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풍경]누가 예산을 끌어올 것인가

나는 90년대 노태우정권때 지어진 신도시에 산다. 신도시의 목적은 서울과 타도시와의 연결이니까, 이 도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도시고속순환도로를 끼고 있고 고속도로와도 가깝다. 구도심과 신도심으로 정확하게 나뉜 이 도시는 두 개의 구(區)로 나뉘어 있다. 구도심에도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 있고, 신도심에도 옛 모습을 간직한 동네도 있다. 옛 모습이라고 해봤자 80년대쯤의 가옥들이다.

지난주부터 지역의 한 초등학교에서 마을에 관한 수업을 하게 되었다. 신도시가 있는 구에 속해있지만 구도심의 모습을 가진 동네다. 아이들과 첫 수업으로 마을답사를 시작했다. 벚꽃이 활짝 피었고 하늘도 맑았다. 지도를 보며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을 중심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인근 중학교를 돌고 학교 주변 동네로 내려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중학교까지 가는 10여분 동안의 길은 험난했다. 인도가 없거나, 있는 인도에도 주차된 차가 빼곡해 위험하기만 했다. 아이들과 걸으며 보도블럭 사이에 피어난 제비꽃과 민들레, 명자나무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거대한 도시순환고속도로가 아이들의 머리위로 지나갔다. 저 도로가 하늘높이 치솟은 이후 그 아래는 단 한 번도 햇빛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 위에 고속도로를 이고 사는 마을의 횡단보도를 지나 중학교에 도착했다. 축구하기 좋은 잔디가 깔려 있었다. 아이들은 모래와 흙이 깔린 자기네 학교 운동장과 비교하며 중학교 운동장이 좋다고 한참 떠들었다. 중학교 앞에 건물을 짓고 있어서 아이들의 안전을 염려하며 계속 앞뒤를 살폈다. 근처에 3층짜리 단독주택이 있었다. 아이들은 멋진 집이라며 감탄했고 동행한 교사도 그 집을 부러워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학교 근처로 돌아와 골목길을 살펴보는데 막다른 골목이 나란히 병렬을 이뤘고 80년대에 지었던 전형적인 양옥주택들이 이제는 다세대주택이 되어 철제계단과 작은 현관등을 덧붙여 변형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동네에 이상한 아저씨가 많다며 아침 등굣길에 “한 번만 안아보자.”말을 거는 남자 얘기를 했다.

 

“그럴 때는 안돼요. 하지 마세요! 하고 막 도망 오면 돼요!” 라고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는 예쁜 얼굴이다.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가 올라붙는 느낌이었다. 학교를 둘러친 담벼락 아래 좁은 인도가 있고 그 건너편엔 인도가 아예 없었다. 학교 앞 2차선 도로는 근처 대기업 연구소로 들어가는 차들이 출퇴근 시간에 교통정체를 이룰 만큼 가득하다고 담당교사가 전했다. 횡단보도에서 손을 들고 길을 건너 아이들을 학교 방향으로 인도하며 가만히 생각했다. 도로 확장을 할 여건이 안되니 일방통행으로 전환하고 반대편에 인도를 설치하는 것 외에 별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통학로를 개선하려면 일단 사람들을 모아 의견을 정리하고 공론화해서 시청 도로교통과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고 정책을 바꾸도록 해야한다. 순서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공사비용을 누가 가져올 것이냐에서 걸린다. 인근에 붙어 있는 대기업 연구소에서 지자체에 내는 세금에 따라 행정과 정책이 변경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시의원, 도의원, 지역구 국회의원, 결국 누가 돈을 끌어오느냐에 따라 공이 갈린다.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여 안전한 통학로로 바꾸자고 백날 결의한 들, 예산을 따올 수 있는 정치인과 행정력이 없으면 백 명의 의견도 그저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아이들이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너서 학교 정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누가 돈을 가져올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도 시 예산으로 가능할 것인가 생각했다. 나는 그저 행정은 결국 예산이 결정한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인 일개 시민이다. 그 외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일주일이 다 되도록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돈이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자본 없이는 애초에 일어날 일도 아니었고 바꿀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잔디밭이 깔린 중학교와, 3층 집도 생각났다. 아, 모두가 돈이 필요한 일이다.

