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포지엄]”지역민주시민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2019-심포지엄_711본격심포지엄

경기중부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구성을 위한 본격심포지엄
“지역민주시민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7월 11일 목요일 오후 6:40-9:30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시민이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무엇이고 민주시민교육은 어디까지 포함하는가에 대한 토론이 여전합니다. 안양군포의왕 민주화운동사업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시민은 무엇이며 어떤 방향으로 민주시민교육을 실천해야 하는지 본격 심포지엄을 통해 집중적으로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고민을 나누려 합니다.  과천, 군포, 안양, 의왕의 각 단체와 활동가, 민주시민교육 당사자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경기중부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의 중심을 잡아보고자 합니다.

활동가 여러분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사전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위 입력창이 안 보인다면 아래 링크로 접수해주세요.
참가신청링크 ▶️https://forms.gle/gSSjTvRMBX21eMnG8

[생애사쓰기] 목화솜 다래

– 나는, 아버지 어머니 잘 몰라요.
어려서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해서, 그냥 사방 팔방으로 떠돌아 다니느라. 그래도 잠깐 우리 집에서 살 때가 있긴 했지. 나는 그나마 우리 큰 이모하고 좀 친했고. 식구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도 없고, 그래서 사촌집으로 갔는데 우리 사촌 오빠가 그렇게 나를 때렸어요. 뭐 달라고 해서 안 해준다면 때리고 그렇게 걸핏하면 나를 때렸어요. 오빠한테 맞으면 이웃집 언니한테 갔는데 그 언니가 나한테 참 잘 해줬어요. 언니네 집에 뒷방이 하나 있어요. 거기 숨어 있으라고 하지. 그러면 언니가 고구마 같은 거 삶아 주고 그랬어요. 그러다 그 언니 엄마한테 걸려서 욕 먹고 그랬죠. 왜 자꾸 쟤 받아주냐고. 언제까지 그럴거냐고.
그래서 열 한살에 제주도를 나왔어요. 나와서 내내 남의 집 살이하고.

– 전쟁이 전쟁이.. 우리 엄마가 막내를 전쟁통에 낳았어요. 내가 그 때 여덟 살이었고. 우리 엄마는 산후조리고 뭐고 없었어요. 그냥 한달만에 일을 나간 거예요. 그러니 애기를 어떻게 해. 내가 봐야지. 내가 애를 업고 다니느라, 나도 앤데, 여덟 살짜리가 애를 업고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 손가락 가운데 마디가 퍼렇게 멍이 들어. 깍지를 하도 껴서. 포대기고 뭐고 애기띠도 없죠. 내가 그때는 엄마 원망을 많이 했는데, 나도 이제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 나이가 됐단 말이죠. 이제 나도 곧 엄마를 만나러 가겠지. 그러면 내가 가서 엄마하고 또 잘 살아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 나는 우리 집이 그렇게 못 살지도 않았어요. 가끔 쌀밥도 먹었단 말이죠. 그런데 왜 나를 학교를 안 보내줬을까.
위로 우리 오빠가 하나 있고 언니가 둘이고 내가 막내딸인데, 우리 아버지가 난봉꾼이라 내가 두 살때부터도 집에 없었어요. 계속 딴살림을 했어요. 언니는 둘 다 여우고 오빠가 이제 장가를 가서 집에 들어왔어요. 올케언니랑 오빠랑 나랑 우리 엄마랑 사는데, 오빠네 조카가 여덟이예요. 애기들을 볼 사람이 없다고 나보고 애를 보라고 했어요. 내가 조카들을 키우느라 학교를 못 간 거예요. 나도 학교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우리 오빠가 했던 말이 너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학교 가고 싶으면 니 아버지한테 가서 얘기하라고. 그 말이 나는 너무 슬펐어. 왜 나한테 그랬는지.

– 우리 언니는 수단이 좋았어. 어려서부터 자꾸 어디서 그렇게 쌀을 퍼와. 그럼 그거 가지고 엿 바꿔먹으러 가지. 쌀뿐이 아니야.아무튼 뭘 그렇게 어디서 가지고 왔어.
나중에도 잘 사셨겠어요.
어 잘 살았어요. 그 딸들도 잘 살고요.
지금도 계세요?
우리 언니 치매걸렸지.

자꾸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들 한다. 글이 맥락이 안 맞는다고 답답해했다. 모두들 쓰다가 학교 못 간 억울한 이야기로 빠져나간다. 복숭아 서리, 수박 서리, 먹고 살만한 제일 부잣집 밭에서 한 두개쯤 가져와도 괜찮던 시절이라는 건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얹어주는 공유의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목화솜이 되기 전에 먹으면 아주 맛나다고 했다. 내가 아카시아 진달래 사루비아는 먹어봤다 했더니 그런 거보다 훨씬 맛나다고 했다.

수업을 하면서 나는 눈가가 자꾸 뿌얘졌다.
목울대까지 차오른 학교 못다닌 서러움을 언제 풀어야 할까.
가계도를 그리고 생물학적 가족사를 풀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남의 집 살이”를 했다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되었고 “애보개” 하느라 자기 집에서도 살림살이를 했던 사람도 서넛이었다.

