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일기
7시 42분
# 1.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할 수 없다. 글쎄요. 라고 운을 떼기 시작할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았지요. 라고 시작할 것이다.
누구 때문이라고, 어떤 환경때문이었다고, 이제는 그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모든 일들은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나에게 다가왔고 그 과정속에서 내가 한 생각, 내가 내뱉은 말들과 엉켜 사건이 되었다.
그런 하루 하루가 뒤섞여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의 때와 땀이 섞여 내가 되었다. 지금 여기, 세상 그 어떤 고통도 신음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평화로운 순간의 나.
#2.
미뤄둔 것들이 있다.
지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다. 내 손길이 필요한 아이와 내가 반찬을 꺼내 뚜껑을 열어주어야만 하는 늙어가는 남자가 있다.
내 한 마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돌아와 산책을 나가길 간절히 기다릴 늙어가는 개도 한마리 있다.
때로는 그 모든 것들을 미루고 싶다.
왜냐하고 물으면, 글쎄요. 라고 시작할 것이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요.
나는 때로 도망치고 싶으니까요.
나도 때로는 모든 책임을 던지고 싶으니까요.
나도 때로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3.
유모차에서 내려 아장아장 걷는 아기와
그 아이를 터질 것 같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혈육이 저녁을 즐기고 있다.
인조잔디와 기계적으로 서양음악에 맞춰 압력을 달리하는 사람이 만든 분수 앞에서도 사람들은 쉴 줄 안다.
내 어린 아이도 저 앞에서 춤추며 흠뻑 젖기를 좋아했었다. 이 곳은 그래서 늘 비현실적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분쟁, 오늘도 더위에 땀흘리며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피부가 하얀 젊은 엄마들이 침을 질질 흘리는 아가들을 따라다닌다. 그 아이들은 때로 내 곁으로 와 낯선 존재를 빤히 바라보다 떠난다.
태초의 인간을 생각한다. 그 어떤 수치심도 책임감도 모르는 작은 인간들.
#4.
코오롱등산장갑을 낀 나이 먹은 여자 옆에 젊은 애기 엄마와 뽀얀 남자아이가 있다. 늘씬하게 키가 큰 애기엄마와 그니의 친정엄마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지만 나 역시 이 인조잔디에 앉아있다. 이건 사실이며 바로 지금이다.
다른 사람은 어찌 그 세월들을 견뎠는가 생각하기 전에, 나는 왜 여기 앉아 있는가 누가 묻는다면, 쉼없이 실패하고 끊임없이 좌절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도 될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쩔은 내가 나는 허름하고 더러운 바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음악이 사치스럽지 않으나 과도하게 평화로워 낯선 숲속으로 퍼진다.
이렇게 나는 오늘 여기서, 금요일의 저녁 7시 42분을 흘리는 중이다.
2013. 7. 5.
날 미워하는 자 고마워요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이제 깨닫는다.
사람이 없을 때는 그 허기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도 깨닫는다.
내 주변에 모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참 인복이 많다고 생각했던 이유다.
내 주변엔 인품이 훌륭한 사람도 많고 독한 사람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 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세상은 나한테 쌀 한 톨 보태주지 않는다며 악에 받쳐 두 주먹을 꾹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휘청휘청 걸어가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 휘청대는 걸음으로 한참을 지난 뒤, 그래도 누군가 술 한 잔 따라주었고, 그래도 누군가 라면이라도 사주었다는 걸 뒤늦게 기억했다.
“세상에 참 좋은 사람이 많아, 내 주변은 다 그래, 그게 내가 만든 세상이거든, 내가 만드는 세상의 중심은 어찌됬건 나니까.” 라고 생각했던 건 얼마 전까지다. 이건, 드라마 에서 경이가 복수에게 “복수씨의 인생을 바꾸는 건 세상을 바꾸는 거예요” 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
얼마 전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물론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들 속에서 자라야 하는 게 맞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나를 윽박지르는 사람, 내 바닥을 보게 하는 구타유발자, 끝없이 나와 불화하고 나와 적이 되는 사람, 언제나 나에게 딴지를 걸고 시비를 거는 사람도, 사람이 온전한 인품을 갖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가득 채운 나만의 제국에서, 인간은 얼마나 오만방자 하기 쉬운가.
