용돈

고 1인 딸아이가 용돈이 모자라다고 계속 투덜거린지 몇 달여.
교통비 포함 주 4만원을 주고 있는데
어떤 주에는 괜찮고 어떤 주는 모자라다는 것이다.

정확한 용돈기입장을 만들어서 제출하면 검토하고 같이 상의해서 조정하자고 하였으나
아이는 용돈기입장 만드는 것을 어려워했다.

결국 지난 주엔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다니고 있는 애견미용학원을 일주일 쉬고
친구들과 빵집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지출액이 더 커져서 돈이 많이 모자란다고 하였다.

두 달여전쯤 아이가 애견미용학원을 다니면서
네가 배우는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노동이고 그에 따라서는 상응한 댓가를 받는 것이 옳으니 우리집에서 키우는 개 목욕을 시키면 1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이는 쉬는 날 일찌감치 자발적으로 개 목욕을 시키고 1만원을 받아가곤 했다.

용돈에 대해서 갈등을 오래 빚을 필요가 없어서
네가 집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별도의 방안을 강구한다면 지켜보겠느냐 물으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트윗에 이 내용을 올렸더니 필수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살림살이 예를 들어, 청소나 설거지 빨래 개기 등은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과 그보다 개념을 조금 바꿔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상금을 부여하는 게 어떻겠냐는 고견을 들었다.

나 역시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학년때쯤에 아이에게 청소하면 얼마, 쓰레기 버리면 얼마 이런 상금제도를 만들었다가 이후 제 방청소를 하면 얼마를 줄꺼냐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어서 기본적인 살림살이를 돈으로 환전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여 미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아이가 토요일 오후에 일주일간 용돈을 사용한 내역을 아주 작은 노트에 적어왔다.

학교 끝나고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학원을 가거나 바로 친구들과 공부를 하러 가는 일이 잦은 것은 집에 들러 다시 버스를 타고 가면 버스비와 먹거리를 사먹는 돈이 비슷하고 중간에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이 아이의 이야기였는데
집에 오면 조금 더 양질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내 의견이고 그 의견을 굳이 관철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여,
아이와 정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교통비 포함 주 4만원은 기본으로 하되 (주당 교통비가 최소 12,000원정도가 든다)
용돈기입장 일주일치 기록에 1만원 상금.
개목욕에 1만원, 발톱깎는 것에 5천원. – 이건 노동의 댓가
– 아이말로는 발톱 깎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으나 매주 개발톱을 깎을 수는 없으므로 목적은 아이에게 돈을 더 줄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 이라 매주 해야 하는 목욕에 1만원, 2-3주에 한 번정도 해야 하는 발톱깍는 일엔 5천원으로 조정하기로 합의 –
200쪽이상의 책을 한 권 읽고 독후감을 작성하면 1만원 상금
재활용쓰레기 한 소쿠리 버리는 것에 2천원 상금.

으로 결정하고 합의했다.
모든 절차는 내가 제안하고 아이가 승락하는 방식으로 했고
독후감의 경우 200쪽이상의 책이라는 것에 대해 아이가 기준을 정하기 애매했는지 나보고 권장도서를 정해달라고 했으나 나는 그럴 경우 엄마가 재밌다고 생각한 책을 너에게 강권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엄마의 사고방식을 네가 답습할 수 있으며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너도 옳다고 생각하기를 바라게 되기 때문에 좋지 않은 듯 하니 네가 스스로 판단해서 즐겁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스스로 고르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한 200쪽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짧은 책이라도 더 감동이 올 수 있으나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인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많은 글을 읽고 독해력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므로 다수의 글을 읽는 것을 목표로 하기 위해 200여쪽 이상의 책으로 정하도록 하자고 제안했고 아이가 수락했다.

해서 아이는 어제 오늘 이틀 사이에 개목욕을 시키고 1만원을 벌고, 일주일치 용돈기입장을 적어 1만원을 받아갔다.
집에 재활용쓰레기가 쌓였는데 그건 하지 않았다.

