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간다.’

과거로부터 온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를 온전한 자기 삶으로 바라보는 홈리스의 이야기.

제주도 출신으로 보육원에서 자라 조소작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IMF이후 일자리를 잃고 18년간 홈리스로 산 임상철 씨의 글 모음집이다.

6년간 빅이슈를 파는 빅판으로 활동했던 임상철 씨는 잡지를 사주는 사람들이 고맙고 자기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매달 자기가 파는 빅이슈에 글과 그림을 그려 A4용지에 출력해 끼워 넣었다. 그렇게 보인 52통의 편지. 과장도 증오도 원망도 없는 덤덤한 홈리스의 이야기.

왜 살아야 하는가 묻는다면,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을 생각하면 된다고 말해줄 수 있겠다.

참고할만한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wt9Ua7aht4g

지금은 조각가로 살고 계신 듯 하다.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
임상철 글/그림, 생각의 힘 펴냄

2020. 5. 24.

임상철지음 / 생각의 힘 펴냄

은발머리의 독일할배 – 카라얀

길건너 아파트형 공장 식당가에 전주콩나물국밥집이 있는 걸 봤다.
한 번도 간 적이 없어 오늘은 아버지와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갔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나오고 있었다. 93.9 강석우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곡이 끝나자 아버지가 베토벤인 줄 알았다 한다.

나는 며칠 전 임헌정이 지휘하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들었다 했고 예전에 부천필에 있었다가 지금 코리아심포니로 옮겨간 임헌정은 말러열풍을 불러온 주역이라 전했다.
– 우리나라 최초 오케스트라가 서울시향이지?
– 모르겠는데.
– 서울시향일거야. 내 기억은 그래.

검색을 해봤다.
1945년 고려교향악단이 있었다. 1948년 서울관현악단은 해군 정훈음악대에 모여 정기공연을 열었고, 1960년에 서울시향이 되었다. 육군악대는 1956년에 KBS 교향악단으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내용을 읽었다.

– 해군교향악단이 있었는데.
– 그게 서울관현악단인가봐. 해군 정훈음악대에서 공연했으니 해군교향악단으로 보였겠어.
– 그 옛날 지휘자중에 김만복이라고 있어.
– 몰라.
– 찾아봐. 그 양반이 그때도 나이가 많았어.

지휘자 김만복. 1925년 대구 출생으로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전공을 지휘로 바꾼 사람. 이 분은 61년부터 서울시향을 이끌고 1965년 사상처음 해외공연인 일본 도쿄에서 공연을 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 그 양반을 조금 알아. 예전에 아빠 느이 엄마랑 명동서 가게 했을 때 자주 왔었어.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부모님은 명동에서 액자가게를 했다. 당시는 저작권이 없던 시절이라 무단복사가 가능했고 엄마는 르느와르나 모딜리아니, 밀레의 그림을 좋아해 그걸 액자로 많이 만들었고 아버지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독일에 계시던 큰아버지가 어떤 지휘자의 사진과 LP판을 보내오면서 액자로 하면 근사할 거 같다고 전했다. 아버지가 보기에도 지휘자의 얼굴이나 선, 사진 자체가 매우 훌륭해 히트 좀 치겠다는 예감이 들어 복제를 해서 액자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것만큼 그 사진은 잘 팔렸고 아버지는 이어서 비엔나필, 뉴욕 필의 전체 공연 장면이나 주빈 메타, 게오르그 솔티, 레너드 번스타인등의 사진을 액자로 만들었다. 명동을 지나다 봤을까. 김만복 선생이 가게로 와서 이 사진을 어디서 구했냐 물으며 이야기를 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번스타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웨스트사이드스토리”작곡자라고 말했다. 누구냐고 빨리 이름을 대라고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검색을 했다.
– 그 분이 오면 미도파 커피집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음악얘기 하고 헤어지고 그랬어. 그 양반은 내가 음악에 대한 사진을 대중에게 보급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나는 그냥 장사한건데 말야.

어릴 때부터 질리게 봐 온 사진이 헤르베르트 본 카랴얀의 바로 이 사진이다. 이후로 이 사진은 여러 곳에서 복제해 전국에 흩어졌고, 큰아버지는 독일에서 간간히 자켓이 멋진 LP판과 북클릿을 챙겨주었다. 저작권이 없던 시절이라 내 부모는 이때 꽤 괜찮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무단복제의 상업적 성공으로 특수한 혜택을 받았다. 크고 나서 좀처럼 카랴안을 듣지 않는다. 그 사람의 수많은 낭설들도 못 들은 척 한다. 카라얀은 비주얼로 내 유년을 완전히 압도해버렸다. 더 이상 보탤수도 뺄 수도 없는, 세상에 지휘자라는 사람들이 있고, 저리도 고독한 옆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 그래서 저 사람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내가 기억이 있을 때부터 우리 집에 늘 있던 잘생긴 독일영감님. 은발머리에 대한 로망은 분명 저 카라얀 때문에 생긴 게 틀림없다.

콩나물 국밥이 나오고 그리그의 페르귄트가 흘렀다. 아버지가 페르귄트가 맞냐고 물었다. 나는 김윤희의 “잃어버린 너”를 생각했고, 그 책을 읽으며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울던 내 나이또래의 엄마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모를, 1989년의 어느 오후.

아버지는 펄펄 끓는 콩나물 국밥을 바라보며 말했다.
– 요즘은 곡명이 잘 생각이 안나.
– 그거 외워서 뭐해?
나는 종업원이 가져다 준 김을 쪼개 넣으며 아버지도 김 넣어드셔. 라고 말했다.

한국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
https://news.samsung.com/…/%ED%88%AC%EB%AA%A8%EB%A1%9C%EC%9…

지휘자 고 김만복 선생 타계 소식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

마흔 넘어 페미니즘

딸아이가 짧은 치마를 입고 출근 준비를 했다.

뭘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는데 위태로웠다.

야야, 너 치마가 좀 짧다. 보이겠네. 라고 했더니

치마를 번쩍 들어올려 “안에 속바지 붙은건데?”라고 반문한다.

나는 입을 닫았다.

아이가 열다섯일 때 딱 저만큼 짧은 빨간 치마를 가위로 난도질한 적이 있다.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다시 올라왔다.

네가 입는 옷이 너를 결정한다는 사상은 “남들의 시선을 고려해서 남들이 좋아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짧고 야한 걸 입으면 안된다는 것”은 “성폭행 당시 무슨 옷을 입었나요?” 라고 묻는 것과 동일하다.

며칠 전 누가 “이 옷은 가슴이 너무 파여서 좀 신경이 쓰인다”는 말을 하길래 “그건 그거 지적하는 인간이 젖만 보고 있다는 뜻이지.” 라고 대답한 적 있다.

여성의 옷차림에 대해 유독 민감하게 굴며 질타하는 남성을 보면 자기 억제가 강한 사람인 공통점이 있었다. 일반화는 위험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본인 욕망을 해소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인간”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적어도 내 내면에서는. 때로 나도 그런 꼰대가 된다.

이 나라는 희한하게 다리를 내놓는 것엔 관대하고 젖을 내놓는 것엔 까다롭다. 유방은 여자만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신체기관이다. 유방에 대해 유난히 예민한 것은 “어머니의 신성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을 질책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그 사람의 욕망이 보인다.

