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간다.’

과거로부터 온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를 온전한 자기 삶으로 바라보는 홈리스의 이야기.

제주도 출신으로 보육원에서 자라 조소작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IMF이후 일자리를 잃고 18년간 홈리스로 산 임상철 씨의 글 모음집이다.

6년간 빅이슈를 파는 빅판으로 활동했던 임상철 씨는 잡지를 사주는 사람들이 고맙고 자기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매달 자기가 파는 빅이슈에 글과 그림을 그려 A4용지에 출력해 끼워 넣었다. 그렇게 보인 52통의 편지. 과장도 증오도 원망도 없는 덤덤한 홈리스의 이야기.

왜 살아야 하는가 묻는다면,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을 생각하면 된다고 말해줄 수 있겠다.

참고할만한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wt9Ua7aht4g

지금은 조각가로 살고 계신 듯 하다.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
임상철 글/그림, 생각의 힘 펴냄

2020. 5. 24.

임상철지음 / 생각의 힘 펴냄

문자가 주는 오만함을 경계하라

[서평]활자 잔혹극 – 루스 렌들

영국 미스테리 소설의 거장 루스 렌들의 <활자 잔혹극>은 1977년작이다. 한국에는 북스피어 출판사가 2011년에 소개했다.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 “의식(儀式)”의 원작소설이다.

▲ 루스 렌들 (지은이) | 이동윤 (옮긴이) | 북스피어 | 2011-11-25 | 원제 A Judgement In Stone (1977년)

오만의 유혹, 세계의 파멸

소설의 첫 문장은 도발적이다. 사건의 결과를 내던지고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 이런 일이 있었어.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내가 지금부터 잘 설명할텐데, 듣고 싶으면 듣고 아님 말어’ 라는 태도로 보인다. 소설은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히고 시작한다. 독자가 찾아내야 할 것은 그 원인이다. 문맹인 가정부가 지식인 가족을 살해한다. 그 곁에는 광신도인 미치광이가 하나 붙어 있다.
주인공은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왔다. 문맹이라는 건 제도권 교육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며 누구도 이 주인공을 살뜰하게 보살피거나 주인공의 미래를 진지하게 염려한 적 없다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문맹이 느낀 수치심은 과연 어떤 것인지 사실 잘 알 수 없다. 글을 알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마지막 해제에 장정일이 적은 발문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단초가 된다. 영어권 국가에 갔는데 말을 한 마디도 못해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던 적 있다면. 이라는 부분을 읽으니 개인의 경험이 생각났다.

10년도 훨씬 더 전에 공부를 하겠다고 중국대륙으로 갔다. 중국어는 학원을 몇 달 다녔지만 사실 한 열 마디 정도 하는 게 전부였고, 영어가 어느 정도 통하겠거니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며 대책없이 떠났다.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부터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나는 영어로 된 호텔명만 알고 간 것이고, 내가 아는 주소도 영어로 된 것이라 발음이 명확치 않았다. 택시기사 한 명에게 호텔명을 댔더니 공항에 줄 지어 서 있는 택시기사 수십 명이 몰려들었다. 그 땅은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새로운 단어는 중국어로 바꾸어 말했고, 내가 도착한 상하이라는 도시는 사투리마저 심해서 어학연수 기간 내내 표준어를 배워봤자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말도 글도 안 통하는 몇 개월을 보내며 어릴 때 본 중국무협드라마에서 본 이미지가 떠올랐다. 팔다리가 다 잘려서 항아리속에 목만 내밀고 살아있는 반역자의 모습이었다.
이후, 말을 떼고 글을 배우고 알량한 글밥으로 공부를 했을 때의 심정은 좌절감, 열패감, 소외감, 박탈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표현명사는 다 갖다 붙여도 무방하다.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설마 주인공의 감정을 반푼어치라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까?
아닐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평생을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온 것이다.
주인공에게 문맹이라는 건 치명적인 비밀이요 상처다. 불행하게도, 주인공은 숨기고 싶은 상처를 후벼파는 대상들에 둘러싸여 산다. 결국 주인공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

작가는, 주인공의 이 문제가 그저 감정의 것으로 건드리고 넘어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문화전체와 문자라는 기표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문자로 둘러싸인 삶과 지식인연 하는 것과,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고 드는 기득권층의 계급성을 두고 문화의 차이로 인한 삶이 달라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질문을 던진다. 문화수혜자와 문화박탈자의 경계는 또 다른 계급갈등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이 어떤 삶을 꾸려가는가는 사실 의지의 문제와 동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언어의 기의도 누구에게나 동일하진 않다. 굳이 성문화하지 않은 약속이 있다고 치면, 언어의 기표는 특별한 교육을 거쳐야 습득할 수 있다. 근대교육은 분명 특별한 영역이다. 그저 너무 흔해서 보편화된 것처럼 보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맹이 아닌 이들이 말하는 보편이나 평범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본인이 기득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기득권들의 놀음은 아닐까.

예를 들어, 쪽방촌에 사는 70대 이상의 노인들은 메모를 길게 하지 못한다. 문자습득이 순탄하지 않았고 문자는 그저 명사, 이름씨로 존재하지만 문자를 사용해 감정이나 생각을 전달할 정도의 문자 습득력은 없다. 이것은 문해력과 바로 직결되는데 타인의 기표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되면 온전히 사람의 표정과 어투, 말씨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휘갈겨대는 수많은 문자를 보며 온통 어지러운 세상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글씨는 쓸 줄 알지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엉망이었다. 이 사람은 초등학교를 3년 정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였다. 가정내 폭력으로 가출이 아닌 구출을 받아,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의 남편이 문맹인 거 같다고 나에게 고백한 적 있다. 그 남편은 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랐고 역시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다. 결혼 후 모든 공기관과 은행 업무를 이 사람이 도맡아서 했는데 남편은 글자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예상되기만 해도 짜증을 부리고 포악을 떤다는 것이다. 남편의 얘기를 전하던 그는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포악을 떨 게 뭐냐고 투덜댔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문맹이라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개연성을 생각해보면 아감벤을 떠올릴 수 있다. 조르주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에서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루스 렌들이 말하는 문맹이라는 형상은 그저 여러 종류의 호모 사케르 중 하나일 것이다.

