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나 우리 아버지 얘기 할 거 있어.
 
(1936년생, 여, 전남 구례 출생)
 
우리 아버지는 서른 여덟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열 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내가 태어나기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는데.
왜정때니까
아버지가 징용을 피해서
어릴 때니까
엄마한테 자세히 알아놓을 걸 안 들어놓은 게 한이 돼.
옛날엔 도라꾸(트럭)라 그랬어요.
인부들을 싣고 아버지가 객지로 막 다녔어요.
징용에 안 갈라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서당 열고,
한문 한글 다 하고,
밖에 나가서 일 하고.
집에 잘 안 오고 그랬는데.
 
함경도로 평안도로 객지로만 다녔을 때.
내가 9살 때까지.
내가 아홉 살 때.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우리 아버지가 교육열이 강한 분이라,
나를 초등학교 입학 시켜놓고
또 객지로 돈 거야.
나는 그 때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나 놓고, 아버지랑 객지 다니러 가는데
엄마한테 가지 말라고 치마자락 붙잡고 막 따라 가고
울었던 생각이 나.
엄마가 여기서 학교 잘 다니고 있으면
열심히 다니면
꼭 온다 한 거야.
 
815 해방 됐는데,
어렴풋이 그게 음력 칠월칠석날일거여.
저녁에 우리 친구 하나가,
우리 놀러가자 하고
그 같이 놀던 동네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를 떼어놓고 간다 해서
그럼 우리도 놀러가자 하고 갔는데,
우리 안 가 그러는데
그러니까 실갱이를 한 거지.
근데 그때,
언니 친구가
나를 보고, 이래 돌아보더니
순이야 순이야
니 엄마 아버지 오셨다 해서
어메 나, 지금도 머리가 막 쭈삣쭈삣 설라고 그러네.
열 살 조금 넘었을 때니까.
그때가.
 
그래가지고
아이고 지금도 목 매어서 얘기 못하겠네.
학교 댕긴다고 1년을 떨어져 살았어.
 
거기서 그러고
이제 해방도 되얏고, 징용 갈 일이 없으니까,
세간살이도 사고 아버지 월급도 받고
대충 뭐가 생각이 나는데
9살 때는 엄마 아빠만 갔으니까 모르지.
(그 세간살이도 사고 이래가지고)
도라꾸에 실어가지고
도라꾸를 먼저 고향으로 보냈는데
도라꾸 기사가 사기를 치고
사라져버린거야.
응. 도라꾸랑 같이. 그렇지.
엄마 아버지랑 기차 타고 가고
이제 차만 먼저 보냈는데.
그리 돼 버린 거야.
살림을 홀딱.
 
그래도 사람이 무사히 들어와서 다행이다 하고
응 우리 엄마 아버지가 그리 말하드라고.
참말 행복하게 살았지.
 
 
여수 반란사건 났잖아.
무지한 백성들 그냥 막 갖다가
처단하고
눈만, 눈만 껌뻑거려도 잡아가고 그러던 때.
그런 때여 그때가.
여기서 안 죽이면 저기서 죽이고.
그때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가신 거지.
육이오 사변 나기 전 해.
그리고 육이오 나고.
 
 
▶옆 자리 할머니가 말을 보탰다.
▶징용을 안 가셨는데 돌아가셨네.
 
 
징용 안 갈라 했는데 그렇죠잉.
나도 태어나기만 거기서 태어났지
객지로 객지로 다녀서.
친구가 없어요.
 
아버지는 열세 살에 돌아가시고
형제는 오남매인데, 남동생 하나 먼저 죽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 아버지가 건설업, 감독정도 되는 거지.
내가 어릴 때 따라다닐 때 보며는,
함경도 갔던 생각이 나는데
여섯 살, 다섯 살인가.
지금도 이북애들 보면 집들 나오는 거 보면
그때 내가 봤던 집 그대로 나오는 게 있어.
일자 집인데, 일자 집 여기 이렇게 나란히 있어.
한 세대씩 줘서 거기서 인제 몇 세대가 사는데,
어리니까 데리고 다닌 거지 이리 저리 다녀야 하니까.
어떤 때는 기차도 타고 다니고.
 
