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쓰다 – 설렁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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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 벌어야만 한다. 그게 어떤 방법이 되었건간에, 모든 사람들은 제 밥을 벌기 위해, 혹은 제 가족의 밥을 벌기 위해 살고 있다. 밥벌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것은 소설가 김훈 선생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 단어에 매혹되어 그의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을 사서 읽었고, 밥벌이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했다.

어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나는 이제 더 이상 밥벌이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는 나에게 언제 네가 제대로 된 돈을 벌어본 적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렇다. 나는 치열하게 밥을 벌었을 뿐이지, 제대로 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다. 일부는 떼서 저축을 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혹은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그런 돈 말고, 나는 그 때 매일 매일 밥만 벌었다. 하루 먹고 살기 위해, 일주일을 버티기 위해, 또 한달 치 월세를 내기 위해, 나는 그 때 밥을 벌었다. 밥벌이가 지겨운 정도가 아니라 치가 떨리던 그 시절에, 나는 마음속이 헛헛해지면 마포에 가서 설렁탕을 먹었다. 10년도 훨씬 더 전에, 그 설렁탕 집엔 지긋한 나이의 노인이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해방 이후, 혹은 전후부터 그 자리에서 설렁탕을 끓여대지 않았을까 싶은 양반이었다. 10년이 훨씬 더 지나, 그 자리에 다시 가보니 그 집은 여전히 설렁탕 냄새를 골목 자욱히 풍기고 있었고, 계산대를 지키는 사람은 30/40대의 젊은 사내로 바뀌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전과 다름없는 설렁탕 한 그릇을 내게 내어주었다.

설렁탕에 대한 미련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 기원한다. 중학교 때 나를 총애, 아니 편애 하시던 한 선생님이 나에게 중학교에 다닐 동안 읽어야 할 리스트라며 파란 메모지 몇 장을 건네 주셨다. 그 중에 한 편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었다. 나 역시 그 선생님을 편애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열심히 책들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삼중당문고의 후예뻘인 어느 출판사의 작은 문고판으로 현진건의 단편소설집을 읽었다. 운수 좋은 날엔 가난한 인력거꾼이 밥을 벌러 다닌다. 그의 아픈 아내는 그가 일을 나서기 전에 설렁탕 한 그릇을 먹고 싶다고 한다. 인력거꾼은 억세게 운이 좋은 일진을 맞아 손님을 태우고 경성거리를 미친듯이 달린다. 그리고 설렁탕 한 그릇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지독히도 운 나쁜 여편네는 이미 이 세상을 버렸다. 나는 그 때 설렁탕. 이라는 음식에 모든 삶의 비애와 고통과 팔자를 담아 버렸다. 얼마 전 읽은 문태준의 느림보 마음이라는 산문집에는 릭샤 운전수에 대한 비애가 담긴 글이 한 편 읽었다. 나 자신이 그 릭샤에 앉아서 묻어 가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는 시인의 착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과, 문태준의 느림보 마음을 모두 설렁탕 한 그릇에 응축 시키기로 했다.

 비오는 거리에서 인력거를 끈다고 생각해보자. 집에는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퀭한 눈을 하고 아비를 기다린다. 병들어 아픈 여편네는 설렁탕 한 그릇이 먹고 싶다고 한다. 인력거꾼은 오늘도 밥을 벌기 위해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사지 육신이 메말라 가는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린다. 뚱뚱한 귀부인이 인력거에 올라타 그 인력거가 휘청하더라도 별 수 없다. 귀부인은 팁까지 얹어서 돈을 내고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설렁탕이다. 설렁탕을 몇 그릇을 사야 할 것인가. 돈 벌어오는 자가 가장 단 한 명뿐인 가족구조라면, 가장은 설렁탕을 보며 침을 꿀떡 삼키고 포장을 해가야 할 것이다. 가장은 그런 사람이니까.

 내가 밥벌이의 지겨움을 아는가, 그 당시에는 알았으나 일선에서 물러 나고 난 뒤 금세 잊었다. 단지 중국에 있던 유학시절동안 인력거를 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은 있다.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되었다. 나의 양심은 알량한 돈 몇 푼에 그의 팔다리를 욱신거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그의 밥벌이였다. 내가 그의 인력거를 타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인력거를 타지 않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딜레마에서 나는 늘 갈등했다.

