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기 힘든 시간

어찌보면
나라는 사람은 참 여러가지를 못 견디는 거 같다.
학원가의 즐비한 버스와 이중주차가 된 승용차들도 못 견디겠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제 밥그릇만 챙기는 꼴을 보는 것도 못 견디겠고
내 새끼가 나약하게 징징대는 꼴도 못 견디겠고
내 개가 인도에 똥싸는 것도 못 견디겠고 (어차피 치우는 거지만 인도엔 흔적이 남은 경우가 있어서)
오늘같이 황사와 미세먼지 많은 공기도 못 견디겠고
내가 던진 말실수도 못 견디겠고
책 안 읽고 보낸 일주일도 못 견디게 싫다.

남들은 다 괜찮은 모양이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고치고 싶고 따지고 싶고 뒤틀고 싶어지는데 남들은 괜찮은 모양이다.
좁아터진 커피집에 사람이 꽉 들어차 공기가 텁텁한데도 문을 꽉꽉 닫고 있길래 문을 열었더니 누군가가 다시 닫았길래 내가 그 곳을 빠져 나왔다. 다들 괜찮은가보다.
나는 안 괜찮은데.

지금 내가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서른 한 살에 낳아 나와 서른 한 살 나이차이가 나는 이 자식이 10시까지 학원에서 코박고 있다가 좀비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청춘을 보낼텐데, 난 그게 화가 나서 못 견디겠는데 다들 괜찮은가보다.

부정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입시미술은 절대 뽑히지 않는다는 원장의 말이 거슬려서 가슴에 와서 박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가 보다. 나는 머리가 띵한데.

… 상당히 까다롭고 예민한 건데
생긴 게 반전이야..
어쩌면 좋지.;

자기 역사를 지우다 – 드라마 야왕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부모가 자살기도 하는 것을 목격하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만 살아남았다.

아버지가 죽는 현장에서 한 남자가 엄마를 구해낸다.

아이는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재혼한 엄마가 아이를 찾으러 온다.

성폭행을 일삼는 의붓아버지에게서 도망쳐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간다.

지병으로 엄마가 죽는다.

소녀는 어리고, 돈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

이 때 이웃의 한 청년이 나타나 소녀를 돕는다.

소녀는 결심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에게 세상으로 나갈 길은 공부.

소녀는 영민한 머리로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간다.

가난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소녀를 돕던 청년은 학비를 대기 위해 기술직을 버리고 유흥업소의 접대부로 일을 한다.

이제 소녀는 여자가 되었다.

유흥업소에서 접대부로 일하는 남편이 부끄럽다.

여자는 이제 과거와 정체성을 지우고 싶다.

입사면접에서 가난의 흔적, 오해, 독한 기질 때문에 탈락한다.

여자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

남편이 호스트로 일하는 돈으로 여자는 미국유학을 감행한다.

타고난 미모, 영민한 머리로 재벌의 아들의 사랑을 얻어낸다.

거칠 것이 없어진 여자는, 거슬리는 것들을 제거하는 폭주를 시작한다.

손이 하늘에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자는 권력의 중심에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언제나 들어갈 수 없는 성벽,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가 가진 무기를 꺼내 들은 여자는

처참하게 모멸 당하고 버려진다.

이제 아무도, 그녀를 돕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지만, 누구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이 여자아이의 가정이 가난에 허덕여 자살시도를 하지 않는 사회였다면,

그 어머니와 아이가 구출되었을 때 다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가 정비되어 있었다면,

여자아이가 성폭행으로 유년시절을 거듭해야 했을 때 누군가 이 아이를 구해주었다면,

성폭행가해자를 과실치사로 살해하게 된 것이 법으로 절대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여자와 연인에게 있었다면.

정당한 기술을 배웠던 여자의 연인이 그 직업으로 여자가 대학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조건이었다면,

혹은 여자의 배경 없는 신분과 독기 어린 눈빛도 품어줄 수 있는 기업의 리더가 있었더라면.

그녀가 권력의 상층부까지 상승했을 때, 그 집안에서 동물적 본능으로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이제는 평생의 적이 된 그녀의 옛 남자는 여자에게 지속적으로 말한다.

산동네의 그 여자로 다시 돌아가라고.

권력과 돈의 맛을 본 여자는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지우고 다시 만든다.