문해자들은 문맹을 보면 가르치려 든다. 문맹자의 의지박약을 말할 것이고 동정하고 연민하며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겠다고 안달을 할 것이다. 타인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지 않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인간이 많다. 과연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해도 되는 행동인가? 존엄의 문제와 과연 무관할까? 이는 통제의 한 방편이거나 폭력의 묘한 양상은 아닐까?

주인공의 이름은 유니스다. 유니스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한 존엄한 존재가 가진 온전한 세계의 침탈을 꿈꾼 한 가족에 대한 인간으로써의 저항일 수도 있다.

“유니스는 숨쉬는 돌이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유니스는 문자가 필요 없는 원형 그대로, 문화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특정한 세계, 요컨대, 자연계의 상징으로 보였다.

영어 원제는 A Judgement In Stone이다. 위에 소개한 문장이 그 핵심문장이 되는 셈이다. 사전을 다시 뒤져 in stone을 확장해 찾아보면 carved in stone이라는 관용어구가 나온다. 변경불가능한, 이라는 뜻이다. 돌은 그런 것이다. 돌에 새긴 심판, 이라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말할 것이다. 문맹 너머, 유니스라는 한 개체가 가진 특질과 그 개체가 40년간 흡수해 온 문자를 제외한 사회문화의 많은 것들이 상징하는 바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변경 불가능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떠한 세계.

조선 후기 문인 김려(1766-1821)는 사유악부(思有樂府)에서 ‘세상이 어지러워 화 당하기 쉬우니 글짓기를 조심하라’고 전했다. 글짓기나 글쓰기가 과연 세상이 어지러울 때나 조심해야 할 일일까. 우리는 글 속에 파묻혀 얼마나 많은 것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만을 떨며 죽어가는가. 배운 것이 탈이고, 아는 것이 병이로다. 무수히 부딪히는 세계와 세계의 충돌, 그 사이에 벌어지는 크레바스 같은 파멸은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작가의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래 읽히는 작품은, 늘 온당한 이유가 있다.

▲ La Ceremonie, 1995 | 감독 : 클로드 샤브롤 Claude Chabrol | 주연 : 상드린느 보네르(Sandrine Bonnaire), 이자벨 위페르 (Isabelle Huppert)

[추천]보리 국어 바로쓰기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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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서림에서 나온 국어사전을 가지고 있다.
단어만 나열한 사전은 수록된 낱말의 숫자로 승부를 보는 모양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보리 국어사전은 수록어휘가 많은 사전은 아니다.
허나 책상 위에 쌓아두고 펼쳐보기도 힘든 초대형 국어사전과 다르다.

1. 외관
1) 펼쳐볼 만한 두께.
예전에 쓰던 시사엘리트영한사전이나 코빌드 영영사전 정도의 두께이고 무게는 그보다 약간 더 나간다. 종이가 영한사전 종이보다는 조금 더 두껍다.
2) 내지 디자인이 보기 좋다.
노안이 오기 시작한 40대도 볼 만한 글자크기로 일반 단행본보다는 작은 글자이지만 시원시원하게 잘 편집했다. 주제어는 더 크게, 그에 대한 설명은 조금 작게 구성되어있다.
3) 예쁘다.
하앍.
사전도 예쁠 수 있다.

2. 내용
1) 한 눈에 구분할 수 있는 편집
틀린 말 앞에는 연한 보라색으로 X가 표시가 되어 있다.
2) 필요한 정보만 넣는다.
모든 단어에 발음표시가 된 게 아니고 주의해야 할 낱말에만 있다.
관련된 복합어, 관용표현, 속담, 타동사형 등 낱말별 유의할 점이 낱말마다 다르게 수록되었다.
3) 뜻을 잘못 아는 말, 구별하는 게 좋은 말 표시
사람들이 흔히 틀리게 쓰는 말을 구별해놨고, 깊은 의미를 잘 몰라서 정확하게 쓰지 못하는 말도 설명했다. 예를 들어, 감추다와 숨기다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4) 활용 설명
접두사나 용어활용에 대한 설명을 박스 안에 다시 설명해 국어공부가 가능하다.
5) 부록이 압권
조사, 어미, 발언, 용언활용표가 실려 있다.
이거만 봐도 국어문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을 듯

아 이 사전 좀 사라 사람들아.
이렇게 훌륭한 사전이 8만원 밖에 안 한다.

 

2017년 1월 10일

 

[서평] 해녀와 나 – 너 독새끼가 뭔주 아나?

우도 어멍들과의 1년, 육십 넘은 막둥이의 변주곡

제주는 근현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섬이다. 최근 몇 년간 관광산업이 급성장해 제주는 이제 국내외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명소가 되었다. 최근 10년 사이 이 도시에서 제주에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집중이 잘 안 될 때 나는 사진집을 찾는다. 요즘은 공공도서관에도 좋은 사진집이 많이 들어와 있다. 사진집은 여타 단행본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 그 값이 꽤 나간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책이 늘어날수록 이미 읽은 것도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데 사진집류가 주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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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초이 찍고 지음 / 남해의봄날 펴냄

 

이 사진집은 준초이라는 사진가가 제주 옆 우도에서 1년을 보내며 기록한 바다 어멍들의 이야기다. 준초이는 이제 나이로 따지면 노년에 가깝다. 책 소개에 보면 2005년 제주에서 광고 촬영을 하던 그가 멀리서 들려오는 숨비소리에 이끌려 우도에 들어가 해녀 사진을 찍은 것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고 쓰여 있다. 이 책은 사진과 작가의 이야기가 같이 어우러져 있는데 사진의 기술력이나 예술성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만큼 완성도가 높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미지 옆에는 도시에서 온 사진작가가 바다와 해녀들을 대하는 어설픈 모습이 소박하게 적혀 있다.

