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몰랐던 것

 

2003년 여름.

중국의 서쪽을 가겠다고 봄부터 마음을 다졌다.

여름방학은 7월과 8월이었다.

7월 한 달은 한국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습학원에 나가 국어와 논술을 가르쳤다. 한 달 생활비가 훌쩍 넘는 월급을 받아 챙겼다. 방학 특강을 맡는 동안 8월엔 여행을 갈꺼라고 호언장담해둔 터였다. 원장은 나를 잡았지만 절대 여행계획이 변경되는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잘한 일이다. 2003년 여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서안을 거쳐 가욕관으로 가 만리장성의 끝을 본 뒤, 둔황에 가서 막고굴을 보고 티벳 아래쪽 감숙성과 사천성을 돌아 성도를 찍고 상해로 돌아오기로 했다. 당시엔 한국인들 중 이 부근을 여행한 사람이 많지 않았고 영어로 된 배낭여행자들의 싸이트를 몇 달동안 뒤졌다. 그 때 온라인으로 알던 한 남자가 이 코스를 다녀온 영향도 컸다. 사진을 잘 찍는 사내였다.

서안까지 가는 데 기차로 18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산사태로 철로가 유실되어 6시간 연착되었다. 서안에서 둔황까지 24시간이 걸렸다. 둔황역에 내리니 밤 12시였다. 자작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사제택시를 타고 1시간 넘게 갔다. 둔황역과 둔황시내는 그렇게 멀었다. 명사산에 올라 모래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느끼고 막고굴을 돌아 나왔다. 하미과를 먹었고 가욕관을 갔다. 만리장성의 끝에 서서 말도 안되는 지평선을 봤다. 하늘은 음침했다. 인터넷으로 연락해 함께 여행을 하겠다고 북경에서 온 여자와 동행을 했다. 여행 중 살을 빼겠다며 식사를 굶는 사람이었다. 견딜 수 없었다. 두려움에 벌벌떨던 그 사람은 란저우에서 비보를 듣고 한국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이틀이상 묵으면 자살이라던 공기오염이 심한 란저우에서 라면을 하나 먹고 맛대가리 없는 커피를 나눠마시고 헤어졌다. 10시간이 걸린다는 샤허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샤허를 가는 길은 내가 여태 가본 중 가장 험한 길이었다. 그보다 더 험한 길은 황룡에서 성도까지 돌아오는 길이었다.

샤허로 가는 길에 회족들이 보였다. 운전기사와 승무원은 승객을 기다리게 하고 회족식당에 들어가 국수를 사 먹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고 싶을까봐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샤허는 온 마을이 사찰로 이루어진 곳이다. 라마승들이 가득했다. 그 사찰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을 위한 식당과 여인숙, 인터넷 까페와 조잡한 물건을 파는 잡화상, 그리고 터미널. 그게 그 마을의 전부였다. 거기부터 시작이었다.

티벳 사람들이 사는 곳.

샤허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7시간짜리 버스를 탔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랑무스. 郞木寺. 원래 그 쪽에서는 랑무스의 우변이 없는 글자를 쓴다. 랑무스는 마을이 卍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슬람 사원도 있지만 주민의 대부분이 티벳불교도이며, 라마승들이 가득하다. 가난한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승려가 되고, 부모와 헤어져 종교인이 된다.

다른 곳으로 나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 아침 7시에 있었고, 도착하는 버스는 저녁에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북경에서 온 내분비과 의사였다. 그녀와 랑무스에서 숙소를 같이 쓰기로 했다.

날씨는 내내 흐렸다.

해발 3천미터가 넘는 곳이었다.

샤허부터가 고산지대였는데 나는 으슬으슬 몸살기운만 돌았다.

DSCN3611 사본

 

랑무스는 천장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장은 사람이 죽으면 잘게 쪼개 독수리에게 먹이로 바치는 장례형태를 말한다. 조장이라고도 한다.

랑무스에 도착한 이튿 날 아침, 나는 북경여의사와 천장터로 향했다.

그녀가 오늘은 장례가 없다더라고 얘기했다. 나는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조금 놀랐다. 누군가 죽어서 독수리의 밥이 되고, 나의 구경거리가 되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개가 가득한 천장터에 힘겹게 올랐다. 천장터에는 신선한, 공기가 있었을 뿐이다. 바닥을 이리 저리 둘러보던 나는 사람의 뼛조각과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건드리진 않았다. 이럴 때마다 지나치게 냉담해지는 것이 나인지라, 사람이 죽었고, 여기서 장례가 있었고, 독수리도 안 먹는 게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내려왔다.

별 게 없다 생각한 우리는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오는 길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북경 여의사가 들어가볼까? 하더니 노크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음식을 해먹고 몸을 누이고 난로를 피울 정도의 공간에 한 라마승이 살고 있었다. 비구니였다. 여자는 바느질을 하다 말고 우리를 맞았다. 매우 쑥스러워했지만 내 동행이 중국인이기도 하고 우리 둘 다 여자인지라 큰 경계심은 없어보였다. 비구니는 우리에게 차를 내주었다.

 

샤허와 랑무스, 이 두 곳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마니차를 돌리며 돌탑을 돌거나 오체투지를 했다. 승려가 가득한 마을에서 늘 불경공부를 하는 소리가 들렸고 승려들은 승복을 입고 법당 근처에서 공부를 하거나 축구도 했다. 샤허에는 어린 동자승들이 들락거리는 작은 극장이 있었는데 30인치짜리 브라운관 티비를 높이 걸어놓고 푼돈을 입장료로 내면 지직거리는 화질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가끔 허섭한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사람들도 있었고 야크떼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침엔 양떼무리가 마을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갔다. 여인숙도 있었고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까페와 식당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니, 내 눈으로 봤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무 경제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누군가 농사를 짓고 먹을 것을 만들어 올테지만 그들은 많이 먹는 것 같지도 않았고 빨래를 자주 하거나 돈을 버는 사람도 매우 적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려이거나, 승려가 아니면 그저 마니차를 돌리며 길을 걸을 뿐이었다. 평생의 목적이 라사에 가는 것이라 했던가. 곳곳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밥을, 구걸해서 먹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르게 아무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거였다.

 

돈을 벌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라사에 가겠다는 꿈을 하나 가지고 평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적게 먹고 적게 일하며 본향을 꿈꾸는 사람들의 삶은 낯설 뿐 아니라, 당혹스러웠다.

 

뭐지.

 

뭐지?

 

아무 것도 안 해도, 괜찮은 건가?

 

오두막에서 만난 그 비구니는 길어진 손톱을 자르거나, 길어진 머리를 자르고 차를 끓여마시고 법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하루에 두 번씩 있는 경연에 참여해 승려들은 박수를 치며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해가 지면 누군가 언덕에 앉아 기도를 했다. 동굴 속에서 하루 종일 기도를 하던 여자가 쑥 나오기도 했다. 주인이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는 야크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흰 야크는 신성하게 여겨진다며 이리저리 꽃을 주렁주렁 달고 관광객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는 몰랐다.

그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라는 걸.

산다는 것은 애써서 뭔가를 만들고 먹고 욕심을 채우고 그 욕심을 버리고 누군가와 싸우고 사랑하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싸우고 뺏고 뺏기며 살아가는데, 그들은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죽으면 뼈를 잘라 새에게 주고 하늘로 돌아가라 빈다. 그 일을 마을 사람들이 하고 누구나 그렇게 하늘로 돌아간다. 조장에 대해서는 척박한 티벳의 환경으로는 화장도 매장도 어렵기 때문에 선택한 생존법일 거라 하기도 한다.

이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성지에 가려고 하는 것은 다음 생에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 생을 살면서 다음 생을 기다린다. 어찌 보면 이 생은 살지 않고 소망만 하며 다음 생을 미리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번 생은 오체투지를 하고 다음 생엔 또 무엇을 할 것인가. 다음 생에도 더 좋은 생을 위해 또 오체투지를 할 것이다. 이들은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이승을 사는 것인지 저승을 사는 것인지, 이번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다음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한 삶이 있었다. 과연 산다는 게 무엇이며, 죽는다는 건 무엇인가.

 

12년이나 지나 생각해보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문명이 진입해 랑무스의 사진을 검색해보면 각종 지프차가 여기저기 주차된 모습이 보이지만, 그래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오체투지를 하며 라사로 가겠지. 다음 생을 위해서. 그들은 이번 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라사로 갈 수 있으니.

 

언제 썼는지 기억이 안나는 글을 C드라이브에서 발견하여 옮긴다.

아마도 2015년 초에 적은 듯 하다.

비둘기 두 마리 

사람들이 북적이는 어느 지하철역 길거리가 훤히 보이는 커피집에 앉았다. 

사람들이 오가고 차가 지나가는 좁은 골목의 입구 비둘기 몇 마리가 좀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먹고 있다. 

일행은 계속 비둘기를 바라보며 초조해했다. 좀처럼 비키지 않는 비둘기는 혐오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지나는 차마다 비둘기때문에 속도를 늦추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종이를 놓고 펜을 하나씩 들고 중요한 계획을 서로 조정하는 중이었다. 비둘기를 눈여겨보던 일행이 탄식을 뱉었다. 

“엇. 아… 저거 뭐야.”
좁은 골목에 깃털이 마구 날렸고 결국 비둘기 두 마리가 납작해졌다. 
오전엔 4년 반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의 수기를 읽었다. 독방에 살던 징역수는 비둘기 둥지를 만들고 비둘기 알을 기다리고 알에서 깬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길바닥에 납작하게 깔릴 비둘기 두 마리는 아직 있는가, 이미 없는가. 

세상은 복잡하게 움직이고 우리의 수명은 조금씩 줄어드는데 비둘기라도 애타게 기다리던 간절함은 여기에 있을까, 거기에 있을까. 
올겨울은 유난히 쓸쓸하게 온다. 

누군가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술에 취해 졸고 싶은 밤이다.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인덕원역에서.

어떤 영결식이 있던 날 

영결식이 2시부터 엄수라 했다. 1시 30분쯤 서울대병원에서 운구차가 출발한 모양이다. 광화문 부근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신호가 몇 번이나 바뀐 뒤에 광화문을 겨우 지났다. 

남산터널로 올라가는 을지로를 지나다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는 다마스 때문에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신호에 다시 걸렸다. 붉은 신호등 아래로 다마스보다 커다란 종이짐을 실은 리어카가 두 대나 지나갔다. 눈이 내렸고 리어카위의 박스는 젖을 것이다. Kg으로 계산을 할텐데 젖은 박스는 어떻게 무게를 달까. 

리어카를 끌고 가는 남자들의 늙은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라디오에서는 영결식을 중계하고 있었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온 몸으로 민주화를 이룩해 낸 전직 대통령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운구차는 호위를 받으며 커다란 길의 교통을 통제하고 거침없이 달렸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권력자도 그러했듯이 변절을 했거나 배신을 했거나 권력자로 마감하면 그 뿐이다. 

권력자의 장례는 국가가 치르고 국민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당연한 듯 그들을 애도한다. 

당연히 받을만한 일이 존재하는가. 

몇 년전, 사진 한 장 제대로 갖지 못한 노인들의 영정사진을 찍어 드리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왜 그런 꿈을 가졌는지 알 수 없으나 오늘에서야 비로소 어느 단체를 통해 무의탁 독거노인이며 기초생활수급자인 분들의 영정사진을 찍었다. 찍기 싫은데 찍어야겠다고 한 분의 표정은 두려움에 가득찼고 관속에 바카스를 넣어달라던 어르신은 옷을 한 벌 더 챙겨와 환하게 웃었다. 

그 중에 건강이 여의치 않아 다른 일은 못하고 야간에 재활용품을 수거해 생계를 이어나가는 이가 있다. 리어카가 지나갈 때 그 사람을 떠올렸다. 

자기 사람을 위해, 자기 인생을 위해, 자기 밥 한 그릇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는 인생도 있나. 

사기를 치고 구걸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몸을 팔아도, 타인의 밥벌이에 기생하며 남의 등 처먹고 사는 인간도 그 자신으로써는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달리 다른 방도가 없거나,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을 때, 세계는 점점 좁아져 북극바다에 녹아가는 얼음판 만한 세상 위에서 오돌오돌 떨며 버티는 것이다. 

눈이 퍼붓고 군사독재에 항거했고 결국 권력자로 기억될 한 사람이 떠난 날, 나는 텅 빈 빈소조차 갖지 못할 뻔한 사람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알량하게도 누군가의 불행을 딛고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어떤 핑계를 찾아서라도 오랫동안 울고 싶은 날이다. 

간간히 햇빛이 드나들던 하늘이 어둑해진다. 

내가 말을 하는 모든 이유는 누군가와 따뜻하게 마주보며 웃고 싶어서다. 그건 나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불행도 그러하리라. 

2015년 11월 26일. 

어떤 영결식날의 소회.

