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메뉴얼

이 나라에 털어서 먼지 안나는 인간 없다는 옛 말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그 말은 인간은 모두 거기서 거기다, 완벽할 수는 없다. 라고 받아들여도 되지만, 약간 꼬아서 보면 –
아무리 잘난 척 해봤자 너도 분명히 꼬투리 잡힐 게 있다라는 협박이기도 하고 더 깊고 넓게 보면 이 나라의 구조는 예로부터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게 살 수 없는 체제가 몇 백년간 곤고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대참사가 일어나면 이 나라의 권력자들이 하는 메뉴얼이 있다.
피해 규모가 엄청나도 그 구조가 단순하면 타겟을 하나 잡는다. 모든 화살과 책임을 한 개인에게 몰아간다. 물론 그 개인은 사건의 주범이기도 하고 극악무도한 짓도 저질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까지 인간이하의 짓거리를 할 때까지 국가와 정부, 사회안전망이 여태 아무 기능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국가는 최선을 다해 악마를 만들어 낸다.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도록 사회안전망은 무얼했으며, 재범 가능한 성범죄자의 관리는 어찌 되었으며, 초동수사가 잘 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며,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 치안은 어디에 있었는가.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은 개인의 악마성을 낱낱이 까발리는 것이다. 얼굴도 공개하고 세상에 널리 알리며 9시 뉴스의 절반을 이 인간이 얼마나 악마인지! 강조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심지어 인육을 먹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거면 모든 책임소재 추궁의 게임 끝난다. 악마라도 인간인데 개인 하나 감당하지 못할 부실한 정책과 정부는 범죄자가 “너무 악마라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복잡한 사안의 경우, 혹은 언론통제에 실패할 경우, 고구마 줄기를 캐서 적당한 선에서 조직을 작살낸다. 정당도 없애고, 간첩도 만들고, 기업도 날리고, 기업주를 단두대에 세우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기업주는 죄수복을 입고 플래시세례를 받는다. 그렇게 조직을 일망타진하고 나면, 권력은 고요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예상컨대, 언론통제에 실패한, 나쁜 짓도 똑바로 하지 못한 멍청하디 멍청한 이번에는 아마 한 종교집단을 날리고, 몇 개의 기업을 날리고, 몇 몇 관공서 책임자가 옷을 벗고.

오늘도 하늘색 화사한 자켓을 입은 그 사람이, 회전의자를 돌려 창밖을 보며 슬며시 웃을 거 같다.

소름끼치네.

• 덧붙여 나는, 이 모든 타겟화와 언론플레이가 누군가 지능적으로 계획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이다. 부실한 국가 시스템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국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충성만 강요 받으며 환갑을 넘긴 사람들은, 정말 한 마리의 악마가 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고 굳게 믿는다.

2014. 4. 24.

용서하지 말아라

일주일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 소년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살인범이다. 7년 전의 일이다. 7년 전의 그 밤이 갑자기 소년에게 밀려온다. 작가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을 정확하게 설계했다. 책의 앞부분엔 이 마을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물론 가상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중심은 저수지다. 소년은 저수지 근처의 삶을 살았다. 파도치지 않는 잔잔한 저수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모두 인간과 기계에 의해 통제되는 곳, 움직이지 않는 것은 썩기 마련일진대 소년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보냈고 살인범의 아들로 살았다. 소년은 잠수를 했다. 검은 물결 속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소설은 내내 어두운 밤이었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만 가득했다. 검은 밤, 검푸른 물, 외로운 달 하나, 소름끼치는 누군가의 실루엣, 소년이 말하던 물의 이미지, 작가가 전해준 그 물의 기억은, 잔인한 마녀의 길고 더러운 손톱같았다.

 

진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그 앞바다는 눈부셨다.

거센 풍랑과 파도가 그치고 바다는 길고 더러운 손톱을 감췄다. 비웃고 싶을 만큼 찬란한 햇살 아래 여유롭게 넘실대는 잔잔한 물결,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얼굴을 싹 바꾼 바다는 반짝이는 물살 위로 아이들을 하나씩 꾸역꾸역 토해냈다.

욕지기가 올라온다. 잔인한, 참혹한, 비참한, 무서운, 역겨운, 모든 것들이 저 배에 가득했다. 더러운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름답고, 생기발랄하고, 뽀얀 젊음의 곱디 고운 아이들은 그 배에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아이들은 물결에 휩쓸려 아름다운 땅 진도로 돌아오고 있다. 바다는 수천가지의 얼굴을 가졌는가보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다 잡아 삼키지만, 돌려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다.

 

문득,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처음 갖는 구체적인 생각이다.

호탕하게 웃고, 힘차게 걸으며, 술에 취한 듯 아무데서나 춤추고 노래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졌다. 빛나는 햇살을 보며 바다를 떠올린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면, 눈을 감아야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 누군가의 통곡,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 따위, 눈 감고 귀 막고 안 보고 안 들으며, 오로지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웃고, 내일은 비가 오니 시원해서 좋다고. 눈 꾹 감고 외면하면 가능한 일이겠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은 고이 접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기로 했다. 매일 밤 꺼내서 한 번씩 읊어야 한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사물이 명료하게 보이는 빛이 있는 한, 두 눈 똑바로 뜨고 두 귀를 번쩍 열고, 슬픔이 가득한 이 도시에 두 다리로 꼿꼿이 걸어야겠다. 잊지 말아야 한다. 깊은 곳에 숨겨둔 쪽지를 매일 꺼내 읽으리라.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라. 나도 나를 용서하지 않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