큰 아이의 성격적 특성상,
무조건 그러모으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딱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구하는 스타일이라 돈을 만들기 위해 일주일 내내 책을 하루에 두 권씩 읽고 독후감을 써내는 나같은 인간형이 할만한 짓은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정책이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최근들어 돈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6살 작은 놈인데
내가 저 나이 때에는 돈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기질인지 환경인지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돈에 대해서 매우 민감히 반응하고
모든 물건의 가격에 대해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집안에 굴러다니는 동전을 보면 매우 흥분하며 자기가 가져도 되냐고 좋아할 정도이고,
또한 돈을 달라고 조르기도 하는데
아이의 목적은 포켓몬카드를 사기 위해서이다.

5장들이 포켓몬카드 한 세트가 500원이므로 아이에겐 500원이 상당히 가치가 큰 돈이다.
얼마 전 할머니가 주신 용돈과 내가 줬던 천원짜리등이 모여 저금통에 들어가지 않은 돈이 1만원이 되었는데 이 돈으로 포켓몬카드를 사겠다고 해서
“가진 돈을 한번에 다 써버리면 안돼지” 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1만원 중에 6천원만 쓰고 4천원은 저금통에 넣겠다고 스스로 대답했다.

– 나에겐 매우 감동적인 경제개념이다. 나란 인간은 이게 매우 부족한 인간형 –

아이는 이래 저래 여기 저기서 용돈이 생길 때도 있고 아직 혼자 다니지 않으니 용돈을 줄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은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포켓몬 카드나 슈팅바쿠간 같은 장난감을 사는 것인데
이 부분을 어떻게 타협해야 할지는 조금 고민해 볼 문제.
청소를 하면 천원을 달라고 하거나 구두를 닦으면 돈을 줄 것이냐고 묻는데
이걸 이렇게 대체해도 되는가 고민중이다.
(엄마 아빠가 주로 구두를 신지 않아 닦을 구두가 없다는 게 함정)

아무튼 그 외에도 6살짜리 작은 놈은
내가 휴대폰을 아이폰으로 바꾸고 나서 앵그리버드를 몰래 깔아놓은 것이 발각되어
앵그리버드를 하게 해달라고 조르길래
기적의 계산법 한 페이지에 20분으로 거래를 했는데
아직까지는 먹히고 있다.
(자랑같으나 이 아이는 덧셈 뺄셈 하는 걸 매우 즐기는 유형이다. 음..자랑 맞군. 암튼)

경제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고
늘 경제개념 때문에 곤란한 일을 많이 겪은 엄마로서
아이에게 경제교육을 시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큰 아이는 말귀를 알아듣는 나이가 되었으므로 나는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엄마가 계산도 느리고 개념도 부족해
일부러 너희에게 좀 인색하게 굴 지도 모른다. 절대 너희들이 나를 닮아선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더니 애가 웃었다. 허허허;;

뭐 이 글을 읽으신 분들 중
좋은 의견이 있으시다면 거침없이 알려주시면
경제개념 무탑재인 에미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2011. 12. 11.

목욕탕 단상

1.

오랜만에 목욕탕에 갔다.
체질상 당분간 온몸을 담그는 탕목욕이나 사우나를 피하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도 나는 물에 몸을 푹 담그거나 뜨거운 찜질방에서 땀을 쭉쭉 빼는 걸 좋아한다.
하루키의 잡문집을 들고 제일 조용한 찜질방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어디가 막혔는지 땀이 잘 나지 않았다.
몇 몇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다.

60℃의 방에서 중년남녀가 다리를 베고 누워 다정한 말을 속삭인다.
어디를 놀러갈까 이야기를 한다.
정상적 부부관계로 도저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약간 씁쓸하다.
부부가 된 지 10년이 된 사람들이 저리 다정한 경우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부가 일종의 “경제공동체”의 속성을 더 많이 띄고 있다는 얘기다.

2.

찜질방에서 여탕에서 이어지는 통로에 여성 전용 수면방이 있다.
네일아트를 하는 자리가 있고 불가마가 있다.
여기까지는 너무 뜨거워서 들어가지 못하는데 많은 중년여성들이 불가마를 좋아하는 듯 하다.
불가마에서 막바로 나왔는가 웃통을 벗고 앉아 있는 여자들이 많다.
여자 목욕탕에서는 속옷을 파는 곳도 더러 있는데 이 공간에도 그런 곳이 있다.
속옷판매대의 윗쪽에 전기공사가 필요한 모양인지
아저씨 하나가 입구에서 뻘쭘거리다 전기공사를 하러 들어간다.
여자들은 등을 돌렸으나 옷을 입진 않았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여성성 따위, 이제 모두 개나 줘버린 모습인가.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하는 판단을 하진 못했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이,
성욕을 일으키는 가슴이 아니라 생명을 낳아 기른 어미의 젖이 된 늙어가는 여자들이
쳐진 젖가슴을 내놓고 땀을 식히고 있다.
이 곳은 마치 연옥의 어느 한 복도처럼.

