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풍경 – 정월대보름

대보름이라 나물을 산 건 아니다. 나물을 좋아하는데 워낙 손이 많이 가 엄두를 잘 못 내다가 동네 수퍼마켓에서 삶아놓은 걸 팔고 있으니 손이 갔다. 다 삶아놓은 걸 가져와 다시 한 번 데치고 양념하여 볶아 그릇에 담았다. 고구마순에는 들깨를 듬뿍 넣었다. 고구마순은 원래 자주색이다. 껍질을 벗기고 씻어서 삶아 말리고 또 다시 삶았을 것이다. 그건 누가 했을까. 누군가 손톱에 자줏빛 물이 들 때까지 작은 의자에 앉아 껍질을 벗겼을까. 다리가 퉁퉁 붓도록 서서 했을까. 깐 마늘은 스치로폼 그릇에 담겨 랩을 씌워 판다. 누가 이 마늘을 다 깠을까. 손에서 마늘냄새가 가실 날 없을 정도로 바쁘게, 손가락이 퉁퉁 불도록 물에 담궈가며 마늘을 물에 담궜다가 일일이 깠을까. 대기업에서는 몇 년전부터 깐메추리알을 포장해서 판다. 이건 누가 깠을까. 삶은 메추리알을 뭉개지거나 부서지지 않게 까려면 약품에 담궜을까. 빙초산같은 것에? 사람이 손으로 깠을까? 문득 궁금해지지만 금세 잊고 만다.

EBS에는 극한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3D직종이라고 하는 어려운 직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택배물류센터, 난로공장, 정육처리기능사, 오징어잡이, 아파트외벽 페인트공, 험하고 어려운 직업을 소개한다. 한 번은 양은냄비를 만드는 공장이 나왔는데 노오란 양은주전자를 일일이 사람이 두들겨 모양새를 만드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위험하고 어려운 직업은 이미 로봇이 대체하는 줄 알고 있었던 내 짧은 상식이 한심스러웠다. 세상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하게 움직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값진 노동을 하고 있는가.

삶은 나물은 일일이 비닐봉투에 담아 가격표를 붙여 가져왔다. 나물 세 종류를 샀으니 비닐봉투 세 개가 나왔다. 얼마 전부터 작은 스티로폼은 재활용품으로 분류하지 않는다던 공지문을 본 기억이 났다. 음식물이 묻은 비닐도 재활용쓰레기로 버리지 말라 써 있었다. 나는 비닐봉투와 스티로폼을 모두 일반 쓰레기봉투에 쑤셔박았다. 쓰레기를 쓰레기에 담는다. 아무 것도 썩지 않을 것이다.

대보름이 가까워오자 각 지자체에서는 대보름행사를 준비한다. 예산을 세우고 기획안을 내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축제에 몰려와 성과를 낼 것인지 준비할 것이다. 대형마트부터 전통시장까지 모두들 오곡을 소포장해서 내놓고 나물을 진열했다. 소매업점에서 파는 나물은 반조리상태부터 완전조리상태까지 다양하다. 건나물 상태 그대로인 것부터 삶기만 한 것, 양념까지 완전히 끝나 가져다 먹기만 하면 되는 형태다. 기사를 검색한다. “유통업계, 정월대보름 마케팅” 이라는 제목부터 “부럼데이”라는 이벤트도 생겨났다.

대보름행사 때문에 소방서는 비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대보름행사장에 갈 것이다. 먹거리를 사먹고 엄청난 쓰레기가 나올 것이다.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울 것이고 썩지 않을 폐기물들은 우리 땅 어디엔가 쌓이고 쌓이겠지. 풍요를 비는 대보름에 쓰레기만 풍요롭다. 누군가의 노동을 잊고 밥을 먹는다. 아무 것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무력한 인간이 나물을 썩썩 비벼 밥 한 그릇을 먹었다.

2016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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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풍경 – 백화점

100807_Nikon 063 사본.jpg 서점은 백화점 안에 있다.
급하게 마련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꼭 백화점으로 갈 필요는 없었는데 마트와 옷가게와 문구점이 이동거리를 생각했을 때 가장 적게 움직일 동선은 백화점에 있는 문구점과 서점, 판매점을 휙 도는 것이다.

걸음을 아껴야 한다. 겨울이니까.
문구 코너에 가서 검은색 클리어파일을 사야했다. 어디선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데 분명히 누군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음원을 틀어놓은 것과 그랜드 피아노의 해머가 두들기는 소리는 명확하게 다르다.
백화점의 가운데는 길게 뚫려 있다. 보이지 않는 기둥이 있는 것처럼 뻥 뚫린 공간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자의 주변엔 아이를 안은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각국에서 온 제 각각의 펜에 둘러싸여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연주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스테들러, 사라사, 시그노, 몰스킨, 이룸, 프랭클린 사이에 서 있었다.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한 권 정도의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부동산과 맞벌이한다>, <미움받을 용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이들의 학습만화와, 장난감만 손에 쥔 사람도 있었다.