역사를 수정하고 재구성하는 여자는 보수적 사회적 통념 하에서

아비를 죽이고 딸을 죽이고 남편을 죽이는 악녀로 재탄생한다.

여자는 산동네의 소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그녀는 이제 다시 혼자다.

어떤 것을 평생 사랑하는 일은 인간이 해내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것을 평생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은, 인간이 해내기 조금 쉬운 일이다.

지독하게 외롭고 슬픈 여자는 사회적 피해자와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걷고 있다.

여자는 더욱 더 독한 가해자로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이제 관성과 가속도가 붙었으므로.

돌아갈 수 없다.

정체성을 지우고 자기 역사를 다시 쓰는 일.

그녀 안에 숨은 나를 본다.

난 그녀를 미워할 수 없다.

왜 그녀가 산동네의 주다혜로 돌아가야 하는지, 나는 그 말이 더 밉다.

yawang_suae

386은 꿈이다

나에겐 386세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내가 겨우 초등학교를 다닐 때쯤 종로에 나가면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고 학생들은 늘 “데모” 중이었다. 
비싼 등록금 내주고 소팔고 논팔아 학교 보내줬더니.. 하는 세대는 그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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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의 작업, 그에 필요한 재료를 사러 엄마와 강북시중심을 돌다보면 늘 백골단과 마주쳤고 최루탄이 어디 터지나 신경써야 했다. 
 
나의 엄마는 67학번쯤 되는데, 야간통행금지에 걸렸다가 풀려난 이야기, 닭장차라고 하는 저 탈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박정희가 화폐개혁을 또 한다더라 는 말을 포장마차에서 했다가 막걸리보안법에 걸려 몇 달동안 생사를 모르다 다리를 못 쓰게 되어 나타난 거래처 아저씨의 인야기를 전하며, 이 나라에서 데모를 하는 것은 삼대가 망할 일을 애써 도모하는 것이며, 여자의 경우 성고문도 비일비재 하니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는데, 오히려 엄마가 이야기를 전하는 그 어법은 무용담과 같아서 나에겐 환상적인 저항의 문법이 되었다. 
 
사람을 마구 잡아가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정부가 있다고 알려준 것은 역설적으로 “절대 데모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라고 강조했던 엄마였다. 그 때 엄마의 언어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엄마도 뭔가 그 “데모꾼” 들에 대한 호의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용기와 체제전복에 대한 꿈과, 사생활과 가족의 생계보다 더 큰 대의를 생각할 수 있는 그들에게 계급이라는 것을 덧붙여 나와 다르지만 그 팔자도 나름 부러운 상황이었던 것 같다. 
나의 모친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밥그릇을 포기하고 대의를 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에게는 늘 자신의 생활과 자신의 몇 안되는 혈육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했고, 어떤 대의가 사회적으로 실천될 때, 약간의 혜택을 조금 더 특별하게 받고자 했다. 그건 본인이 끊임없은 불가항력의 힘에 이끌려 인생의 파도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것이 억울함으로 남았고, 그에 대한 미미한 보상을 세상에 요구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결과적으로 나에겐 엄마가 투쟁해야 할 권력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엄마의 규칙대로 살길 바랐던, 그것도 매우 강경하고 카리스마가 심한 사람이었으므로, 나에겐 저항의 문법이 필요했다. 어릴 때는 욕지거리를 배워 사용해보기도 했지만 이후엔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메커니즘이 얽히고 설켜 결국 내 삶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낀 건 아마 중학교 때쯤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거였다. 그게 내가 열 네살쯤 때의 일이었다. 전교조가 시작되었고, 6월 항쟁이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당시 시사저널은 좋은 언론이었고, 한겨레가 창간되기 전이었다. 그 때 선두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386이었다. 전교조를 시작한 나의 선생님들은 1960년 생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그 분들의 “애제자” 로 쉽게 발탁되었다. 그 분들이 읽어보라고 적어준 책의 리스트는 점점 늘어나,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전태일 평전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따로 있었고, 그들이 즐겨 읊는 시가 따로 있었으며, 그들에게 가치가 있는 작가는 따로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답습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은 저항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386의 정서를 많이 흡수한 것은 내가 만났던 그 세대의 사람들이 줄곧 나에게 친절했기 때문이다. 
 줄곧 그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려 했고, 나는 기쁘게 그것들을 받아들였으며, 더욱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다시 그들에게 환영받는 입장이 반복되었다. 
 그들이 대열에서 벗어나 각자 흩어지고, 우리세대는 한총련의 마지막을 맞이했으며, 나는 그 입시전쟁에서 복합적 이유로 밀려나 그 대열에 끼지도 못했는데, 대열은 연세대 사태로 와해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조국을 휩쓸었다. 대학 가서 뭔가 해 볼 것 같던 친구들은 취업에 몰두했고, 그들은 높은 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자격증을 따기 위한 삶을 살아갔다. 나 역시, 그런 대의나, 저항에 대해서 잊고 살았다. 그 때, 우리가 저항했던 적들은 모두 시야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 적들은 땅으로 스며들어 우리들이 마시는 물까지 오염시켰다. 그게 바로 경쟁과 경제위주의 삶, 약육강식, 적자생존, 2등은 기억하지 않는 시기가 2002년 월드컵과 노무현을 어깨에 메고 시작되었다. 
 
