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말하다

#1.

동네 수퍼에 못 보던 아가씨가 캐셔를 보고 있다.

고운 얼굴에 피부도 깨끗한 것이 20대 초반같다.
아이라이너도 섬세하게 번짐없이 잘 그렸다.
참 예쁜 얼굴인데 표정은 좋지 않다.
일부 배달부탁드리구요 비닐봉투 하나 주세요. 라는 나의 말에 “네?” 하고 되묻는다.
방금 전 잠시만요 하고 내가 물건을 놓고 저쪽에 가서 크리넥스를 가져온 것이 못마땅했나 생각하게 되었다.
배달용 포장봉투에 물건을 넣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각이나 크기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비닐이 찢어질 지경으로 구겨넣고 있다.
이 아가씨 일 하기 싫군. 속으로 생각하며 눈치를 살핀다.
한 마디라도 상냥하게 하려는 습관이 불거져 나오려는 찰나다.
배달물품을 들고 가려는 아저씨에게 지난 번에 배달오신 분께서 주소를 헛갈리셨다던데 말을 하니
이 아가씨는 듣고 싶지 않은 건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건지 마음의 거리가 멀다.
배달포장을 번쩍 드는 아저씨는 초보라 그렇다며 괜찮을거라고 믿음직스럽게 대답해주신다.
일하기 싫구나. 하는 순간.
그 캐셔 자리 위의 공기를 살폈다. 혹시 더운가. 문이 열려 있어서 답답한가.
이 아가씨가 이렇게 일을 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뭔가.
고운 얼굴에 이 자리가 어울리지 않다고 본인도 생각해서인가. 궁금했다.
수퍼에서 나오는 길에 엊그제 다시 봤던 “베를린”에서의 한석규의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당신이 여기에 목숨을 거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정우가 한석규를 보며 말한다.
그러자 별 시덥잖은 얘기를 한다는 듯이 한석규가 인상을 지푸리며 말한다.
“일이잖아 일. 일이니까 하는 거지 일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냐?”
#2.
당신은 전공이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해?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냐.
남편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들고 나온 건 김훈이었다.
그는 한국일보 기자생활을 모두 다 마친 후에 자기가 하고 싶었던 소설 쓰는 일과 자전거 타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떳떳하게 정년퇴직을 한 사람이 말하는 밥벌이의 지겨움은 너무 가볍게 세상을 날아다녔다.
#3.
이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가 맞다.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자본을 천시하는 태도를 모두 다 가슴에 품고 있다.
자기가 번 돈을 자유롭게 쓰는 것에 대해서 기본적 윤리를 지켜주길 소망한다.
돈으로 착취하는 것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격양된 목소리로 비난한다.
사회정의를 지키는 것은 옳은 일이나 이 나라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무언가 부정한 일을 분명히 저질렀을 것이라는 암묵적 동의를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정당하게 돈을 버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전후 급속도로 성장한 이 나라의 경제구조는 한 방에 일확천금이 가능한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 기회를 잡은 자들이 쉽게 부자가 되었으며 정치의 부침속에 많은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일도 자주 있어왔다.
그러나 그 안에서 꾸준하게 법을 지켜가며 세금을 모두 내가며 돈을 벌어 떼부자는 아니더라도 부를 누리는 사람을 몇 알고 있다.
물론 그렇게 누리는 경제적 부유함엔 분명히 운도 작용했다. 그 운을 잡기 위한 대단히 빠른 감각은 필수였다.
더 이상 사람들은 절약하거나 아끼지 않는다.
검소한 것은 쪼잔한 것이 되었다.
이 나라에서 사치는 필수고, 정기적인 해외여행과 비싼 가방같은 사치품들은 누구나 하나쯤 가져야 하는 필수품이 되었다.
외국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와 놀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들었는데 모두 다 부자뿐이라는 것이다.
#4.
이 나라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매체는 TV이다.
연예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전국민에게 중계된다. 그들도 비정규직, 계약직 노동자일 뿐인데 스타라는 이유로 더 화려하게 살기를 종용받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자기를 동일시 한다. 현실의 남루함을 지우기엔 가장 쉬운 마약이다.
어느 날부터 전체주의를 몰아내는 풍조가 시작되면서 이상하게 방향은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말이 “나는 누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던 전쟁 직후의 청교도 정신은 모두 스파게티 면발에 말아 먹었는 모양이다.
#5.
청교도 정신이 필요한 건 아니다.
밥벌이를 하기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디서부터인가 꼬여있다는 것이다.
밥벌이를 지겹도록 해보지도 않은 자가 밥벌이의 지겨움을 논하고
돈에 피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자가 돈을 천시하고
노동에 소금꽃을 피워보지 않은 자가 노동을 기피한다.
모두 다 간접경험만을 가지고 세상을 다 아는 체 하며 세상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가. 왜 우리는 계속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는 것인가.
#6.
1963년도에 김수용은 혈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1947년 해방직후에 극작가 김영수가 써서 1948년 공연된 작품이다.
해방 직후 성북동 방공호에 모여살던 이북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극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눈에 띄였던 것은 두 형제다.
형은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 그 형의 일을 돕다가 부인은 병에 걸려 (납중독으로 추정) 운신하지 못하고 늘 머리를 싸매고 있는 노모와 포탄해체 과정중에 폭발로 다리를 다친 딸과 동생을 부양하고 있다. 동생은 그 와중에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룸펜이다.
그리고 동생은 조국의 진정한 해방을 부르짖으며 형은 돈의 노예라고 비난한다.
얼마 전 리메이크하여 예술의 전당 자유연극시리즈에서 공연된 이 작품에서 두 형제는 무대위를 뒹굴며 육탄전을 벌인다.
그럼 니 입에 들어가는 밥은 어디서 나옴매
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공부하고 밥 처먹은 인간이 누구냐 묻는다.
#7.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치던 마르크스는 노동을 숭고하게 여기라 하였지
노동을 천시하여 모두 다 곡괭이를 집어 던지고 피둥피둥 놀면서 자본을 비난하라 하지 않았다.
매우 기괴하게 뒤틀린 2013년.
우리는 수없이 많은 혈맥의 동생, 1963년 영화에서 최무룡이 분했던 원칠이를 본다.
어떤 이유로든 지쳐버린 수많은 원칠이들은, 그저 쉬고 싶은 것인지 놀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내 안에 숨은 원칠이는 매일 아침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출근하는 원팔이가 벌어오는 밥을 먹고 있으니 말이다.
2013. 6. 30.