 

“이땅 마중 올 때 독새끼난 50개 삶아오라, 너 독새끼가 뭔주 아나?”
“예! 계란!”

날이 더우니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려고 냉장고에서 차갑게 얼은 생수를 가져다 줬는데 차가운 바다에서 한참 물질을 하다 온 해녀들에겐 하나도 도움이 안 되었다거나 의미심장한 대답을 기대했는데 툭 던지는 일상의 언어에 놀란다거나, 그 사진기 들고 다녀서 처자식 먹여나 살리겠냐는 어멍들의 이야기에 쑥스러워하는 작가의 낮은 마음이 정겹다.

해녀들은 자존감이 높다고 한다. 자식들이 제발 물질만은 그만하라 말려도 바다에 들어가면 먹을 것을 캐오고 돈으로도 바꿀 수 있으니 노동이 주는 기쁨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다. 준초이는 쉽게 말해 잘나가는 광고사진 작가였다. 그런 그가 바다 어멍 앞에선 까까머리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작가는 해녀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내리 바닷가에서 머뭇거리고 계란도 삶아놓고 기다린다.

우도에서 1년을 보낸 작가는 더 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김영갑의 제주사진은 철저히 고독했다면 준초이의 바다와 해녀는 뜨거운 정열과 뭉클함이 있다. 왠지 모르게 심심한 주말이라면 이 검고 푸른 바다를 누비는 신령같은 해녀들과 그 곁에 쭈삣거리는 대가의 이야기를 들어봄직 하다.

통영에서 작은 출판을 하고 있는 남해의 봄날에서 펴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숨가쁜 프리랜서로 살아온 내가 우도에서 보낸 1년은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시간이었다. 분명 존재했을 현재라는 시간대를 음미하지 못하고 앞으로만 뛰어가는 내 모습이 한때는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남에게 비춰질 것이 창피하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진 삶의 몸통에서 현재는 토막난 채로 과거와 미래 어느 쪽인가로 흡수, 통합되어 버렸던 시절이었다. 해녀들은 언제나 현재를 산다. “물때를 어질지 마라” 하시던 옛 어른들의 지혜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자연의 섭리에 맞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준다. – 책 216쪽 중에서

《고양이 마을로 돌아가다》-  나쁜 자본주의와 이별하기

 

히라카와 가쓰미 지음 / 남도현 옮김 / 이숲 펴냄

 

문득 서평을 쓴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읽으라고 초강추라고. 꼭 읽으라고.” 한 줄이면 될 것 같다.
한 권에 책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을 할 필요가 뭐가 있냐는 생각이 드는 건 굳이 쪼개어 해체하거나 느낌을 덧붙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고양이와 같이 사는 나에겐) 제목이 참 매력적이다.
고양이 마을로 돌아가다니. 고양이는 인간이 키우는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위상을 높였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양이를 모시고 산다고 말한다. 어쩌면 지구의 주인은 고양이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진지하게 들을 때 나 역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도시에 산다. 전혀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고양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양이를 대하는 도시민의 태도가 그 도시의 인간미를 측정하는 지수가 된다고도 한다. 작은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모여 그 도시 시민이 생명을 대하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이 책은 멀리가지 않고 도시의 골목을 거닐며 자본주의에 대해 성찰한 한 사업가의 명상이다. 주장이라고 보기엔 논조가 부드럽고 이야기라 하기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또한 책상에 앉아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언저리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고양이 마을도, 그가 관찰한 고양이들을 지켜보다가 나온 이야기다. 이전에 출간했던 저자의 책중에 《‘소비를 끊는’ 공중목욕탕 경제의 권유》라는 책도 있는데, 이 책에도 공중목욕탕과 가업을 잇지 않으려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처럼 동네를 산책하며 고심했던 소재들이 등장한다.

책은 1장과 2장으로 나뉘어 있따. 1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이야기를, 2장은 골목길에서 찾은 자본주의와 자본이 바꿔놓은 우리 일상의 이야기들을 한다. 일본과 한국은 여러 모로 닮아있다. 한국은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저자의 이야기가 더 정겹게, 실감나게 들릴 것이다.

작가는 1950년 도쿄 출생으로 사업가이자 저술가이다. 벤처사업가 중 하나라고 알려졌는데 참신한 업종을 창업한 경력이 있는데 저술한 책을 보니 기존의 체제와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히라카와 가쓰미가 쓴 그간의 책은 《반전략적 비스니스의 권유》, 《주식회사라는 병》, 《경제성장이라는 병》, 《이행기적 혼란-경제성장 신화의 종말》, 《소상인小商人에의 권유-경제성장에서 축소 균형의 시대로》,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 《소비를 그만두다》 등이다. 그러니까 기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계속 제시하고 주장하고 있다.

묵직한 경제학원론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겉핣기식 책은 아니다. 발로 쓴 글은 어딘가 깊이가 있는 법이다. 혼자 읽고 음미하기도 좋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독서모임에서 자신의 일상과 비교해가며 함께 이 책을 읽는 것도 매우 좋겠다.