우리 증조 할아버지부터 벼슬아치 집안이라는데
자식도 딸 둘 아들 하나 삼남매 중에 우리 엄마가,
몸종까지 일 봐주는 사람까지 다 대동해서 시집을 보내서
일을 할 줄 몰라.
당췌 일을 할 줄 몰라.
그러니 시골에서는 이리 저리 벌어먹을라면
품이라도 팔아야 하는데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
김도 못 매고 아무 것도 못하는거야.
품팔이도 못 한거야.
일을 할 줄 몰라서.
그래서 우리가 엄청 고생했어.
18살 때까지 살다가 인제 거기 살다가 연천으로 갔어.
소개를 해서 고모할머니가.
거기 살만한 집이 있다 해서.
연천이 제 2고향이 되어버렸어.
 
제가 1936년생인데.
그때 연천이 종전 막 되고 난 다음이니까
머 아주 하꼬방에 판자집에 뭐 움막에 그냥 난리도 아니고
거기가 그니까 휴전선 바로 아래 니까 아주 그냥 머.
 
그래서 내가 이제 컸으니까
빵 만드는 집에 취직하고, 돈 벌고
결혼해가지고 살림 놓고 살았지.
그래서 그때부터는 고생을 덜 했어.
 
우리 어머니가 재주가 없어가지고
고생을 많이 했어.
우리 어머니는 몇 년도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는데
일흔 아홉에 에 부산서 돌아가셨어.
 
왜정때 징용 피해 이리 저리 객지로 돌아
여순반란 나서 아버지 죽어
전쟁 나고 구례 사는데 지리산으로 패잔병 숨어들고,
밤이면 밤마다 이 빨치산들 와서 있는 대로 다 집어가.
트럭 사기 당했지.
빨갱이들한테 밤마다 털리지
어머니는 능력이 없지.
오남매가 고생을 많이 했지.
 
우리 엄니가 그때는,
참 어떻게 저렇게 자식들한테 저럴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가 그때 서른 넷 다섯인데.
 
자기 집에서 아씨 아씨 하던 사람이,
얼마나 황당했겠어.
 
재가는 무슨,
양반집이라 재가도 못하고
재가 하면 그 동네에서 쫓겨나지. 난리나.
우리 어머니도 대단하고,
우리 아버지도 참 대단한 분이야.
그때는 딸들은 안 가르쳤어요.
아들 딸 안 가리고 능력대로 가르치겠다고 우리아버지가.
나를 가지고 그렇게..
내가 조금 똑똑했는지,
공부 잘 하면 대학까지 꼭 보내주마 했는데
돌아가셨어.
엊그제 같어. 그게.
나는 아버지 얘기만 하면
이렇게 지금도
눈물 나와.
눈물이 나서……
 
 
2017년 1월 16일.
서울, 동대문에서.
170116_%eb%8f%99%eb%8c%80%eb%ac%b8-011

실패입니다.

– 뭘 써야 할 지 모르겠어요. 나는 이룬 것이 없고, 내 인생은 다 실패예요.

나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든 이 분에게 그렇지 않다고 우길 작정을 했다.

– 여기 책에 있는 글도 그렇고, 이 교재, 응? 이 책, 여기 있는 사람, 방금 읽은 그것도 그렇고. 이렇게 사람들이 살다 보면 그래도 뭐 하나라도 이룬단 말이죠. 나는 전혀 그런 것이 없어요. 아무 것도 해 놓은 게 없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실패예요.

나는 짖궃은 표정으로 “아닐껄요.” 하고 웃었다.

– 정말이예요. 나는 다 실패. 모든 게 실패.

