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팔자 때문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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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31일 민중의 소리 발행

올해도 생애사쓰기 수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주로 공공기관에서 오전에 수업을 열고 노인대상으로 수강생을 모집한다. 어떤 기관은 65세 이상으로 한정하기도 하고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인이용자들에게 모집공고를 주로 알리기도 한다. 굳이 노인으로 한정할 것은 없지만 여러 기관에서 선호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대체로 한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는 감동이 있다. 특히 자기 삶을 글로 정리하겠다고 모이는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떳떳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라야 자기 삶을 글로 써보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다. 글도 쓰고 발표도 하고 나중에 책자로도 묶어낸다는 프로그램 설명이 있으니 대부분 공개할 자신이 있는 사람들만 모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기관에서는 글로 쓸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모아놓기도 한다. 그런 경우엔 수업시간에 편하게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그걸 받아 적어 글로 변환해주기도 한다. 교육프로그램에 구술사기록의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내가 목적하는 바는 자기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를 책자에 넣고 그 과정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결과물을 보존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기관이 모두 이들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경험했던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가 종이에 새겨진 것을 보며 귀하게 여긴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 담은 리어카 끌고 이동하는 길에 은행나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 담은 리어카 끌고 이동하는 길에 은행나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김철수 기자

길게는 석 달 정도 자기 삶을 계속 반추해가며 기록해 나가는 작업은 쉽지 않다. 중간에 연락도 없이 안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초반에 모집한 사람들에 비해 30%정도가 남으면 성공인 셈이다. 서른 명 넘게 모집해도 많이 남으면 열 명 남짓이고, 대부분 그보다 더 적은 숫자가 마지막까지 원고를 써서 제출한다. 60대를 노인이라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적어도 70대가 넘어야 노인이라 할 수 있는데, 직접 글을 쓰고 자기 글을 고쳐오고 사람들 앞에서 낭독을 할 수 있는 80대들이 많이 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가난을 헤쳐온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잊고 있다가 다시 떠올리기도 하면서 자기 삶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기도 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한숨을 쉬면서 스스로의 ‘팔자가 기구해서’, 또는 자기 부모의 ‘팔자가 사나워서’라고 서술한다. 자기 삶을 되새길 때는 대한민국의 연대표에 자기 삶을 채워나가는 숙제를 낸다. 해방, 전쟁, 1.4후퇴, 4.19혁명, 이승만하야, 5.16 군사쿠데타를 말하다 보면 한 개인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사회적 사건 옆에 가족과 개인의 서사를 보태 적다 보면 팔자 때문이라기보다 나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 나의 사생활을 뒤틀기도 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의도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여러 사안들에 대해서 묻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사람들이 기억하는 해방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랐다. 태어났을 때 이미 일제가 지배하고 있었고, 집안에 딱히 민족과 일제를 설명할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그들에게 해방은 ‘국가의 패망’이었다. 어린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에는 일본의 패전을 슬퍼하며 울던 사람들과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공존했다.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다.

박복한 팔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쉬워질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성들의 경우 바람난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항상 있었다. 어떤 수업을 들어가도 한 명 이상 같고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자기 어머니를 두고 새어머니를 얻어 식까지 올린 아버지도 있고 오랫동안 두 집 살림을 하거나, 아예 집을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박복한 팔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쉬워질 것이다. 인과관계를 찾을 필요도 없고 그저 그런 운명에 의해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던 일들을 설명하기 쉬워진다. 박복한 팔자는 한 사람에게 귀착되고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이유는 없다. 팔자때문이니까.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뉴시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들이 겪어왔던 일들은 우리가 같은 땅에서 같은 제도 아래 같은 역사를 겪었기에 파생된 일들이다. 한 나라에서 같이 사는 건 운명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같은 시험을 보고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재난을 겪어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듯이, 같이 보고 겪은 것들 때문에 인생이 뒤집어지기도 한다. 내가 저지른 게 아닌데 내가 피해를 본 일들이 있다면 그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 욕심을 채우는데 눈이 먼 권력자들의 성급한 결정때문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말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오래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일들이 다 나 때문은 아니라고.

올해 만난 당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에게 나눠주면서, 들어줘서 고맙다고 해준 덕에 나 역시도 잘 버텼다. 건강이 허락될 때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던 당신들이 조금만 더 건강하면 좋겠다.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야 할 때마다 서글펐다. 당신들의 삶은 충분히 반짝이고, 이미 넘치도록 아름답다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모두 고마웠다고.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좋은 나라 만나서

2019년 12월 8일 민중의소리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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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이북의 돌산입니다. 황해도 은률군 서부면입니다. 사홍선 동네라고 했습니다. 구월산 밑에 있습니다.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라 하니, 일제 때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열 일고여덟 젊은 시절에 영장이 나왔습니다. 그때는 일본이 큰 전쟁을 할 때라 젊은 사람들에게 모두 영장이 나왔습니다. 근로정신대라고 전쟁터에 일을 하러 가야 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위안부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여자들을 데려다가 몹쓸 짓을 한다고요. 끌려가면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무조건 피해야 했습니다. 빨리 결혼을 하면 안 끌려갈 수 있다들 했습니다. 동네마다 혼처를 찾느라 난리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아무데나 그저 빈 자리가 있으면 무조건 보내야 한다고 성화였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성급하게 결혼시켰어요.

시집은 피목촌이라는 동네였습니다. 시댁은 그 일대에서 아주 잘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때는 100칸짜리 집을 지으면 거만하다 해서 아흔아홉 칸을 짓고 살지 않았습니까? 시댁이 그런 집이었어요. 그런데 가보니 신랑이, 몸의 반을 못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돈 많은 집이니 전답은 다 소작을 주고 나는 할 일이 없었어요. 농사도 안 짓고 할 일도 없었어요. 밥 해주는 사람, 빨래 해주는 사람 다 있었어요.

가서 보니 남편은 몸이 그렇지만 돈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그리운 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없었습니다. 시부모님은 당시만 해도 아들이 장가를 못 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들어오니 나름대로 흡족하셨던 모양입니다. 나는 이것도 내 정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정붙이고 살며 아이도 낳았습니다.

