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다미선교회

모태신앙이던 내가 교회를 멀리하게 된 것은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동네에 알려졌다. 엄마는 가끔 교회에 충성했고 가끔 냉담했는데 본인이 정서적으로 불안정할 때 교회에 집착했다. 초등학교 4학년쯤 엄마가 교회에 충성하던 시절이었다. 그날은 엄마가 주일예배 전에 교회 앞에서 주보를 나눠주는 안내를 맡았다. 건너편에서 같이 안내를 하던 다른 집사가 엄마에게 “이집사, 이혼했다며?”라고 물었다. 그게 84-5년도 쯤이었다. 이혼한 싱글맘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시선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현존하는 모든 여성혐오의 총체쯤. 그래서 엄마는 그길로 교회를 그만뒀다. 나도 자연히 교회를 안 나가게 되었다. 엄마는 종교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 말이 적다는 천주교로 옮겨갔다. 나는 세례를 받으려고 여러 번 애를 쓰다가 번번히 실패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쯤, 어찌저찌해서 친해지게 된 아이들과 함께 갑자기 교회열풍에 휩쓸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광신도가 되었다. 집안사정이 정신없이 흔들렸고 매일 다툼과 폭력이 난무하던 때였다. 집에서 학교를 제외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은 당시에 흥하던 단과학원과 교회였다. 합법적으로 외부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토요일에는 청소년부 예배가 있어서 하루종일 교회에 있었고 일요일에도 교회에 있었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이 되는 방학때 교회오빠들에게 기타를 배웠다. 그때가 CCM이 막 퍼져나가던 때였다. 주찬양선교단이 봄여름가을겨울만큼 흥했고 송명희와 최덕신은 청소년기독교도들의 아이돌이었다. 기타를 가르쳐주던 오빠와 찬양집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찬양집회만 다녔겠나. 연애도 했다. 우리는 신앙으로 똘똘 뭉친 강력한 커플이 되었다. 화요일에는 동대문 근처에 있는 무슨 교회의 찬양집회에 나갔고 가끔은 온누리교회 두란노 찬양집회에 갔다. 토요일,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찬양집회를 주도했다. 내 남자친구는 기타를 쳤고 나는 탬버린을 든 보컬을 하거나 키보드를 치면서 노래를 했다. 우리 둘은 매일 아침마다 큐티도 했고 주말에는 수유역에 있는 아멘서점에서 책과 음반을 골랐다. 그때 락음악을 사탄의 노래로 규정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나도 그 영향을 받아 몇 년동안 모은 모든 테이프를 죽죽 잡아빼서 가위로 싹둑싹둑 오려 버렸다. 엄마는 방문을 열고 내가 테이프를 다 망가뜨리는 걸 보더니 “어머, 저 미친년.”이라 말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연애초기, 내 남자친구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친구에게 연애질이 들통나 무리에서 왕따가 되었고, 학교에서는 남녀공학에서 계집애가 학생회장이 되었다는 이유로 남자애들에게 물을 뒤집어쓰기도 했고, 새아버지와 엄마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집안꼴은 개판이었다.

모든 상황이 악화일로이던 때에 남차친구가 다미선교회 책을 내밀었다. 지금은 그 책 제목이 기억이 안나는데, 파란색 표지에 한 가운데 무슨 사진인지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휴거가, 사춘기에, 혼란스러운 집구석에, 외롭던 나에게 한줄기 구원이었다.

다 망해버려라. 나도 망해가고 있으니 다 같이 망하고 나도 하늘나라 가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다.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한 성경통독을 두 번 마치고 구약이 지겨워 신약을 다시 읽고 있었다. 새로 나온 만나성경을 사서 주석까지 훑어가며 읽으면서도, 다미선교회 이장림목사의 책을 있는 대로 찾아 읽으면서 휴거론에 푹 빠졌다.
친구 한 명이 나에게 “미친 것 같다.”라고 했는데 나는 “미쳐도 모자라지 않겠니.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이라고 대답했던, 그게 중3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주찬양 선교단의 테이프를 다시 듣는데 이런 가사가 들렸다. “누가 아는가, 주님이 오실 그날을.” 이건 성경에 있는 구절인데, 다미선교회의 말과 상반되는 것 아닌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성경을 다시 펼쳤고 요한계시록을 다시 읽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다들 “너무 미친 거 같아서” 나를 멀리할 때, 다시 성경을 통해 휴거에서 벗어났다.