세상에서 나를 괴롭히는 그 누군가로 인해 인간은 성숙한다. 내 편보다 남의 편이 많아야 반성할 기회가 많아진다. 내 편으로 가득한 세상에선 바닥을 볼 일도, 성장을 할 필요도, 반성을 할 이유도, 사과를 하거나, 손해를 보거나, 베풀 이유도 없다.
어떤 엄마는 자기남편을 남편이라 부르지 않고 “내편”이라 부른다 했다. 그러나 오늘같은 날은. 남편처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저 남편인 게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늘 남의 편인 사람이 가족중에 있을 때, 그런 성장기를 거친 사람이 더 많은 자를 이해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겠다. 물론 누군가 나를 적대시 하는 것이 대해서 쉽게 배척하고 미워하기를 즐긴다면 콩알만큼의 깨우침도 없을 것이지만.
니체가 그랬다던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나를 가장 강하게 만든다고. 뭐 그런 맥락.
2013. 6. 19.
이천십삽년 유월 십일
생각해보니 아침나절 내 차선에 어린 고양이가 죽어 있었다. 순간 속도를 줄이고 더 밟지 않게 건너갔다. 내 뒤에 오던 차도 더 밟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고양이는 차도의 정 가운데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될 무렵 골목길에 세워둔 차의 틈새로 다 큰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무척 놀라 속도를 늦췄고 다행히 고양이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고양이를 지나치고 난 다음 안양시청 앞에서 술에 취한 게 빤해 보이는 남자가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다. 아크로타워 앞에서 유턴을 하던 차들이 남자를 피해 주저 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고양이 얘기를 쓰고 나니 어젯 밤 낙동강 하류를 휩쓸고 있다는 뉴트리아 얘기가 떠오른다. 고양이는 아무리 개체수가 늘어도 생태계를 교란시킨다는 얘기까지 나오진 않는다. 사실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가장 큰 주범은 인간이다.
내가 그런 인간이다.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보호에 앞장서고 싶지는 않다. 간혹 동물학대를 비난하는 글들을 보면, 이들이 과연 어떤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 싶을 때가 있다. 그들은 동물을 학대한 사람을 함무라비 법전보다 더 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욕을 퍼붓는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느껴지지 않고 동물사랑을 빙자한 – 그저 그 마음에 깊이 박힌 인간종에 대한 적대감만 느껴질 뿐이다.
밤이 깊어간다.
어두운 하늘엔 이불솜같은 구름이 가득하고 나는 조경업자가 돈을 받고 만든 인공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개와 함께 걷고 있다.
하루는 이렇게 지나고 어떤 생명은 길에서 사라지고 어떤 생명은 살아남았다.
운전을 하면 인생의 축소판을 걷는 것 같다고 말하던 사내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다.
오늘 나는 살아남았고 산 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 매일 죽은 자들의 이야기만 탐닉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한 자리에 있었고 나는 매일 그들을 찾았다. 모두 다 살아있을 때 했던 이야기들인데 나는 그들이 죽고 난 뒤 만났다.
매일 밤 죽은 자들의 도시를 헤매고 죽은 자들의 바다를 구경했다. 그들을 더 만나기 위해 산 자들을 외면했고 나의 생명도 점점 조악해졌다. 이제는 죽은 자들을 외면하고도 잠을 자곤 한다.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누가 먼저 세상에서 사라지는 지,
내 눈앞에서 없어지는 지 알 도리는 없다. 대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빨리 내가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라고 그들에게 말할 수 없다. 생명력이라는 건 누군가에게 끝없는 부러움이요, 채울 수 없는 욕망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 적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하루를 기억한 적 없다. 내일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루를 살기 위해 어제를 잊고 내일은 미뤄둔 채, 내일은 언제나 내일이고, 어제는 언제나 어제이므로, 그렇게 하루만 살아온 삶이 있다.