세월호 유가족을 두고 “돈 때문에 저런다”는 건 본인이 돈에 대한 욕망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산다는 뜻이고, “그런다고 공천 못 받아요!”라고 은수미의원을 향해 외쳤던 김용남은 “공천 노이로제”에 시달리던 때였을 것이다. 그는 공천은 받았으나 낙선했다. 김용남의 욕망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사람마다 욕구의 정도는 모두 다르다. 타인에 대한 힐난은 본인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음을 반증한다. 손가락질 할 때 나머지 손가락이 나를 향한다는 말의 뜻이 바로 이거다.

나이 마흔이 넘어 페미니즘을 배워간다. 그동안 나는 사회적 남성으로 살아왔다.

딸아이에게 카톡을 보내서, 오래 전 일을 사과하고 싶다.

“언제나 네가 꼴리는 대로 입어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다 죽겠노라”고.

 

2016년 5월 1일

 

[영화]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지난 3월 24일부터 31일 사이에 서울 롯데시네마 홍대입구점에서 인디다큐 페스티벌이 열렸다. 코코뉴스와 연대를 맺은 창작집단3355가 공동체상영을 진행하는 영화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를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었다.
▲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엽서 이미지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Masquerade of Her>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감독 박강아름의 사적 다큐멘터리다. 한 사람의 생활 일부가 기록되어 후세에 남을 때 그 중 기록의 가치를 갖는 것들이 있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기록의 가치를 갖는 사적 다큐에 해당한다. 십대때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여자이고, 대한민국 국민이다. 한국사회에서 성장한 20대 후반의 여성의 정체성은 어떤 것들이 규정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이 영화의 첫 촬영은 2008년에 시작되었다. 영화는 텀블벅 후원을 거쳐 2015년에 마무리되어 그 해 4월 26일에 첫 시사회를 열었다. 2008년부터 박강아름은 “나는 왜 남자친구가 안 생길까?” 하는 사적인 질문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감독의 카메라는 계속해서 한 여성의 사적인 생활을 기록한다. 사회는 감독이자 주인공인 박강아름에게 단호하게 ‘남자친구가 안 생길만 하다’라고 말한다. 10대 소년소녀들부터 감독의 선배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외모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남자친구 없는 몇 년을 지내며 주인공은 체중조절도 시도해보고 외모의 변신도 꾀해보지만 신통치 않다. 결국 주인공은 특별한 실험을 준비한다. 외양을 바꿔보고 사회의 인식을 시험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각자의 역사 속에 깃든 선입견으로 그녀를 규정하고 원래 주인공의 모습보다 훨씬 더 보기 좋다는 말을 건네며, 심지어 ‘몰라보겠다’, ‘훨씬 예쁘다’, ‘진작 좀 그렇게 하고 다니지’라고 쉽게 말을 한다. 주인공은 연령과 계층을 넘나드는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외모로 판단할 수 있는 어떠한 상을 구현해낸다. 교복을 입고, 무슬림복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 충실하여 주인공을 대한다.

박강아름의 원래 모습은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은 편안한 모습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젊은 여성들은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으며 살아갈까? 내가 좋아한다고 정한 것들은 진정 자기가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영향으로 좋아하기로 결심한 옷일까? 청바지에 흰 면티는 가장 편안하고 무난한 복장이라 했나? 소녀시대가 청바지에 흰 면티를 입은 그 날부터 대한민국 여성의류에 관한 미의 기준은 뒤집어졌다.

미디어는 이미지를 쏟아내고 대중들은 거리낌 없이 소화한다. 이미지가 세계를 점령하면서 개인이 각자 스스로 창출해낼 수 있는 계층에 대한 이미지는 소멸된 셈이다. 누군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낸다는 것은 ‘반전’이라 불리며 행위자는 ‘특이한 사람’이 된다. 이미지를 먹고 자란 사람들은 늘 새로운 이미지를 갈구하면서도 기존의 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길 바란다. 고대 서사의 원형에서 벗어나지 않는 스토리를 소비하는 것처럼 예측 가능한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길 바란다.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초단위로 쏟아지는 정보는 사람들의 뇌를 흥분시킨다. 일상이 예상 가능한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힘겨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돌출적인 인물이 되고 그들의 실험은 누군가에게는 신선한 지적 자양분이 되지만 과로누적의 사회에서는 귀찮은 일이 된다.

▲ 아주 사적인 질문에서 시작한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사회의 통념을 녹여냈다

박강아름의 실험은 지금 이 나라에서 한 사람을 대하는 인권존중의 민감도가 어디쯤 와 있는지 보여준다. 기계에 사람의 몸을 맞추고 옷에 사람을 끼워 넣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물질이 만들어놓은 것에 인간을 액체처럼 변형시켜 계속 자르고 다듬는다. 사람들은 스스로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에 가서 누워 묻는다. 내가 이 침대에 사이즈가 맞느냐고.

문명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사실 자본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더 많다. 자본의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다리가 잘려나간다. 발목이 없는 사람들이 침대에서 기어 나와 절룩거리며 기뻐한다. 나는 이제 침대에 맞는 사이즈가 되었다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본의 영향력 없이 순수하게 대할 수 있을까. 이미 모두 침대에 맞춰 스스로를 다듬은 마당에 혼자 삐쭉하니 튀어나온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테세우스가 되어 프로쿠르스테스를 죽이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강아름처럼, 그의 영화를 후원한 사람들처럼, 그의 영화를 보러 간 사람들처럼 죽이지 말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설득하여 다리를 다르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득하는 테세우스들의 실험이 2016년 5월 26일 인디포럼에서 다시 열린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프로듀싱을 맡은 창작집단3355에 연락하면 공동체 상영도 추진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를  발랄하고 즐겁게 풀어낸 다큐다. 105분의 상영시간 동안 너무 웃다가 눈물을 흘릴 수 있으니 마스카라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영화 한 장면

제작_박강아름
각본 Screen Writer_박강아름, 정성만
프로듀서 Producer_김문경
촬영 Cinematographer_박강아름
편집 Editing_박강아름

박강아름 필모그라피
1999 <섹스>
2000 <물어보는 거야, 너한테>
2004 <유실>
2004 <파리의 노래>
2006 <똥파리의 꿈>
2007 <내 머리는 곱슬머리>

공식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hermasq/

http://www.koconews.org/news/articleView.html?idxno=439

코코뉴스에 게재된 영화평입니다.

http://www.koconews.org/news/articleView.html?idxno=439

응답하라 1988의 판타지 

응팔 마지막회를 경건하게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나에게 이제 오늘 응팔이 끝나면 뭘 할꺼냐고 물었다.
응팔은 골목에서 시작한 가족의 판타지를 말했다. 초반의 짜증나는 성보라 캐릭터와 아들 잡아먹은 며느리라는 시어머니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판타지를 구현하는데 충실하기 때문에, 민폐 캐릭터가 없다.
• 이것은 명백한 판타지다 •
운동화끈도 못 묶고, 주차 못해 골목을 점령하는 최택과, 동생 머리 끄댕이 잡아 뜯는 성보라와, 없는 형편에 쓸데없는 물건만 사오는 성동일도, 가만 보면 싸가지 없는 정팔이도, 딸년들이 싸우는데 그만하라고 말리지도 못하는 엄마 일화와, 카리스마로 동네에 군림할 수 있는 졸부 라미란이 없다.
바르기만 해서 엄친아를 시전하는 선우는 새아빠의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은 갈등을 겪지 않고, 학생주임인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특공대 동룡이도 별 일 없이 순탄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위에 열거한 각자의 단점은 미화되었다. 그러니 이건, 판타지다. 주인공들은 크게 갈등하지 않고 서로 배려하고 편들어주며 화합한다.
이건 지금, 이 시대가 내 편을 그리워하는 판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명백한 판타지다. 동네 꼬마의 눈사람을 위해 회의를 여는, 그런 골목은 없다. 인간은 갈등하기 위해 존재한다. 골목은 “어메 짠한그…”가 존재하면서 동시에 뒷담화를 필수적으로 장착한다.
• 포기하는 자만 쟁취한다 •
응팔의 사랑은 가족보다는 현실적이다. 어남류 어남택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한데 사람들은 시각적 이미지에 압도당하면 판단력이 떨어진다. 어쨌거나 드라마의 청춘들은 모두 곱다.

