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 우리들의 여덟빛깔 무지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동안 중단했던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의 이용자 생애사쓰기 프로그램을 재개했습니다. 2022년에는 직업훈련중인 청년발달장애인들의 생애사를 함께 쓰고 원고를 묶어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세상에서 문화공동체 히응과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이 함께 만드는 이 과정이, 장애란 무엇인가 다시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도서는 배포하지 않으니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이나 문화공동체 히응으로 연락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판타지와 현실 사이 –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수업일지

우영우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복지관 수업을 가는 날, 오전에 회의가 있어 부랴부랴 점심을 먹고 서둘러 교실로 향했다.

학생들은 항상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린다. 셔틀버스를 타고 오기 때문이다. 이 교실에 모이는 발달장애청년들은 다수가 직업을 가지고 있다. 요양병원이나 학교에서 오전에 근무를 하고 복지관에서 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오전 내내 커피 내리는 연습을 하다가 온 이도 있다. 장애여부를 떠나 지금의 청년 누구나 취업이 어렵다. 취업을 하더라도 커리어나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곳에 들어가는 일도 쉽지 않다. 이 교실에 있는 청년들도 비슷하다.

교실에 문이 열린 것을 흘낏 보는데 저 안쪽에서 채은 씨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나는 안녕하세요! 손을 흔들고 화장실에 먼저 갔다.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슬미 씨를 복도에서 마주쳤다. 슬미 씨는 나를 보고 옷이 예쁘고 가방도 예쁘다고 해줬다. 오늘은 정말 대충 입고 갔는데도 칭찬이 후하다.

교실에 들어서자 다은 씨가 나를 재촉한다. 선생님 커피를 사놨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왔다고 말이다. 복지관 1층에는 이용자들이 직업훈련도 하고 취업도 하는 카페가 있다. 자폐인들 중 직업훈련이 가능한 사람들만 바리스타가 되거나 제과제빵 기술을 배운다. 우리는 이들을 엘리트라고 부른다. 자폐스펙트럼이라는 말처럼, 다들 다른 성향이 있는데 지적장애를 동반하지 않았거나, 경미한 경우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은 선별된 이들이다.

신발을 벗고 교실에 들어가니 홍찬 씨는 엎드려 있다. 홍찬 씨와 정훈 씨는 자폐이고 다른 이들은 지적장애가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렇다. 지적장애의 정도는 모두 다르다. 수업 시작 전까지 잠시 준비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엎드려 있던 홍찬 씨가 벌떡 일어나서 차렷 열중쉬어 차렷 선생님께 경례. 하면서 이하나. 선생님. 이라고 내 이름을 기억해줬다. 그리고 나와 눈도 맞췄다. 지난 4회동안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는데 오늘은 홍찬 씨가 정말로 내 눈을 보면서 말했다. 자폐인인 학생이 눈을 마주치고 내 이름을 기억해준다는 건 엄청난 일이라 정말 기분이 좋았다.

교실에는 두 명의 복지사 선생님이 항상 같이 들어온다. 보영 씨와 다은 씨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해서 선생님이 도와줘야 하고, 홍찬과 정훈은 스무고개처럼 질문 하나 하나씩 넘어가야 한다. 오늘은 교실안에 있는 친구를 인터뷰하고 소개하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소통이 잘 되는 짝꿍을 지어주고 서로 질문을 해보라고 했다. 다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질문했고 좋아하는 만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포켓몬스터가 압도적이었다. 홍찬 씨가 벼랑위의 포뇨를 좋아한다고 해서 아이패드를 열어 포뇨 노래를 틀며 화면을 보여주었다. 홍찬 씨가 눈을 한 번도 안 떼고 포뇨 영상을 열심히 보며 양 손을 위로 올려 반짝반짝 흔들었다. 정말 기분이 좋아보였다.

정훈 씨는 아무래도 소리에 예민한 것 같아서 수업 중에 음악을 틀 때 조심한다. 아직까지 거슬린다는 표시를 한 적은 없다. 여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2악장을 틀어주었는데 정훈 씨는 귀에 손을 댔다가 내려놓기도 해서 그 수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보영 씨는 게임에 몰입해 있다. 집에서도 게임을 하기 때문에 심심할 틈이 없다고 했다. 보영 씨가 포켓몬게임을 한다고 해서 혹시 포켓몬고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2017년부터 수집한 내 포켓몬고의 포켓몬들을 보여주었다. 보영 씨와 포켓몬고 친구를 맺었다. 나는 친구 맺는 법을 가르쳐 주고 다음 시간에 포켓몬도 교환하자고 했다. 보영 씨가 좋은지 계속해서 소리 내어 웃었다. 복지사 선생님들도 정말 좋아하는 거 같다고 했다.

수영선수인 지영 씨는 포켓몬고를 깔 줄 모른다고 했다. 다음 주에 같이 해보자고 얘기했다.

종열 씨는 갈수록 글쓰기 실력이 늘어간다. 혼자서 척척 써내려가는데 다음 문장에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힌트를 주면 완성된 문장을 하나씩 만들어낸다. 종열 씨는 요양병원에서 청소일을 한다.

교실 안에 있는 친구 소개를 마치고 지금은 만나지 않는 옛날 친구에 대해서 적어보자고 했더니 종열 씨가 한 친구에 대해서 적었는데 2018년 생애사쓰기에 참가했던 수영 씨 같았다. 나는 종열 씨에게 혹시 시 잘 쓰는 수영 씨를 말하는 건지 물었다. 안경 쓰고. 종열 씨가 맞다고 했다. 수영 씨는 감정이 풍부하고 슬픔이 가득차 있었다. 자주 울었는데 감정기복이 심해 약을 먹었고, 지적장애가 있었지만 모든 글을 운문으로 쓰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그때 수영씨에게 우리 복지관 최고 시인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수영 씨는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입을 막고 웃었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채은 씨도 내가 아는 이름을 적었다. 은혜언니가 보고 싶어요. 글씨도 동글동글 예쁘게 잘 쓰는 채은 씨는 정말 귀엽다. 오늘 나는 채은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채은 씨는 알고 있어요? 본인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채은 씨가 부끄러워하며 크게 웃었다. 나는 채은 씨에게 이 글을 선생님이 다른 곳에 가서 소개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채은 씨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고 했다. 채은 씨는 좋다고 해줬다.

슬미 씨는 오늘도 학교 다닐 때 자기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했던 친구에 대해서 적었다. 내가 채은 씨에게 글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걸 듣자 슬미 씨가 자기 노트를 가지고 와서 자기 것도 찍어서 소개해달라고 했다. 대신 실명은 빼달라고 했다. 슬미 씨는 맨 아래 “나는 이제 스물 아홉 살이다. 하지만 나이 먹는 것이 싫다!”라고 적었다. 나는 슬미 씨에게 “선생님은 내후년에 오십살 되는데 어떻게 하라고요.” 라고 농담을 걸었다. 슬미 씨가 “그래도 선생님은 정말 동안이십니다.”라고 대답해줬다. 껄껄껄.

정훈 씨는 내가 한 마디 물어볼 때마다 한 마디씩 대답했다. 종열 씨와 직업훈련을 같이 했는데 자기에겐 어려운 축구게임을 종열 씨가 잘 하더라는 기억을 말해줬다.

보영 씨는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해서 “오늘 새 게임친구가 생겼습니다. 친구의 이름은 이하나 선생님입니다.”라고 적어주었다.

쓴 글을 발표하는데 다들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 좋아하는 사람, 그리운 사람, 친구에게 사랑한다고들 적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홍찬 씨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해보자고 부탁했다. 홍찬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눈을 마주치며 차렷, 열중 쉬어, 경례를 했다. 홍찬 씨는 “이하나 선생님”이라고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다음 주에 야외 활동을 나간다는 공지사항을 들으며 나는 교실을 나왔다. 홍찬 씨가 내 이름을 기억해주고, 이름을 불러준 것이 감격스러워서, 오늘의 수업일지를 적는다.

오늘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하는 날이다.

*사진은 채은(가명) 씨에게 허락 받은 채은 씨의 글.

*참가자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안양시의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는 2018년, 2019년에 이어 다시 발달장애청년 생애사쓰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발달장애청년 생애사쓰기 네 번째 시간.

문장을 완성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극을 줄이고 더 가깝고 촘촘하게 이야기를 붙여내는 것도 쉽지 않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다.

떠오르는 낱말과 낱말 사이을 이어붙이는 일, 그렇게 해서 만든 하나의 문장과 그 다음의 문장을 연결짓는 일.

이미 세 번의 글쓰기 시간을 마쳤다. 학생들은 단어와 단어를 나열하고 그 사이에 조사를 넣거나 서술어로 끝맺으며 짧은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나는 그 사이에 부사를 넣었다. 질문을 다시 던지면 한 줄을 더 쓸 수 있었다.

오늘은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와, “내가 가장 슬펐을 때”에 대해서 적어보기로 했다. 수행능력이 높아서 한 시간동안 두 개의 주제로 서너줄짜리의 글을 쓸 수 있다.

행복했을 때를 쓸 때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눈앞에 뭐가 보였는지, 날씨는 어땠는지, 내 얼굴에 쏟아지는 빛은 어느 정도였는지, 어떤 소리가 들렸는지를 적어보게 했다. 모두들 질문에 답하는 형태로 하나씩 하나씩 글자를 눌러적었다.

행복한 기억을 발표한 뒤 슬펐을 때를 적어보자고 하자 수빈이(가명) 중학교때 자기를 놀렸던 남학생의 이름을 적고 나에게 물었다. 수빈은 지적장애가 있는데 잘 설명하면 하나씩 하나씩 잘 따라오는 학생이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선생님, 저 이런 얘기 써도 되요? 저 슬프게 한 아이요.”

“네. 써도 되죠.”