 2002년 종로서점의 폐점이 이 시대의 시작을 울리는 경고였다고 생각한다. 
 월드컵이 열리고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레드컴플렉스를 극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컴플렉스를 극복했다기 보다, 이념을 버리고 소비를 택한 소비자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이 대선에 승리한 것으로 진보진영이 한 발 나선 것처럼 보였지만, 그 때 부터 사람들은 선거나 투표권이 소비자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만일, 전두환이 이 시점에 다시 출마를 해, 숨겨둔 돈이 100억조 정도 있는데, 그돈으로 시장경제를 다시 활성화 시키고 당신들의 아파트값을 유지해주며 해외정복을 시작해 부동산 경기를 재 점화하겠다는 공약과 함께 실천을 시작한다면. 나는 전두환도 재선에 이길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광주에서는 곡소리가 이어지겠지만, 이미 그런 것들은 괘념치 않는 사회 아닌가. 북한 주민들을 그리도 걱정하는 사람들이 한 국가의 테두리 안에 살고 있는 5월마다 제사상이 이어지는 광주를 잊고, 대추리를 잊고, 노근리를 잊고, 자살자가 가장 많은 동두천을 외면하고 지내지 않던가. 
 
 이 시대가 진보가 그나마 밥술 좀 얻어먹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시대는 위험사회(율리히 벡), 그리고 고도성장이 멈춘 것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태, 그리하여 더 이상 발전하거나 팽창하지 않을 각자의 재산에 대해서, 그 재산을 빼앗기면 가난과 죽임과 파산과 종말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시대, 그래서 이 사람들은 더욱 더 보수保守적일 것이다.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한 것. 그 지키기 위한 방패로 누군가는 진보를 택하고 보수진영을 택할 뿐, 진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는 진보나 보수라는 구분 자체가 모호한 상태이다. 성장을 하기 위해 파괴를 서슴치 않아야 한다는 종(縱)적 팽창에 대한 주장인가, 혹은 성장을 멈추더라도 나누면서 가야한다는 횡(橫)적 팽창을 꿈꾸는가 그 정도의 차이다. 
 
 나에게 꿈과 저항을 알려준 386세대는 지금 50대가 되었고, 이번 대선을 지나면서 극명한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시사인에 만화를 그리는 굽시니스트는 “50대 이상 평범한 엄마들이 아는 유일하게 친근하고 스토리가 있는 정치인”으로 박근혜의 당선이유를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대선이후 멘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뒷짐을 지고 있다. 이리 저리 여러곳에서 모두 실망한 사람들은 대통령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국민수준이 더 중요하다는 이상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386이 대열에서 벗어날 때쯤, 신자유주의, 혹은 경기 부양의 마지막 정점을 향해 그래프를 바짝 끌어올리는 총력전을 벌이고 있을 때, 이들은 후배들을 양성할 시기를 놓쳤다. 많은 후배들이 대열에서 벗어나 어학연수를 떠났고, 혹은 돌아오지 않았고, 혹은 학위를 따서 금의환향했다. 
 어떤 50대가 나에게 말했다. ‘가난과 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지도 않은 세대 아닌가. 중학교 입시와 고등학교 입시가 사라졌던 세대가 아닌가.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그렇게 쉽게 간 세대가 단군이래 없었을 것이다. 취직도 얼마나 쉽게 되었던가. 학교 앞에 대기업의 차가 와서 학생들을 모시고 가던 세대다. 취업을 하고 나서 경기는 얼마나 좋았나. 10% 성장율까지 보인 고도성장의 세대다. 세계 역사상 그런 유래가 없을 만큼 실컷 먹고 잔치 벌린 가장 풍족한 세대가 아닌가. 그러면서 뭐가 힘들다고 징징대는 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도 50대지만, 우리는 정말 편하게 살았다.’ 라고.
 