전통 상장례에 관하여 – 강의록

전통 상장례에 관하여

 

강의 윤여빈(경기문화재단 생활문화팀 전통의례 고증 전문가, 前 성균관 의례부장

정리 이하나

  • 들어가는 말

하늘의 도(道)는 옳으냐 그르냐 天道是非也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이다. 이 중, 일반적으로 본기와 열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본기(本紀)는 천자(天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평민이 두 사람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공자이다. 포의(布衣)입은 평민이지만 모든 왕의 스승이 되었다 하여 본기에 수록되었고, 초패왕 항우(項羽)는 전쟁을 할 때 기습전을 하지 않고 정공법을 사용했다 하여 천자의 반열에 올랐다. 본기의 기본정신은 포폄(褒貶)이다. 포폄은 춘추전국시대의 정신으로 볼 수 있다.

열전(列傳)은 총 70편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는 백이(伯夷)숙제(叔弟)의 이야기이고, 마지막은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의 자서전이다. 맨 마지막 태사공 사마천에는 자신이 왜 대대로 역사를 공부하고 궁형을 당해 비루한 처지가 되었는지 나타나있고 사실상 마지막 편과 다름없는 제 69편에는 화식(貨殖)열전(列傳), 화(貨)는 돈을 말하고 식(殖)은 불어난다는 뜻으로 재산을 불리는 법, 돈을 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 69편의 주제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뭐냐고 묻는다. 강남의 상인이 사막을 뚫고 가서 물건을 사 나르고, 강북의 물건이 남쪽까지 가 닿고 바다를 건너고 험한 길을 넘어 물건이 유통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이익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현시대에도 와 닿는 이야기다.

열전의 첫 이야기인 백이숙제(伯夷叔弟)편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중략)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행동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

사마천의 이 질문은 전통상장례와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화두가 된다.

  • 의례의 기본

프랑스의 배우 알랑 드롱은 전세계 최고의 미남자로 손꼽혔다. 그의 전성기때 프랑스정부에서는 프랑스의 음식문화를 해외에 홍보하고자 그를 모델로 영상을 촬영했다. 완성된 영상은 수차례의 정부관료들의 회의를 거쳐 세상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1935년생인 알랑 드롱은 17세에 알제리에 군인으로 파병되었고 세계 각지를 방랑하다 파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첫 영화는 1957년이었고,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것은 1960년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였다. 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얼굴을 가진 그의 개인사에는 품위가 깃들 겨를이 없없다. 그가 프랑스 음식을 먹는 장면에는 외형의 조형미로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품위는 이렇듯 하루아침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살아온 역사가 그 사람의 품위를 결정지을 수 있다. 전통의례의 기본은 바로 이 품위에 있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예비를 할 수 있으나, 인간이 죽는 것은 예비를 할 수 없다. 선한 인간이나 악한 인간이다, 부귀영화를 막론하고 모두 다 죽는다. 인간의 끝은 동일하다. 그러나 죽음의 품격은 인간마다 다르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며,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죽을 때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인간이 단 한 번, 처음으로 겪는 것이 바로 이 죽음이다.

노련한 장의사들은 주검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추정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일생을 의식보다 더 많이 기억한다. 삶의 흔적은 고스란히 몸에 남는다. 이 사람의 마지막 살아있는 모습이 평화로웠는지 아닌지도 주검이 말해준다.

전통장례에 관해서는 유교에 입각하여 기술한다.

기본적으로 유교에서는 영혼을 믿지 않고 사자의 의식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유교에서는 신이 있다는 걸 믿지 않고 기록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유교는 철저히 인본주의다.

품위는 인간이 스스로 충분히 가꿀 수 있다. 어느 영화배우에게 여태 같이 일한 여배우 중 최고의 미인이 누구냐 물으니, 그가 말하길 진선미(眞善美)를 뛰어넘는 것은 귀(貴)라고 했다. 위에 말한 알랑드롱처럼 눈으로 보는 조형미를 넘는 품위를 바로 귀(貴)라고 표현한 것이다.

백범 김구선생은 젊은 시절 동학운동에 투신하였다가 동주 태화산 나복사로 피난을 갔다. 은신중에 운명에 관한 공부를 하는데 자기 얼굴은 아무리 뜯어봐도 도둑의 상이었다. 그 때 그가 깨달은 공부는 관상 좋은 것보다 몸 좋은 게 좋고, 몸 좋은 것보다 심상(心相)좋은 게 최고라는 거였다. 관상(觀相)은 불여심상(不如心相)이다. 도둑의 상이었던 김구의 얼굴은 해방 후 환국하기 전 평범한 한국인의 얼굴이 되었고 오히려 그 얼굴에 기품이 묻어났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수양을 하면 사람의 얼굴도 변한다는 것이다. 타고난 걸 고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자각을 해도 타고난 성질이나 기질을 억누르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체의 중심은 어디일까?

인중(人中)이 인체의 중심이라 말한다. 한자로도 사람 인(人)에 가운데 중(中)을 쓴다. 사람의 가운데라는 뜻이다. 이를 다른 말로 말이을 이(而)라고도 한다. 콧물이 흐르는 선이 아니라 말 이을 이(而)를 쓰는 의미가 있다.

인중의 위쪽은 생각을 하는 이성적인 부분, 인중의 아래쪽은 땅에서 나는 걸 먹고 배설하는 본능의 부분이라 생각한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중심이 인중의 위에 있다는 것이다. 순자가 본 성악설은 인간의 중심이 인간의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순자나 맹자나, 두 사상가의 핵심은 교육이다. 본성을 자제하고 희노애락을 억누르기 위해, 혹은 타고난 본성인 “이성적 사고”를 잘 지키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 성리학은 인중의 윗부분을 인간의 본성으로 본다.

퇴계 이황은 김유신의 말을 이야기하며 주인이 정신을 잘 차리면 말은 바른 길을 갈 것이고 술 마시고 졸면 말이 알아서 천관녀의 집으로 간다고 했다. 이것이 성리학의 본질이다.

율곡 이이는 또한 하늘은 폭포의 물과 같고, 사람은 그 물을 담는 그릇과 같다고 했다. 하늘에 있는 진리와 내 안에 있는 진리가 같다는 말이다. 물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 그릇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인중의 위쪽을 본 게 이(理), 인중의 아래를 본 게 기(氣)가 되어 이기설(理氣說)이 시작되었다. 형이상학은 인중의 위를, 형이하학은 인중의 아래를 말한다. 이 상하(上下)를 합치 시키는 것이 바로 인(仁)이며, 그것이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덕목이다. 몸을 잘 못 움직이는 병을 불인지병(不仁之病)이라 한다. 참기 어려운 병이라는 것이다. 인을 이루기 힘들다는 뜻이다.

생명이 어디서 나고 어디서 끊어지느냐가 인간의 출생과 사망을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 생명은 인중에서 끊어진다. 숨이 막힌다, 숨이 끊어진다고 표현하는 데 이 숨이 끊어지고 막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곳이 인중이다. 사람이 죽은 것을 확인할 때 숨이 끊어지는가를 보는데 호흡이 끊어지는가를 확인할 때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인중에 손을 대고 호흡을 확인한다. 바로 인중이 기식(氣息)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 상장례(喪葬禮)의 절차

매일 죽겠다고 말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농담으로 한국사람은 매일 죽는다고 하지만, 기실 전통 상장례에서 한국인은 환갑에 죽는다고 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엇일까. 이는 우리의 오랜 농담에도 숨어있다.

흔히들 병풍 뒤에서 향내 맡는다는 표현으로 죽은다는 것을 표현한다. 여기에 나오는 병풍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말한다. 병풍 앞에 있으면 산 것이요, 병풍 뒤에 있으면 죽은 것이다. 벽도 경계를 나타내지만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할 수 있는 병풍은 생사경계의 상징을 더 많이 내포한다.

예(禮)의 주체를 주례(主禮)라고 한다. 흔히 결혼식장에서 쓰는 주례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지금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주례는 정확하게 주빈(主賓), 큰 손님이 되고 혼인식의 주례는 신랑신부가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환갑잔치를 생각해보자.

회갑때는 잔치자리에 병풍(屛風)(평풍(平風)이라고도 함)을 펴놓고 그 앞에 고임상을 차린다. 죽음의 방향은 서쪽이라 위패는 서쪽에 놓는다. 아버지는 왼쪽에 앉고 어머니는 오른쪽에 앉는다. 돗자리를 펴놓고 음식을 차리고 잔을 올리는데 언뜻 보면 제사지내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리하여 이를 다른 말로 산제사라고 한다.

일련의 사회생활에서 은퇴하여 노인들이 모이는 경로당에 나갈 준비를 하고, 안방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사랑으로 넘어간다. 재산도 물려주고, 곳간열쇠도 넘겨준다. 이것이 농경시대의 은퇴이며, 죽음의 의례 중의 하나이다.

회갑잔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속하지 않는 효도잔치의 한 가지가 되는데, 이 것이 바로 죽음의 준비단계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회갑을 넘긴 사람은 손자들을 데리고 나가 교육을 하고 윤달을 택해 수의를 만들고, 치관을 하며 죽음을 준비한다. 지금은 수명이 늘어나 회갑잔치는 거의 하지 않고 칠순잔치로 넘어갔지만 예전에는 환갑을 넘기면 수를 다 했다고 보는 것이다.

의식적이며 의례적인 이런 산제사 외에 현실적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죽음은 예비가 불가능하다. 문밖이 저승이라는 말이 있다. 죽는 것은 예비할 수 없으므로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출생과 죽음을 비교해서 보자.

출생은 예비가 가능하지만, 죽음은 예비가 불가능하다. 사람이 태어나는 일은 예비가 가능하니 식구들이 준비를 했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목욕을 시키고 강포에 싼다. 사람이 죽어도 염습을 하고 씻기고 작은 이불로 싸는 소렴을 거쳐 큰 이불로 싸는 대렴을 한다. 태어남과 죽음의 과정이 같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안방의 아랫목에서 태어났다. 옛날에는 죽을 때가 되면 안방 아랫목에 눕혔다. 태어나는 장소가 죽는 장소가 된다.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을 삼칠일 친다. 상여를 질 때 횟소리를 메기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두 스물 한 명이 일을 한다. 은정(隱丁)이라하는 못을 박을 때도 스물 한 개의 못을 박는다. 예전에 큰 배는 스물 한 명이 노를 저었다. 21이라는 숫자는 전통사회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1년은 원래 360일인데 이는 자연현상과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아 5일을 더해야 한다. 그보다 더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해서는 5일과 1/4일을 더해야 한다. 이 계산법은 복잡하기 때문에 1/4를 매해 더하지 않고 4년에 한 번씩 윤년을 만들어 계산을 맞추는 것이다. 5일을 네 번 더하고 4분의 1을 네 번 더하면 21이 된다. 삼과 칠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21은 역법상 계산의 의미로 불완전한 역법을 완전케 해주는 기능을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100일이 되었을 때 백일잔치를 한다. 이 백일잔치에는 백설기를 돌리는데, 백(百)자와 백(白)자의 중의적 표현을 더하고, 설(舌)자를 쓴다. 이는 여러 번 혀가 움직인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유명(有名)이 된다는 뜻이다. 이름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백일이 되면 이름을 짓게 된다. 백일을 버텼으니 살았다고 보는 것이며, 이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도 백일(百日)이 지나면 졸곡(卒哭)을 한다. 백일이 지나 졸곡을 하면 흉례(凶禮)에서 길례(吉禮)로 바뀐다. 지금은 유명무실화된 가정의례준칙에서도 백일이 탈상의 기준이 된다. 3년상은 세종때 생긴 것이다. 원경왕후가 죽고 난 뒤 세종이 백일탈상을 너무 아쉬워하자, 황희가 3년상을 제안했는데 이후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백일을 지난 사람이 성장을 하여 맞는 첫 예(禮)가 관례(冠禮), 성년식이다.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여자는 비녀를 꽂는다. 노동의 의미에서는 장정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남자들의 관례에서는 마을 어귀에 있는 큰 돌을 들어 어깨에 올려야 반품에서 온품이 되었다고 본다. 여자들은 초경을 하면 혼인을 준비할 수 있게 되는데 여자는 관례라 하지 않고 계례(笄禮)라 한다.

이때부터 남자들은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날 수 있고, 술을 마실 수 있고 자(字)를 받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어린 시절이 끝났다는 의미를 갖는다. 관례를 치른 후 혼인을 약속하면 서로 사주단자를 보내고 신부댁에서 길일을 택해 신랑댁에 보낸다. 납패라고 하여 신랑댁에서 간단한 선물을 보낸다.

혼인식 때 술을 나눠 마시는 것은 합궁을 의미하고 시아버지에게 밤과 대추를, 시어머니에게 닭을 올린다. 혼인례가 끝나면 신부댁으로 가고 3년을 산다. 신부댁으로 갈 때 신부도, 신랑도 모두 가마를 타고 간다. 가마는 4명이 드는 것을 탔다. 다시 신랑댁으로 돌아와 평생을 보내게 된다.

관혼상제가 인간의 기본 의례였는데 이 중 혼인의 다음에 오는 것이 상례이다.