곧이어 가족에게 큰일이 생겼고 나는 잠시 학교를 쉬게 되었다. 내가 다미선교회에서 벗어나면서 남자친구와도 멀어졌다. 남자친구는 다시 나에게 찬양집회에 나가자고 했는데 “오빠는 한가하냐? 나는 이제 바쁘다. 공부해야하거든.”이라고 시건방지게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완전히 헤어졌다. 오빠는 교회였고, 교회가 오빠였으니까. 일체된 두 가지 존재를 같이 밀어냈다.
6개월 후에 학교에 복학한 나에게 선생님과 아이들이 “신앙부장” 안 하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종교에서부터 멀어졌고 중창단에 복귀해 노래연습하고 공연다니며 잘 지냈고, 그 이후로는 어떤 종교와도 가까워지지 않고 있다. 회피한다기 보다, 모든 게 납득이 잘 안된다. 가끔 진보적인 신학서적을 읽을 때는 있다.

사춘기에 술 담배 폭력으로 일탈하지 않은 건 교회때문인데, 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는 데가 그때는 교회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어려서는 매우 금욕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내가 교육받은 범위내에서 정당하게 일탈할 수 있는 한계는 다미선교회까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그때 예체능에 집중했다면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성경을 두 번이나 읽는 기염을 토하진 못했겠지. 성경을 읽은 건 서구문화와 문학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된다. 종교가 필요한 시기라 종교에 몰입했고, 그 종교에게 기복을 원할 때 위험해진다. 기복신앙으로 바라보던 종교가 나에게 답을 주지 않을 때, 사이비에 빠지는 건 아닐까.

사회적 자아를 키우고 싶은 욕망을 가진 부류가 있을 것이다. 사이비에 빠지는 저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 사연도 모두 안타깝고 구구절절할 것이다. 오죽하면 그랬겠나 싶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 매몰차게 거절할 줄 모르고, 자기 이득을 우선시 할 줄 모르는, 적당히 손해보고 싸움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힘든 곳이 이 나라니까. 그 개개인 모두가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 것이다. 들어보면 모두 그럴만한 사정일 것이고, 모두 이해할 만한 사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납되는 것은 다르다. 저간의 사연은 이해해도 좋지만, 그렇다고 “불법감금이나 개인의 결정권을 침해하거나 지능적으로 노동력과 금전을 갈취하는 등의” 비윤리적 행위는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건, 스티븐 핑커가 <빈서판>에서 한 얘기다.

2020. 2. 25.

순대국과 숙명여대

점심시간이 지난 순대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직원과 눈이 마주치면, 순대국 한 그릇을 외치고 자리에 앉는 법이다.
부글부글 끓는 순대국이 오기 전엔 늘 반찬을 먼저 차린다.
김치뚝배기에서 김치를 먹을 만큼 꺼내 접시에 담는 중이었다.

자동문이 열리네 안 열리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허리가 완전히 굽은 노인이 들어섰다.
계산대 근처 테이블에 앉은 노인에게 서빙하던 여자가 다가간다.
“할머니 뭐 드려? 순대국 하나 포장? 똑같이?”
노인의 목소리는 멀지 않아도 안 들릴 것 같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도 모르겠다.
몸을 숙이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큰 소리로 순대국 포장을 묻던 여자가 주방에 대고 외친다.
“순대국 하나 포장. 밥 따로 포장!”

“밥 따로 포장?”
“어. 밥 추가해서.”
국밥집에서 포장을 할 때 밥은 원하는 사람에게만 딸려간다. 대부분 밥은 집에 있는 걸로 먹는다는 얘기다.
국밥집의 뜨거운 밥을 포장해버리면 그 온기와 끈기 때문에 맛이 떨어져서인지, 나도 포장할 때 밥을 달라고 하지 않지만,
음식을 나르던 사람들은 노인의 순대국 포장 주문을 받으며 밥을 싸가겠냐고 물은 모양이다.

허리가 완전히 굽은 노인이 엉거주춤하게 걸어 반대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약간 기울어진 고개는 살짝 좌우로 떨렸다.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저 할머니 불쌍해서 어쩐대.”
“그래도 저 할머니가 숙대 나온 할머니야.”