 비가 오는 날, 속이 헛헛한 날이면 설렁탕집을 찾는다. 이제는 아이를 데리고 설렁탕집을 찾는다. 해방 이후부터 설렁탕을 끓여낸 커다란 솥이 있는 작은 집이 아닌, 대형체인점으로 가서 어린이 설렁탕을 한 그릇 시켜주고 나도 한 그릇 시켜 먹는다. 아이와 먹는 설렁탕은 급하다.

대신, 혼자 먹는 설렁탕은 어쩐지 슬프다.

나는 그 마포의 그 작은 설렁탕 집에서 고깃내를 실컷 맡으며 전혀 가난해 보이지 않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설렁탕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리고 그 설렁탕 집으로 나를 데려가 설렁탕을 사 먹였던 늙었던 그 남자를 생각한다. 그 사람은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마포에서 설렁탕을 먹을 때 마다 아버지를 다시 마주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마포를 떠나 다시 그 집에 가서 설렁탕을 먹으려면 몇 번의 환승을 거쳐야 하는 상황이 되고 나서야, 아버지는 이미 이 나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제 마포에까지 가서 설렁탕을 먹지 않는다. 그저 커다란 체인점에서 급하게 밥을 먹을 뿐이다.

밥을 벌었는가. 오늘 나는 충분한 밥을 벌었는가. 나를 위해 밥을 벌고 있을 그 사람을 위해, 또 한 때 나를 위해 밥을 벌었을 두 사람을 위해, 나는 가만히 설렁탕을 바라본다.

 

2009. 12. 

 

MADE IN CHINA

얼마 전 아이를 데리고 후배들을 만났다. 후배 한 명은 우울증이 온 것이 아닌가 고심하고 있었고, 다른 한 후배는 그런 정신적 괴리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에게는 대화를 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나의 아이는 어른들의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못내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장소를 옮기면서 후배와 함께 잰 걸음으로 호텔의 상가에 들어갔다. 그 호텔의 상가는 남대문 시장의 수입상가와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므로, 적당한 가격에 아이에게 어울리는 장난감을 사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핸드백과 스카프, 빅사이즈 옷과 셔츠나 넥타이를 파는 점포를 지나 나는 장난감 가게 앞에 도달했다. 환호성을 지른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멋진 자동차를 축소해 놓은 미니어처도 있었고, 아이가 좋아하는 중장비 자동차도 있었지만, 내가 고른 것은 아이가 가지고 놀기에 적당한, 성인 남자의 엄지 손가락만큼 작은 자동차 6대가 한 개의 비닐지갑 안에 들어있는 것이었다. 얼마 전 약국에서 산 어린이용 비타민제에 끼워져 있는 자동차와 동일한 제품 같아 보였다. 아이는 자동차가 맘에 들었는지 제 손에 들고 우리가 밥을 먹으러 가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아이는 잃어버릴까 봐 – 라고 말하며 자동차를 쉽사리 꺼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자꾸 비닐 지갑 속으로 자동차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분주한 식당에서 속사포 같은 이야기들을 쏟아 내며 자꾸 흐트러지는 정신을 가다듬어 드문드문 대화를 빠르게 이어갔다. 후배와 식사를 마침과 동시에 우리는 대화도 정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을 기약하며 지하철 역에서 헤어졌다. 아이는 제 손에 자동차를 들고서 쫄랑 쫄랑 나를 따라 걸었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 새로 산 자동차들을 제 아빠에게 자랑하기도 하고 뒤로 당겼다가 앞으로 슝- 하고 나가는 자동차가 신기했던지 한 참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그 많은 미니카 중에 가장 맘에 들었던지 책장 사이에 쑤셔 박아 나름대로 숨겨 놓기도 했다.