단 하루, 오늘만 살기 위해, 오늘만 산다면, 아침나절 죽은 어린 고양이따위는 잊어야 했을 것이다.
하루를 기억할 수 없는 삶은 얼마나 고단한가. 그 삶은 모든 질문에 한 가지로 답한다. 없다. 라고.
기억도, 추억도, 행복도, 슬픔도 없다고. 그러나, 힘들었다고.
기억하지 못하는 삶은, 힘겹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천십삽년 유월 십일을 기억하며
인생은 한끗차이
밤.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테니스장에는 조명이 눈부시다.
나는 개를 끌고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돈다.
지하주차장은 모든 아파트의 현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사람이 걸어나올 길은 없다.
차만 다닐 수 있는 주차장 입구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온다.
저 남자는 왜 저 길로 올라오는 것일까.
가끔 이 보다 더 늦은 시간, 밤 11시가 넘어가 혼자 단지를 걷던 남자가 출구를 묻는 경우가 있다. 대리기사들이다.
그들에게 출구를 알려주고 돌아서며 생각한다. 인생은 한 끗차이.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나는 저 사람에게 출구를 알려주고, 저 사람은 나에게 출구를 묻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서 헤어졌던가.
꽉 막힌 양재대로에서 귤을 파는 사내가 있다.
여름이 되면 참외를 판다.
그 전에는 뻥튀기를 팔거나 전자모기채를 파는 사내들도 있었다.
그 때도 생각했다. 인생은 한 끗차이.
우리는 어디서 헤어져서 나는 차 안에서 저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랬다. 주유소에서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면서 기름총을 꽂고 휴지를 갖다주고 영수증을 끊을 때 아가씨 이거 먹어. 하면서 차 안에 있던 귤이나 사탕을 주고 가던 사내들이 있었다.
큰 아버지가 근무했던 신문사의 회사 차량을 보고 큰아버지의 이름을 물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를 어떻게 아느냐 물었다. 나는 그저 먼 친척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 때 나에겐 큰아버지의 명예보다 비빌 언덕, 나의 혈연이, 정확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안도감, 혹은 한 달에 30만원쯤의 돈이 필요했다. 그 때 큰아버지에게 그런 걸 받기 위해 찾아가지 못했다. 인생은 한 끗차이. 그 때 나는 기름 쩐 내나는 옷을 어찌하지 못하고 손을 열 번씩 씻고 저녁마다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인데 지우고 싶지는 않다.
비 오는 날 버스 정류장에서 과격한 차가 흙탕물을 튀기고 지나가 단 한 벌인 정장바지가 홀딱 젖어버린 순간과, 동생은 굶고 있을텐데 이걸 과연 먹어도 되나 한 참을 망설인 끝에 혼자 설렁탕을 사먹었던 기억과, Shut the fuck up 이라고 소리지르던 고객님에 대해서, 잊지 않으려 한다. 과거를 언제나 끌어안고 가고 싶은 것은 인생은 한끗차이라는 걸 잊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누군가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기 위해서, 지하주차장에서 높은 구두를 신고 억지 웃음을 짓는 언니들에게 사탕 하나 나눠주기 위해서, 나에게 밥을 가져다 주는 사람에게 욕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고 싶다.
인생은 한 끗차이.
2013. 6. 1.
검은 강이 터질 때
간혹 사람들은 악에 받쳐서 열나게 일을 하고 치열하게 살면 성공할 수 있고 그러면 복수가 가능할 것이라 믿기도 한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 차 있는 원망과 분노는 절대 긍정적 성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설령 그가 사회적으로 명망을 얻게 된다 한 들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게 되고, 재산을 많이 모았다 한 들 흉금을 터놓을 친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복수는 얄팍한 싸구려 유리 같아서 그 칼끝은 쉽게 부서지고 칼집은 지나치게 길어 제가 뽑은 칼에 제 발이 걸려 넘어지기 마련이다.