“글만 쓰면 눈물이 나.”
어쩌면 그건 글의 내용이나 지나온 세월에 묻힌 많은 이야기와 동시에, 한 글자 두 글자 꾹꾹 눌러 적으며 “내 이야기”를 써보는 것에 대한 애닮픔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19. 6. 10.

황해문화 기고에 관한 소회

인쇄된 글자를 다시 읽어봤다. 고쳤어야 하는 글자가 몇 개 보였다. 부끄럽지만, 인쇄는 그런 것이라, 그것도 역량이다.

황해문화를 구독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사를 하면서 책장을 몇 번 뒤집어서 황해문화의 구간을 한쪽에 모아놓지 못했다. 어떤 때는 다 읽지 못하고 한 계절을 넘기기도 했다. 황해문화는 사실 나에게 한 사람의 이야기였고, 구독을 하면서 두 세 사람의 이야기가 되었다가 불과 몇 년전부터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건 나의 이해력이 성장했다는 이야기였을거다. 나에게 인천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물으면 배다리, 차이나타운, 그리고 황해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황해문화는, 중앙중심 한국문화에서 외면받았으나 꿋꿋했다. 인천에서 이런 잡지가 나오냐는 반응도 있었고, 내가 정기구독을 하는 걸 얘기하면 신기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최근들어 황해문화가 그동안의 공력을 인정받아 무척 기뻤다.

내가 감히 흠모하는 매체에 글을 보내도 되나 생각했을 때, “그건 자기가 판단하는 게 아니다”라고 해준 분이 있었다.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영원히 독자로 남을 줄 알았던 매체에 필자가 된다는 건 상상해 본 적 없다. 글쎄 잘 모르겠다. 어쩌면 꿈을 꿔본 거 같기도 하다.

수년 전에 라디오에서 <작은책>의 발행인 안건모 씨의 인터뷰를 들었다. 작은책이라는 잡지에 대해 듣고 나도 저런 곳에 글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10년 정도 지났을까. 결국 꿈꾸던 게 이루어졌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1년간 연재를 하게 되었다.

황해문화에 실은 글은 “르뽀”로 분류되었다. 이런 글이 르뽀인 줄 잘 모르겠다. 다시 보니 부족한 거 같고, 전체 맥락이 어울리는 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지금은 판단이 잘 안 선다. 원래는 지난 봄호에 실릴 예정이었는데 지면사정으로 여름호가 되었다. 여름호의 주제를 알았으면 싹 다 갈아엎어 다시 써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이런 일은 편집부에게 모든 것을 맡기니 다른 의견을 내지 않겠다.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쁘고, 지면을 허락해주셔서 고마울 뿐이다.
잘 살아야겠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매우 흔하고, 별 거 아닌 일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인생의 지점이 된다.

황해문화 이후에도, 내가 선망하던 매체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도 원고를 보내게 되었다. 그건 책이 나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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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에 실린 글은 “신도시 생활자의 아파트라이프”이다.
지난 2007년부터 2019년 4월까지, 나는 아파트에 12년 연속으로 살았다.
이 원고에 언급되거나 글의 배경이 된 아파트의 원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도순)

서울시 관악구 난향동 (구, 난곡,신림7동) 휴먼시아 
서울시 관악구 난향동 국제산장아파트
안양시 동안구 비산 성원상떼빌 (건설사 부도로 건축중단되어 현 안양비산화성파크드림)
안양시 동안구 임곡마을
안양시 동안구 래미안안양메가트리아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평촌e편한세상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푸른인덕원대우아파트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삼성래미안아파트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한일나래아파트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의왕포일동아에코빌아파트
의왕시 내손동 의왕내손e편한세상
의왕시 내손동 두산호수위브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은하수한양 샛별 신성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관악 성원 부영
안양시 동안구 부림동 한가람두산 신라 세경
안양시 동안구 부림동 공작부영 성일
안양시 동안구 범계동 목련단지
안양시 동안구 갈산동 샘마을 대우 쌍용 우방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무궁화태영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평촌더샵아이파크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신평촌일성트루엘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호계럭키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호계푸르지오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평촌어바인퍼스트 (공사중)

 

2019. 6. 5.

[생애사쓰기]성수종합사회복지관 수업을 시작하며

내일부터 성수종합사회복지관에서 초등문해교육을 마친 어르신들과 생애사쓰기 수업을 시작한다.
초등문해교육을 마친 분들과의 수업은 처음이라, PPT를 손 보다가 접었다. 대신 다음과 같은 프린트물을 만들었다.
<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복지관에서 붙인 프로그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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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보내는 편지>> 수업에 함께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글쓰는 사람 이하나라고 합니다.
앞으로 열 번, 여러분과 만나게 됩니다.

