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양은!

“내 담주에 교회 댕겨오니라 늦을끄야. 그래도 좀 봐둬.” 라고 지난 주에 미리 얘기하고 글쓰기 수업에 늦게 오신 84세 갑순씨,
앉자 마자 분통을 터뜨리신다.

“나라가 나라가, 나라가 이게 뭔 꼴이고.
내는 막 미쳐버리겠다.”
고 하신다.

갑순씨는 박근혜를 ‘박근혜양’이라고 칭하셨다.

“이게 뭐꼬 이게.
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을 벌려놓고 말이다.
내사 마 내가 그 광화문에 나도 나가서 막 미치고 싶다 안카나.
내도 막 소리지르고 막 그 위에 드러누버버리꼬 싶다.
내가 나이만 더 젊었으믄 거 나가서 나도 소리 지르고 그러고 싶다.
박근혜양은 무릎꿇고 빌어야 된다.
잘못했다고 말해야한다.
아이고 내가 마.. 이게 뭐꼬 이게.”

내가 1번 찍으신 어르신들이 더 배신감이 큰 거 같다 했더니
“거럼. 배신이지. 배신이다. 우째 이리 망쳐놓을 수가 있나.
우리가 전쟁 다 겪고 진짜 배곪아 가며 이래 만들어 놓은 나라다.
그래도 나는 새마을운동 때문에 나무 껍질 벗겨먹던 시절 벗어났다고 그래도 박대통령 존경했다. 근데 이게 뭐꼬 이게.
어매 내가 막 밤에 잠이 안 온다.
내는 죽는 것도 안 무섭다. 내가 막 매달려 죽어부리고 싶다.
내 좀 보라고. 내 고생한 게 다 뭐냐고 응 이 말이야아.”

안동출신 갑순씨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앞에 앉은 서울태생 춘예씨는 눈이 벌겋다.
“아 그만 얘기해요 형님.
난 눈물이 나.”

춘예씨 옆에 고흥사람 연례씨가 날 보며 말한다.
“어. 여긴 계속 울었어. 울드라고. 서럽다고.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어. 1번은 안된다 했잖아. 걔들은 안돼.
그거 이제 돈 해먹은 거 다 받아내야지. 전부 다 받아내야돼.”

부산싸나이 영석씨도 한마디 한다.
“그 최태민이가 목사 아이가. 그라믄 그래도 좋은 점만 배우면 될낀데 우째 그래 못된 거만 배워처먹었나 모르겠다.”

네 사람은 한참동안 분통을 터뜨리며 얘기했다.
배신이다 배신.

평생 1번만 찍고 산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어르신들을 만나다 보면,
어버이연합 알바 나가는 분도 만나고, 민주평통 행사 나가시는 분들도 만나게 된다. 이분들은 조국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하고 나가시는 분들이다. 추선희 같은 사람의 입담에 끄덕끄덕 할 수도 있다.
1번은 좋은 거니 1번만 찍는다는 분들도 있다. 정의당이 1번이거나, 노동당이 1번이라해도 그래도 1번을 찍을 분들이다.

이들이 겪은 공포, 이들이 겪은 가난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놀다가 폭탄이 떨어져 반쯤 날아가버린 집을 바라보던 열 살남짓의 어린아이, 배가 고파 나무뿌리를 캐다가 푹푹 삶아먹던 어린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 어느 날 갑자기 총살당한 삼촌, 날 버리고 도망간 엄마, 널부러진 시체의 산, 의붓동생을 업어 키우느라 학교를 포기했던 어린이, 피난 길에 부모를 잃은 어린이, 자고 일어나면 피난민 천막이 산을 메워버린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제발 생각 좀 하고 사세요.”라고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될까.

나는 흥분한 어르신들에게 이 얘기를 마무리하자며 부탁했다.

“그러니까 어머님 아버님, 다음에는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찍어주세요. 젊은 사람들한테 인기 많은 사람 찍어주시면, 저희가 잘 해볼께요. 잘 감시해볼께요.
2016년 12월.
(기록해놓고 업로드를 안 해 이제 올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나 우리 아버지 얘기 할 거 있어.
 