숙대나온 할머니, 우리 엄마가 올해 일흔 한 살인데, 저 정도 걸음걸이면 여든 다섯은 넘었을라나.
30년대에 태어나 식민지를 거치며 숙명여전을 다녔던 이력이 순대국집에도 알려진,
노인의 학력은 순대국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다른 생명의 창자를 씹으며 내내 생각해도 알 도리가 없었다.

2018. 2. 23.

관변단체의 외로움

2019년 글입니다.

금요일에는 모 지역의 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준비모임에 안양사례를 발표하러 갔었다. 안양은 학교민주시민교육의 대표사례가 되었고 나는 학교민주시민교육과 지역네트워크 조성의 대표 발언자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두 착시현상이다.

민주시민교육은 이미 수십 년전부터 다들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말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해왔는데 그게 제도권 밖에 있어서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나 회원들은 예전엔 “운동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주를 이뤘고 학습이 습관인 사람들이라 내내 공부하고 일반 시민대상으로 강좌와 활동들을 펼쳐왔다. 그걸 모아서 어떤 틀에 끼워맞추게 된 게 최근 일이고, 이 지역에서의 시작은 사실 안양과천교육지원청에 발령나온 장학사의 제안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이런 발표를 하러 다니는 게 여간 머쓱한 일이 아니지만 태생이 뻔뻔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잘난 체를 하러 다닌다. 내가 외부에 나가서 앞에 서면 나는 나 개인이 아니라 “안양지역의 학교 민주시민교육”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훗날 내 이름을 기억하겠는가. 물론 이름이 쉬우니 기억 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나 개인보다 안양에서 민주시민교육 한다는 사람, 으로 내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인지라, 개인의 쑥스러움은 제쳐두고 그냥 잘난 체를 한다.

강연을 끝내고 나면 현장감이 있어 좋고, 현장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이며, 재미있다, 라는 평가를 받는다. 개그감이 있고 중간중간 성대모사를 끼워넣어 연기하며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어서 재미있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고 현장감이 있다는 얘기는 내가 현장만 말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이야기는 알고 있어도 하지 않는다. 그럴 깜냥도 안된다. 그건 연구자들의 몫이다. 대부분 이런 강연은 대학 교수들이 꽤 다닌다. 이 분야에서 기고 요청이 들어오면 한 책에 실리는 필자들은 대학교수나 연구자, 이 분야를 오래 연구한 교육자들이지 나같은 현장 활동가는 매우 드물다. 가방 끈도 내가 제일 짧다. 현장전문가가 이 바닥에 몇 명 더 있는데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경력이 오래되었고 더 넓은 지역을 기반으로 홛동한다. 하지만 나는 안양지역에 국한해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지역에서의 민주시민교육과 그 네트워크 조성과 학교 민주시민교육을 교육지원청과 학교와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가”에 대해서는 적합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온 일보다, 과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나는 바닥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뭘 만들어서 하나씩 탑을 쌓아가는 유형이 못된다. 그 이유는, 요청을 해오는 일만 처리해도 1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대부분 어떤 욕구를 가지고 나를 찾는다. “뭘 하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엇부터 시작하면 될지 감이 안 온다.”는 생각이 있으면 내가 이걸 구체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나의 계절은 대부분 그런 것들을 구체화시키면서 흘러간다.

강연은 같은 PPT를 가지고 여기 저기 다닌다. 심화과정이 필요하거나 구체적인 요청을 해오는 경우를 제외하고 “학교 민주시민교육 어떻게 해왔는가” 라는 주제면 비슷한 내용을 기반으로 하되 업데이트만 한다. 충청도와 강원도, 경기도 몇 개 지역에서 같은 내용으로 사례 발표를 해왔다.

금요일에 다녀왔던 곳은 질의응답 시간을 따로 빼두어 좋았다. 질문이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분들은 어딜가나 있다. 이 분들은 손도 가장 먼저 들고 마무리도 자기가 하고 싶어한다. 이런 분들은 1년 정도 시간을 두고 끊임없이 말할 수 있게 둬야하는데 그게 사실 참 어렵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걸 정확하게 인지하게 되면 그때는 이런 습관이 조금 완화되는데 그러기 전에 이미 기력을 놓아버리는 경우도 본다.