저는 2013년부터 어르신들 뿐 아니라, 중년층, 장애인가족들과 함께 생애사쓰기 수업을 해왔습니다. 생애사라는 것은 나의 삶을 돌아보는 역사를 뜻합니다. 이 수업을 할 때마다 많은 분들이 울고 웃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 순간도 어렵지 않은 날들이 없었고 쉽게 지나간 시절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이룬 게 없다.”
“내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다.”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모두 허무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한 성공한 삶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가난은 왜 부끄러웠을까?
우리는 역사에서 늘 비껴나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열심히, 정직하게 살았다고 믿습니다.
특히 자기 삶을 쓰겠다고 모이시는 분들은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꽃을 키우듯 일궈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이제 열 번의 수업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우리 삶의 아름다운 고갱이들을 캐내 보겠습니다. 생애사쓰기 수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19.6.3.

[생애사쓰기]가난이 부끄러워서

“노조활동 한 적 없어요. 어용이었어요.”

수요일 생애사쓰기에 참여한 60대 여성의 말이다. 써온 목차에 “노조활동”이라 써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물었을 때였다.

“무슨 노조를 했겠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일자리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나는 바닷가에서 자랐어요. 재첩 따고 다시마 걷으면서 살았어요. 그게 너무 고되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공장이 얼마나 좋았는데요. 앉아서 손가락만 까딱까딱하면 돈이 나오는데요. 왜 노조를 합니까. 짤리면 방법이 없어요. 돈 벌 데가 없는데요. 거기 사무실 가면 회의한다고 빵도 주고 음료수도 줘요. 그냥 앉아있다가 오는 거예요. 쉬고 좋잖아요? 그렇게 지냈어요. 어용노조하면서. “

이 사람의 글은 서늘하다.
세상을 뒤에서 바라보는 습관이 묻어났다. 한 발 뒤에서, 언제나 객관화해야 한다는 삶의 강박이 있었다. 그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흔적이다.

… 선생님, 이렇게, 누구 편을 들어서 같이 화내주고, 불합리하지만 내 사람이라 편들고, 뭐 그런 거 잘 못하시죠?

이 수업의 수강생들은 자꾸 나보고 점쟁이같다고 한다. “어머 다 들켰네.”라는 게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내 질문을 받은, 재첩 따는 게 힘들었다는 그 분은
“맞아요. 저는 끊임없이 저 자신을 담금질하며 살았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아들에게 크게 혼이 났네요. 제가 편을 안 들어줬어요. 엄마는 왜 매번 그런 식이냐고. 아주 그냥.. 아주 크게 혼쭐이 났어요. 안 그러려고 노력해요. 잘 안되네요.”

네,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요. 저도 좀 그런 편이거든요.

나는 수업을 마무리하며 김은화 씨의 책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의 표지 뒷 면을 읽어내려갔다.

“이건 책을 만들 때 투자한 사람들에게 먼저 보내주는 건데요. 음.. 이런 내용입니다.
공장노동자부터 요양보호사까지, 40년간 가족을 먹여 살린 어머니의 삶을 딸이 인터뷰하다, 라고 써 있어요. 그런 내용이고요. 제가 좀 읽어볼게요.

‘엄마는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새벽 6시면 일어나 할아버지 밥상부터 오빠 도시락까지 하루 열 끼를 챙겼다. 아침 9시에 집 앞의 물류 회사로 출근, 저녁 6시에 돌아오면 밥 먹고 설거지하느라 바빴고, 새벽에는 근육통으로 끙끙 앓았다. 주말에는 빨래하고 장 보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런 엄마가 육십을 넘겨 말했다. 자기는 인생에서 이룬 게 없다고. 도대체 엄마의 노동은 무엇이었을까? ‘ “

재첩이 지겨웠던 그 분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모두들, 지금은 평촌에 집 한 채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글에서 “가난의 부끄러움”을 매번 느꼈다.

이날은 내가 질문을 했다.

“그런데요. 가난이, 왜 부끄럽죠?
우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몇 주째, 선생님들이 써 오신 글을 보면 공통된 게 있는데요, 가난이 부끄러웠다. 가난해서 부끄러웠다, 거든요. 근데,이 가난이, 누구를 속이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내가 도박이나 술에 빠져 가족들이 일궈놓은 것을 하루 아침에 날렸거나, 그래서 생긴 가난이 아니잖아요? 어린 데도 일을 했고, 모든 식구가 나가서 일했는데도 가난했던 거잖아요?
그러면, 음… 부끄럽기 보다 ‘화가 난다’면 모르겠는데, 대체 이게 왜 부끄럽죠? 우리는 왜, 언제부터,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했을까요? 왜죠?

저도 가난했을 때가 있었는데요.
저는 화가 났거든요. 선택에 제한을 받으니까.
부끄럽진 않았어요. 어쩌라고, 열심히 하는데. 하루종일 일을 하는데도 가난한걸.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가난한데 어쩌라고. 그런 마음이었거든요.”

부끄러울 수도 있지.
굳이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 부끄러움이 죄책감이 되거나,자기 삶을 비하하는 일이 되지 않길 바라서였다.

눈물을 싹 닫고 일어선 재첩 이야기의 그 분은 서*이 씨. 글 뭉치를 나에게 내밀며 원고를 좀 봐달라고 했다.

이 수업의 내 강사비는 두 시간에 7만원.
담당자에게는 첨삭지도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어쩌겠는가.
서*이 씨의 이야기는 안 읽어볼 수가 없는 걸.