원망과 분노, 증오를 담은 가슴은 그 어떤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다. 결정적으로 그 마음은 언제나 슬픔이 가득한 검은 강과 같아서, 쉽게 터져 행복을 완전히 잊은 채로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 쓰고나니 참 할매같다…
저녁 설거지를 미뤄둔 9시.
2013.5.28.
어스름
해 지는 시간이 늦어진다.
하루가 추웠다. 나만 추웠겠는가. 그도 추웠을 것이고, 당신도 추웠을 것이고, 우리 모두, 조금씩 시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따듯한 것이 생각나서 나는 설렁탕을 사러 간다. 검은 나의 차를 타고 어스름이 내리는 거리에, 네온사인이 들어오는 광경을 본다. 가족들과 밥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이 식당에 삼삼오오 앉아 있기도 하고 야근을 하기 전 허기를 달래려는 남자들이 신발을 반쯤 벗은 채 앉아 설렁탕을 훌훌 먹고 있다.
외롭다고 말을 하면 그 뒷모습이 초라해보일까봐
쓸쓸하다고 말을 하면 내 신발의 뒷축을 감추고 싶을까봐
아프다고 말을 하면 앞선 자의 눈이 아련해 질까봐
오늘도 가면을 쓰고 하루를 지내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긴 한 숨을 쉰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그 모든 대답은 나에게 있는데 애써 들여다 보는 시간이 엄습해오는 걸 느끼는 바로 그 때가 어스름.
침대맡에 앉아 일기를 쓰는 그 한적한 시간에 물밀듯이 밀려드는 안타까움에 대하여.
그럴 나이와 그럴 때가 따로 있다는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밀어내면서
최백호의 신보를 뒤적거리는 밤들이 이어지더라도,
그래 내일은 또 무슨 할 일이 산적해 있다는 것이 다행인 시절.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여름은 멀리에 있다.
뒤틀리는 무릎의 통증을 느끼며 삐딱하게 서서 창밖을 바라본다. 휴대폰을 꺼내 그 어스름을 담는 시간. 그저 내가 기억하기 위해, 내 눈보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시간. 그런 시간들이 촘촘히 이어져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나이를 먹고 아이는 자란다.
2013. 4. 10.
날씨는 왜 좋고 지랄
그런 날이 있었어. 아기 기저귀에 쓰는 노란고무줄이 있었어. 그걸로 가속페달을 묶어놓은 버스를 상상해봤어? 내가 학교 다닐 때 타고 다니던 마을버스는 그런 버스였어. 그 버스가 기울어질 정도로 아이들이 많이 탔어. 그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던 길에 시비가 붙으면 버스기사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욕을 했어.
“씨발 내가 너 따위 죽이고 깜빵 한 번 더 가면 돼”
똑같은 교복을 입고 깔깔대던 열일곱 열여덟 아이들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순간이었지. 그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이었어. 순수했고 착했어. 순조롭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이었고, 청천벽력같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안정된 성품의 부모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다수였어. 모험심이 많거나, 책임감이 적은, 바람같은 사람들과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보다 그 반대편이 사는 데는 훨씬 수월했겠지. 몰아치는 폭풍을 헤치고 나갈 에너지를 잘 모아두었다가 자기를 가꾸는 데 쓸 수 있거든.
바다에 배가 가는데, 자꾸 폭풍이 몰아치면 무슨 기운으로 고기를 잡겠어. 근데, 날씨가 계속 좋으면.. 고기도 잡을 수 있고, 하늘도 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할 수도 있거든. 폭풍만 만나면서 살면, 그런 여유는 없지. 하루 하루 버티고 견디는 게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그래서 가정 환경이 안정적이어야 공부를 잘한다고 말하기도 하는거야. 맨날 집에 뭐가 박살나는데 뭔 정신으로 책을 들여다보나. 그런 집구석에서 아이들은 하루하루 숨죽이며 버티는 거거든. 그 와중에 공부를 하는 애들은, 유별난 독종이라고들 하는데, 뭐 꼭 그게 독종이라 그러겠어? 그건 그냥 그 아이가 버티는 방법인데 사회에서 좀 좋아하는 방법을 고른 것 뿐이잖아. 책에다 코 박고 있으면 집중이 잘 되는 뇌를 가지고 태어났나보지. 그게 뭐 꼭 훌륭하다고 말하긴 어려운 거 아니겠냐고.