이번에는 강연 초반부터 내 이야기에 꼬투리를 잡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이는 분이 있었다. 어떤 것이 민주시민교육이다, 라고 정의내릴 수 없고 우리는 배워본 바 없어 가르칠 수 없다는 게 내가 말하는 내용의 요점인데 이 분은 강연 내내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으로 보였다. 끝날 때쯤 이 분은 자기가 새마을부녀회 회원이라며 내가 “시민단체에 새마을 부녀회는 들어가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 매우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내가 시민단체라 명명하는 것은 NGO와 NPO를 중심으로 말하는데 새마을부녀회나 민주평통, 자유총연맹 같은 단체는 시민들이 모인 단체이지만 국가로부터 고정적인 기금을 지원받도록 법제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이 다르다고 분리해서 호명하는 것일뿐 “시민단체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그분은 “우리도 회비를 낸다”고 항변했다. 그 사람의 기준은 자발적 참여가 회비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그 분에게 “국가에서 받는 지원금과 회비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정확히 알아보셔야 한다”고 말할 기회를 놓쳤다. 대신 “새마을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단체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주 활동이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낮아 회원을 많이 모을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 큰 힘을 지니셨다.”고 조금 추켜세웠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운동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는 아까 다른 분이 말씀하셨듯이 자기들만의 용어와 철학이 있어 장벽이 높은 단점이 있고 오히려 협력이 잘 안되는 것은 진보쪽이 더 많다”고 살짝 디스도 했다. 이때쯤에 그 분의 언성이 좀 낮아지며 살짝 미소도 지었다. 그분도 나름 감정처리를 하느라 매우 애쓰고 있는 듯 했다.

이런 강연을 여러 차례 다니며 본 강연 시작전에 항상 “이것은 안양의 특수한 상황이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여기 서 있는 이 사람의 머리와 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 받아들이셔도 안되고 다 옳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점을 강조해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강연자를 가르치려고 들거나, 그 자리에서 자기 주장을 펼치려는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의 외로움을 나를 부른 이 공동체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외로움은 공동체의 적이다. 외로운 사람을 보듬는 것이 공동체가 할 일이겠지만, 그 외로움에 같이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 사람들인지라,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가끔은 외롭고, 가끔은 외롭지 않다. 외로움을 줄이는 방법으로는 회의가 있다.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다. 외롭지 말자. 무슨 일이 있어도, 타인의 삶의 무게를 나눠 짊어지는 게 부담스럽더라도, 적당히 눙치고 뭉개기도 하면서 외롭지 말아야겠다. 회의하자.

2019. 2. 24.

[퍼스트 펭귄] 11. 우리는 일터의 꽃이 아니다!

2018.11.14

https://together.kakao.com/magazines/987

예쁜 알바 뽑습니다 

‘예쁜 알바 뽑습니다’

‘외모에 자신 있는 분 우대’

‘결혼 예정 시기 표기 필수’

‘신장 165cm 이상’

보는 순간 매우 기분이 상하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지 않은 문구들입니다. 고용에 있어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인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이런 차별적 채용 공고 문구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고용 과정에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단편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관 아르바이트 직원들의 시위 (출처 : 알바노조)

직장 내 성희롱, 임금 차별뿐 아니라 임신을 하면 다른 직원들에게 피해가 간다며 순서대로 임신하라는 지령까지. 일하는 현장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Metoo 물결이 파도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48년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 이미 남녀평등과 남녀의 동등한 근로권을 보장하였고 1953년 근로기준법에 여성근로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산업은 남성 중심으로 움직였고 여성은 남성의 보조역할에 그쳤습니다. 고용평등의 조치는 40여 년간 별 효과 없는 ‘말로만 법률’이었던 것이죠. 

일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일하는 여성들의 문제는 여성들 스스로가 해결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차별을 일삼으며 불평등한 회사 운영을 하는 회사측에 항의하고 여성은 산업의 보조인력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맞서 싸워왔습니다. 이 문제를 스스로 소리 높여 외치고 사회에 알렸던 퍼스트 펭귄들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성평등에 대한 인식과 제도가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긴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직장 내 성평등을 위한 긴 싸움]

나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70년대 이 나라의 여성들은 산업현장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1970년 근로기준법을 외쳤던 전태일 열사도 여공들의 처참한 삶에 주목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노동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여성들의 노동운동도 힘차게 일어섰습니다. 『열세 살 여공의 삶』이라는 책에는 공안당국자가 “한글도 모르는 여공 따위”라는 모멸을 서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전에 여성노동자들은 ‘몇 번 시다, 몇 번 미싱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들은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며 이름을 되찾았다고 기억합니다.