수빈은 중학교때, 고등학교때 자기를 괴롭힌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중학교 3학년때 누구, 고등학교 1학년때 누구, 고등학교 2학년때 누구. 아이들의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고1, 고2, 중2라고 적었다.

“얘는요! 입 튀어나왔다고 못생겼다고 했어요.” 그 얘기를 듣자 웃음이 터졌다. 나는 수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한국사람은 다 입이 튀어나와있어요. 수빈씨.”

“정말요?”

“그럼. 선생님도 입이 좀 나와있어요.”

“그리고 얘하고 얘는요. 나보고 춤춰보라고 하면서 막 웃었어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뒤통수가 싸늘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너희 나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라고 했어요.”

“잘했네요.”

“그리고 얘는요, 저한테요. ‘이 장애인새끼가!’ 라고 했어요.”

“헐. 그래서 수빈 씨는 뭐라고 그랬어요?”

“그냥 무시했어요.”

“잘 했어요.”

“얘는 장애인 아니거든요. 얘는 일반인이거든요.”

“수빈 씨. 일반인 아니고, 비장애인. 비장애인이라고 해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비장애인.”

“수빈 씨는 본인이 장애인이라고 생각해요?”

“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장애가 심하지 않거든요.”

“네 그래요. 장애인을 놀려서도 안되고 비장애인을 놀려서도 안되죠. 나쁜 아이들이네요.”

수빈 씨가 초중고등학교때 앨범찍어놓은 사진을 휴대폰에서 찾아 보여주면서 이 앨범들을 모두 다 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숨이 빨라지길래 같이 쉼호흡을 했다.

“예전에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서요. 아빠가 한의원에 데리고 갔는데요. 한의사 선생님이 숨을 쉬라고 했어요. 쉼호흡하라고.”

“네 좋은 방법이예요.”

수빈은 학창시절 자기를 괴롭힌 아이들 이름을 모두 적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하나씩 다 적었다. 나는 수빈씨에게 앞으로도 화가 나면 글로 적어보라고 권했다.

이어서 각자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발표했다. 학생들은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한다, 게임을 한다, 밥을 먹는다, 잠을 잔다, 메니큐어를 바른다, 치킨을 먹는다, 꽃에 물을 준다, 쉼호흡을 한다라고 적었다. 물건을 던지거나 술을 마시거나 소리를 지른다고 적은 사람은 없었다. 장애인으로 분류되어 살아가는 청년들은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행동교정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술을 마시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욕을 하는 건 아무도 가르치지 않으니까.

국가가 장애를 분류하고 구분짓고 선을 그어두었다면 그에 대한 차별도 장애등급 심사만큼이나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2018년, 2019년에 걸쳐 진행한 발달장애청년생애사쓰기 수업을 코로나2년 휴식 이후에 재개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초대해 준 수리복지관관계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강좌]발달장애청년 생애사쓰기

안양시 수리장애인복지관의 이용자 중 발달장애 청년들의 생애사쓰기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2018년과 2019년, 2년 간 발달장애 청년들의 마음을 함께 읽어보았는데요, 코로나로 2년간 쉬었네요.

복지관에서 다시 프로그램을 준비해 오늘부터 12번 함께 만나 청년들의 삶을 글로 써볼 겁니다.

이번에 참여하는 청년들은 재능이 많아요. 수영선수, 볼링선수도 있고 바리스타도 있습니다. 직업훈련을 마치고 이미 일을 하고 있는 청년들도 있고요.

오늘은 첫 수업이라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기 소개와 자랑거리를 나누었어요.

각자 자기 얼굴을 그려보고 앞으로 재미나게 글쓰기 수업 하자는 의미로 서로 하트를 그려주거나 응원의 메시지도 전달해봤습니다.

저도 참가자들과 함께 자화상을 그려봤네요.

열 두번의 만남을 통해 어떤 마음속 보물을 찾게될지 기대됩니다.

동화로 쓰는 생애사 – 9월 4일의 기록

“나 고등학교 때” + 화난 얼굴 행복한 얼굴
수업 10분전, 대부분의 학우들은 그 정도 시간에 들어온다. 담당 복지사도 10분 전에 와서 오늘 결석자를 알려준다. 복지사 선생님과 한 청년이 같이 들어왔다. 건강하고 잘 생긴 청년이다. 자원봉사 선생님이라고 복지사샘이 알려주니 갑자기 교실에 환호성이 터졌다. 20대로 보이는 청년이 쑥스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상민 씨가 일어나서 자기 소개를 하고 싶다고 했다. 편한대로 해도 된댔더니 춤으로 자기 소개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서 승민 씨가 원하는 노래를 틀어줬다. 씨스타의 Ma Boy라는 노래였다. 승민 씨의 춤은 동작이 조밀하지 않다. 전체적인 동작을 크게 확장하여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데 미세한 움직임은 잘 표현하지 못해도 충분히 흥이 났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 오히려 육감적인 동작을 표현하지 않아서 보는 나도 덜 쑥스러웠다. 승민 씨가 춤을 추고 나자 수정 씨도 춤으로 자기 소개를 하겠다고 나섰다. 수영 씨가 자기 노래를 부르고, 채영 씨는 어린이 찬양인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라는 노래를 불렀다. 혜은 씨는 다들 노래를 한 소절씩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혜은 씨도 노래 하겠냐고 물었더니 가스펠 곡 하나를 골라서 말해주었다. 나는 유투브와 음악 스트리밍 앱을 번갈아 열어가며 노래를 틀었다.
수영 씨가 작곡한 곡중에 “봄바람”이라는 곡이 있는데 나는 이 곡이 참 좋다. 재능 있는 누군가 수영 씨의 곡을 유명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그게 또 좋은 일일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여기 저기 알려보고 있다.
새로 온 자원봉사 청년에게 자기 소개를 하겠다는 의미는 채영 씨 차례에서 무색해졌다. 누군가를 위한 소개가 아니라 장기자랑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면 어떤가. 글 쓰기 시간이라고 글만 써야 하는 건 아니다. 노래도 괜찮고 그림도 괜찮다. 울고 웃으며 수다를 떨며 한 시간을 보내도 상관없다. 생애사 쓰기의 의미를 나는 자기 표현하기라고 본다.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글쓰기로 넘어가기 위해선 마음의 고갱이를 깊이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여러 명이 같이 한다면 서로를 표현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학우들이 춤으로 노래로 자기 표현을 하는 걸 보니 흐뭇했다.
지난 주에 썼던 글은 중학교때 이야기, 오늘은 고등학교때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다른 생애사쓰기는 생애주기별로 하나씩 훑어 나가지만 여기는 이야기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게 약간 어려워서 단편적으로 끊어서 진행한다. 옛 기억을 꺼내는 것에 능숙하지 못한 면이 있다. 비장애인들이나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자기 기억을 재구성해 이미 스토리로 만들어 머릿속에 저장해둔다. 수시로 그 에피소드를 꺼내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주목을 끄는데 익숙하다. 인터뷰를 많이 해 본 사람들이 가진 특성이 이런 것인데 자기 서사가 확실해 오히려 그 안에서 한계가 생기는 경우다. 여기서 한 얘기를 다른 데 가서도 하기 때문에 우물처럼 고여버린 서사가 있다. 그 틀을 깨는 질문을 던지면 당황하고 그럴 때 자기 세계의 균열이 일어나는데 어떤 이들은 균열을 두려워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진지하게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한 고민을 하기도 한다.
자폐와 지적장애의 특성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어렵지만 여기도 분명 자기 서사가 있다. 고정된 서사를 깨는데 비장애보다 어려운 면이 있다. 자폐가 있는 학우들은 자기 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고 내가 그 틀을 깨려고 망치를 들고 덤빌 일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흐름을 타는 정도면 충분하다. 수영 씨가 바로 그런 케이스인데 평소에 해보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최선규 아나운서나 90살이 되어도 더 멋진 노래를 만들거에요, 최선규 아나운서와 듀엣을 할거예요. 라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이다. 은혜 씨는 수현 씨와 다른 서사를 보이는데 은혜 씨의 서사는 다 독립적이다. 본인이 겪었던 불쾌한 정서가 모든 서사를 관통한다. 반짝이는 흰 바지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
학우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혜은 씨도 비슷하다. 각자 일종의 테마를 가진 셈인데 혜은 씨는 “기분이 좋아 방긋방긋 웃어.”, “기분이 안 좋아 아침에 울었어.”가 자신의 테마다. 매번 이 문장이 들어가고 아마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다고 추측할 뿐이다. 혜은 씨에게는 불안이 느껴진다. 세상만물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움직이는 것에 대한 불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모든 것들이 쉴 새없이 변화한다는 것은.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나 역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건 아닐까. 작동하기 위해서. 지구가 뱅글뱅글 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인간은 불안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기현 씨는 자원봉사선생님이 딱 붙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어나가게 도우니 긴 글을 쓸 수 있었다. 계속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그랬냐고 추궁하는 것이 아니고.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사회복지학과 전공학생이거나 자원봉사를 오래 해 본 청년들인데 숙달된 경험이 있어서 나도 많이 배운다. 자원봉사자들도 사실 글쓰기 교육이 필요한 경우가 보이긴 하지만, 타인의 마음의 문을 열어 열쇠 하나씩 꺼내는 것 같은 작업은 능숙하게 잘 해낸다. 비장애인 생애사 쓰기에도 이런 역할을 서로 해 보는 게 괜찮을 것 같다.
승민 씨는 요즘 모든 글의 마무리에 “사랑해”를 넣는다. 친구들아 사랑해, 동진아 사랑해, 우리 좋은 친구 되자, 은혜언니 사랑해. 사랑이 넘치는 승민 씨는 오늘도 열심히 글을 쓰려고 최선을 다한다.
수정 씨가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좋아한다고 적었다. 청년들이 왜 내 시대의 대중문화를 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부모님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부모님들은 아마 나보다 10살 정도 많을텐데, 수영 씨만 해도 홍학표, 장철웅, 최선규 아나운서를 말하고 혜은 씨는 자꾸 김병세 이야기를 한다. 지금도 활동하는 연예인과 방송인들이지만 9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이들이다. 어디서 봤냐고 물으면 TV에서 봤다고 대답을 하는데 누군가 90년대 취향을 가진 사람이 집안에서 TV를 틀어놨을 것이고 어릴 때부터 그 문화에 익숙하게 파고들었다는 이야기다. 지금 시대의 대중문화는 아이돌 음악에 집중되어 있다. 또래의 비장애인에 비해 20년전 대중문화에 모두 익숙해져 있는 게 특이하다. 나는 기억하는 이들이지만 20대 후반의 미술선생님은 잘 모를 이야기들인데 스물 네 살의 수 씨가 탤런트 홍학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웃음이 나올 뿐.
이날은 지난 주에 이어서 얼굴 그리기의 채색을 했다. 얼굴을 그려서 종이에 반절만 붙인다. 떨어져 있는 종이를 넘기면 얼굴이 두 개가 되는데 기분 좋을 때의 내 표정과 기분 나쁠 때의 내 표정을 그리고 색으로 표현했다. 은혜 씨는 기차와 전철을 탈 때 행복했다는 걸 표현하며 행복하면 얼굴이 초록색이 되고 화가 나면 주황색이 된다고 했다. 신종인플루엔자 주사를 맞을 때 기분이 나빴다고 하는데 지난 주에도 신종인플루엔자 주사 얘기를 했다. 무척 아팠던 모양이다. 수영 씨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그렸는데 “컵라면만 먹고 싸우고” 라는 말을 했다. 중고등학교때 음악학원 다닐 때 이야기인 것 같은데 학원에서 받은 교육이 좀 혹독했던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음악교육을 받다가 고등학교 졸업때쯤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정 씨는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했는데 “미안하구나 얘야.”라는 할머니의 말을 말풍선에 그려 넣었다. 자기 얼굴에는 “할머니 가지마”라는 말을 적었다. 20대 쯤 되면 대부분 아무리 슬펐던 일이라도 자기 검열에 걸려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정 씨는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감정을 잘 표현한다.
승민 씨는 화가 나면 초록색, 칭찬을 받으면 하늘색이 된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반장이 뭐라고 했던 걸 기억해서 말했는데 행복한 건 “선”, 불쾌한 건 “악”이라고 말했다. 이분법과 대립은 가장 쉬운 학습법이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혜은 씨는 화나면 보라색이 되고 기분이 좋으면 연두색인데, 연두색은 메로나 색깔이다. 혜은 씨는 대부분의 그림에 메로나 색깔인 연두색을 주로 칠한다. 화가 난 얼굴에 보라색을 칠하고 “엄마 혼나” 라고 적었다. 혜은 씨는 조사를 많이 쓰지 않는다.
채영 씨는 기분이 좋으면 살색, 화가 나면 까만색. 기현 씨는 재밌으면 살색, 화가 나면 파란 색이 된다. AOA에 초아가 탈퇴해서 이제 AOA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발달장애인들이 파란 색에 집착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그 역시도 낭설인 것 같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낭설이 있나.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쉽게 일반론을 찾아내려고 한다. 다양성을 이해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어떤 규칙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사실을 구겨넣으려는 이분법적 사고는 세상을 편협하게 만든다. 자폐는 세상밖으로 나가기 어렵고 자기만의 세상에 산다고들 말한다. 과연 자폐자만 그럴까. 비장애라는 사람들 중에 자폐보다 더 편협하고 더 좁은 자기 만의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2018년 9월 4일의 기록