사람이 죽는 것이 상례인데, 안방 아랫목에서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고 매장을 한 뒤 혼을 다시 모셔오는 절차가 있었다. 혼백상자를 가져와 상청에 모시고 살아있는 것처럼 아침에 밥을 올리고 저녁에 밥을 올리는, 상식을 올리는 의식을 갖췄다.

죽음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임금이 죽으면 붕(崩), 제후가 죽으면 훙(薨), 일반인이 죽으면 졸(卒), 가장 보편적인 말로는 죽었다, 사(死)를 썼고, 비하하는 말로 뒈지다쯤에 해당되는 폐(廢)라는 말도 썼다. 귀양을 가 위리안치에 봉하는 것도 폐인(廢人)이라 칭했는데 살아있으나 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을 썼다. 이는 혼은 날아가고 육신은 흩어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사상 앞에서 향을 피우는 것은 혼을 불러오는 행위이며, 술을 땅에 붓는 것은 육신을 불러 모으는 것이 된다.

(1) 임종(臨終)

가족이나 가까운 혈족이 운명(殞命)할 때 곁에서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

임종이 가까워지면 병자가 평소에 입던 옷 중에서 흰색이나 엷은 색의 깨끗한 옷을 골라 갈아 입히고 거처하던 방과 운명한 뒤 모실 방도 깨끗하게 치워 둔다.

유언(遺言)이 있으면 침착한 마음으로 기록하거나 녹음해 두고, 병자가 죽기 전에 가장보고 싶어하는 친족 친지에게 속히 연락하여 운명을 지켜볼 수 있도록 손을 써야 한다.

임종단계에 들어가면 바깥에 있던 사람을 안방 아랫목으로 눕힌다. 집안의 중심은 안방이며, 안방에 모시는 것을 천거정침(天居停寢)이라고 한다. 머리는 동쪽을 향하게 두고 호흡의 기식을 보며 인중을 살펴 숨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한다. 기식이 끊어지면 사람이 완전하게 죽었다고 본다. 북쪽에 대고 높은 곳에 올라가 초혼(招䰟)을 하게 되는데 이를 복복(復復)혹은 고복(皐復)이라 한다. 높은 곳에 올라가 고인이 입을 새 옷을 줄 테니 영혼이 다시 들어오라고 부르는 의례이다. 기록에 있는 의식이나 대부분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정형화된 형식이 있으나 지방마다 그 양식이 조금씩 다르다.

초혼을 하고 날 때가 되면 몸이 경직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은 사자상을 차린다. 사자상은 문밖에 신발을 세 켤레 두고, 밥도 세 공기, 간장도 세 종지, 물도 세 대접을 준비한다. 저승사자는 보통 삼사(三使者)자라고 하여 세 명이 움직이고 삼성이라는 신과 함께 혼을 데리러 온다.

(2) 수시(收屍)

먼저 눈을 곱게 감도록 쓸어 내리고 몸을 반듯하게 한 다음 손과 발을 매만져 가지런히 한다. 머리를 약간 높게 하여 괴고, 깨끗한 솜으로 코와 귀를 막는다. 이를 수시 또는 정제수시(整齊收屍)라 한다. 얼굴에 백포를 씌우고 홑이불을 머리까지 덮은 뒤 병풍이나 장막으로 가린다.

사자상을 차린 후에 시신을 곧게 편다. 이를 수시라고 한다. 몸을 잘 펴서 칠성판이라는 판 위에 올린다. 북두칠성을 본떠서 만들었다하는데 시신에서 나온 분비물을 걸러내고 잡귀를 쫒기 위해 구멍을 일곱 개 낸 판이다. 이는 염습을 위해 몸을 정리하는 것이다.

(3) 발상(發喪)

초상을 알리고 상례를 시작하는 절차이다. 수시가 끝나면 가족은 곧 검소한 옷으로 갈아입고 근신하며 애도하되, 호곡은 삼간다. 흔히 ‘謹弔’라고 쓰인 등을 달아 놓거나 ‘喪中’또는 ‘忌中’이라 쓰인 네모난 종이를 대문에 붙여 초상을 알린다.

이후 발상(發喪)이 이어지는데 여기부터 의례적인 행위가 시작된다. 곡을 하는 것도 아이고, 에고라는 소리를 넣어서 해야 한다. 발상(發喪)은 상장례가 바뀌는 단계를 말한다. 장례는 임종의 단계가 지나면 그 주체가 바뀌어 상례에서 장례로 전환된다.

(4) 부고(訃告)

호상은 상주와 의논하여 고인이나 상제와 가까운 친척과 친지에게 부고를 낸다. 부고에는 반드시 장일과 장지를 기록해야 한다. 가정의례 준칙에는 인쇄물에 의한 개별고지는 금지되어 있다. 다만 구두(口頭)나 사신(私信)으로 알리는 것은 허용된다.

(5) 염습(殮襲)

운명한지 만 하루가 지나면 시신을 깨끗이 닦고 수의(壽衣)를 입힌다. 남자는 남자가, 여자는 여자가 염습을 한다. 우선 목욕물과 수건을 준비하고, 여러벌의 수의를 깨끗이 닦은 후 겹쳐진 옷을 아래옷부터 웃옷의 차례로 입힌다. 옷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산사람과 반대로 오른쪽으로 여민다. 옷을 다 입히면 손발을 가지런히 놓고 이불로 싼 뒤 가는 베로 죄어 맨다.

염습부터 살아있는 사람이 주체가 되기 시작한다. 베옷을 입히는 것은 오래된 풍속이 아니고 옛 시신을 발굴해보면 대체적으로 평상복을 입혀 묻었다. 관료는 관복을 입히고 관료가 아닌 사람들은 평소에 입던 옷 중 깨끗한 것을 골라 입혔다. 염은 오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는 작업에 쓰이는 솜을 말한다. 이 때 빈곳을 채운다는 의미로 반함을 하는데 씻은 쌀이나 구슬을 죽은 사람의 입에 물리는 일이다. 이 쌀은 바로 사람의 몸을 의미한다.

사망 후 24시간이 지나면 시반현상이 일어나고 몸이 부패하기 시작한다고 보고 염습을 진행한다. 씻겨서 옷을 입히는 절차를 보면 사람이 태어났을 때와 같다. 여자는 여자가 하고 남자는 남자가 하는 식으로 현대의 절차가 바뀌었다. 입관을 한 뒤 주검은 무덤으로, 즉 장지로 가게 된다. 상례는 발상, 상주들, 즉 살아남은 사람들의 의식이며, 장례는 매장절차를 말한다.

(6) 입관(入棺)

염습이 끝나면 곧 입관한다. 이때 시신과 관 벽 사이의 공간을 깨끗한 벽지나 마포(麻布) 등으로 꼭꼭 채워 시신이 관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 망인이 입던 옷을 둘둘 말아서 빈 곳을 채우기도 한다. 시신을 고정시키고 홑이불로 덮고 관뚜껑을 덮은 다음 은정(隱釘)을 박는다.

그리고 관 위에 먹으로 ‘○○(직함)○○(본관)○○○(성명)의 널’, 여자의 경우는 ‘○人○○(본관)○씨의 널’이라 쓰고, 장지(壯紙)로 싼 뒤 노끈으로 묶는다. 입관이 끝나면 관 밑에 나무토막을 깔고 안치한 다음 홑이불(관보)로 덮어 둔다. 관은 병풍으로 가린다.

(7) 성복(成服)

입관이 끝나고 영좌를 마련한 뒤 상제(喪制)와 복인(服人)은 성복을 한다. 성복이란 정식으로 상복을 입는다는 뜻이다. 요즘은 전통 상복인 굴건제복을 입지 않고 남자는 검은 양복에 무늬없는 흰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매며, 여자는 희색 치마 저고리를 입고 흰색 버선과 고무신을 신는다.

(8) 발인(發靷)

영구가 집을 떠나는 절차이다. 발인에 앞서 간단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린다. 이를 발인제라 한다.

(9) 운구(運柩)

발인제가 끝난 뒤 영구를 장지나 화장장까지 장의차나 상여로 운반하는 절차이다. 장의차를 이용할 때 상제는 영구를 차에 싣는 것을 지켜본다. 승차 때는 영정, 명정, 상제, 조객의 순으로 오른다. 상여를 이용할 때는 영정, 명정, 영구, 상제, 조객의 순으로 행렬을 지어 간다.

(10) 하관(下棺)

장지에 도착하면 장의차나 상여에서 관을 내려 광중(壙中)에 넣는다. 하관때는 상주와 복인이 참여하되 곡은 하지 않는다. 광중이란 관을 묻기 위하여 파놓은 구덩이이다. 관을 들어 수평이 되게 하여 좌향(坐向)을 맞춘 다음 반듯하게 내려놓고 명정을 관위에 덮는다. 그 다음에는 횡대를 차례로 가로 걸친다. 이때 상주는 ‘취토(取土)’를 세 번 외치면서 흙을 관위에 세 번 뿌린다.

기존에 있는 무덤이나 묘지가 진짜일까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장례는 풍장이 많았다. 시신을 나무에 매달아 바람에 의탁한 후 풍화가 되면 뼈만 추려 항아리속에 넣었다가 땅에 내려놓고 풀로 덮거나 가매장을 하여 탈골이 될 때까지 기다려 뼈만 다시 묻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조선조에는 특정 계급만 의례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일반 백성들은 풍장의 풍습을 유지했을 것이라 본다.

한국의 장례는 풍수와 관련하여 탈관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관에 쓰는 널과 탈관문제는 기본적으로 뼈가 잘 산화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동남아의 아열대기후는 부패가 잘 안되기 때문에 주로 화장을 하게 되었고 우리나라도 뼈의 산화가 늦어지는 지역에서는 탈관을 하여 하관을 했다.

명당지혈을 찾는다는 얘기에 의문이 가는 것은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대부분 왕족을 중심으로 한 최상류층의 의례만 남아있을 뿐 일반인들의 장례문화는 거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풍수에 따라 명당을 찾는다는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 보급된 일로 추정하는 것이다.

(11) 성분(成墳)

상주의 취토가 끝나면 석회와 흙을 섞어서 관을 완전히 덮는다. 이때 빨리 굳도록 물을 조금식 끼얹고 발로 밟아 다진다. 평토를 한 다음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 봉분을 만들고 잔디를 입힌다. 지석(誌石)은 평토가 끝난 뒤 무덤의 오른쪽 아래에 묻는다. 나중에 봉분이 허물어지더라도 누구의 묘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2) 위령제(慰靈祭)

성분이 끝나면 묘소 앞으로 영좌를 옮기고 간소하게 제수를 차린 뒤 고인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화장을 했을 때에는 영좌를 유골함으로 대신하여 제사를 지낸다.

상주는 특별한 지팡이를 짚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대나무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동나무나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는다. 대나무의 상징은 하늘을 상징하여 동그랗다. 고통을 당해 속이 비었다는 의미가 있다. 대나무의 마디부분은 세(世)라고 하고 마디와 마디 사이는 대(代)라고 하는데 세대차이의 어원이 된다. 어머니는 고통을 당해 단단하다는 의미이며 땅으로 상징하여 나무를 네모낳게 깎는다. 오동나무의 오동(梧桐)의 동(桐)자가 동(同)과 음이 같은 것을 취해 아버지와 같이 슬퍼하라는 의미가 있다 하며 오동나무는 마디가 없어 두 사람을 모시지 않는다는 뜻을 말한다. 이는 천원지방(天元地方)의 의미를 띄는데,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난 것이 자연의 일부라 인정하고 무덤도 바닥은 네모지게 파고 봉분을 동그랗게 하는 이유가 된다.

(13) 삼우(三虞)

장례 후 3일째 되는 날에 첫 성묘를 하고 봉분이 잘 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간단한 제사를 올린다. 이를 삼우라 한다. 요즘은 초우와 재우는 생략한다.

(14) 탈상(脫喪)

상기(喪期)가 끝나 복(服)을 벗는 절차이다. 탈상은 부모, 조부모, 배우자의 경우 별세한 날로부터 100일까지이고 그 밖의 경우는 장례일까지이다. 이때 지내는 제사가 탈상제인데 제사 지내는 방법은 기제(忌祭)에 준한다.

탈상은 상복을 벗는 것을 말한다. 현재는 돌아가신 지 3일째 되는 것을 주로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49제를 지내고 더러 100일 탈상도 있다.

우리나라는 점점 화장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땅을 사고 무덤을 만드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인데 이처럼 의례를 바꾸는 것은 대체적으로 돈 때문이다.

이후에 남은 절차가 제례이다. 관혼상제의 마지막 부분이 제사인데 한국사회의 친족관계는 이 제사절차를 위해 정리되었다 봐야 한다.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형제간이 2촌이 된다.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4촌이 있고, 증조할아버지의 제사를 위해 6촌이, 고조할아버지의 제사를 위해 8촌이 있다. 동고조를 8촌까지로 명하는데 고조할아버지, 즉 위로 4대까지는 집안 사당에 모신다. 4대면 거의 100여년, 한 세기가 되고 4대가 넘어가면 사당에서 물러나 조상이 된다. 보통 4대조까지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만 4대 봉사가 끝난 뒤에도 없애지 않고 계속 봉사하는 신위를 위한 제사를 불천위제사라 부른다. 불천위는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적 학문적으로 뛰어난 경우에 한하여 자손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이다. 국가에서 명하거나 유림에서 지정하기도 하며 부부를 합동으로 제사지낸다.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신다고 하여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을 사용해 불천위제사(不遷位祭司)라 한다.