1970년대 여공들의 근무모습 (출처 : 구로구청)

1980년대 들어서 여성주의 의식이 확산되고 여성근로자들의 노조운동도 더욱 활발해지면서 고용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 모성보호를 명시한 고용평등법의 제정이 대두되었습니다.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노동자 전체의 권익보호를 위해 여성연합을 비롯한 여성단체는 끊임없이 남녀고용의 평등을 주장해왔습니다. 그 결과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어 모집, 채용, 교육, 배치, 승진, 정년, 퇴직 및 해고에서 성차별을 금지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남녀고용평등법의 등장 

‘대한민국 헌법’의 평등 이념에 따라

고용에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하고 

모성 보호와 여성 고용을 촉진하여

남녀고용평등을 실현함과 아울러

근로자의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1조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었어도 성차별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이 애매하고 법 실행의 강제규정도 없었습니다. 남녀고용평등법을 추진해 온 퍼스트 펭귄들은 법 제정에 안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미흡한 법의 개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캠페인에 대한 한겨레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평등한 노동, 건강한 모성”, “평생 평등 노동권 확보”라는 슬로건으로 여성단체들은 1990년대 새로운 운동을 펼쳐나갔습니다. 결혼과 임신으로 인한 고용 중단, 아이를 돌봐야 해서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사회적 조건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산전 후 휴가제도 도입과 남편도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법제화할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남녀고용평등을 외친 퍼스트 펭귄들은 여성이 육아를 전담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정마다 육아분담을 해야한다고 개인에게 강조하기 보다 육아분담을 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남녀 모두가 가정생활을 잘 꾸려나갈 수 있는 노동환경이 갖춰질 수 있도록 제도와 정책을 잘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일, 가정이 모두 지켜질 수 있도록

‘남녀고용평등법’은 ‘남녀고용평등과 일 · 가정의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로 그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름은 법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도 지킬 수 있는 노동조건이 필요하다는 시대적인 요구가 반영되었습니다. 일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평등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죠.

여성이 사회에 처음 진출하는 시점엔 차별이 적더라도, 결혼 후 가사노동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는 사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습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남녀가 모두 함께 일하고 가정을 책임질 수 있도록 정책적인 제안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미처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노동현장의 현실을 반영해 취업부모들의 일과 가정생활이 양립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구체화 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해왔습니다.

여성 노동에 대한 단체들의 목소리 (출처 : 한국여성단체연합회)

일하는 여성들의 고충으로는 성차별뿐 아니라 직장 내 성희롱 등의 문제도 만만치 않았는데요. 1993년 서울대 신교수가 조교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일삼은 일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습니다. 여성단체들은 현장 활동을 토대로 수많은 사례를 듣고 수집하였습니다. 법 개정과 제정을 위해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안했고요. 여성단체들은 정부가 여성노동의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고 요구해왔습니다. 2018년 들어 여성 응시자를 의도적으로 탈락시킨 경영자는 징역형을 받기도 하고, 개정된 성범죄 특례법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을 엄단하는 조항이 신설되었습니다.

남녀모두 평등한 노동권을 보장받는 것은 헌법에 적혀 있는 평등권을 지키는 일이며 인권보장의 기본입니다. 노동은 단순한 경제활동을 넘어서 자기 성취와 사회적 효능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유용한 수단입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보는 사회가 이루어져야 성별과 능력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이 줄어듭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시작한 노동운동,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퍼스트펭귄들은 성별로 편을 갈라 싸워온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노동의 권리와 기회를 빼앗아가려는 눈에 보이는 않는 불평등과 싸워온 것입니다. 퍼스트펭귄들이 꿈꿔온 오랜 바람이 이제야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기획 : 서울시NPO지원센터, 현장연구자모임 들파

| 스토리 : 유일영 (더 이음 사무국장)

| 글 : 이하나 (hana@allmytown.org)

| 삽화 : 이한비 / 인포그래픽 : 문화공동체 히응


👉🏻 국립여성사박물관 : http://eherstory.mogef.go.kr/

👉🏻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 http://www.yeono.org/ 

👉🏻 한국여성노동자회 : http://kwwnet.org/

코로나 혐오

이 상황에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개학 후 각 교실에서 펼쳐질 혐오였다.
중국교포나 이민자들의 아이들은 각지에 흩어져있다. 지역과 학교마다 다르듯이 아이들의 경제상황과 가정형편에 따라 차별도 세밀하게 나눠져있다.