동화로 쓰는 생애사 – 9월 11일의 기록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발달장애인 생애사쓰기 교실의 수업기록

수업기록이 많이 밀려서 오늘의 이야기부터 써보려고 한다.chaeliminhye

내일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쓸 수 있겠지.

어제 저녁 미술샘에게 문자가 왔는데 일찍부터 자느라고 통화를 못했다. 내일은 사물에 대한 걸 이야기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연락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것, 여행 간 이야기, 올 여름, 비가 올 때 어떨까, 여러 가지 주제로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해봤다. 초등학교 때 이야기, 중학교 때 이야기까지. 화가 났을 때 표정과 기분이 좋을 때 표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아무래도 이 생애사쓰기는 연속성이라기 보단 단편들이 이어지는 편이다.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학우들에 따라 모든 것이 많이 다르다.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점점 감정의 층위를 들어내기도 한다. 변화가 없을 것 같다가도 큰 변화를 나타내기도 해서 나도 매번 고민이다.

단조로운 수업으로 진행을 할 수 밖에 없는 게 내 편견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굳이 어려운 것을 시도해 실패의 경험을 줄 필요 있나. 잘 한다고 칭찬만 해주고 싶은 사람들이다.

예전에도 한 번 적었겠지만, 발달장애인들은 여섯 살무렵부터 꾸지람을 주로 듣고 산다. 하지 마, 안 돼, 거기 가면 안 돼, 조용히 해, 여기서 떠드는 거 아니야, 여기서 그러면 안돼, 그건 하지 말아야 해. 끊임없는 금지와 억압. 대부분 이 행동교정은 지도사와 가족에게서 온다. 기본 질서를 지키기 바라는 마음, 깊이 이해한다. 그 행동을 그대로 두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놀라는 일까지 생기면, 상황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으니까.

몇 명이 일찍 와 있고 서너명이 나중에 같이 들어왔다. 주로 복지관 셔틀을 이용하기 때문에 학우들이 도착하는 시간은 엇비슷하다. 재민 씨가 이 주째 나오지 않았다. 언어전달이 안되는 재석 씨에게 이 시간이 재미가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지난 주부터 자리를 같이 한 청년 자원봉사자가 들어오자 기현 씨와 동욱 씨가 호감을 나타냈다. 기현 씨는 자원봉사 청년의 팔에 있는 헤나 레터링을 보고 “문신이다.”라고 말했다. 자원봉사자가 문신은 아니고 몇 달 있다가 지워지는 레터링이라고 말했다. 청년은 나에게 이런 저런 말을 건넸고 나는 그에게 뭔가를 물어야 할 시점이라 느꼈다. 어쩌다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는지, 지금 학생인지, 사회복지쪽에 관심이 많은 지, 짧은 질문을 몇 개 하고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주에 있었던 일 때문에 청년이 무척 재미있었던 것 같다.

(지난 주에 이 청년이 등장하자 갑자기 여학우들이 장기자랑을 하겠다고 나서서 20분간 돌아가며 춤추고 노래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라이너스의 담요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스누피를 아는 학우도 있고 모르는 학우들도 있었다. 나는 라이너스가 늘 담요를 가지고 다니며 슬프거나 우울할 때 담요를 꼭 쥐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모양이라 하며 학우들에게도 그런 물건이 있는지 물었다. 동선은 기타를, 수영은 기타와 A4용지, 수정은 우쿨렐레, 채영은 곰인형, 승민은 부채, 기현은 가수들의 앨범을 말했다. 은혜 씨는 대답도 하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빛나는 흰색 말 인형과 검은 말 인형에 대해서 적고 있었다. 은혜 씨가 몇 주째 말수가 부쩍 줄었다. 어딘가 모를 우울감이나 압박감이 느껴진다. 그게 볼 때마다 마음이 쓰인다. 자폐와 지적장애를 같이 동반한 혜은 씨는 좋아하는 물건, 에 대해서 써볼 건데 혜은 씨는 소중한 물건이 있냐고 묻자 “기분이 좋아서.”라고 대답했다. “기분이 좋아서.”는 혜은 씨가 자주 하는 말이다. “기분이 좋아서 방긋 방긋 웃어.”

, “기분이 안 좋아. 혜은이 울어.”라고, 자폐의 특성이라고 하는 같은 말 반복의 몇 가지 대사다. 혜은 씨는 내가 “성경책 좋아해요?” 물었더니 “어, 성경책 좋아. 예배갈 때, 성경책, 가져가.”라고 대답하더니 연필을 쥐고 성경책. 이라고 적었다.

채영과 승민, 수정 씨 세 명은 서로 농담도 하고 웃고 장난을 잘 친다. 말하자면 셋이 소녀들의 그룹같은 걸 형성하고 있는데 같은 수업에 들어오는 수영 씨와 은혜, 혜은 씨와는 조금 다르다. 채영, 승민, 수정 세 명은 지적 장애고 수영, 은혜, 혜은은 자폐다. 나는 점점, 지적장애, 에 장애라는 말을 붙이는 것과, 자폐에 증상을 말하는 “증”을 붙이는 일이 쉽지 않다. 지적장애는 한 단어처럼 들려서 사는 데 불편함이 있다, 고 들리지만 자폐를 자폐증, 이라고 말하면 어떤 병명처럼 들리는 것이다. 병이란 무엇이고, 장애란 무엇인지, 자꾸 그 말에 걸려 넘어진다. 자폐증, 이라고 하면 이어지는 단어에 ‘환자’를 붙여야 할 것만 같아서, 그런 말이 익숙해서 그게 껄끄러운 것이다. 지적장애 세 학우가 서로 대화가 잘 되는 것은 서로 의사소통이 자유롭고 상대방의 기분과 의사를 읽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고도로 지능적인 사람이 악의적인 장난을 친다면 난감해 할 것은 분명하다. 고기능으로 장난을 친다는 것은 투명하지 않다는 말인데 이들의 언어와 행동은 상당히 투명하고 읽어내기 쉽다. 배배 꼬아 말을 하거나 애둘러 말하는 것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거나 아예 읽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대신 직감으로 알겠지만 그에 대한 확신을 갖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학자들이 뭐라고 그 원인을 파악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경험치라고 생각한다. 많이 겪어보지 않으면 익숙해지지 않는다. 고등학교까지 장애와 비장애가 함께 공부하는 곳을 다녔지만 모두들 학원 가고 놀러다닐 때 이들은 조금 뒤에 물러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고 친구들과 어울려 멀리 놀러나가지 못했다. 비장애인들도 마찬가지다. 장애인들을 접촉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영원히 낯선 존재로 남을 수도 있다.