내게 거짓말을 했던 시간

심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심심하다는 건 어떤 느낌이죠?
언제나 단순한 표현에 대해서 끝없이 캐묻는게 정신분석이다.
음. 그건 마치 뭐랄까..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같이 이야기하고 놀아줬으면..? 좋겠다는 기대?
이게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구요. 약간 뭐랄까.. 유아틱? 하다는 느낌이죠. 그러니까 심심해~ 라고 하는 건 마치 저희 아들이 집에서 분명히 놀고 있는데도 뭔가 더 재미난 거를 찾고 싶다고 말할 때,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놀이상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 같은 건데요.
아무튼 저는 심심하다는 말을 써보거나 누구에게 말해보거나 문장이 되어서 머릿속에 떠돌아 다녔던 기억도 없거든요. 무척 생소한 느낌인데 그게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알긴 아는데 뭔가 제가 꺼렸던 표현이랄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안 써 본 말이 몇 가지 있는데요, 심심하다 외롭다 무섭다 세 가지 정도. 그 중에서 외롭다, 라는 말은 글에는 많이 썼을테고 무섭다 라는 건 누가 어떤 게 제일 무섭냐고 물었을 때 글쎄, 난 별로 무서운 건 없는데.. 라고 서슴없이 대답한 편이었죠. 심심하다는 건, 심심해 본 적이 없다는 건데 늘 뭔가.. 하고 있었고 할 게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어제 느낀 그 심심하다 라는 감정은,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는 것과, 게으름을 피워도 된다는 듯한 제 자신에 대한 허가? 같은 건데.. 음.. 그러니까 이건..
투정이죠. 네. 투정같은 거요. 애들 투정.
– 그럼 기억이 있을 때부터 투정을 부려본 적이…?
없어요. 애교를 부려서 뭔가를 더 얻어낸다거나 투정을 부린다거나 하면.. 맞으니까.
감정을 솔직하게 내보이면.. 맞는거죠.
징징대면 맞고 화내면 맞고 울면 맞고 투정부리면 맞고 울음 참으려고 애쓰고 있으면 그게 더 꼴뵈기 싫다고 맞고 뭔가 되게 경직된 것에 익숙했달까.
모든 관계의 의사소통은 사무적이었다. 용돈을 더 받기 위해서 혹은, 필요한 학용품을 찾기 위해서 다 쓴 학용품의 증거물을 제출하고 16절지 종이에 청구서 라고 적어야 했다. 연필 12자루를 다 사용하였으므로 새로 한 다스가 필요합니다. 이에 용돈 1200원을 청구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1200원을 줬다.
무척 권위적이고 사무적이면서, 약간 군대식 같기도 하네요. 라는 말에 기억을 더 더듬어본다.
경찰대를 가라는 얘기도 하셨고, 여군됬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하셨죠. 단순히 국가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그것보다는 어떤 힘에 상징에 대한, 로망같은 게 있지 않으셨을까 해요. 군대라는 강한 조직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랄까. 그런 자리에 제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거겠죠.
심심해, 무서워, 겁난다, 라는 말을 써보지 않았던 35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무섭다라는 말을 작년부터 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나 오늘 삐짐” 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한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나이값 못하고 삐진다 라든가, 무섭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불안과 공포는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였다는 것을 늘 잊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그 때는 감정을 표출하기만 하면 폭력이 들어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생존이 더 급했고, 그게 더 절박해서 모든 것을 닫기 시작했고, 닫다 보니까 그게 습관이 되어서, 이제 완전히 막혀버린,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그렇지만 요즘 들어서 그런 정서를 느낀다는 건, 회복이 되고 있다는, 좋은 신호로 보이네요.
우리 자매의 어린시절을 회고할 때 엄마는 늘 너희들은 말을 참 잘 듣는 아이들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늘 덧붙였다. 니가 질질 짜는 거 빼고. 물론 죽여버리고 싶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 동생은 말이 늦었다. 7살이 되어서야 겨우 한 문장을 말할 줄 알았다.
나는 내 동생이 바보라고 생각했지만 그림을 지나치게 잘 그려 이상한 천재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동생은 감정을 몸과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걸 그림으로 풀어낸 것 뿐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감정이 복잡하여 언어보다 그림이나 노래로 더 먼저 표현하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감정의 표출이었다.
돌아오며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늘 좋은 사람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라고.
성격이 좋다. 품이 넓다. 대인배다. 그릇이 넓다. 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고 그런 칭찬은 그런 행동을 강화시켰다.
그런데도 문제는 다 풀리지 않았다.
단순히 어린 시절에 감정표출을 하지 못해 성격 좋은 아이가 되었던 것일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친구와 사사로운 대화를 나누다가 내 감정보다 상대방의 감정을 먼저 떠올리는 나를 친구가 발견했다.
남편이 술을 많이 마셔 집에 들어오기 귀찮아 하는거 같은데 피곤하겠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어쭈 어디 외박을 하려고 감히. 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그건 남의 감정을 먼저 읽는거잖아. 자기 감정은 뒤로 제껴놓고.”
눈치를 많이 보고 자란 사람은 남의 감정을 빨리 읽어내는 능력이 발달한다. 그것 뿐만 아니라 나는, 내 감정은 일단 뒤로 제끼고 남의 감정을 먼저 읽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걸 그 친구의 발견으로 깨달았다. 그게 며칠 전이다.
그 한 마디로 많은 문제가 갑자기 풀렸다.
힘없고 약한 어린 아이가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거나 생명의 위협을 수시로 느끼며 살아오는 와중에 책임질 것이 늘 있었다.
그럴 때 내가 택한 방법은 타인의 감정을 먼저 읽어 벌어지는 감정의 교류를 먼저 수습하는 일이었다.
나의 감정은 뒤로 제쳐 놓아야 화가 나서 나를 위협하는 상대에게서 나를 보호하고, 그리고, 나의 동생을 보호할 수 있었다.
언제나 돌아서서 다시 생각하면 내가 화를 냈어야 하는 정당한 부분에서 화를 내지 못했다는 것을 늘 깨닫곤 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왜 그 때 그 말을 하지 못했을까. 이런 것들은 내가 사회적 지위를 얻으면서 조금씩 해결되었지만, 지금도 남의 감정을 먼저 읽는 습관은 쉽게 내 몸을 떠나지 않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몸살과 감기를 앓았다. 정신분석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의 감기몸살도 앓지 않았다.
이 날 나는 그 간 내가 해마다 앓았던 몸살감기들이 쉬고 싶은데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쉬면 안된다는 것. 쉴 수 없었다. 내 일기장의 첫 머리는 늘 “삶은 늘 치열해야 한다” 라고 또렷하게 적혀 있었으므로.
하루 종일 내 마음의 바닥에서 요동만 치다가 겉으로 내뱉어지지 못한 감정들은 그 날의 일기가 되었고 그 날의 글이 되었다.
때로는 사진이 되었고 그것으로도 해결이 안되면 그게 꿈이 되었다.
언제나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는 하루종일 미뤄두었던 내 감정들이 총천연색으로 스펙타클하게 펼쳐지곤 했다.
잠은 언제나 모자랐고 꿈은 언제나 생생했다.
30년이상 묵은 감정들이 터지기 시작했을 때는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아 낮에도 끝없이 백일몽을 꾸고 하루 종일 허공을 헤맸다.
꼭 이렇게 불규칙한 잠의 원인들이, 단순히 당시의 환경이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때문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30년만에 긴 시간을 보내면서 아버지도 나처럼 꿈을 잘 꾸는 사람이며, 그 역시 총천연색으로 된 꿈을 주로 꾸며, 꿈을 메모하기 위해 곁에 펜을 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결론은 한 가지 원인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서나 적용된다. 어떤 사람의 성격이 단 한 가지의 환경적 원인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진 내가, 더 이상 표출되지 못하는 감정들이 내 안에서 좀비처럼 나를 거꾸로 잡아먹는 일을 그만두려면 이제부터라도 꺼내놓아야 하기에, 아마 그래서 작년엔 트위터에서 그렇게 정치인들에게 욕지거리를 해댔던  것이다. 대상을 압축시켜 원망을 쏟아내면 어느 정도 급한 소갈은 가능하므로.
분노보다도, 가볍게 웃을 줄 아는 감정부터 연습하기가 쉽다. 그게 나에게도 주변에게도 좋을 것이다.
웃기면 웃고, 내가 크게 웃는다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이제는 집에서 크게 웃고 가볍게 깔깔대고 아이를 간지럽히고 하릴없이 누워있는 연습도, 하고 있다.
이야기너머 자기역사쓰기 특강을 하셨던 “김민영”선생님이라는 분이 자기 역사의 글 맨 앞에 이런 소제목을 달았던 게 기억난다.
마흔 – 이제는 솔직해야 할 시간.
내년에 마흔이다. 나 역시, 내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 지기 위해, 서른 아홉을 걷고 있는 중인 모양이다.
 2013. 6.30.