성덕선은 상징이다.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상징이지 동창의 75%가 좋아하는 여신을 말하는 건 아니다.
택이가 남편이 된다는 건 그의 승부수 때문이다. 결정적일 때 치고 나가고, 버릴 패를 확실히 포기하고, 대가를 아까워하지 않으며, 사랑 앞에 불친절하지 않다. 택이의 사랑은 정석이다. 이건 사랑을 얻는 법에 대한 이야기지 택이가 덕선이를 차지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환이가 탈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성인이 된 아이들이 호프집에서 모여 피앙세 반지를 앞에 두고 한 고백이다. 친구들 앞에서 붕 띄웠다가 완전히 자빠뜨려 모래사장에 내리꽂은 형국이다.

덕선이가 정환이를 사랑했대도, 저런 남자와 결혼하면 안된다. 어따대고 고백을 장난으로 떡칠하나. 이건 정환이가 츤데레인 게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사랑은 조롱하지 말아야 한다. 정환이가 사천에 내려온 택이에게 빨리 덕선이를 잡으라 말한 건 제 사랑의 알량함을 인정한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내가 이 드라마를 본 것은 판타지의 구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나에겐 저런 초등학교 동창들이 있고, 27년째 만나고 있으며, 아이들이 자라 술 한 잔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친구들이 생각났다. 나의 판타지의 빈 공간을 채워준 친구라는 소재가 맘에 들었다.
한 가지 더, 청춘들의 러브라인, 골목에서의 포옹과, 바닥이 뜨근할 거 같은 이불 위에서의 꿈결같은 키스가 전혀 추하지 않아서다.

다시는 저런 순간이 나에게 오지 않겠다는 걸 매 번 확인하고 나 자신에게 각인시키면서도 내 마음이 완전히 늙어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게 해줘서, 그래서 좋았다.
인간에겐 판타지가 필요하다.

그 판타지가 더럽지도 추하지도 않다면 굳이 미워할 이유가 왜 있겠는가.
• 기분좋은 판타지였던 이유 •
건물주가 없기 때문이다.

정봉이네는 집주인이지만 단 한 번도 집세를 올리지 않은 듯 하다. 외려 이자 얘기도 안하고 차용증도 안 쓰고 세입자에게 돈을 빌려준다.
선우네도, 택이네도, 동룡이네도, 모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 택이아빠의 가게는 집에 붙어있고, 이들은 골목을 공유한다.
갑질하는 대상은 유일하게 드라마 끝날 때 성동일을 정리해고한 한일은행이다.

건물주 없는 세상, 상상해봤나.

어쩌면 이건 판타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로서 응팔은 끝났다.

성동일이 은행에서 짤린 건 이제 자본이 등장했다는 얘기로 해석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동룡이는 외식업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보라와 선우는 결혼해서 검사와 의사커플이 되어 금수저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에게 곧 IMF가 닥치겠지만, 모두들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덕선이네는 검사 딸, 의사 사위, 국보급 바국기사 사위와 정규직 승무원 딸이 있고, 선우네와 택이네도 이 구도를 같이 가져간다. 정환이네는 이미 자본을 축척해뒀고 금성전자 대리점이 문제겠지만 하이마트가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둘째 아들이 철밥통이다. 정봉이는 희대의 럭키가이, 조만간 백종원이 될 것 같다. 동룡이는 곧 예식장과 장례식장 사업에도 진출하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프랜차이즈에 뛰어들지도 모른다.
–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회를 기다리며

“Hell 조선에서 게임을 읽다” 첫 강좌 소감 (7월 14일분)

Hell 조선에서 게임을 읽다. 첫 강좌를 듣고

첫 강좌의 내용은 중독과 몰입이었다. 게임을 몰입이라 보지 않고 중독이라 폄훼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게임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이경혁 선생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키워드 :

괄시와 굴욕의 역사.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게임은 태초부터 환영받은 적 없다.

Hell 조선이라는 용어도 게임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다양한 종류의 심층적인 게임을 잘 하지 않지만 간간히 기사를 검색하거나 게이머들이 모인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면서 모르는 단어를 항상 검색해서 알아내려 했던 덕인지 강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지경은 아니었다. 첫 강의는 우리가 게임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라 할 수 있다. 중독과 몰입이라는 단어는 비슷하지만 그 뉘앙스가 다르다. 과학적으로 두 가지의 뇌 상태는 같을 수 있으나 이 사회의 언어로써는 부정적, 긍정적 효과를 동반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제 1강에서는 게임의 본질이 무엇이며 우리는 중독, 혹은 몰입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를 논의하기로 했다.

게임의 사전적 의미는 놀이다. 중국어에서는 게임을 유희라고 풀이한다. 우리가 말하는 놀이의 범주는 상당히 여러 가지다. 게임은 놀이의 한 갈래이지만, 놀이의 한 갈래로 완전히 편입하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게임은 명확히 말해 비디오게임이며, 이 비디오게임이 현재는 컴퓨터게임으로 진화했다. 스마트폰에서 할 수 있는 게임들은 모바일게임이라 하는데, 스마트폰도 말하자면 작은 컴퓨터와 다름없으므로 모바일게임 역시 컴퓨터게임의 범주에 들어간다.

최초의 컴퓨터게임은 1958년 미국에서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주거니 받거니 공을 치는 화면이 컴퓨터로 만들어졌고 부룩 헤이븐 국립연구소에서 개발했다. 이는 비디오게임, 컴퓨터게임의 역사를 찾아봤을 때 나오는 정설이다. 그 이전에 어떤 개인이 어디선가 혼자 만들어 놀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전산시스템의 수준으로 봐서 한 개인이 혼자 만들고 놀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논다, 컴퓨터게임의 출발은 놀기 위한 것이었을 거다. 어쩌면 그 놀이를 위장해 사실상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전략시뮬레이션은 전쟁전략을 짜기에 적당했을 것이고 컴퓨터의 능력을 평가하고자 퍼즐게임을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게임을 놀이, 여가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유사 이래 인간들이 찾아내는 놀이가 환영받거나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적은 별로 없다. 인간은 언제나 승부를 가르기 위해, 상징적인 경쟁을 하기 위해, 또는 개인이 즐거움을 찾기 위해 어떤 놀이를 찾아왔다. 이 놀이는 대부분 현재 문화예술의 갈래가 되었다. 오래 전 구텐베르크 활자가 발명되고 사람들이 쉽게 손에 책을 넣게 되었을 때 어떤 나라에서는 마구잡이로 베껴 퍼져나가는 소설이 사람들의 정서를 해친다고도 하였다.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시각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움직이는 그림이 가져올 폐해에 대해서 말했다. 사진도 마찬가지, 그림의 영역을 침탈당한 자들은 사진을 비난했다. 만화도 그러했고 세상에 새롭게 등장하는 대부분의 문화예술과 놀이는 처음엔 비난으로 시작했다. 왜 그랬던 걸까.