점점 글 쓰는 속도가 빨라진다. 아예 주제를 뭐로 정할 건지 설명을 하는 와중에 써내려가는 학우도 있다. 이제 수업이 네 번 더 남았다. 10월 말이 되면 끝난다. 무척 서운할 것이다. 화요일 오전은 나에게 더없이 평화로운 시간이다. 그렇다고 내가 주제만 던져주고 노는 건 아니다. 학우들은 옆에서 질문을 보태주면 바로 다른 대답을 해준다. 이들과의 글쓰기는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일이다. 내가 다음에 뭘 쓰면 좋을지 말하지 않고 앞에 쓴 글에 대해서 질문에 질문을 보탠다. 그러면 풍성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열 명쯤 되는 학우들이다 보니 일일이 다 못 챙기는 게 안타까울 뿐. 기현 씨는 자원봉사 청년이 옆에 앉아 있으니 글이 계속 길어지고 있었다. 혜은 씨도 계속해서 질문을 하면 이야기를 더 해 나갈 수 있다. 오늘은 고무찰흙과 색연필, 크레파스도 좋아한다고 적었다.

지금 이 수업처럼, 아홉 명의 발달장애인과 그만큼의 비장애인이 같이 안전한 시설 안에서 같이 이야기하고 놀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때,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누구도 이들을 피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면 사는 게 그닥 어렵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미술 선생님이 학우들과 수업을 할 때마다 어떤 몽상에 빠진다. 이 교실만큼은 더없이 평화로운데, 이 문을 열고 나가면 각자의 전쟁터가 시작된다. 복지사는 행정감사를 준비하고 서류를 꾸미고 이용자들의 민원을 받아내야 하고 나는 이런 저런 업무 처리를 해야 하고 다른 강의와 글을 쓰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자꾸 뭘 흘리고 놓치며, 미술 선생님은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른 동네까지 가서 수업을 하고 대학원 논문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 수업을 같이 한 발달장애청년들은 더러 길을 걸을 때 고개를 숙이거나 누군가에게 아무 잘못 없이 욕을 먹기도 하며, 이들을 유혹하는 온전한 악을 잘 피해 다녀야 한다. 하늘이 맑았다. 채영 씨의 곰인형이 너무 귀엽고, 자꾸 “김병세 세수해”라고 말하는 혜은 씨가 생각나서 웃음이 나다가 은혜 씨의 글과 다른 그림이 마음에 남았다. 얼굴이 검은 쥐와 뱀을 그렸다. 그룹홈에서 나와 집에서 다닌다고 했다. 은혜 씨에게 집은 어떤 곳일까. 은혜 씨가 글을 더 많이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빛나는 흰 바지를 입고.

2018년 9월 11일의 기록

 

동화로 쓰는 생애사 – 아홉번 째 이야기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 동화로 쓰는 생애사
9번째 수업 (7월 24일분)
지난 주의 “자기소개하기”에 이어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을 적어보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생애사쓰기에 들어가는 셈인데, 자기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먼저 꺼내고 참가자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아팠던 기억과 그 것들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을 해보고 난 다음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빛나던 순간, 내가 정말 대단한 주인공이 되었던 경험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세 가지로 나눠놨지만 사실 한 가지 주제다. 가장 잘 하는 것을 했을 때, 그리고 타인의 주목을 받거나 칭찬을 받았을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생애사쓰기는 대부분 연대기적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섣부르게 연대기적 기술을 하다 보면 특정한 한 시점에 얽매이는 경우도 있고 나이가 많거나 기억력이 첨예한 사람은 시작자체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글쓰기 능력에 따라 이야기를 분할해서 적어보는 게 좋다. 이건 수업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몇 회기 내에 끝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기획한 수업은 여유있게 내면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자기 기억을 전반적으로 꺼내본 다음엔 순차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다. 이들은 지금 모두 20대니까, 초등학교때, 중학교때, 고등학교때 이야기를 하나씩 나눠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억이 세밀하지 않을 수도 있고 자폐 성향으로 이미 했던 이야기들을 반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과정이 끝나고 참가자들이 조금 단단해지면 내가 가장 화났을 때나 슬펐을 때를 얘기할텐데 이 학우들은 자기가 스트레스 상황에 처했을 때의 매뉴얼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 부분도 같이 적어봐야겠다고 계획하고 있다.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했다. 지난 주 수업이 끝난 뒤 미술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금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을 해보고 싶은데 하루에 글쓰기와 그림을 나눠서 하기에 무리일 거 같다며 하루는 글쓰기만 하고 그 다음 주에 미술수업만 집중하는 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당연히 좋다고 대답했다. 미술 선생님은 똑같은 기법으로 그리는 것보다 점점 다양한 방법들을 끌어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물론 나도 다양한 기법의 글쓰기를 해보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진행이 안 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고, 시점이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이야기를 과거의 이야기처럼 하거나 과거의 이야기 중에 오늘 머릿속에 박힌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화법을 구사하기 때문에 릴레이 글쓰기나 이론적인 수업을 하기가 어렵다. 쉽게 말해 이 학우들은 꽂히는 것에 집중하는 성향이 강해서 그날 그 주간에 무엇에 꽂혀 있느냐가 이야기의 중점이 된다. 주제를 정했을 때 쉽게 받아들이는 것만 어려울 수 있는데 아무래도 글쓰기가 주는 엄숙함과 강박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시간이 여유있었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잘 하는 것을 써보자고 했는데 뚜렷한 특기가 있고 없고를 떠나 모두들 자기가 잘 하는 것을 금방 찾아 써냈다. 각자 쓴 내용이 참으로 멋졌다. 수영씨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작곡도 하는데 나에게 들려주는 노래가 상당히 멋졌다. 내가 유명한 음악프로듀서를 찾아서 곡을 보내보면 어떻겠느냐 물었더니 좋다고 했다. 유명해지면 악플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하죠? 라고 물으니 그렇다면 유명해지는 건 싫다고 완강하게 대답했다. 노래가 정말 좋다. 아깝다. 이 노래를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기현 씨는 예의 그렇듯 한 문장씩 물어가며 썼다. 혜은 씨는 설거지를 잘한다고 적었고 채영 씨는 춤을 잘 춘다고 적었다. 감성적인 글을 잘 쓰는 수정 씨가 좋은 글을 썼길래 시를 잘 쓰는 법에 대해서 적어달라고 했더니 귀감이 될 만한 글을 적어주었다. 승민 씨는 며칠 전 복지관을 찾아온 인디영화에 출연했다고 한다. 무용도 오래 했는데 연기에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은혜 씨는 자기가 만들 줄 아는 빵의 이름을 나열했다. 자기가 잘 하는 것을 다 쓴 뒤에 천천히 일어나 한 명씩 돌아가며 읽었다.
글을 다 읽은 후에는 앞에 앉아 있는 친구를 응원하는 편지를 썼다. 상대방의 칭찬할 점을 적고 응원메세지를 적어보자고 하자 모두들 묻지도 않고 능숙하게 잘 적었다. 평소 글쓰기를 전체적으로 구성하지 않고 나열하는 형태로 쓰던 혜은 씨가 재대로 된 편지를 적었고, 나에게 일일이 문장을 묻던 기현 씨도 쓱쓱 편지를 적어내려갔다.
그 다음 주에 있었던 그림 수업에 나는 참석하지 못했고 담당 복지사 선생님이 결과물 사진을 보여줬다. 자기가 잘하는 것에 연관된 사물을 그려 붙이고 관절이 움직이는 종이인형을 만든 모양이다. 다들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씩 있으니 참 좋다. 학우들의 오늘은 오랜 교육과 훈련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봤다. 이들이 받는 교육 중에 비장애인에게도 필요한 교육이 많다. 자기 재능을 살리는 일, 화가 났을 때 대처하는 법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자주, 비장애인들이 장애등급이 없다는 이유로 너무 오만하게 자기 삶을 대한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에게는 과도하게 많은 규칙들을 요구하고 비장애인들은 그 많은 규칙들을 깨버린다.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세상의 기준은 어디에서 왔을까. 임금노동이 가능한가에서 왔나? 한 사람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그것들을 구분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는 인간의 활용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인간을 이용하겠다는 또 다른 인간세력에 의해, 우리는 생산을 강요받고 노동을 유지하는 부품으로 살아가게 된 것일까. 이 생각도 편견일지 모르겠다.
두 주 동안 이 수업은 쉰다. 2주간의 방학이다.
다음 수업은 8월 14일에 있다.
이 뜨거운 여름을 다들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궁금하다. 모두들 시원한 곳에서 잘 견디고 있길.
7월 24일의 수업 내용을 밀리고 밀려 8월 5일에 적다.

동화로 쓰는 생애사 – 여덟번 째 이야기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여덟 번 째 수업 – 나를 소개해요

 

생애사쓰기는 흐름과 단계가 있다.

혼자 하는 생애사 쓰기는 위험이 더 높다. 여럿이 하는 생애사쓰기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살면서 사람들은 많은 감정들을 억누른다. 그런 것들이 쌓여 돌이 되고 바위도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앞에 가로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까. 생애사쓰기를 하겠다고 도전하는 건 그 바위 앞에 직면하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실체를 잘 모르고 접근한다.