구체적인 시대

노래와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형태의 콘서트가 유행이라던데 공연장에까지 앉아서 남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단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 그 누구보다 언어를 많이 사용하며 살고 있지만, 때로는 그 모든 언어들이 다 부질없어서 굳이 말로 이루어지 않은 것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목소리로 말을 하지 않고 알아들을 문장을 전달하지 않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들을 수 있고, 내가 아는 만큼 내가 듣고 싶은 만큼만 들어도 되는 그런 형태의 소리로 많은 것을 함축 시키고 싶을 때가 있다.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들어도 말이 많은 것은 일부러 피했는데 그 반면 나는 이야기를 잘 하는 아이였다.
내 얘기만 들어달라고 하는 거였는지 아직 잘 알 수 없다.

오늘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는 박제동 화백을 모신 토크콘서트 형태의 국악콘서트가 있었다.
80분 공연에 음악 공연은 30-40분 정도로 할애하고 나머지는 정은아의 사회로 이루어졌다.
박제동 화백은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객석에서 간간히 폭소가 터졌고 나 역시 프로그램북으로 입을 가리며 웃곤 했다. 그의 화법은 숨김이 없고 솔직하고 정직했다. 샘이 나고 화가 나고 오기가 나고 질투가 나는 인간의 칠정을 모두 무대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관객들이 웃는 부분은 바로 거기였다. 길들어지지 않는 인간의 건강하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할 때 말이다.

행복했어요. 오기가 났지, 화가 나서, 미치겠는거야. 어쩔 줄을 모르겠지, 부끄럽죠. 대체 어떻게 이런 짓거리를 했을까, 막 질투가 나지요. 아 나는 어떻게 하지, 나보다 더 잘 하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요. 질투가 나서 미치겠는거지. 그래서 어디 너 두고보자 하고 오기를 부렸어요.

오늘 그 공연장에서 박화백이 말한 자신의 감정들이다. 인간의 오욕 칠정을 숨김없이, 그렇지만 뻔뻔하지 않게, 솔직하지만 염치있게 말하는 것이 듣기에 즐겁다는 것을 알게 했다.

