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고등학교 때 학교는 서울이었지만 집은 경기도 양주에 있었다.

서양음식을 좋아하는 엄마는 동두천에 맛있는 피자집이 있다는 걸 알아냈고 우리는 새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동두천에 가서 피자를 먹고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매우 얇은 도우에 페페로니만 얹은 피자였는데 그 때 당시엔 그런 피자가 많지 않은데다가 제대로 된 모짜렐라 치즈를 사용해 그 맛이 엄청났다. 식구들이 모두 앉아 한 판을 먹고 냉동실에 넣어둘 요량으로 두 판을 더 사오곤 했다. 엄마는 가끔 새아버지와 단 둘이 동두천에 가서 피자를 사오기도 했다.
그 피자집은 철길 근처 허름한 단층건물이었다.
동두천은 그 때 무척 음침한 곳이었고 낮에는 문 닫는 술집들, 손님 없는 밥집들이 버려진 푸대자루처럼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그 길이 활기에 넘치는 시간은 통금이 풀린 미군 사병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었겠으나 고등학생인 내가 그 시간에 거길 방문할 일은 없었다.
피자를 먹고 나오면 피자집 앞 골목에는 작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놀고 있었다. 얼굴이 까맣고 고수머리인 아이와 노란 머리, 하얀 피부의 아이들이 낡아빠진 세 발 자전거를 타고 사방치기를 하기도 했다. 나와 눈이 마주쳤던 한 아이. 까만 얼굴에 곱실곱실한 머리를 양쪽으로 높이 올려 묶은 이마가 훤하던 아이가 기억에 또렷하다. 나는 저 아이들이 한국말을 할 줄 알까 궁금했다.

훗날 남에게 그 때의 이야기를 했더니 너는 어디 6.25때 피난민촌에서 살다 온 거냐고 내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았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던 건 무려 1992년쯤이었다. 버려진 혼혈 아이들이 모여서 살던 아주 작은 보육원. 햇빛이 아주 쨍하던 날이었는데, 역사와 삶을 모조리 뒤흔들며 사람의 삶은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살다 보면 언제나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50년전의 순간으로 100년전의 어느 날로 회귀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2014. 8. 12.

어떤 택시의 기억

늘 다니던 길이었다.
택시가 빙 돌아 먼 길로 우회하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다니는 길이고 이미 한 달 반이 되어가던 길이다.

나는 흰색 면 블라우스를 입고 멜방이 달린 길다란 검정 치마를 입고 있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지만 머리는 적당히 길었고 콘택트렌즈도 끼고 있었다.

나에겐 500원도, 1000원도 매우 귀중한 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택시를 탔느냐 하면, 지하철 역에서 그 곳까지는 버스 노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혐오시설. 분명 서울시내에 있었으나 그 곳으로 가는 버스는 없었다. 그 곳의 주변까지 가는 버스는 있었으나 나에게는 500원만큼 시간도 중요했다. 시급 1000원짜리 아르바이트에 늦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구치소앞에서 택시를 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붉어진 얼굴에 질질 짜고 나온 눈물 때문에 이 자가 나를 우습게 본 게 틀림없었다.

지하철역에 다다르자 뒷좌석에 앉았던 나는 기사에게 말했다.
길을 돌아오셨다고.
원래 여기까지 2800원이면 충분하다고. 지금 4000원이 넘게 나왔다고.

기사는 룸미러로 나를 슬쩍 보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원래 내는 요금대로만 드리겠다고 했다.
“그래?”
택시 정차장에 닿은 기사가 속도를 올렸다.
“내가 못 내려주겠다면?”

택시는 서지 않고 속도를 내어 다시 어디론가 달려갈 기세였다. 지하철역 근처 승강장은 반원형으로 되어 있어 돌아나가게 되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로 긴 한숨과 함께

알겠어요. 다 드릴테니 그냥 세워주세요. 라고 말했다.

기사는 반대편 승강장에 차를 세웠다. 나는 천원짜리 네 장을 던지듯 내었다. 그 새 요금이 100원 올라 있었다. 나는 동전 몇 개를 더 꺼내 기사에게 쥐어주고 차 문을 세게 닫았다.

택시를 탈 때마다는 아니다. 가끔 아무 일도 없을 때 이 생각이 난다. 그 날 내가 택시에서 내리지 못했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등골이 서늘해질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열일곱살이었다.

2014. 8. 13.

주스, 피자, 거울

1999년

냉장고에 병으로 된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사다놓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집의 냉장고는 검은색이었고 같이 살던 여자의 것이었다. 나는 6천원쯤 하는 커다란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냉장고에 넣으며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다.

‘병 주스를 사 먹을 수 있다니. 고생은 이제 끝났어. 다음은 파스퇴르 우유다.’

 

2006년

몇 년이 지나 도미노피자를 시켜먹던 날을 맞이했다. 이 비싼 피자를 먹을 수 있다니. 그 날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의 노동이 없이도 신용카드가 내 손에 주어져 있었고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시켜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갖고 싶은 책을 계속 사도 모자람이 없었다. 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많아지더라도 중단되지 않았다.

‘이건 뭐지?’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사다 놓던 날보다 훨씬 더 편안하게 살고 있는데 먹을 것은 넘쳐났다.

훨씬 더 힘들게, 치열하게,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자면서 일을 하던 날은 도미노피자를 시켜먹는 그 날보다 더 열심히 일했는데, 도미노 피자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정당하지 않는 세상이라 여겼다. 매일 매일이 꿈결이었다. 사람이 미치는 건 현실적이지 않은 일이 눈앞에 버젓이 펼쳐질 때였다. 왜 일하지 않는데 돈이 있는 걸까. 벌어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까지, 그게 현실이라는 걸 아는 데까지, 벌어 오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람은 현실에서 과거의 나처럼 살고 있고 나는 계속해서 꿈속에 살고 있었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

 

2014년

나 자신의 가장 비열한 치부를 마주하는 일은 구역질 나는 일이다. 차라리 평생 아무도 비난한 적 없이 살았다면 욕지기는 덜 할 것이다. 내 안에 살아 꿈틀거리는 오만가지의 군상들은 작은 구더기처럼 꿈틀대다가 필요한 것들을 끄집어 내어 내 얼굴에 발라대는 것은 구역질 나는 내 치부의 어떤 조종자다. 오만가지 악과 오만가지 선이 한 사람의 영혼에 모두 깃들어 있다는 걸 알고 지냈더라면, 혹은 모르는 척 평생을 살면 조금 나았을까.

나 자신도 모르는 어떤 불편함이 계속 체증처럼 가슴을 짓누르다가 어느 날 그 불편함이 기괴하게 뒤틀린 얼굴을 하고 어두운 밤 골목에 떡하니 나타나 씨익 – 하고 소름끼치게 웃는 순간이 털썩털썩 눈앞에 떨어질 때.

그런 일을 겪지 않으려면.

‘이놈의 거울은 청동으로 만들었나 아무리 닦아도 잘 보이지 않아.’

2014.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