상장례와 제례에는 촌수에 따라 복식이 달라지고 불천위제사를 포함해 100년 이후의 조상을 모시는 지체는 집안이 아니라 문중이 된다. 죽은 자의 무덤, 산소가 주체가 되고 죽은 사람의 집이라 하며 무덤을 유택(幽宅)이라 한다.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를 선물(膳物)이라 한다. 이 음식을 할 때 파와 마늘은 쓰지 않는다. 오로지 간장만 사용하는데 이는 한 집안은 한 가지 맛의 장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 집안이라도 각자의 입맛이 다르니 마무리 양념은 각자 집에 가져가 조리해서 먹으라는 뜻이다. 국가의 제사나 향교의 제사는 간장도 쓰지 않고 전혀 간을 하지 않는다. 제사의 음식은 궁극적으로 모인 제례의 주체들이 먹을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도를 철폐하여 4대봉사까지만 하도록 정리하였고 제사는 기본적으로 살아있을 때 얼굴을 본 사람까지만 지내게 되었다. 일반사람은 대부분 자기 부모님의 제사만 지내는 편이다.

  • 품격 있는 죽음

유교에서 가장 이상향으로 보는 것은 요순시대이다.

요순시대는 집안이 갖추어지고, 깨끗한 옷을 입고, 농사를 지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처자식을 먹일 수 있고 부모를 봉양할 수 있는 사회였다고 한다. 이런 시대를 소강이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를 대동사회라 한다. 모두가 행복한 시대를 꿈꾸는 것이다.

인간은 행불행을 논하기 어렵고 하늘의 도가 옳고 그른지 정의내릴 수 없으나 인간이 지향하는 지점은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한 것이라는 것엔 이의가 없다. 인간이 하는 근심걱정이 하루에 몇 개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처럼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각을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사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인중의 아래에서 일어나는 먹고 본능을 채우는 일부터 인중의 위에서 일어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깨닫는 일까지 사람의 인생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스티븐 호킹은 사람의 죽음이 컴퓨터가 꺼지는 것과 같은 구조라 하였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마음 심(心)자에도 어떤 파장이 느껴지는데, 이것이 과연 단순한 기계의 종료로 치부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죽음을 이기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끝없는 고행으로 이어져왔다. 인간은 각자의 수양을 통해 인간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살아가는데 사후세계가 있고 없고를 떠나 행불행을 뛰어넘는 것이 죽음이 아닐까.

몸은 못 움직이고 의식은 남아있을 때 우리는 품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고, 고통을 인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삶과 죽음은 새끼줄처럼 하나로 꼬여 있어서 안이 행(幸)이면 밖이 불행(不幸)일 수 있고 안이 불행이어도 밖이 행일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심상(心相)중에 자존심,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은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살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를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늘 짐승과 사람의 경계, 사람과 신의 경계에 놓여 있다.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남는 마지막 순간, 그 순간을 숭고하게 남길 필요가 있다. 비록 육신은 이 세계를 떠나가지만 한 사람의 삶과 그 삶을 지켜왔던 혼은 자손과 자손을 통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8월 10일

그 강을 건널 때

1.

며칠 간 비가 왔다.

흔들의자에 앉아 코에 산소 호흡기를 꽂고 비오는 창밖을 바라보던 어머님은 입원을 하겠다고 하셨다. 죽음을 앞둔 것이 빤했지만 그 중 한 자식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면 가족의 평화는 깨진다.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다시 돌아오라는 얘기를 듣고 우리 집에 머무신 지 3주쯤 되었다.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다른 음식으로 준비해야했고 나는 꼼짝없이 집에서 어머님의 식사만을 준비했다. 이미 식도에까지 큰 종양이 자리를 잡아 굵은 음식을 씹어 넘길 수 없는 상태였다. 고형식을 드시게 하되 최대한 잘게 잘라 먹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다. 나는 욕심을 내었고 아이의 이유식을 준비할 때보다 더 철저히, 영양가와 맛을 생각했다. 내가 집을 비울 때는 고급 식재료를 사러 강남의 백화점에 다녀올 때뿐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고생한다며 주말에 다른 형제의 가족이 집으로 와 어머님의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 뿐이었다.

진통제를 시간에 맞춰 붙이고 떼어드리고 화장실을 가시게 하고 목욕을 시켜드리고. 밥을 차리는 일. 좋은 생선을 사오고 깨끗하고 신선한 재료만을 구했다. 가스불은 하루 종일 끓어대었고 호흡이 힘들어진 말기 암 환자를 위해 에어컨과 공기청정기, 제습기와 가습기를 모두 꺼내놓고 그 때 그 때 습도와 온도를 맞춰 틀었다.

어머님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어진 건 내가 병원에 진통제를 타러 갔다 온 순간이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어머님이 안 보인다고 하셨다. 이미 한 쪽 눈의 눈동자는 한 쪽으로 돌아가 버렸고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어머님을 앉혀놓고 병원에서 의사가 하듯이 혀를 내밀어 보세요. 여기 보세요. 손가락 보이세요? 같은 질문을 하며 어머님의 얼굴을 아이패드로 찍었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진료예약을 하고 환자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니 동영상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병원에서 의사가 한 말은 예상했던 거였다. 준비하시라. 한 달 정도. 라고.

돌아오는 길 운전대를 팔이 빠질 듯이 움켜쥐었다. 5년. 세월과 약, 병원과 모든 치료비가 모두 헛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생명을 더 연장하는 일은 헛되다. 고통 없이 보내드리리라. 이를 악물고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지 않길 바라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님이 물었다.

엄마 이가 꺼매. 봤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이 갈 때가 되면 이가 검푸르게 변한다고 아버님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소매를 눈가로 올리는 것을 보았다.

미국에 사는 큰 아들이 오자마자 본 것은 이제 눈조차 보이지 않게 된 당신의 어머니였다. 멀리 있어 안타까운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어머니는 작아지고, 말이 느려지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한다. 큰 아들은 당신의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겠다고 한다. 멀리 있던 자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어머님을 집으로 모시고 매일 매일 사람이 어떻게 쇠약해지는지, 어떻게 생명을 조금씩 내려놓는지를 보았다. 병 전에 50kg 정도 나가던 몸은 37kg로 줄어들었고 화장실까지 가는 일도 혼자 해 내기 어려워졌으며 며느리에게 빈 몸을 보이는 것에 익숙해지는 데까지, 어머님은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하나씩 벗겨지는 존엄성과 자존심은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누군가의 팔을 잡고 변기에 안고 속옷을 맡기고 비어가는 작은 몸을 내 맡기는 일은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일, 그 뒤편으로 뚝뚝 떨어지는 생명. 어머님의 뒷모습에, 한 걸음마다 뚝뚝 내려앉는 것은 생명. 그 혼들이 우리 집 마룻바닥에 흔적도 없이 내려앉았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 내뿜는 공기는 늪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가득한 질척거리는 질감이 있다. 가족들은 그 공기를 함께 맡는다. 집안에 맴도는 어머니가 버리는 생명을 우리는 하나씩 주워 여기저기에 쑤셔넣었다. 그 생명들을 모아 당신의 이별 앞에서 진하게 애도를 위해서였다. 어머님의 생명 한 줌이 그 자손들의 힘이 될까. 어머님의 삶이 하나씩 뚝뚝 떨어지는 것을 나는 그 뒤를 밟으며 줍고 있었다.

그 며칠 전 어머님은 집에서 생일상을 받으셨다. 오랫동안 연락을 못하고 지내던 내가 처음보는 친척들도 찾아와 어머님의 손을 잡고 통곡을 했다. 어머님의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다. 병색이 완연하다는 건 그만큼 삶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후 점심밥을 드시고 난 다음 우리는 119 구급차를 불렀다. 일반 승용차에 앉아서 병원으로 이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머님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 어떤 가족은 병원에서 다시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눈동자가 돌아간 것이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전 날 밤 네 명의 가족이 앉아 소리를 높이며 싸우기까지 했으나 결정권은 아직 어머니에게 있었다. 엄마의 생명은 아무리 작아졌더라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님은 모든 자식의 마음을 채워주며 살았고 마지막까지 그리할 터였다.

어멈아. 병원에 가기로 했다.

119 구급차가 들어오고 구급차 들것에 누워 어머님은 근처 대학병원으로 가셨다. 비는 하루 종일 왔다. 나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어머님이 없는 집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 날 오후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MRI를 찍은 어머님은 새벽에 급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아침 일찍 들었다.

그 오후에 거동도 하지 못하는 어머님이 MRI 기계에 들어가 뇌 MRI를 찍었다는 거다.

이 상태로 병원에 가시면 결국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말 한마디 못 넘기고 기도삽관 한 채 돌아가실 거라고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치던 내 언어가. 저주스러웠다.

2.

중환자실에서 3일.

매일 병원을 가서 정해진 면회시간에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어머님을 뵙고 왔다.

기도삽관을 한 채 어머님은 의식이 없었다. 뒤늦게 나는 어머님에게 입을 맞추고, 일어나시지 못하리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귀에 대고 일어나시라고 말했다. 소풍을 가자했다. 아이들이 왔다고 했다.

괜찮다고 이제 가셔도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며느리에게 허락된 언어가 아니었다. 나는 딸이 아니라 며느리라서, 모든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제 그만 아프셨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족들은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어머님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숨만 쉬고 계셨다. 거친 호흡에 어딘가 통증이 느껴지는지 의식은 없는데 가느다란 팔다리가 몸부림을 쳤다. 중환자실 앞에 네댓 명의 가족이 줄줄이 서서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경비아저씨가 복 받은 집이라는 소리를 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거나, 오지 않는 며느리, 오지 않는 사위들도 많다며, 친척들은 하나같이 쓰잘데기 없다는 흰소리도 했다. 그가 나에게 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 누구에게도 화가 나거나 당황스럽지 않았다. 그저 저 안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어머님의 짧은 생명 때문에 생각의 고리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매일 밤이 고비였다. 그 삼일동안, 그 짧은 삼일동안 가족들은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중환자실 앞 의자에서 시간을 보내는 형제들과 배우자는 초주검이 되어갔다. 어머님이 처음으로 암진단을 받고 몇 차례의 시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상태가 나빠졌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암센터 주차장으로 들어설 때도 어머님은 당신이 암에 걸렸다는 걸 몰랐다. 가족들이 알리지 말자는 의견을 냈고 나는 그에 대해서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어머님과 시간을 보낸 것은 불과 몇 년이었지만 어머님의 아들들은 어머님과 40년 넘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어떤 의견도 내세우지 않았다.

내가 왜 암센터로 가니?

그 때 나는 대답할 권리도 없었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건 당신이 몸으로 낳은 자식들에게 있었다.

“여기가 더 잘 봐요.” 내 거짓말은 금방 들통날 것이었으나 어머님은 화를 내지 않으시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세심하게 챙겨줘서 고맙다고 할 분이었다.

내가 왜 중환자실로 가니?

라고 묻지도 못한 채 중환자실에 들어가 삼일을 보내는 어머님을 바라보며 이제 이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생전에 대학병원 병실에 입원해 계실 때 어머님 바로 맞은 편 침대에는 전혀 거동을 못하는 할머니가 한 분 있었다. 혼자 배변도 가리지 못해 관장을 해서 똥을 빼내고 소변줄을 차고 있었다. 가끔 의식이 돌아오면 눈을 껌뻑껌뻑 할 뿐이었고 간병인과 자식들이 돌아가며 노구를 뒤집으며 닦아냈었다. 어머님은 맞은 편 침대에 곧게 앉아 그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살 필요는 없다고 뇌까리셨다. 지금 어머님의 모습은 당신이 가장 원하지 않던 모습이었다.

5년 동안 어머님의 몸은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시술은 더 이상 효과를 내지 못했고 암세포는 서서히 늘어났으며 결국 간에서 시작한 암은 폐로 전이가 되었다. 방사선 치료를 10여 차례 받았으나 다른 곳에서 종양이 다시 생겨났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종양은 모두 다른데 어머님 몸에 숨어있는 녀석들은 예상치 못한 여러 곳에서 아주 작은 형태이지만 매우 많이 계속해서 솟아났다. 물방울같이 하얀 종양들이 온 몸에 구석구석 퍼지는 것을 사진으로 보았다. 방사선 치료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항암치료에 들어가기 전 어머님은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낯선 시골 동네로 내려가겠다고 하셨으나 우리는 아무 것도 예비하지 못했고 어머님은 혼자 식사를 해 드실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으며 생활을 작파하고 내려가 보필할 가족이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아무도 그 일을 해 낼 수 없었다. 어머님의 손주들은 어리고 아들들은 돈을 버느라 바빴으며 배우자는 때로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나는 항암 안 할란다.