말과 음악이 같이 공연된다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생소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들은 더 이상 구체적이지 않은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어려워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지하는 시대다. 개나 소나 스토리텔링- 이라는 비아냥조도 떠돈다. 나 역시 이야기를 발굴하고 쌓아가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관통해 온 이야기들은 구체적이거나 노골적이라기 보다 상징적이며 여러가지 해석을 가능케 하는 가사없는 노래같은 특성이 있다.
소리를 더한 극을 하고, 그 극을 해설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느끼는 것보다 알고 머릿속에 집어넣기를 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유홍준의 “아는 만큼 보인다”가 그 출발점이었을 거다. 알지 못해도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눈썰미” 라는 것인데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을 아름답게 느끼지 못할 만큼- 바쁘다.

그리하여 시대는 추상과 이별하고, 극사실과 해석, 해부와 분석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닐까.
박제동 화백의 그림으로 부족하고 그가 덧붙인 글씨를 읽는 것도 부족하여 그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듣고 거기에 걸맞는 음악을 연주해 특정한 느낌을 잡아넣고 그 음악에는 구체적 대사와 이야기까지 넣어 확장까지 시키는 시대.

좋다 나쁘다로 평가하고 싶지 않다.
그저 시대는 모든 예술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지고 있다는 것 뿐이다.

2013. 6. 26.

서운함이 분노가 될 때 – 실은..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그니가 말했다.

속상하다는 걸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을 때 감정의 변화가 오잖아요? 그 때는 단순히 속상한 마음, 서운한 마음, 섭섭하고 사소한 것들이 이제 분노가 되거든요. 감정이 변하는 거죠.
그래서 그 감정이 변했을 때 터뜨리지 않으려고 거리를 더 두는 경향들이 있기도 해요.
그러다 보면 말을 안 하게 되기도 하고 물리적 거리를 멀리 하게 되는데요.
실은.. 그런 게 관계를 더 악화 시키거든요.

저 사람이 왜 나에게 말을 안 걸지?
그런 마음이 들면 그 때는 섭섭한 걸 넘어서서 이유를 모르게 화가 나는 마음으로 바뀌거든요. 그건 상호 마찬가지예요. 실은.. 서로 똑같이 느끼고 있는 거죠.
ㅇㅇ님이 느끼시는 것을 ㅁㅁ도 똑같이 느끼게 돼요.

이 사람은 한 문단에서 무척이나 많은 “실은..”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사람은 진실을 밝히고자 애쓰는 사람일까 생각했다.
상대방이 나의 진실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느낄 때, 감정을 폭발시켜서 싸움이 날까 두려워서 회피하느라 말을 아낄 때, 숨겨둔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분노로 치환된다는 진실을 나에게 알려주고자 했다.

그가 아는 것은 진실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고립된 생각을 말할 때 그의 눈빛은 무척 커다란 호기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내 눈빛에 강하게 주목하며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눈빛을 받다 보면 내 말의 어딘가에서 논리에 맞지 않는 나만의 아집이 드러나 버렸다. 그래서 ‘이건 저만 느끼는 거겠지만..’ 이라고 덧붙일 수 밖에 없었다.

섭섭해.
기분나빠. 라는 말을 그대로 전달했을 때
저 사람이 과연 나에게 사과해줄까, 저 사람이 이 감정을 이해해줄까 의심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자리를 뜨거나 입을 다문다.

나의 고립된 생각,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저 해당당사자는 절대 내 맘을 모두 이해하지 못할거야’ 라는 고정관념이 많은 것을 변질시킨다.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조금이라도 더 맘을 드러내는 일이 문제해결의 시작일텐데, ‘실은’ 쉽지 않은 일이다.

2013.6.23.

날 미워하는 자 고마워요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이제 깨닫는다.
사람이 없을 때는 그 허기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도 깨닫는다.
내 주변에 모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참 인복이 많다고 생각했던 이유다.

내 주변엔 인품이 훌륭한 사람도 많고 독한 사람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 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세상은 나한테 쌀 한 톨 보태주지 않는다며 악에 받쳐 두 주먹을 꾹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휘청휘청 걸어가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 휘청대는 걸음으로 한참을 지난 뒤, 그래도 누군가 술 한 잔 따라주었고, 그래도 누군가 라면이라도 사주었다는 걸 뒤늦게 기억했다.

“세상에 참 좋은 사람이 많아, 내 주변은 다 그래, 그게 내가 만든 세상이거든, 내가 만드는 세상의 중심은 어찌됬건 나니까.” 라고 생각했던 건 얼마 전까지다. 이건, 드라마 에서 경이가 복수에게 “복수씨의 인생을 바꾸는 건 세상을 바꾸는 거예요” 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
얼마 전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물론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들 속에서 자라야 하는 게 맞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나를 윽박지르는 사람, 내 바닥을 보게 하는 구타유발자, 끝없이 나와 불화하고 나와 적이 되는 사람, 언제나 나에게 딴지를 걸고 시비를 거는 사람도, 사람이 온전한 인품을 갖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가득 채운 나만의 제국에서, 인간은 얼마나 오만방자 하기 쉬운가.

세상에서 나를 괴롭히는 그 누군가로 인해 인간은 성숙한다. 내 편보다 남의 편이 많아야 반성할 기회가 많아진다. 내 편으로 가득한 세상에선 바닥을 볼 일도, 성장을 할 필요도, 반성을 할 이유도, 사과를 하거나, 손해를 보거나, 베풀 이유도 없다.

어떤 엄마는 자기남편을 남편이라 부르지 않고 “내편”이라 부른다 했다. 그러나 오늘같은 날은. 남편처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저 남편인 게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늘 남의 편인 사람이 가족중에 있을 때, 그런 성장기를 거친 사람이 더 많은 자를 이해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겠다. 물론 누군가 나를 적대시 하는 것이 대해서 쉽게 배척하고 미워하기를 즐긴다면 콩알만큼의 깨우침도 없을 것이지만.

니체가 그랬다던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나를 가장 강하게 만든다고. 뭐 그런 맥락.

2013. 6. 19.