남편은 몸이 불편했으나 풍족했던 시댁
해방되니 모두 일꾼들의 것이 되고 무일푼 신세

일제 강점기가 지나니 시대가 바뀌더군요. 그 많던 전답이 모두 일하던 일꾼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전쟁이 터졌습니다. 인민군들이 들어와 집을 자기들 사무실처럼 썼어요. 우리를 알몸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거처가 마땅치 않고 나는 젊으니 시댁 어른들이 친정에라도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애들 둘을 끌고 돌아다니려니 길이 막막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날 낳고 돌아가셨고 우리 형제들에겐 계모가 있었습니다. 친정을 가도 안 반가워하겠지만 일단 언니를 찾아가봤습니다. 동네가 홀라당 비어 있었습니다. 폭격 맞아 죽었는지 어쨌는지 집은 빈집이 되었고 식구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빈집에 몸을 쓰지 못하는 남편과 애들 둘을 데리고 앉아 있는데 계속 비행기는 와글와글 돌아다니고 총소리 나고 폭격이 이어지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언니가 없는 집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디다. 그저 시간이 가길 기다린 건지, 누가 오길 기다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br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 ⓒ자료사진

아군과 인민군이 밤마다 싸우고 사람들은 징집을 당하지 않으려고 도망가다가 잡히기도 했습니다. 해가 지나고 봄이 되었습니다. 언니도 돌아오고 친정에서 그럭저럭 전쟁을 피하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시누이를 데리고 우리 친정으로 왔습니다. 시댁이 있는 동네는 더 이상 살 수가 없게 되었다고만 했습니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동리까지 왔습니다. 아버님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확인하더니 여러 말 할 거 없고 어서 길을 떠나자고 했습니다. ‘이래도 고생하고 저래도 고생하니 가다 죽더라도 가자’고 하셔서 다 같이 피난길을 나섰습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섬으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친정 오빠가 신천에 살았는데 피란길이 멀어 그 집에 들렀습니다.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헛간에 들어가 보니 쌀이 좀 있어서 속곳 바지에 쌀을 싸고 남은 옷가지에 마구잡이로 쌌습니다. 식구들이 다 이고 지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이불 보따리를 이고 시어머니는 우리 애들이랑 시누를 데리고 바닷가로 갔습니다. 솥단지 밥단지 숟가락은 어찌 가져가요 물어보니 아버지가 네가 쌀만 맡아라 해서 나는 쌀만 지고 시어머니는 요만한 솥단지하고 수저만 들고 애들 건사하며 갔어요.

바닷가에 도착하니 피난민들이 바글바글했어요. 그때는 기계로 가는 배가 없고 풍선(風船)이 20여척 서 있는데 선착장에 가득가득 짐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배가 어디로 가나요?” 물으니 전부 다 이남으로 갈 거라고 했습니다. 물이 들어오면 배가 나갈 건데 파도가 잔잔하면 모두 다 순탄하게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피난민들이 모두 그 배를 타고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는 산이 옴폭하고 그 산 아래에 바다를 바라보는 집들이 쭉 서 있었어요. 집들은 전부 다 비어 있었습니다. 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총소리가 나고 갑자기 난리가 났습니다. 시아버지가 ‘물이 들어오면 섬으로 건너가야 한다. 애들하고 니 엄마하고 어떻게든 갈 테니 쌀 이고 먼저 가라’고 하셨어요. 여기저기서 막 쏴대니 배가 못 들어오는 겁니다.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가야 해요. 물이 막 들어차기 시작해서 금방 배가 올 거 같았어요. 어디서 누가 총을 쏘고 난리가 났어요. 어디서 누가 쏘는지 모릅니다.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도 막 쓰러지는 거 같은데 나는 쌀자루 이고 차오르는 물을 따라 나가는데 물이 점점 차올라요. 머리에 이고 있던 쌀자루도 너무 무겁고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었어요. 갯바위 위에 쌀을 내려놓고 사람 오기를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와야 말이죠.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안 오는 거예요.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죽을 판이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라.

바위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는데 물이 다시 쭉 빠져서 쌀을 끌고 다시 육지로 가려고. 중간에 작은 섬에 사람들 몇 명이 바글바글 모여 있더라고요. 거길 들어가서는 식구를 잃어버렸다 얘기를 하니 쌀은 어따 뒀냐 물어서 나도 모르겠다, 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젖 먹이던 아이가 있어서 젖은 불어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물 들어오면 식구들이 오려나 내내 기다리는데 저 멀리 서 있는 배가 활활 불에 타고. 쌀이고 뭐고 다 실어놨는데 다 불타버렸어요. 이제 다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전쟁이 나고 친정 언니 집을 거쳐 피난길에 들린 신천 오빠집
바닷가 총격에 온 가족을 잃고 홀로 남으로
질긴 목숨, 그래도 살아지더이다

사람 목숨이 참 질기다고. 그때 죽을 것 같았는데 안 죽어집디다. 기다려도 아무도 안 오는데. 새끼 둘 다 내버렸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다 어디 갔는지 모르지. 남편도 모르고. 아무도 안 오고. 그렇게 바닷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데 아무도 안 오고. 그날부터 내가 혼자가 되었습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뉴시스

2년 전, 서울에서 만난 김 모 노인은 노인자서전 쓰기 수업을 하러 온 강사라 하니 내 손을 잡고 앉아 보라더니 이 이야기를 쉬지 않고 한 번에 쏟아냈다. 그해 그 해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미군 배를 타고 백령도에 당도했다. 백령도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라기에 그대로 따랐다. 군산에 도착하자 트럭이 여러 대 왔다. 피난민들이 살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을 듣고 트럭에 올랐다. 트럭은 부안에서 사람들을 내려놓고 떠났다. 자식 둘과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부안에 내린 젊었던 김 노인에게 누군가 방을 한 칸 내주었다. 김 노인은 거기서 혼자가 되었다. 피난민들에게 준다며 어디선가 된장과 고추장을 걷어다 주었다. 남의 집 살이를 하며 끼니를 때웠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고향에 따로 부인이 있었고 결국 고향의 부인에게도 돌아갔다. 김 노인은 호적을 만들지 못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김 노인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아주 짧게 얘기했다.

서부역 뒤 기찻길에 앉아 있으면 서울역으로 들어가는 기차에서 배추 겉잎을 밖으로 던져버렸다. 버린 배춧잎들을 모아 바구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식당에 가서 팔면 잘 받아주었다. 방 하나 얻고 연탄 몇 장 사서 겨울을 견디고, 배춧잎을 주워 팔다가 배추를 받아 팔게 되니 형편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 사이 아이 둘은 ‘알아서’ 크고, 김 노인은 ‘세월이 좋아’ 수급자가 되었다. 김 노인은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흡족해했다. 사는 게 쉽지 않고 고생도 많이 해서 더 살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나라에서 살라고 해주니’ 가는 날까지 감사하며 살겠다고 했다.