(1936년생, 여, 전남 구례 출생)
 
우리 아버지는 서른 여덟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열 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내가 태어나기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는데.
왜정때니까
아버지가 징용을 피해서
어릴 때니까
엄마한테 자세히 알아놓을 걸 안 들어놓은 게 한이 돼.
옛날엔 도라꾸(트럭)라 그랬어요.
인부들을 싣고 아버지가 객지로 막 다녔어요.
징용에 안 갈라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서당 열고,
한문 한글 다 하고,
밖에 나가서 일 하고.
집에 잘 안 오고 그랬는데.
 
함경도로 평안도로 객지로만 다녔을 때.
내가 9살 때까지.
내가 아홉 살 때.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우리 아버지가 교육열이 강한 분이라,
나를 초등학교 입학 시켜놓고
또 객지로 돈 거야.
나는 그 때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나 놓고, 아버지랑 객지 다니러 가는데
엄마한테 가지 말라고 치마자락 붙잡고 막 따라 가고
울었던 생각이 나.
엄마가 여기서 학교 잘 다니고 있으면
열심히 다니면
꼭 온다 한 거야.
 
815 해방 됐는데,
어렴풋이 그게 음력 칠월칠석날일거여.
저녁에 우리 친구 하나가,
우리 놀러가자 하고
그 같이 놀던 동네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를 떼어놓고 간다 해서
그럼 우리도 놀러가자 하고 갔는데,
우리 안 가 그러는데
그러니까 실갱이를 한 거지.
근데 그때,
언니 친구가
나를 보고, 이래 돌아보더니
순이야 순이야
니 엄마 아버지 오셨다 해서
어메 나, 지금도 머리가 막 쭈삣쭈삣 설라고 그러네.
열 살 조금 넘었을 때니까.
그때가.
 
그래가지고
아이고 지금도 목 매어서 얘기 못하겠네.
학교 댕긴다고 1년을 떨어져 살았어.
 
거기서 그러고
이제 해방도 되얏고, 징용 갈 일이 없으니까,
세간살이도 사고 아버지 월급도 받고
대충 뭐가 생각이 나는데
9살 때는 엄마 아빠만 갔으니까 모르지.
(그 세간살이도 사고 이래가지고)
도라꾸에 실어가지고
도라꾸를 먼저 고향으로 보냈는데
도라꾸 기사가 사기를 치고
사라져버린거야.
응. 도라꾸랑 같이. 그렇지.
엄마 아버지랑 기차 타고 가고
이제 차만 먼저 보냈는데.
그리 돼 버린 거야.
살림을 홀딱.
 
그래도 사람이 무사히 들어와서 다행이다 하고
응 우리 엄마 아버지가 그리 말하드라고.
참말 행복하게 살았지.
 
 
여수 반란사건 났잖아.
무지한 백성들 그냥 막 갖다가
처단하고
눈만, 눈만 껌뻑거려도 잡아가고 그러던 때.
그런 때여 그때가.
여기서 안 죽이면 저기서 죽이고.
그때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가신 거지.
육이오 사변 나기 전 해.
그리고 육이오 나고.
 
 
▶옆 자리 할머니가 말을 보탰다.
▶징용을 안 가셨는데 돌아가셨네.
 
 
징용 안 갈라 했는데 그렇죠잉.
나도 태어나기만 거기서 태어났지
객지로 객지로 다녀서.
친구가 없어요.
 
아버지는 열세 살에 돌아가시고
형제는 오남매인데, 남동생 하나 먼저 죽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 아버지가 건설업, 감독정도 되는 거지.
내가 어릴 때 따라다닐 때 보며는,
함경도 갔던 생각이 나는데
여섯 살, 다섯 살인가.
지금도 이북애들 보면 집들 나오는 거 보면
그때 내가 봤던 집 그대로 나오는 게 있어.
일자 집인데, 일자 집 여기 이렇게 나란히 있어.
한 세대씩 줘서 거기서 인제 몇 세대가 사는데,
어리니까 데리고 다닌 거지 이리 저리 다녀야 하니까.
어떤 때는 기차도 타고 다니고.
 