 그 사람의 이야기에 바로 다른 50대가 “그건 당신 생각”이라고 일갈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었겠군.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덤으로 억울함이 솟구쳐 올라오기도 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적어도, 
 기본 규칙과 규율이 있고, 그에 대해서 변치 않는 적용이 있고, 열심히 하면, 이렇게 가면, 성실히 하면, 이 길이 正道다. 라는 룰이 지켜져야 하지 않나. 
 이제 인생의 절반정도를 살았는데 지금 느끼는 것은 나보다 어린 세대, 혹은 내 자식들이 엄마 이 길이 正道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글쎄..어떤 인간이 정권을 잡고 누가 교육감이 되고 누가 입시제도에 손을 대느냐에 따라 정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아랫세대들에게 정답과 규칙을 가르쳐 줄 수 없는 세상. 그 때 그 때 다르다고, 융통성있게 살아야 한다고. 정답은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게 오늘의 현실. 
 
공분을 논하기 바쁜 인터넷 場에서 조만간 “경상도 50대 개새끼론”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용어에 광분하지 마시라. 한 때 20대 개새끼론이 유행이었다.) 
저항할 게 없어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제 그냥 맥이 빠져버린 것이다. 
 
저항은 언제나 지속된다. 운명에 대해, 관습에 대해, 삶에 대해, 불가항력적인 권력에 대해, 내 욕구에 대해, 인간은 끊임없이 저항해야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저항이 모든 이에게 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저항은, 저항하고 싶은 자에게만 가치가 있다. 
 
그런데, 맥 빠져 버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몇 백년전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 “레 미제라블”에 이렇게들 광분하시는지. 
당신들의 마음속에 장발장에게 투영한 그 부글거리는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지, 들여다 본 적 있는가. 
 
  
 
 
 

그럴 수도 있지?

1.

며칠전에, 동네 엄마에게 제안을 받았다.

근처에 어린이 전용 수영장이 생겼는데 수영복이랑 수건만 챙겨서 보내면 씻기고 말리고 차에 태워서 보내준단다.
4명 그룹짜며 보내면 할인해 준단다. 아들도 같이 보내지 않겠니. 하고. 그 엄마 아들은 초딩 2학년.
얼만데요? 물어보니 할인해서 주 2회 강습에 3개월 선납하면 52만원이랜다.

딱 짤라 거절하기 곤란했다.
어린이 수영에 대한 나의 생각은
_ 절대 혼자 머리감고 옷 갈아입고 수영장에서 자빠지지 않을 나이에 보낸다. 이기 때문에.

오후에 다시 전화가 왔길래 그렇게까지 시킬 필요 없는 거 같은데 아무튼 제안해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6개월내에 수영마스터”를 강조하신다.
..

수영은.. 재밌자고 하는 거 아닌가;;;
나도 이제 배우는데;;
내 대답은 “수영선수 시킬 것도 아닌데..” 였다.
아무튼 고맙다고는 했다.

2.

그 날 오후에 만난 동네 또 다른 엄마.
낮에 수영 제안 받은 얘기 했더니 아 거기까지 연락이 갔구나 한다.
요즘 우리 아들 뭐 하냐고 물어봐서 유치원에서 방과후를 매일 하니까 애가 좀 피곤한 거 같아서
(내가 시킨 거 아님!!! 지가 한다고 그랬음!!!) 태권도만 보내고
일 있어서 애 좀 맡겨야 할 때는 블록놀이방 보내는데 본인도 좋아하고 수업 하나 하겠다고 하도 졸라서 주 1회만 보내고..
태권도에서 주말 수업 하는데 그것도 보내달라고 해서 토요일 오전에 보낸다. 했다.