이천십삽년 유월 십일

생각해보니 아침나절 내 차선에 어린 고양이가 죽어 있었다. 순간 속도를 줄이고 더 밟지 않게 건너갔다. 내 뒤에 오던 차도 더 밟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고양이는 차도의 정 가운데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될 무렵 골목길에 세워둔 차의 틈새로 다 큰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무척 놀라 속도를 늦췄고 다행히 고양이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고양이를 지나치고 난 다음 안양시청 앞에서 술에 취한 게 빤해 보이는 남자가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다. 아크로타워 앞에서 유턴을 하던 차들이 남자를 피해 주저 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고양이 얘기를 쓰고 나니 어젯 밤 낙동강 하류를 휩쓸고 있다는 뉴트리아 얘기가 떠오른다. 고양이는 아무리 개체수가 늘어도 생태계를 교란시킨다는 얘기까지 나오진 않는다. 사실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가장 큰 주범은 인간이다.

내가 그런 인간이다.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보호에 앞장서고 싶지는 않다. 간혹 동물학대를 비난하는 글들을 보면, 이들이 과연 어떤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 싶을 때가 있다. 그들은 동물을 학대한 사람을 함무라비 법전보다 더 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욕을 퍼붓는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느껴지지 않고 동물사랑을 빙자한 – 그저 그 마음에 깊이 박힌 인간종에 대한 적대감만 느껴질 뿐이다.

밤이 깊어간다.
어두운 하늘엔 이불솜같은 구름이 가득하고 나는 조경업자가 돈을 받고 만든 인공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개와 함께 걷고 있다.

하루는 이렇게 지나고 어떤 생명은 길에서 사라지고 어떤 생명은 살아남았다.

운전을 하면 인생의 축소판을 걷는 것 같다고 말하던 사내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다.

오늘 나는 살아남았고 산 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 매일 죽은 자들의 이야기만 탐닉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한 자리에 있었고 나는 매일 그들을 찾았다. 모두 다 살아있을 때 했던 이야기들인데 나는 그들이 죽고 난 뒤 만났다.

매일 밤 죽은 자들의 도시를 헤매고 죽은 자들의 바다를 구경했다. 그들을 더 만나기 위해 산 자들을 외면했고 나의 생명도 점점 조악해졌다. 이제는 죽은 자들을 외면하고도 잠을 자곤 한다.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누가 먼저 세상에서 사라지는 지,
내 눈앞에서 없어지는 지 알 도리는 없다. 대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빨리 내가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라고 그들에게 말할 수 없다. 생명력이라는 건 누군가에게 끝없는 부러움이요, 채울 수 없는 욕망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 적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하루를 기억한 적 없다. 내일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루를 살기 위해 어제를 잊고 내일은 미뤄둔 채, 내일은 언제나 내일이고, 어제는 언제나 어제이므로, 그렇게 하루만 살아온 삶이 있다.

단 하루, 오늘만 살기 위해, 오늘만 산다면, 아침나절 죽은 어린 고양이따위는 잊어야 했을 것이다.
하루를 기억할 수 없는 삶은 얼마나 고단한가. 그 삶은 모든 질문에 한 가지로 답한다. 없다. 라고.
기억도, 추억도, 행복도, 슬픔도 없다고. 그러나, 힘들었다고.
기억하지 못하는 삶은, 힘겹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천십삽년 유월 십일을 기억하며

인생은 한끗차이

밤.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테니스장에는 조명이 눈부시다.

나는 개를 끌고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돈다.

지하주차장은 모든 아파트의 현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사람이 걸어나올 길은 없다.

차만 다닐 수 있는 주차장 입구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온다.

저 남자는 왜 저 길로 올라오는 것일까.

가끔 이 보다 더 늦은 시간, 밤 11시가 넘어가 혼자 단지를 걷던 남자가 출구를 묻는 경우가 있다. 대리기사들이다.

그들에게 출구를 알려주고 돌아서며 생각한다. 인생은 한 끗차이.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나는 저 사람에게 출구를 알려주고, 저 사람은 나에게 출구를 묻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서 헤어졌던가.

 

꽉 막힌 양재대로에서 귤을 파는 사내가 있다.

여름이 되면 참외를 판다.

그 전에는 뻥튀기를 팔거나 전자모기채를 파는 사내들도 있었다.

그 때도 생각했다. 인생은 한 끗차이.

우리는 어디서 헤어져서 나는 차 안에서 저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랬다. 주유소에서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면서 기름총을 꽂고 휴지를 갖다주고 영수증을 끊을 때 아가씨 이거 먹어. 하면서 차 안에 있던 귤이나 사탕을 주고 가던 사내들이 있었다.

큰 아버지가 근무했던 신문사의 회사 차량을 보고 큰아버지의 이름을 물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를 어떻게 아느냐 물었다. 나는 그저 먼 친척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 때 나에겐 큰아버지의 명예보다 비빌 언덕, 나의 혈연이, 정확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안도감, 혹은 한 달에 30만원쯤의 돈이 필요했다. 그 때 큰아버지에게 그런 걸 받기 위해 찾아가지 못했다. 인생은 한 끗차이. 그 때 나는 기름 쩐 내나는 옷을 어찌하지 못하고 손을 열 번씩 씻고 저녁마다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인데 지우고 싶지는 않다.

비 오는 날 버스 정류장에서 과격한 차가 흙탕물을 튀기고 지나가 단 한 벌인 정장바지가 홀딱 젖어버린 순간과, 동생은 굶고 있을텐데 이걸 과연 먹어도 되나 한 참을 망설인 끝에 혼자 설렁탕을 사먹었던 기억과, Shut the fuck up 이라고 소리지르던 고객님에 대해서, 잊지 않으려 한다. 과거를 언제나 끌어안고 가고 싶은 것은 인생은 한끗차이라는 걸 잊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누군가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기 위해서, 지하주차장에서 높은 구두를 신고 억지 웃음을 짓는 언니들에게 사탕 하나 나눠주기 위해서, 나에게 밥을 가져다 주는 사람에게 욕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고 싶다.

 

인생은 한 끗차이.

 

2013. 6. 1.