김노인이 말한 피난길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사에 남아있는 황해도 신천 사건으로 추정한다. 김노인에게 그 사건은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일생의 큰 사건일 뿐, 어떤 이유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 것을 들으며 전쟁이란 그런 것이겠다고 짐작했다. 아흔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작은 임대아파트를 얻게 되어 나라가 고맙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떤 감정도 쉽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종로 5가, 카바이드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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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0일, 민중의소리 발행

남편은 성실했다. 매달 따박따박 받아오는 봉급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차츰 살림을 늘려나갔다. 살림을 늘린다는 것은 어제까지 쓰던 낡은 냄비를 버리고 새 냄비를 사는 것, 그 중에서도 조금 더 좋은 것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실하게 매일 매일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직장을 다니던 남편이 듬직했다.

어느 날 남편이 회사에서 받는 봉급보다 더 벌 수 있으니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성실한 거로는 누구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무엇인들 못하랴. 남편이 잘 해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차린 공장과 어린 아이들과 같이 살던 조그만 집까지 모두 은행으로 넘어갔다. 남편이 이 고비를 넘기면 된다고 할 때, 나는 이웃과 친구들을 찾아 푼돈이라도 꾸어 남편에게 주었다. 금방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점점 들어가는 돈만 늘어났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집을 비워줘야 했는데 빚이 있으니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살면서 갚겠노라 약속하고 바로 옆 동네로 이사했다. 빚을 꿔준 사람들과 연락도 끊지 않았다. 누군가는 와서 욕도 하고 화도 냈지만 다 내가 돈을 빌리고 약속한 날짜에 갚지 못했으니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계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은 집에 드러누워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안하다고만 했다.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나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답답했다. 내가 무지해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무슨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무작정 버스를 탔다. 버스는 종로 5가를 지나갔다. 해가 진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어둑한 밤거리에 다들 집에 돌아갈 법도 한데 카바이드 불빛이 한데 잔뜩 모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버스에서 내려 불빛을 따라갔다.

겨울 포장마차 노점 불빛(자료사진)
겨울 포장마차 노점 불빛(자료사진)ⓒ뉴시스

카바이드 불빛은 출항을 앞둔 오징어잡이배처럼 빛나고 있었다. 불빛은 수 십대의 리어카 위에 있었다. 리어카 위에는 국수, 오뎅, 꼼장어 같은 게 놓여 있었다. 장사를 나가는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있었던 것이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부터 애기 업은 젊은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리어카 위에 뭔가를 척척 올리더니 하나씩 대열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저씨, 나도 장사하고 싶어요. 아저씨 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남편이 죽었어요?”

아. 장사를 나가는구나. 내가 잠들던 시간에 이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잠도 제대로 못자고 다음 날 해질 무렵 어제 갔던 장소를 다시 찾아갔다. 한 남자가 제일 커다란 리어카에 지갑과 잡화를 올려두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먼데서 그 남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그 남자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물건 살 폼도 아닌데 리어카 앞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남자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 남자에게 말했다.

“아저씨, 나도 장사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아저씨 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나 돈 벌어본 적 없어요.”

남자는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남편이 죽었어요?”

여기까지 적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수년 전 성업하던 식당을 접었다. 식당이 있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복지관에서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미처 졸업하지 못한 학교의 졸업자격 시험도 통과했다. 칠순을 넘기고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몇 차시였던가. 생애사쓰기 수업 중에 카바이드 불빛을 발견한 순간의 이야기를 써왔다. 써 온 글을 내가 대신 읽었다.

“밤 9시에 혼자 버스를 탔다. 가다보니 종로 5가였다.” 라는 문장을 읽고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밤에 일 없이 혼자 버스를 탔을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다들 아시죠? 이게 무슨 기분인지.” 라고 물었고, 칠순을 넘긴 수업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되었든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 위에 거침없이 올라타고 싶은 마음, 그 신산함에 대하여, 동의를 구했다.

남편이 죽지 않았으나, 돈을 벌지 못하는 남편은 마치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점상을 시작한다. 누워서 꼼짝을 하지 못했던 남편은 아마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점상을 거치다 노점상 철거 투쟁에도 나섰다. 정부가 마구잡이로 노점상들을 때려 부쉈고 데모도 해봤다던 이야기를 짧게 언급하고 그 시절의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인의 도움으로 식당을 열었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사명감으로 살았다. 식당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자식을 유학까지 보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일이 끝나는 고된 노동을 십 수 년 겪고 비로소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구청의 철거 단속에 항의하는 노점상(자료사진)
구청의 철거 단속에 항의하는 노점상(자료사진)ⓒ민중의소리

카바이드 불빛에 홀려 장사를 시작한 사람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졸기도 했고 바닥만 보면 눕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 정도의 고된 노동이 있어야, 나이 먹어 복지관에 다니며 여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이 사람은 경매로 넘어간 건물주 때문에 권리금 한 푼도 못 받고 보증금만 건져 가족을 먹여 살린 식당을 접었다. 후회는 없다고 했다.

나는 이 사람의 노동이 과연 온당한 대가를 받았던 것인지 따져보고 싶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없이 평온한 노후를 얻을 수 있을까. 카바이드 불빛에 생계의 희망을 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가히 이해할만 했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

2019년 11월 14일. 민중의 소리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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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이름 내가 지었지.
피란민으로 남한에 내려왔거든. 내려와서 동네 이장이 호구조사 나왔을 때, 이름이 뭐냐고 묻길래, 저는 이름이 김명자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어. 그 이름이 맘에 들었거든. 명자. 아끼꼬. 원래 어릴 때는 우리 아버지가 독자인데, 우리 할머니가 독자가 큰 딸을 낳아놓으니 이쁘다면서 이쁜아 이쁜아 이렇게 불렀지. 그래서 그게 그냥 이름이 됐어. 다른 이름이 없었던 건데, 호적에다가 이쁜이라고 올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내가 나는 이름이 김명자요, 라고 한 거야.

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잉?

먹고 살기 힘들어서 우리 할머니는 지금 내 나이만큼 되었을 때야.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딸을 일곱을 낳았다고. 내가 맏딸이고. 할머니까지 해서 우리 식구가 모두 다 남만주로 갔어. 거기 가서 딸을 하나 더 낳았지. 그래서 우리 집에는 딸이 여덟이 됐어. 나하고 밑에 동생 셋은 이름이 있는데, 나머지는 이름이 없어. 딸그만이, 딸그뿐이, 뭐 그랬어.

그 당시에 재수 좋은 사람은 헤이타산 끌려가고 재수 나쁜 사람은 정신대로 끌려갔어. 정신대 알아? 내가 그때 열여섯 살 먹었는데, 열여섯 살 먹어서 결혼을 하면 안 잡아간다 하길래, 그때 우리 살던 집 근처에 스물여섯 먹은 총각이 혼자 와서 살드라 이거야. 그래서 그놈하고 결혼을 했지. 그게 우리 영감이여.