어머님의 결심은 자식들의 설득으로 금방 무너졌다. 암환자인 부모가 치료를 거부했을 때 쏟아지는 것은 자식들의 두려움이다. 효도하지 못했다는 감정, 방치했다는 죄책감. 엄마가 죽게 생겼는데 무엇이라도 해야 된다는 강박. 어머님의 의지는 자식들의 만족을 위해 그 때 무너졌다. 항암 추적치료제를 받았을 때 병원에서는 손으로 집으면 안 된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 되물었을 때 입안과 혀에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만 했다.

피부에 닿기만 해도 타버릴 지경의 독성을 가진 항암제를 먹어서 몸에 넣는 것이다.

암전문병원에 있는 선배는 독약과 극약의 한 끗 차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어머님은 몇 달간 마른 김에 항암제를 싸서 드셨고 입안이 헐어 치약을 바꿔야 했으며 손과 발의 모든 피부가 벗겨져 발을 디디고 서 있기도 어려워졌다. 머리카락은 빠지지 않았으나 몸속에 들어간 추적치료제가 어머님을 죽이는 건지 어머님의 암세포를 죽이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그 약은 어머님의 백혈구를 마구잡이로 죽여 버리기 시작했다. 백혈구 수치가 떨어져 항암제 투약을 중단했다. 몇 주를 쉬고 다시 항암제를 투약했을 때도 백혈구 수치가 마구잡이로 다시 떨어졌다.

암 진단 이후 단백질을 끊은 것 때문에 4년간 아미노산제재를 드셔야 했고 방사선으로 숨을 쉬기 어려워졌으며 항암제로 백혈구가 죽었다. 무엇이 어머님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나.

나는 어머님의 손을 잡고 강가로 다가가는 꿈을 자주 꾸었다.

누런 강물이 흐르는 강 앞에서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강 앞에 검은 그림자로 멈춰 있었다.

때로 그 강가에 올빼미가 거칠게 날고 흰 달이 뜨고 누런 안개가 피어올랐다.

꿈속에서도 알았다. 언젠가 그 강가에서 손을 놓는 날이 있으리란 걸.

지난 5년간, 나는 매일 그 강가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3.

까무룩 잠이 들은 그 밤.

그 날도 비가 왔다.

2012년 9월 16일 밤 12시 48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031로 찍히는 낯선 번호.

전화를 받으니 병원 중환자실이었다.

밖에 보호자분이 안 보이셔서 전화드렸어요. 환자분이 곧 임종하실 것 같습니다.

언제가 될지 몰라 긴장하고 있던 나와 남편은 순식간에 옷을 꿰입고 각자의 차를 몰아 병원에 가기로 했다. 몇 분간 병원에 있을 가족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 번호 세 개가 모두 대답이 없었다. 신호등도 무시하고 미친 듯이 달려 주차를 하는데 10분이 걸렸다.

병원의 후문 쪽에 주차했는데 후문은 잠겨 있었다. 남편은 나보다 늦게 병원으로 들어왔다. 정문으로 뛰어가던 나는 남편에게 후문이 잠겨 있으니 정문 가까이에 주차를 하라고 일렀다. 엘리베이터는 마치 200층 꼭대기에서 내려오듯이 더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 들어가 복도에 있는 가족들을 찾았는데 그날따라, 모두들 중환자실 앞 의자에서 한 목숨처럼 잠들어 있었다. 세 명의 성인남자 중 아무도 간호사가 보호자를 찾는 소리에 대답하지 못했다.

중환자실 호출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는 순간,

의료진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 어머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CPR은 동의하지 않으셔서 하지 않았습니다.

김○○님, 2012년 9월 17일 0시 56분. 임종하셨습니다.

서 있는 것이, 불경스러웠다.

나는 주저앉았다.

세 아들은 바보같이, 어린애같이, 심장이 터질 듯이,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 같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님의 몸은 온기가 남아 있었으나, 이상한 물질감이 있었다. 굳어간다는 것, 그 1분 1초 사이에, 어딘가 묵직한, 표현할 수 없는 둔탁함이 느껴졌다. 36kg 정도의 작은 몸. 어머님은 그렇게 그 강의 배를 타 버리셨다.

세 아들과 세 며느리, 다섯 명의 손주, 배우자, 그 누구도 어머님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장례식장은 예약을 할 수 없다.

중환자실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던 나에게 남편은 단호하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어머님의 둘째 아들은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장례식장을 알아봤다.

가족들은 슬픔을 잠시 미뤘다.

장례식장을 어디로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게 우선이었다. 돌아가신 분을 병실에 눕혀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입원했던 병원의 장례식장은 한 자리가 남아 있었지만 밀어닥칠 손님들을 생각하면 규모가 작았다. 아버님은 이 병원 장례식장은 주차비가 비싸서 안된다고 극구 반대하셨다. 산등성이에 조용한 장례식장이 있는 근처 병원에 연락을 했다. 검은색 성장을 한 사람이 나타나 어머님의 시신을 운구차에 실었다. 어머님의 둘째 아들이 시신을 운구하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남편의 옷가지를 챙겨 정해진 장례식장으로 갔다.

그 사이 사촌들이 모두 뛰어와 장례절차를 의논하고 있었다. 남편이 미리 들어둔 상조회사에서 나와 장례절차와 계약해야 하는 것들을 말하고 있었다.

여기는 탈관을 혀 안혀?

우리는 탈관을 혀.

원래 해?

원래 다 탈관한다고. 우리는 탈관하는거여.

나는 탈관이 뭔지도 몰라 뒤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와 20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사촌형님이 챙겨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다.

장례식장 담당직원과 필요한 물품을 정리했다.

쟁반은 몇 개만 하고 고무장갑 두 개만 하고 이거 빼. 이거 필요없어. 물티슈 개수 똑바로 세줘야 돼요. 수육 비싸 안돼. 편육으로 해.

가족들은 상복을 고르고 각자 사이즈를 적어넣었다. 다 큰 아이들이 상복을 입을 수 있나 없나도 가늠했다.

형님 옆에서 식사대접에 필요한 것들을 듣는 사이 남자들은 모여서 수의와 관, 장지에서 일할 사람들을 섭외하고 제상에 무엇을 올리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마쳤다.

다들 집으로 띄엄띄엄 번갈아 가며 돌아갔다가 옷을 챙겨입고 나타났다.

아침 해가 떴다.

집으로 돌아가 어머님의 손주들을 모두 깨워 차에 실었다.

일단 장례식장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내려놓고 아침 10시가 되자마자 나는 근처 백화점 유니클로 매장에 갔다.

검은 바지 세 벌과 검은 티셔츠 세 벌, 검은 조끼 세 벌을 사고 여자들이 입을 내의를 위 아래로 사서 거대한 쇼핑백에 잔뜩 쑤셔 넣었다.

사촌형님과 근처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더 사왔다. 장례식장에서 제공하는 물품들은 모두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들인데 일반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비쌌기 때문에 커피믹스나 종이컵, 인스턴트 라면들을 잔뜩 사서 차에 실었다.

미리 앞당겨서 했던 칠순잔치의 어머님 사진을 가지고 대형마트의 사진현상소에 들러 영정사진을 만들어 달라 했다. 사진은 몇 시간 만에 준비되어 마트에 사진을 찾으러 다녀왔다.

장례식의 시작은 소비였다. 계산서와 계약서가 오고가고 마트를 드나들어야 했다. 각자의 집에서 준비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상조회사와 거래처 은행에서 일회용품을 몇 박스씩 보내주었다.

날씨가 흐렸다.

몸이 부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조문객들이 대낮부터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래된 내 친구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나는 낮부터 술을 마셨다. 가족들은 돌아가면서 작은 방에 들어가 잤고 손님이 들어오면 정신을 차리고 잔뜩 부은 얼굴로 나와 조문객을 받고 인사를 나눴다. 서른 넘은 사촌조카가 부의금을 받았다.

눈물을 감추려고 술을 마셨고 나는 술에 취했다.

만취상태를 용서받는 며느리가 되었다.

자네만큼 애 쓴 사람도 없네. 라는 말을 믿었다.

장례식장에서 술에 취한 며느리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 날 밤을 견디는 방법은 그 외엔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나는 변명한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으나 그 시간을 고스란히 버틸 재간이 나에겐 없었던 거다.

둘째 날, 해가 뜨기 시작했다. 산 속 언덕에 있는 장례식장은 고즈넉했다. 가장 큰 슬픔을 겪어내기에 충분히 위로가 되는 풍광이 펼쳐졌다. 발 아래 안양시내의 전경이 펼쳐졌고 하늘이 맑고 높게 올라섰으며 흰 구름이 조금씩 떠다니기 시작했다. 멀리서 햇빛이 어디론가 쏟아지고 있었다. 젖었던 유리창이 조금씩 말라가며 손님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첫 날 오후에 미국에서 가족들이 비행기를 타고 왔고 나의 아버지도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둘째날 도착했다. 나의 큰아버지와 사촌오빠들이 들렀고 전주와 강북에 사는 친구도 다녀갔다. 가족들의 각자의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섰고 어머님이 낳아 기른 아들의 지인과 거래처에서 화환이 계속 도착했다. 높은 포장탑차가 장례식장 앞에 서서 화환을 토해내고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복도는 온통 국화로 가득해 더 이상 놓을 곳이 없었다. 첫 날과 둘째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육개장을 계속 먹었고 발목이 조여 오는 걸 느꼈다.

친척들은 빠짐없이 어머님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했다.

분주하게 쟁반을 들고 앞치마를 동여맨 형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자네 어머님이 생전에 우리한테 해주신 거 생각하면 이건 새 발의 피밖에 안되네.

내가 모르는 어머님의 지인과 내가 모르는 멀고 먼 친척들이 모여 내 손을 잡으며 얘기 많이 들었네. 고생 많이 했네. 어머님 좋은 데 가셨을 것이네. 라고 위로를 건넸다.

사람들은 모여서 어머님과의 추억을 한 자락씩 꺼내놓았다. 들으면 뭉클한 이야기들만이 가득했다. 언제 나의 어머님이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는지, 마음이 서늘할 때 위로가 되었는지, 오갈 곳이 없던 마음을 어머님께 어떻게 던져두었는지, 낯선 서울땅에서 어머님이 차려준 밥을 먹고 기운을 낸 이야기며, 가족들과 싸우고 전화를 할 때마다 뭐라고 힘을 돋구어주셨는지를 이야기했다. 어머님 삶의 모든 이야기들이 장례식장에서 펼쳐졌다.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이야기들이 둠벙둠벙 춤을 추듯 장례식장에서 꽃을 피웠다.

담양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 후 서울에 올라와 자리를 잡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산동네에서 근검절약으로 진정 “타의 모범”이 된 어머님의 생활이 들려왔다. 흑석동에 마련한 작고 초라한 집의 현관을 거쳐 가지 않은 친척들이 한 명도 없었다더니 모두들 나의 어머님 덕에 직장을 얻고 집을 구하고 풍파가 있어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때마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먹을 것을 챙겨주고 친인척의 아이들에게도 차별 없이 공정하게 대해주었다는 이야기들, 누군가 해내야 하는데 할 수 없었던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집안의 큰 어른이었다는 걸, 강조하거나 소리 질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데도 계속 해서 들려왔다.

하늘이 맑아지면서 이것이 삶의 완성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하늘도 그렇게 어렴풋했다. 점심이 지나 입관을 할 테니 상주가족들은 입관실로 모이라 했다. 우리는 안에 들어가지 않고 유리창을 통해 어머님을 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사촌형님들이 의자를 가져다주어 지팡이를 짚고 유리창 안을 바라보았다. 어머님은 작았다. 내가 본 어머님의 모습 중에 가장 작고 작은 모습이었다.

사람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작아진다고 했다. 우리가 매일 죽음과 멀어지기 위해 애를 쓰기 때문에 그걸 잊게 된다 했다. 삶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투쟁의 연속이다. 중년이 지나 어느 순간이 되면 도망치는 일을 멈춰야 한다. 자기가 작아질 때부터.

작고 작은 어머님의 얼굴에 고운 화장이 입혀지고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수의를 입고 얼굴을 덮고 아들이 들어가 어머님을 관 속에 넣었다. 나는 의자에서 한 발자국도 일어날 수 없었다. 통곡소리가 멍멍하게 들려왔다. 아무 기력이 없었다. 어머님을 관 안에 넣고 사촌형님들이 병원 응급실에서 휠체어를 가져왔다. 나는 그대로 휠체어에 옮겨 앉아 응급실에 누워 링거주사를 맞았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물리치료사가 어디를 다쳤냐고 물었다.

첫 날엔 술에 취해 주절거리고 둘째 날은 링거를 맞았다. 몸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동서가 오늘은 술 드시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미안하다 대답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4.

어머님은 살아 돌아오지 않으신 거다.

사람이라는 게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단백질이나 무기질, 탄수화물과 지방, 칼슘이나 인 같은 화학기호로 나타낼 수 있는 물질이 사람의 육신이라면,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도 알아낼 수 없는 어떤 것이 그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혼이라 부른다.