우리 증조 할아버지부터 벼슬아치 집안이라는데
자식도 딸 둘 아들 하나 삼남매 중에 우리 엄마가,
몸종까지 일 봐주는 사람까지 다 대동해서 시집을 보내서
일을 할 줄 몰라.
당췌 일을 할 줄 몰라.
그러니 시골에서는 이리 저리 벌어먹을라면
품이라도 팔아야 하는데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
김도 못 매고 아무 것도 못하는거야.
품팔이도 못 한거야.
일을 할 줄 몰라서.
그래서 우리가 엄청 고생했어.
18살 때까지 살다가 인제 거기 살다가 연천으로 갔어.
소개를 해서 고모할머니가.
거기 살만한 집이 있다 해서.
연천이 제 2고향이 되어버렸어.
 
제가 1936년생인데.
그때 연천이 종전 막 되고 난 다음이니까
머 아주 하꼬방에 판자집에 뭐 움막에 그냥 난리도 아니고
거기가 그니까 휴전선 바로 아래 니까 아주 그냥 머.
 
그래서 내가 이제 컸으니까
빵 만드는 집에 취직하고, 돈 벌고
결혼해가지고 살림 놓고 살았지.
그래서 그때부터는 고생을 덜 했어.
 
우리 어머니가 재주가 없어가지고
고생을 많이 했어.
우리 어머니는 몇 년도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는데
일흔 아홉에 에 부산서 돌아가셨어.
 
왜정때 징용 피해 이리 저리 객지로 돌아
여순반란 나서 아버지 죽어
전쟁 나고 구례 사는데 지리산으로 패잔병 숨어들고,
밤이면 밤마다 이 빨치산들 와서 있는 대로 다 집어가.
트럭 사기 당했지.
빨갱이들한테 밤마다 털리지
어머니는 능력이 없지.
오남매가 고생을 많이 했지.
 
우리 엄니가 그때는,
참 어떻게 저렇게 자식들한테 저럴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가 그때 서른 넷 다섯인데.
 
자기 집에서 아씨 아씨 하던 사람이,
얼마나 황당했겠어.
 
재가는 무슨,
양반집이라 재가도 못하고
재가 하면 그 동네에서 쫓겨나지. 난리나.
우리 어머니도 대단하고,
우리 아버지도 참 대단한 분이야.
그때는 딸들은 안 가르쳤어요.
아들 딸 안 가리고 능력대로 가르치겠다고 우리아버지가.
나를 가지고 그렇게..
내가 조금 똑똑했는지,
공부 잘 하면 대학까지 꼭 보내주마 했는데
돌아가셨어.
엊그제 같어. 그게.
나는 아버지 얘기만 하면
이렇게 지금도
눈물 나와.
눈물이 나서……
 
 
2017년 1월 16일.
서울, 동대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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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할매들 – 과거와 과거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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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 골목은 사라져버렸다. 높게 둘러친 펜스를 따라 독립문초등학교 앞에서 골목을 찾는다. 독립문 초등학교는 오늘 입학생 예비소집일인가보다. 지킴이 아저씨가 어린이와 엄마들을 맞이하고 있다. 한 아이가 두리번거리자,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할머니와 같이 왔다고 저어기, 오고 계시다고 대답했다.

골목을 내려간다. 천주교 무악동 선교본당이 있다. 낮은 기와지붕, 나무대문을 밀고 들어선다.
노인들을 만나러 간다. 분명히 대부분 여성일테지.
서까래가 있는 대청마루에 어디선가 진동이 올 때마다 문이 흔들리는 유리달린 나무문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든다. 88년쯤,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마당이 있는 한옥집. 마당엔 성모상이 있다.
할머니들이 미리 모여 명찰을 달고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를 따라 온 어린아이가 지루함을 참아내려 애쓰고 있다. 방학은 모두에게 쉽지 않다. 예상대로 남자노인은 없다.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의 내공을 알아채는 신묘한 기술이 나에게도 생겼다. 활동가의 내공이 강하게 느껴지는 팀장과 인사를 주고 받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업공간과 나누어 둔 곳에는 낮은 탁자위에 과자와 인스턴트 차가 마련되어 있다. 이런 곳에서 잽싸게 차를 타고 물을 끓이는 이는 언제나 내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간식거리를 대접하는 일에 늘 굼뜨다. 나도 커피믹스를 하나 타 마셨다.