 장난감을 산 지 이틀이 지난 날, 나는 아이와 자동차를 함께 가지고 놀았다. 내가 원해서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아이가 같이 놀자고 매달렸기 때문이었는데, 몇 개의 자동차는 이미 더러 고장이 나 버려서 뒤로 당겼다가 놓아도 앞으로 가지 않았고, 몇 개의 자동차들은 회전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나는 자동차들을 들어 올려 꼼꼼히 살펴 보았다. 작은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고 어떻게 조립을 했을까 싶을 만큼 작은 자동차였다. 그리고 자동차의 아래쪽엔 MADE IN CHINA 라는 글씨가 선연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중국의 어느 공장에서 화학물질 냄새를 맡아 가며 이 자동차를 조립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삐뚤게 붙여진 자동차들의 스티커들을 보다가 손톱보다 작은 스티커를 사람 손으로 붙였을 거라고 확신했다.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져 왔다.

 누군가 이 자동차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집으로 돈을 부쳤으리라, 누군가 그 냄새에 코가 마비되어 피를 토했을 지도 모르겠다. 인권유린의 사각지대라는 말 따위는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이 것을 만들었으리라. 하루에 12시간을 일하고도 우리 돈으로 30만원도 채 되지 않는 월급을 받고 좋다고 신명 나게 웃었을 누군가를 생각했다.

 오래 전 나는 사탕을 먹을 때마다 신경숙의 소설을 생각했다.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에서 주인공은 짝꿍의 엄지 손가락이 기형적으로 뒤틀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주인공이 그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짝꿍은 나는 사탕공장에서 일하는 데 하루에 몇 백 개씩 사탕을 리본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손을 뒤틀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조용히 손을 내려놓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리본 모양으로 묶여진 사탕을 먹을 때마다, 볼 때마다 씁쓸한 마음에 달콤함이 저만치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자동차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차가워진다. 누군가 생산을 하고 컨베이어 벨트에 빠르게 물건을 올려놓기 위해 그 어떤 단상도 할 수 없는 삶이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과연 나는 그들이 만든 물건을 구매하는 것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산업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자들의 인권을 위해 내가 깃발을 들고 나설 수 있을 것인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인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쳐들어 왔다. 나는 자동차를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이걸 봐봐. 이걸 만든 사람들을 생각해봐. 하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고질병은 고칠 수 없는 것일 게다. 즐거움 속에 숨겨진 인생의 비애를 포착해 내는 기질은 사춘기시절 감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수반된 것이었고, 나는 아직도 그런 삶에 버거워 하고 있다. 왜 나는 좀 더 단순하게 살 수 없는가, 그저 이건 MADE IN CHINA 니까 벌써 고장이 나버렸잖아. 하고 넘겨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들은 과연 양심의 소리인 것인가, 아니면 한동안 생업의 현장에서 밥벌이를 했던 나의 비애가 가져다 주는 자기 연민의 확대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그저 아프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주는 기쁨도 있을 것이라고. 나보다 더 그들이 행복할 수 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아이와 자동차를 가지고 놀았다. 뒤로 힘껏 당겼다가 손을 놓는다. 자동차는 급회전을 하면서 저 멀리에 가서 부딪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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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 

안녕 새.혼.

설날 연휴.
아이와 함께 서울나들이에 나섰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가서 한옥의 풍경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느즈막히 출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행사는 끝물이거나, 이미 끝났을 것이 분명했다.

지인의 집 근처에 차를 대고 걸어가기로 했다. 아이는 차 안에서 깊게 잠이 들었다. 차를 세우고 아이를 깨웠다. 다 왔다. 다 왔다. 자 이제 일어나야지. 엄마 졸려. 엄마 졸려를 반복하던 아이는 그래도 새로운 나들이에 기대가 되었는지 금새 잠을 떨치고 일어나려 노력했다. 아이를 차에서 끌어내 길을 걷다가 장갑은? 이라고 물으니 차에 두고 왔다고 한다. 다시 차에 돌아가 아이의 장갑을 꺼내는 순간, 뒷 문이 열리는 자리에 오래된 새의 사체를 발견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음을 외면했다.

세상에 죽어나가는 것이 어디 한 둘 뿐이랴.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 떨어져 죽는 일은 언제나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그들도 결국은 죽고 나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순리인 모양이다.