 

나는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지만 (이런 문제는 그때가 돼야 알 수 있겠지만), 인간의 죽음을 법제화한다는 생각에는 거부감이 든다. 그리고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는 자연사를 ‘존엄사’라 부르는 것에도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발상에 ‘당사자의 책임’이라는 근거를 끌어들인다는 점이 못마땅하다. (중략)
내가 존엄사 법안에 반대하는 이유는 죽음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사건이며, ‘죽음’이라는 개념이 일반적 정의가 필요한 법과 어울리지 않아서다. 죽음이 개인의 문제라는 인식에서는 법안의 취지나 내 생각이나 똑같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죽음은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집단적, 집합적인 면이 있고, 또 역사적인 면이 있다. 이런 측면이야말로 죽음을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법안에는 이런 부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임상 차원에서 죽음은 역시 개별성이 문제시된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죽음이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대책이 있기에 이 문제를 획일적으로 다룰 수 없다. (중략) 결국, 죽음은 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닌 무엇이다. (58-59)

“처음부터 지금까지 실마리는 없었다.” 헤이안 시대(794~1185) 진언종을 창시한 구카이가 지은 『삼교지기(三敎指기)』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실마리는 인간의 지성 밖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할 뿐이다. (98)

토드는 가족 분류를 설명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점을 지적한다. 외혼제 공동체 가족이 분포된 곳은 러시아, 중국, 베트남, 구(舊)유고슬라비아, 쿠바, 헝가리 같은 국가들이다. 즉, 사회주의 국가들은 거의 외혼제 공동체 가족 구조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나는 이런 지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즉, 공산주의 국가처럼 ‘권위주의’와 ‘평등주의’라는 두 가지 규제력을 통해 통치되는 공동체는 원래 외혼제 공동체 가족 체계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도 하나의 구상인 것이다.
*토드 『세계의 다양성(La Diversite du monde. Structures familiales et modernite)』의 저자 엠마누엘 토드

많은 사람이 일본 전체가 순식간에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경험했다. 만약 원전 사고의 영향이 도쿄까지 미쳤다면, 수도의 기능이 마비됐을 뿐 아니라 모든 정치 기능이 수도에 집중된 일본 전체의 기능이 마비됐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기능을 분산하고, 수도 이전을 고려하는 등 집중을 막으려는 논의는 정치가 사이에서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고 있다. 국가만이 아니라 세계도 집중이 아니라 분산을 통한 공존을 구체화하는 것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자연에서 배워야 할 지혜다. 효율만을 중시하는 중앙집권 체계와 지속을 위한 공존 체계라는 두 가지 사고방식이 서로 싸우는 것이 오늘날 상황이다. (126)

지구의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이토록 많은 쓰레기를 배출한다. 문명인의 생활은 어쩌면 쓰레기를 만들고, 쓰레기를 치우는 삶이다. 개도, 고양이도, 가축도, 야생동물도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 그들의 배설물을은 시간이 흐르면 땅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집을 짓거나 부수지 않는다. 보금자리는 자연 그대로 풀숲이나 나무뿌리 사이, 혹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에 있다. 해가 뜨거운 여름에는 어디가 시원한지, 추운 겨울에는 어디가 따뜻한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아니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간다. 인간만이 자연에 도전하고, 자연과 대립하고, 자연을 가공한다.
최근에 ‘지속 가능한 사회’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인간을 제외하면 어떤 생물도 지속 가능한 사회라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간다. 지속 가능한 사회는 오로지 인간에게 국한된 개념으로 다른 생명체한테는 너무도 당연해서 염두에 둘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133-134)

사무실 뒤쪽에는 나무가 많은 공원이 있는데, 뒷문으로 나가 잠깐 쉬다 보면 이네무리 군이 햇볕을 쬐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다. 이네무리 군이 나무 아래서 오줌을 누고 나서 요령 있게 모래로 덮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은 참으로 정교하게 조직돼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중략)
우리는 고양이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134)

정치가는 자기 정치 생명의 큰 부분을 주식회사에 의존하고 있다. 주식회사의 경영자들 또한 성장을 지속시키지 못하면 그 소유자인 주주들에게 버림받을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다. 혀재 국가는 주식회사에 의해 지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국가가 구사하는 경제 성장 전략은 실제로 주식회사의 전략이고 국가가 말하는 성장 시나리오의 내용 또한 주식회사 경영자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136)

문명의 발전은 어떤 가혹한 자연조건에서도 살아갈 조건을 갖추도록 도구와 기계를 만들어냈다. 가혹한 자연조건을 완화하고,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어느 정도 에너지가 필요할까? 우리는 자연이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면서 자연과 관계 맺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한하다고 생각했던 자연은 소진할 것이며, 오늘날 바로 그런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140)

찬찬히 바라보면, 정상경제를 우리가 발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일하고 살아가는 바로 이 땅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일하고 살아가는 바로 이곳을 소중히 여기고, 품격 있는 국가로서 실현할 수 있는 경제를 새롭게 구상해보자. 품격 있는 국가는 품격 있는 의식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153)

한심한 독서

1.
글자를 읽기 시작한 건 너댓살 무렵이다. 당시엔 그 나이에 글자를 읽는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신동소리를 들었다.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꽤 많은 분들이 동일하리라 생각한다.
처음으로 읽는 책이 국민서관의 <신데렐라>였다. 참으로 한심한 동화다.

7살엔 사촌오빠네서 얻어온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백과사전을 읽었다. 읽는 책인 줄 알았다.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48권짜리 위인전집을 읽었고 그 다음에 전래동화집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 읽었다 싶은 건 전래동화전집이었다. 나머지는 차라리 읽지 않고 나가 노는 게 나았다.

초등학교 5학년때는 읽을 게 부족해 세로로 된 책이나 어른들 책도 읽었다. 선데이서울도 읽었고 뺑끼통도 조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세계걸작 다이제스트를 읽은 건 누군가 읽지 말라고 뺏었어야 했다.

초등학교 때 독서대회를 한 달간 했다. 상 받으려고 얇은 책만 골라 읽고 독후감을 날림으로 썼다. 한 달동안 53권을 읽고 전교 1등을 했다. 목적은 상장이었지 책 읽는 게 아니었다.