자기 확인을 위해 사는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 사람들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없어도 오늘을 넘길 수 있는 물건을 산다. 물건의 필요성은 주관적이다. 물건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굳이 오늘 사지 않아도 될, 시그노 펜 한 자루와, 펜텔의 펜 두 자루와 201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을 내가 검은 파일 위에 올려 계산을 기다린 것처럼.
돈을 내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피아노 연주는 계속 되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생명 없는 물건이 위로가 되는 공간에서 사람이 규칙대로 맞추어 연주하는 음악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건 생명 없는 물건인가 아니면 물건을 사는 행위인가. 물건으로 위로를 받는다면 정말 그 물건은 무생물인가.
백화점에 창문도 시계도 없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오로지 물건을 소개하기 위해 사람들은 내내 서있다. 가만히 진열대에 앉아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물건들은 누군가에게 불려가 꽃이 될 것이다. 위로가 되고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고 자신감을 되찾아줄수도 있다.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적게는 수명, 많게는 수백 명의 손길이 닿는다. 만든 사람들이 손길 하나 하나에 영혼이 묻어 물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순히 자본이 만들어내는 실재하나 실체가 없는 사물에 불과할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시시때때로 모양을 바꾸는 집이었다. 그 안엔 대체가족이 살고 공동체를 이루었다. 사랑하는 법에 대해 혼란스럽던 하울의 친구들은 환경이 변해도 계속 함께 했다. 우리가 사는 성이 그 때마다 변한다해도, 자본이 들고 나더라도, 우리의 사랑도 굳건할 것인가.

사물을 바라보고 주머니에 넣어 행복해진다면, 그 때부터 그 사물의 삶이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독히 외로우면, 말 걸지 않는 사물을 사랑하며 계절을 건너는가.

2016.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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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

– 숨막히게 그리운 사람 하나 없는 인생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 숨막히게 그리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했던 나의 한 시절,
어쩌면
그 때의 나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르겠다.

–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알기 때문에.

– 밤에 삼각대를 놓고 벚꽃을 찍고 있으면
술에 취해 흔들흔들하면서도 가만히 서 있던 그 사람,
그 때의 그,
그 때의, 나.

2016년 4월 4일의 살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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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장례 – 2016년 1월 21일

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사랑의쉼터, 돈의동 첫 작은장례를 치르다.

 

돈의동은 탑골공원의 담벼락을 끼고 돌아 종로 3가에서 5가의 숨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주거지역이다. 주소는 돈의동 103번지. 103번지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한 사람이 산다. 103번지에만 700여명이 산다. 이들은 모두 혼자 산다. 옆 방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고, 삶을 나누며 형제처럼 가족처럼 지내는 이도 더러 있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은 혼자다. 사람들은 이들을 쪽방촌 홀몸노인, 혹은 독거노인이라고 부른다. 700여 명 중, 노년층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노인인 것도 아니다. 103번지의 골목을 오가다 보면 꽤 많은 장년층을 볼 수 있다. 사회적 약자인 청년 장애인도 눈에 띈다.

고독사가 이슈로 부각되며 노인고독사에 대한 이야기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통계청에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고독사망자 연령비율 1위는 60대 이상 독거노인이 아니라, 50대 남성이었다.

103번지 주민들은 어딘가가 아프다. 젊은 시절 산업재해를 입은 사람, 직업으로 인한 질병을 얻은 사람, 여러 이유로 마음을 다쳐 술로 달래다 몸도 다친 사람, 직업병, 만성질환, 성인병, 신체적 정신적 장애, 이들은 모두 각자 다양한 이유로 아프고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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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사랑의쉼터 복도에 붙어 있는 돈의동 지도

가족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기초공동체다. 이 기초공동체를 기반으로 사회가 이루어지고 지역과 국가와 이익집단이 탄생한다. 기초공동체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돈의동과 다른 쪽방으로 흩어진다. 이들은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개체가 되어 골목을 떠돈다. 이들은 가난과 굶주림, 추위나 더위 따위의 물리적 환경은 사람이 사람의 손을 잡고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몇 년 전 노숙자 인문학운동을 하던 이가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 노숙자의 공통점이 게으르거나, 술문제가 있거나, 아프기 때문인 거 같냐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가족이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대화를 할 사람도, 없어요.”

돈의동에 사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세상에 가족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고 사람에 의해 길러진다.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아무도 없는 막막한 어둠, 어쩌겠는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 돈의동에 모인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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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103번지. 2015년 가을촬영

이 돈의동의 복지를 담당하는 것은 종로1,2,3,4가 주민센터와 사랑의쉼터라는 복지관이다. 복지관은 구세군재단이 위탁운영을 한다. 작은 골목의 사이로 허름한 건물이 하나 있다. 지하엔 교육관과 샤워시설이 있고, 1층과 2층엔 휴게공간이 있다. 3층에는 사무실과 상담실이 있다. 이화순소장과, 사무국장과, 복지사 둘이 이 공간에서 업무를 본다. 복지관 쉼터 계단에는 “주폭”에 대한 경고가 여기 저기 붙어 있다. 술을 먹고 난동을 피우는 주민들이 많다. 5년간 일한 복지사는 주민에게 폭행을 당해 상해를 입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 거기 있다. 주민들이나, 주민복지를 책임지는 행정직들도 술 때문에 괴롭다. 술을 마셔서 괴롭고 못 마셔서 괴롭다. 술에 취해서 괴롭고, 술이 안 취해서 괴롭다. 그래도 살아야하니까. 맨 정신에 버틸 수 없는 날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술을 마신다. 가난한 자들의 마취제는 화학작용으로 만든 술뿐이다. 소주 한 병 만큼의 위로는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