2016. 4. 13.

코코뉴스 [자본의풍경]에 연속 게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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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풍경 – 동네마트에서 소유의 경계를 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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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동네엔 동네 슈퍼라고 하기엔 큰 마트가 하나 있다. 대부분 이런 동네마트는 중견유통기업이 몇 개씩 점포를 가지고 있다. 때로 어떤 점포는 대기업에 인수되기도 한다. 몇 년 전 동네에 마트대란이 벌어진 적 있다. 갑자기 동네마트가 세 개가 동시에 들어서고 기업형 슈퍼마켓도 하나 들어왔다. 1년 사이에 한 곳이 장렬히 전사하여 폐업하고 그 자리엔 비슷한 형태의 마트가 들어왔다. 정확한 명칭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동네마트”라고도 부르는데 어느 지면에서는 “지역마트”라고도 하고 “중견마트”라고도 한다.

아무튼 이 동네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대에 설 때, 나는 종종 긴장한다.
내 앞에서 계산을 마친 사람이 영수증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자기 물건을 잽싸게 치우지 않을 때다. 온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한다. 앞 사람의 물건 옆에 내 물건이 떠밀려가고 있다. 앞 사람이 비닐봉투나 장바구니에 물건을 다 담지도 않았다. 식은땀이 날 것만 같다. 저 사람의 물건과 내 물건의 경계에 가름대라도 놓아야 할텐데 동네 마트에는 대형마트에 있는 빨간 막대가 없다. 계산원은 개의치 않고 바코드를 빠르게 찍는다. 나는 물건을 올려놓은 이쪽에서 계산기 너머의 저 쪽의 물건들을 살핀다. 앞 사람이 내 물건을 가져갈 가능성은 고의보다 우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계산기의 바코드 인식기를 통과한 물건은 내 물건이고 인식기를 통과하기 전의 물건은 아직 마트의 것이다. 나는 마트의 물건을 나의 소유물로 전환하는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내 물건이 바코드 인식기를 통과해, 마트의 판매물품이 아닌 나의 소유물로 그 경계를 옮겨 완전히 내 것이 되기까지 20여초 남짓의 시간이 걸린다. 카드나 현금, 지불수단이 계산대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계산기를 한 번 더 통과하고 계산원이 영수증을 출력할 때까지 마트의 출입구쪽에 놓인 내 물건들은 마트의 것도 아니고 온전히 나의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있다. 앞서 계산한 사람은 콩나물 한 봉지와 무 하나를 들었다. 비닐봉투에 푹 쑤셔넣고 계속 그 자리에 서서 영수증을 다시 보고 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계산원은 내 물건을 밀어내기만 할 뿐 물건이 가야 할 자리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 모양새다.
드디어 앞서 계산한 사람이 자기 물건을 챙겨 자리를 떴다. 나는 장바구니에 계산한 물건들을 주워 담으며 잽싸게 카드를 꺼내 계산원에게 주고 싸인을 하고 영수증을 챙긴다. 이 역시 20여초 안에 해결될 일이다. 앞서 간 사람이 머문 시간이 얼마나 되나 세어본다. 하나, 둘, 셋, 세어보면 1분도 안 되는 시간이다. 30초 정도에 수많은 감정이 일어났다가 가라앉는다.