바닥은 따뜻했다. 다리를 모으고 앉은 노인들이 다리를 구부리고 있기 힘들다고 말한다. 나는 다리를 뻗으시라고 얘기했다. 저도 관절염이예요. 저도 이따가 뻗을거예요. 노인들이 쑥스럽게 웃는다. 수업이 시작되고 글쓰기 교재를 나눠드리자 글은 쓸 줄 모른다고 할머니들이 입을 모은다. 글 쓰란 소리를 하지 말라고 못을 박는다. 말로 하면 열권 이상도 얘기한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구술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 토박이들일테고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엔 지역의 역사가 담겨 있을거다. 할머니들은 넓은 마당이라는 마을의 한 곳에 대해 말했다. 검색엔진이 알려주지 않는 넓은 마당이라는 곳은 예전에 공터가 있던 곳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패드를 꺼내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재빠르게 받아 적었다.

29년생부터 50년생까지. 무려 21년이나 나이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묶였다. 이름, 나이, 고향, 서울에 언제 오셨어요? 라는 걸 가지고 자기 소개를 했다. 고향은 어디고, 서울엔 언제 왔고, 이 동네엔 언제 왔고, 지금은 어디에서 누구랑 살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단 고생한 얘기가 먼저 터진다. 첫 만남부터 자기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별하고 혼자 지낸 할매는 왜 그리 많은가. 왜 옛 사람들은 남자들이 그리 일찍 죽었을까. 평균수명으로 남자들이 더 짧게 살다 간다지만, 내가 만난 노인들 중 젊은 시절 남편을 잃은 할매들이 꼭 몇 명씩 있었다. 스물아홉에 혼자되었다, 서른여덟에 혼자되었다는 할매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6-70년대에 애 딸린 과부로 살던 사람들은 “안 해 본 일”이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범주의 돈벌이를 했다. 대부분은 장사다. 광주리를 이고 시장에 나가 팔아보는 걸로 시작을 한다. 여성들이 직장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없었다는 얘기다. 아이들은 둘 이상이다. 집 가까운 곳에서 장사를 하면 아이들도 들여다볼 수 있고 동네에서 아이들끼리 잘 크기도 했다. 고등어를 떼어다 판다고 나섰다가 생선 아가미에 구더기가 낄 때까지 한 마리도 팔지 못해 그대로 버렸다는 얘기부터, 그 무거운 수박을 받아다가 리어카에 실어 판 얘기, 요즘은 가사도우미라고 하는 남의집살이, 아모레 화장품 장사, 미제장사,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각종 비정규직 노동의 직업이 등장한다. 그때는 직장이 있어서 월급을 받으면 살기가 편한 것이었고, 직장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그날 그날을 자신의 노동과 입담으로 해결해야 했다. 할매들의 이야기를 받아치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무용담 삼아 말하던 내 모친을 떠올렸다. 엄마 고생은 고생도 아니다 생각했다가, 비슷한가 했다가, 노동의 강도를 어디가 더 세다고 비교하는 것은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한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바닥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가운데 낮은 천장 아래 둘러앉아 있으니 이야기가 더 잘 나오는 것이겠다. 정면을 보고 앉는 교실형 구도와 둘러앉아 있는 구도는 한 장소내의 권력서열을 말해준다. 학교의 교실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이다. 특정인에게 특정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압박은 사람을 유순하게 만드는 것인지 비겁하게 만드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비슷한지를 말하는 자리에 높낮이가 있을 필요는 없다. 할매들의 이야기는 한 시간 반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29년생인데도 미모가 빼어난 할머니가 잘 안 들린다며 나를 보고 자꾸 웃는다.

– 예전엔 못 배우고 글 모르는 게 참 부끄르왔는데, 이제는 그런 거 없어. 살만치 살고 고생할 만치 다 했는데 멋이 부끄러. 안 부끄러인쟈.

– 못 배운 것보담도, 살다 보니 이뤄놓은 게 없어서 내가 참 부끄럽습니다. 어딜 가서 앉아 있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잘 못하고 그럽니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살았는데, 어쩌다가 이래 되얏나 모르겠심다. 나는 생전 구경도 안 댕겨봤어요. 제주도도 못 가봤습니다. 그리 살았는데, 어찌 지금 사는 게 이렇습니다.
– 우리가 몇 번 봤어도, 이런 얘기는 오늘 처음입니다. 내 살아온 얘기를 누가 들어줍니까. 이렇게 말할 기회도 없었고, 나도 말해 본 적이 없는데 얘기 해보니 참 재미있고 좋네요.