일본놈이 언제 손을 들었냐 하면 음력으로 7월 초이레 12시였어. 중국에서, 몽고에서, 만주에서 일본놈 하고 미국놈 하고 싸움을 했어. 미국놈이 이기고 일본놈이 졌지. 그때는 중국에서 만주족들이니 몽고사람들이 우리를 막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다고 해. 무서워서 우리는 너무 무서워서 거기서 살 수가 없어. 소련놈이 이북에서 정치한다고 하고, 미국놈은 이남을 정치한다고 해. 그래서 거기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이제 내려오는데 겨울을 내내 걸어서 여덟 달을 걸어서 내려왔어. 내려오는 길에 너무 추우니까 아들이 얼어버렸어. 서울에 도착했는데 아들이 얼어 죽어버렸어. 그래서 남대문에 죽은 거 버리고.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자료사진

그리고 그 담에 임신을 해서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일흔 넷이여 시방. 그 아이를 지 아부지가 딱 짊어지고 내려왔다고. 일본놈들이 면이란 면은 다 걷어가서 솜도 없고 이불도 없어. 여름옷도 없고. 그래서 홑이불 뜯어가지고 묶어서 애 아부지가 그 딸을 업고 내려왔다고. 그게 지금 일흔 넷이여.

여덟 달을 빌어먹으면서 내려오는데 한 번은 어디를 걸식을 하러 갔어. 밥을 뜩뜩 긁어서 밥풀만 줘. 그때는 양은그릇도 없고 다 투가리 들고 다녔어. 우리 밥 좀 주시오, 했더니 우리도 점심이 얼마 없응게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오, 하는 소리를 듣고 뒤로 돌아서는데 눈물이 비 오듯 하더라고. 날은 추워서 강가에서 바들바들 떨고. 그때는 우리 아들이 아직 안 죽었어. 밥을 얻어먹으면 한 숟갈, 두 숟갈 뜯어서 먹이고, 그래가지고 그 아들을 업고 내려왔거든.

여덟 달을 걸어서 내려왔어. 빌어먹으면서 내려왔어. 걸어서 여덟 달을 빌어먹으면서 내려왔어. 아들은 얼어서 죽어버리고. 죽은 거 남대문에 내다 버리고. 애 아부지도 내려오다가 얼어버려서 내려와서는 죽어버리고. 오는 데 추웅게 죽어버리더라고. 그때 내가 서른셋이여. 여태까지 내가 혼자 살았어.”

지금으로부터 6년 전, 한 복지관에서 만난 노인이다. 을축년 소띠 1925년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총기 있었다. 남만주에서 내려와 서울에 자리 잡았던 주소도 줄줄 읊었다. 첫 수업때 아들이 죽은 이야기를 했다. 황해도에서 태어났다는 김명자옹은 먹고 살기 힘들어 남만주로 이주했다가 해방 이후 전쟁 즈음에 서울로 내려온 것 같았다. 말이 매우 빨랐고,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를 섞어 말했다. 변형된 일본어가 곳곳에서 튀어나왔고 나이 탓에 발음이 어눌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김명자옹은 첫 수업이후로 다섯 번을 더 만났다.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나를 잡았다.

“선생님,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항상 같았다. 남만주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며 여덟 달을 걸식을 하며 걸어 내려왔다. 남대문에 도착하니 등에 업은 두 살배기 아들이 얼어 죽었다. 남대문에 아기 시체가 쌓여있었다. 피난 내려오며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모아두었더라. 나도 거기다 아기를 던졌다. 묻어주지도 못했다.

아들의 죽음에서 멈춘 김명자옹의 삶
노인은 얼마나 많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담당복지사를 붙잡았다. “선상님,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같았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끔찍하고 처절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얘기였다. 매주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사뭇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인의 손을 잡았으나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더러 마음의 귀를 막았다.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월호참사 전면 재수사, 국민고소고발인대회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1.02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월호참사 전면 재수사, 국민고소고발인대회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1.02ⓒ김철수 기자

노인은 얼마나 많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자기 옛 주소까지 기억하는 총명한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처음부터 얘기한다는 것이 항상 남만주에서 걸어 내려와 등에 업은 아이가 죽은 것이었다. 그 사람의 생애 처음은 남만주가 아니었고, 아이가 죽은 일도 그 사람의 삶의 첫 장면이 아니었는데, 김명자옹의 처음은 남만주에서 걸어 내려와 아이가 죽었고, 그 아이를 묻어주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게 김명자옹에게는 삶의 전부였을 것이다.

상실은 사람을 멈추게 한다. 김명자옹은 묻어주지도 못한 얼어 죽은 아들 이후의 삶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때 죽지 않은 딸이 일흔이 넘었다는 것 외에는.

아이들을 잃고 난 다음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군가 애써 잡아끈다고 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죽음은 그 무엇보다 무고하기에, 그 슬픔도 대책이 없다. 태연하게 “명복을 빈다”라고 말하기도 죄스럽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공개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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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소리 : 발행 2019-10-18 12:05:51

“이거는 선생님만 보시고.. 공개는 좀…”
아무렇게나 뜯어온 다양한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를 내보이며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이거는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지 말고, 선생님만 보시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남성노인들은 공개하지 않을 이야기는 아예 쓰지 않는 것인지, 그럴 이야기가 있으면 아예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인지, ‘공개하지 말고 선생님만 보시라’고 했던 남성노인은 없었다.

여성들이 말하는 ‘선생님만 보시라’는 내용은 대부분 가족과 얽힌 이야기다.
올 봄에 만난 한 여성노인은 수업이 끝나고도 나를 붙잡고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갔다. 주인공의 남편은 오랫동안 도박에 빠져 살았다. 남편이 지방으로 일을 하러 간다고 해서 혼자 얼마나 외로울까 힘들까 걱정했다. 남편이 지방으로 일을 떠난 뒤 주인공은 이웃의 권유에 못 이겨 아이들을 데리고 집 근처 공원에 놀러갔다. 공원을 뛰어놀던 아이가 저기 아빠가 있다고 소리를 쳤다. 남편은 지방으로 일 하러 간 적 없었다. 집 근처 어딘가에 도박꾼들과 방을 얻어 기거하며 본격적으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이후로도 남편과 이혼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직도 살아있고 이제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사람은 꽤 많은 글을 썼지만 복지관에서 책자로 만든다고 했을 때 원고를 내지 않았다.