그렇게 폭풍이 쉴 새 없이 불던 날이 있었어. 이번엔 정말 큰 건이 터진거야. 그 때 내가 열일곱살이었는데. 와 정말 살다 살다 결국 이런 일도 터지는구나. 싶더라고. 욕이 절로 나와. 씨발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되지? 내가 뭘 잘못 했는데? 난 하라는대로 다 하고 살았잖아. 내가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했냐, 집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했냐. 열일곱의 나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고 지각도 안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 게다가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세 번이나 읽었다고. 그 때 욥의 심정이 뭔가 생각했어. 와 정말 좆같겠구나. 씨발.
내 생일이 8월 말인데.
그 날 학교에 자퇴서를 쓰러 갔지. 담임선생님이 무슨 일인지 다 알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 인정받는 아이였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내년에 만나자고 힘내라고 다 격려를 해줬어.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그 마을버스를 탔어. 나는 사복을 입고 있었지. 나는 학교에 소속된 아이가 아니니까. 사복을 입고 싶었어.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아니라고 완강하게 외치고 싶었던 거 같애. 내가 이만저만한 그지같은 일이 생겨서 학교에 못 다니게 됬다구요!! 라고 나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원망을 퍼붓고 싶어서.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난 아무것도 잘 못 한 게 없는데! 내가 왜 자퇴서를 써야 되냐고!!
그건 지금 생각해도 충분히 억울할 만한 일이거든.
그래 그 마을버스를 타고 오는데.. 버스 안에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거야. 자리가 비었더라고. 애들은 다 학교에 있었거든. 게다가 내 생일인데 말야. 날씨가 겁나게 좋은거야. 진짜 허벌나게 좋더라고. 햇빛이 막 미치게 내려쬐고 말야. 8월 말, 내 생일 즈음엔 주로 태풍이 오지. 그게 참 이 엿같은 팔자를 반영한다고 생각하던 나이였는데. 와 .. 날씨는 왜 좋고 지랄. 약올려?
날씨 좋으면 놀러가고 싶잖아. 사람들의 표정도 좋잖아. 길에 웃는 사람들도 많잖아. 나는 미치겠는데 말야. 내 세상은 무너졌는데 햇빛이 짱짱해. 태양이 비웃는 거 같은거지.
그건 니 문제야. 나는 멀쩡하단다.
슬펐지. 그래서 그 날 어디 쪼그리고 앉아서 뭘 적었을 거야.
내 세상이 무너지는 날, 누군가는 빨래를 널고 세탁소에 옷을 맡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누군가가 태어나고 누군가가 죽기도 한다.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은 회사에 가고 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사겠지. 수박을 사오는 누군가의 엄마도 있을 것이고 아이스크림을 베어먹으며 골목을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다. 내 세상은 무너졌는데, 그건 내 세상만 무너진 일이었다.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간다. 비록 내가 사라진다 해도, 세상은 아무 일 없이 돌아갈 거다.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어..
비참하지. 나 없이도 조직이나, 세상이나, 내가 속했던 사회가 돌아간다는 게 진짜 짜증나잖아. 그게 얼마나 슬퍼. 나 없으면 죽을 거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인간은 그냥 그렇게 먼지같은 존재야. 근데 그걸 깨달았는데도, 그 때 한 생각은. 아 나는 정말 무용지물. 여기서 끝났거든.