많은 강좌를 깊숙이 진행할 수 없는 것은, 각자의 마음에 놓인 바위를 강사 한 명이 어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자의 몫인데, 때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도움도 적당한 때를 맞추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어떤 바위는 너무 거대해서, 친구나 지인이나 글쓰기 강사의 도움으로 안될 때도 있다. 좀 더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자아와, 정신과 전문의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여러 명이 모인 강좌에서는 섣불리 참가자의 삶을 건드리면 안된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하는 생애사쓰기는 더 위험할 수 있다. 만약에 타인들이 당신에게 “험난하게 살아왔다”라고 말한다면 절대로 혼자서 자기 삶을 돌아보면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마치, 돌아보면 돌이 되리라, 소금기둥이 되리라는 말처럼. 어쩌면 그 말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이 무너져 버린다는 비유는 아니었을까.

이 생애사쓰기 수업은 발달장애인이라는 특수성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하는가 고민한다. 그 특수성은 단지 조금 느리다는 것 뿐이다. 사람들은 쉽게 발달장애인은 어린 아이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모든 발달장애인이 그렇지 않다는 걸, 이 작은 그룹 안에서도 명확히 확인했다. 수영씨는 아무리 봐도 지능이 상당히 높을 것이다. 동선씨도 지능이 낮아보이지 않는다.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사람과의 교류에 능숙하지 못하고 처세에 밝지 못하다는 것인데, 그 사회성이란 대체 뭘 말하는가? 타인의 감정을 바로 읽어내고 혹은 미리 예측해서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말을 하고 상대방이 좋아할 행동을 준비해서 실행하고 나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생각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자기 의견을 내거나 감추거나, 뭐 그런 행위들을 말하는 거 아닌가?

이 그룹에서 일어나는 처세는 좀 다르다.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려고 고의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단지 자기 감정에 조금 더 충실하고 절제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평화롭게 느껴진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특강수업도 나간다. 초등학교의 경우 많을 때는 1개 학기에 40시간 이상일 때도 있는데, 초등학교마다 아이들의 특색이 있다. 쉽게 말해 눈치가 빤한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은 강사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강사가 원하는 대답을 아이들이 미리 유추해서 준비하고 대답하면서 그 몇 초간에 일어나는 경쟁이 불꽃튀게 치열하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는 대부분 성적이 좋거나 부유한 아이들이 많다. 나는 이런 아이들을 “정제된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그 반면 부유층이 적고 성적 성취도가 대단히 높지 않은 학교는 경쟁하려는 욕구가 조금 떨어진다. 이런 반이 오히려 아이들의 공동작업에서 창의적인 대답들이 많이 나온다.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고 모르겠는 걸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은 모르는 걸 감추려고 애쓴다.

복지관의 이 반에서 감추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수치심, 죄책감, 자기의 눈치없는 행동들을 모두 알고 있다. 단지 경쟁하지 않을 뿐이다. 질투나 시기는 있지만 그 강도가 세지 않아 귀여워 보인다. 누군가의 입을 틀어막고 나를 인정받기 위해 손을 높이 드는, 그런 경쟁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이 그룹에서 바로미터로 삼는 것은 모든 참가자들이지만 그 중에 은혜 씨와 기현 씨의 변화를 가장 눈 여겨 보고 있다. 은혜 씨는 자신의 상처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고, 기현 씨는 자기 주도적인 문장을 하나씩 끼워 넣기 시작했다.

생애사쓰기의 단계는 대체적으로 이러했다. 처음엔 좋고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려서 쓰고 발표한다. 서로 먼저 좋은 면들을 드러낸다. 그래야 상호간의 신뢰가 생기고 긍정적인 연대의식이 움트기 시작한다. 그 단계가 지나면 1/3 정도 되는 지점에서 조금씩 서로 상처를 노출하기 시작한다. 이건 강사가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 꺼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억울했던 기억과 힘들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타인과 부딪히며 각자의 기억을 공유하기 시작하면 타인과 나의 공통점과 다른 점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글을 들으면서 자기 기억을 비교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과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지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거나, 허언증에 가까운 거짓말로 자기 정체성을 감추는 사람은 끝까지 그 작전을 고수하게 된다. 그런 참가자는 그런대로 내버려 둬도 무관하다. 강사입장에서는, 다 알 수밖에 없다. 글쓰기로 강사를 속일만큼 능수능란한 거짓말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건 글쓰기의 힘일지도 모른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드러나는 요소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기 마련이다.

서로 상처를 드러내는 순간이 오면 어느 이야기에나 있는 절정부분이 나타난다. 6회기를 넘어가는 수업은 대부분 기승전결이 있는데, 이 드라마틱한 부분을 만나려면 계절을 두 개 정도 같이 넘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 누군가가 써온 걸 읽다가 울고, 그걸 듣고 또 누군가 울고, 그날은 자기 얘기를 숨기고 있다가 집에 가서 혼자 몰래 쓰고는, 강사에게만 가져온다. 발표는 못 하겠다며. 그렇게 하나씩 자기의 비밀을 나에게 고백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타인의 힘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렵지 않다. 내가 만일 타인의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 것을 힘겨워 하는 인간이었다면 이 일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정이입을 못해서 그런 건 아닌데, 그저 나는 그런 것들이 다 견딜만 하다.

그래서, 누군가 상처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신호다.

나는 이제 이 교실에서 처음부터 다시 생애사쓰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첫 회기에 나의 기억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소개하는 일이 가장 앞서야 할 것 같지만 대부분의 생애사쓰기 수업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글쓰기는 결국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 나 자신에 대한 소개는 애써 앞서 할 필요는 없다. 만일 조금 더 글쓰기에 능숙한 이들이거나, 자기 성찰을 해 본 경험자들이 모였다면 시작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써보고 맨 마지막에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써서 비교해보면 될 것이지만.

그 외 글쓰기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든가, “내가 가장 잘났을 때”등 좋은 기억을 먼저 공유하는 게 쉽다.

7월 10일, 여덟 번째 수업은 그래서 자기 소개하기를 주제로 정했다. 이날 나오는 글의 소재들을 가지고 다음 단계를 하나씩 확장시켜 나가면 된다.

학우들에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여러 가지 소재들을 나열해보자고 권했다. 나는 어떻게 생겼고, 나의 성격은 어떤 편이고, 나는 뭘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며, 나의 습관은 어떤 게 있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내 소원은 무엇인가.

학우들은 이미 음식에 대한 글을 써봤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 습관, 싫어하는 타인의 행동, 등에 대해서 적었다. 그리고 대부분 절반이상을 자기의 꿈과 미래의 직업에 대해서 적었다.

수영 씨는 노래를 만드는데 늙을 때까지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했고, 역시 최선규아나운서와 콘서트를 하고 싶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수정 씨는 어린이집 선생님이나 꽃집 주인이 되고 싶다고 했으며, 기현 씨는 나에게 확인하지 않고 나중에 바리스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적었다. 채영 씨는 피아노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고, 은혜 씨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승민 씨는 보컬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고, 동선 씨는 바리스타가 되어 해외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혜은 씨만 자기 꿈을 적지 않았는데, 혜은 씨는 늘 근접한 과거와 현재만 왔다갔다 하는 것 같다.

학우들의 글과 그림을 여러 번 다시 봤다. 아무도 “나는 장애인입니다.”라고 적지 않았다. 단 한명도, “나는 자폐인입니다.”라거나, “나는 지적장애인입니다.”라고 적지 않았다. 모두들,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자신의 꿈을 적었을 뿐이다.

2018년 7월 10일의 기록

 

 

 

 

 

 

동화로 쓰는 생애사 – 일곱 번째 이야기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일곱 번 째 수업 – 비 오는 날의 추억

 

비가 올 줄 알았는데 맑게 개인 아침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먼 바다의 태풍이 오키나와 근처에 머무르며 전국에 비를 뿌렸다. 폭우가 그친 하늘은 푸르렀고, 오랜만에 공기도 맑았다.

20분 먼저 도착했더니 아무도 없었다. 내가 일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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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교실에 1등으로 도착하면 느꼈던 쾌감이 기억났다. 누가 제일 먼저 오나 지켜봐야겠다는 장난기 서린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에어컨이 켜져 있었다. 담당선생님이 이미 왔다 간 모양이다.

책상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다이어리를 꺼내는데 승민 씨와 동선 씨가 같이 들어왔다. 사무실에 들러 오늘 쓸 재료를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승민 씨는 키위주스 같은 걸 손에 들고 있었고 동선 씨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테이프 커팅기를 가져 왔다. 나는 “오.. 둘이 같이 오는 건가요…” 하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둘은 쑥스럽게 웃었다. 승민 씨가 에어컨을 켜뒀으니 문을 닫아야 한다며 문을 닫았다. 승민 씨가 교실 밖으로 왔다갔다 하는 사이 동선 씨가 말을 시작했다.

“저한테 관심을 보이는 친구들이 많아서요. 조금 불편할 때가 있어요.”

“아 그런가요? 어떤 친구들이예요? 동선 씨가 인기 짱인가봐요.”

동선 씨가 수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수정이 누나가 문자를 자꾸 보내는데요. 자기 화난 거 속상한 거 막 저한테 너무 많이 얘기해서 좀 피곤해요. 그리고 자기 얘기 안 들어주고 편 들어주지 않으면 저한테 막 화를 내서요. 부딪힘이 있어요.”

“아, 그렇군요. 수정 씨가 동선 씨를 좋아하나봐요. 승민 씨는 어때요?”

동선 씨가 웃으며 “승민이는 괜찮아요. 저를 잘 챙겨줘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뭔가 장난을 더 치고 싶었지만 웃으며 들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웃음이 절로 났다. 청춘 아닌가. 좋아한다는 건 여러 가지 관계의 가능성이 있으니까, 굳이 더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동선 씨가 나에게 얘기를 술술 해 주는 게 재미났다.

나는 동선 씨와 승민 씨에게 커피 한 잔을 갖다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한 번 부탁해보고 싶었다. 학우들이 직접 만든 커피는 아니더라도 일부러 얻어먹어보고 싶었다. 동선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다녀오겠다고 했다. 강사샘 커피라고 하면 그냥 줄거라고 말했다. 동선 씨가 1층 까페로 내려간 사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수정 씨가 들어왔다. 그리고 재민 씨도 들어왔다.