다들 자기 한 몸 누일 쪽방보다 커다란 사연을 품고 산다. 죽이고 달래고 얼러봐도 상처받은 일들은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추운 날 시린 걸음을 걸을 때마다 길모퉁이에서 툭 치고 튀어나오는 고통이 이들을 들볶는다. 사연을 말한들 무슨 소용 있겠냐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추운 겨울, 쪽방촌에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한 달에 한두 명은 시신이 되어 103번지를 떠난다. 이들은 무연고자다. 공고를 내도 가족을 찾아도, 시신양도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죽음은 무연고 독거자의 시신처리라는 이름을 쓴다. 장례절차 없이 바로 화장장으로 향한다. 죽어 사라질 육신은 모두 마찬가지지만, 이들을 기억하는 103번지의 이웃들은 애도를 표할 방법이 없다. 살아서 한 줌 도움이 못되었다면 가는 길이라도 잘 보내주고 싶은 103번지의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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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쪽방촌의 한 건물. 아래에서 위로 3층까지 주거공간이 있다. 2015년 여름 촬영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죽음의 의식을 개선하는 단체다. 상업주의에 휩쓸려 가정의 대소사도 외주를 주게 된 이 시대에 함께 하는 상포계를 통해 의례의 힘을 확인하고자 한다.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출자금과 조합비를 내고 혈연으로 한정하지 않은 타인의 장례를 준비한다. 그 조합비의 24%중 20%는 조합운영비, 그 중 1%를 공동체 기금으로 조성하고 4%는 연합회 회비로 사용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성을 가진다. 무턱대고 사회공헌만 하는 곳은 협동조합보다 사회복지재단이 걸맞다.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모인 협동조합이라면 공동체의 회복에 지출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이 원칙을 지켰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는 상포계를 통해 상장례의식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자기 분야를 지키며 사회공헌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돈의동 사랑의쉼터와 MOU를 맺었다.

직장으로 처리되는 돈의동 주민들의 장례를 대신해서 치르기로 약속했다. 병원의 영안실이나 상조회사의 식사대접, 화려한 제단과 방문객을 대신해, 이웃들이 죽음의 본질을 생각하며 애도하고 한 번쯤 그를 기억하고, 영정사진을 놓고 잘 가라고 이별의 인사를 건네고, 함께 살던 공간에서 그를 기리는 일,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착안한 “작은 장례”이다.

장례의식은 상업적 상조회사의 난립으로 변질되었다.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알고 있는 장례절차는 전통의식과도 다르고 죽음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도 아니다. 상품으로 만들어질 수 있고 계산서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남았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작은 장례를 통해 이윤을 창출할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사회환원이기 때문이다. 2015년 겨울이 깊어갈 때 작은 장례를 약속했다.

2016년 1월에 돈의동에서 사망자가 발생했고 약속한대로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사랑의쉼터와 첫 작은 장례를 준비했다.

좋은 일을 할 때 외부에 얼마나 알려야 하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갈등한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서의 가르침 때문인지 좋은 일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불편해한다. 작은 장례를 준비하며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이 사람의 죽음을 한 번쯤 기억해 달라는 의도였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추도식을 취재하겠다는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사무국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슈화되어 이것이 마치 행사처럼 비춰질 때, 가치가 훼손되고 본질이 곡해될까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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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사랑의쉼터 복지관 앞 2016년 1월 21일 아침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아침. 며칠 째 혹한이 몰아치고 있었다. 엘니뇨현상으로 겨울이 따뜻할 거라더니 자연현상은 인간이 예측하기 어렵다는 걸 반증이라도 하듯, 일주일째 영하 10도에서 수은주는 깔짝대기만 했다. 대설이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겨울철 맑은 하늘은 추위의 상징이다. 하늘이 맑고 햇빛이 쨍쨍했다. 사랑의쉼터 앞에는 카메라와 휴대폰, 수첩을 든 취재진들이 몰려왔다. 이 풍진 세상을 등지고, 가시는 길 평안하길 바란다는 추도사를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김상현 이사장이 읽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이사장과 사랑의쉼터 이화순 소장이 상주가 되었다. 삼베완장을 차고 조문객을 맞았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웃들이 소식을 듣고 와 조문을 했다. 사랑의쉼터 지하 교육장엔 작은 제단이 차려졌다. 고인의 독사진도 없어 주민등록증을 확대해 영정사진을 놓았다. 검소한 꽃바구니 두 개가 제단을 지켰고, 흰 국화와 향, 간소한 제기가 놓였다. 간단한 다과가 한쪽에 차려졌다. 쪽방만한 돗자리에 이웃들이 차례대로 신을 벗고 올라가 고인과 이별했다. 신발을 벗은 맨발을 사진기자가 뒤에서 찍었다. 굳은살만 남은, 한 생명의 삶을 말해주는 발뒤꿈치에 애도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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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한 아이가 조문을 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에게 소주 한 병의 위로가 되었을까.