전쟁이후 국가재건에 열을 올리던 국내사정은 차치하고 이건 단순한 억압의 문제로 보긴 어려울 것이다. 각 매체마다 다른 이유가 있으니 일일이 여기서 따지긴 어려워도 대부분 새로운 문물의 등장은 기존 문물의 영역을 침범해왔고 파이를 나눠야 했다. 인간이란 종은 애시당초 보수적이라 새로운 물결이 거대하게 몰려올 때 불안과 위기감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인지라 새로운 매체, 새로운 문물은 거의 다, 그렇게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현대의 게임은 비디오게임에서 컴퓨터 게임으로 넘어가고 현재는 모바일게임까지 발전해왔다. 게임이라는 건 상호작용, Digital interactive Contents가 중심이다. 기존의 게임, 놀이도 상호작용이 중심이라면 게임은 digital 이라는 영역이 포함되어 상당히 복잡한 계산이 가능해져 더 풍부한 선택지를 만든다는 차이가 있다.

의문은 여기서 발생한다. 디지털 상호작용이 게임의 기본이라는 얘기를 듣자, 화면으로 넘어오기 전의 게임과 비교를 해봤다. 오래전 모니터없이 실제 사람과의 접촉으로 이루어지던 상호작용의 게임은 게임의 룰을 참가자들이 수정하고 변경할 수 있다. 모니터에서 펼쳐지는 게임은 제작자와 제공자가 있고, 디지털이라는 영역이 개임했기 때문에 게임의 룰도 그 계산 안에서 이루어진다. 비디오게임(모니터와 컴퓨터 게임을 이하 비디오게임이라고 칭하겠다)은 게임의 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각본에 의해 제작해야 하고 수많은 선택지를 만드는 것 하나 하나가 비용이 소모되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바꿀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게임안에서 개별적으로 최적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개발단계에서 이미 완성품이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는 게임의 선택은 한계가 있다. 각종 게임들이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를 하거나 패치를 만들어도 그 역시 개발자, 즉 생산주체에게 게임의 규칙을 정할 권력이 주어진다.

비디오게임이 사용자의 적극적 반응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넓게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게임은 각종 매체와 예술장르를 포괄하여 발전한다. 마치 블랙홀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예술의 영역을 흡수하여 발전한다. 90년대 우리나라에서 게임OST가 주목을 받던 때가 있었다. 게임을 잘 모르던 사람들은 게임의 현란한 미적 기술과 아름다운 음악이 동반된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새로운 매체가 탄생했다고 환영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으나 게임은 최대한 사용자의 감정이입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람들을 매혹할 만한 수많은 수단을 동원한다. 기본적으로 문화예술은 매혹의 기술이 돋보여야 살아남는 장르이다. 그게 어떤 방향이건 간에 생산자의 취향에 맞는 소비계층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계층이 넓고 깊게 빠져들수록 문화예술의 생산자는 흥하게 된다. 게임은 복합적인 문화매체를 동시에 품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기반이 되는 각본이 필요하다. 게임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한다. 무모한 퍼즐게임은 사람들을 매혹시키지 못한다. 게임의 기본은 이야기구조의 흥미로움이다. 이야기로 사람을 매혹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게임은 다른 장르를 가져왔다. 중독성이 있는 효과음으로 시작한 단순한 게임들이 유려한 음악으로 스토리에 힘을 북돋는다. 또한 미술역시 사실적 기법을 동원하거나 단순화한 상징적인 것 여러 가지를 보태 가장 아름답게, 가장 눈에 띄기 쉽게, 소비계층이 가장 좋아할 만한 디자인을 구현한다. 게다가 사용자의 적극적 상호관계를 끌어내기 위해 연극적 요소를 배치한다.

1강에서 이경혁씨는 게임은 시간과 공간을 현실과 다르게 유리되어 있다고 했다.

게임에서의 시간은 현실에서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고, 장소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과 그 안에 주어지는 모든 미장센은 역할이 있는 소품들로 채워진다. 현실세계에서는 당장의 어떤 사건을 이루어내기 위해 모든 사물이 그 역할을 하지 않지만, 게임에서 보이는 공간의 사물들은 대부분 어떤 임무를 띠고 있다. 목적성이 강한 장소가 주어지는 것이다. 게임에서의 시간은 몰입도를 최적화하기 위한 계산된 시간일 테고 장소 역시 몰입도를 이끌기 위한 장치로 꾸며져 있다. 말하자면 게임속의 모든 사물과 세계는 필요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필요하지 않은 것, 그저 무용의 물체는 그다지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유저들은 게임공간속에 무의미한 사물을 발견했을 때 황당해하기도 한다. 그것은 게임을 진행하기 위한 각종 도구들을 생산자가 이미 적절하게 배치했을 거라고 암묵적으로 모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게임의 세계관은 유용한 사물과 유용한 시간, 유용한 공간의 연속이다. 일상생활에서처럼 존재 자체만으로 의미를 갖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도 되는 것은 필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물과 사용자간에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인지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몰입이 탄생한다는 것이 이경혁씨의 주장이다.

생산자의 능력에 따라서겠지만 사실상 게임은 그 규칙과 세계가 정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확장이 가능한 영역이다. 무한히 확장하느냐는 개발자, 즉 생산주체가 정할 수 있다. 어쩌면 사용자중에 무한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애쓰는 주체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인크래프트 같은 게임이 그런 양상을 보이는데, 기초적으로 개발사에서 제공한 영역을 넘어서 사용자들이 끊임없이 변형판을 만들어 게이머들 사이에 상호 제공한다. 이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되고 개발과 비판, 사용의 영역을 마구 뛰어넘는다. 그렇다면, 현재의 비디오게임은 앞서 말한 “생산자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 게임의 규칙”을 파괴할 수도 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교체되고 영역을 넘나드는 일이 흔해지면 그 때는 비디오게임의 형태가 어떤 식으로 발전하게 될지 지금 내 수준으로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본 강좌에서 짚은 부분은 생산과 소비 주체의 혼재가 아니라 사행성 게임에 대한 부분이었다. 게임이 모바일형태로 더욱 개인과 내밀하게 소통하면서 모바일게임은 돈과 더 가까워졌다. 지문인식이 가능한 경우 신용정보를 등록해두면 손가락을 대는 것만으로 지출이 가능해졌다. 결제가 간편해진다는 것은 소비가 더욱 쉬워진다는 말이다. 소비가 쉬워진 게임시장이 이런 기회를 간과할 리 없다. 현재 우리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모바일게임은 어느 수준에 오르면 현금을 동원하지 않고는 레벨업이 어렵게 만들어져 있거나, 현금이 있으면 더욱 쉬운 게임을 펼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불평등의 수치가 가속화될수록 게임시장은 발전한다. IMF 시절 우리나라 e-sports가 가장 크게 성장했듯이, 그 때 수많은 프로게이머들이 탄생했고 PC방 마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는 현실을 도피하려는 인간의 비겁함이라고 치부하기엔 사회적 원인이 매우 명백하다. 현실에서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결과를 얻기 어려워질 때 사람들은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한 다른 수단을 택한다. 적어도 몇 백 시간 내에 한 세계에서 최고가 될 수 있고 그 쾌감을 아는 사람이라면 게임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과거의 게임은 공들이고 시간 들인 만큼 댓가가 돌아오는 매우 평등한 매체였다.

모바일시장이 나타나면서 이 평등함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현질,이라고 하는 금융결제, 즉 돈을 가진 자가 더 앞서 나가는 게임의 룰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암담한 시대에 유일한 구원이었던 게임마저 더 이상 평등하지 않은 형태로 가고 있는 것이다.