혼은 몸속에 있을 때 말을 하고 웃음을 짓고 몸을 움직이고 눈빛을 보낸다. 사람의 몸에 혼이 들어 있을 때 몸은 계속해서 말을 한다. 혼이 지어내는 생각들을 여러 가지 몸짓에 담아 밖으로 내보낸다. 그 몸짓을 알아듣거나 말거나, 그것은 듣는 자의 몫이다.

이제, 어머님의 혼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다.

예컨대, 어머님이 했던 이야기는 분명히 여기저기에 남았으나 어머님의 혼이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한들, 우리는 육신으로만 소통하는 인간인지라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정녕 끝인 것인가.

아침 일찍 공기는 적당히 촉촉했고 검고 커다란 영구차가 장례식장 아래 주차장에 자리잡았다. 가족들의 은색 승용차 두 대와 시신을 실은 리무진과 가족들이 탈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7시. 내가 처음으로 맞는 온전한 장례식의 마지막 날이었다.

다양한 일을 겪어왔으나 처음부터 끝을 지킨 장례식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임종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일만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장지는 연고가 없는 충남 당진의 어느 마을이었다. 오래 전 시부모님과 큰 시부모님 내외가 마련해 둔 곳이었다. 버스와 승용차, 운구차를 나눠 탄 어머님의 가족들이 함께 장지로 향했다. 어머님의 아들들이 모는 각자의 승용차는 유난히 빛나 보였다. 저런 물질적인 것도, 장례를 지켜보는 타인들과, 가시는 분께 어떤 위로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놓을 곳이 없을 만큼 쏟아지던 화환과 빛나는 자동차와 멀끔한 자손들이, 그 사람의 삶을 축약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어머님은 생전에 세 명의 아들을 낳아 온전히 길렀고, 아버님과 스무 살쯤에 결혼해 헤어짐 없이 해로하셨다. 손윗동서의 아이들을 잠시 맡아 기르다시피 했고 집안의 모든 동기간, 조카들과 화목하게 지내셨다. 때마다 전화를 하고 속을 풀어주고 인사치례를 하는 일은 모두 어머님의 몫이었다. 그들에게 어머님은 언제나 마지막 구원투수였다.

큰 엄마,를 부르며 울던 다 큰 중년 남자가 있었고, 작은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는 늙어가는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어머님에게 여러 번 마음의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건강하실 때 더 많이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한 것과, 편찮으실 때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들 했다.

천지간에 엄마와 동생 단 세 명이 세상을 건너오며 평생을 살아온 나는, 사촌들이 찾아와 일을 봐주는 것이 어색했고 원래 그러는 것인가 궁금했고, 이 가족이 매우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당신들의 직접적인 일이 아닌데도 삼일 내리 장례를 지키는 일은 결국 나도 동일한 경우가 생겼을 때 삼일 내리 장례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한국의 일반적인 가족들의 관혼상제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매우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나, 사촌들이 없었다면 첫 날은 만취하고 둘째 날은 쓰러져 버리는 며느리는 아무 것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는 길엔 바닷가가 보이는 휴게소가 있었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었고 가족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드문드문 웃기는 이야기를 하고 농담도 주고받았다. 저녁나절 아이들을 집에 데려가 재우며 어머님의 장지에서 태울 것을 준비해왔다. 내가 가져온 것은 진료기록과 영상이 담긴 씨디, 처방전, 병원 영수증, 남은 진통제 따위였다. 그것들은 꼭. 태워 버리고 싶었다.

휴게소에서 상복을 입고 커피를 사 마셨다. 모두들 화장실에 들어가 참았던 것을 내려버리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드문드문 황금빛이 보이는 길로 들어섰다. 차를 돌릴 수 없는 길 끝에 다다르기 전에 가족들은 버스에서 모두 내렸고 나는 잘 걷지 못하는 통에 갈 수 있는 곳까지 차를 타고 올라갔다.

맏손자가 영정을 들었고 첫 손주였던 딸아이는 분에 차 있었다.

딸아이는 자기가 집안의 첫 손주이고 할머니 손에 자란만큼 자기가 영정을 들어야 한다고 투덜댔다. 여기 살지도 않는 사촌동생이 할머니 사진을 들고 가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표시를 계속 내었다. 딸아이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나 모든 절차를 뒤집을 만큼 여유 있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충분히 네 마음을 알고 있으니 여기서는 그만하자고 달래었다. 아이는 입을 잔뜩 내밀고 장례식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장을 할 곳은 앞면이 툭 터진 곳이었다. 아래로 논과 들판이 잘 보였고 가리는 것이 없어 그늘이 들 틈이 없었다.

어느 새 사람들이 작은 포크레인을 가지고 땅을 파고 있었다.

땅을 파던 사람들은 먼 친척뻘 된다 했다. 그들은 흙이 아주 좋다고 활짝 웃어보였다. 비가 왔는데도 질지 않고 촉촉하게 물기가 배어 있어 먼지도 날리지 않는 게 여기가 명당이 틀림없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아버님은 흡족한 표정이었다가 금방 울상이 되었다가 다시 웃곤 하셨다. 일꾼이라고 칭하는, 그들이 땅을 다 판 뒤 관을 드는 건 어머님의 둘째 아들의 친구들이 하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상조회사에서 나온 장례지도사의 도움을 받아 관을 내렸다. 집안과 동네마다 하관하는 방법이 다르다 하는데 아버님 집안은 탈관을 한다. 관을 빼고 시신만이 땅바닥에 놓였다. 아주 작디작은 어머님이 흰 끈 세 개에 놓여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졌다. 저리 가면 더 빨리 사라지실 것이 분명했다. 죽음으로 향해가며 더욱 더 작아졌던 어머님은 흔적도 없이 떠나가실 게다. 시신이 내려지는 순간 곡소리가 시작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통 장례법에서는 이 따 곡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터지는 울음을 누가 말릴 것은 아니었다.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이 돌아가며 삽으로 흙을 떠서 시신 위에 뿌렸다. 누군가 시신으로 뛰어들어 붙들고 울까 겁이 났다.

시신 위로 흙이 뿌려지고 조금씩 시신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머님의 둘째 아들은 선글라스를 쓰고 삽을 들고서 흙을 덮는 일에 열중했다. 흙을 덮으며 발로 밟아 땅을 다졌다. 오래전에 친구를 염해서 보냈다는 사람이라 뭔가 능숙해보였다.

내 옆에 앉은 사촌큰형님이

삼촌은 저럴 때 보면 참 멋지다며 나를 툭 쳤다.

포크레인이 흙을 떠넘기고 남편과 남자들이 땅을 다지는 사이 나는 다른 식구들과 아버님과 불 속으로 태울 것을 던졌다.

클리어파일에 촘촘히 모아둔 어머님의 진료기록, 예약증이 붙은 영수증, 처방전, 미처 다 드시지도 못한 아미노산제, 남은 진통제를 하나씩 쏟아붓으며 영상기록이 담긴 씨디도 던졌다. 장례지도사가 시신을 잠시 담고 있었던 관을 불 속으로 던졌다.

이제 안 아프셔도 돼요.

나는 짐승처럼 외쳤다.

이제 안 참으셔도 돼요.

이제 안 아프셔도 돼요.

다 끝났어요.

항암추적치료제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백혈구 수치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부작용은 끝을 보자는 듯이 용트름을 할 때, 한국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그 병원에서는 임상실험을 받아보겠느냐고 권유했다. 나는 오랜 시간 담당의사와 상담을 하고 원서로 된 논문을 받아 읽고 가족들에게 병원에서 권하는 치료에 대해 설명했다. 모두들 내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에미 네 생각은 어떠냐?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이건 실험이예요.

그래, 그럼 하지 말자.

병원에 임상실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순간 그들은 내 예상대로 말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얼굴이 하얗던 의사는 나에게 슬픈 눈빛을 하고 잠시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진통제라도. 간문제니까 신장에서 해독되는 게 있다고 들었어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되의뢰서를 써 줄테니 집 근처 병원을 다니며 진통제 처방을 받으라 했다. 그 때부터 받았던 진통제는 패치로 된 것이었고 내가 보살피지 않는 순간에 어머님은 진통제 패치를 갈아 끼우는 순간을 자주 놓치셨다. 아프기 직전에 갈아야 했는데 아플 때까지 참으려 했고 통증이 엄청날 텐데 아프다 소리 한 번 하지 않으셨다. 마지막 순간엔 폐쇄공포증과 불안장애도 겹쳐 안정제를 드셔야 했는데 그 역시 내키지 않는다며 밤새 뒤척이셨다. 끝까지, 단 한 번도 아프다 소리치지 않았던 어머님의 진통제는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관을 태우는 불속에 남은 진통제와 진통제 패치, 진료기록을 끼워두었던 클리어파일까지 모조리 집어던졌다.

어느 새 봉분까지 솟아올랐다.

멍하니 앉아 있는 가족들에게 아버님이 이제 가자 이르셨다.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던 가족들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어머님의 새 봉분을 바라보며 산을 내려갔다. 하늘이 맑았고 구름이 고왔다. 들녘에 곧 곡식이 여물 것이라고 바람이 살살 불어왔다.

가시는 날이 좋아 마지막까지 복을 받으신 분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만 했다.

이제 매주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에 갈 일이 없고, 어딘가를 가다가 전화를 받고 유턴을 할 일이 없을 테고, 매달 100만원어치 영양제를 살 일도 없고, 의료계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할 일도 없고, 간암에 대한 의대전공서적도 어디론가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더 이상 예약증을 받고, 주차사전등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머님의 환자카드도 버려도 되고, 주민번호도, 잊어도 되는 거였다.

5.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세무문제 처리를 할 일이 있었다. 어머님과 무관한 일인데 내가 모아둔 영수증이 5년치에 달했다. 모든 영수증을 추려서 날짜별로 정리하고 클립이나 작은 집게를 이용해서 정리했다.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거래명세서를 일일이 출력해 정리했다. 탈상은 원칙대로라면 백일이 지나야 하지만 가족들은 삼우제가 끝나야 탈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멋대로 정한 원칙이거나 말거나, 어쨌거나 탈상도 하지 못했는데 돈 문제 때문에 영수증을 추리고 있으니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간다는 게 야속했다.

내 하늘이 무너졌어도 세상은 여전히 쉬지 않고 돌아간다. 세월은 누구를 기다리거나, 누군가의 애도를 위해 멈춰주지 않는다. 영수증을 정리해 남편에게 넘겨주고 장례를 치른 다음 나는 병원을 찾았다. 온 몸이 부풀어 오르고 양말자국이 발목에 선명하게 남았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7kg가 늘어나 있었다. 병원에 가서 장례를 치렀다고 얘기하고 화장실을 잘 가지 못한다 하니 이뇨제를 처방해주었다. 오래 먹으면 좋지 않으니 일주일만 먹고 이후에도 문제가 있으면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하니 다시 오라 했다.

이뇨제를 먹으니 화장실에 갈 수 있었고 매일 1kg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지 오일 째 되는 날 삼우제를 지내러 산소를 다시 찾았다. 젖은 흙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 듯 보였고 아버님은 승용차를 끌고 산소까지 올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타이어를 태워먹고 결국 진입을 포기한 아버님은 차를 바꿔야겠다고 하셨다.

가족들은 어머님한테 와서 자꾸 그러시면 좋아하시겠냐고 아버님을 달래기도 하고 퉁박을 주기도 했다. 아버님의 충격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돌아가실 거라는 걸 예측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아버님은 쉽게 어머님을 놓지 못하셨다.

발인한 날처럼 맑았던 삼우제날, 돌아오는 하늘도 높고 맑았다. 이제 제대로 가을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장례식장은 9월 중순인데도 꽤 추웠고 내내 비가 오다가 개였던 게 하늘이 어머님이 돌아가신 걸 알고 날씨를 맞춰준다고 억지를 부려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임종을 본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전해 들었을 뿐이고 친구가 죽은 것도, 친구의 오빠가 죽은 것도, 엄마가 전해준 가족들의 다양한 죽음의 형태도 순조로운 게 없었다. 노환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경우가 단 하나도 없이 나는 실종, 자살, 사고의 죽음만을 간접적으로 들으며 성장기를 마쳤다. 그에 비하면 어머님의 죽음은 비록 병사라 할 수도 있겠으나 5년간 꾸준히 그 길을 같이 걸어온 나에겐 자연사와 다름없었다.