적어도 오늘 돈의동을 떠난 고인의 죽음은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여기 한 사람이 힘들게 살았고, 그리고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를 기억했고, 2천 원짜리 국수를 지하시장에서 먹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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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상가 지하시장, 조문객들은 2천원짜리 잔치국수를 나눠먹었다.

몇 사람은 말했다. 나도,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알 수 없는데, 나 가는 길도 저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2년째 결연장례를 약속했다. 가는 길을 약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집단구술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조합원이 늘어나고 한겨레두레의 공동체기금이 늘어날수록 외로운 죽음이 줄어들 것이다. 누구나 죽는다. 같은 하늘 아래 머리를 내리고, 같은 땅 위에 발 딛고 살던 사람들은 먼저 가는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그의 삶을 기억하고 이별을 슬퍼할 권리가 있다. 사람답게 사는 길 너머에 사람답게 이별하는 의식이 있다. 장례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옆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손을 맞잡을 수 있다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차가운 삶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질지도 모른다.

골목에 뒹구는 소주병처럼 깨어지지 말자고, 훈훈하게 덥힌 따뜻한 술이 되어, 고인의 가는 길을 덥히고 싶다.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 종로구 돈의동 103번지에 살던 故김철구씨의 명복을 빕니다.

루의 산책 

성곽이 있어 다행이지 죽은 자들의 숨결도

모두 갈아엎은 천박한 땅위에

발 딛지 못하고 간신히

폴짝

어둔 밤이라 망정이지

존재는 헛되어서

제 이름을 가지니

 

눈물을 흘리지 마

산이 무너질테니

물이 차면 숨이 막히니

메마른 성곽이라 다행이지

발 딛지 못하고 다시

폴짝

2016. 1. 18.

응답하라 1988의 판타지 

응팔 마지막회를 경건하게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나에게 이제 오늘 응팔이 끝나면 뭘 할꺼냐고 물었다.
응팔은 골목에서 시작한 가족의 판타지를 말했다. 초반의 짜증나는 성보라 캐릭터와 아들 잡아먹은 며느리라는 시어머니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판타지를 구현하는데 충실하기 때문에, 민폐 캐릭터가 없다.
• 이것은 명백한 판타지다 •
운동화끈도 못 묶고, 주차 못해 골목을 점령하는 최택과, 동생 머리 끄댕이 잡아 뜯는 성보라와, 없는 형편에 쓸데없는 물건만 사오는 성동일도, 가만 보면 싸가지 없는 정팔이도, 딸년들이 싸우는데 그만하라고 말리지도 못하는 엄마 일화와, 카리스마로 동네에 군림할 수 있는 졸부 라미란이 없다.
바르기만 해서 엄친아를 시전하는 선우는 새아빠의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은 갈등을 겪지 않고, 학생주임인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특공대 동룡이도 별 일 없이 순탄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위에 열거한 각자의 단점은 미화되었다. 그러니 이건, 판타지다. 주인공들은 크게 갈등하지 않고 서로 배려하고 편들어주며 화합한다.
이건 지금, 이 시대가 내 편을 그리워하는 판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명백한 판타지다. 동네 꼬마의 눈사람을 위해 회의를 여는, 그런 골목은 없다. 인간은 갈등하기 위해 존재한다. 골목은 “어메 짠한그…”가 존재하면서 동시에 뒷담화를 필수적으로 장착한다.
• 포기하는 자만 쟁취한다 •
응팔의 사랑은 가족보다는 현실적이다. 어남류 어남택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한데 사람들은 시각적 이미지에 압도당하면 판단력이 떨어진다. 어쨌거나 드라마의 청춘들은 모두 곱다.

성덕선은 상징이다.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상징이지 동창의 75%가 좋아하는 여신을 말하는 건 아니다.
택이가 남편이 된다는 건 그의 승부수 때문이다. 결정적일 때 치고 나가고, 버릴 패를 확실히 포기하고, 대가를 아까워하지 않으며, 사랑 앞에 불친절하지 않다. 택이의 사랑은 정석이다. 이건 사랑을 얻는 법에 대한 이야기지 택이가 덕선이를 차지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환이가 탈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성인이 된 아이들이 호프집에서 모여 피앙세 반지를 앞에 두고 한 고백이다. 친구들 앞에서 붕 띄웠다가 완전히 자빠뜨려 모래사장에 내리꽂은 형국이다.