현실세계와 유리된 듯 보였던 게임은 현실과 매우 가까워졌고 이제는 개인의 손바닥 위로, 화장실 안으로 침대 머리맡으로 아주 은밀하게 진입해 들어왔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끼리 커뮤니티를 자연스럽게 형성하도록 생산자들이 머리를 짜내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했다. 더욱 개인화된 게임은 밀실과 광장의 경계를 허물어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현실과의 경계를 점점 낮추고 있다.

게임은 마치 자생적으로 점점 커져가는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유동체가 되었다.

단순히 화면 안에서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던 게임은 이제 현실에서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하며 그 영역을 계속해서 파괴해나가고 있다. 마치, 애니팡의 동물들이 줄을 지으면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며 터져나가듯이, 언젠가는 애니팡의 화면이 밖으로 터져 나올 것처럼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게임의 확장력은 무서울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할 수도 있다. 그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게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말할 것이냐에 따라 달려 있을 것이다.

노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던 시절을 지나, 남녀노소 막론하고 지하철에 앉아서도 뭔가를 터뜨리며 쉽게 웃고 쉽게 돈을 지불하는 때가 도래했다. 이제 여기서 게임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을 것이다. 아케이드 게임이 피시방으로 옮겨가고 피시방이 손바닥으로 들어온 시기처럼, 모바일게임의 급속한 성장으로 게임은 이제 또 다른 영역을 찾아 나설 것이다. 게임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가 되어, 어떤 차원의 공간으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고 할지, 그것은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직 미지의 차원 – 우리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어떤 시공간 – 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Hell 조선에서 게임을 읽다> 제 1강 중독과 몰임 / 이경혁씨의 강의를 듣고

본 강의는 7월 14일부터 총 5강, 서울 종로구의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인문학협동조합의 기획강의입니다.

[전시]즐거운 나의 집 – 2015.2. 서울 아르코미술관

150203_iphone5s 264

붉은 벽돌로 지어진 김수근의 작품.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내 아르코미술관.

남영동 대공분실을 건축한 김수근의 건축물 안에서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본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중첩시켜 보는 것일 지도 모르겠으나 어찌됬건 한국건축에 앞장선 사람이 지은, 둔탁하고 육중한 건물에서 홈 스윗홈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150203_iphone5s 208

집이란 무엇인가

<즐거운 나의 집>전시 프로그램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우리는 세 종류의 집 속에서 동시에 거주한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기억의 집

현재 살고 있는 집

그리고 살아보고 싶은 꿈의 집

이 세 가지가 하나 된 산에 사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참 행복한 사람이다.

이 말은 어쩌면 대부분의 우리가 처한 현실 – 역설적으로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주거조건에 처해있다는 말로 들린다.

우리가 많이 묻는 질문 “아직도 거기 살아?” 라는 것들.

태어나서 여태까지 서른 번을 넘게 이사를 다닌 나에게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은 열군데가 넘어 하나 하나 순차적으로 기억해 낼 때 마다 꼭 종이와 연필이 필요하다.

전시는 인트로에 해당하는 영상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도시와 우리가 살았던 공간에 대한 스냅사진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150203_iphone5s 212

집안에 들어서는 것처럼, “다녀왔습니다” 라는 발판의 인사.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이 나온다. 익숙한 물건들, 누군가의 집에 꼭 있던 물건들. 양주, 상패, 애매모호한 성질의 물체들이 줄지어 놓여있다. 낡은 브라운관 티비엔 사물에 대한 텍스트가 흘러나온다. 오래전 어떤 접대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색깔의 소파에 앉으니 갑자기 장식장이 있던 어느 거실로 돌아가는 듯 하다. “홍은동입니다.”라고 전화를 받던 앞치마를 맨 여자가 나타날 것만 같은 물성의 감촉.

150203_iphone5s 215150203_iphone5s 219

부엌으로 들어가면 지지고 볶는 소리가 난다. 하얀 테이블에 미색 자기들이 놓여있고 식탁에서 나눌 법한 대화들이 소설과 문학작품에서 튀어나와 테이블과 그릇에 붙여져 있다. 문득, 그 공간에서 나는 눈물이 올라왔다. 따뜻하고 독립된 부엌 한 번 가져본 적 없던 유년이었으나 부엌과 밥상은 누구에게나 그립고 아련한 원형이다. 밥을 먹는다는 행위와 밥을 차려낸다는 것과 함께 먹는다는 것.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중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밥을 먹는 일이 아닐까.

이어지는 침실에서는 함께 잠을 잔다 하더라도 잠이 뒤엉켜 섞이거나 서로 잠을 자는 모습을 바라보며 같이 행위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관계와 잠을 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잠에 빠져들면 인간은 모두 개인이 된다. 꿈과 꿈이 엉키는 일도 없고 잠이 합쳐지는 경우도 없다. 가장 독립적 공간인 화장실도 누군가와 공유하기 어렵다. 근대 중국에서는 배변의 문제를 함게 해결하는 공동체중심의 개방형 화장실도 있었으나 아무리 공간을 나눠쓴다 하더라도 배설의 문제는 개별의 것이다.

150203_iphone5s 224150203_iphone5s 221150203_iphone5s 217

그에 반해 부엌은, 함께 해야만 그 가치가 상승되는 유일한 공간이 아니겠나.

우리가 살던 집에서 느끼는 푸근함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2층으로 이어지는 전시공간에는 오늘 우리가 사는 집에 대해 말한다. 충격이 시작된다. 현대의 집은 돈으로 귀결되고 부모의 재산과 나의 수입에 비례하여 주택 DTI를 설치미술로 구현했다. 놀랍고도 비참한 결과에 불쾌해질 수도 있다. 그만큼 이 사회는 뭔가 기이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당한 노력에 대한 댓가를 가늠할 수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선대에 이루어놓은 자산이 없으면 미래가 불확실한 빚더미에서 시작하고 빚더미로 끝나는데 과연 이 게임에서 돈을 버는 자는 누구인지.

150203_iphone5s 230150203_iphone5s 232 150203_iphone5s 231 150203_iphone5s 238 150203_iphone5s 239

선착순 마감 마지막 기회. 라는 말이 도시를 점령했다.

150203_iphone5s 260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고 싶은 집은 협력전시기관의 철학과 홍보가 같이 담겨있다.

본 전시는 ㈜글린트와 아르코미술관이 협력한 전시라는 게 마지막 장에서 펼쳐진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느가 하는 질문에 <즐거운 나의 집>전시는 글린트의 주장에 따른다. 공유주택, 쉐어하우스, 함께 사는 집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건국이래 주택문제는 단 한 번도 해결된 적 없다. 집이 좁고 낡았다며 시멘트를 들이붓고 발라대더니 땅값은 정신없이 오르고 다닥다닥 붙은 층간소음 작렬하는 공동주택에, 붙박이 장롱 문짝 하나에 300만원이 되는 평당 1400, 2000이 예사로운 나라, 땅과 집을 가진 권력자들은 절대 이 기득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며, 펄벅의 <대지>에서 왕룽이 말했듯이 “땅이 곧 생명”이라고 믿고 있는 이 수많은 땅주인과 건물주들은 땅이 마지막 생명이며 자손만대 길이 남을 영생의 복권이므로. 과연 대안은 가능한가? 인심좋은 지주들의 선량한 기부에 힘입어서? 그 외에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일까?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에서 다음 전시는 “우리가 살고 싶은 집”으로 이어진다는데 창밖으로 정말 살고 싶은 집의 풍경이 보였다. 남의 사생활, 누군가의 고즈넉한 집이지만 저런 집 한 채 꿈꾸며 살아도 죽기 전에 한 번 이뤄보기 힘든 나라. 참으로 착찹하다.