 

학우들이 무슨 얘기를 하다가 또 연애 얘기가 나왔는데 수정 씨가 “연애는 운이야.”라고 했다. 나는 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럼 수정 씨의 운은 누굴까요?” 하고 물었더니 수정 씨가 자지러지듯 웃으며 책상에 털푸덕 엎어졌다.

승민 씨가 “띠로리~”라는 소리를 효과음처럼 내며 장난을 쳤다.

“동선이는 동생이야.” 수정 씨가 항변하듯 말했다. 오늘은 수정 씨 기분이 상당히 좋아보였다.

승민 씨는 “수정 언니는 앙탈을 부려요.”라고 말을 보탰다. 그리고는 앙탈부리는 모습을 몸으로 표현해줬다. 내가 다이어리를 뒤적이는 사이에 갑자기 수정 씨와 승민 씨가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냐고 물으니 걸그룹 시크릿의 “Love is move”라는 노래라 했다. 승민 씨가 율동까지 곁들여 몸동작을 하며 노래를 불러줬다.

오늘 제일 늦게 온 사람은 수영 씨였다. 늦었어요. 늦었어요. 하며 들어오는 모습이 앨리스의 이상한 모험에 나오는 하얀 토끼 같았다. 수영 씨를 보면 조끼에서 시계를 꺼내 보며 마구 달려가는 흰 토끼가 생각난다. 수영 씨는 귀가 다 나았고 나에게 팔을 보여주며 여기 저기 상처가 나서 최선규 아나운서와 샬롬남매가 못 될 거라고 슬퍼했다. 피부도 예민한 모양인데 감각도 예민하니 많이 긁고 딱지를 뜯어낸 것 같았다. 팔에 얼룩덜룩한 상처가 많았다. 수영 씨가 팔의 상처를 보여주며 속상해하길래 나도 상처가 많다고 했더니 내 팔을 마구 살폈다. 나는 “선생님은 발에 상처가 많아요.”라고 대답했다.

비가 오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냐고 물으며 칠판에 몇 가지 의성어와 의태어를 적었다. 부슬부슬, 보슬보슬, 추적추적, 뚝뚝뚝, 주룩주룩, 쏴아, 등등 승민 씨가 태풍이 오는 이야기를 하며 우르르쾅쾅을 말했다. 나는 비오는 날의 기억에 대해서 적어보자고 권했는데 다들 조금 어려운 모양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이 교실에서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승민 씨는 비 오는 날 집에서 엄마 아빠와 TV를 보며 쉬었던 기억을 적었고 수정 씨는 감각적으로 비 내리는 소리가 음악소리 같다고 적었다. 은혜 씨는 오늘도 열심히 또박또박 글자를 적어내려갔는데 교회에 갔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바로 집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어느 선생님 댁에 머물며 젖은 옷가지를 말렸던 기억을 썼다.

채영 씨는 비가 와서 좋았다. 끈적끈적했다, 라는 표현을 썼다.

재민 씨는 이렇게 썼다. 옆에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앉아서 한 가지 한 가지 선택하며 말을 만들었다.

“비 왔을 때가 기억나요. 23살 때 비가 많이 왔어요. 비가 많이 와서 기분이 나빴어요. 점심 때 일하러 가고 있었어요. 우산은 파란 우산이에요. 집에 와서 엄마가 만든 밥을 먹었어요.” 담백하게 쓴 재민 씨의 글이 흐뭇했다.

기현 씨는 자기가 쓴 글을 발표하려고 일어났을 때 옆에 앉은 재민 씨의 손을 살짝 잡았다.

손을 잡은 채로 읽더니 슬며시 손을 놓았다.

“비가 오면 기분이 좋아요

시원하기 때문이에요

검정색 우산이 있는데 나가기 싫어요

옷이 젖으니까요

어제는 비가 조금 왔는데 운동하러

가고 싶었어요 우산쓰고 버스타고

갔어요 운동하고 집에 올 때 우산쓰고

걸어왔어요 비오는 길을 걸어오니 좋았어요

사람들도 우산 쓰고 다녔어요“

기현 씨는 옆에 서서 계속 다음 문장을 뭘 써야 하는지 의논해야 한다. 마침표는 안 찍는 버릇이 있는데 마치 계속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뜻 같아서 나는 마침표 없는 문장도 흥미롭게 읽는다.

처음에 수정 씨가 적은 글을 보고 다른 글을 하나 더 써달라고 종이 한 장을 내주었다.

“어제 주말에 내가 비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 꼭 음악같다. 우산을 쓴 내가 음악 같은 소리를 듣고 있네. 그녀의 행복은 음악같은 비 내리는 소리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비가 싫지는 않은 거라고 말해주자.”

흰 종이 위에 내가 제목을 적어서 넘겼다. “우산을 쓰고 빗속에 서 있는 내 모습”. 수정 씨는 부끄러워하다가 큼직한 글씨로 다음 글을 적었다.

“빗물 속에 내리는 걸 나는 들었다. 팝콘처럼 툭툭 사탕처럼 촉촉하고 우리들의 미소처럼 톡톡 햇살처럼 나의 마음 따사로운 빗소리 ♡ 꼭 사랑하는 친구들처럼 내렸다가 안 내렸다가 한다.”

수영 씨는 여전히 손을 마구 흔들며 과거의 기억을 얘기했다.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쩐지 부자가 된 것 같다.

“나는 어릴 때 교회 유치원에서 비가 많이 오는 게 기억났다. 밖에 빗소리가 와서 그런가 보다. 보슬보슬 비가 왔다. 너무 비가 오면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게 기억났다. 마치 크리스천이 될 것이다. 꼭 크리스천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최선규 아나운서와 함께 Rhythm of the Rain 노래를 무대에 서고 싶은 느낌이다.” 문장의 조응이 잘 맞지 않지만 보슬보슬, 이라는 의태어를 넣은 게 인상적이었다. 결국 오늘도 수영 씨의 글은 최선규 아나운서로 귀결되었다. 최선규 아나운서를 만날 수 있으면 수영 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무 좋아서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혜은 씨는 길게 먹은 음식을 적었다. “비가 와서 우산 써요. 기분이 좋아 방긋방긋 웃어 빗소리 연두색 우산 쓰고 집에 가요 시원하게 아이스크림 먹고 부추전 부침개 먹었다 김치전 부침개 먹고 부라보콘 아이스크림 먹었다 팥빙수 먹고 파시통통 먹고 냉면 먹었다 둥지냉면 물냉면 먹고 수박 먹었어 포도먹고 메론 먹었다 메론 아이스크림 먹고 쿠앤크 아이스크림 먹었다 메로나 아이스크림 먹고 비비빅 아이스크림 먹었다 쿠앤크 아이스크림 먹고 삼겹살 먹었다 고기 먹었다 족발하고 냉면 맛있게 먹었다 피스타치오 부라보콘 아이스크림 먹고 달래전 부침개 먹었다 슬러시 먹고 둥지냉면 비빔냉면 먹었더 메론 아이스크림 먹고 메론 슬러시 먹었어 빵먹고 과자 먹었다 요구르트 먹고 앙팡 요구르트 마셨다 음료수 마시고 메론마루 아이스크림 먹었다 앙팡 요구르트 마시고 애플쨈쿠끼 먹었다 딸기쿠기 먹고 김치찌개 맛있게 끓여 먹었다 서울우유 체다치즈 먹어서 치즈 좋아서 먹고 있어 짜장면 짬뽕 먹고 만두 먹었다 여름에 비오는 날 맛있게 많이 먹고 운동하러 갑니다 뚝방길 걸어요 살찌는데 많이 먹어 운돈해야지 다이어트 해야 돼 빵 조금만 먹고 산에 다니기 커피 조금만 마셔 밀가루 조금만 먹어 집에서 국정홍보처들어가요 아이스크림 조금만 먹고 적당히 먹었다.”

혜은 씨의 글은 소리를 내서 읽어보면 운율이 느껴진다. 혜은 씨가 읽을 때 운율을 넣어서 읽는데 항상 3,4조를 맞춰 글을 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3,4 운율을 맞춰 읽어보면 리듬이 느껴질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다섯 글자지만 소리가 짧고, 빵, 같은 것은 소리가 길어서 한국어에 살아있는 운율이 매우 생생하다. 이 글은 모두 먹을 거만 적은 것 같지만 혜은 씨가 비오는 날 먹었던 음식을 나열한 것이다.

다들 글을 쓰고 발표하는데 승민 씨가 동선 씨에게 쓴 편지를 읽겠다고 했다. 사랑해, 결혼하자, 는 내용이 있었는데 나는 아무도 없을 때 몰래 하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다. 이건 중요한 얘기니까, 친구들이 놀리지 않도록, 몰래 몰래, 단 둘이 있을 때 고백하는 게 좋겠다며 말렸다. 승민씨는 그래도 발표하겠다고 우기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편지는 두 번 접어 가지고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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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간에는 빗방울 모양으로 오려낸 종이를 나눠주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것들을 그려보기로 했다. 선생님이 일일이 한 명씩 확인하고 지도하며 열심히 책상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혜은 씨는 모든 걸 초록색으로 그렸다. 왜 다 초록색이냐고 물었더니 메로나 색깔이라고 답했다. 혜은 씨는 계속 웃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칠판에 분홍 구름과 파란 구름을 붙이고 물방울들을 연결해서 붙였다. 미술 선생님이 학우들의 그림을 봐주는 동안 분홍구름이 떨어져 내가 칠판앞으로 다가가 다시 구름을 붙였다. 채영 씨와 수정 씨가 손가락 하트를 그리며 나를 쳐다봤다. 사소한 일에도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기현 씨가 자동차 그림을 그려넣었다. 비오는 날 자동차는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이건 레이 자동차인데 하얀색이라고 했다. 비오는 날 하얀 레이 자동차에 채영이를 태우고 놀러갈 거라고 했다. 채영 씨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양팔을 높게 들어 기뻐했다. 기현 씨는 빨간 자동차는 불자동차 같아서 좋지 않다고 했다.