낡고 불안한 버스 – 석달간의 공교육 소회

1학년 아이의 알림장 앞에 칭찬스티커 붙이기가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칭찬받을 일이 있으면 붙여주는 스티커이다. 이런 제도는 이미 보편화 된 지 오래되었고 그에 대한 폐해 및 부작용으로 인해 반대의 목소리도 크다.

내 아이는 6학년때부터 태권도에 다녔는데 그 때 처음 칭찬스티커의 존재를 알았다. 스티커를 적게 받아온 날은 울고 불고 난리까지 쳐서 내가 이노무 스티커를 다 갖다 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6살짜리에게도, 나는 가끔 그런 엄마다.

학교를 들어가고 별 다를 일 없는 것처럼 매일 매일 아침 일찍 혼자 학교를 가게 되고 집에 와서 간혹 엄마랑 시간이 안 맞아 혼자 있게 되도 별 탈 없이 지내는 아이는 숙제를 해야 하는 책이나 공책을 안 가져오고 알림장도 다 적어오지 못하곤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마냥 재미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때는 매일 국어 10칸짜리 쓰기 공책에 네 바닥씩 그 날 배운 것을 써가는 숙제를 했다. 나중에는 숙제가 빨라지면서 글씨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어른들은 그런 사소한 것으로 걱정하지만 지금 어디서 악필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글씨체가 독특한 편이긴 하지만 그건 초등학교때와는 무관하다고 본다) 숙제를 못하면 학교가서 하라고도 하고 그래 뭐 못할 수도 있지 라고 넘겼다. 알림장쓰는 게 어렵다고 호소할 때도 야 임마 엄마 때는 더 했어. 라는 말을 삼키며 어어 그러니 하고 친절한 척을 했다. 다른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학습지 선생님이나 다른 예체능 수업을 듣거나 학원을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아이는 방과후 수업을 죄다 신청해놓고 태권도를 하나 다니는 것으로도 시간이 빠듯하다. 본인이 고른 방과후 수업이 월/화/수/목으로 꽉 차서 석달을 지내더니 이번에는 일주일에 두 번만 하겠다고 스스로 몇 개를 내려놓았다. 방과후 수업은 유치원때부터 본인이 골라 결정해왔다. 1학년이지만 학교에서 무상급식을 해주기 때문에 (경기도교육청) 밥을 먹고 나면 12시 40분에서 1시쯤이 되고, 방과후 수업을 하는 날은 2-3시에 끝나는데 일주일에 두 번은 5교시도 있다. 학원을 별도로 안 다녀도 하루 일과가 4시나 5시에 끝나는 생활이 반복된다. 꼴랑 태권도 하나 다니는데 이런 식이라 아이는 늘 하루가 짧다고 투덜댄다.

얼마 전에는 알림장을 4일째 학교에서 가져오지 않으면서 이런 저런 가정통신문이나 종합장에 알림장의 내용을 적어왔다. 알림장의 문구는 맘에 들지 않는다. 한자어가 너무 많이 섞여 있는게 불만인데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으니 말하지 않는다. 알림장을 다 쓴거냐 잃어버린거냐 물으니 잘 모르겠다기에 그럼 새로 하나 만들던가 해야지 이게 뭐냐 하니 알림장 앞에 칭찬스티커가 붙어 있기 때문에 꼭 찾아야 한다는거다. 그럼 니가 요령껏 알아서 찾아오라 하니 그 다음날 바로 찾아왔다.

아이의 알림장에 스티커 개수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러나 최근 엄마들을 만나 얘기를 할 때마다 이 스티커 이야기가 나온다.

담임선생님의 스티커 부여기준이 모호하고 붙여서 개수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압수를 당하기도 한다는거다. 하루에 2개, 5개를 떼어가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래 뭐 경쟁하는 사회니까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며 웃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엄마들은 꽤나 심각했다. 아이들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였다. 그 얘기를 전하는 엄마들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듯 했다.

오늘에서야 알림장 앞에 붙어 있는 스티커판을 자세히 보니 100개의 스티커까지 붙을 수 있고 우리 아들의 스티커는 스물 여섯 개다. 가장 개수가 많은 아이가 누구인지도 엄마들을 통해 들었는데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내가 아역탤런트 제의 받은 적 없냐고 물을 정도) 여자아이인데 그 아이는 이미 70개를 넘었다는거다. 그래서 그 아이의 엄마는 또 주변의 질투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하단다. 엄마들의 불만은 적게 붙여 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시 떼어가는 박탈감에 초점이 맞춰진 듯 했다.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아이들이 예민해지고 경쟁에 몰입되는 것에 우려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이라 판단했다.

엄마들과 참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와 스티커를 보고 아이에게 물었다.

“너도 이거 스티커 신경쓰여?”

“어!”

“신경쓰지 마.”

“신경쓸 거야.”

“그거 중요해?”

“어. 나만 적어.”

“아까 ㅇㅇㅇ 엄마가 걔는 너보다 더 적다던데?”

“ㅎㅅㅈ 하고 ㅇㅊㅎ 하고 나하고 제일 적은데, ㅎㅅㅈ은 스무개는 넘고 ㅇㅊㅎ은 스무개도 안돼. 나는 스무개는 넘었어.”

“그래? 니네 셋이 제일 스티커 적게 받았구나?” 하고 나는 웃었다.

아이는 입을 삐쭉 내밀고 금방 씰쭉씰쭉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는 아이에게 다시 가서 말했다.

“너 이거 스티커 신경쓸 거야?”

“어. 신경쓸 거야. 나도 스티커 많이 받고 싶어.”

“그래? 그럼 너는 신경써. 그치만 엄마는 신경 안 쓸 거야. 엄마는 너 스티커 하나도 못 받아와도 상관없어. 알겠지?”

“알았어!” 아이는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생각해보니 금요일 숙제가 뭔지도 안 물어봤다.