150203_iphone5s 254

벌집같은 고시원을 나와 벌집같은 아파트로 들어섰다. 달라진 것 같지만 달라진 건 하나 없다. 집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언제까지나 집의 물성을 무시하고 추억만 곱씹으며 살아야 할까.

2015. 2. 2.

새마을운동을 부르는 시대

1.
아이가 보는 마인크래프트 게임중계 유투브 영상이다. 양띵의 마인크래프트에 나오는 장면.

마인크래프트는 정육면체 블록을 이용해서 기본적으로 집을 짓고 양식을 구하는 등 생존을 시작하고 발전하면 마을과 도시를 만들거나 여러가지 모드를 사용해서 다양한 세계를 구축하는 게임.

최근 초딩들에게 각광받는 게임이며 일부 학교에서는 방과후 컴퓨터수업에도 활용한다. 정육면체를 이용해 공간활용에 대한 학습이 가능하다.

그 일선엔 아프리카티비에서 게임중계를 한 양띵이라는 게임중계자가 있다.
양띵은 미소와 옴므 등과 함께 양띵크루를 만들어 합동으로 진행을 하고 있는데 지난 해 양띵은 유투브 한국인 크레에이터중 최고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지금은 CJ E&J와 계약을 체결해 앱을 출시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양띵의 이런 행보를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이 처자는 1990년생으로 2007년부터 아프리카티비 BJ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뒤져보니 얼마 전 “민주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하는데 그에 대해서도 적극 사과를 했단다.

아이가 유투브로 양띵 방송을 볼 때 나도 옆에서 가끔 지켜보는 편이다. 욕설도 나오고 편안하니 초딩부터 청년층까지 재미있게 볼 만한 컨텐츠를 생산하는 건 분명하다.

욕설에 대해서는 나는 매우 관대한 편이며, 영어 섞어쓰는 보그병신체보다는 욕설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 또한, 방송에서도 불현듯 욕이 튀어나왔다가 자제합시다~ 같은 말도 이어지기 때문에 금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어제 본 방송에 새마을농사 미션이 있었는데 플레이어 (마인크래프트는 게임하는 사람의 시각에서 화면이 움직인다)가 새마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치다 이 장면을 봤고 아이에게 이게 뭐냐고 물으니 새마을농사를 짓는거라고 대답했다.

2.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시대에서 큰 비중을 가져온 일이며 그 평가는 여러 갈래다.

나는 (김영미 저 / 푸른역사 펴냄)을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고 그 책에 이어 새마을노래를 벨소리로 하고 다니는 골수 새마을키드 한 분을 인터뷰 한 적이 있다. 박근혜정부가 새마을운동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에 대해 알레르기가 일어나지만 새마을운동을 단순히 박정희 독재의 상징으로 바라봐도 되는지 궁금하다. 참여한 국민들이 있었고 저항보다 동원에 적극적이었어야 했던 가난이 있었다.

박정희가 그렇게 오랫동안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시대상이라고 본다.
4.19를 주도했던 세력들은 대체 어디서 뭘 했고 당시 국민들은 뭘 했길래 소장이 쿠테타를 일으키고 18년동안 독재를 하게 내버려뒀는가. 이미 이건 역사가 되어버렸다.

내가 느끼는 문제는, 복고와 보수주의가 같이 오면서 우경화가 그 바닥에 깔어 있다는 것이다.
공안정국, 조작질은 이 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고 우경화도 전세계적으로 전방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내가 보는 것은 현상이다.

인기절정의 개그콘서트에서 일베의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고, 여성비하, 외모비하가 공중파를 타며 일반화 되는 오늘, 일베의 용어를 쓰면 개망나니가 되고 호로자식이 되며 일베는 일베가 아닌 사람들을 비하하고 공격하길 즐긴다. 오유나 다음까페의 커뮤니티에서는 페이스북 유저들을 꺼려하고 페이스북 골수유저들은 오유와 다음까페를 무시하는 이 요상한 현상.

서로간의 교차하는 컨텐츠를 가지고 싸우거나 타 집단의 용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거침없이 비난을 해도 되는 이 분위기.

70년대를 불러내고 정신승리를 부르짖는 이 분위기. 모 논객이 토 나온다고 했던 바로 그 분위기. 그 현상을 보는 거다.

나는 이 나라의 젊은이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거나 정신적 세뇌를 받아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돈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외롭고 우울하고 처참한 세상에서 현대인을 움직이는 건 “멋져 보이는, 좋아 보이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새마을운동이 아름답고 숭고한 일로 보일 수 있다. 그 말은 새마을운동을 대체할 다른 역사적 컨텐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2015/01/img_5828.jpg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 겨울

 

1992년 봄. 낯선 선배가 찾아와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 따라 나오라고 했다.

우리 학교에는 독서서클이 있는데 비밀서클이고 학교에서는 알아서 안되는 일이라 했다. 한 학년당 네 명을 뽑는데 선배 중 누가 너를 추천해서 찾아왔으니 내일까지 결정을 해서 답을 달라고 했다. 별 일은 아니고 한 달에 한 번정도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지만 전교조 문제로 교장이 예민할 뿐이라고 했다. 선배는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갔고 나는 “선택받았다”는 느낌이 좋았다. 의식화라고 말하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고 노태우랑 전두환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며 김대중에 대해서도 잘 모르던 수준이었다. 그저 나는 이 사회가 많이 잘못되었고 이 학교도 무척 잘못된 채 굴러가고 있다는 것만 아는 정도의, 막말하는 년에 불과했다.

 

듣기로,

1989년 전교조가 시작되어 교사들이 해직되고 파면당할 때 내가 다닌 여고의 선배들은 까만리본을 달고 등교를 하고 도시락을 복도에 내놓는 단식투쟁을 했다고 한다. 교무실에서 지정하는 반장, 부반장이 모두 사퇴하고 각 반마다 대표 두 명을 자율적으로 뽑아 (그럼 그 전에는 학교에서 임원을 지정했다는 게 더 이해가 안 간다) 30인회를 구성하고, 이 선배들이 교장실에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여러 가지 민주화과정을 요구했다고도 들었다. 그 때 많은 선생님들이 이런 투쟁에도 불구하고 파면, 해직 당했고 우리학교는 사립이라 더욱 쉽게 잘라낼 수 있었다. 이후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여상 교장으로 있던 학원장이 K대 명예박사과정중이라 K대 출신 석사생들이 대거 교사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풍문도 있었다. 사실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나 정말 K대 출신 교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거의 평균출생년도 1960년생. 당시 30대 초반. 아는 건 겁나게 많고 인문과목 선생들은 서로 바꿔서 수업을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지적능력과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활기찬 사람들이었다. 그 때 교사들과 함께 선배들도 학교를 짤렸는지는 몰랐다.