어머님이 암환자라는 이름을 걸고 병원을 본격적으로 다녀야 했을 때 나는 암에 대한 여러 가지 책들을 찾아보며 암에 대한 개념을 잡으려 했다. 도대체 이 병은 무슨 병인가, 고칠 수 있는 병인가, 아니면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인가, TV에 나오는 암완치는 무슨 이야기고, 암을 극복했다는 이야기는 진실인가, 완치는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나름대로 한 암에 대한 철학은 암은 인간이 늙어가는 과정중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인간 수명이 늘어나면서 그 발병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과, 영양부족보다는 영양과다에 그 원인이 있을 수 있고, 심장이 거세게 펌프질을 하면서 순환하는 피가 종양을 쓸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암은 자연발생적인 노환의 한 종류로 이해하게 되었다. 현대의학이 발전하기 전, 즉 사진촬영이 불가능할 때는 암을 노환의 한 종류로 봤다는 조선시대의 문헌자료가 있다. 젊은 사람의 경우도 있었겠으나 노인의 경우는 그저 나이가 들어 몸이 쇠하여 죽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사람의 몸속에 생겨나는 종양은 쓸데 없이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이 문제다. 그걸 우리는 악성 종양이라 부른다. 암환자를 묻으면 사람은 죽었으나 그 안의 종양은 죽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사람 속에 사는 종양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세포는 계속해서 분열하다 결국 소멸하게 된다. 종양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분열횟수의 끝이 없다는 것이다. 악성종양은 계속 자기분열을 반복하고 무한히 증식하며 스스로 혈관을 만들어 사람 몸 속 여기저기에 뿌리를 내린다. 세포는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해야하는데 악성종양은 영양분을 빨아서 증식만 할 뿐,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세포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괴생명체가 되어 계속해서 커져나가기 때문에 다른 세포를 파괴하고 세포가 파괴되면서 장기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이 악성종양이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것이다.

어머님의 몸속에 살던 놈들은 유달리 독한 놈들이었다. 처음 암진단을 받고 대부분 5년의 생존율을 보인다는 통계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전이가 될만한 시점에 전이가 되었고 폐로 넘어가 폐를 타고 식도로 올라갔을 때, 어머님의 CT 촬영사진을 집으로 가져야 컴퓨터로 열어보고 입을 막고 울었다.

온 몸에 하얀 물방울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빈 곳이 없었다. 암환자는 혈액검사로 여러 가지 수치를 잰다. 그 중 AFP 수치라고 하는 간암을 식별하는 수치가 있다. 환자의 상태와 정비례하진 않는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항암치료까지 갔던 병원에서 처음 쟀던 AFP 수치는 2000이 넘었다. 일반적으로 수치가 500이 넘으면 암을 의심하게 된다. 마지막 어머님의 수치는 2만이 넘어 있었다. 수치가 1만이 넘었을 때 이게 가능한 수치냐고 물었는데 간호사는 흔한 케이스는 아니지만 그게 꼭 환자의 건강상태와 정비례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해줬다.

수치가 5천이 넘어가면서 나는 어머님의 차트를 보기 시작했고 진료기록을 떼서 따로 집에서 번역을 해서 읽었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영상사진에서 무너졌다. 이제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5년 동안 모시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초반 3년간은 어머님이 식사도 다 차려내셨고 살림도 다 하셨다. 나는 명절에만 주력해서 음식장만을 도왔다. 마지막 2년간은 명절을 우리집에서 보냈고 작은 집에서 보낸 적도 있다. 집 근처 다니던 병원에서 영 탐탁치 않은 진료를 반복해서 받고 암치료로 1,2위를 다툰다는 대형병원으로 옮기면서 어머님의 모든 의학적 일을 내가 도맡아 했을 뿐이다. 돌아가시기 전 우리집에 머무셨던 것도 불과 3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겐 그 시간이 끝나지 않았던 시간처럼 멍청하게 멈춰 있었다.

이 집에 머무셨던 동안의 그 텁텁한 공기가 있다. 가끔 그게 느껴진다. 창가에 놓아드린 흔들의자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가만히 계셨던 어머님의 모습이 선연하다. 아이는 여러번 물었다. 할머니 죽은 거야?

할머니 돌아가신 거야.

할머니 다시 못 와?

다시 못 오시지.

왜 다시 못 와?

일곱 살이던 아이는 그 때부터 물었다.

왜 사람은 죽는 것인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인 아이는 어차피 죽을 것인데 사람은 왜 태어나느냐고 물었다.

얼음이 얼어가는 천변을 걷다가 그 날도 아이가 다시 물었다.

엄마, 사람은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

나는 대답했다.

잘 죽으려고.

잘 죽는 게 뭐야?

할머니 장례식 기억나지?

어.

꽃도 많이 오고, 사람도 되게 많이 왔지?

어.

그렇게 죽기 위해서 사는거야. 어차피 태어났으니까, 그건 되돌릴 수 없거든. 하지만 기왕 태어난 거 평생을 열심히 살면 할머니 장례식처럼 사람들도 많이 오고 모든 사람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면서 그리워하게 되거든. 훌륭하게 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죽고 난 다음에 에이 잘 죽었다, 할 수도 있잖아. 그런 거 말고, 죽을 때, 할머니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할머니의 몸은 없지만, 우린 모두 할머니를 기억하잖아.

그럼 나는 왜 태어났어?

엄마가 너 보고 싶어서.

왜?

모든 사람은 저기 별이었거든. 그 중에 엄마가 맘에 드는 별이 있어서 갖고 싶어졌거든. 그래서 너 오라고 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걸 아이도 알고 있을터였다. 하지만 아이는 웃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죽음이 몸나(我)가 죽고 얼나(我)가 살아나는 과정이라고 했다.

시작해서 끝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상대를 끝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나서 죽는 것이 몸나이다. 몸나가 죽어서 사는 것이 얼나이다. 얼나는 제나(自我)가 죽고서 사는 삶이다. 말하자면 형이하(形而下) 생명으로 죽고 형이상(形而上)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몸나로 죽을때 얼나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몸나의 인생을 단단히 결산을 하고 다시 얼나의 새 삶을 시작한다. 몸삶을 끝내고 얼삶을 시작한 얼삶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1956)

이 말이 내내 아리까리했다. 언뜻 언뜻 알겠으나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얼마 전 누군가와 예술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죽어야 값이 올라간다는 얘기를 하며 웃었다. 그 때 문득 깨달았다. 죽어야 값이 올라간다는 것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추한 배금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거기서 힌트를 얻은 셈이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혼이 지어내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몸이 전해주는 살아있는 시간동안, 우리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은 계속 변화하고 흔들린다. 이리 저리 부딪히고 혼도 흔들린다. 한 사람의 영혼이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타인에게 전하는 동안 우리는 그 사람의 몸짓을 보느라 그 사람의 영혼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영혼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보통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죽을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의 영혼을 본다. 그의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몸짓을 통해 우리에게 전했던 이야기는 그 사람의 몸이 멈추면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 사람의 몸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와 그 사람의 몸이 전했던 이야기들이 장례식장에서 꽃을 피우고 몸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몸에 다시 새겨진다. 그렇게 한 사람의 영혼이, 다석 선생이 말한 “얼나”가 다시 깨어나는 것이라는 걸. 죽어야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걸 안다.

어머님의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백골이 진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님의 무덤에 가면 생전에 어머님의 몸을 통해 들었던 그 영혼의 이야기들을 듣는다. 굳이 무덤에 가지 않아도 도처에 어머님의 몸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전화기를 보면

윗사람이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던 말이 생각나고

아이를 보면

남 앞에서 제 새끼 아끼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시던 말이 생각나고

전복을 보면 전복껍질이 참 예쁘다며 수세미 받침이나 비누 받침으로 쓰셨던 게 생각나고

언제나 고맙다, 애썼다고 하셨던 게 여기저기 스며있다.

CT 촬영사진으로 봤던 어머님의 장기 속 물방울 같던 종양들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어머님의 집엔, 어머님이 쓰던 물건들이 있다.

돌아가신 다음 해 추석에 부엌 찬장에서 만 원짜리 다섯 장이 나온 적이 있다.

우리는 어머님이 미리 세뱃돈을 놓고 가셨다며 아이들에게 나누어줬다. 30년간 써오신 가계부에는 가족의 역사가 들어있다. 몸은 죽었지만 그 사람은 죽지 않았다는 얘기가 뭔 지 알 거 같다. 어머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오로지 당신의 장례식 단 한 번뿐이었다. 그래서 이청준은 장례식을 축제라고 했던 모양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명예나 권력을 남기라는 미련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영혼이 불려온다. 그가 평소에 남겼던 모든 기운과 이야기는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몸을 통해 되풀이되고 역사가 된다.

사람이 몸으로만 산다면 어찌 허무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겐 꼭 기억되기 마련인지라,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런 말이었나보다. 명절이 돌아온다. 가족들은 꼬막을 삶고 게를 찌며 어머님을 생각할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서 또 아이들을 낳으면 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저희들의 할머니가 생전에 잘하시던 음식이 있었고 명절이면 모두 모여 그걸 먹었고, 돌아가신 날의 장례식이 얼마나 고왔는지에 대해서. 어머님은 그렇게 대를 이어 살아가실 것이다.

꿈에서 보았던 거친 물살의 강을 건너가셨다. 그 강가에서 우리는 손을 놓았다. 그 강가로 걷는 것이 그 때 나에겐 삶의 이유였다. 나도 그 강가에 서서 배를 타고 싶었다. 거친 물결을 넘어간 어머님이 그 배를 치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 강의 저 편에서 그들은 또 다른 삶을 산다. 강물은 쉬지 않고 흐른다. 나는 손을 놓고 다시 돌아간다. 언제고 다시 그 강가로 갈 것이다. 그리고 강을 건너겠지. 누군가의 손을 잡고 강가에서 이별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다.

2015년 2월 14일

1994년 10월 21일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닌 탓에 한 살 어린 친구들과 동급생이었다. 학교를 4년 다니다 보니 유명해져서, 나름대로 편하게 살았다. 술담배를 하거나 일탈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교사를 어려워하지 않았고, 한 살 많은 나에게 선생님들도 나름대로의 대접을 해 준 셈이다. 고 3 때, 아침 7시 50분까지 등교를 해야 했는데, 학교는 월계동이고 우리집은 경기도 양주라서 새벽차를 타고 나가야 했다. 가을이 되어 급기야 담임에게 도저히 시간을 못 맞추겠으니 아침 자율학습을 빼달라고 통보했다. 나는 그런 애였다. 사정하는 게 아니고, 못 나오겠으니 처리는 당신이 맘대로 하시라고 선언하고 뒤돌아 나가버리는 애였다.

2학기에 들어서는 졸려서 살 수가 없었다. 야간 자율학습은 밤 11시에 끝나는데 새아버지가 매번 나를 데리러 운동장에 차를 대놓고 기다렸다. 11시에 월계동에서 출발하여 잽싸게 밟으면 집에 12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씻고 야식먹고 공부를 조금 더 하다 보면 2시가 넘어 잠들었고 아침에는 5시에 일어나야 학교를 갈 수 있으니, 나는 6시에 일어나 아침자율학습을 째기로 한거다.

그 날은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잘 못 일어나는 사람들이 우리집 여자들인지라, 그 날은 모두 다 늦잠을 잤다. 유달리 일찍 일어나는 새아버지도 그 날은 늦잠을 잤다. 새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도 동생도 같이 차에 탔다. 동생의 학교가 더 가까워 동생을 먼저 내려주고 차가 창동으로 들어설 때쯤, 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다리가 무너졌다고?”

조수석에 앉은 엄마가 라디오 소리를 크게 올렸다. 강북에 살아 강건너 가는 일이 드문 나에게 한강다리는 혜은이의 제 3한강교가 끝이었다. 그렇게 많은 다리가 있는줄도, 다리마다 이름이 다른 줄도 잘 모르고 지냈다.
8시가 넘어 학교에 도착하니 아침자습이 끝난 시간이었다. 나는 지각한 것은 생각도 안하고 교실로 마구 뛰어 올라가 한강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호들갑 떨며 아이들에게 전했다. 내가 시끄럽게 라디오 뉴스를 전하고 있는데 덩치 큰 국어선생이 들어와 내 뒤통수를 갈겼다.

“야. 이하나. 지각했으면 가만히 있어야지 뭐 이렇게 시끄러워 아침부터.”
“아 그게 아니고 지금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니까요오!!” 나에게 그 뉴스는, 희생자를 생각하지 않는, 일종의 쑈같았다. 걸프전의 생중계를 고스란히 본 나에게 재난과 사건사고소식에 사람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건 마치 게임 시뮬레이션 화면 같은 것이었으니까. 걸프전을 CNN으로 보면서 느꼈던 것. 폭탄이 떨어질 때 참 아름다웠으니까. 광활한 사막에 떨어지는 불꽃놀이, 나에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은 언제나 죽고 어디서나 죽게 마련이니.
“이 새끼가, 지각한 거 무마할라고 수 쓰고 있어.” 국어선생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나를 자리에 앉히려고 다그쳤다.
“아 진짜라니까요.”