덕선이가 정환이를 사랑했대도, 저런 남자와 결혼하면 안된다. 어따대고 고백을 장난으로 떡칠하나. 이건 정환이가 츤데레인 게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사랑은 조롱하지 말아야 한다. 정환이가 사천에 내려온 택이에게 빨리 덕선이를 잡으라 말한 건 제 사랑의 알량함을 인정한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내가 이 드라마를 본 것은 판타지의 구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나에겐 저런 초등학교 동창들이 있고, 27년째 만나고 있으며, 아이들이 자라 술 한 잔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친구들이 생각났다. 나의 판타지의 빈 공간을 채워준 친구라는 소재가 맘에 들었다.
한 가지 더, 청춘들의 러브라인, 골목에서의 포옹과, 바닥이 뜨근할 거 같은 이불 위에서의 꿈결같은 키스가 전혀 추하지 않아서다.

다시는 저런 순간이 나에게 오지 않겠다는 걸 매 번 확인하고 나 자신에게 각인시키면서도 내 마음이 완전히 늙어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게 해줘서, 그래서 좋았다.
인간에겐 판타지가 필요하다.

그 판타지가 더럽지도 추하지도 않다면 굳이 미워할 이유가 왜 있겠는가.
• 기분좋은 판타지였던 이유 •
건물주가 없기 때문이다.

정봉이네는 집주인이지만 단 한 번도 집세를 올리지 않은 듯 하다. 외려 이자 얘기도 안하고 차용증도 안 쓰고 세입자에게 돈을 빌려준다.
선우네도, 택이네도, 동룡이네도, 모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 택이아빠의 가게는 집에 붙어있고, 이들은 골목을 공유한다.
갑질하는 대상은 유일하게 드라마 끝날 때 성동일을 정리해고한 한일은행이다.

건물주 없는 세상, 상상해봤나.

어쩌면 이건 판타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로서 응팔은 끝났다.

성동일이 은행에서 짤린 건 이제 자본이 등장했다는 얘기로 해석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동룡이는 외식업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보라와 선우는 결혼해서 검사와 의사커플이 되어 금수저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에게 곧 IMF가 닥치겠지만, 모두들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덕선이네는 검사 딸, 의사 사위, 국보급 바국기사 사위와 정규직 승무원 딸이 있고, 선우네와 택이네도 이 구도를 같이 가져간다. 정환이네는 이미 자본을 축척해뒀고 금성전자 대리점이 문제겠지만 하이마트가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둘째 아들이 철밥통이다. 정봉이는 희대의 럭키가이, 조만간 백종원이 될 것 같다. 동룡이는 곧 예식장과 장례식장 사업에도 진출하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프랜차이즈에 뛰어들지도 모른다.
–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회를 기다리며

백화점

서점은 백화점 안에 있다.
내일 있을 일 때문에 급하게 마련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꼭 백화점으로 갈 필요는 없었는데 마트와 옷가게와 문구점이 이동거리를 생각했을 때 가장 적게 움직일 동선은 백화점이었다.

걸음을 아껴야 한다. 겨울이니까.
문구 코너에 가서 검은 색 파일을 사야했다. 어디선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데 분명히 누군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음원을 틀어놓은 것과 그랜드 피아노의 해머가 두들기는 소리는 명확하게 다르다.
백화점의 가운데는 길게 뚫려 있다. 보이지 않는 기둥이 있는 것처럼 뻥 뚫린 공간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자의 주변엔 아이를 안은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각국에서 온 펜에 둘러싸여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연주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스테들러, 사라사, 시그노, 몰스킨, 이룸, 프랭클린 사이에 서 있었다.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한 권 정도의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부동산과 맞벌이한다>, <미움받을 용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이들의 학습만화와, 장난감만 손에 쥔 사람도 있었다.
자기 확인을 하기 위해 사는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 사람들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없어도 오늘을 넘길 수 있는 물건을 산다. 물건의 필요성은 주관적이다. 물건은 단지 실제로 쓰이기 위해서이기 보다 때로 위안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굳이 오늘 사지 않아도 될, 시그노 펜 한 자루와, 펜텔의 펜 두 자루와 201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을 내가 검은 파일 위에 올려 계산을 기다린 것처럼.
돈을 내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서서 서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피아노 연주는 계속 되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생명없는 물건이 위로가 되는 공간에서 사람이 규칙대로 맞추어 연주하는 음악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건 생명없는 물건인가 아니면 물건을 사는 행위인가. 물건으로 위로를 받는다면 정말 그 물건은 무생물인가.
사물을 바라보고 주머니에 넣어 행복해진다면, 그 때부터 그 사물의 삶이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독히 외로우면, 말 걸지 않는 사물을 사랑하며 계절을 건너는가.

2016. 1. 16.

공범

1.
오전에 목동까지 가서 바이올린 앙상블을 연습했다. 근처에 사는 분과 동행했고 같이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포도밭과 산을 갈아엎어 만든 아파트에 사는 그 사람과 나는 각각 15,000원이 넘는 스테이크를 하나씩 먹었다.
그 분은 내 차를 얻어탔다며 밥값을 내겠다고 했다. 나는 밥을 잘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댔다. 한 달째 주차장 크랙을 메우는 공사를 한다. 주차장에 내려갈 때마다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거기에서 일을 하고 있다.

차를 세우고 내렸는데 미화원 아저씨가 공사가 끝난 바닥을 마대자루로 닦고 있었다. 공동현관을 들어서자 우리 동 미화원 아주머니가 엘리베이터 앞을 닦고 있었다.
바이올린 가방을 쥔 손이 사라졌음 싶었다.