3.

목욕탕으로 내려가 작은 노천탕에 앉아 쉼호흡을 한다.
보호자 명목으로 최근 병원을 하도 다녀서인가..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피곤하다.
심장이 계속 벌렁거려 전신을 담그지 않는다.
복식호흡만 잘해도 몸이 많이 좋아진대..하던 말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3.

벗은 몸의 사람들을 가만히 본다.
사람의 몸을 봐도 저 사람은 어딘가가 아프구나, 혹은 아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매우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참 열심히 하는구나 싶다.
잘 발달된 정강이를 가진 여자,
눈썹과 아이라인에 문신을 한 여자,
가슴이 납작한 여자
출산후 군살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여자
보기에도 싱그러운 어린 여자
그리고

모두가 벌거벗어 똑같이 평등한 가운데서도
멋스럽게 커다란 집게핀으로 머리를 올리고
금색의 천을 허리에 두르고 걷고 있는 날렵한 40대 후반의 여자가 있다.
다 벗었어도 멋을 부리는 사람이 있구나.
저런 능력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설령 본인의 컴플렉스의 발현이거나
삶의 즐거움이거나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 어떤 가치라 하더라도.
그저 그럴 뿐이다.

4.

세신관리사, 혹은 목욕관리사라고 이제는 이름이 붙은 사람들이 있다.
한 때 우리는 그녀들을 때밀이아줌마라고 불렀다.
때밀이아줌마들은 검은 레이스로 된 속옷을 입는다.
구분을 하기 위해서다.
하루종일 젖은 몸, 축축한 곳에서, 아무리 레이스로 되었다 하더라도, 속옷을 입고 있는다는 건 에지간히 익숙해지기 전엔 곤욕스러운 일일 것이다.

점심시간이 다가온다.

가끔, 아니 가끔보다 조금 더 자주,
나는 전문가에게 내 몸을 맡긴다.
내 엄마도 이렇게 나를 샅샅이 씻겨주진 않았지.
그렇다고 무슨 모성따위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녀들의 노동이, 매우 숭고하다는 생각을 한다.
돈과 노동을 교환하는 것이지만, 이다지도 쑥쓰럽고 부끄러운 일을 거침없이 해내는 노동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는가 늘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내 삶이 너무 느슨해져 있기 때문인가.
아니, 늘 분주하나, 내 스스로의 성취감을 이룰 일들을 하지 않고 있어서인가.
그건 내가 누군가를 돌보는 보호자로서의 삶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밖에 없는, 환경때문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하려고 전투적으로 뛰어드는 내 열정이 부족해서인가.

문제는 내가 체력을 되찾지 못해서인가
혹은 내가 정신적으로 해이해져서인가.

얼마나 많이 버려야 하는가,
벗겨져 나가는 묵은 시커먼 때들처럼.
얼마나 많이 새로워져야 하는가
얼마나 다시 치열해져야 하는가.

과연 나는 오늘 이따위로 살아도 되는건가.

삶은, 치열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왜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팔다리가 잘려 항아리에 담기는 형벌을 받은 것처럼
나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시간에 쫒기고 길에 쫒기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가.

생로병사의 한 가운데서
그 모든 것들을 목도해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인정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다시 걸어야 할 길이 어디인지도
아직은 어렴풋할 뿐이다.

5.

갓 돌지난 어린아기가 탕속을 아장아장 걸으며 좋아한다.
한 손엔 뽀로로를 한 손엔 크롱인형을 들고 제 엄마에게 걸어갔다가
반대편으로 걸어갔다가 그저 그 걸음마 하나 하나가 즐겁다고 까르르 웃는다.

의도치 않게 눈물이 흘러 고개를 돌리고 안경을 벗는다.