IMG_9259_픽셀화_사진

나는 학우들이 그림을 그리고 붙이는 걸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마음이 편했다. 평화로운 시간이다. 학우들이 악수를 하고 돌아간 다음 담당 복지사와 미술선생님, 나 셋이서 빗방울 그림을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 얘기했다. 일단 파일에 담긴 할거지만 스캔을 어찌할까 물어서 한 사람이 그림 빗방울 세 개를 한꺼번에 스캔해두면 나중에 자석툴로 따서 디자인을 할 수 있으니 개별로 정리해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일주일이 지나면 학우들을 다시 만날 것이다. 그 사이에 승민 씨가 동선 씨에게 편지를 전해줄까 궁금하다. 기현씨는 운전을 하기 어려울텐데, 하얀색 레이에 채영씨랑 같이 타고 여행을 갈 날이 올까. 그리고 이 수업에 커플이 나타나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그리고 커플이 안된 학우들은 살짝 삐치기도 할까? 여러 가지가 궁금해졌다. 연애는 고달프고 힘든 일이다. 청춘의 연애는 그래도 반짝이니까. 학우들도 모두 누군가에게는 유달리 반짝이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2018년 7월 3일의 기록

동화로 쓰는 생애사 – 여섯 번째 기록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동화로 쓰는 생애사

여섯 번째 시간 :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6월 19일의 기록)

오늘은 은혜 씨가 오기를 기대하며 수업을 들어갔다. 모두들 똑같이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5분 전에 오는 사람은 혜은 씨와 재민 씨, 제 시간에 맞춰 오는 사람은 기현 씨다. 아직까지는 이 순서가 바뀐 적 없다. 다른 학우들은 언제 오는지, 내가 15분 전에 도착해도 교실에 와 있다.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했다. 더러 손수건을 챙겨오는 학우도 있다.

학우들이 앉아서 관장님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보다.

“관장님으로써 좋아하는거야.”라는 얘기가 나왔다. 수정 씨였다. 지난 주 미술선생님과 이번 수업은 친구소개하기를 주제로 잡았다. 수업 전날 미술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친구 소개가 좋은데 이 교실 안에서 같이 생애사쓰기 수업을 하는 친구들을 서로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말이었다. 서로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거고 그에 따라 다른 기법을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수긍했다. 수업준비를 하며 이런 저런 고민을 했을 미술선생님을 떠올렸다. 내가 꽤 나이를 먹은 축에 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미술선생님의 전화를 받으며 선생님의 성의가 느껴지는 동시에 젊은 사람이 기특하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생각은 분명 언젠가 꼰대질로 나타날 것이다. 말을 조심할 게 아니라 생각을 조심해야 할 일이다. 나이 먹은 사람이라는 티를 내는 건 누군가를 하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수업에 참여하는 학우들을 대하는 자세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나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라서 이들에게 반말을 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을까. 나는 노심초사한다.

강사는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강사는 수강생의 능력을 최대치로 이끌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앞에 서서 내 주장과 생각을 전파하는 것은 다소 폭력적인 면이 있으니까. 정해진 교과과정이 없는 수업일수록 조심스러워야 마땅하다. 내가 하는 말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내가 딛고 선 얼음판이 깨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학우들에게 이 교실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소개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다들 좋다고 대답했다. 누구를 소개하고 싶냐고 물으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얘기했다. 수영 씨는 기현 씨를, 수정 씨는 재민 씨를, 승민 씨는 동선 씨를, 채영 씨는 혜은언니를, 혜은 씨는 채영 씨를, 서로 교차해가며 지정했는데 채영 씨에 대해서 쓰겠다는 사람이 세 명이나 나왔다. 아마 채영 씨가 제일 인기가 좋은 모양이다. 채영 씨는 피부가 흰 편이고 예쁜 얼굴이다. 몸매가 갸날픈 편인데 아주 밝게 웃는다. 늘 생글생글 웃고 있다.

발달장애나 자폐인 경우 예민한 면이 있기 때문에 특정지점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피부접촉에 대해 예민하거나 특정한 소리, 주파수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감정기복이 있고 난처한 상황이 잦을 수밖에 없다. 나 역시도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다. 수년전 발달장애 엄마들의 생애사 쓰기를 지도할 때 발달장애와 자폐에 대한 자료를 여럿 찾아보았을 때 특정한 섬유의 질감이나 시각적인 패턴, 특정한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는 정보를 얻었다. 말하자면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에 대해 대응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까다롭다는 것이다. 나 역시 특정 섬유의 질감에 예민한 편이다. 나는 면 섬유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편이라 대부분의 옷이 면으로 되어 있다. 나일론이나 린넨이 섞인 옷을 입기 시작한 건 얼마 안되었다. 속옷부터 겉옷까지 100% 면은 아니더라도 면의 느낌이 나는 재질을 선호한다. 반짝거리는 장식이 달린 것도 기피한다. 그저 그런 게 불편할 뿐이다. 어지간해서는 바꾸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발달장애인은 특정한 주파수나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명제를 다시 생각했다. 손톱이 칠판에 긁히는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특정 주파수를 가진 소리를 소름끼치게 싫어한다. 아주 높고 앙칼진 사람의 목소리도 싫다. 그 정도가 다를 뿐이지 낯선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장애의 정도와 무관하지 않을까.

발달장애인의 범주에 묶이지 않는 사람들도 특정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기피하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낯선 환경에 놓이는 것은 누구나 당황할 수 있는 일이다. 그에 대한 대처능력이 조금씩 다를 뿐. 받아들인다는 것의 정도 차이일 뿐이다.

발달장애인이 스트레스가 많을 것이다, 라는 선입견은 이런 데서 기인한다.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반응을 참지 않고 대부분 드러내기 때문이다. 비장애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말도록 훈련을 받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감추고자 하는 것 뿐. 그리고 뒤돌아서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지난 주에도 약간 느꼈던 건데, 청춘이다 보니, 학우들도 연애에 대한 욕망이 느껴진다. 누가 누구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났다. 글을 쓰면서 서로간에 찌릿한 느낌들이 오고 갔다. 그 모습이 재미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는데, 아마 재미있고 불안한 것 그 자체가 연애의 시작이 아닐까. 발달장애라는 이유로 어린아이 취급을 받지만, 이미 몸은 다 성장한 상태고 남녀간의 애정도 느낄 수 있다. 때로 발달장애인중에도 성적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러브라인이 형성되는 걸 관찰하며 혼자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누군가 “복지관에서는 연애하면 안돼.”라고 말했다.

나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드냐고 물었다. 학우들은 어떤 선생님이 그렇게 말을 했다고 전했다. 연애, 라는 단어가 나오자 다들 까르르 웃었다. 내가 해법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나는 왜 안될까요? 라고 물었지만, “몰라요. 복지관에서는 안된대요.” 라는 채영 씨의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성에 대해 정확히 알기 전에 성행위에 대해서 눈을 떠버리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비장애인들이 고약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할 수도 있다. 지적장애여성을 유린했다는 뉴스가 터질 때마다 장애인 딸을 둔 부모들은 어떤 심정일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창동의 영화 오아시스를 생각했다. 오래전 영화라, 문소리가 맡은 역할의 주인공이 단순한 뇌성마비일 뿐인지 지적장애도 동반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장애인의 성문제와 연애 문제는 어디서 누가 풀어나가고 있을까? 성인이 된 장애인들의 성문제는 억압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하나?

생각해보면 이들은 스무살이 넘었는데, 아직 클럽도 가보지 못했을 거 아닌가. 학우들이 술은 마실까? 아닐 것 같다. 발달장애인은 “정신연령이 낮다”고 말하는 건 정당한가 생각해봤다. 역시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교실 안의 친구에 대해 써본 뒤에는 미술수업을 위해서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소개하는 글도 더 적어봤다. 학우들 중 자폐성향이 강한 사람은 타인을 소개하는 글을 적는 것이 어려움을 겪었다. 예상한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 애정을 듬뿍 담아 친구를 소개했다.

1 .★ 제 친구 이름은 정기현입니다. 그리고 나이는 24세입니다. 기현이의 성격은 바람직합니다. 여자친구를 좋아하는 최기현은 고기, 잡채, 북어국을 좋아하죠. 기현이는 정말 노래할 때와 운동할 때가 행복합니다.

수영 씨가 쓴 소개글이다. 여기서 여자친구란 걸그룹을 말한다. 친구의 식성을 기억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바람직하다는 표현이 특별해서 오래 들여다보았다. 바람직하다, 바람직한 성격이라는 건 어떤 것일까.

2.★ 제 친구 이름은 최승민입니다. 승민이의 성격은 남에게 배려하면서 사랑고백을 많이 합니다. 승민이는 에이핑크를 좋아합니다. 성게알, 생선을 좋아합니다. 승민이는 노래를 아주 잘합니다. 춤도 아주 잘 춘다.

수영 씨가 한 장 더 적은. 승민 씨에 대한 소개글이다. 사랑고백을 한다는 건 “사랑해요” 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걸 말한다. 성게알을 좋아한다니, 승민 씨는 미식가인 모양이다. 존댓말어미를 쓰다가 반말어미를 쓰는 건 비장애인들도 흔히 하는 실수다. 이런 건 별로 중요치 않다.