*
수업 전후 준비와 지도에 10시간이 넘게 드는 이 수업은 평촌도서관에서 주관한다. 안양시 평생교육원 기준으로 강사비를 책정하며, 경력과 저서에 무관하게 시간당 30,000원으로 책정했다. 내가 초등학교 수업보다 강사비가 형편없다 했더니 담당자는 시간당 30,000원인데 그보다 높지 않냐며 매우 당당하게 말했다.

폭력적 골목의 풍경

나 보광동 살 때는 집안에 들어와 앉아 있던 놈도 있었어.
반지하 창문 열어놨는데 안방에 마당 수도 틀어서 물 뿌린 놈도 있고,
샤워하는데 목욕탕 창문 여는 놈도 있었어.
그 놈 잡겠다고 머릿수건 두르고 나가서 112 불러 골목에서 내가 아는 온갖 욕을 해제꼈어. 동네 아줌마들이 튀어나와 아가씨 입 한 번 걸죽하다며 박수 쳐줬어.
알잖아 내가 욕 좀 하는 거.

어떤 씨발 개좆같은 새낀지 걸리기만 해봐라 자지를 잘근 잘근 잘라서 젓갈을 담가 니 아가리에 쑤셔 넣어줄테다. 목구녕에서 피를 토할 때까지 발라줄라니까 당장 나와 이 씹새끼야. 좆만한 새끼 어디 비겁하게 좆도 아닌게 나한테 이 지랄을 해?
개좆만도 못한 새끼니까 샤워하는 거나 훔쳐보고 지랄이지 씨발놈아 모가지를 산 채로 따버릴라니까. 내장을 꺼내서 줄넘기를 해버릴라니까.
씨발 새끼 좆을 다 까서 포를 떠버릴라니까 당장 나와!!

경찰이 와서 나를 말렸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하래.
10분 정도 씨발 소리를 수백번은 했을거야.
하도 쉬지 않고 이 목소리로 욕을 해대니까 경찰이 찾아보겠다고 막 움직이더라.

내가 용감해서 소리 질렀을까?
작은 강아지가 큰 개보다 많이 짖어. 딱 그 수준인거지.
나는 무서우면 욕을 해. 눈물보다 욕이 먼저 나와.

경찰이랑 그 새끼가 튄 곳을 찾아 동네를 다 뒤졌어. 연립주택과 다세대 주택 사이에 여자 빤스만 한 무데기 쌓여있더라. 나는 그 동네가 그런 동네인지 알았지.

내가 그때 스물 넷이었어.

대흥동 살 때는 밤에 자고 있는데 방안에 들어와서 불 끄는 놈이 있었어. 불이 딱 꺼지니까 잠에서 깬거야. 동생이랑 나는 반사적으로 자다 일어나 그 새끼 목덜미를 잡았어. 도망가더라. 머리채는 모자를 썼으니 안 잡히고 사람을 잡는다는게 셔츠를 잡았는데 셔츠 단추가 다 튿어져서 도망갔어. 역시 경찰을 부르고 일주일 넘게 경찰이 와서 순찰을 돌았지.

보광동에서도, 대흥동에서도, 경찰이 뭐랬는지 알아?
여기는 워낙 아가씨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이런 일이 많다는거야. 그래서? 그러면 순찰을 더 도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서울시내에서 이렇게 골목 많은 데가 없대. 장난해? 강북에 온 동네가 그런 골목이야. 경찰이 일주일 열흘 와서 순찰 돌아주긴 했어. 나는 파출소 번호를 전화기에 입력해놓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나 지난 번에 그 여자인데 요즘 순찰 안 도시냐고 묻곤 했어.

용감했다고?
만약에 걔들이 칼을 들었으면?
잠든 내 동생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 새끼가 염산을 들었으면?

용기가 필요해?
그런 건 필요치 않아.
난도질 당하고 죽지도 못한 채 살아남을 수도 있는 문제야.

나이 먹을 만치 먹고 애 낳고 평촌에 와서 살 때야.
아파트 벤치에 앉아 있는데 펜스 건너편에서 어떤 남자가 뭘 물어. 몇 가지 대답을 해줬더니 그 새끼가 뭐랬는지 알아?
아줌마 나랑 연애 좀 할래요?
미친 호로새끼 내가 왜 니랑 연애를 해?
질문에 대답해주면 연애하냐?

세상에 그런 새끼가 다 있냐니.
수두룩 빽빽한 게 그런 새끼들이야.

어떤 심정이냐고?
내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어.
모조리 다. 사라지라고.

2019. 6. 1.

 

누군가에겐 낭만적으로 보일, 보광동의 골목 (2014년 9월)

맥락 없는 두 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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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구를 배우고 싶다는 아이에게 큣대를 바이올린 활이라 생각하라고 말했다. 왼손으로 지판을 잡고 오른손은 힘 있되 유연하게.
오랫만에 큣대를 잡아보니 정말 그랬다. 우연하게 비슷한 원리들이 있다. 어깨에 힘을 뺀다거나, 손목의 스냅을 이용한다거나, 손가락의 안 쓰던 근육을 쓴다거나.