“선생님, 나요, 이거 다 썼지만, 아직은 아닌 거 같어. 못 내. 이거는. 내가 진짜 부끄러워서.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근데 지금은 아니야. 우리 애들은 이런 거 몰라. 이런 거까지는 공개 못해. 내가 이 동네 너무 오래 살아서….”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그이의 손을 잠깐 잡았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장미를 들고 폭력 근절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장미를 들고 폭력 근절을 요구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이 사람이 참가한 수업은 모두 여성만 있었다. 그 중 전업주부로 살아온 사람은 단 한 명이었고, 대부분 가장으로 살아온 여성들이었다. 남편의 폭행을 몇 장에 걸쳐 써온 사람도 있었고, 시댁의 횡포를 한 두어 줄로 적은 사람도 있었다. 폭력이 없는 남편들은 아팠다. 이들은 남편이 먼저 병들어 죽지 않는 이상, 버텼다. 수업에 참가한 여성들은 남편이 먼저 죽은 동료들을 “힘들게 살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본인들도 만만치 않게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먼저 사라지는 삶이 더욱 안타까운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한 달여가 지나, 가장으로 살았으면서 가장행세를 하지 못했던 여성들이 왜 남편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 동네에 남편이 먼저 간 이가 있었어. 근데 남편이 먼저 가면,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여. 밤에 찾아와. 남자들이.”
“누가 찾아온다고요?”
“동네 남자들이 그렇게 찾아온다고.”
다른 여성들도 말을 보탰다.
“그렇지. 그럴 수밖에 없지. 아이고 우리 동네는 진짜 흉측한 일도 있었다니께. 친척 아저씨까지 온다더라고!!”
노인들은 그들 특유에 탄식을 쏟아내며 몸서리를 쳤다.
“선생님, 무슨 말인지 알지요?”
삼시세끼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던 시절에, 끼니보다 잦았던 성폭력의 그림자가 교실위에 나타났다가 가라앉았다.
“그래서 집에 남자가 있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쓸모가 없어도,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거라고.”
아빠가 없는데도 남자 신발을 현관에 두고, 음식을 배달시키면 빈 방을 향해 “여보!”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내 등줄기를 스쳐갔다.

일러스트.
일러스트.ⓒ제공 : 뉴시스

이 교실에 있었던 여성들의 남자들 중 다수는 기운이 있는 상태로 집안에 있으면 술을 마시거나 가족을 때렸고 그렇지 않으면 아프다가 먼저 죽었고, 집밖에 있으면 도박을 하거나 다른 여자를 만났다. 소수의 남자들이 충실히 가정생활을 했고 소처럼 일했다.
여성노인들은 계속해서 말했다. 얼마나 모진 세월이었는지, 힘겹게 살아왔는지, 가족에게 끊임없이 상처받으면서도 가족을 지키려고 얼마나 애써왔는지.

가장 처음의 상처는 가족에게 왔다.
물론, 가장 처음의 위로도, 가장 처음의 돌봄도 가족이었다. 한 교실 안에서 여성 노인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 남성노인들은 입을 꾹 닫고 눈을 반쯤 감았다. 그들의 마음은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해수욕을 잊은 늦가을, 보드라운 마룻바닥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서걱대는 모래알 같았다.
나는 이들에게 언제나 “더 말하라”고 강권한다.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남고, 이렇게 글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퍼져나간다.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도착한 적 없이 허공을 떠돌다 증발한다. 삶의 성과를 가족의 평안으로 측정하는 여성노인들의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당신의 삶은 또 얼마나 모질었더냐고.
공개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남몰래 적어가는 그들의 손끝에서 우리들의 생존이 단 한 번 찬란한 빛과 만난 낡은 칼날처럼 번뜩인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모자를 쓴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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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노인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처음 진행하게 되었다. 보조강사로 시작해 두어 번의 수업을 맡았다. 내가 맡은 첫 수업에는 남성 노인이 열 명이 넘었고 여성 노인이 세 명이었다. 그 이후에 만난 어느 집단도 이렇게 남성 노인이 많은 경우는 없었다. 그 교실의 남성 노인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의 모자에는 보훈, 호국 같은 글자가 수 놓여 있었고 몇 명은 그 모자에 배지를 잔뜩 달고 있었다. 모자를 쓴 노인들은 좀처럼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쓸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등을 의자에 깊이 넣고 이야기를 듣겠다는 자세였다.

노인들이 글을 쓰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나는 복지관 담당자에게 다시 물었다. 수강생의 특성을 알려달라고. 사전에 복지관측에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참가자의 70%가 문맹이었고 나머지 30%도 문자를 해독하는 수준이라는 것. 문장을 완성해 한 편의 글을 써볼 기회가 없던 사람들이었다.

교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후반 출생자였다. 잊고 있던 근현대사를 다시 뒤졌다. 1919년 3.1운동, 1921년 조선어연구회가 설립되었고,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했지만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을 몰고 간 일제는 1938년 한글교육을 금지시킨다. 1939년 징용령이 공포되고 1940년 창씨개명이 실시되었다.

일본 전쟁영웅 찬양 글을 쓰는 학생들
일본 전쟁영웅 찬양 글을 쓰는 학생들ⓒ경남교육청 홈페이지

그 교실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앉아 있던 노인들은 그때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연표를 읽은 나는 다음 수업에서 이들에게 모두 일본어는 조금이라도 기억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노인들은 갑자기 신나서 자기가 기억하는 일본어와 일본노래를 이야기했고 몇 년 전 일본 여행 갔을 때 통역이 필요 없었다는 허세까지 부렸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소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글말살정책의 현상이 강의장에 고스란히 살아났다. ‘지금 돈으로 치면 500원씩 벌금을 걷어갔다, 우리 센세이는 때렸다, 집에 와서 한참을 울었다, 그걸 고자질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일본인 센세이보다 조선 선세이가 더 나빴다..’ 이들은 일본어를 얼마나 혹독하게 배웠고 잘했는지를 말했다.

나는 한국어를 배울 수 없던 상황에 대해 하나씩 점검하며 물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학교를 다닐 수 있던 사람들이 적었고 다닌 사람들이 배운 언어는 일본어. 45년 광복을 맞아 하루아침에 선생들도 사라져 버렸다. 학교는 길을 잃었고 이들은 산으로 들로 소란스러운 정국을 구경하며 몰려다녔다는 이야기를 했다. 혼란스러운 정치대립이 이어져 길에서 싸움이 잦았다고 기억했다. 코에 솜털이 거뭇해질 때쯤 전쟁에 뛰어들어야했고 돌아와 보니 청년이었다.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사내들. 이들이 문맹으로 남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국가는 이들을 방첩대나 보안대라는 이름으로 불러 세웠고, 제대로 된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자원봉사로 이용했다. 그러다가 어느덧 경력도 이력도 없이 배지를 잔뜩 달고 노인이 되어 앉아 있는 이 사람들을 보며, 국가란 무엇인가 생각했다.

