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두운 밤
두레박에 물 길어올리듯
그깟 반쯤 깨진 두레박엔 물이 반밖에 안 찼을 테지만
낡은 펌프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물을 긷는 갈증
소리가 절반을 해갈한대도
하루는 코 한 올이 풀린 그물 같은 것
빠져나갈 물고기가 아쉬워
뒤척이는 어부의 이부자리처럼
배는 곪지 않아도
먹고 살 일이 까마득해
먼 바다에 나가 안개만 먹고 노래했으면
그리운 것이 많아
목이 타는 밤, 그런 밤
밤과 밤을 넘나드는 알 수 없는 짐승의 소리
아무 것도 그립지 않았으면
베개가 딱딱한 그런 밤,
해가 뜨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밤과 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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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4월의 바다

꿈은 기억 위에 돋아난다.
상상했던 모든 것들은 과거에서 온다.
들었거나 읽었거나 봤거나 느껴봤던 것들.
기억 속에 숨어있거나 그 밖에서 혼자 울고 있었더라도.
꿈꾸지 않았던 일들은 늘 일어나고 만다. 다시 과거가 된다.
바다를 바라보고 산철쭉이 혼자 섰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 분홍옥매와 꽃잔디와 뜬금없는 난까지.
바다앞에서 나를 잊지 말라 했던가.
바다는 예전의 바다가 아니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으라 했던가. 그건 방향제로 악취를 덮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덮는다고 덮어질까. 눈이 녹으면 벌겋게 드러나는 황토처럼, 꽃이 지면 질퍽해진 목련그늘 아래처럼.
기억이 기억을 덮고, 세월이 세월을 덮으면,
바다는 다시 예전의 그 바다가 될까.
살아있는 자의 손을 꼭 잡는다.
바다 앞에서 우리는 모두 속수무책이므로.
그림자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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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고 팔고 버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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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의 키가 작은 남자는 남씨였던가, 그 사람은 화가라고 했다. 그는 키가 작으니, 창문 없는 고시원 방이 작지 않을 거 같았다. 키 작은 사람을 부러워하는 일도 생긴다. 유화에 쓰는 특유의 역한 기름내 풍기며 그가 그리는 그림을 7호실 오 씨는 “나까마 그림”이라고 불렀다. 그는 두어 달 고시원에 있다가 떠난 것 같다. 낮에는 막노동을 했고 가끔 일이 없는 날, 그러니까 비가 오거나, 노동을 팔지 못하고 봉고차에 실려 가지 못한 그런 날, 그는 고시원 방에서 물감과 테라핀 냄새를 풍겨가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연장이 들었을 거 같지도 않은 반달모양의 가방을 메고 새벽에 고시원을 나섰다. 남대문 경찰서를 지나 퇴계로쪽 남대문 시장 앞 육교 아래 가면 드럼통에 군불을 땐 사내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인력시장이 짧게 형성되면 거기 모인 사내들은 차례도 순번도 맥락도 이유도 없이, 자기 자신을 가장 늠름하게 내보이려 애쓰다가 봉고차에 실려 품을 팔러 갔다. 하루를 먹고 살 수 없는 날, 나까마 화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어디론가 또 팔려간다 했다.
 
품을 팔고, 그림을 팔고, 생명을 박박 갈아 하루를 버티면 또 다시 하루가 왔다.
우물에 빠져 둔탁한 머리통이 그 바닥에 닿을 때, 운 좋게 다른 세상에 펼쳐지면 좋겠다고, 그가 이사나가는 짐을 보며 생각했다.
 
1995년쯤의 이야기와 2005년쯤의 사진을 가지고
2017년에 쓴다.
사진은 용산구 동자동.