물론 중딩은 바이올린 활을 어떻게 잡는지 모른다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생각해보니 바이올린 레슨 받은지가 꽤 되었다. 4년 되었나. 지금은 스즈키 7권까지 하다가 다음 단계는 너무 어렵고 지루해진다며 모짜르트와 하이든 콘체르토를 연습하고 있다. 어디가서도 절대 연주할 수 “없는”, 독보적인 소리를 자랑할 수 있다. 그동안 레슨은 대여섯 번 정도 빼먹은 듯 하다. 선생님이 꾸준히 와주시니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했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쌓인다.

친구가 다시 진료를 잘 받겠다 결심한 걸 칭찬했다. 갑자기 정신분석을 30개월 받은 게 떠올랐다. 그 긴 걸 어찌 했나. 빼먹은 건 두 세번 정도였다. 지금도 수요일 오전 10시는, 어딘가 가야 하는 낙인 같은 게 느껴진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지치고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중단하면 언제 죽어도 모를 거라 했던 것 같다.

어젯 밤엔 세수를 하다가 지역사회에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내가 30대였다는 걸 깨달았다.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사무국장입니다, 라고 처음 말한 건 2014년이었다. 2012년 관양시장을 처음으로 지금까지, 나는 어느 덧 마흔 다섯이 되었다.

아지를 처음 만난 건 2004년이고, 설이를 처음 만난 건 2010년이다. 시간은 알 수 없는 속도로 흘러가고 나는 쌓여가는 책을 바라보며 한숨 쉰다. 적당히 내 엉망인 일상을 외면하면서 천천히 먼저 간 자들의 길을 따라간다.

2.
수 년만에 돈의동 골목을 찾아갔다. 복지관의 간판이 바뀌었고 복지관 바로 앞에는 새로 기념패를 만드는 가게가 열렸는데 오늘이 개업식이었나보다. 각종 모터사이클 클럽에서 보낸 화환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의 화분과 멋진 오토바이를 구경하다가 골목을 돌아나왔다.

오늘 창신동에서 만난 할매들은 “여 와서 산지 얼마 안돼”라고 했다. 얼마나 되셨나 물었더니 얼마 안된다는 게 45년이라 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 45년은 얼마 안 되는 걸로 느껴질까.

무엇이 그리운지 잘 모르겠다.
가끔은 아무 것도 없었던 거 같기도 하다.

새로 산 두 권의 책이 바닥에 그대로 있다. 마을장터 행사의 가방을 아직도 풀지 않았다. 과거는 그대로 남는 것일까 미래와 만나 변하는 것일까.

마을과 골목에 대한 원고를 준비중이다. 내가 살아온 수많은 골목들을 떠올린다. 동자동의 엄지만화방 골목, 며느리가 목 매달아 죽었다는 마당 넓은 집의 보광동 골목, 다다다다 내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리던 성북동의 언덕배기 낙원 아파트 골목, 안개꽃을 들고 나를 기다리던 남자친구의 손을 잡아 본 사춘기의 신창동 골목, 삐딱구두를 신고 계단을 내려가던 이모를 놀렸던 삼양동 골목, 폭염에 일사병으로 쓰러진 동생이 구급차를 탄 대흥동 골목, 무지개빛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미군의 높은 목에 팔을 감던 의정부 골목, 엄마가 달리던 골목, 매를 피해 달아난 샘표간장 뒷동네 골목, 그 수많은 골목을 모두 뒤에 두고 와서, 그립다 쉽게 말하기도 어렵다.

살아있는 자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나.

2019년 6월 1일

성수동 1가

성수동1가.
복지관이 있는 건물은 여러 기관들이 모여있다.

재활의원, 아트홀, 종합사회복지관, 구립성수도서관. 1층에는 서가가 있어서 공공도서를 꺼내볼 수 있고 2층에도 큰 서가가 있어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다. 북까페도 있어서 커피 한 잔 마시며 모임도 하고 책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이 건물로 가는 길은 조금 특별한데, 길 한쪽에 쿠팡 물류센터가 있다. 택배 차량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오늘 이 복지관에 가는 길에 마늘을 파는 트럭을 지나쳤다. 그리고 복지관 앞에 세 대의 트럭이 서 있었다. 한 대의 트럭은 과일을 팔고 있었고 팔을 벌린 사람이 세 사람쯤 서 있으면 될 만한 거리에는 다섯 켤레에 3천원 하는 양말을 파는 트럭이 있었고 그 한쪽 끝에는 찹쌀도너츠를 파는 트럭이 있었다.

수업은 1시 시작인데 할매들은 11시부터 나와 이미 2시간동안 글자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30분 일찍 도착해 10분 전에 교육장소의 복도로 간다. 작은 틈새공원에 벤치가 비어 있어 잠깐 바람을 맞고 앉아 있었다.