한옥마을에서 연을 만들기도 하고 이리 저리 한옥을 구경하며 차례상 지내기의 이야기도 듣던 아이는 신이 났다. 오징어도 뜯어먹고 솜사탕까지 손에 쥐었다. 친구를 만나러 다시 차에 올라탈 때 아이에게 말했다.

“너 차에 탈 때 뭐 발견한 거 없어?”

“뭐?”

“거기 죽은 새 한 마리 있는데.”

“어디?”

아이에게 차 문을 열고 뒤를 돌아보면 보일 것이라 말해주었다.

아이는 차 문을 다시 열더니

“어 진짜네. 새가 죽어 있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는 종알댔다. 죽음에 대해서 큰 경외감이나 큰 슬픔이나, 두려움이나 거부감따위 없이.

“엄마 엄마, 이제 저 새의 영혼은 다시 하늘로 간거야? 그럼 저 새의 이름은 무엇이라 지어주지? 새의 영혼. 이니까 새.혼. 이라고 지어줄까? ”

시동을 걸고 차가 움직이자 아이가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든다.

“안녕 새혼아. 잘 있어. 다음에 또 만나. 하늘나라에 잘 가.”

 

할머니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고 장례식장에 도착해 눈물을 그렁거리던 일곱살의 손주는 해를 넘겨 여덟살이 되었고, 이제 사람도, 새도 그 영혼이 살아 하늘로 도달하리라 믿는지도 모른다.

안녕. 새혼아. 하늘나라에 잘 가. 훨훨 날아가렴.

이치를 깨닫지 않아도, 무엇인가 배우지 않아도 깨닫는 아이.

아이의 영혼은 무엇이라 이름지을까.

 

2013. 2. 14.

도시의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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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내 신변을 환기할 필요가 있었다.

스트레스 저항력이 약해지는지, 이제는 몸의 증상으로 치환되는 일이 너무 잦아지는 중이다.
사소한 일을 마치고 나서 갑자기 진땀이 나고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까지 아파져 급하게 휴대폰 어플을 켜고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의 극장에 영화예매를 했다.
바지만 다른 것으로 갈아입고 외투를 챙겨입고 부랴부랴 어두워 지는 밤길을 달려 극장까지 오는 길에 운전을 조심해야겠다 는 생각을 계속 했다. 귀향이 시작되었는지 도로엔 차가 그득했다.
하늘은 푸르스름하고 땅은 네온사인과 차량불빛으로 온통 붉었다.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서너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제 엄마에게 쉬- 쉬- 하며 까치발을 들었다. 귀엽게 생긴 그 아이를 보고 “아이고 어떻게 하지?” 하며 말을 건넸다. 아이는 수줍은 듯 제 엄마 뒤로 숨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극장 매표소가 보이는 장소에서 애기엄마가 두리번 거리기에 화장실 방향을 알려주고 예매해 둔 표를 기계에서 뽑아냈다.
영화는 두 시간일 것이고 저녁은 아직 먹지 않았으니 간단하게 팝콘판매대에서 핫도그와 사이다를 시켰다. 음식을 파는 애들은 하나같이 날렵하고 얼굴이 작고 어린 남자아이들이었다. 군대도 안 갔다온 거 같은 소년도 청년도 아닌 사내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팝콘이며 탄산음료를 뽑아냈다.
핫도그는 내가 예매한 영화 홍보용 포스터로 둘러 싸진 멋드러진 지함에 들어 있다. 그 박스를 한참 들여다 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끊임없이 영악하고 영민해야 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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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앉은 의자 앞에 두 어린아이가 앉아있다. 초등학교 2-3학년이 되었을까. 두 아이는 남매 같기도 하고 쌍둥이 같기도 하다. 아이들은 아이패드 미니 정도 되는 작은 타블렛을 들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영화 광고판 앞으로 가서 섰다. 여자 아이는 검은색원피스 스타일의 패딩코트를 입었고 남자 아이도 검은색 패딩 다운 자켓을 입었다. 이 시간에 영화관에 아이 둘만 있는게 이상하게 느껴져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핫도그 지함을 바라보다가, 또 영화 안내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을 바라보았는데 저만치 서 있던 아이들의 움직임이 묘하다. 남자 아이가 울고 있다.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찍어누르고 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달래는 듯 하다. 확실한 건,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의 아이 둘이라는 것이다. 방치, 방임, 이런 단어들이 생각났다. 주변의 사람들은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두 아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아이들에게 다가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부모들은 어디에 간 것일까. 아이들은 이 시간에 저 비싼 기기를 들고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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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관에서 영화가 끝난 모양이다. 부모로 보이는 남녀가 나오며 아이들을 끌어 안았다. 여자 아이가 제 아빠로 보이는 파란 점퍼를 입은 덩치 큰 남자에게 팔을 휘둘렀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고 항의하는 목소리가 바로 내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들렸는지 들리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 아이는 연신 눈물을 닦아 냈다. 퍼머를 한 단발머리, 고운 얼굴의 엄마가 사내 아이를 끌어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울고 있었다.
남들이 볼까 얼른 눈물을 훔쳤다.
왜 내가 울고 있는가.
2013. 2. 8.