2017년 8월 22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사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무죄석방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2017년 8월 22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사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무죄석방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정의철 기자

이들의 삶은 기록된 것보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발화하지 못한 것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꿈틀거리다 어디론가 몸을 감췄다. 비가 오면 냄새를 피우는 썩은 사체처럼,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기회가 되면 사람들을 괴롭혔다. 공포와 불안은 혼백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내가 만난 노인들이 어제 광화문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빨갱이 세상을 막아야 한다는 공포는 어느 집에나 있는 억울하게 죽은 조상신이었다. 노인들의 목덜미엔 비참하게 죽어버린 혼백이 매달렸다. 모자에 배지를 달면 두려움이 사라질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린 시절, 일본 선생의 매질을 기억하며 손가락을 구부리던 그들의 모자를 기억한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나는 다 실패여” –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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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이었다.
서울의 어느 노인복지관에서 ‘노인 자서전 쓰기’ 수업을 의뢰해왔다. 나는 그 수업의 보조강사이자 기록자로 참여했다. 복지관의 규모가 커서 수강생도 많았다. 노인들은 대부분 유년기의 기억을 이야기하다 울었다. 그들이 겪은 전쟁은 그저 비참이었다. 누군가 사라지고 누군가와 헤어진 이야기만 이어졌다. 자기를 살뜰하게 챙기다 사라진 아버지를 이야기하던 여성 노인이 펑펑 울었다. 노인들의 서사는 유년기에서 오랫동안 맴돌았다.

두꺼운 점퍼를 입고 맨 뒷자리에 앉아 글쓰기 교재를 뒤적거리던 남성 노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 인생은 실패입니다.”
강사로서의 역할은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다독이는 일인지라 나는 그에게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패인지 아닌지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는데요.”
그는 슬며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다들 뭔가를 이뤘어요. 일이 있거나, 자식이 있거나. 여기 책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사람들이 살다 보면 뭐 하나라도 이룬단 말이죠. 하지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해 놓은 것이 없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실패예요.”
나는 짓궂은 표정으로 “아닐걸요.”라고 말하고 웃었다.
“정말이에요. 나는 다 실패. 모든 게 다 실패.”

2017년 1월이었다. 나는 그에게 성공한 사람들은 오늘 모두 청문회장에 앉아 있다고 말했다. 굵은 주름이 남은 굽은 손가락으로 노인은 얇은 글쓰기 교재를 쥐고 가만히 있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듯했다.
다른 노인들은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그의 앞에 다가갔다.
“아버님, 우리 모두 다 죽잖아요. 인생에 성공이 어딨어요. 모두 다 죽는다는 건 결국 다 실패한다는 말이잖아요. 아닌가요?”
노인이 허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다 실패여….”
“어떻게 실패했는지 알려주세요. 그럼. 실패인지 아닌지 좀 보게요.”

노인이 환하게 웃었지만 어이가 없는 것인지, 기분이 나아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굽은 허리를 일으켜 노인이 나에게 목례를 했다.
그는 다시는 그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노인 자서전 쓰기 수업 참가자
노인 자서전 쓰기 수업 참가자ⓒ필자 제공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다시 만나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의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라고 뇌까리며 형광등을 켜둔 채로 모로 누울지, 나는 알 수 없다.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모든 것이 실패였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무엇이냐고. 헤어진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이 칼럼을 시작한다.

당신의 인생은 실패도 성공도 아니라고. 나도 비슷하게 살고 있다고.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문자가 주는 오만함을 경계하라

[서평]활자 잔혹극 – 루스 렌들

영국 미스테리 소설의 거장 루스 렌들의 <활자 잔혹극>은 1977년작이다. 한국에는 북스피어 출판사가 2011년에 소개했다.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 “의식(儀式)”의 원작소설이다.

▲ 루스 렌들 (지은이) | 이동윤 (옮긴이) | 북스피어 | 2011-11-25 | 원제 A Judgement In Stone (1977년)

오만의 유혹, 세계의 파멸

소설의 첫 문장은 도발적이다. 사건의 결과를 내던지고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 이런 일이 있었어.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내가 지금부터 잘 설명할텐데, 듣고 싶으면 듣고 아님 말어’ 라는 태도로 보인다. 소설은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히고 시작한다. 독자가 찾아내야 할 것은 그 원인이다. 문맹인 가정부가 지식인 가족을 살해한다. 그 곁에는 광신도인 미치광이가 하나 붙어 있다.
주인공은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왔다. 문맹이라는 건 제도권 교육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며 누구도 이 주인공을 살뜰하게 보살피거나 주인공의 미래를 진지하게 염려한 적 없다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문맹이 느낀 수치심은 과연 어떤 것인지 사실 잘 알 수 없다. 글을 알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마지막 해제에 장정일이 적은 발문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단초가 된다. 영어권 국가에 갔는데 말을 한 마디도 못해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던 적 있다면. 이라는 부분을 읽으니 개인의 경험이 생각났다.

10년도 훨씬 더 전에 공부를 하겠다고 중국대륙으로 갔다. 중국어는 학원을 몇 달 다녔지만 사실 한 열 마디 정도 하는 게 전부였고, 영어가 어느 정도 통하겠거니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며 대책없이 떠났다.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부터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나는 영어로 된 호텔명만 알고 간 것이고, 내가 아는 주소도 영어로 된 것이라 발음이 명확치 않았다. 택시기사 한 명에게 호텔명을 댔더니 공항에 줄 지어 서 있는 택시기사 수십 명이 몰려들었다. 그 땅은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새로운 단어는 중국어로 바꾸어 말했고, 내가 도착한 상하이라는 도시는 사투리마저 심해서 어학연수 기간 내내 표준어를 배워봤자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말도 글도 안 통하는 몇 개월을 보내며 어릴 때 본 중국무협드라마에서 본 이미지가 떠올랐다. 팔다리가 다 잘려서 항아리속에 목만 내밀고 살아있는 반역자의 모습이었다.
이후, 말을 떼고 글을 배우고 알량한 글밥으로 공부를 했을 때의 심정은 좌절감, 열패감, 소외감, 박탈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표현명사는 다 갖다 붙여도 무방하다.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설마 주인공의 감정을 반푼어치라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까?
아닐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평생을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온 것이다.
주인공에게 문맹이라는 건 치명적인 비밀이요 상처다. 불행하게도, 주인공은 숨기고 싶은 상처를 후벼파는 대상들에 둘러싸여 산다. 결국 주인공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

작가는, 주인공의 이 문제가 그저 감정의 것으로 건드리고 넘어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문화전체와 문자라는 기표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문자로 둘러싸인 삶과 지식인연 하는 것과,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고 드는 기득권층의 계급성을 두고 문화의 차이로 인한 삶이 달라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질문을 던진다. 문화수혜자와 문화박탈자의 경계는 또 다른 계급갈등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이 어떤 삶을 꾸려가는가는 사실 의지의 문제와 동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언어의 기의도 누구에게나 동일하진 않다. 굳이 성문화하지 않은 약속이 있다고 치면, 언어의 기표는 특별한 교육을 거쳐야 습득할 수 있다. 근대교육은 분명 특별한 영역이다. 그저 너무 흔해서 보편화된 것처럼 보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맹이 아닌 이들이 말하는 보편이나 평범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본인이 기득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기득권들의 놀음은 아닐까.