찹쌀도너츠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은 남녀였다. 얼핏 보기에 나보다 어려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부부일까? 또는 남매일지도 모른다. 혈연관계일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득의 크고 작음을 떠나 무척 고될 것이다. 하루종일 바깥바람을 맞으며 길에 서서 일하는 것은 정말 고단한 일이다. 나처럼 모니터 앞에 앉아 자판이나 두들기는 족속들은 견디지 못하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길에서 주전부리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한다. 나는 범접하지 못할 삶의 부지런함에 경탄한다. 새벽에 일어나 식재료를 준비하고 이른 아침 차를 끌고 밖에 나왔을 것이다. 남은 식재료는 오래 두지 못할 것이고 그날 준비한 분량을 다 팔지 못하면 손해가 날 것이다. 화장실도 참고, 밥 먹는 것도 참고 일을 해야겠지.

남대문시장의 기업은행 앞에 가면 호떡을 파는 부부가 있었다. 2년전일이다. 그 부부가 거기서 호떡장사를 한 지 꽤 되었다고 들었다. 재작년 거기서 호떡을 사며 건빵이가 남자에게 물었다. 식사는 하고 일하십니까. 남자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점심은 거른다고 했다. 준비한 호떡을 다 팔면 집에 돌아간다고 했다. 여자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내내 호떡을 빚고 있었다. 침 삼킬 시간도 없어보였다.

고된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건, 식구이기 때문이겠지. 식구란 그런 것이니까.

소박한 거리에 앉아서 나는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워진 나머지 포켓몬고를 열고 체육관 배틀을 시작했다. 외면하는 것은 편리한 방법이다.

이 거리의 어딘가에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살고 있는데, 조만간 같이 점심을 먹자고 청해야겠다. 근처에 형부식당이라고 5천원짜리 카레를 만들어 파는 집을 봤는데, 무척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 것만 같았다. 부지런히 새벽부터 음식을 준비할 사람들에게 돈을 내고 밥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삶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허망하고 가소로운 일이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노동하지 않는 자가 인생을 논해도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나의 안온한 삶이 언제나 부끄럽고 부끄럽다.

 

2019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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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네 

가난한 빨래

내내 빈곤에 대해 생각중이다. 기생충 여파일까?

아니 사실 기생충을 보기 그 며칠 전부터, 생애사쓰기 수업을 하다가 참가자들의 원고를 읽고 하던 생각이다.

왜 우리는 가난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아마 최근 내가 겪은 개인적인 여러 가지 일들이 오버랩 되기도 해서였겠다.

 

경제감각이 떨어진다는 건 변명이겠지.

암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모두 변명이다.

자기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꼭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대가는 형벌 같은 걸 말하지 않는다.

건강이 약간 흠집나거나, 살이 찌거나, 특정분야의 풍요를 추구하다 전체의 풍요를 망가뜨리거나, 인간관계가 깨어지기도 하고, 외로워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형태가 있겠다.

 

작년에 했던 작업의 협력자 중의 몇 사람이 경제정의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정치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경제정의에는 사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는 게 그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나 역시 기괴하게 변형된 프로테스탄티즘의 “부지런한 노동”을 주입받으며 자랐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논리는 과연 정당하냐는 질문은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면서부터였다.

 

‘주식회사는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느냐에 따라 결정권을 갖게 되지만 협동조합은 1인 1표입니다.’ 라는 논리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 게 수년 전이다.

 

모든 불평등은 우연한 사건들의 중첩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가슴으로 체득한 건 얼마 안된다. 나도 이전엔 ‘노오력’으로 많은 걸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노력으로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 마흔을 넘기고 나서였을거다.

 

그 이전의 세상은 온통 억울함이었다.

 

아이가 직업진로에 대한 학교 과제를 하다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찾고 있었다. 커리어넷이라는 교육부의 진로정보망이었다. 아이는 평균연봉을 보면서 왜 4천만원 이상의 직군이 안 보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이에게 하루에 열 두 시간 일하고 1년에 2천만원도 못 버는 사람이 있는데 하루에 너댓시간 일하고 1년에 1억을 버는 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내가 화가 났다고 느꼈는지 왜 그런 걸 묻느냐고 했다.

아니, 그냥 묻는 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공부 열심히 해서 더 좋은 직업을 갖게 되면 그게 공정한 거 아니야?

그럼 누구나 열심히 하면 성적이 잘 나오나?

.. 아니.

모든 사람이 공부 잘 하고 싶다고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니?

.. 아니.

 

아이가 덧붙였다.

엄마,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하잖아.

 

어차피 세상이 불공평하다니.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 중엔 잔디밭이 깔린 집에 사는 아이도 있었고 교사한테 촌지를 건넸다는 이유로 더 사랑받는 경우도 봤는데 나는 반지하에서 몇 년째 살고 있었는데도, 세상은 어차피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신분세탁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내가 무슨 신데렐라쯤 된다고 생각한 걸까.

 

인간은 이성을 가졌는데, 어차피 불공평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공정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면 안될까? 라고 물었더니 아이가 ‘그걸 왜 나한테 요구하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가만히 봤다.

 

내가 만난 대대로 부잣집인 아이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본인의 노력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 중의 일부도 그런 면이 있었는데,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그대로 쏟아낸다는 거였다. 스스로의 감정처리를 하는데 서투르고 자신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타인에게 마구 퍼붓는데 염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당해보였고 어떻게 보면 솔직해보였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무례했다.