중학교때는 성경을 두 번쯤 읽고 휴거를 주장하던 다미선교회의 책과 두란노서원과 말씀사에서 나온 종교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성경을 읽은 것 외에, 쓰레기를 읽느라 시간을 많이 보냈다. 차라리 연애나 하든가 연예인 팬질이 나았다.

진심으로 책을 읽은 건 중•고등학교 때였다. 한국근대문학을 많이 읽었고 정신세계사의 책을 읽고 몇 달을 앓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난 뒤에 매일 먹고 사는 문제로 괴로운 주제에도 책은 읽었다. 무언가를 읽고 쓰는 일은 매우 당연한 일상이라 무시로 읽고 썼다. 쓰는 건 대부분 체계없는 일기였다.

중국으로 공부하러 건너간 다음에도 교보에 해외 책배송이 생기자마자 생활비를 탕진해가며 책을 샀고 한국에 들를 때마다 40kg를 채워 배낭에 넣어 지고 비행기를 탔다.

2.
문제는 이때쯤부터 시작되었다.
책을 읽고 싶었던 게 아니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읽으며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는데 독후감을 위해 책을 읽게 되었다.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쉽고 흔하게 말하는 트라우마나 컴플렉스 따위였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술과 책을 골랐다.

결혼을 하고 난 뒤에 책 사는 일이 더 쉬워졌다. 돈을 벌지 않아도 책 살 돈이 생긴 건 노다지 금광을 발굴한 셈이었다. 책을 읽으며 엑셀에 리스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이 가까이 있었으나 ‘구멍난 가슴’을 메우기 위해 책을 사제꼈다. 결혼 후 2년차부터 읽는 책보다 사는 책이 많아졌고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책 집착은 도를 넘어섰다.

엑셀에 칸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쉽고 얇은 책을 읽어야했다. 1년 목표를 100권으로 잡고 2006년부터 꾸준히 목표를 달성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매년 200권이 넘는 책을 읽고 리스트를 정리했다. 심할 때는 하루에 여러 권을 읽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읽지 않으면 안된다는 압박이 있었다.

이 시기에 읽은 책은 대부분 글자만 읽었다. 책을 더 보관할 수 없어서 박스채 팔거나 여기저기에 기증을 했다.

책 읽는 속도는 당연히 빨라졌고 머릿속에 남는 것은 없어졌다. 책을 사들이는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졌다.
사실 알라딘에서 책을 산 게 몇 년 안된다. 이 시대의 지식분자들은 다 거기서 책을 사는 거 같아서 거기서 산 것 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책을 읽고 싶어서 읽은 게 아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남들에게 나는 이만큼 읽었다고, 이런 것도 읽는다고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내면에 곯아가는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몰라 그저 앉아서 활자만 읽었다.
오래전에 그만둔 방송통신대에 복학을 했다가 1학기만에 그만두었다. 책 읽을 시간을 줄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런닝머신 위에서도 책을 읽었다. 실내 사이클 위에서 책을 읽어야 했기 때문에 수영장을 다니지 않았고 언제나 가방엔 한 권 이상의 책이 있었다.

집안은 책으로 점점 좁아져갔고 알라딘에 지불하는 돈은 점점 많아졌다. 그럴수록, 머릿속에 남은 건 없어졌다.

집주인과의 갈등도 본격화되었다. 두 번 읽지 않은 책을 사들이는 이유에 대해 추궁했다. 매달 몇 십만원 어치의 책을 사서 쌓아두었다가 다시 어디론가 처박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이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아이의 책을 사들이는 일에도 집중했다.
그저 다 돈지랄이었다.

3.
2013년부터 엑셀에 리스트를 만드는 작업을 그만두었다. 제일 소중하게 여기던 파일인데 지금은 어디다 처박아뒀는지도 모른다.
읽는 책의 권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책을 사는 수량은 여전했다. 어설프지만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필요한 책은 더 늘어났다.

여전히 책을 사고 있었지만 책에 집착하느라 일상을 무너뜨리는 일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 몇 명의 정신과 전문의와 진지하게 상담도 했다. 술을 못 마시면 활자를 읽었다.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삶의 위기가 오면 급격하게 책 구매액이 늘어났다. 택배가 올 때가 되면 뭘 샀는지 기억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일을 하고 돈을 벌면서 모조리 다 책값으로 탕진했다. 그 책들이 지금 다 우리집과 퇴직한 회사의 작은 도서관 일부에 있다.

견딜 수 없어서 대형 붙박이 책장을 짰다. 도서대여점같은 슬라이딩으로 했어야 했는데 만드는 분이 벽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 했다. 도서대여점의 책은 얇고 가볍지만 내 책들은 그러하지 않으므로.

도서정가제 시행 한달전, 물욕이 폭발했다. 알라딘 할인을 받을 수 있고 무이자 할부가 잘 되는 카드를 새로 발급받았다. 폭풍처럼 택배가 밀려들었다. 알라딘 배송 아저씨는 급기야 짜증을 내기도 했다. 책 좀 나눠서 시키라고 박스를 던져놓고 가기도 했고 도서정가제가 언제 끝나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이 때 긁은 카드값을 나는 아직도 갚고 있다.

지금도 내 서재와 마루와 아이의 방은 당연하고, 거실의 테이블 위, 소파위, 안방의 침대 옆, 화장대 위, 식탁 위에도 책이 있다. 읽다 던져버린 책, 읽으려고 꺼내 둔 책, 읽고 안 치운 책.