기역의 바다

허리가 기역자로 고부라진 할머니를 보면 미원 맛이 최고라던 고흥의 박 씨네 할머니가 생각나곤 해. 도무지 일어날 수도 앉을 수도 없을 것 같던 노인이 하루 종일 뭔가를 하고 있었거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노인이 하는 일이라곤 온통 먹거리를 만드는 거였어. 그 집 마당엔 뭔가 펼쳐져 있었는데 계절별로 아마 다른 것들이었을 거야. 가을에 갔을 때는 유자껍질이 있었으니 그 전엔 고추가 있었겠고, 봄에는 또 다른 게 있었겠지. 헛간 옆에는 마늘과 양파가 매달려 있었고 서대라는 생선도 여기 저기 있었어. 하루 종일 널었다 걷었다 빻고 다듬고 하는 것들은 내가 슬리퍼를 꿰차고 집 앞 수퍼에 가면 10분도 안 돼서 사올 수 있는 것들. 섬에서 80년을 나무처럼 살았다던 두 노인 내외는 그런 먹거리들을 모두 손으로 다듬고 만져가며 마련했어. 그 집의 할머니는, 먼 바다가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집에 살면서도 한 번도 허리를 편 적이 없을 것 같이 완전히 허리가 굽어 있었지. 희한한 건, 그 집의 영감님은 키가 크고 훤칠했는데 허리가 얼마나 꼿꼿한지 먼 바다에 떠가는 작은 배도 한 눈에 알아차릴 것 같았거든. 두 사람은 언젠가부터 다른 바다를 보고 있지 않았을까.

쪼그리고 앉으면 무릎이 턱에 닿던 고흥의 할머니를 생각해. 자식들이 가는 모습을 보며 이 빠진 입을 앙 다물던 모습을 보고 말았거든. 바위 위를 가볍게 넘나들던 노인을 보며, 나는 또 다른 노인들을 생각해. 우리는 어디서 헤어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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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삼척

삼척

삼척
오래된 골목을 걸으며
당신의 바다를 만져본다

반짝, 하고 빛나던 별들의 폭발과
무너져 내리던 한 세상에 관하여
돌아보면 돌이 될 거라던 이방인의 주문이
국자에 스뎅그릇에
덜그럭, 소리를 내고 떨어질 때

도깨비처럼 벚꽃잎처럼 천변에 흩날리던
산 자의 영혼에 관하여
꽃잎처럼 뛰어내린 여자들에 관하여
비 내리는 기차역 앞마당에 관하여

비린내가 싫었던
당신의 차가운 우주를 잡아본다
여기 이 손끝에 와닿기를

기억이 소멸되지 않기를
시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가 하나씩 늘어갈수록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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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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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앞바다엔 작은 바위섬이 있었대.
사람들은 바위섬이 닿을 듯이 가까워도 갈 수 없다 해서 “멀곳”이라 불렀다지.
작은 바위섬은 온통 바위와 마른 나무 몇 그루 뿐이었지만, 가닿고 싶은 사람들은 다리를 놓아서 섬과 바위섬을 하나로 묶었어.

오래전에 멀곳이었던 바위섬은, 마을의 전망대가 되었대.
멀리서 들어오는 뱃머리를 보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어.

가까이 있어도 먼 곳이 있고,
멀리 있어도 가까운 곳이 있잖아.

넌 지금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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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바다집

남자는 배를 타고 고기를 낚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그물을 손질하는 사이, 여자는 의자에 앉아 해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밖에 놓인 메뉴판엔 식사가 세 종류.
백합조개가 들어간 칼국수가 있었지만, 

칼국수보다 커피가 궁금했다. 

예상치 못한 사물은 낮게 말한다. 

여기, 무언가 숨어 있다고. 
드립커피가 3500원.
벽에는 LP판이 꽂혀있고 피아노 위엔 영농일지가 있었다.

어느 도예가가 선물했을 법한 도자기들과 

바다를 좋아하는 작가가 붓을 뻗쳤을 바다풍경, 

한지를 우그려뜨려 붙인 천장, 

나무로 된 싱크대, 

피아노 위 주인여자의 흑백사진과  

멀찌기 걸려 있는 어부의 파안(破顔), 
별바다호(號),가 잡아오는 물것으로

노래를 잇는 여자가 있는 곳.
별바다집.

 
20170402 인천 옹진 장봉도 

3월

내 어리석은 낱말들을 모아
미련한 문장 하나를 만들어
뽑혀나갈 나무 뿌리 아래에
숨겨두고 싶었다

부끄러운 연필을 부러뜨리고
운동화 끈을 꼭 묶고 달릴 수 있다면
사다리를 타고 척척
달에 갈 수 있을까

흩어질 꽃잎을 모아
주인 잃은 의자 위에 뿌리면
오늘이 조금 짧아질까

해가 너무 길다고
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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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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