고 3쯤 되면, 선생과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경이 되지 않나, 나는 앞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빨리 티비를 틀어보라고 했다. 교실에는 뒤통수가 뚱뚱한 브라운관 티비가 있었다. 티비 아래 서 있던 아이가 손을 뻗어 MBC를 틀었다. 비오는 한강에, 다리 상판이 아래로 뚝, 썰어낸 듯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쉬는 시간동안 티비를 틀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무 일 없는 듯 자율학습을 했다. 누군가는, “저 중에 고3이 있었다면, 좋겠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죽음은 교실에 언제나 가득했다. 우리는 햇빛 한 번 못 보고 매일 매일 도시락을 싸러 집에 다녀오곤 했으니까. 타인의 죽음과 또래가 학교 가던 길에 무참하게 아무 이유없이 생명을 잃은 일에 대해서 우리는 분개할 시간도, 울 정신도 없었다. 우리에겐 수능이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고, 이미 중간고사를 끝내고 내신성적을 정리할 때였을 뿐이다. 그 다음 해, 우리중 많은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내가 명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안타깝다거나, 슬프다거나, 억울하다거나, 누군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도, 하나의 쑈처럼 보였다. 나는 일주일 내내 그 뉴스쇼를 지켜보았고 전혀 슬프지 않았다. 잠을 설치긴 했고, 뉴스를 끄지 못했으나, 같이 울거나 뭐가 문제라거나,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게 보낸 20년의 세월을 지나, 20년만에, 세월호가, 그 세월을 관통해 다시 침몰했다.

도대체 배 이름은 왜 세월호라 지은 것인가.

묻어두었던 긴 세월동안의 공감하지 못했던 타인의 죽음과 고통이, 굽이쳐 휘돌아 거대한 해일이 되어 몰려오는 오늘이다. 성수대교 붕괴 후 20년, 2014년 10월 21일이 방금 지나갔다.

2014. 10. 21.

오늘.

1. 이른 저녁 들른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 나는 딱 육십까지만 살래.
– 어머 언니 안돼. 우리가 언니 보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봐야돼.
– 육십은 너무 젊지 요새는.
– 곡기를 딱 끊으면 된다더라. 나는 그렇게 죽을꺼야.
– 아 진짜 왜 그러니?
– 난 자살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 어머 무슨 소리야!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이 그런 소리 해도 돼? 자살은 죄악이야.
– 그러니까 곡기를 끊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 난 추해지기 전에 죽고 싶어.

자기 의지로 죽고 싶다는 여자는 병원 간병일을 했던 경험을 이어서 말하고 있었다.
내 뒤에는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지방대 나와 석사를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냐고 여자가 묻고 있었다. 듣고 있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2. 며칠 전 아이와 긴 산책을 하는데 아이가 다시 물었다.
엄마 사람은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
일년째 이어지는 질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잘 죽으려고 살지.
– 뭔 소리야.
–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일단 태어난 건 되돌릴 수 없잖아. 그럼 어떡해. 기왕 태어났으니까 되돌릴 수 없는 건 포기하고. 죽는 날 사람들이 이 사람 참 잘 살다 갔다고 죽어서 아쉽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살아야지.
아이는 알아듣는 듯이 조용해졌다.
– 너 할머니 장례식 기억나? 손님이 정말 많이 왔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슬퍼했어. 그건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만큼 잘 사셨다는 뜻이야. 그게 쉬운 게 아니야. 평생 나쁜 짓을 하고 산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봐. 사람들은 나쁜 놈 잘 죽었네. 하고 만세를 부를 수도 있잖아.
– 축제를 할 지도 몰라.
–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하는거지.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3. 에밀 시오랑의 책의 부제는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이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거라는 거다. 염세주의라기 보다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삶의 수많은 생채기들은 발목을 잡고 늘어지지만 그래도 하루의 10초 정도, 행복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웃으며 살아가고 미래에 대한 꿈이 보이면 가열차게 걷기도 한다.

해피해피한 인생이 어디 있겠나.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인생은 없다. 해피해피한 인생은 무료한 인생일 뿐.
작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인간은 대부분 출생의 비밀, 환난과 고통, 지속되는 도전, 고칠 수 없는 신경증과 정신적 장애를 가졌다. 그건 작품의 주인공뿐 아니라, 지금 저 밖 공원에서 떠드는 아이들과 어디선가 곤히 자고 있는 평화로운 사람들 모두에게도.

단 한 번도 쉬운 인생은 없었다.

4. 우리는 모두 아프다.
나도. 당신도.
아프지 않은 날도 있다.
아! 오늘은 아프지 않구나.
그래서 하루를 넘기도 또 살아있다. 반복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오늘은 아프지 않을거야. 라고 때론 거짓말도 하면서.

너는 별이었으니까

아이가 물었다.
엄마 사람은 왜 살아?
행복해지려고 살지?
어차피 죽잖아.
그러니까 죽기 전까지 행복하려고 살지?

 

사람은 죽으면 뭐가 돼?
뭐가 되긴 뭐가 돼. 끝이야.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글쎄…
그럼 정말 아무 것도 없어?
음……………….. 별이 되는거야.
뭐가 된다고?
별이 된다고.
그럼 엄마도 별이 돼?
그렇지.
그럼 나도 별이 돼?
응.
왜 별이 돼?
너는 원래 별이었으니까.
근데 여기 왜 왔어?
엄마가 오라고 해서.

 
– 임철우의 “그 섬에 가고 싶다”가 떠오른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이는 더 묻지 않고 잠들었다.
아이가 어릴 때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내가 할머니가 되어 죽게 되면 나의 손주에게 할머니는 네가 볼 수 없는 안드로메다로 돌아갈 거니까, 나중에 거기서 만나자고 하면서 히히덕거리며 가고 싶다고.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다고.

 

 
are you 도민준?

 

 

하지만 머잖아 내 딸아이도 어쩔 수 없이 깨닫게 되리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란 넓고 거대한 것이며, 그 거대한 우주 속에 한톨 씨앗으로 홀로 떨어져 있는 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자그맣고 미미한 존재인 것인가를.

그리고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란 기쁨과 즐거움, 사랑스러움 뿐만이 아닌,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슬픔, 한숨, 추하고 비틀거리고 뒤틀린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라는 서글픈 사실을 말이다. 내가 그랬고, 아내와 우리 부모들이 그러했으며, 아직 살아 있거나 혹은 예전에 살다 간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들 그러했듯이…….
임철우 <그 섬에 가고 싶다>

부음

올 여름들어 처음으로 선선한 하루였다. 찜통에서 나왔더니 다른 계절이 선뜻 와 있었다. 내일은 작은 아이의 개학이라 마음만 분주한 오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3주전쯤 시이모부님께서 돌아가셨다. 7년 넘은 치매의 시이모님을 보필하시다 병을 얻어 먼저 작고하셨는데 오늘은 상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시이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오늘 돌아가신 시이모님은 작년에 먼저 가신 시어머님의 언니. 나는 그 분을 알지 못한다. 결혼하기 전에 인사를 갔을 때도 가물가물하시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조근조근 조용한 목소리로 하셨던 분이다. 이후 명절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는 이미 치매가 많이 진행되어 대화를 나눌 수도 눈을 맞추기도 어려운 형국이었다. 그러니 시이모님도 나를 모르실테고, 나 역시 시이모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간간히 가서 뵈면 치매환자 치고 유난스럽지 않으시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다니러 온 우리를 방문을 열어 빼꼼히 보시고 다시 방안으로 조용히 사라지곤 하셨다. 치매환자들은 남아있는 욕구를 발산하고 본능만이 남는다 하던데 그 분은 무엇이 남으셨던 건지 1-2년에 한 번 뵙는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가족들은 어차피 가실 것, 말년에 옆에서 보필하시던 분 안 계실제 가시는 게 외려 고인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겠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큰 아이도 같이 가신 셈이니 차라리 잘됬다고 뇌까렸다.

작년에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시외숙모, 시이모부, 시이모님까지, 남편의 외가에 이어지는 초상이다. 남겨진 다른 이모님만이 걱정될 뿐이다. 형제들의 줄이은 초상에 얼마나 맥을 놓으실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무리 때 되면 사그라지는 것이 생명이라 한 들 죽음은 누구에게도 익숙치 않은 일이다.

아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은 얼마나 외로운 일일 것인가. 문득 예전에 보았던 “나는 전설이다”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 식이다. 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으로 표현되곤 한다. 도시가 텅 비어버리는 일. 그게 종말을 묘사하는 영화들의 주된 기법이다. 천지간에 사람이 넘쳐난다 한 들 내 아는 이 없는 세상은 마치 비어버린 뉴욕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세상이 망한 것과 별다를 게 무엇일까.

일제 강점기에 대한 책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전쟁에서 지면 남자는 거세를 당하고 여자는 강간을 당한다라는 공포가 만연했었다고. 거세당한 남자와 강간당한 여자라는 것은 그 민족의 씨를 말살하고 다른 유전자가 유입된다는 말일게다. 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내 천지간의 혈족이 사라진다는 말일게다.

작년에 시어머님을 보내드리고 난 뒤, 끊임없는 부고가 이어졌다. 내 주변의 지인들의 장모와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실은 며칠 전에도 잘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지만 안타까운 죽음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7월에도 문상을 다녀왔으며 문상에 적합한 음전한 옷도 한 벌 마련해 둔 터이다. 조사는 들으면 가는 거래. 라는 말을 전했을 때, 나이 마흔 넘으면 그것도 아니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도 떠오른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한 두 다리 건너의 부고를 전해들으며 내가 이제 부지런히 문상만을 다닐 나이가 되었다는 걸 절감한다.

또래 친구들과 달리 남편이 7살 연상이고, 시부모님들은 8남매 9남매의 막내시다 보니 줄줄이 연로하신 분들만 남아계신다. 나이 먹은 배우자와 살면 늙는다는 말은 죽음을 자꾸 접한다는 말이었나보다. 삶의 완성이 죽음이라면 그 삶을 다 살아낸 사람들의 뒷모습을 이어서 보며 마음을 자꾸 비우게 되는 것인 모양이다.

부음을 듣고 해가 지고 풀벌레 소리가 밀려들었다. 백내장에 익숙해져 더 이상 눈도 긁지 않는 역시 늙어가는 개를 데리고 산책을 했다. 3주전에 무릎 수술을 하여 아직 목발을 짚고 있는데 아파트 단지 한 가운에 널직한 광장에 인사 나눈 적은 없는 이웃의 아이가 걸음연습을 하고 있다. 그 아이는 다리가 불편한 지 늘 휠체어를 타고 다녔는데 본격적으로 일어나 걸을 요량인 모양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등 뒤에서 잡고 아이의 엄마가 두 살짜리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오는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옆으로 나는 딸깍거리는 목발소리를 내며 걸었다. 해는 지고 별은 보이지 않는다. 풀벌레 소리는 깊고 이 동네 아이들은 내일 개학이다. 늙어가는 것과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 앉아 최명희의 혼불을 읽는다. 마침 청암부인이 죽어 상을 치르는 중이다.

2013. 8. 21.

안녕 새.혼.

설날 연휴.
아이와 함께 서울나들이에 나섰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가서 한옥의 풍경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느즈막히 출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행사는 끝물이거나, 이미 끝났을 것이 분명했다.

지인의 집 근처에 차를 대고 걸어가기로 했다. 아이는 차 안에서 깊게 잠이 들었다. 차를 세우고 아이를 깨웠다. 다 왔다. 다 왔다. 자 이제 일어나야지. 엄마 졸려. 엄마 졸려를 반복하던 아이는 그래도 새로운 나들이에 기대가 되었는지 금새 잠을 떨치고 일어나려 노력했다. 아이를 차에서 끌어내 길을 걷다가 장갑은? 이라고 물으니 차에 두고 왔다고 한다. 다시 차에 돌아가 아이의 장갑을 꺼내는 순간, 뒷 문이 열리는 자리에 오래된 새의 사체를 발견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음을 외면했다.

세상에 죽어나가는 것이 어디 한 둘 뿐이랴.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 떨어져 죽는 일은 언제나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그들도 결국은 죽고 나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순리인 모양이다.

한옥마을에서 연을 만들기도 하고 이리 저리 한옥을 구경하며 차례상 지내기의 이야기도 듣던 아이는 신이 났다. 오징어도 뜯어먹고 솜사탕까지 손에 쥐었다. 친구를 만나러 다시 차에 올라탈 때 아이에게 말했다.

“너 차에 탈 때 뭐 발견한 거 없어?”

“뭐?”

“거기 죽은 새 한 마리 있는데.”

“어디?”

아이에게 차 문을 열고 뒤를 돌아보면 보일 것이라 말해주었다.

아이는 차 문을 다시 열더니

“어 진짜네. 새가 죽어 있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는 종알댔다. 죽음에 대해서 큰 경외감이나 큰 슬픔이나, 두려움이나 거부감따위 없이.

“엄마 엄마, 이제 저 새의 영혼은 다시 하늘로 간거야? 그럼 저 새의 이름은 무엇이라 지어주지? 새의 영혼. 이니까 새.혼. 이라고 지어줄까? ”

시동을 걸고 차가 움직이자 아이가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든다.

“안녕 새혼아. 잘 있어. 다음에 또 만나. 하늘나라에 잘 가.”

 

할머니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고 장례식장에 도착해 눈물을 그렁거리던 일곱살의 손주는 해를 넘겨 여덟살이 되었고, 이제 사람도, 새도 그 영혼이 살아 하늘로 도달하리라 믿는지도 모른다.

안녕. 새혼아. 하늘나라에 잘 가. 훨훨 날아가렴.

이치를 깨닫지 않아도, 무엇인가 배우지 않아도 깨닫는 아이.

아이의 영혼은 무엇이라 이름지을까.

 

2013.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