 

1992년 학교 담벼락을 공사하는 사이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어느 날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던 아이들이 히터를 틀었다. 새마을과장인 50대의 영어선생이 그걸 발견하고 교실에 있는 아이들을 모두 복도에 불러세웠다.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따귀를 맞았다. 저 끝까지 한 대씩 때린 영어선생은 다시 돌아오며 한 대씩 때렸다. 그 며칠 전엔 어느 졸린 수업시간에 누구 노래 좀 듣자는 아이들의 성원이 있었다. 교사가 그걸 허락했고 복도를 지나가던 교장이 그 소리를 들었다. 교장은 벌컥 앞문을 열고 들어와 “수업 중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라고 소리를 질렀다. 교사는 그 자리에서 그냥 학생과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두 가지 일이 있고 난 뒤 어느 날 학교에 갔더니 책상서랍에 이 유인물이 있었다. 교장실과 교무실에는 뭉치로 뿌려져 있었다고 했다. 나를 불렀던 선배들 네 명이 한 일이었다. 후에 그들에게 그 날 밤의 무용담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몰래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불쾌했고 반장이었던 나는 전교 반장단이 모인 자리에서 교장이 얼마나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낼 수 있는지 정확히 봤다. 그 분노에 숨이 막혀 나는 공황발작 비슷한 걸 일으키며 쓰러졌다. 집안사정으로 자퇴를 했다가 겨우 다시 복학을 한 나에게, 다시 정학이나 퇴학이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건 옳은 일이었다. 뭘 선택할 기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쓰러지는 것 뿐이었다. 아이들에게 질질 끌려 양호실로 돌아갔고 미친 듯이 난리를 치던 교장은 며칠 후 나를 보고는 몸은 괜찮냐고 물어봤다.

 

다음 해 문학과목을 배우게 되면서 지금은 모대학에 문창과에 출강하는 안모씨가 문학선생이 되었다. 그 지엄한 교장 밑에서도 취해서 들어오는 날도 적지 않았던 그 양반이 어느 날은 술 냄새를 달큰하게 풍기며 들어와

“얘들아. 바다를 보고 싶지 않느냐. 바다! 바다! 아 동해바다! 동해바다로 가자!” 하더니 아이들을 모두 이끌고 학교 수돗가에 세워져 있던 스쿨버스에 애들을 태웠다.

관광가이드처럼 버스 앞에 선 문학선생은 “자, 이제 이하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이 버스를 타고 동해바다로 가는거야! 이하나. 뭘 부를거냐!”

“고래사냥?”

“그렇지!! 역시!! 그래! 우리는 동해바다로! 고래를 잡으러 간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 뿌우니이네에~ 열여덟 아이들 앞에서 열 아홉 내가 서른 서너살의 술취한 문학가와 함께 덩실덩실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노래가 끝나고 문학선생은 너무 심취한 나머지 신이 나서 지나가는 요구르트 아줌마에게 100원짜리 요구르트 48개를 사서 아이들에게 돌리고 자기도 하나 마셨다. 광란의 분위기가 멈추기 전에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버스 문을 두들겼다.

 

“선생님. 헉.헉… 선생님. 교장실.. 헉. 헉. 교장실.. 교장선생님이.. 헉헉. 지금 노래한 거 .. 이하나죠. 헉헉. 둘이 같이 들어오시라는데요. 헉헉.”

 

안선생과 나는 둘이 같이 교장실로 불려들어가 나란히 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교장은 나와 안선생의 중간지점으로 정확하게 교장명패를 던졌다. 안선생이 술이 취해서 몰랐던 모양인데, 그 스쿨버스는 교장실 창문 바로 아래 주차되어 있었다. 교장실에서 10분 넘게 욕을 먹고 나오는 길에 안선생이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안선생의 1미터 넘는 어깨가 무척이나 무거워보였다. 그 다음해에도 내 문학선생은 안선생이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동지의식을 가지고 문학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가끔 나에게 단편소설을 낭독시키고 본인은 잠을 자기도 했다. 좋다. 좋아. 잘 읽었어. 내가 읽는 건, 김유정의 동백꽃의 대사 “느 집엔 이거 읎지?” 이런 사투리와 적절한 성대모사였다.

 

<나무가 보내온 편지> 하명희작가의 소설을 전성원편집장의 소개와 양돌규선생의 소개로 읽었다. 나는 그들의 후배가 된다. 내 위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전교조집회에 앞장 서 있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185617221_f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85617221

1989년, 중학교 2학년때 전교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우리 학교에서도 몇 명의 교사가 해직되었으나 너무 조용히 진행되었다. 등교투쟁도 있었으나 나는 학생회 부회장인데도 알 수 없었고 나는 전교조의 문제보다 학생의 자치권에 관심이 있었을 뿐. 간선제였던 학생회 임원들을 직선제로 돌리는 것에 집중하고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때 우리 학교에서 해직당한 교사 한 명이 전교조 총무로 인터뷰 하는 화면을 보기도 했다.

1993년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전교조집회가 있었다. 나는 우리 한뜻 친구들 여덟명과 함께 그 집회에 참석해 열심히 팔을 휘두르며 전교조노래를 불렀다.

보라 힘찬 우리의 깃발 / 당당한 우리의 선언 / 학교위에 높이 날리며 / 참세상 횃불 춤춘다. / 우리 흘린 피와 땀으로 / 참교육 곧게 세우고 교실 가득 가슴 한가득 / 폭압을 뚫고 가네 / 살아오는 아이들 손잡고 / 교단에서 거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교육 노동자 / 전교조 우리의 사랑 / 전교조 우리의 생명 / 참교육 승리 그날까지 전진하는 동지여 / 보라 푸른 조국의 하늘 / 솟구쳐 오르는 새 날 / 한라에서 백두까지 / 물결쳐라 전교조 /

 

그 때 누군가, 이게 마지막 전교조 집회라고 했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어찌되었건 나는 다음 해에 고3이었으므로.

한뜻에서 같이 활동하던 친구는 내가 고3이 된 해에 연세대에 입학했다. 1995년 내가 명동호프집에서 시급 2500원을 받으며 300평정도 되는 호프집을 헤집고 다니며 맥주를 나를 때 그 친구가 이른 저녁에 나를 찾아왔었다.

“나 한총련 탈퇴할려고.”

“왜.”

“나는 있잖아………… 이런 건 아닐거라고 생각했어. 왜 여기서도 권력투쟁을 하는 지, 나는 그게 이해가 안간다.”

친구는 혼자 앉아 맥주 몇 잔에 담배를 한 갑 몽땅 뽀개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 한총련을 탈퇴했고 그 다음해에 연세대 사태가 있었다. ㄷ여대 노래패에서 활동한다던 친구는 지금 뭘하는 지도 모른다. 다들 흩어져 그냥 애엄마로 사는 건지 아무도 뉴스에 나오지 않고 페북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생각이 났다.

잊었던 노래가락도 생각나고, 그 노천극장의 깃발들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되었는데 나는 뭔가 어설픈 시대에 발만 걸쳤다가 어설프게 밀려났거나 내가 뒤돌아 나왔거나 내 밥상에 밥그릇을 챙기느라 멀리 본 적이 없다. 그저 이렇게 책으로 다시 읽고,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추억만 하는 무력한 삶이다.

 

2014. 12. 29.

 

 

믿습니까!

1. 강신주의 글때문에 충격받았다는 글은 어제인가 그제 봤다. 그리고 그게 퍼져서 오늘 오후부터 여기 저기 담벼락에 걸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떻게 이리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반응이었다. 그 글은 2012년 어느 신문에 기고한 칼럼이고, 수치심에 대해 거론하며 노숙자를 끌어 들였는데, 그들은 ‘수치심도 모르는 존재’처럼 읽을 만 했다.

그 글에 대한 분노폭발은 강신주 개인에 대한 분노폭발로 이어졌고 인신공격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 분노의 대열에 쉽게 동참하지 않은 것은 일단 운전중이었고, 대부분의 반응이 ‘어떻게 철학자라는 사람이 이럴 수 있느냐’ 였기 때문인데 이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의 대다수가 나와 비슷하게도 평소, 닭그네나 귀태의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는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형평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권력을 가진 자, 즉 기득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비난과 원색적인 욕설까지 할 수 있다. 때로 그런 것들은 정의로운 발언, 속시원한 이야기, 타인이 하지 못할 이야기를 대신 하여 카타르시스를 전해준다 – 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그러나 그 반대축에 서 있는 약자에 대한 비난은 무식한, 뻔뻔한, 엘리트 지상주의의, 인문학이 뭔지도 모르는, 저 딴 게 학자라고, 일컫는다. 매우 쉽게.