동물원 옆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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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과천 현대미술관

20,000원 내고 멤버십 갱신

국립미술관 기획전 무료입장.

임충섭 개인전

그리고 2011 소장품 대전. 

 

현대미술관은 가는 길은, 그 길이 수려하고, 그 길이 멀고, 그 길이 고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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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감을 받고 온다. 

오늘도 두 세시간, 

푹 쉬고, 많은 것을 머릿속에 넣고 가슴을 비우고 돌아왔다. 

가까이에, 그리고 이 사회에,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현실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미술관 옆 동물원의 주체는 미술관이다. 

동물원 옆 미술관의 주체는. 동물원이다. 

 

2013. 2. 7.

 

 

송충이의 솔잎

망해가는 마봉춘이 창사특집다큐를 찍으셨던데

아프리카의 한 부족이 관광객의 사진촬영 대상이 되어 돈을 받고 자기들의 삶을 보여주는 생존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나의 내면에 내재된 조상들의 솔잎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의문이 생겼다.

• 적어도 우리 기억속, 우리의 역사속엔 다양한 직업군이 있었고 모든 사람이 문명사회에 진입하기 전에는 성씨가 분류되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아프리카에는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인지, 내가 모르고 있는 것 뿐인지
서구사회와 가까웠고, 그 문명의 유적으로 알려진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모로코는 분명히 전근대 고대국강 형태를 갖추고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존재하였는데,

인류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화를 거듭했다면 정말 중앙아프리카 이남엔 고대국가의 이름이 단 하나도 없었을까?
마야와 잉카와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정말 그 곳엔 지배와 통치가 허용되는 문명이 없이 공동의 평등한 삶만 존재했는가?
단순히 내가 모르는 것인가 혹시 누군가 필요에 의해 삭제했거나 왜곡한 것은 아닌가.

• 송충이의 솔잎은 유전자에 새겨진 정체성의 이야기다. 수십년 수백년 수천년을 그렇게 살아오면서 계발되고 특화된 각자의 성질에 대하여 되도록 정체성에 가까운 환경에서 살아갈 때 사람은 안정감을 느낀다.
오래전부터 농경사회였고, 유목이나 사냥보다 농경에 어울리는 땅에 살던 이 나라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농촌으로 이주해도 歸農이라 말한다.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고향이고 정체성이고 유전자에 새겨진 역사이므로.

서구사회나 다른 민족들 중, 아직도 몽골은 유목생활을 반절정도 유지하고 있고 자연환경이 척박한 곳에서는 타고난 솔잎에 어울리게 사냥을 주로 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글쟁이 집안, 농사꾼집안, 장사꾼 집안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축적되는 노하우가 있고 그 직군으로 살아가는 비법들이 삶에서 삶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며 삶은 비교적 익숙한 환경내에거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동물적 개체가 보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생존의 문제이므로.

21세기.
우리는 모두 자신의 솔잎을
10년 이내 단기간에 쌓아온 스스로 만의, 한 개인의 노하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대와 세를 거쳐 이어져 내려왔고 삶속에 숨어 있는 역사성은 단지 10여년 만에 규정되거나 안정화되지 않는다.