★ 내 친구 이름은 박수정입니다. 나이는 24입니다. 그리고 수정이 누나에 매력은 귀엽고 애교있는 누나이고 성격은 수줍음이 많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가수 정기고와 씨스타 소유를 좋아하며 선생님들과 관장님을 좋아합니다. 누나에 대한 행복할 때는 저에게 제 물건 챙겨주는 것과 멋지다 듬직하다면서 좋은 말로 해주고 문자 하는 것을 행복해하고 좋아합니다. 누나한테 하고 싶은 것은 물건 챙겨주고 문자는 항상 고백하는 하트 문자는 마음만으로도 좋으니까 너무 많이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건 챙겨주고 관심 가져주어서 고마워.

이건 동완 씨의 글이다. 비교적 수월하게 이 정도 문장을 쓸 줄 안다. 어법과 문법이 안 맞는 부분이 있지만, 나는 아직 이들의 글을 쉽게 찍찍 긋고 고치지 못하겠다. 나 아니더라도, 항상 어디선가 지적받고 질책받는 일상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 마라, 떠들지 마라, 소리 내지 마라. 그러는 거 아니다, 먹어라, 먹지 마라. 매일 그런 일상을 산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장애인이라서 불편한 것보다, 그저 누군가에게 늘 지청구를 들어야 한다는 게만으로도 힘든 일이다. 동완 씨는 다른 여자친구들이 호감을 표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나보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해서 혼자 몰래 웃었다.

4.★ 내 친구 은혜누나를 소개합니다. 은혜 누나는 글씨를 잘 씁니다. 은혜 누나는 복지관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은혜 누나는 커피를 잘 만듭니다. 은혜 누나는 녹차라떼 홍차라떼 자몽에이드 카페라떼를 좋아합니다. 은혜 누나는 일도 잘하고 저랑 말도 같이 해줍니다. 은혜 누나는 26살입니다.

기현씨의 글이다. 은혜 씨는 글씨가 정말 네모반듯하다. 특별한 글씨체를 갖고 있다. 내 수업에 들어오는 이들은 대부분 바리스타이다. 아직 이들이 만들어 준 커피를 못 마셔봤다. 기현 씨가 이 글은 쉽게 썼다. 매번 나에게 확인하며 쓰던 사람인데, 은혜 누나를 소개하는 글은 하나씩 특징을 적으면 되니까 쉬웠는가보다.

★ 내 친구는 김채영입니다. 나이는 24살입니다. 채영이의 매력은 예뻐요. 성격은 귀엽습니다. 채영이는 피자빵을 좋아해요. 채영이가 놀아줄 때 행복해요.

의사소통이 안되는 재민 씨의 마음을 하나씩 선택지를 놓고 봉사선생님이 적은 것이다. 성격이 귀엽다니, 이건 선택지를 잘못 만들어준 것이다. 봉사선생님도 글쓰기를 배워야겠다.

★ 내 친구는 민혜은입니다. 31살이고요. 많이 착하고 영원한 사람 핑클 가요 부르고 난 뒤에는 떡볶이를 먹고 나서 스트레스 확 풀릴때까지 기분이 많이 좋아하고 난 뒤에는 안양병목안수리산산림욕장에서 춤을 신나게 추니까요 기분이 많이 행복해진 것 같아 보였어요.

★ 기현이는 복지관 1층 카페에서 바리스타 근무 하고 나서 기현이는 커피샷도 뽑고 난 뒤에는 커피샷도 내릴 때까지 먼저 커피와 음료수를 만드니까요 딴 사람 앞에서 커피와 음료수 주문을 하고 나서 기현이는 기분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은혜씨의 글이다. 이번 글에서는 글이 끝날 때만 마침표를 찍는다는 걸 발견했다. 문장이 끝나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를 한 문장에 다 담는다. 여행을 갔던 글을 썼을 때는 문장을 끊었는데 이번에는 길게 한 문장으로 썼다.

★ 내 친구 우재민을 소개합니다. 재민이 오빠는 25살이고 성격은 멋있고 착한 게 매력입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은 치킨입니다. 재민이오빠와 5월에 만화카페에 간 적이 있었는데 재밌었고 시간이 된다면 또 놀러가고 싶어요.

내 친구 민혜은을 소개합니다. 나이는 31살이고 성격은 좋고 착한 게 매력입니다. 혜은이 언니가 좋아하는 것은 방긋방긋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 혜은이 언니는 먹을 때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그리고 혜은이언니와 복지관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었는데 매우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고 무척 행복했습니다.

채영 씨의 글을 자원봉사선생님이 받아쓴 것이다.

8.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름 우재민오빠. 나이 24살, 성격 착하고 부드러운 남자다. 좋아하는 것은 동료들하고 대화를 하고 여자도 좋아한다. ♡ 고재민 오빠는 웃는 여자를 좋아하고 머리 긴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모든 여자 중에 잘 웃는 여자. 나를 좋아하지만 비밀로 하자. 재민오빠 지금은 동료로 지내자. ♡

수정 씨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쑥쓰러워했다. 재민 씨는 의사소통이 안되는데 눈빛으로 많은 감정이 오갔던 모양이다. 수정 씨도 재민 씨에 대해 호감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동료로 지내자는 문장을 보니 “복지관에서 연애하면 안돼요.”라는 말이 떠올랐다.

★ 동갑이자 친구 이동선. 나이는 23살이고 성격은 착하고 또 상남자이다. 좋아하는 것은 대화 좋아하고. 친절하고 멋진 남자. 부드러운 카리스마. 농담을 받아주고 좋은 친구. 승민이를 좋아하고 부드러운 친구이다. 여자아이돌을 좋아한다. 특히 여자친구를 좋아한다. 동선이와 농담을 주고 받고 놀았다. 매력은 부드러운 동선이다. 사랑해. 잡앤조이 동갑 여자.

승민 씨는 하트를 몇 개 그려넣었다. 승민 씨가 동선 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동선 씨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는 동선 씨가 튕기고 있다. 문자도 자주 보낸다고 한다. 이 글을 쓸 때 동선 씨에게 이름의 한자를 물어봤다. 내가 다시 받아 써서 포스트잇에 적어 주었다. 승민 씨는 정성을 들여 동선 씨의 한자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 승민 씨의 사랑해나 하트는 흔히 쓰는 것이라 단지 그것 때문에 동선 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해석하긴 어렵다. 수영 씨에 대해 쓴 글에도 똑같이 하트와 사랑해, 라는 말이 들어 있다.

★ 이름 오수영 언니. 25살이고. 수영 언니는 아나운서 좋아하고, 기타를 치고, 노래도 잘한다. 고음도 소화를 잘한다. 성격은 인사도 잘한다. 취미. 최기현 좋아하고, 배려심 언니다. 예쁘다. 여신님이다. 아름다운 었다! 사랑해 언니. 최고이었다. 아름아운 었다. 나랑은 착하고 친구 잘 챙기고 예쁘다. 착하고 언니다. 힘내 고백이다. 러브. 잡앤조이 동료다. 사랑해.

승민 씨는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 온전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쓴다. 맞춤법을 잘 모르는 것도 있고 모르는 글자도 많아서 항상 나에게 물어본다. 내가 포스트잇에 또박또박 적어주면 아, 맞다, 하고 웃으며 열심히 적는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볼 때마다 숙연해진다.

10.★ 김채영, 스무세살, 성격 착하다. 기분이 좋아서 행복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자, 채영아 사랑해, 놀러가고 있는 중이야, 채영아, 예쁘다고, 제주도 비행기 탔어요. 산으로 갔어요. 사진 예쁘게 잘 찍었어요, 기분이 좋아서 설거지 깨끗이 예쁘게 잘해 이채영.

이건 혜은 씨의 글인데, 말할 때와 글이 똑같다. 혜은 씨는 자폐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감정기복도 많아서 힘들어 할 때가 많다. 아침에 울지 않은 날은 수업시간에 와서 꼭 그 얘기를 해주는데, 이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나보다. 글을 쓰다가 울기도 했다.

★ 김수빈 선생님 회색 옷 바지 얼굴 눈 쌍커풀 있어요 코, 손 반지 있어요 여행가는 거 만화카페 커피 마시고 성경책 성격 말씀 혜은이 엄마한테 발신 통화해요 엄마 혜은이 엄마. 혜은이 아빠한테 수신통화해서 아빠, 혜은이 아빠. 잠언말씀. 혜은이 엄마한테 수신통화해서 엄마 혜은이 아빠한테 발신통화해요 아빠 엄마 아빠 혜은이 엄마한테 발신통화해요 혜은이 아빠한테 통화하고.

김수빈 선생님은 혜은 씨 앞에 앉아 있던 자원봉사선생님이다. 선생님을 그리기 전에 글을 써본 것인데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울면 안돼 혜은이 울면 안돼 울어도 해야 해 울지 말아야 해 참아야 해 라고 계속 뇌까렸다. 혜은 씨의 글에는 늘 저 부분이 들어간다. 혜은이 엄마한테 수신통화해서 엄마 혜은이 아빠한테 발신통화하고. 이 부분. 때로는 혜은이 아빠한테 수신통화하고, 엄마한테 발신통화해요. 라는 문장이 들어가기도 한다. 혜은 씨는 불안감이 많아보인다. 불안할 때마다 엄마와 아빠에게 전화를 하는 것 같다. 서른 한 살이다. 성인이 된 지 10년이 넘었다는 말이다. 무서운 것도 많고 두렵고 불안한 것도 많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꾹꾹 눌러닦으며 열심히 글을 썼다. 울면 안돼, 참아야 해. 라는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미술 선생님은 글을 기반으로 자기 앞에 앉은 사람을 그려보는 수업을 했다. 펜을 한 번도 안 떼고 그리는 것이다. 다들 훌륭하게 해냈다. 나도 옆에 앉아서 해봤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모두들 친구에게 사랑을 담아 그렸다. 적어도 이 교실에서는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평화로웠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학우들을 보니 꿈속에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물론 전날의 숙취가 덜 가신 탓도 있었지만. 이 시간이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며 나도 그림을 따라 그렸다.

 

2018년 6월 19일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