근데..나는 무용지물이다 – 에서 모든 인간은 다 그렇지만 그래도, 무용지물은 아니다. 이런 고차원적인 생각으로 발전하는데.. 20년이 걸린 거 같애. 뭘 억지로 해서 티비에 나오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그 경박한 욕심을 버리는데 말야.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걸까. 한심한가? 근데 또 그것도 아니거든. 뭐가 한심해. 인간은 원래 다 한심해.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래. 더 한심한 인간도 다 잘 살아. 밥 잘 먹고 잘 자고 똥만 잘 싸고 잘 살아.
날씨를 뭐 어떻게 할꺼야.
날씨 좋다고 하늘에 돌 던지면 나빠지나.
아니면 돈이 많아서. 내 기분이 맞는 날씨를 찾아 비행기를 타고 가나? 갔는데 거기 날씨가 바뀌면? 그럼 말짱 꽝이잖아.
기분이 나빠. 날씨 좋아서 더 나빠. 날씨가 나빴으면 좋겠어. 비가 주룩주룩 왔으면 좋겠어. 그럼 뭐..기다려야지. 비 오는 날까지. 뭘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오늘은 집에 가서 적는거야.
와..오늘은 정말 좆같은 날이었습니다. 씨발. 오늘을 최악의 개같은 날로 정하면, 내일은 덜 개같겠지요. 하하하. 잠이 오나. 잠이 안 오겠지. 안 오면 뭐 못 자는거지 뭘 어떻게 하나. 꼭 자야되나. 하루 안 잔다고 죽지 않아. 그냥 내일 좀 피곤할 뿐이야. 세상에 .. 그렇게 큰 일은 없어. 다 어떻게 보면 그냥 먼지같은 일이야. 할매들한테 어떻게 사셨나요? 물어봐봐. 그 새털같이 많은, 개털보다 많은 날들이 한 줄이 되거든. 그 해에는 애를 낳았지. 2년이 넘어가고 그 해에는 둘째를 낳았지. 아마 큰 애가 아팠던가.. 안 죽었으면 다 별 일 아닌거가 되는 거 같애.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도 않잖아. 안 죽으면 됐지. 뭐. 살아있으면 언젠가 억울하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혹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살려두는 게 나을 거 같애. 언젠가 붙잡고 말해줘야지. 너 때매 뒈져버리는 줄 알았어. 알고는 있냐? 라고.
2013. 3. 15.
근데 그 때 그렇게 억울했는데 말야.
그 때 내가 꼭 그렇게 억울해하지 않을 수도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아? 자퇴서를 안 쓰는거야. 버티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거든. 근데 나는 내가 더 비참해지는 방법을 택한거지. 누가 알아줄까봐. 그냥 훈장 하나 달고 싶었던거야. 그래서 훈장을 달았지. 트라우마. 내 트라우마. 내가 골라서 내 가슴속에 새긴거야. 그냥 학교 버티고 다녔으면.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혹시 알아. 학교에서 장학금을 줬을 수도 있어. 그 일은 생각보다 무척 금방 해결됬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 때 왜 자퇴서를 썼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 그냥 내가 그런 인간이구나. 깨달은 걸로 만족이야. 어쨌거나 쉬는 동안 공부를 좀 해서 성적을 올리고 다음 해에 당당히 재입학을 했고 학교도 잘 다녔으니까. 그게 막 가슴아파할 일은 아닌거 같애. 내가 그냥.. 모르는 길이 있으면 일단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지랄같은 성격때문이겠지 뭐. 내 트라우마, 내 상처ㅡ 그런 거 말야. 뭐든지, 일단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왔을 때, 결국 어느 방의 문을 여는가는. 내가 선택하는 거더라고. 등 떠밀려 들어갔어도, 나올라면 나오는거지 뭐.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아닌 이상.
비오는 밤
기억이 잊혀지는 게 구슬프다.
내가 잊어가는 것도 구슬프다.
빗소리는 더 이상 양철지붕을 때리지 않는다.
곱게 화단에 내려 앉아 값비싼 향나무를 적시고 비싼 개밥을 먹고 사는 개들의 똥무덤을 적실 것이다.