허리가 적당히 굽은, 다리가 적당히 휜, 노인들이 주섬주섬 힘겹게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할매들을 보내며 신발을 확인한다. 신발 안 미끄러우세요? 추운데 잘 여미고 들어가세요. 나는 부러 살가운 척 한다. 때로는 옷깃도 여며드리고 신발을 신는 사이 들고 있는 커피잔도 들고 서 있는다.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다 만 제일 젊은 어르신이 내 옆에 선다. 사잇문에 몸을 반쯤 기대고는 잘 뚜등긴다고 칭찬을 한다. 타자를 빠르게 친다는 말이다. 할매라 부르기 애매한 이 분은 붉은 모직 모자를 쓰고 서서 아들이 만나고 있는 여자 흉을 본다.
맘에 안 들어 죽것어. 그러실만 하겠는데요.
그래도 낼 모레 칠순인데 여기서는 막내시네요. 라며 웃으니 잇몸을 보이며 큭큭대고 웃는다.
사는 게 무셔. 나는 자다가 깨서 멍, 하니 있을 때가 많아. 여기 노인네들 봐봐. 내가 젤 어린데. 내가 이쟈 낼 모레 칠십이면, 팔십까지, 구십까지 살아야 허잖어. 죽지도 몬하고. 죽는 게 반갑지는 않을 것이고. 10년, 20년을 내가 어찌 견디나. 나는 사는 것도 무섭고, 죽는 것도 무섭고. 우울햐. 에이. 기분이 안 좋아. 어째 갈수록 사는 게 무서워.

사는 게 무섭다고. 나도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모르는데,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으면 앉은 자리가 그대로 무덤이겠지. 나도 사는 게 무섭다.

어르신들과 일별하고 돌아오는 길, 남대문을 향해 가는 수문장 교대식 행사행렬을 본다. 과거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이다. 어쩌자고, 왕조의 기억만 남겨두는가. 변변한 무덤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과거는 모두 어디에 묻혔나.
남산을 돌아 해방촌으로 내려서며 지나가는 여자들의 얼굴을 훑는다. 나의 과거 어디메에서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늙지 않고 있는 이태원언니들을 찾는다. 미제장사 했다는 할머니의 미소를 떠올린다. 역사의 과거에 돌아앉은 행촌동 골목길에서, 타인의 과거를 엿듣고, 나의 과거를 지나, 나의 미래에게로 돌아간다.
오늘따라 햇빛이 따가워 눈에 멍이 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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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근데 계속 가는데 마다 느끼는 건데, 아무래도 할매들이 날 좋아하는 거 같다. 아마 다 내 몸에 붙은 살 덕분이 아닌가, 마 그래 생각하고 있다.-

☆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협동조합 은빛기획의 공동사업에 관한 기록입니다. 계속 쓸란지는 잘 모르죠 뭐.

2017. 1. 11.

작은 장례 – 2016년 1월 21일

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사랑의쉼터, 돈의동 첫 작은장례를 치르다.

 

돈의동은 탑골공원의 담벼락을 끼고 돌아 종로 3가에서 5가의 숨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주거지역이다. 주소는 돈의동 103번지. 103번지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한 사람이 산다. 103번지에만 700여명이 산다. 이들은 모두 혼자 산다. 옆 방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고, 삶을 나누며 형제처럼 가족처럼 지내는 이도 더러 있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은 혼자다. 사람들은 이들을 쪽방촌 홀몸노인, 혹은 독거노인이라고 부른다. 700여 명 중, 노년층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노인인 것도 아니다. 103번지의 골목을 오가다 보면 꽤 많은 장년층을 볼 수 있다. 사회적 약자인 청년 장애인도 눈에 띈다.

고독사가 이슈로 부각되며 노인고독사에 대한 이야기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통계청에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고독사망자 연령비율 1위는 60대 이상 독거노인이 아니라, 50대 남성이었다.