2.
저녁엔 약속이 있어 그 포도밭이 끝난 산 언저리에 있는 작은 식당에 가서 닭도리탕과 오리구이를 먹었다. 저녁도 얻어먹었다.
단체가 모인 자리였는데 인사를 하다가 목이 메었다. 자꾸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식사중인 분들을 두고 먼저 일어나 골목을 지났다. 차가 줄지어 서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박스를 들고 걷고 있었다. 남자는 뒷문이 열린 트럭으로 걸어갔다. 택배기사였던 것 같다.
내렸던 창문을 올려 닫았다.

자다가 깨어 울컥대는 목울대를 만져본다.
거대한 슬픔에 어떻게 화를 내야 할 지 모르겠다. 소소한 서러움엔 그저 고개를 숙이면 될 일이고 일기를 쓰면 넘어갈테지만.

이제 두 주먹을 꽉 쥔 소녀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러나 저러나 나는 공범자다.

기록으로 남다

 

아래의 글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서울지역 조합원 자격으로 은빛기획, 서울시시설관리공단과 같이 진행한 다음스토리펀딩의 연재글로 작성한 것입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3234

mom_장지가는길

2012년 9월, 5년간의 투병을 끝으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님의 장례식을 치르며 장례식장에서 집에 잠시 들러 내가 부랴부랴 한 일은 집에 와서 기록을 챙기는 일이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병원순례, 어머님의 마지막 5년은 병원기록으로 남았다.

진료비 영수증, 예약증, 병원을 옮길 때 받았던 의무기록지, 의사의 소견서, CT 촬영 안내문, 영상CD, 혈액검사결과, 임상실험권유안내서, 더 이상 병원에서 해줄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받았던 되의뢰서, 발급기관은 온통 병원이었다. 5년간, 병원수발을 들며 모든 기록을 40페이지짜리 두 개의 클리어파일에 정리했다.

기록을 모아두지 않으면 그 일도 사라지는 것처럼, 마치 없었던 일이 되는 것처럼, 나는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붙잡는 심정으로 하나씩 기록을 모았다.

사그라지는 생명이 기록된 영상CD에는 암세포가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하얗게 가득차 있었다. 이제 이 모든 기록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임종 일주일 전이었다.

어머님의 옷가지를 태우며 나는 클리어파일을 통째로 불속에 집어던졌다.

통증도, 고통도, 모두 사라질 것이라 말하며, 남은 진통제도, 진통제패치도, 아미노산도 기록과 함께 불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듬해 아버지의 자서전을 내고 싶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 구남매의 막내라던 그는 자기 아버지를 엄청난 기록광이라고 소개했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의 기록을 그대로 두기 아까워 책으로 묶어 정리하고 싶다는 얘기와 함께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는 흰 편지지를 펼쳐 보였다. 편지지에는 자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팔순 노인의 글씨가 그득했다. 문서의 제목은 “비망록”이었다. 어떤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적어둔 기록. 비망록.

구남매의 아버지는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도에서 평생을 살았다. 단 한 번도 외지로 나간 적 없고 고흥군 면사무소에 다닌 것이 이력의 전부다.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두꺼운 수첩을 하나 가져왔다. 단행본만한 합성피혁 다이어리에 본인의 사주, 조상들의 생몰년도, 제삿날부터 큰 딸의 결혼식 때 지출한 내역과 지난 30년간 자식들이 보내온 용돈과 방문기록까지 꼼꼼히 적혀 있었다. 경기도 남부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고흥까지 달려갔다.

1980년대에 지었다는 집은 나로도 바닷가가 내려다보였다. 노인은 멋쩍게 웃으며 별 일도 아닌데 일을 크게 만들었다며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보였다. 노인은 1960년대부터 손바닥만 한 농협수첩에 매일 매일 일지를 적었다. 감상은 적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또박또박 연필로 꼼꼼하게 적었다. 그날 무엇을 샀고 무엇을 팔았고, 몇 째가 서울에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연말이 되면 농협에 가서 수첩을 하나 구해오고 매일 밤 작은 소반을 놓고 앉아 그날의 일을 적은 것이 50여권이 넘었다. 두꺼운 클리어파일에는 신문스크랩, 자식들에 대한 서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자료는 차고 넘쳤다. 손수 정리해 둔 비망록노트를 기반으로 구술을 받았다. 노인의 듬성듬성한 이야기는 글로 옮겨져 그대로 책이 되었고, 책 뒤편엔 손수 정리한 비망록을 그대로 스캔해서 실었다. 이 분은 스스로 자기 연대기를 표로 만들었는데, 본인의 삶과 지역사건, 국내 사건과 국외사건까지 같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기록을 하셨냐는 질문에 노인은 그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라며 웃었다.