우리가 헤매이는 이유는

너무 멀리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 아스팔트도 독하기 독한데, 지속되는 폭설때문에 제설방제에 사용된 염화칼슘이 그 독한 아스팔트를 뻥뻥 뚫어놓은 도로에서 당황하던 하루 종일을 결정짓는 생각을 해봤다.

9세기 ~ 18세기

식민 지배 이전의 아프리카에는 10,000개 이상의 국가와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4] 이들은 제각각의 정치 조직과 지배 체제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는 아프리카 남부의 산족처럼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는 작은 가족 집단도 있고, 아프리카 남부와 중부의 반투어권 씨족 집단처럼 좀 더 크고 조직을 갖춘 집단도 있으며, 더 나아가 아프리카의 뿔의 씨족 집단, 사헬 지역의 왕국들, 서아프리카의 요루바와 이그보(Igbo) 혹은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해안의 무역 도시와 같은 자치 도시국가나 왕국처럼 더욱 체계를 갖춘 나라도 있었다.

기원후 9세기경 초기 하우사 등 일련의 왕조 국가들이 사하라 이남 사바나에서 서부 지역부터 중부 수단을 지배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는 가나, 가오, 카넴-보르누 제국이었다. 가나는 11세기에 쇠퇴하였으나, 말리 제국이 뒤를 이어 13세기에 서부 수단 대부분을 통합하였다. 카넴은 11세기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서아프리카 해안의 삼림 지역에는 북쪽 무슬림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 왕국들이 성장하였다. 이그보의 은리 왕국(Nri)은 9세기에 세워진 초기 왕국이었다. 또 오늘날 나이지리아 땅에서 매우 오래된 왕국으로, 에제 은리(Eze Nri)가 다스렸다. 은리 왕국은 이그보 우크부(Igbo Ukwu)에서 발견된 정교한 청동 유물으로 유명하다. 이 청동 유물은 9세기경으로 보인다.[35]

요루바의 도시국가와 왕국 가운데 역사상 최초의 나라 이페(Ife)는 이페의 우니(Ooni)라는 성직자 오바(oba, 요루바어로 “왕” 혹은 “지배자”를 뜻한다)가 다스렸다. 이페는 아프리카에서 종교와 문화면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으며, 청동 조각의 독특한 자연주의 전통으로 유명하였다. 이페의 정부 형태는 오요 제국(Oyo)에서 수용하여, 이곳의 오바(임금)은 오요의 알라핀(alaafin)이라고 하였으며, 한때 수많은 다른 요루바 혹은 비(非)요루바 도시국가와 왕국을 다스렸다. 다호메이의 폰 왕국(Fon)은 오요의 지배를 받는 비 요루바 나라 중 한 곳이었다.

알무라비툰은 사하라 사막의 베르베르 왕조로, 11세기에 광활한 북서 아프리카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36]바누 힐랄과 바누 마킬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아랍 베두인 부족의 연합체로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집트를 거쳐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이주하면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융합하여, 지역 주민이 아랍화되고, 아랍 문화는 이슬람을 기초로 지역 문화의 여러 요소를 흡수하였다.[37]

아래 내용은 위키디피아

http://ko.m.wikipedia.org/wiki/아프리카#section_3

난곡, 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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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이유 – 아름다운 집
서울 신림동
Nikon D5000 Nikor 18-70mm / Digital Printing /
76.2cmX101.6cm (30X40) 액자 미포함 사이즈
2009. 11. 촬영
1st Edition – Digital Printing /76.2cmX101.6cm (30X40)/ 경기도 안양시 안양6동 이야기너머 작은 도서관 소장중

2006년 12월
돐이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우리는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주인이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었고, 아이가 어려서 아파트 생활에 도전해보기로 했으나 근처의 아파트 단지들은 매우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값이 만만치 않았다. 세입자로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척의 정보로 옮기게 된 곳이 관악구 신림동, 난곡이었다.
나는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했고, 서울의 남쪽 끝, 안양에서 넘어가는 산비탈에 새롭게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는 것만 몇 년 째 구경하던 차였다.
난곡이라는 지명이 무엇을 뜻하는 지, 내면에 숨어 있던 기억이 조금씩 불거져 나올 때쯤, 택시를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사가 해 준 문구가 귀에 딱 박혔다. “난곡이 천지개벽을 했구나. 서울이 버린 동네. 대한민국이 버린 동네.” 인터넷으로 난곡에 대해서 검색을 해봤다.