하나씩 잊혀져 가는 게 구슬프다.
온 몸을 감싸던 외투를 벗는 계절이라 슬프다.
태양이 빛나고 꽃이 피더라도 답답하던 옷에 배어 있던 체취가 그리운 날이 있더라.
갑자기 눈이 왔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날이 흩어진다.
올 겨울은 너무 길었지. 올 겨울은 너무 힘들었지, 그래서 빨리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꽃은 기다릴 수가 없네.
그 겨울의 시작부터 믿기지 않았으니까. 결국은 그래도 겨울은 가고 봄은 오는 건데, 이렇게 쉽게 가고 이렇게 쉽게 와도 되는 건가..
이렇게 쉽게 가고, 이렇게 쉽게 올꺼면 왜 그렇게 잔혹했나.. 싶은게지.
곧 저 멀리 남쪽 마을엔 산수유가 핀다는데, 삼중창 유리밖에 잘 들리지도 않는 빗소리가 들린다고 우기면서, 갈 봄 여름없이 꽃피네 꽃피네. 라고 중얼중얼.
개 한마리 애기 하나 드르렁 거리는 애매한 계절의 비오는 밤이다.
2013. 3. 13.
안녕 새.혼.
설날 연휴.
아이와 함께 서울나들이에 나섰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가서 한옥의 풍경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느즈막히 출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행사는 끝물이거나, 이미 끝났을 것이 분명했다.
지인의 집 근처에 차를 대고 걸어가기로 했다. 아이는 차 안에서 깊게 잠이 들었다. 차를 세우고 아이를 깨웠다. 다 왔다. 다 왔다. 자 이제 일어나야지. 엄마 졸려. 엄마 졸려를 반복하던 아이는 그래도 새로운 나들이에 기대가 되었는지 금새 잠을 떨치고 일어나려 노력했다. 아이를 차에서 끌어내 길을 걷다가 장갑은? 이라고 물으니 차에 두고 왔다고 한다. 다시 차에 돌아가 아이의 장갑을 꺼내는 순간, 뒷 문이 열리는 자리에 오래된 새의 사체를 발견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음을 외면했다.
세상에 죽어나가는 것이 어디 한 둘 뿐이랴.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 떨어져 죽는 일은 언제나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그들도 결국은 죽고 나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순리인 모양이다.
한옥마을에서 연을 만들기도 하고 이리 저리 한옥을 구경하며 차례상 지내기의 이야기도 듣던 아이는 신이 났다. 오징어도 뜯어먹고 솜사탕까지 손에 쥐었다. 친구를 만나러 다시 차에 올라탈 때 아이에게 말했다.
“너 차에 탈 때 뭐 발견한 거 없어?”
“뭐?”
“거기 죽은 새 한 마리 있는데.”
“어디?”
아이에게 차 문을 열고 뒤를 돌아보면 보일 것이라 말해주었다.
아이는 차 문을 다시 열더니
“어 진짜네. 새가 죽어 있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는 종알댔다. 죽음에 대해서 큰 경외감이나 큰 슬픔이나, 두려움이나 거부감따위 없이.
“엄마 엄마, 이제 저 새의 영혼은 다시 하늘로 간거야? 그럼 저 새의 이름은 무엇이라 지어주지? 새의 영혼. 이니까 새.혼. 이라고 지어줄까? ”
시동을 걸고 차가 움직이자 아이가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든다.
“안녕 새혼아. 잘 있어. 다음에 또 만나. 하늘나라에 잘 가.”
할머니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고 장례식장에 도착해 눈물을 그렁거리던 일곱살의 손주는 해를 넘겨 여덟살이 되었고, 이제 사람도, 새도 그 영혼이 살아 하늘로 도달하리라 믿는지도 모른다.
안녕. 새혼아. 하늘나라에 잘 가. 훨훨 날아가렴.
이치를 깨닫지 않아도, 무엇인가 배우지 않아도 깨닫는 아이.
아이의 영혼은 무엇이라 이름지을까.
2013. 2.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