나의 생명력이 어디선가 줄줄 새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처연하다.

나는 아직 서른일곱밖에 안되었는데
너무 많이 걸어왔고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

그러면서도 내가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서 슬프고 고달프다.

2011. 11. 28.

황천의 개 – 후지와라 신야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492529

신야의 책은 처음이다.
제목이 맘에 들어 골랐다.
황천의 개라니 이렇게 냉소적일 수 있는가.

후지와라 신야가 <청년플레이보이>지에 실었던 에세이를 묶었다.
그는 아사하라쇼코라는 옴진리교 교주에 대한 탐색으로 시작하는데
그가 미나마타병의 희생자였다는 친형의 증언을 진즉에 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친형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약자가 되었다는 입장을 고려해, 만코(쇼코의 형)가 죽은 다음에 글을 완성해 책을 묶어냈다.

뭔가 연결이 되지 않는 듯한 몇 편의 글이지만 그 중심은 같다.
후기산업사회에 아주 일찍 돌입한 일본의 오늘을 지배하는 철학(?)과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인지 그의 존재 자체가 말해준다.

젊을 때 떠났던 인도의 여행에서 얻어온 것들과 삶과 죽음, 진실과 허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마치 비슷한 시절 인도를 다녀온 후지와라 신야의 삶과 아사하라 쇼코의 삶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읽고 나서 퉁 – 하는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런 책이다.

2011. 11. 27.

동주 – 구효서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075895

구효서 장편소설
동주 
구효서 (지은이) | 자음과모음(이룸) | 2011-10-17

오랜만에 읽는 구효서의 책.
윤동주를 중심으로 하는 스펙타클 역사소설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잃어버린 언어와 잊혀져 가는 언어 사이의 간극,
시인으로 말을 지킬 것인가 백성으로 땅을 지킬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그를 지켜보았던 한 사람의 매우 무미건조한 상황.

문체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여겨지는
참 오랜만에 만나는 구효서의 소설.

내 기억속의 구효서는 참 재미난 이야기꾼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구효서는 그간 많은 변화를 겪은 듯 하다.



사모하지 않고는 같아질 수 없어요. 같아진다는 건 사모한다는 뜻  190


동주를 동주라 부르는 너는, 누구더냐 – 293


들판의 모든 꽃이 사쿠라가 돼버리면 세상에서는 꽃이란 것 자체가 없어지는 거란다 _ 298


사람을 죽여 땅을 차지한 지배는 인류 역사에 없어. 그것은 지배가 아니니까. 지배란 복종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아. 복종하지 않는다면 총을 들지 않고도 시와 조국을 지킬 수 있어_ 340


다만 너와 나는 시를 지켜야 한다는 거지. 너는 시인이니까. 그것이 우리의 약속이었어_ 340 


시가 꽃이라면 각각의 언어가 그대로 꽃이요, 시인은 꽃잎을 받치고 선 꽃대일진대 언어를 앗아 시를 유린함에 어찌 꽃대인들 저 홀로 생명이라며 하늘을 우러를 수 있을까. 꽃나무는 그렇게 하늘 아래 홀연히 꽃 피우고 서 있는 것으로 존재의 사명을 다하는 것일 터, 그걸 일컬어 감히 누가 미미하고 유약하다 할 것인가. 말을 앗기고 잃는 순간 저절로 생명이 소멸해버리는 시인의 운명이 어찌 가엽고 안타깝기만 할까.. _ 397

_ 그간 책에 대한 독후감을 잘 쓰지 않았는데
딱 이정도로 간단하게 매일 매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록을 남기지 않으니 머릿속에서도 쉽게 사라진다.

2011. 11. 26.

시골 큰집 – 신경림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
대학을 나온 사촌형은 이 세상이 모두
싫어졌다 한다.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를 뒤적이다 훌쩍 뛰쳐나가면
나는 안다 형은 또 마작으로
밤을 새우려는 게다. 닭장에는
지난봄에 팔아 없앤 닭 그 털만이 널려
을씨년스러운데 큰엄마는
또 큰형이 그리워지는 걸까. 그의
공부방이던 건넌방을 치우다가
벽에 박힌 그의 좌우명을 보고 운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그
좌우명의 뜻을 나는 모른다. 지금 혹
그는 어느 딴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조합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는
국화꽃이 피어 싱그럽다 그것은
큰형이 심은 꽃. 새아줌마는
그것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화사한
코스모스라도 심고 싶다지만
남의 땅이 돼버린 논둑을 바라보며
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
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 신경림 農舞 중..