부모 중 누가 중국인이라도, 한국어를 곧잘해서 아이들이 유아교육부터 한국어를 잘 가르쳤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는 경우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중국친구,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더러 학부모회도 잘 참석하고 책도 읽어줄 수 있는 중국인 부모도 있다.

하지만, 경제형편이 어렵거나 한국어가 어려운 경우는 뻔한 혐오와 차별이 기본세팅되어 있다. 문제는 교사들이라고 모두 혐오와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교사들이 모두 인권의식이 뛰어나고 젠더감성이 높은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이 나라의 보통시민이다. 이 사회 전반의 타자에 대한 시선이 고스란히 적용되는 수준이고 외부로 나타나는 본인의 공적인 행동을 구분할 줄 알아서 실수가 적은 것뿐이지,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는 것이다.

혐오와 차별에 대해 교육자가 강경하게 응대하지 못하고 본인의 속내를 들키는 순간 교실은 아수라장이 된다.
“왕따 당하는 애들은 이유가 있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교사라는 직군이 엘리트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계다.

자신이 학교 다닐 때 말 한 번 안 섞어봤을 법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면 그 자신도 괴로울 것이다. 도무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이끌어낼 지는 경험한 자도 잘 모를 일이고 경험했다고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때로는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학교 현장에서는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까. 그것도 궁금하다.

 

2020. 2. 22.

민주시민, 문화다양성으로 다시 보기 – 이룸

안양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의 민주시민교육 전문강사팀의 2020년 새로운 행보를 시작합니다. 안양문화예술재단과 청소년수련관이 MOU 맺고 시작하는 안양 문화다양성 민주시민교육에 합류합니다.

안양문화예술재단의 문화다양성 사업에 적극 동참해 지역 내 문화다양성교육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향후 지역 내 문화다양성 교육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차별과 혐오가 모두 드러나는 시기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다양성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20. 2. 21.

코로나19로 인해 일정은 조정할 예정입니다.

[쓰다]민주시민입니까?

2019년 2월 20일, 페이스북에 게시한 글입니다.

이하나

엊그제는 지역의 교사들이 모여 민주시민교육연구회라는 걸 만들었다고 연락이 와서 참석했다. 지역교육네트워크가 뭘 하고 어떤 걸 해왔는지 설명하고, 네트워크 내의 각 단체와 연대회의의 시민단체들도 소개했다. 시민교육을 하고 있는 안양지역의 시민사회단체의 각 특성을 얘기하고 교안개발의 중점이 무엇이었는지 말하면서 질문 있냐고 물으니,

교사들은,
“너무 다른 세상 이야기라, 무슨 질문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시민단체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르고, 자기들은 저항을 해 본 적도 없어서, 아이들에게 중요한 교육이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건 알겠지만, 마을교육공동체를 교육청에서 떠들어댄 지 몇 년이지만, 그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얘기했다.

나는 교사들에게 생협에서 장을 보지 않느냐고 물었다.
여섯 명정도 모인 자리였는데 절반이 그렇다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금이 총회 시즌인데, 총회 안 가시죠?”
다들 웃었다.
“그런 모임이 있다고 연락은 오는데 오전에 있어요…”
“총회는 오전에 잘 안 합니다. 그런데 모임이 오전에 있어서 그게 불만이면 사무국에 전화해서 저녁모임도 해달라고 요청하셔야 합니다.”
“아…”하는 탄식이 흘렀다.

하라는 대로, 그렇다는 대로, 원래 그렇다 하니,
그대로 따라서 살아온 사람들.

시민사회단체는 백명이면 백명의 의견이 있어 통일이나 완전 합의, 만장일치가 잘 안되는 성향이 있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건 각자 자기 불만을 먼저 털어놓고 민원제기를 하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모임에 나온 교사들은, 학교를 벗어난 사회에서 저항의 경험이 너무 적어서, 문제점을 발견해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던 건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장학사에게 카카오같이가치에 연재했던 퍼스트펭귄 링크를 보내줬고 이 내용을 공유하면 시민사회단체가 무엇을 하는지 대충 감이 올거고 이런 일을 했거나 하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시민교육을 지난 십수년간, 아니 수십년간 해왔다고 얘기해주면 될 거라고 얘기하며 헤어졌다.