“부자가 착하기까지 해.” 라는 건, 감정이 얽히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이들은 무척 예의바르고 단정했지만 어떤 곳에서 자신을 부정당했을 때 그 에너지를 가장 만만한 사람에게 쏟아 부었다. 그렇다고 부자들은 그렇더라, 고 일반화할 수 있을까? 그 역시도 자신 없다. 내가 몇 명이나 만나봤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더라”고 쓰는 건 내가 가진 콤플렉스때문이겠다.

부자들은 대체로 취향이 있었는데 마흔 이전에 내가 만난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건 짜장 또는 짬봉, 물냉 또는 비냉, 후라이드 또는 양념 정도였지, 어떤 그릇이나, 가방이나, 구두의 수준이거나, 어떤 연주나, 어떤 화풍이나, 어떤 조명기구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취향이 생기면 삶이 무거워진다. 골라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불만스러운 것들도 많아진다. 스테인레스 컵에 물을 마시는 게 끔찍하면 도자기 컵을 사야 하며 질질 새는 물병으로 곤혹을 치르고 나면 조지루시 보온병을 사러 가야 하니까.

 

가난을 쉽게 전시하고 빈곤을 관람하는 시대.

누군가에게는 바꿀 수 없어서 익숙하고 당연한 운명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미치도록 끔찍한 기억이 되어서 기를 쓰고 계단을 기어오른다.

 

예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들은 말이 기억난다.

“가난한 사람들은 소리가 많이 나요. 기운이 없고 건강이 좋지 않으니 물건을 살짝 내려놓지 못해요. 가난한 사람들은 물건을 복도에 많이 내놔요. 집이 좁아서 다 들어가질 못하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있잖아요. 보행보조기라든가, 커다란 소쿠리 같은거요.”

 

가난하면 자기 삶을 외부에 노출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물건들 중에 1년에 몇 번 쓰지도 않는데 부피가 큰 것들이 있고 매일 쓰는 물건이지만 도저히 좁은 집에 들여놓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오래된 아파트의 작은 현관에 도저히 들어가지 않는 쌍둥이 유모차라든가, 노인의 전동스쿠터라든가, 쨍하게 마를 빨래 같은 것들.

 

그동안 나는 골목마다 널려 있는 빨래들을 꽤 많이 찍었다. 그건 부지런한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그들이 코를 죄던 노동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햇빛이 잘 드는 골목에 내 걸어야 하는 빨래들. 햇빛을 담는 대신 먼지를 안고 돌아온 빨래들이 하루치의 노동을 준비한다. 스팀다리미가 없어서, 건조기가 없어서, 스타일러스가 없어서 골목에 내놓은 빨래들.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세탁기를 돌리고 대나무에 끼워 베란다에 내 걸어야 했던 상하이의 내 꿉꿉한 빨래들. 딱히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누군가 말하는 것이다.

“그게 가난이야. 네가 근면이라고 우겼던 바로 그거 말야.”

 

 

여름이 낮아질 때 – 성수종합복지관 첫 수업 기록

– 선생님, 이제 우리 가르치려면 큰 일 났어요.
– 아주 속이 터지실거예요.

어르신들이 킥킥대고 웃었다.
– 아이고 선생님이 엄청 젊으네.

팀장이 지원서류와 저작권동의서를 묶은 종이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빠르게 지원서류를 훑었다. 1931년생부터 1952년생까지, 무려 20년이나 차이나는 사람들이 “어르신”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노인 수업을 할 때마다 이런 것들이 꺼림칙하다.

베트남 참전용사가 자유총연맹을 가면 625참전용사들과 세대차이가 나서 너무 힘들다고 했던 얘기를 기억한다.
1931년생이면 해방 때 이미 알 거 다 알고 기억할 거 다 기억하던 사람이고, 1952년생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만 기억할터였다.

모두 얼마 전에 초등교육과정을 마쳤다고 했다.
준비해 간 오늘의 교육자료를 나누자 모두들 입을 달삭이며 소리내어 읽었다. 참가자들은 오전 10시부터 모여 2시간동안 한글교실 수업을 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점심도 굶고 연달아 4시간 수업을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초등교육과정을 끝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며 정말 훌륭하십니다, 라고 말하다가 코끝이 찡해졌다.
주책없이 솟구치는 것들이 있다.

PPT에 담았던 내용을 모두 입으로 풀었다.
– 그렇게 하면 선생님이 너무 힘드실텐데.
맨 앞에 앉은 분이 말씀하셨다.
– 저를 좀 보세요. 에너지를 좀 써야할 것 같지 않으신가요?
할매들이 와르르 웃었다.