올 해초, 1월달에 갈급증이 다시 생겨 한 달동안 빨리 읽을 수 있는 만화책과 동화책을 포함해 40여권의 책을 읽고 리스트만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3월부터 거의 책을 읽지 않고 근 10여년만에 최소수량을 매달 갱신하며 7월을 맞았다. 보름째 소설책 한 권을 읽고 있는데 한 편 읽고 던져놓고 애니팡이나 하다가 이해가 안된 구절을 다시 들춰 읽고 단편 하나를 두 번 세 번씩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4.
누군가는 무슨 개소리냐고 했지만, 나는 학력컴플렉스와 지적컴플렉스가 심했다. 이게 과거형인 건 이제는 그 컴플렉스가 극복되어 자신감이 생겼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시작된 것이다.

남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무기를 갈고 닦는다. 우연히도 나는 그게 책이 되었다. 라면봉지 뒷면의 조리법을 읽듯이 수많은 활자를 읽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 모든 것들이 몸 속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라 하지만 그런 것 같지 않다. 기억나는 스토리가 없고 핵심도 다 날렸다.

최근들어 글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나눌 사람이 생겼는데 도대체 내가 뭘 읽고 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천권이 넘는 책을 읽었는데 사실은 한 권도 안 읽은 것 같다. 녹아내린 책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나 그거 읽었어.
나는 이것도 읽었어.
나 좀 봐줘.
나는 이걸 읽어.
나는 이만큼 읽었어.

내가 책을 읽은 이유는 허세를 부리고 지적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이었지 주로 숫자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내면의 들키고 싶지 않은 여러가지 문제들을 직면하지 못해서 내내 활자속으로 도망다니기만 했다.

한심한 독서를 중단했다.
이제서야 책을 읽고 있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놓친 부분이 없나 다시 읽고 문장을 곱씹어 보면서 가만히 여운을 느끼게 된 지금이, 이제서야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된 셈이다.

어릴 때의 독서편력을 들은 정신과 전문의는 그랬다. 외로웠을 거라고. 방임이 있을 때 활자에 천착할 수 있다고. 아이들은 친구와 노는 게 재미있고 가족과 교감을 나누는 많은 활동이 더 즐거운 것이지 책만 쳐다보는 것은 결코 친구와 노는 만큼 재미있는 일은 아니라고. 동생은 내 옆에서 그림을 그렸고 나는 동생 옆에서 책을 읽었다. 우리는 그렇게 자랐다.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마흔이 인생의 중반이라면 여러 방면으로 판을 바꾸고 있는 셈이다. 최근 몇달간 도서구입비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제 활자에 대한 집착은 내 정서상태의 척도가 된다. 기억도 나지 않을 글을 과자봉지의 성분분석표를 보듯 읽는 짓을 그만할 수 있으면 좋겠다.
죽기 전까지 못 읽고 가는 책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끝.

2015. 7. 8.

독후감 :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 뿌리와 이파리

위험할 수 있는 책이다.

꼼꼼하게 읽고 저자의 의중을 잘 살펴야 한다.

한마디로 일반화하지 말고 호도하거나 곡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책이다.

제국의 위안부

이 제목은 이 책의 정체성을 아주 잘 표현하는 좋은 제목이다.

“진보측의 이런 대응은 ‘정의’편에 서 있다는 자기확신이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식의 자기확신이 때로는 경직된 자세와 무책임한 폭력을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318쪽)

이 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위안부문제의 해결과 정확한 역사의식이 필요하다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점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 저자는 이 전에도 그랬듯이 친일파라는 공격과 최근 불거진 일베(충이라 일컬어지는)의 세력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감당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것처럼 타인의 의견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사람도 많지 않으므로.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 이 저자의 의견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적확한 주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이 보편화되기엔 대중과 정치의 기질적인 문제로 실현되기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그 점이 이 책을 위험하게 만든다.

저자는 일본과의 화해가 난항을 겪으며 위안부문제가 청산되지 않는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를 집중 추궁한다. 분노는 화해를 불러올 수 없다. 저자는 이 점에서 우리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일본과의 대화를 더 단절시키는 게 아닌가 의심한다. 그 의심은 직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씩 증언록과 정대협의 활동을 통해 이 나라에서 만들어내는 위안부의 이미지가 왜곡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일본의 전시에 동원되었던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정신대는 근로노동을 위해 동원되었으며 일본이 국가적으로 동원한 식민지 노동동원 수탈에 해당한다.

위안부는 일본정부와 군에서 묵인한채로 조선인이나 일본인등 국적이 중요하지 않은, 그저 돈벌이에 급급했던 자들이 속이고 꼬드겨 모집한 10대 후반에서 30대까지의 여성들이다. 강제로 차에 태워 끌어간 사례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취약계층의 여성들에게 돈벌이를 할 수 있고 여성이지만 자립할 수 있다는 것으로 꾀어내 각 전장으로 보내는 포주와 업자들이 존재했으며 그 포주와 업자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물론 일본정부는 이에 대해 묵인한 책임이 있다.

위안부는 성노예의 역할뿐 아니라 부대내에서 함께 전투를 보조하는 역할까지 해내야 했는데 간호사의 역할을 하거나 단지 성매매뿐 아니라 술과 노래와 춤이 있는 행사를 진행해 군대를 위안하는 전투적 조력자의 역할도 해내야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조선인 위안부는 이미 공창제가 보편화되어 있는 일본인 위안부를 대체하는 역할이었으며 조선여성은 일본여성의 대체제이지만 같은 제국의 신민으로서 적국의 여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역할을 위해 위안부들은 일본옷을 입는 경우도 있었으며 위안부 동원당시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점도 있다.

전쟁초기에는 나름 화기애애한 동지애적 분위기도 있었으며 사연모르고 위안부가 되어버린 조선인 여성들이 긍지를 가질 수 있는 분위기도 분명 존재했다는 것. 예를 들어 친절한 일본군이나, 너무 어린 위안부를 탈출시킨 사례나 일본군과 사랑에 빠진 케이스도 있다는 것.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이런 분위기는 당연히 폭력적으로 변했다는 것.