미술학원 다니지 않았어요? 하길래
인제 흥미를 잃은 거 같아서 안 보내요, 하면서 “미대 가야 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했더니
그 엄마왈 “그러게.. 체대를 갈 것도, 미대를 갈 것도 아닌데..” 라고 한다.

이 엄마는 최근 남편이, “내가 지금 행복한가” 하는 고민에 빠져 난감하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기도 교육때문에 자꾸 누군가에게 떠밀리는 느낌이라 괴롭다고 한다.
뒤쳐지지 말라고 시키는 건데 이게 뭔가 싶다는 거다.

나는 얼마전에 초등학교 4학년 수학문제를 봤는데 도저히 공부 하라 소리 할 수 없게 생겼던 얘기를 하며, 이게 변별력을 위해 만든 문제라면,
내 새끼가 수학천재면 풀 것이고, 아니면 마는거지..
굳이 공부 잘해 대학 잘 가 직장 잘 들어가 대기업의 부속품으로 7-8년 근속하고 나이 마흔에 인생 이모작 해야되는거면, 난 그것보단 장바닥 전투력과 사회성이 더 중요하지 않겠나 라고 얘기 했다.

그러게요..라며 그 엄마는 멍한표정을 지었다.
애가 뒤쳐지지 말아야 하니까. 라는 그 엄마에게
뭐 공부가 많이 떨어져요? 물으니, 아니 그건 아닌데..

내 기준에 공부가 많이 떨어져요? 는 글을 못 읽거나 계산을 못하는 경우, 혹은 본인이 성적이 너무 떨어지거나 학교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하는 경우를 말한다.

글쎄 나는 예체능이나 애가 사춘기를 넘길 수 있게 꽂힐만한 뭔가는 꼭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공부는. 글쎄.. 억지로 시키면 올라가서 뛰어내리든가 가출하든가 둘 중 하나 아닐까 싶은데.. 정도로 얘기하고.

그 엄마가 뭔가 더 얘기하고 싶었으나, 저녁이 늦어,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3.

이웃에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가
학교 – 보습학원- 태권도를 마치고 요일별로,
학습지 선생님, 미술학원, 피아노 레슨을 받는 아이가 있다.
10시 정도에 받아쓰기 공부를 하다가 자는 모양인데,
이 친구는, 주로.. 한 페이지 푸는데 1시간 이상 걸리는..
집중력이 아주 떨어지는 아이다. 그렇다고 ADHD는 아니고, 그냥 재미가 없어서 하기가 싫은 아이.
그 엄마는 애 옆에 앉아 있으면 자꾸 소리 지르게 되고 그래서 자리를 뜨면 애는 딴 짓하고 손톱 쳐다보고 있고, 그러다 보니 애는 또 숙제를 늦게 하고 그래서 엄마가 또 화를 내고..
반복이라고 한탄한다.

4.

오늘 같은 태권도를 다니는 형아의 엄마에게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사범님한테 야단을 맞았다며 울고 들어왔는데 애는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하지 못하고 너무 서럽게 울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싶다며 우리 아들한테 좀 물어봐 달란다.

아들이 설명해주는 상황은,
어떤 꼬맹이가 그 형한테 자꾸 까불고 놀리고 그래서 형이 참다가 화가 나서 “나쁜 말”을 했단다. 무슨 나쁜 말? 이냐고 물으니 입에 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말을 돌린다.

그 엄마는, 아들이 울며 들어와 놀랐고,
그 나이때는 다 그런 거 아니냐.
우리 애가 먼저 잘못한 거 아닌데 왜 야단을 맞아야 하나 이런 생각인 거 같았다.

좀 친한 사이라 나는

“언니 남자애들은 현장에서 바로 잡아 주지 않으면 뭘 잘못했는지 전혀 깨우치질 못해요. 기억을 못하니까. 나중엔 별로 감도 안 오나보더라고. 나중에 얼르고 달래고 설득하는 게 통하는 건 여자애들 스타일이지.
그리고 태권도는 무조건 연장자가 참고, 욕을 하면 욕한 애가 무조건 더 혼나는 거고, 꼬맹이는 야단을 쳐도 잘 모르니까, 형들이 양보하고 참고 가르쳐라 이게 메뉴얼인 거 같더라구요.
큰 애들이 화를 못 참아서 손 한 방만 나가도 작은 애들은 나가 떨어지니까 일이 더 커지잖아요. 그래서 그런거겠지.”라고 얘기했더니
이 엄마는..