이미 상당히 진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교사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교양있는 시민들이 사는 배려 넘치는 사회쯤으로 인식하는 게 사실이다. 특히 교육공무원의 경우, 정치적 중립을 “강요”받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정치성이 드러나는가 늘 자기 검열을 거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몇 해전에는 어느 토론회에서 “자기 자신이 민주시민인가 알아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떤 평가를 받고 싶다는 것인데, 시민은 덕망과 교양을 갖춘 존재로만 인지하고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아 자격을 갖추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착한 어린이는 울지 않아요. 착한 어린이는 싸우지 않아요. 라는 노랫말처럼 자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저항하고 기득권에게 돌을 던지고 욕을 하면 곧바로 “착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착한사람은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프로파간다.

“말 들어야지” .. 말을 왜 들어. 왜, 들을만 해야 듣지.
말을 안 들으면 니 말이 개똥이라 못 들어주겠다는거지, 듣는 사람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더 많은데. 그런 교육을 잘 이수해야 4대보험을 직장에서 내주는 주류로 편입할 수 있으니. 그렇게 사는 게 어쩌면 “옳은 것”일 수도 있다.

.. 시민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좀 말이 안되는 면이 있는데, 몇 년을 해와도 아직도 20년 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 무슨 자치를 논하나. 착한 사람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유효하다.

경기중부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SNS채널안내

2018년부터 2019년까지 경기중부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구성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여

2020년 본격적으로 경기중부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를 시작합니다.

우선 소통을 위한 SNS채널부터 열었습니다.

경기중부 (안양, 과천, 의왕, 군포) 지역의 민주시민교육 관계자, 관심 있는 시민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fb_icon_325x325경기중부민주시민교육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inzuedu/

전국 민주시민교육에 관한 뉴스와 지역시민사회단체소식을 업데이트합니다.

unnamed경기중부민주시민교육카카오채널

http://pf.kakao.com/_bkDHC 

경기중부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의 공식행사와 홍보가 필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현재는 안양군포의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시민교육위원회에서 비용을 부담합니다.

kakaolink_btn_medium_ov경기중부민주시민교육 오픈채팅

https://open.kakao.com/o/gQPcT6Xb

경기중부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의 자율적 정보공유를 위한 오픈채팅방입니다.

 

 

아래 이미지는 주변 단체와 시민들에게 안내하실 수 있도록 QR코드를 넣었으니 자유롭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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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0.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20 정기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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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정기총회 안내

안녕하세요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입니다.

2020년 정기총회를 안내합니다.
함께해 주셔서 소중한 의견 부탁드립니다.

참석이 어려운 회원께서는 2월 19일까지 위임을 해주시면 됩니다.
– 보내드린 위임장을 작성하여 보내주시거나, 또는 문자 위임(위임합니다)하여
문자나 카톡으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 일시 : 2020. 02. 21(금), 늦은 7시
* 장소 : 군포시청 별관 회의실(군포시 군포시청 백리길 6)
* 안건 : 19년도 사업 및 결산보고/ 임원선임/ 20년도 사업계획 및 예산승인

☞ 회원 자격은 2019년 본인이 약정한 회비의 50%이상 납부한 회원으로 합니다.
개별적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회비납부계좌 : 국민은행 003101-04-127730 안양군포의왕민주화기념사업회

☞ 아직 회원가입을 못하신분은 CMS나 자동이체로 신청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CMS 자동이체 별도 양식 요청하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등으로 건강을 헤칠까 염려됩니다.
총회 장소에 손소독제와 마스크는 준비하겠으나,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 분은 참석을
권장하지 않겠습니다.

늘 건강한 생활 되시기를 바랍니다.

안양군포의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범죄와 민폐

아침을 못 먹고 길을 나섰다.

요즘은 끼니를 거르면 속이 쓰려서 약속장소에 15분 먼저 도착하자마자 먹을 걸 사 먹을만한 곳을 찾았다. 커피집이 문을 열긴 했는데 샌드위치 같은 건 하나도 없어서 다시 나왔다. 근처에 편의점이 있었다.