구술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초연하던 노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내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소. 그게 내 한인디, 뱃사람이 아닌디, 배를 하나 인수해서 그 배안에서 하룻녁 주무시던 중에 화물선인가 뭐인가가 충돌해가지고 침몰했지. 지금도 다들 옛날 사진은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어째 우리 아버지는 초상 하나도 없소. 아버지 인상이 어쩌코롬 생겼다 대충 이런 것으로 연상해서 만들수가 있다 하는디 이제 다 끝나버렸지 않소. 이제 끝나부럿어.”

나무처럼 한 곳에서 뿌리내리고 산 노인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서류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쓰는 연필로 이어갈 수 있을까.

“어째 초상하나 안 남기고.”라고 먼 산을 보던 노인의 선한 눈매가 가슴에 박혔다.

고흥에서 돌아와 시댁의 안방을 뒤적거렸다. 1988년부터의 가계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매일의 기록을 넘겨보다 1995년 7월 손녀, 3.8, 출산 9시, 고대병원. 이라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 아래는 과일 4,000, 차기름 10,000, 과자 1,200, 소주 2,000이라는 그날의 소비가 적혀 있었다. 몇 권의 가계부를 뒤적거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의 가계부도 있어 꺼내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것은 이런 것이었다.

“8월 24일, 장남 가는 날, 어머니와 있다가 병상에 엄마 돈 두고 떠나감. 눈물을 흘리면서 갔다. 아버지 마음 몹시 아프다. 엄마의 가슴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기도.

8월 25일. 아내가 병원 퇴원. 은환엄마가 엄마 머리 감겨주고 둘째 집으로 가다.”

가계부는 곧 끝났다. 어머님의 기록은 아버님의 서툰 문장으로 이어져 나에게까지 남았다.

2015년 12월 14일 씀

 

 

그 때는 몰랐던 것

 

2003년 여름.

중국의 서쪽을 가겠다고 봄부터 마음을 다졌다.

여름방학은 7월과 8월이었다.

7월 한 달은 한국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습학원에 나가 국어와 논술을 가르쳤다. 한 달 생활비가 훌쩍 넘는 월급을 받아 챙겼다. 방학 특강을 맡는 동안 8월엔 여행을 갈꺼라고 호언장담해둔 터였다. 원장은 나를 잡았지만 절대 여행계획이 변경되는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잘한 일이다. 2003년 여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서안을 거쳐 가욕관으로 가 만리장성의 끝을 본 뒤, 둔황에 가서 막고굴을 보고 티벳 아래쪽 감숙성과 사천성을 돌아 성도를 찍고 상해로 돌아오기로 했다. 당시엔 한국인들 중 이 부근을 여행한 사람이 많지 않았고 영어로 된 배낭여행자들의 싸이트를 몇 달동안 뒤졌다. 그 때 온라인으로 알던 한 남자가 이 코스를 다녀온 영향도 컸다. 사진을 잘 찍는 사내였다.

서안까지 가는 데 기차로 18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산사태로 철로가 유실되어 6시간 연착되었다. 서안에서 둔황까지 24시간이 걸렸다. 둔황역에 내리니 밤 12시였다. 자작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사제택시를 타고 1시간 넘게 갔다. 둔황역과 둔황시내는 그렇게 멀었다. 명사산에 올라 모래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느끼고 막고굴을 돌아 나왔다. 하미과를 먹었고 가욕관을 갔다. 만리장성의 끝에 서서 말도 안되는 지평선을 봤다. 하늘은 음침했다. 인터넷으로 연락해 함께 여행을 하겠다고 북경에서 온 여자와 동행을 했다. 여행 중 살을 빼겠다며 식사를 굶는 사람이었다. 견딜 수 없었다. 두려움에 벌벌떨던 그 사람은 란저우에서 비보를 듣고 한국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이틀이상 묵으면 자살이라던 공기오염이 심한 란저우에서 라면을 하나 먹고 맛대가리 없는 커피를 나눠마시고 헤어졌다. 10시간이 걸린다는 샤허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샤허를 가는 길은 내가 여태 가본 중 가장 험한 길이었다. 그보다 더 험한 길은 황룡에서 성도까지 돌아오는 길이었다.

샤허로 가는 길에 회족들이 보였다. 운전기사와 승무원은 승객을 기다리게 하고 회족식당에 들어가 국수를 사 먹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고 싶을까봐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샤허는 온 마을이 사찰로 이루어진 곳이다. 라마승들이 가득했다. 그 사찰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을 위한 식당과 여인숙, 인터넷 까페와 조잡한 물건을 파는 잡화상, 그리고 터미널. 그게 그 마을의 전부였다. 거기부터 시작이었다.

티벳 사람들이 사는 곳.

샤허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7시간짜리 버스를 탔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랑무스. 郞木寺. 원래 그 쪽에서는 랑무스의 우변이 없는 글자를 쓴다. 랑무스는 마을이 卍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슬람 사원도 있지만 주민의 대부분이 티벳불교도이며, 라마승들이 가득하다. 가난한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승려가 되고, 부모와 헤어져 종교인이 된다.

다른 곳으로 나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 아침 7시에 있었고, 도착하는 버스는 저녁에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북경에서 온 내분비과 의사였다. 그녀와 랑무스에서 숙소를 같이 쓰기로 했다.

날씨는 내내 흐렸다.