+ 이 포스트는 Networked blogging에 의해 자동으로 트위터와 페이스북 계정에 업데이트 될 것입니다.
한미FTA반대 시위가 한창인데 시나 지껄이고 있다고 시비걸꺼면 제발 언팔해주시기 바랍니다.

겨울밤-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 신경림 시전집 1권 농무 / 16쪽 – 17쪽.

그 어느 꿈속에서

낯선나라에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다 고현정을 만났다.
얼큰하게 취한 그녀와 낯선 이국의 거리를 헤매다 그녀가 나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인쇄된 명함을 주었다.
아마 중국이나 대만 어디쯤..
음주후였으나 운전을 해서 어딘가로 가야만 했다.
한 잔 더 할까 생각이 든 나는 고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ARS팬서비스였다.
그럼 그렇지… 나는 마음을 접었다.
붉은 색 나의 차에 홍콩이나 상해에 있는 연립주택 지하, 남의 집 철문옆에 묶여있는 나의 자전거를 풀어 차에 실었다. 그 건물의 1층에 묶여있던 나의 개를 풀었다. 운전을 하려는데 네이버에 다니는 후배가 남편과 나타나 술을 먹었으니 운전을 대신해주겠다 했다. 후배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고 갑자기 나에게도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가 생겼다. 아이를 뒷좌석에 앉히고 후배와 내가 뒷좌석에 비좁게 앉았다. 주인을 잃은 듯 귀를 붙이고 떨던 개를 불러 트렁크에 넣었다.
후배의 신랑이 운전을 시작했다.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그 집이, 지금 나의 집인지, 엄마의 집인지, 우리의 나라인지 알 수 없었다.

FTA, 조약 날치기, 포털의 조작, 삼성.
오직 나만의 것들을 지키려던 혈혈단신.
그런 것들이 반영되었다.
깨고 나니 밤 12시 28분이었다.

무엇을 하였는가

세종 이도가 소이에게 말했다
그러는 너는 네 인생에 대해서 무엇을 하였느냐
네가 이따우로 살고 있는 게 모두 내 탓이냐

나도 누군가에게 그랬다.
너 때문이라고
당신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묻는다
나는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것을 해주었는가.

생각해보면,
참 많은 것을 하였다.
참으로 많은 것을 시도하였고 좌절하였고 노력하였다.
진실로 그러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또 다시 원점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원망하는
그 원점이다.

겨울이다

내가 한 번 일어섰던 그 겨울
다시 붙잡고 일어서야 할 겨울이 온다.

2011. 11. 17.

블랙박스

대형전시회 그 중 현대작을 소개하는 곳에 가면
어둡게 칸막이가 막혀있고
비디오 작품을 상영하는 곳이 있다.
완벽한 어둠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지만
어둠에 가까우려고 노력한 그 곳에서

멍하니 몇 분간의 비디오물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24시간동안 상영을 하는 24시간짜리 Time 이라는 작품을 다 보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남는다.

어둠과 가까운 이 곳은 집중이 잘 되어,
마음속의 모든 상념을 떨치고
작가가 하는 말만을 들을 수 있다.

오늘 갔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한.호주 현대작가 전시회 TELL ME TELL ME
에서 이름을 적어오지 않은,
호주 작가의 존재..운운 했던 비디오물이 인상깊었는데
사실 그 미디어의 예술성 보다는
그 아래 흘러가는 자막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자에 익숙한 나는 문자와 그림이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
그림에 전혀 몰입하지 못하고
모든 신경을 문자에 쏟곤 하는데
아무튼,
벗어나라 어쩌고..하다가 From YOU 라는 글자가 크게 나와서.

그래서.
그래서 그랬던 모양이다.

tell me tell me 전시회는 별로였다.
도록은 4만원이 넘고.
뭔가 .. 일관성이 있을라다가 말아서.
차라리 아예 아무 공통점이 없었다면 모를까.

그래도,
그 비디오가 상영되는 그 공간.
거기가 있어서 좋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