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허리가 기역자로 고부라진 할머니를 보면 미원 맛이 최고라던 고흥의 박 씨네 할머니가 생각나곤 해. 도무지 일어날 수도 앉을 수도 없을 것 같던 노인이 하루 종일 뭔가를 하고 있었거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노인이 하는 일이라곤 온통 먹거리를 만드는 거였어. 그 집 마당엔 뭔가 펼쳐져 있었는데 계절별로 아마 다른 것들이었을 거야. 가을에 갔을 때는 유자껍질이 있었으니 그 전엔 고추가 있었겠고, 봄에는 또 다른 게 있었겠지. 헛간 옆에는 마늘과 양파가 매달려 있었고 서대라는 생선도 여기 저기 있었어. 하루 종일 널었다 걷었다 빻고 다듬고 하는 것들은 내가 슬리퍼를 꿰차고 집 앞 수퍼에 가면 10분도 안 돼서 사올 수 있는 것들. 섬에서 80년을 나무처럼 살았다던 두 노인 내외는 그런 먹거리들을 모두 손으로 다듬고 만져가며 마련했어. 그 집의 할머니는, 먼 바다가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집에 살면서도 한 번도 허리를 편 적이 없을 것 같이 완전히 허리가 굽어 있었지. 희한한 건, 그 집의 영감님은 키가 크고 훤칠했는데 허리가 얼마나 꼿꼿한지 먼 바다에 떠가는 작은 배도 한 눈에 알아차릴 것 같았거든. 두 사람은 언젠가부터 다른 바다를 보고 있지 않았을까.
쪼그리고 앉으면 무릎이 턱에 닿던 고흥의 할머니를 생각해. 자식들이 가는 모습을 보며 이 빠진 입을 앙 다물던 모습을 보고 말았거든. 바위 위를 가볍게 넘나들던 노인을 보며, 나는 또 다른 노인들을 생각해. 우리는 어디서 헤어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20170416

동해 삼척
돌아보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모로 누워 잠든
네가 보인다
쓰담쓰담
한 번 더
쓰담쓰담
한 번 더
20170409
/동해 맹방
삼척
오래된 골목을 걸으며
당신의 바다를 만져본다
반짝, 하고 빛나던 별들의 폭발과
무너져 내리던 한 세상에 관하여
돌아보면 돌이 될 거라던 이방인의 주문이
국자에 스뎅그릇에
덜그럭, 소리를 내고 떨어질 때
도깨비처럼 벚꽃잎처럼 천변에 흩날리던
산 자의 영혼에 관하여
꽃잎처럼 뛰어내린 여자들에 관하여
비 내리는 기차역 앞마당에 관하여
비린내가 싫었던
당신의 차가운 우주를 잡아본다
여기 이 손끝에 와닿기를
기억이 소멸되지 않기를
시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가 하나씩 늘어갈수록
나는,

20170409

섬마을 앞바다엔 작은 바위섬이 있었대.
사람들은 바위섬이 닿을 듯이 가까워도 갈 수 없다 해서 “멀곳”이라 불렀다지.
작은 바위섬은 온통 바위와 마른 나무 몇 그루 뿐이었지만, 가닿고 싶은 사람들은 다리를 놓아서 섬과 바위섬을 하나로 묶었어.
오래전에 멀곳이었던 바위섬은, 마을의 전망대가 되었대.
멀리서 들어오는 뱃머리를 보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어.
가까이 있어도 먼 곳이 있고,
멀리 있어도 가까운 곳이 있잖아.
넌 지금 어디야?
20170402 장봉도
남자는 배를 타고 고기를 낚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그물을 손질하는 사이, 여자는 의자에 앉아 해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밖에 놓인 메뉴판엔 식사가 세 종류.
백합조개가 들어간 칼국수가 있었지만,
칼국수보다 커피가 궁금했다.
예상치 못한 사물은 낮게 말한다.
여기, 무언가 숨어 있다고.
드립커피가 3500원.
벽에는 LP판이 꽂혀있고 피아노 위엔 영농일지가 있었다.
어느 도예가가 선물했을 법한 도자기들과
바다를 좋아하는 작가가 붓을 뻗쳤을 바다풍경,
한지를 우그려뜨려 붙인 천장,
나무로 된 싱크대,
피아노 위 주인여자의 흑백사진과
멀찌기 걸려 있는 어부의 파안(破顔),
별바다호(號),가 잡아오는 물것으로
노래를 잇는 여자가 있는 곳.
별바다집.
20170402 인천 옹진 장봉도
내 어리석은 낱말들을 모아
미련한 문장 하나를 만들어
뽑혀나갈 나무 뿌리 아래에
숨겨두고 싶었다
부끄러운 연필을 부러뜨리고
운동화 끈을 꼭 묶고 달릴 수 있다면
사다리를 타고 척척
달에 갈 수 있을까
흩어질 꽃잎을 모아
주인 잃은 의자 위에 뿌리면
오늘이 조금 짧아질까
해가 너무 길다고
네가 말했다
170319
경기도 이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