해발 3천미터가 넘는 곳이었다.

샤허부터가 고산지대였는데 나는 으슬으슬 몸살기운만 돌았다.

DSCN3611 사본

 

랑무스는 천장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장은 사람이 죽으면 잘게 쪼개 독수리에게 먹이로 바치는 장례형태를 말한다. 조장이라고도 한다.

랑무스에 도착한 이튿 날 아침, 나는 북경여의사와 천장터로 향했다.

그녀가 오늘은 장례가 없다더라고 얘기했다. 나는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조금 놀랐다. 누군가 죽어서 독수리의 밥이 되고, 나의 구경거리가 되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개가 가득한 천장터에 힘겹게 올랐다. 천장터에는 신선한, 공기가 있었을 뿐이다. 바닥을 이리 저리 둘러보던 나는 사람의 뼛조각과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건드리진 않았다. 이럴 때마다 지나치게 냉담해지는 것이 나인지라, 사람이 죽었고, 여기서 장례가 있었고, 독수리도 안 먹는 게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내려왔다.

별 게 없다 생각한 우리는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오는 길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북경 여의사가 들어가볼까? 하더니 노크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음식을 해먹고 몸을 누이고 난로를 피울 정도의 공간에 한 라마승이 살고 있었다. 비구니였다. 여자는 바느질을 하다 말고 우리를 맞았다. 매우 쑥스러워했지만 내 동행이 중국인이기도 하고 우리 둘 다 여자인지라 큰 경계심은 없어보였다. 비구니는 우리에게 차를 내주었다.

 

샤허와 랑무스, 이 두 곳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마니차를 돌리며 돌탑을 돌거나 오체투지를 했다. 승려가 가득한 마을에서 늘 불경공부를 하는 소리가 들렸고 승려들은 승복을 입고 법당 근처에서 공부를 하거나 축구도 했다. 샤허에는 어린 동자승들이 들락거리는 작은 극장이 있었는데 30인치짜리 브라운관 티비를 높이 걸어놓고 푼돈을 입장료로 내면 지직거리는 화질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가끔 허섭한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사람들도 있었고 야크떼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침엔 양떼무리가 마을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갔다. 여인숙도 있었고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까페와 식당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니, 내 눈으로 봤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무 경제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누군가 농사를 짓고 먹을 것을 만들어 올테지만 그들은 많이 먹는 것 같지도 않았고 빨래를 자주 하거나 돈을 버는 사람도 매우 적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려이거나, 승려가 아니면 그저 마니차를 돌리며 길을 걸을 뿐이었다. 평생의 목적이 라사에 가는 것이라 했던가. 곳곳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밥을, 구걸해서 먹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르게 아무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거였다.

 

돈을 벌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라사에 가겠다는 꿈을 하나 가지고 평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적게 먹고 적게 일하며 본향을 꿈꾸는 사람들의 삶은 낯설 뿐 아니라, 당혹스러웠다.

 

뭐지.

 

뭐지?

 

아무 것도 안 해도, 괜찮은 건가?

 

오두막에서 만난 그 비구니는 길어진 손톱을 자르거나, 길어진 머리를 자르고 차를 끓여마시고 법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하루에 두 번씩 있는 경연에 참여해 승려들은 박수를 치며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해가 지면 누군가 언덕에 앉아 기도를 했다. 동굴 속에서 하루 종일 기도를 하던 여자가 쑥 나오기도 했다. 주인이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는 야크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흰 야크는 신성하게 여겨진다며 이리저리 꽃을 주렁주렁 달고 관광객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는 몰랐다.

그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라는 걸.

산다는 것은 애써서 뭔가를 만들고 먹고 욕심을 채우고 그 욕심을 버리고 누군가와 싸우고 사랑하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싸우고 뺏고 뺏기며 살아가는데, 그들은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죽으면 뼈를 잘라 새에게 주고 하늘로 돌아가라 빈다. 그 일을 마을 사람들이 하고 누구나 그렇게 하늘로 돌아간다. 조장에 대해서는 척박한 티벳의 환경으로는 화장도 매장도 어렵기 때문에 선택한 생존법일 거라 하기도 한다.

이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성지에 가려고 하는 것은 다음 생에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 생을 살면서 다음 생을 기다린다. 어찌 보면 이 생은 살지 않고 소망만 하며 다음 생을 미리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번 생은 오체투지를 하고 다음 생엔 또 무엇을 할 것인가. 다음 생에도 더 좋은 생을 위해 또 오체투지를 할 것이다. 이들은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이승을 사는 것인지 저승을 사는 것인지, 이번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다음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한 삶이 있었다. 과연 산다는 게 무엇이며, 죽는다는 건 무엇인가.

 

12년이나 지나 생각해보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문명이 진입해 랑무스의 사진을 검색해보면 각종 지프차가 여기저기 주차된 모습이 보이지만, 그래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오체투지를 하며 라사로 가겠지. 다음 생을 위해서. 그들은 이번 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라사로 갈 수 있으니.

 

언제 썼는지 기억이 안나는 글을 C드라이브에서 발견하여 옮긴다.

아마도 2015년 초에 적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