“성공한 사람들은 오늘도 죄다 청문회장에 앉아 있잖아요.”
노인의 앞에 앉았던 영감님이 내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굵은 주름이 남은 굽은 손가락으로 노인은 얇은 글쓰기 교재를 쥐고 가만히 있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듯 했다.
다른 노인들은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그 분 앞에 팔꿈치를 대고 가까이 말했다.

“아버님, 우리 모두 다 죽잖아요. 인생에 성공이 어딨어요. 모두 다 죽는다는 건 결국 다 실패한다는 말이잖아요. 아닌가요?”

허허허.
노인이 웃었다.

– 나는 다 실패여…

“어떻게 실패했는지 알려주세요. 그럼. 실패인지 아닌지 좀 보게요.”

노인이 환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는 것인지, 기분이 나아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굽은 허리를 일으켜 노인이 나에게 목례를 했다.

“다음 주에 꼭 뵈어요.”

다짐을 받고 싶었다. 당신이 배운 것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공부 잘 하고 돈 잘 버는 게 성공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의 입으로 듣고 싶어졌다.

알 수 없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 라고 뇌까리며 형광등을 켜둔 채로 모로 누울 지, 나는 알 수 없다.

– 1월 9일 월요일, 서울 동대문에서.

 

2017. 1.9.

170109_silver-039

혓바늘이 돋는다

1.
엄마,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이 신을 만든 게 아닐까?
– 그거 니가 몇 년전에도 물어봤던 거야.
그때도 엄마가 그런 거 같다고 했었어.
그랬나?
– 어.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 풍진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왜 이따위로 살아야 하는지, 왜 계속 싸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신이 있다고, 불가항력이라고, 내가 범접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믿어버리면 그때부터 모든 삶은 심플해진다.

이것이 내 팔자라고, 사주가 그렇더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면 안간힘을 써도 안되는 일에 관해,
알 수 없는 우주의 기운을 믿어버리면,
내 인생이 그닥 쓰레기같지 않게 느껴지니까.
내 삶의 모든 노력이 공허하게 부정당하지 않는 기분이 드니까.

2.
다음 주에 끝나는 종로구 모처의 노인글쓰기 수업의 참여자들은 중산층 이상, 대다수 연금생활자로 보인다.
그 격차는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고학력자들이고 글솜씨가 매우 빼어나다.
직접 한글파일에 사진을 붙이고 사진에 캡션을 붙이는 70대가 있다. 반포주공아파트가 천 만원일 때, 아파트를 사지 않고 카메라를 샀다는 노인이 있다. 평생 공직에 있어서 인생이 참 무료했고 오만하게 살았다고 고백하기도 하며, 개인의 모든 울분을 사회적 문제와 정치이슈로 간단하게 치환해버리는 수구전통의 성향을 가진 분이 거침없이 박근혜는 자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편이 은행원이었고 나중에 회계사가 되었는데도 사는 게 늘 가난했다고 고백한 77세 여성노인이 있었다. 모두들 은행원 월급이 썩 괜찮은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했고, 그녀가 혹시 사치를 한 건 아닌지, 욕심이 많았던 건 아닌지 의심하는 질문이 오갔다. 77세의 곱상한 이 할매는 성격이 명랑하고 장난기도 많아 뒤에서 보고 있으면 중학교 2학년 응원단장 같다. 사람들의 질문에 토라진 할매에게 다가가, 남편이 자수성가했고 줄줄이 동생들 공납금을 대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무슨 사정인지 알 거 같다고 말을 걸었다.
저는 그거 이해해요. 밑빠진 독에 물 붓기죠. 라고 웃었더니,
육남매의 외아들이고 혼자 공부한 남편이었다며 자기도 육남매의 맏딸이었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개천에서 난 용은, 그 개천의 장력에 의해 이무기로 생을 마감하기 마련이다. 집집마다 개천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하늘로 승천하지도 못한 채, 가시나무 가지에 걸려 억울하게 뜬 눈으로 소멸되는 삶이 있다.