중견마트도 대형마트만큼이나 근무조건이 좋지 않다. 더 열악한 곳도 많다. 계산원은 때로 물건 진열을 하다가 뛰어와야 하고 배달을 선택한 손님을 위해 박스를 챙겨와 물건을 담아야 하고 주소지를 확인해야 한다. 고객의 물건이 소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은 없다. 빨리 계산을 마치고 싸놓은 동전을 풀어야 하거나 영수증용지를 교체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일은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온 부품을 조립하는 것과 별 다르지 않다. 정신을 압도하는 진열대와 정육, 생선, 과일코너가 외치는 유혹을 고스란히 들어야 한다. 그 사이사이에 댄스곡이 쿵쾅거린다. 좁은 통로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불편을 감수하고서도 기어코 물건을 사서 계산대에 올려놓고는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일. 그 누구의 궁금증이나 불만을 참아낼 시간이 없다. 앞서 계산한 사람의 이야기, 이를테면 왜 이렇게 양파 값이 올랐는지 궁금해 하거나, 지난번에 사간 복숭아가 금방 상했다는 불만 따위를 들어줄 시간이 없다. 내 뒤에 나와 같이 물건을 사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혹은 빨리 계산을 마친 직원이 다른 일을 하거나 10초라도 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공장의 컨베이어벨트는 계속 돌아가는 것처럼, 바코드 인식기도 쉬지 않고 삑삑거린다. 느린 사람의 속도를 기다려줄 체제는 없다. 돈은 빠르게 돌고 돌아 영혼을 압도해야 한다. 그래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으니까.

 

2016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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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풍경 – 정월대보름

대보름이라 나물을 산 건 아니다. 나물을 좋아하는데 워낙 손이 많이 가 엄두를 잘 못 내다가 동네 수퍼마켓에서 삶아놓은 걸 팔고 있으니 손이 갔다. 다 삶아놓은 걸 가져와 다시 한 번 데치고 양념하여 볶아 그릇에 담았다. 고구마순에는 들깨를 듬뿍 넣었다. 고구마순은 원래 자주색이다. 껍질을 벗기고 씻어서 삶아 말리고 또 다시 삶았을 것이다. 그건 누가 했을까. 누군가 손톱에 자줏빛 물이 들 때까지 작은 의자에 앉아 껍질을 벗겼을까. 다리가 퉁퉁 붓도록 서서 했을까. 깐 마늘은 스치로폼 그릇에 담겨 랩을 씌워 판다. 누가 이 마늘을 다 깠을까. 손에서 마늘냄새가 가실 날 없을 정도로 바쁘게, 손가락이 퉁퉁 불도록 물에 담궈가며 마늘을 물에 담궜다가 일일이 깠을까. 대기업에서는 몇 년전부터 깐메추리알을 포장해서 판다. 이건 누가 깠을까. 삶은 메추리알을 뭉개지거나 부서지지 않게 까려면 약품에 담궜을까. 빙초산같은 것에? 사람이 손으로 깠을까? 문득 궁금해지지만 금세 잊고 만다.

EBS에는 극한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3D직종이라고 하는 어려운 직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택배물류센터, 난로공장, 정육처리기능사, 오징어잡이, 아파트외벽 페인트공, 험하고 어려운 직업을 소개한다. 한 번은 양은냄비를 만드는 공장이 나왔는데 노오란 양은주전자를 일일이 사람이 두들겨 모양새를 만드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위험하고 어려운 직업은 이미 로봇이 대체하는 줄 알고 있었던 내 짧은 상식이 한심스러웠다. 세상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하게 움직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값진 노동을 하고 있는가.

삶은 나물은 일일이 비닐봉투에 담아 가격표를 붙여 가져왔다. 나물 세 종류를 샀으니 비닐봉투 세 개가 나왔다. 얼마 전부터 작은 스티로폼은 재활용품으로 분류하지 않는다던 공지문을 본 기억이 났다. 음식물이 묻은 비닐도 재활용쓰레기로 버리지 말라 써 있었다. 나는 비닐봉투와 스티로폼을 모두 일반 쓰레기봉투에 쑤셔박았다. 쓰레기를 쓰레기에 담는다. 아무 것도 썩지 않을 것이다.