편의점에 들어가자 물품을 가져온 사람이 냉장고 앞에서 진열을 돕고 있었다. 카운터에는 점주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는데 내가 냉장고 앞에 서서 주저하자 친절한 말씨로 손님 쇼핑 좀 하시게 잠깐만 비켜달라고 그에게 청했다. 샌드위치가 세 종류 있었다. 잠깐 고민하다 햄에그샌드위치와 따뜻한 캔커피를 샀다. 차에 가서 먹을까 하다가 서서 먹는 스탠드에서 얼른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이미 한 청년이 뭔가 뚜껑을 열고 있었다. 청년이 먹는 건 비빔밥이었다. 각종 채소가 들은 용기가 밥 위에 얹어져 있었다. 아침 9시 45분에 편의점에 서서 비빔밥을 먹는 청년은 하루가 끝난건지 시작하는건지 알 수 없었다. 창밖에 초등학생쯤 된 통통한 사내아이가 창문에 붙은 포스터를 한참 보다가 갔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선거 입후보자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커피로 입을 가시며 서둘러 약속장소로 갔다. 약속시간보다 7분 정도 늦은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알아봤다. 그는 늦어져 미안하다며 오래 기다렸냐고 물었다. 그는 얇은 선거운동 점퍼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가방이 두 개쯤 들러져 있었다. 나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고 말하며, 시간이 촉박한 줄 알았다면 약속을 조금 여유있게 잡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사무실로 들어선 그가 성급히 테이블위에 널부러진 것들을 치웠다.

“제가 요즘 아침에 선거운동하느라고요. 근데 애들이 어려서요. 아침인사 끝내고 집에 가서 애들 밥을 차려주고 나와야 해서요. 아휴.”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같은 커피 드리퍼까지 가져와서 커피를 내려주겠다고 했다. 제대로 된 드립주전자가 없다는 걸 부끄러워했고 동료가 새로 가져온 원두인데 맛있다고 했다며 그럴싸하게 대접하지 못해 부끄럽다는 표현을 했다.

그는 컵을 뜨거운 물로 덥혀보려고 했지만 사무실 안에 개수대가 없어서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가 내려준 머그잔은 절반은 차갑고 절반은 따뜻했다. 커피는 대단히 맛있지 않았으나 그래도 최고의 맛이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반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국회의원 입후보를 할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이 있었고, 신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10% 득표율을 넘지 못해 공탁금을 홀라당 날릴지도 모른다. 그의 얇은 잠바를 보고 있자니 다른 후보들이 입는 두꺼운 점퍼도 생각났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데 그가 서둘러 책을 두 권 챙겨주었다. 후원자가 수 십권을 사서 보내줬다는 “거래된 정의”와, 어린이 재활병원 설립운동에 관한 책자였다. 사무실 밖 공간에는 몇 몇 사람들이 모여 스터디를 시작했다. 나는 손님이 있으니 멀리 나오지 마시라 했으나 그는 굳이 문 밖까지 나와 나를 배웅했다.

진보정당의 국회의원 후보자도 아침밥을 차려야 하는 나라에서, 61세의 여성이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을 모르고 전국으로 돌아다녔다는 뉴스가 하루종일 떠돌았다. 60년을 산 여자가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야했던 이유와 교통사고로 입원중에도 자기 종교의 예배에 참석했던 이유가 뭔지 나는 잘 모른다. 밤늦게 틀었던 한 보도영상에는 재벌가의 아들에게 프로포폴을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여의사와 간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법적으로 그의 집에 가서 프로포폴 주사를 놓았던 간호조무사는 “엄마는 쓰러지시고, 아빠는 수술해야 하고, 돈이 필요해서 그랬다.”라고 했으며, 그 간호조무사의 상사인 병원 원장은 “우리집도 상황 안 좋아. 감옥가서 좀 쉬다 오지 뭐. 의사하기도 지겹다.”고 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은 “내가 너를 믿고 의지한 결과가 이거니?”라고 간호조무사에게 물었다.

“돈이 필요해서 그랬어요.”

무엇이 범죄이고, 무엇이 민폐인가.

아침 9시 45분의 편의점 비빔밥은 또 뭐란 말인가.

 

2020. 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