줄줄이 매달리는 동생들의 공납금을 대고, 병든 가족의 병원비와 약값을 대고, 집집마다 있는 화상들의 사고를 치닥거리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졌던 사람들이, 왜 국가의 의무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나, 이해하고 싶어졌다.

복지관 뒤에 아파트에 혼자 사는 영감님은 월 300만원 정도 되는 연금을 받아 살고, 막내딸은 미국에서 박사과정 공부중이라 했다.

3.

큰 아들이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보증사기를 당하고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로 1년이 흘러가, 며느리와 교대로 아들을 돌보는 84세의 노인은 월 40만원으로 살고 있다. 쓰러진 아들이 빚을 내어 구해준 전세집의 보증금이 5천만원이 넘고, 연락이 끊긴 둘째 아들도 호적에 올라 있어 아무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복지관에 나오면 시름을 잊는다고 고백했었다.

평생을 비정규 공무원으로 일했던 78세 노인은 부인을 일찍 여의고 딸들은 가난하고 아들은 소식을 모른다. 복지관 청소를 하며 노인사회활동 급여로 월 20만원을 받고, 노령연금 20만원도 받는데, 매달 월세가 22만원이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노인사회활동이 중단되어 다음 달 월세를 내기 어렵다고 주거비 지원을 요청했다고, 복지사가 전했었다.

지난 달에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다.

그 이전에는 쪽방촌에 사는 노인들을 만났고, 작년 겨울에는 쪽방촌의 작은장례에 갔다.  발이 없는 노인이 문상을 왔다. 그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지하 장례식장으로 들어서 슬리퍼를 벗고 고인에게 절을 했다. 고인과 그는 지나가다 몇 번 본, 이웃이다.

나는 수업 중에 노인들이 하는 말을 기록하다가
“왜 노인들의 빈부격차가 이리도 큰가” 라고 적었다.
그리고 10초쯤 쉬었다가 바로 아랫줄에
늙으나, 젊으나 매한가지. 라고 덧붙였다.

4.

파업과 철야농성중에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더라는 전설같은 사내가 환갑을 넘기고도 여전히 뽀얀 얼굴로 매일 TV에 나와 조근조근 말을 한다. 이제 그는 원했던 원치 않았던, 사람들이 그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난세의 영웅을 바란다.

그 방송국에서 하는 예능프로에 “운이 좋아 노래로 먹고 살게 되었다”는 빼어난 미모의 여가수가 나와 말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꿈이 부정당하는 말과 같으니까. 그 사람이 간절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간절히 원했던 게 무엇일까.
그녀의 말과 달리, 사실 나는 아무 것도 간절히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간절히 원했던 건 살아남는 거였다.
폭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지뢰가 터지는 언덕을 넘어 까닥하면 온 몸이 터져버릴 지도 모르는 순간마다, 그저 살아남기를, 그저 별 일 없기를 바랐는지도.

5.

일찍 세상을 떠난 막내삼촌은, 1951년 1월 1일 생이었다. 천하에 불운한 팔자라고들 했다. 남들의 말처럼 삼촌은 자기 능력을 단 한번도 발휘하지 못하고 바다 건너에서 위암으로 일찍 갔다. 문득 삼촌 생각이 났다.

미국의 오바마 케어가 사라질 거라 한다. 나는 다시 아버지의 약을 부쳐야 할 것이다.

모두들 살아남고자 한다.
조금 더 근사한 모습으로 살길, 조금 더 의연한 모습으로 죽길.
올 겨울은 박근혜탄핵을 돕는 우주의 기운 때문인가 뜨듯한 겨울이다. 몸이 많이 피곤한데, 사람들의 상처가 자꾸 혓바늘처럼 입속에 맴돈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야겠다.

2017. 1. 4.

161214_%ec%a4%91%eb%a6%bc30
2016년 12월, 서울 중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