난곡에 살던 사람들을 밀어내고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아파트단지는 2300여세대.
주공 1단지와, 2단지, 그리고 그 밑에 영구임대주택은 3단지로 분류되었으나, 길이 나뉘어져 있었고, 입구도 완전히 달랐다. 분양가는 평당 1200만원에서 평당 1400만원. 월세는 24평 기준 5000만원 보증금에 월 70만원 정도. 안양의 삼막사에서 경인교대앞을 지나 호암터널을 지나는 산길에서 내려오거나, 난곡사거리에서 올라오는 그 길의 아파트 단지는 신림역보다 해발 300미터 정도가 높다는 소문이 있었고, 피부로 느낄 만큼 확연하게 날씨가 달랐으며, 산안개가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의 꼭대기를 감싸고 돌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성채, 사람이 살아서는 안되는 불길한 예감이 흐르고 있다고 미친 척 지껄여도 신빙성 있게 들릴 만큼, 때로는 신비롭고, 때로는 기괴한 분위기를 뿜어낼 줄 알았다.
봄이 되면 산에서 아까시 냄새가 흘러내려왔고, 밤꽃 냄새가 지천에 진동했다. 조금만 걸어올라가면 관악산과 삼성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펼쳐졌고, 차 지나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절간 같은 곳도 있었다.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갑자기 트럭에 실려 자 이제 여기서 한 번 살아보라고 강제로 이주 당해 몇 십년을 일궈먹고 살면서 골목과 골목을 통해 같은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오줌을 싸고 옆집에 수저가 몇 개 인지, 누구네 서방이 마누라를 얼마나 두들겨 패는지 적나라가 알 수밖에 없던, 모든 집을 지나가야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구비구비 돌아가던 난곡에 살던 사람들은 그 아파트에 단 한 사람도 남을 수 없었을 게 뻔했다. 원주민이라고 말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 승용차를 끌고 다니고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냈으며, 대부분 대학을 나왔고, 좋은 직장에 다녔다. 딱지를 사서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비밀도 아니었으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 나는 알 지도 못했다. 나는 세입자였으므로.

그 성채로 들어설 때마다 부채의식에 시달렸다.
그런 나에게 무슨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냐고 낯선 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가난하고 못 배웠다면, 공기라도 좋은 데 살면 안되나. 단 하나 남은 천혜의 것. 달이 가까운 동네라는 게, 우리나라야 척박한 도로 환경으로 인해 산동네 달동네가 빈민가가 되었지만, 아침마다 들려오는 새소리와 쏟아져 내려오는 꽃냄새를, 누군가가 눈물 흘리며 쫒겨났을 거라는 그 땅에서 가만히 앉아 맡는다는 것도 힘겨웠다.

내 양심에 발린 소리였던가.
간혹 나는 삼성산 아래 고시촌을 떠돌다 6동 시장이라 부르는 재래시장에서 아이를 들쳐업고 장을 보고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저기 어딘가 사람이 살고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삼성산 성당의 뒷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그리고 이 집을 만났다.
아파트가 밀어내지 않은 골목. 이 집은 몇 평이나 될까.
이 집이 열평이라면, 평당 1200만원 시세를 적용하면 1억 2천짜리 집이 될테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너무나 빤한 일.

고마웠다.
내 어린 날, 화장실을 가기 위해 어두운 산길, 휴지를 쥐고 마구 내달려야 했던 기억처럼, 아무 것도 없고, 설령 부모는 끼니걱정을 하더라도, 엄마 아빠가 집에 있어서 좋아. 라고 뇌까렸던 철없으나 암울했던 그 시절처럼, 완전히 색이 바랜 가림막에도, 여기,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고.
내 알량한 양심에, 조금 기름칠을 해 준 셈이라 고맙다고.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70만원을 내면서 일곱식구일지, 여덟식구일지 모를 사람들을 내 쫒은 자리에서 내가 두 발 뻗고 살고 있지 않다고 변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게끔. 나, 당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게끔. 말해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기념한, 겨울의 풍경이다.