많이.

놀랐나보다.

그래 그래 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정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5.

엄마들은 아이들이 야단맞고 들어오면 싫은걸까. 모두?
관심이 있으니까 교사로서 야단도 치고 그러는 거 아닐까?

라는 질문을 트윗에 올리니.
트위터에 어떤 분이 요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 별로 없다며.
자기 자식을 야단칠 권리는 부모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물론 다 그렇다고 말할 수 없고 쉬운 일반화를 시킬 수 없으므로)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니가 잘못했으니까 선생님이 야단을 쳤을 것이고,
야단맞을 짓을 했을 것이고,
선생님은 집단을 규율하는데 있어서 어떤 규칙이 있을 것이고,
설령 불공평한 일이 있었거나, 다 똑같이 잘못했는데 혼자만 걸려서 억울하다 하더라도 그 억울할 일을 하지 않았으면 될 것이며,
선생님이 정말 너에게 관심이 없고, 돈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교육업자면 절대 너를 야단치지 않을 것인데. 라는 생각은.
옛날 부모들의 생각이라는 의견도 들었다.

내가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건지,
내가 이상한 사람인건지.

그래서 큰 아이 자격증 학원에서 애 야단쳤다고 죄송하다는 식으로 그렇게 누누히 강조했나.

아니, 근데 보습학원 같은 데서는 막 엎드려뻗쳐도 시키고 매도 때리고 하던데
이건 뭐지.

공부를 안하는 건 야단맞아도 되지만, 다른 사안은 “그럴 수도 있지. 공부하느라 힘든데” 하고 넘어가는 건가?

다 미친건가?

내가 너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나?

그럴 수도 있지, 싸울 수도 있지, 욕할 수도 있지, 때릴 수도 있지, 저 아이가 열받게 했대잖아요. 이게 바로 학교폭력의 가해자의 시발점인데.

6.

그럴 수도 있지, 사대강 팔 수도 있지. 토건 중요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해군기지 건설할 수도 있지. 국가 방위력 중요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성폭행 할 수도 있지. 꼴렸다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 있는거야? 다??

2012. 4. 12.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 조금.

1.

민주주의의 원칙이 다수결이라고 한다면, 다수는 늘 현명한 판단을 내릴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다.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 명제를 전복시켜야 지배가 용이하다. 대중은 우매하며, 함부로 휩쓸린다는 가치를 내세워야 한다.

2.

대중의 무지함과 잔혹함을 역설하기 위해선 소수지배계층이 이 의견과 여러 사례들을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노출시켜야 한다. 당신들이 의견을 모아봤자 모두 쓸데없다고. 그리하여 사회적 잔혹뉴스가 유통되면 그들에게 좋다. 신문의 사회면의 잔혹성과 비도덕성이 부각될 수록 대중은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하며 스스로 차별화 하여 고립된다. 대중의 고립과 상호간의 불신은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3.

(1)대중이 우매한 권력자를 선택하거나 잘못된 주권행사 (투표/선거)를 하는 경우는 숱하게 많다. 이 상황의 원인중 하나로는 권력층에게 독점된 정보의 폐쇄성에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은폐, 왜곡, 즉 거짓말이 정의(定意)로, 명제로 유통되고 점령하는 것이다.

4.

국가권력의 지도자가 올바른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하기 위해선 지도자를 앙망하는 정치가 아니라 시스템이 확고해야 한다. 이 경우 (2)지도자가 절대 善을 추진할 수 없음도 감안해야 한다. 훌륭하고 능력있고 선량한 지도자가 그러한 정책만을 펼친다는 것은 환상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그 어떤 지도자도 독단적으로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음을 말한다.

5.

그리하여 법(헌법)과 중재, 감시기관이 모든 권력을 철저히 나눠갖고 이 시스템이 그 어떤 폭력적 정권이나 지도자가 나오더라도 변질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감시체계가 되는 법을 누가 정하느냐와 감시기관이 특정계층에 의해 장악당했을 경우 민주주의는 보완할 방법이 없다.

(1), (2)는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에 나온 문장의 차용입니다.
이건 책을 읽으며 한 생각들이고, 앞으로 더 좋은 생각이 나면 또 정리해보겠습니다.

2012.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