그래 오늘 나왔던 또 다른 한 가지 학부형들의 불만은 숙제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알림장 내용이 너무 길다. 라는 것이었다. 반마다 담임선생님의 재량에 따라 운영하는 학습내용이 다른데, 우리 반 선생님은 받아쓰기도 시키고 수학수행평가도 했다. 쪽지 시험 같은 걸 본 모양이다. 나는 그 내용을 본 적이 없는데 아이가 받아쓰기 공책을 학교에서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왜 안 가져오냐고 닦달하지도 않았다. 물론 숙제에 “받아쓰기 틀린 거 다섯 번씩 써 오기” 라는 항목이 있어 이거 숙제 했느냐고 물으면 한 개 틀려서 학교에서 해왔다 라거나 하나도 안 틀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이 아이는 띄어쓰기가 문제가 되지 교과서의 맞춤법은 그럭저럭 해결이 되고 있는 편이다.

선생님이 내주는 숙제는 국어책의 내용을 3번 써오기 정도인데 이런 숙제는 다 해도 두 바닥을 넘지 않는다. 수학의 경우 덧셈식 뺄셈식을 만들어 오기 정도인데 이런 경우는 옆에서 도와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엄마들이 이 정도 숙제에 불만을 갖는 이유는 어차피 사교육으로 다 돌리고 있지 않느냐는거다. 사교육 숙제도 치이는데 공교육 숙제까지 해야 하니 골치가 아프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보다 더 들어봐야 할 문제는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8시쯤 되는데 아이들은 9시나 10시에 자는 게 맞다. 8시에 돌아와 씻지도 못하고 아이 숙제를 봐주다 보면 글씨가 느려 시간이 오래 걸리니 아이가 숙제를 마치고 나면 11시에 자는 경우가 많다는거다. 때로는 국어 세 번쓰기, 두 번읽고 싸인받기, 수학숙제 몇 페이지 해오기까지 겹치면 2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어떤 엄마들은 엄마가 없더라도 일단 너 혼자 할 수 있는 쓰기 숙제 같은 경우는 해야한다고 길을 들이고 있고, 여전히 대책 없이 불만을 갖는 엄마들도 있다. 알림장도 다 쓰지 못하면 학급홈페이지를 보고 다 보충을 해가야 하는데 알림장이 5번 6번까지 항목이 있는 경우 아이들이 시간 내에 쓰기가 어렵기도 하고 낱말도 어려운 게 많아서 숙제에 알림장까지 체크하기가 힘들다는 거다.

잘 따져보면 아이들이 혼자서 숙제를 해내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집에서 조부모가 육아를 책임지고 있는 직장엄마들이나 전업주부들도 애 하나만 보고 있는 게 아닌 경우가 많아 앉혀놓고 아이의 스케줄을 따라 숙제를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그렇다면 모두 사교육을 끊으면 되잖아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지난 번 학교 상담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교직생활 20년을 넘어가면서 최근들어서는 학부형들의 힘이 너무 세지고 여러가지 감시를 받는 기분이 들어, 열정을 다 펼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고백아닌 고백을 하셨다. 나도 내 딴에는 위축되어 있는거지. 라고 혼자 읖조리듯 한 그 말이, 20년 넘게 한 직업에서 선생이라는 사명감으로 평교사로 살아온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생각한 적이 있다. 적어도 큰 폭력사건이 아닌 이상 최대한 교권은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으나 이런 저런 반발들과 개인들의 의견을 접할 때에는 내 개인의 의견은 되도록 뒤로 미뤄놓는 편이 낫다고 깨닫는 중이다.

엄마들에게 사교육의 불필요성에 대해서 다시 강조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엄마들은 늘 아이들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실제로도 아이들이 못 해내기 때문에 다른 방편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내 아이가 쳐지기 때문이라고 하는 엄마들 앞에서 –  집에 와서 더 놀기 위해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숙제를 반절이상 해 오거나 공책을 안 가져가면 학교에서 냅다 아침에 급하게 하기도 하고 받아쓰기도 잘 틀리지 않아 추가되는 숙제가 없고 쓰기 숙제는 하라고 시켜놓으면 알아서 하고 있는 아이를 둔 내가,  다른 엄마들에게 사교육을 끊으라고 말하는 건 당신 자식은 알아서 하니 걱정이 없겠지 라는 퉁박을 듣는 것밖에 안된다.

게다가 엄마들이 불만을 갖는 이유의 또 다른 것은 다른 반 알림장과의 비교인데, 다른 반 알림장은 1, 2번에서 끝이 나고 숙제는 거의 없으며 알림장의 내용이 “감기 조심하기” 정도라는 것이다. 아름답지 않냐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숙제는 기본적인 학습의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집에 와서 그 날 배운 것을 돌아보는 의미가 숙제이고 공부하는 힘을 기르는 것인데 모두가 사교육을 의지하는 상황에서 나혼자 잘났다고 숙제가 많긴 뭐가 많냐고 주장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는거다.

한 때는 사교육에 의존하는 성향들을 비난한 적도 있으나 그런 비난과 비판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사교육이 공교육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해소 하는 데 사회적 기능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등교육, 즉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학교는 점점 더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데 학교와 교육청간의 어떤 시스템이 작용하는지는 모르지만 학교끼리 경쟁이 붙어 예산을 확보해야 하고 아이들은 실적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는 것을 본다. 실업계학교는 취업률을 높여 실적을 만들어야 무슨 무슨 학교로 지정이 되어 예산과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인문계는 당연히 대학진학률을 높여야 한다. 학교와 교사가 경쟁력이 있어야 사교육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풍토에서 전쟁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취업률을 만들어야 하는 학교들은 아이들에게 자퇴를 권유하는 경우가 있어 인근의 정보산업고에서 1학년 자퇴율이 급증하고 그 아이들은 모두 탈학교청소년이 되어 이런 저런 알바를 하며 견딘다. 자퇴를 했다가 다시 복학을 하라는 권유를 받은 아이들은 복학을 했다가 다시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학교를 떠나는 경우도 보았다. 20년전 내가 학교를 다닐 때도 학생의 숫자는 대학진학율을 증대시키기 위한 자료의 하나가 되어 아이들의 적성따위 고민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대학에 쑤셔 넣는 게 학교의 기능이었다. 이미 공교육이 자빠지기 시작한 건 20년전, 어쩌면 전교조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89년 그 때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전엔 사교육을 엄격하게 금지했기 때문에 그마나 공교육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지 공교육이 잘 되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있었던 건 아니다. 어떤 학교는 시에서 지원하는 특정 프로그램에 선정이 되어 돈폭탄과 다름없는 예산을 지원받게 되고 어떤 학교는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선정이 된다. 그 외 다른 공기관의 지정학교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여러 가지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프로그램에 지정이 되어 학교에 각종 프로그램이 미친 듯이 쏟아지는데 인력 확충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정해진 교사들로 받아낸 예산을 활용하기 위해 고군분투 해야 하니 교사는 아이들의 교실보다 잡무와 프로그램 처리에 대한 서류를 쳐내기에 바쁘다. 프로그램 지정 학교가 되면 가정통신문이 하루에 무려 열장이 나가는 경우도 있고 그 중에 한 두장 회신을 받아야 하는 것은 교사들의 책상위에 마감날까지 회신이 돌아오지 않은 아이들의 것을 기다리는 통신문들이 쌓이고 쌓이는 것이다.