2013. 2. 1.

_최근들어, 이 사진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일이 생겨서 적어본다.

무섭다는 말

예민한 아이는 새벽녘 제 부모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으면 곧잘 잠에서 깬다.
새벽 2시 50분.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가 에미를 부른다.
엄마 저기 뭐가 있어.
엄마 저기 뭐가 이상해.
빛에 비친 그림자였거나, 안방에 숨어 들어온 늙어가는 개였을게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를 다독여 다시 재우고 나도 모르게 아이가 가르킨 방향을 외면한다.

무섭다는 말.
언제 해봤을까.
기억이 없다.

아이 무서워.
아이 두려워.

이 아이는 나를 대신해, 무섭고, 두렵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는데,
내 기억속의 나는 당췌, 무섭다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어 본 적이 없다.

아이가 묻는다.
엄마는 세상에서 뭐가 제일 무서워?
글쎄…
한 참을 생각해도 싫은 건 있어도 무서운 게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견고하게 만들어 온 밖에 내세우기 위한 자아는 이제 세월의 더께를 입어 더욱 더 곤고해진다.
딱딱하게, 움직이지도 않고, 석고상에 이끼가 끼듯.
무섭다는 말, 해 본 적도 없이, 이제는 무섭다고 말하기도 쑥스러운 나이를 먹었다.

그 모든 것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스스로 무장하여 갑옷을 입혀 대문앞에 세워놓은 저 것이.
이제는 나인 척 하고 수십년을 살아서, 자기가 나 인 줄, 내가 자기인 줄, 나도, 그것도 착각하고 있다.

경리장부 20년 주물러, 자기가 대표이사 인 줄 아는 경리직원처럼.
그렇게 되어버렸다. 주객의 전도.

무섭다는 말.
누구에게 할까.

어느 봄밤, 아이를 재우고 나와 벚꽃 사진을 찍는 나를 마주쳐, 술에 취한 채 흐느적대면서, 옆에 한 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그 날의 당신을
이 밤, 생각한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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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1.

2004년 12월 1일 -자전거 고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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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일

이 날.
이 날 아마 날씨가 약간 춥긴 했고,
며칠 째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을거다.
과외를 가는 길이었고,
길을 잘 못 들었는데 자전거마저 고장이 났었지.
그래서 길에서 만난 자전거 수리공에게 자전거를 고쳤는데, 아마 그 수리공이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을거야.

근데 그 터무니없는 값이라는 게 12위안이거나 20위안이었을게야. 그 때 아마 스타벅스 커피가 30위안이 좀 안됬나 그럴껄.

이 날도 분명히 시엔시아루 스타벅스에서 6시간 정도를 뭉개면서 외국인 유학생이라는 특권 아래서 무료 시음료도 몇 잔 받아먹고 그랬을지도 몰라.
이 날이 아니었다 해도, 그 전 날 그랬거나, 그 다음날 그랬거나. 아무튼 스타벅스를 도서관 삼아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전거 수리공과 흥정을 하는 거지. 한 잔의 커피값도 안되는, 그 저녁의 노동에 대해서.
손톱밑의 때는 평생을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호적은 분명히 없을 게 뻔한, 자기 이름이나 겨우 쓰면 다행인. 그 남자와 길바닥에서 말야.

그리고 슈주허를 넘으며 생각했겠지.
나는 대체 뭔가.
나의 돈은 무엇이고, 저이의 돈은 무엇인가.

가난이 내 영혼을 잠식하면,
나는 사기꾼이 될까 거지가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전거를 밀었을거야….

도시, 한 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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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재우다 잠들었고
새벽 2시 반이 넘어 깼다.
내가 자고 일어나면 무조건 밖에 나가는 줄 아는 개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길의 짧은 산책

아무도 없는 새벽,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나간 게 이런 풍경.
모두가 벽으로 둘러쳐진 아파트, 똑같은 풍경이라니

참으로 재미없고 정떨어진다.

아파트 생활 6년.
다시 또 생각한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2013.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