나는 아까 그 글을 보고, 왜,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해도 되고, 노숙자에 대한 비난은 하면 안되는가? 라고 생각했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약자의 정의는 무엇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그랬다. 약자 앞에 약하고 강자 앞에 강하자는 주장아래, 강자를 씹어내어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대신 약자는 언제나 사회적 피해자라 “나를 투사하여” 맹목적으로 그들의 편을 들었다.

여기에서 내가 제시하고 싶은 것은 왜, 약자는 객관적으로 평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되는 대상이냐는 것이다. 그게 과연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가?

어제 나이지리아의 한 소설가인 치마만다 아다치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단편적인 이야기의 위험성.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보지 못한 약자계층에 대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2. 가난하다는 건 벼슬이 아니다. 부자인 것도 벼슬이 아니다.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그 모든 것도 단편적이지 않다.

권력과 부를 가진 누군가의 삶은 평생 폭력에 노출되어 이미 정신적으로 좀비(오늘 회자된 낱말이므로 활용해보도록 하자)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돈과 명예보다 삶과 행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쉽게 불행한 부자를 시기하고 비난한다.

적어도, 이 글을 읽을 정도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가난이 몸에 익은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좋게 말해 자유롭다. 쉽게 말해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구걸을 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은 자존감이 바닥에 가닿은 것이 맞다. 그게 항상 그의 의지때문도 아니고 항상 사회적 구조 문제 때문도 아니다. 이야기는 단편적이지 않으므로.

20년전 동자동 뒷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은 주변에 피해를 입히며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담배를 피우며 앵벌이를 해서 냉장고를 바꾸고 보일러를 바꿨다. 싸움을 하다 가스통을 열어 불을 질러 버리기도 했다. 아침 10시에 소주병을 들고 돌아다니다 행패를 부리기도 했고, 새벽부터 출근하여 하루 종일 그들의 오줌을 닦아야 하는 경비원과 청소노동자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몇 백원을 달라고 생짜를 쓰기도 했고,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이불이나 옷을 훔쳐 가기도 했다. 그들에게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늘 여러사람들이 비난한 강신주의 표현에 의한 ‘좀비같은 노숙자’이거나 그보다 조금 형편이 나아 쪽방 한 칸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만큼 법의 외부에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부류들은 또 있는데 바로 고위 권력층이다.

3. 경제적 약자를, 노점상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타당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는다. 당신이 며칠 동안 애를 써서 겨우 접속한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소득공제 자료를 찾고 어떻게 10원이라도 더 환원 받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일을 그들은 안 한다 말이다. 그들이 받는 혜택이 없기에 세금도 내지 않으며, 때로는 어느 학교의 담벼락에 무단으로 조립식 건물을 짓고 통행을 방해하며 몇 년씩 재산권리를 주장하다가 관공서에서 철거를 해서 세금 잘 내는 시민들에게 돌려줄 공원을 만들겠다고 하면 드러누워 폭력경찰 물러가라 ㅇㅇ시장 자폭하라. 등등의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이런 예시도 단편적이다. 우리는 항상 이 단편적 이야기의 반대편도 살펴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긴 걸 여기까지 읽은, 혹은 강신주가 누구인지 아는 바로 우리- 나를 포함하여) 약자를 비난하기 꺼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출발선이 달랐거나 혹은 같은 선에서 출발했더라도 여러가지 개인적 사회적 이유 때문에 많은 기회를 박탈당했을 거라고 잠재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 중의 일부가, 스스로 그 기회를 계속 해서 거절해왔거나, 마음에 맺힌 상처 때문에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규정하고 계속 사회에서 겉돌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을 어떻게든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내부의 인물로 끌어당기기 위함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암묵적 동의 안에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법 안의 테두리에 존재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법과 사회란,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은 보호할지라도 그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내던지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당해보이는” 사회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강신주의 “좀비같고 강시 같은 노숙자들”에 대한 반응이 과한 것은 아닌가 경계해본다. 무릇 학자라면, 더구나 인문학 학자라면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문학이란 인간의 무늬를 곱게 아로 새기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혜택받은 지식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설령 시궁창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더라도 어찌됬건 그들은 문자 해독 능력을 부여받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좋은 뇌를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므로. 때로는 그들이 선택하지 않은 타고난 혜택 때문에, 혹은 주변의 환경 덕분에 그렇게 될 수도 있으나 절대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의해 지식인이 될 수도 있다. 의지도, 타고난 힘이라, 그 역시 혜택이라 쉽게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사회적 공적 자리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모두 “그러면 안돼” 라고 쉬쉬하며 동의하는 어떤 규칙에 대해서 과감히 아니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오늘 나는 강신주의 글을 읽고 한 개인의 의견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가 우려한다. 혹은 잘나가는 대중철학자를 자칭한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전혀 없었는가 확인하고 싶다. 몇 달전 서점에 갔다가 강신주의 책이 비소설, 인문 부분 베스트셀러 대열에 다수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어… 이 양반 심하네. 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게다가 그는 모 방송국의 예능프로그램에까지 출연했으며, 공중파에서 강의도 한다. 적어도 대중들에게 매우 알려진 사람이며 알려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의 역할은 인문철학계의 공지영쯤이다. 공지영에 대한 문학적 성취나 작품성, 언어조탁성을 떠나 공지영을 인정하게 된 계기는 1년에 책 두 권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 공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본 다음부터다. 그래 때로 저런 역할을 해내는 사람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말하자면 예전에 MBC 방송국에서 했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책을 소개할 때 있었던 논란과 같은 거다. 그 프로그램은 도서시장을 분명히 부흥시켰다. 신동엽이라는 이름은 개그맨의 이름으로만 알던 사람들에게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사 읽게 했다. 아무리 좋은 글도, 사람들에게 읽히지 못하면 일기와 다름없다. 세상 가장 평등한 전달 수단이 글자이며 책이라 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 마당에 대중적 철학자 하나 있으면 좋지 아니한가.

공지영이나, 강신주 같은 대중적인 지식인들은 위험하지만 그들의 순기능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이 또 한 번의 단편적이지 않은 접근이겠다. 그가 말한 노숙자에 대한 표현도 내가 읽기엔 달을 보랬더니 손가락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가 노숙자를 비난하기 위한 글을 썼던가. 그 글에서 노숙자는 장치였다. 물론 사람의 삶을 놓고 대상화 한다는 비난은 면하기 어렵겠으나 어떤 삶을 대상화하지 않고 글을 이끌어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강신주가 그만큼이나 되는 사람인가는 세월이 더 흘러봐야 알겠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수치심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리너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왜, 그가 말한 글의 장치에 대한 비유 하나에 이렇게 화를 내는가.

만일 그가, “대통령이랍시고 눈알은 비어 있고 영혼이 없는 미소를 내뱉으며.” 라고 썼다면 뭐라고 답했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만일 “대통령이랍시고 영혼이 없는 미소를 내뱉는” 이라는 수식어를 2011년에 썼을 때와 2003년에 썼을 때라면 얼마나 다른 평가가 나타나겠는가. 내가 믿는 진실과 내가 믿는 상식이 절대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게 지식인의 자세일까? 정말?

2014. 1. 16.

그의 원문글은 다음 링크다.

http://pdf.joins.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2201204080056

2012년 4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