그러니 저자가 택한 제목은 조선인 강제 위안부라는 패러다임을 바꿔 <제국의 위안부>라는 패러다임으로 이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소 강경한 말투로 정대협을 비판하고 있는데, 정대협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약자이다. 이들이 사업초기에 위안부와 정신대를 혼동하였던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이 의의가 분명해 진 다음에도 왜 정정하지 않는가 묻고 있다. 또한 몇 몇 위안부출신 할머니들이 정대협과의 불화를 겪고 위안부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를 들기도 한다. 또한 구술이나 증언에도 질문자의 의도가 개입된 약탈적 인터뷰로 위안부 피해여성들을 극도의 피해자로만 규정하여 그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심리적 요인도 있다고 파악한다.

이런 운동의 주인공은 활동가이며, 정작 현장피해자는 그 들러리가 되어버리는 경우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묻고 있다. 피해여성 중에는 당시 전쟁이 심각하지 않았던 시절 일본병사들과 들판에서 소풍을 즐기거나 말을 타고 애들처럼 놀던 기억을 얘기하는 증언자도 있는데 이것은 이후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대협에 협조하는 순간 이런 모든 기억들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정대협의 주장이 국가의 주장이 되어버렸으며, 대부분의 증언자들의 내용을 종합했을 때 얼마전 만들어진 위안부 소녀상은 실제 위안부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적대감을 부추키고 끊임없이 일본과의 대화를 단절하여 서로 분노만을 주고 받는 감정선을 이루게 된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힘겨웠던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뒤틀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안부의 모습도 바로 그 소녀상에 다를 바 없으며 평범하게 살던 집안의 금지옥엽 딸들도 무조건 끌려가 트럭에 실려 위안소에 던져지고 아편을 맞으며 버텨내야 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증언자들의 증언이 번복되는 사례와 전후 희생자들의 삶이 곤궁했던 것을 감안하여 진정 피해자들을 위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개별적이고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지 않는가 말하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다음 단락으로 축약된다.

“지금 필요한 일은, 그들을 ‘올바른 조선인 투사’로 존재하게 하면서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 아니다. 그저 그들을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중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적국 여성들의 ‘완벽한 피해’의 기억을 빌려와 덧씌우고, 조선 여성들의 ‘협력’의 기억을 벗겨낸 소녀상을 통해 그들을 ‘민족의 딸’로 만드는 것은, 가부장제와 국가의 희생자였던 ‘위안부’를 또 다시 국가를 위해 희생시키는 일일 뿐이다.”

읽는 내내 불편했던 점은 일본의 패망이후 버려진 이들은 일부 일본군의 도움으로 전장을 탈출하기도 했으나 밀려드는 소련군과 미군으로 인해 더 극심한 (일부 증언자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 해리성 기억장애를 말하는 듯) 2차 피해를 입고 인생을 7-80년 더 살고 나서는 완벽한 희생자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할머니들의 행적을 보면 90년대 정대협이 출범하고 나서 도처를 다니며 생생한 증언을 들려주는 행사를 하고 있는데, 세상 살기 힘든 끔찍한 기억을 자꾸 말하다 보면 아무리 무덤덤해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런 증언을 반복해서 할 자신이 없다.

일본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나는 반일주의자에 가까운데 문제는 사실을 왜곡하고 상징성을 덧칠하여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이득을 취하는 세력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등은 분명히 필요한 움직임이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사실 타인을 탓하기 전에 우리를 돌아보자는 것인데 이건 상당히 성숙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이 목적이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는 의심이 든다. 물론 타인의 잘못도 비판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하지만 그 전에 나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자는 것은 식민지지배의 복잡한 구조속에서 위안부를 전장으로 내몰고 현재까지 괴롭히고 있는 그 적확한 주체와 말하자면 그 끝나지 않은 전쟁의 적이 과연 “일본”뿐인가 하는 것이다.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서, 반일과 극렬한 반대는 이 나라의 민족주의와 극우세력을 자극하여 전체주의로 몰아갈 가능성이 크다. 거대한 제국주의의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의식으로 똘똘뭉친 식민지배의 유령은 다시금 파시즘을 불러올 수 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자들은 “히틀러”를 독일민족의 선구자와 대단한 혁명가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 때는 2차 대전이 본격적으로 잔혹성을 띄기 전이었고 히틀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위인으로 평가할 수도 있어던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전쟁시에 이루어진 일본인 위안부의 역할이 한국전쟁에도 이어져 유엔군이 한국에 주둔했을 때 유엔군 위안소가 있었으며, 미군들은 한국정부가 만들어 준 위안소를 즐겨 이용했으며, 그에 대해 미국은 단 한 번의 언급도 없이 한국의 일본정부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에 거들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도 묻고 있다. 기가 막힌 일이다.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0838.html

이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보니 진보진영의 한겨레에서 보도한 바가 있었다.

식민지라는 것은 매우 복잡한 구조라는 걸 다시 깨닫는다.

솔직히 책을 읽어나가며 일본이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이 나라가 과연 광복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광복 68주년. 우리의 전체주의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추천한다. 대신 이 책을 읽기 전에 모든 편견을 내려놓을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을 맹신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엔 수없이 많은 의견이 있다. 일베도 있고 51.6%의 투표율을 만들어준 사람들도 있다. 그 모든 의견을 듣고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며, 개인의 자유다. 이 심리적으로 무거운 책을 내가 선택하고 꼼꼼히 읽은 것은, 솔직히 이 책을 펴낸 출판사를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3. 8. 16.