대보름이 가까워오자 각 지자체에서는 대보름행사를 준비한다. 예산을 세우고 기획안을 내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축제에 몰려와 성과를 낼 것인지 준비할 것이다. 대형마트부터 전통시장까지 모두들 오곡을 소포장해서 내놓고 나물을 진열했다. 소매업점에서 파는 나물은 반조리상태부터 완전조리상태까지 다양하다. 건나물 상태 그대로인 것부터 삶기만 한 것, 양념까지 완전히 끝나 가져다 먹기만 하면 되는 형태다. 기사를 검색한다. “유통업계, 정월대보름 마케팅” 이라는 제목부터 “부럼데이”라는 이벤트도 생겨났다.

대보름행사 때문에 소방서는 비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대보름행사장에 갈 것이다. 먹거리를 사먹고 엄청난 쓰레기가 나올 것이다.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울 것이고 썩지 않을 폐기물들은 우리 땅 어디엔가 쌓이고 쌓이겠지. 풍요를 비는 대보름에 쓰레기만 풍요롭다. 누군가의 노동을 잊고 밥을 먹는다. 아무 것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무력한 인간이 나물을 썩썩 비벼 밥 한 그릇을 먹었다.

2016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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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풍경 – 백화점

100807_Nikon 063 사본.jpg 서점은 백화점 안에 있다.
급하게 마련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꼭 백화점으로 갈 필요는 없었는데 마트와 옷가게와 문구점이 이동거리를 생각했을 때 가장 적게 움직일 동선은 백화점에 있는 문구점과 서점, 판매점을 휙 도는 것이다.

걸음을 아껴야 한다. 겨울이니까.
문구 코너에 가서 검은색 클리어파일을 사야했다. 어디선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데 분명히 누군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음원을 틀어놓은 것과 그랜드 피아노의 해머가 두들기는 소리는 명확하게 다르다.
백화점의 가운데는 길게 뚫려 있다. 보이지 않는 기둥이 있는 것처럼 뻥 뚫린 공간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자의 주변엔 아이를 안은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각국에서 온 제 각각의 펜에 둘러싸여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연주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스테들러, 사라사, 시그노, 몰스킨, 이룸, 프랭클린 사이에 서 있었다.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한 권 정도의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부동산과 맞벌이한다>, <미움받을 용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이들의 학습만화와, 장난감만 손에 쥔 사람도 있었다.

자기 확인을 위해 사는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 사람들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없어도 오늘을 넘길 수 있는 물건을 산다. 물건의 필요성은 주관적이다. 물건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굳이 오늘 사지 않아도 될, 시그노 펜 한 자루와, 펜텔의 펜 두 자루와 201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을 내가 검은 파일 위에 올려 계산을 기다린 것처럼.
돈을 내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피아노 연주는 계속 되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생명 없는 물건이 위로가 되는 공간에서 사람이 규칙대로 맞추어 연주하는 음악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건 생명 없는 물건인가 아니면 물건을 사는 행위인가. 물건으로 위로를 받는다면 정말 그 물건은 무생물인가.
백화점에 창문도 시계도 없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오로지 물건을 소개하기 위해 사람들은 내내 서있다. 가만히 진열대에 앉아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물건들은 누군가에게 불려가 꽃이 될 것이다. 위로가 되고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고 자신감을 되찾아줄수도 있다.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적게는 수명, 많게는 수백 명의 손길이 닿는다. 만든 사람들이 손길 하나 하나에 영혼이 묻어 물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순히 자본이 만들어내는 실재하나 실체가 없는 사물에 불과할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시시때때로 모양을 바꾸는 집이었다. 그 안엔 대체가족이 살고 공동체를 이루었다. 사랑하는 법에 대해 혼란스럽던 하울의 친구들은 환경이 변해도 계속 함께 했다. 우리가 사는 성이 그 때마다 변한다해도, 자본이 들고 나더라도, 우리의 사랑도 굳건할 것인가.

사물을 바라보고 주머니에 넣어 행복해진다면, 그 때부터 그 사물의 삶이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독히 외로우면, 말 걸지 않는 사물을 사랑하며 계절을 건너는가.

2016.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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