103번지 주민들은 어딘가가 아프다. 젊은 시절 산업재해를 입은 사람, 직업으로 인한 질병을 얻은 사람, 여러 이유로 마음을 다쳐 술로 달래다 몸도 다친 사람, 직업병, 만성질환, 성인병, 신체적 정신적 장애, 이들은 모두 각자 다양한 이유로 아프고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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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사랑의쉼터 복도에 붙어 있는 돈의동 지도

가족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기초공동체다. 이 기초공동체를 기반으로 사회가 이루어지고 지역과 국가와 이익집단이 탄생한다. 기초공동체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돈의동과 다른 쪽방으로 흩어진다. 이들은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개체가 되어 골목을 떠돈다. 이들은 가난과 굶주림, 추위나 더위 따위의 물리적 환경은 사람이 사람의 손을 잡고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몇 년 전 노숙자 인문학운동을 하던 이가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 노숙자의 공통점이 게으르거나, 술문제가 있거나, 아프기 때문인 거 같냐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가족이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대화를 할 사람도, 없어요.”

돈의동에 사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세상에 가족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고 사람에 의해 길러진다.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아무도 없는 막막한 어둠, 어쩌겠는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 돈의동에 모인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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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103번지. 2015년 가을촬영

이 돈의동의 복지를 담당하는 것은 종로1,2,3,4가 주민센터와 사랑의쉼터라는 복지관이다. 복지관은 구세군재단이 위탁운영을 한다. 작은 골목의 사이로 허름한 건물이 하나 있다. 지하엔 교육관과 샤워시설이 있고, 1층과 2층엔 휴게공간이 있다. 3층에는 사무실과 상담실이 있다. 이화순소장과, 사무국장과, 복지사 둘이 이 공간에서 업무를 본다. 복지관 쉼터 계단에는 “주폭”에 대한 경고가 여기 저기 붙어 있다. 술을 먹고 난동을 피우는 주민들이 많다. 5년간 일한 복지사는 주민에게 폭행을 당해 상해를 입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 거기 있다. 주민들이나, 주민복지를 책임지는 행정직들도 술 때문에 괴롭다. 술을 마셔서 괴롭고 못 마셔서 괴롭다. 술에 취해서 괴롭고, 술이 안 취해서 괴롭다. 그래도 살아야하니까. 맨 정신에 버틸 수 없는 날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술을 마신다. 가난한 자들의 마취제는 화학작용으로 만든 술뿐이다. 소주 한 병 만큼의 위로는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

다들 자기 한 몸 누일 쪽방보다 커다란 사연을 품고 산다. 죽이고 달래고 얼러봐도 상처받은 일들은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추운 날 시린 걸음을 걸을 때마다 길모퉁이에서 툭 치고 튀어나오는 고통이 이들을 들볶는다. 사연을 말한들 무슨 소용 있겠냐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추운 겨울, 쪽방촌에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한 달에 한두 명은 시신이 되어 103번지를 떠난다. 이들은 무연고자다. 공고를 내도 가족을 찾아도, 시신양도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죽음은 무연고 독거자의 시신처리라는 이름을 쓴다. 장례절차 없이 바로 화장장으로 향한다. 죽어 사라질 육신은 모두 마찬가지지만, 이들을 기억하는 103번지의 이웃들은 애도를 표할 방법이 없다. 살아서 한 줌 도움이 못되었다면 가는 길이라도 잘 보내주고 싶은 103번지의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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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쪽방촌의 한 건물. 아래에서 위로 3층까지 주거공간이 있다. 2015년 여름 촬영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죽음의 의식을 개선하는 단체다. 상업주의에 휩쓸려 가정의 대소사도 외주를 주게 된 이 시대에 함께 하는 상포계를 통해 의례의 힘을 확인하고자 한다.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출자금과 조합비를 내고 혈연으로 한정하지 않은 타인의 장례를 준비한다. 그 조합비의 24%중 20%는 조합운영비, 그 중 1%를 공동체 기금으로 조성하고 4%는 연합회 회비로 사용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성을 가진다. 무턱대고 사회공헌만 하는 곳은 협동조합보다 사회복지재단이 걸맞다.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모인 협동조합이라면 공동체의 회복에 지출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이 원칙을 지켰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는 상포계를 통해 상장례의식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자기 분야를 지키며 사회공헌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돈의동 사랑의쉼터와 MOU를 맺었다.