옛이야기속의 계모

매일 하나씩 읽어주는 옛이야기보따리.
아이가 재미가 붙었는지 읽어달라고 한다.
오늘은 계모얘기를 읽었는데,

생각해보니 전통설화/신화/전래동화 , 즉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계모들은

1.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들어오고
2. 아버지와의 애정관계는 불분명하며
3. 계모가 등장함과 동시에 아버지는 사라지거나 역할이 미미해지거나, 생계를 책임지느라 자식을버려두고 계모에게 양육을 맡긴다.
4. 이를테면, 새로 들어온 계모들의 역할은 한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보모 및 육아담당으로 들어오고, 밥벌이는 하지 않는다.
5. 다시 말하면, 아내가 없는 홀아비는 계모를 들여와 생계를 해결해주고 보육을 맡기는 기능으로 “사용” 하는 듯 보인다.
6. 여권신장따위 개도 안 물어갈 소리였던 전근대 사회에서 부계사회와 일부일처제였던 사회적 제도에서 홀로된 여자가 자식을 키우는 일은 경제적 궁핍이 당연했으되
7.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해야만 했던 홀아비들은 육아를 전혀 담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8. 이렇게 짝을 잃은 남과 여는 단순한 계약관계 및 자식육성을 위해 결합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태를 띈다.
9. 가족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대부분 이런 이야기에 임무로 수여받은 “남자의 자식”에 대한 육아를 게을리 하는 계모들은 그 사실이 발각되면 곧 쫒겨나고 만다.

말하자면 옛이야기에서의 계모는 그저 밥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는 새로운 취직자리를 얻어 자기 자식을 데리고 “주거이동”을 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늘 밖에 나가 있으니 “부부”의 기능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

새로운 일자리는 홀아비의 아이를 키우는 일인데 그 일을 게을리 하였으므로 당연히 해고되는 것이다.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계모들은 계모가 아니라 그저 새로 들인 보모를 계모라고 통칭하였던 것은 아니었던지.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런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속의 “새어머니”라는 존재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무관한”, 그저 양육을 맡았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이름을 잠시 빌려쓴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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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보리출판사에서 나온 서정오선생님의 글모음인데 이야기가 구어체로 되어 있어서 마치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주는 것 같이 읽어줄 수 있다. 옛날 이야기를 머리맡에서 해주는 게 중요하다 싶어서 아이가 어릴 때는 이솝우화나 삼국유사를 다시 읽고 내가 이야기를 가공해 해주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어주는 건 게으른 방법이긴 하지만, 워낙 우리말을 맛깔나게 잘 쓰시는 분이기 때문에 마음이 놓인다.

7살까지만 해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올 초부터 부쩍 매일 하나씩 읽어달라고 하고 있다.

읽다보면 아이가 잘 모르는 입말의 낱말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서 우리의 옛풍속, 즉 장작이 한 짐, 쌀이 천 석, 이런 표현이 나오면 질문이 술술술 이어진다.

이 중 “두꺼비서방님”이라는 옛이야기는 허물을 벗고 근사한 낭군이 된 두꺼비의 허물을 태워버린 색시가 서방님을 찾아 갖은 모험을 다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이야기로도 충분히 <반지의 제왕> 못지 않은 대형 스펙타클 서사 판타지 영화가 가능할텐데..라는 상상을 해봤다.

2013. 3. 8.

이성복 새 시집 – 래여애반다라

빛에게 

빛이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빛은 왔어 

균열이 드러났고

균열 속에서 빛은 괴로워했어

저로 인해 드러난 상처가 

싫었던 거지

빛은 썩고 농한 것들만 

찾아 다녔어

아무도 빛을 묶어둘 수 없고

아무도 그 몸부림 잠재울 수 없었어

지쳐 허기진 빛은 

울다 잠든 것들의 눈에 침을 박고,

고여 있던 눈물을 빨아 먹었어

누구라도 대신해

울고 싶었던 거지,

아무도 그 잠 깨워줄 수 없고

아무도 그 목숨

거두어 줄 수 없었으니까 

언젠가 그 눈물 마르면

빛은 돌아가겠지,

아무도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아무도 태어나지 않고

다시는 죽지 않는 곳, 

그런 곳에 빛이 있을까 

 

– 이성복 

 

이미지

 

오랜만에, 만나면 반갑고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2013. 3. 

국가란 무엇인가 – 유시민

왜 누구는 보수주의자가 되고 누구는 진보주의자가 되는가? 베블런의 이론에 따르면 생활환경의 변화에 강하게 노출되는 사람이 먼저 새로운 사유습성을 받아들인다.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된다. (중략) 그런데 생활환경의 변화가 몰고 온 충격이 모든 개인에게 똑같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어떤 환경의 변화를 긴급한 상황으로 인식한 사람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신속하게 받아들인다.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의 여집합(餘集合)이다. 보수주의자는 기존의 지배적 사유습성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 보수주의가 기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의 변화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모두 영원히 보수주의자로 살아갈 것이다. 보수주의는 특정한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중략)
베블런은 유한계급은 부유하기 때문에 혁신을 거부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보수적이다.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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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적어서 보수적인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에서 주로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이 형성되고 표출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기존의 제도와 사유습성에 노출된 기간이 짧으며 지적 활동이 상대적으로 왕성하다. 기존의 사유습성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풍부하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기존의 사유 습성은 더욱 강력한 지속성을 지니며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는 부족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필연이다.

진보주의에 매혹을 느꼈던 젊은이가 나이가 들면서 보수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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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주의는 현존하는 지배적 사유습성을 지키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수용하고 낯선 것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에 부합한다. 쉽게 단결하며 잘 무너지지 않는다. 무녀져도 단시간에 수월하게 복원된다. 반면 진보주의는 새로운 사유습성을 창조하여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운동이다. 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 그래서 쉽게 단결하지 못하며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한 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열정과 신념이 무너지면 바람에 날리고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

– 국가란 무엇인가 – 유시민 / 진보정치란 무엇인가에 실린 글 中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