예를 들어, 쪽방촌에 사는 70대 이상의 노인들은 메모를 길게 하지 못한다. 문자습득이 순탄하지 않았고 문자는 그저 명사, 이름씨로 존재하지만 문자를 사용해 감정이나 생각을 전달할 정도의 문자 습득력은 없다. 이것은 문해력과 바로 직결되는데 타인의 기표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되면 온전히 사람의 표정과 어투, 말씨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휘갈겨대는 수많은 문자를 보며 온통 어지러운 세상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글씨는 쓸 줄 알지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엉망이었다. 이 사람은 초등학교를 3년 정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였다. 가정내 폭력으로 가출이 아닌 구출을 받아,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의 남편이 문맹인 거 같다고 나에게 고백한 적 있다. 그 남편은 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랐고 역시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다. 결혼 후 모든 공기관과 은행 업무를 이 사람이 도맡아서 했는데 남편은 글자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예상되기만 해도 짜증을 부리고 포악을 떤다는 것이다. 남편의 얘기를 전하던 그는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포악을 떨 게 뭐냐고 투덜댔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문맹이라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개연성을 생각해보면 아감벤을 떠올릴 수 있다. 조르주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에서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루스 렌들이 말하는 문맹이라는 형상은 그저 여러 종류의 호모 사케르 중 하나일 것이다.

문해자들은 문맹을 보면 가르치려 든다. 문맹자의 의지박약을 말할 것이고 동정하고 연민하며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겠다고 안달을 할 것이다. 타인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지 않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인간이 많다. 과연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해도 되는 행동인가? 존엄의 문제와 과연 무관할까? 이는 통제의 한 방편이거나 폭력의 묘한 양상은 아닐까?

주인공의 이름은 유니스다. 유니스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한 존엄한 존재가 가진 온전한 세계의 침탈을 꿈꾼 한 가족에 대한 인간으로써의 저항일 수도 있다.

“유니스는 숨쉬는 돌이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유니스는 문자가 필요 없는 원형 그대로, 문화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특정한 세계, 요컨대, 자연계의 상징으로 보였다.

영어 원제는 A Judgement In Stone이다. 위에 소개한 문장이 그 핵심문장이 되는 셈이다. 사전을 다시 뒤져 in stone을 확장해 찾아보면 carved in stone이라는 관용어구가 나온다. 변경불가능한, 이라는 뜻이다. 돌은 그런 것이다. 돌에 새긴 심판, 이라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말할 것이다. 문맹 너머, 유니스라는 한 개체가 가진 특질과 그 개체가 40년간 흡수해 온 문자를 제외한 사회문화의 많은 것들이 상징하는 바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변경 불가능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떠한 세계.

조선 후기 문인 김려(1766-1821)는 사유악부(思有樂府)에서 ‘세상이 어지러워 화 당하기 쉬우니 글짓기를 조심하라’고 전했다. 글짓기나 글쓰기가 과연 세상이 어지러울 때나 조심해야 할 일일까. 우리는 글 속에 파묻혀 얼마나 많은 것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만을 떨며 죽어가는가. 배운 것이 탈이고, 아는 것이 병이로다. 무수히 부딪히는 세계와 세계의 충돌, 그 사이에 벌어지는 크레바스 같은 파멸은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작가의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래 읽히는 작품은, 늘 온당한 이유가 있다.

▲ La Ceremonie, 1995 | 감독 : 클로드 샤브롤 Claude Chabrol | 주연 : 상드린느 보네르(Sandrine Bonnaire), 이자벨 위페르 (Isabelle Huppert)

오늘도 기적

1.
밤 10시.
모 공기관의 공무원.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전화는 못 하겠고 죄송하지만 내일 오전에 전화를 해도 되겠느냐는 문자.
어차피 늦게 문자를 보냈으면 그냥 얘기를 하는 게 낫지. 나는 좀 그렇게 응대하는 편이다.
회의 중이니 끝나고 전화하겠다고 답신을 보내고 통화를 했다.
행사를 준비했는데 자리를 채우는 게 영 어려웠던지. 이야기를 하는데 망설임과 막연함 때문인지 중언부언이 더러 묻어난다. 무슨 말인지 알겠고, 왜 전화했는지도 잘 알겠고, 뭘 원하는지도 잘 안다. 필요한 것은 동원인데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두 달전에 알려줘야 스케줄 조정이 가능하다고 일러주며 잘난 척을 좀 하면서, 아직 퇴근 못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 사무실이라고 답했다. 오죽하면 이 시간에 전화를 하셨겠느냐, ‘당신 마음을 이해한다’는 분위기를 풍기고는 당신이 원하는 자리에 늦더라도 참석하겠다고 대답했다.

정부에서 말하는 협치, 거버넌스. 지금으로는 되지도 않는 소리다.
기관의 공무원들이 말하는 거버넌스는 선택지를 두어 개쯤 내놓거나, 아예 단 하나의 명제를 설정한 다음 “자 어때요? 한 번 보세요. 괜찮죠? 이제 동의해주시면 됩니다.” 라는 게 전부이다. 처음부터 가닥을 잡아나가면서 조직적으로 실천해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은 중간에 한 개의 톱니바퀴라도 헛다리를 짚으면 배가 산으로 가서 집을 짓고 장사를 한다.

민관이 협치해서 배가 바다로 가려면, 지독한 사람들이 세 명 이상 모여야 하는데 그나마 그 세 사람 구하기는, (이상한 드립을 넣고 싶지만 참겠다) 매우 어렵다. 모르기 때문이다. 실패의 흔적도 정리해 둔 적이 없다.

2.
이 전화통화를 하기 직전에 나는 민에서 쌓아올린 성과를 관이 묵사발로 만들 뻔 했던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며 어느 톱니가 빠졌기에 진창에 빠져 헤맸는지,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려고 갖은 애를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다 나온 거였다. 누가 잘하고 잘못했고가 아니고, 그저 다들 잘 몰라서 그렇다.