직장으로 처리되는 돈의동 주민들의 장례를 대신해서 치르기로 약속했다. 병원의 영안실이나 상조회사의 식사대접, 화려한 제단과 방문객을 대신해, 이웃들이 죽음의 본질을 생각하며 애도하고 한 번쯤 그를 기억하고, 영정사진을 놓고 잘 가라고 이별의 인사를 건네고, 함께 살던 공간에서 그를 기리는 일,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착안한 “작은 장례”이다.

장례의식은 상업적 상조회사의 난립으로 변질되었다.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알고 있는 장례절차는 전통의식과도 다르고 죽음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도 아니다. 상품으로 만들어질 수 있고 계산서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남았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작은 장례를 통해 이윤을 창출할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사회환원이기 때문이다. 2015년 겨울이 깊어갈 때 작은 장례를 약속했다.

2016년 1월에 돈의동에서 사망자가 발생했고 약속한대로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사랑의쉼터와 첫 작은 장례를 준비했다.

좋은 일을 할 때 외부에 얼마나 알려야 하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갈등한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서의 가르침 때문인지 좋은 일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불편해한다. 작은 장례를 준비하며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이 사람의 죽음을 한 번쯤 기억해 달라는 의도였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추도식을 취재하겠다는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사무국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슈화되어 이것이 마치 행사처럼 비춰질 때, 가치가 훼손되고 본질이 곡해될까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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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사랑의쉼터 복지관 앞 2016년 1월 21일 아침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아침. 며칠 째 혹한이 몰아치고 있었다. 엘니뇨현상으로 겨울이 따뜻할 거라더니 자연현상은 인간이 예측하기 어렵다는 걸 반증이라도 하듯, 일주일째 영하 10도에서 수은주는 깔짝대기만 했다. 대설이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겨울철 맑은 하늘은 추위의 상징이다. 하늘이 맑고 햇빛이 쨍쨍했다. 사랑의쉼터 앞에는 카메라와 휴대폰, 수첩을 든 취재진들이 몰려왔다. 이 풍진 세상을 등지고, 가시는 길 평안하길 바란다는 추도사를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김상현 이사장이 읽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이사장과 사랑의쉼터 이화순 소장이 상주가 되었다. 삼베완장을 차고 조문객을 맞았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웃들이 소식을 듣고 와 조문을 했다. 사랑의쉼터 지하 교육장엔 작은 제단이 차려졌다. 고인의 독사진도 없어 주민등록증을 확대해 영정사진을 놓았다. 검소한 꽃바구니 두 개가 제단을 지켰고, 흰 국화와 향, 간소한 제기가 놓였다. 간단한 다과가 한쪽에 차려졌다. 쪽방만한 돗자리에 이웃들이 차례대로 신을 벗고 올라가 고인과 이별했다. 신발을 벗은 맨발을 사진기자가 뒤에서 찍었다. 굳은살만 남은, 한 생명의 삶을 말해주는 발뒤꿈치에 애도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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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한 아이가 조문을 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에게 소주 한 병의 위로가 되었을까.

적어도 오늘 돈의동을 떠난 고인의 죽음은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여기 한 사람이 힘들게 살았고, 그리고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를 기억했고, 2천 원짜리 국수를 지하시장에서 먹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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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상가 지하시장, 조문객들은 2천원짜리 잔치국수를 나눠먹었다.

몇 사람은 말했다. 나도,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알 수 없는데, 나 가는 길도 저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2년째 결연장례를 약속했다. 가는 길을 약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집단구술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조합원이 늘어나고 한겨레두레의 공동체기금이 늘어날수록 외로운 죽음이 줄어들 것이다. 누구나 죽는다. 같은 하늘 아래 머리를 내리고, 같은 땅 위에 발 딛고 살던 사람들은 먼저 가는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그의 삶을 기억하고 이별을 슬퍼할 권리가 있다. 사람답게 사는 길 너머에 사람답게 이별하는 의식이 있다. 장례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옆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손을 맞잡을 수 있다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차가운 삶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질지도 모른다.

골목에 뒹구는 소주병처럼 깨어지지 말자고, 훈훈하게 덥힌 따뜻한 술이 되어, 고인의 가는 길을 덥히고 싶다.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 종로구 돈의동 103번지에 살던 故김철구씨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