더듬 더듬 글을 읽는 사람들의 출석도 부를 겸 내가 써 간 글을 한 문장씩 돌아가며 읽었다. 더러 더듬거렸고 더러 틀렸다. 어느 정도의 문해력인지, 어느 정도의 글쓰기가 가능한지 알아야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글 잘 쓰는 사람은 종이를 앞에 두면 마구 휘갈겨 써내려 갈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조선 – 기록의 나라에서 시작해, 민간의 기록이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시니어들의 삶의 노하우가 축적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대통령의 재임순서를 나열하자 받아 적는 분도 있었다.
나는 원고지를 나눠주고 자신에게 편지를 써보자고 권했다. 30분 정도 걸렸는데 대부분 원고지 1매를 못 채웠다. 기본 글쓰기의 순서가 전혀 안 잡혀 있었다.

– 자, 선생님들, 저를 보세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시자고요.
누구나 종이를 받으면 당황해요. 하루종일 소설을 쓰거나 글을 쓰는 작가들도 빈 종이만 보면 도망치고 싶습니다. 한 번에 후다닥 글을 써내려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 못 봤어요. 맞춤법, 띄어쓰기, 작가들도 모두 힘들어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죠? 틀려도 된다. 맞춤법 틀리면 어떻게 할까요? 네. 고치면 돼요. 띄어쓰기 틀리면 어떻게 할까요? 네, 고치면 됩니다. 대신,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는 연습을 해봐요.
일단 생각을 먼저 하는 거예요.
상상을 해보시죠.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모두 받아줄 수 있는 사람, 우리 엄마도 안 해줬던 거, 우리 아버지도 못해줬던 거, 내 동생, 내 자매, 내 자식, 남편, 아무도 못해줬던 거, 다 이해하고 받아주는 친구 한 명.

자리에 앉은 참가자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없어. 라는 뇌까림도 들렸다.

네 없어요. 없죠. 그런 사람은 없죠.
그러니까 상상의 인물을 하나 만들어봐요. 다 되는 사람 딱 하나 있다고.
“글을 쓰면 되겠네요.” 한 사람이 말했다.

– 네,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자구요. 그래서 하나씩 이야기의 순서를 정해보는거예요. 어떤 이야기부터 할까? 일단 자초지종을 설명해야겠죠? 이야기의 순서를 잡아보죠. 메모를 하는 게 좋은데, 꼭 글자로 메모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림도 되고, 기호도 괜찮아요. 나만 알아보면 돼요. 그리고 그 순서에 따라서 한 문장씩 쓰는 겁니다.

그런 사람 없지.
그런 사람이 어딨나.
그 말이 귀에 남았다.
엄마 또래인 참가자들이 “선생님 강의가 정말 정말 재미있네요. 아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라고 환히 웃어주었다. 나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고개를 꾸벅 숙여 맞절을 했다.

수업 시간마다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어려웠다. 평촌도서관부터 나는 수강생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기로 했다. 중국에서는 Mr의 의미로 선생을 붙인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선배라는 말보다는 그 말이 좋다. 여성노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어머니인 것은 아니다. 혹시 자식을 먼저 보냈으면, 뼈 아플 말이기도 하다.

– 글쓰기를 하시다가, 어느 날 도저히 못 쓰겠고, 눈물이 그치지 않거든, 여기 복지관 선생님께 이야기해서 상담을 받으셔야 해요. 누구나, 그런 거 하나쯤 있잖아요. 평생을 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거. 있으시죠? 한 두 개쯤 있으실거예요.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글을 쓰시다보면 그게 떠오를 거예요. 정신력이 강하고 나약하고가 아닙니다. 그냥 내가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잘 봐야 해요.
겨우 빠져나온 웅덩이가 있어요. 동굴이 있고, 무시무시한 바위가 있었어요. 잘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글을 쓰다가 어느 날 그게 떡 하니 내 길을 막을 거예요. 그 이야기가 내 뺨을 막 때릴 거예요. 그럴 때는 잠깐 쉬고, 그 동굴을, 바위를 가만히 보세요. 내가 이걸 다시 잘 볼 수 있나. 생각하셔야 해요. 내가 중간에 그만두면 선생님한테 미안하니까, 복지관에 미안하니까. 아뇨.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여기서 두 시간동안은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 나 자신만 생각하세요. 이기적으로 하세요. 숙제 안 해서 선생님한테 미안하다,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쉬는 시간에는 오십이 넘도록, 육십년을 살도록, 글자를 쓰지 못해서 남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살았노라고, 은행도 피해다니고 관공서도 피해다녔다고, 멋지게 생긴 참가자가 말했다.

나는 칠판에 글을 네 줄 썼다. 이런 식으로 써보시죠 오늘은.
땡땡아,
그동안 수고 많았다.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그렇게 잘 헤쳐왔니. 나는 내가 너무 기특하고 예쁘다. 고맙다. 땡땡아. 이제 여기서 내가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 글로 한 번 써보자!

나는 참가자들이 쓴 원고지를 모두 걷어 집으로 가져왔다. 10회의 수업이 끝나는 날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10번은 충분하지 않지만, 태양이 더 뜨겁고 낮게 내려오는 이 여름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시원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수 십년을 글자를 쓰지못하고 읽지 못한 삶의 무게를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문맹율이 기록적으로 낮은 나라에서 이 사람들은 수 십년을 모른 채로 버텼다. 반지하 방의 푸념따위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다.

– 성수종합복지관 첫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