여름 내내 매달린 한 바닷마을의 재난에 대해서도, 최초부터 그 자리를 지킨 한 사람의 말로 응축되었다. “우리가 너무 무지해서.”

놀라울 만큼의 낮은 문맹률과, 놀라울 만큼 높은 대학진학율과, 모두가 100만원짜리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이 나라에서 무지한 사람들은 왜 이리 많은가. 나도 그들 중 하나다.

3.
매일 매일 많은 일들이 있다. 왜 나는 이렇게 사나.
오늘은 버스를 탈 일이 있었는데 버스 창문밖을 바라보며 나에게 물었다.
주어지는 인건비 대비 소요시간이 너무 길어서.
매일 매일이 전투고 전쟁터다. 나를 찾고 기다리고 나타나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올해 들어 두 곳의 시범적으로 일감을 받은 두 곳의 거래가 딱 한 달만에 끊어졌다. 내 실수도 있었는데 내가 실수를 하게 되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 내용은 정리해 회사 페이지에 올려야겠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감도 잘 선별해서 받아야겠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원하는 목표와 프로세스가 다 정리되어 그대로 수행할 대상을 찾는 의뢰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에는 실수가 이어진다. 한 번도 저지르지 않은 실수나, 오류들이 계속 발생하고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세상에 없던 것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과 내가 더 잘 어울린다.

4.
적어도 일주일에 하룻밤은 이번 달에 수금될 돈을 헤아리고 이번 달을 넘길 방법을 계산하며 몇 시간을 보낸다. 대부분의 일이 후불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는 항상 잔고가 있어야 하는데 중간에 한 곳이라도 구멍이 나면 속수무책이다. 역시 그간 내가 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탓이긴 하지만. 오늘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살면 엄청나게 힘들다고 말했다. 네 맞습니다. 많이 힘들고, 건강이 많이 상했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는 없다. 시간과 돈은 언제나 모자라다. 까페를 열고나서 강의를 줄이느라, 오늘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은 문서를 써서 모 학교에 제출했다. 지난 두 주간은 정말 길에서 쓰러지는 줄 알았는데 물리적으로 힘든 것보다 정신적 타격이 꽤 컸다.
그래서 사실 매일이 기적이다.
나와 같이 사는 사람도 짐승도 하나도 아프지 않고 모두들 건강하게 잘 자라나고 곱게 늙어간다. 잘 생각해보면 나도 참 건강하다.

5.
나는 왜 이런 글을 이토록 길게 쓰고, 이걸 또 공개하는 걸까.
누군가에게 들어달라고 하는 말이다. 집에는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짐승도 있는데, 또 말하고 또 말한다. 말하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내 삶의 일부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여기에 전하며 사회적 성취감을 얻는다. 어쩌면 다들 잘 살아보자고 얘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향하는 바는 생의 연대다. 나도 당신도 다들 매일 기적을 살고 있으니, 오늘 내가 이만큼 느꼈고 겪은 만큼, 서로 주절거려보자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참 아는 게 없구나. 죄다 모를 일이다.

*애정하는 번역가가 모든 처음이 힘들다고 적은 걸 방금 보니 생각났다. 나는 모든 처음을 사랑하는구나. 새싹같은 것들. 불완전하고, 여린 것들. 생각해보니 2014년에 만든 이룸의 로고도, 새싹이었다. 여린 이파리.

 

2019년 9월 24일.

2019년 8월 – 조국과 서울대

1987년 민중운동을 읽어내려가다가 이석규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이 불과 몇 년전이다.
87년,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저 놀부 두손에 떡 들고” 라는 노래를 가르치는 교사에게 대통령 선거를 우리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는 수준이었다.

1987년은 6월 항쟁뿐 아니라 노동자대투쟁도 있었다. 8월 22일 대우조선에서 투쟁하던 노동자 이석규는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숨졌다.

나는 서울대생 박종철과 연세대생 이한열을 기억지만, 이석규라는 이름은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나 알게 되었다. 아무도, 이석규와 노동자대투쟁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그 때, 나는 그 대우조선소에 작업복을 버리고 올라온 남자와 막 연애를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은 모두 서울대였다. 서울대학생들이 서울역에서 회군을 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서울역 회군의 주동자 심재철은 그때부터 민주세력의 역적이다.

94년도에 학교를 들어간 친구들의 등을 바라보며 호프집에서 맥주를 날랐던 나에게 찾아와 “내가 생각한 한총련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말하던 내 친구로부터, 이화여대 앞의 옷가게에서 티셔츠를 개고 있던 나와 마주친 학교 배낭을 멘 동창으로부터, 나는 수 십번 수백번의 박탈감을 느끼고 대학도 가본 놈이 데모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

노동법이 뭐고, 산업재해가 뭔지 모르고 불 난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다 쓰러지는 언니들이 내가 읽는 잡지를 보고 “넌 좀 이상한 애 같아.” 라든가, “너 간첩이지?” 라는 우스꽝스러운 의심을 받았던 세월을 지나고 나니 나도 변하고 말았나.

마치 나도 서울대생이었던 것처럼,
서울역회군에 분노했던 선배가 있는 것처럼, 96년 연세대에서 질질 끌려나온 흰 바지 입은 여학생이 나인 것처럼.

조선소가 망해나가는 건, 정규직들이 노조일 하느라 바빠 현장을 돌보지 않아서라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성토를 들으며, 원청 새끼 개새끼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새끼들이라는 3차 하청 현장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뭐라고 생각한 건가.

소나타쯤 타고 다닌다고 내가 강남좌파쯤 된다고 착각한건가.

박탈감을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은 착각해버리는 것이다.

나도 맘만 먹으면 3억짜리 벤츠 GT 정도는 살 수 있지. 중고차를 70개월할부로, 걔는 모아둔 용돈으로 새 차를. 이 차이를 모른 채, 내 자식이 누리는 풍요가 마치 80년대 내가 누리는 풍요인 양 착각하고 마는, 이 편리한 정신세계는 귀찮아서 나약해지는 것인가, 편리한 걸 찾는 것인가.

아무리 죽여도 사라지지 않는 모기떼가 들러붙는 것같던 지겨운 여름이 지나간다. 이 여름, 90% 이상의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고 그 중 대다수가 월 소득 700만원 이상의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만들어온 세상을 본다.
서울대생들이 만들어온 온 세상에서 부르짖은 민주와 정의가 흔들리는 것을 본다.

서울대의 서울대에 의한 서울대를 위한 2019년 8월의 사건을 기억하자. 32년전 최루탄에 맞아 죽은 노동자의 이름은 지운 채, 그해에 죽은 대학생 둘을 더 또렷이 기억하는 세상에 매듭을 한 번 묶어본다.

2019년  9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