교사들이 미처 해소하지 못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으니 이제 학부형들이 무급으로 동원된다. 학교의 예산과 결제 심의를 맡은 학교운영위원회부터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녹색어머니회까지 초등학교 학부형들이 동원되는 경우다. 때로는 학교시험의 공정성을 꾀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미명하에 중고등학교에서는 시험감독관을 맡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시행되는 여러 가지 무급 학부형 동원에는 교통정리를 하는 녹색어머니회, 학교내 보안과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마미캅, 보람교사, 준비물 정리, 급식모니터링, 도서사서, 각 반의 장을 맡은 연락책의 엄마들, 지역 예절관에 가서 연수까지 받아야 하는 지역사회어머니회, 컵스카우트 걸스카우트 대표, 아람단 대표, 전교어린이회의 엄마들 조직이 있고, 2013년도부터는 경기도의회 조례에 의거한 학부모회의가 별도로 구성되었다. 그 외 자원봉사로 진로코칭교육등에 독특한 직업을 가진 부모들이 동원되거나 일주일에 한번씩 학부모가 참여하여 각 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들은 특별히 운영된다. 각 반의 아이들은 이제 30명이 넘지 않는데 20명에서 27명에 이르는 엄마들이 이 역할을 모두 분담해야 한다.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은 대부분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니 전업주부이거나 출퇴근이 자유로운 엄마들이 하나씩 맡아 일을 하게 되어 있고 그러나 보면 3-4개까지 겹치기 마련이다. 학교일을 많이 맡은 엄마들은 매일 출퇴근도장을 찍는 만큼 들락거리게 되기도 한다. 자기가 잘나서 나서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보다, 선생님이 부탁하니 하는 경우도 있고 넓은 마음으로 돕고자 하는 봉사심에서 우러나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에 안양과천교육지원청 내에서 새로 법적효력을 가진 기구가 된 각 학교 학부모회의의 대표들이 모였는데 하나로 모여진 의견은 학부모회의 예산을 확충하는 문제였다. 학교에서 별도의 기부금을 받지 않으며 그런 절차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학교에 배정된 예산을 가지고 학부모회를 운영해야 하는데 무슨 일을 할라치면 예산은 확보되지 않았고 받아낼 절차는 복잡하고 하다못해 의결할 일이 있어 모여도 다과값도 준비되지 않아 누군가 자꾸 사비를 털어내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처음엔 왜 자꾸 예산얘기들을 하나 의문이 생겼으나 학부모회의는 학교의 교육사업을 지원하거나 새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도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최소한의 경비는 필요한 것이 맞는 듯도 했다.

내 옆에 앉았던 안양의 모 초등학교 학부모회장은 이미 다년간의 운영위원회와 회장경력으로 학교의 학부모참여도를 높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은 일절 학교에서 비용을 걷어서는 안되고 (운영위원회는 통상적으로 학교를 위해 쓰든 자기네 식사를 위해 쓰든 아무튼 걷는 게 일반적이다) 학부모를 통원한 과다한 사업을 하지 않는 것이 참여도를 높이는 것이라 조언해주었다. 그 쪽은 적당히 엄마들이 부담없이 참여하는 선에서 모든 사업을 잡기 때문에 참여도가 상당히 높고 학교측의 협조도 잘 이루어진다고 전했다.

문제는 이런 학부모회가 학교에 어떤 행사를 제안했을 경우, 결국 처리해야 하는 것은 교사들에게 분배된다는 점이다. 이번 학년도에 학부모회의 임원직을 자원해서 맡았는데 내 목적은 학교라는 곳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동향을 살피고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내가 뭔가 제안을 던지는 순간 누군가에게 업무가 되어버린다는 일이 많은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아주 소소하게, 1학년 아이의 알림장 앞에 붙은 칭찬스티커의 문제부터, 그로 인해 불거져 나오는 불만들을 처리할 기구가 없다. 학부형들과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대체적으로 하나로 일치하는데 학교는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학교는 학교대로 나아가고 학부형과 아이들은 그 나름대로 학교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학교라는 곳에 다시 발을 들이고 깊은 면을 보기 시작한 지 이제 몇 달.

얼마 되지 않는 이 시점에 느끼는 것은 학교가 계속해서 위를 보고 걸어가면 이대로 공교육은 절대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협감마저 들지만, 아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는 혁명과 혁신자체가 생존에 위협이 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으므로.

망가진 채로 망가진 시스템에서 모두가 허덕거리며 굴러가겠지.

고장나고 기름 떨어진 오래된 버스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으로 꾸역꾸역 산을 넘어가는 느낌. 그게 지금의 학교다. 그 버스에는 불안한 학부형들과, 지친 교사들과, 매일 울고 싶은 아이들이 미어터지게 타고 있다.

2013.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