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마을에서 같이 놀기

문화공동체 히응이 잘 하는 강의 중의 하나는, 마을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주제입니다. 각 단체나 공동체마다 마을에서 뭔가를 하고 싶은데,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때 강의를 요청해옵니다. 각 사업주체마다 소재를 정해놓고 문화공동체 히응과 구체화시킬 수 있습니다. 한 번의 특강만 주어졌다면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수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초계획을 함께 짜보는 시간을 마련합니다.

작년에 이어서 “평촌 청소년문화의 집”에서는 마을에서 세대공감을 이뤄내는 청소년활동을 기획했습니다. 2019년에는 큰 상도 받았다더군요. 올해는 코로나19로 비대면 강의를 준비했습니다. 청소년문화의집에 방문해 ZOOM으로 활동할 청소년들을 만났습니다.

세대공감은 주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번에도 작년과 같이 청소년들이 노인정이나 경로당을 방문해 마을에서 함께 공감하며 다양한 활동을 기획할 예정입니다. 저는 노인들의 생애사 강의 경력을 활용해 노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례들을 공유하고, 인터뷰와 취재의 기본을 설명했습니다.

평촌동에서 마을어르신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만들어나갈 청소년들을 응원합니다.

2020년 5월 30일, 평촌청소년문화의 집 강의장면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명랑할매

https://www.vop.co.kr/A00001466408.html

2020년 2월 7일, 민중의소리 발행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복지관이었다.

생애사쓰기를 하러 온 노인들이 스무 명 넘게 앉았다. 각자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이미 있었다. 연금생활자가 많았다. 먹고 사는 데 큰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후가 편안한 사람들은 대부분 공직자 출신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다수 그랬다.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은 중간에 IMF를 비껴가지 못했다. 장사하던 사람들은 더했다. 어떻게든 IMF 이전에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센 풍파에 밀려 다 한 번씩 쓰러졌다.

복지관의 위치나 평소 이용자의 소득수준에 따라 생애사쓰기 프로그램에 모이는 사람들도 달라진다. 사회복지사가 일일이 연락해서 프로그램 설명도 잘 듣지 못한 채로 교실에 와서 앉아 있는 경우는 저소득층이 많지만, 자발적으로 모집공고를 보고 오는 사람들은 경제적 형편이 낫다. 저임금 고노동에 몰입해서 하루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적다는 말이다. 아껴 쓰면 큰 문제 없이 산다는 것이고, 자녀들이 일정한 소득을 유지해서 부양의무에서 벗어난 이들이기도 하다. 이 복지관은 프로그램 공고를 보고 자발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아껴 쓰고 근면하게 일해 중산층에 진입한 이들이다. 이들이 처음 공기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매번 생활비가 모자라 빚을 얻어 쓸 정도로 공무원 급여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퇴직할 때쯤에는 모든 상황이 좋아졌다. 정확한 신분보장이 되니 은행대출도 쉬웠고 정보도 빨리 얻었고 따박따박 고정적인 급여가 나오니 맘만 먹으면 집은 살 수 있었다. 저항하지 않아도, 어쩌면 저항하지 않아야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보수적인 생활태도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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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팔자 때문이 아니라고

https://www.vop.co.kr/A00001458067.html

2019년 12월 31일 민중의 소리 발행

올해도 생애사쓰기 수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주로 공공기관에서 오전에 수업을 열고 노인대상으로 수강생을 모집한다. 어떤 기관은 65세 이상으로 한정하기도 하고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인이용자들에게 모집공고를 주로 알리기도 한다. 굳이 노인으로 한정할 것은 없지만 여러 기관에서 선호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대체로 한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는 감동이 있다. 특히 자기 삶을 글로 정리하겠다고 모이는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떳떳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라야 자기 삶을 글로 써보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다. 글도 쓰고 발표도 하고 나중에 책자로도 묶어낸다는 프로그램 설명이 있으니 대부분 공개할 자신이 있는 사람들만 모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기관에서는 글로 쓸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모아놓기도 한다. 그런 경우엔 수업시간에 편하게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그걸 받아 적어 글로 변환해주기도 한다. 교육프로그램에 구술사기록의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내가 목적하는 바는 자기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를 책자에 넣고 그 과정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결과물을 보존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기관이 모두 이들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경험했던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가 종이에 새겨진 것을 보며 귀하게 여긴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 담은 리어카 끌고 이동하는 길에 은행나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 담은 리어카 끌고 이동하는 길에 은행나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김철수 기자

길게는 석 달 정도 자기 삶을 계속 반추해가며 기록해 나가는 작업은 쉽지 않다. 중간에 연락도 없이 안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초반에 모집한 사람들에 비해 30%정도가 남으면 성공인 셈이다. 서른 명 넘게 모집해도 많이 남으면 열 명 남짓이고, 대부분 그보다 더 적은 숫자가 마지막까지 원고를 써서 제출한다. 60대를 노인이라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적어도 70대가 넘어야 노인이라 할 수 있는데, 직접 글을 쓰고 자기 글을 고쳐오고 사람들 앞에서 낭독을 할 수 있는 80대들이 많이 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가난을 헤쳐온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잊고 있다가 다시 떠올리기도 하면서 자기 삶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기도 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한숨을 쉬면서 스스로의 ‘팔자가 기구해서’, 또는 자기 부모의 ‘팔자가 사나워서’라고 서술한다. 자기 삶을 되새길 때는 대한민국의 연대표에 자기 삶을 채워나가는 숙제를 낸다. 해방, 전쟁, 1.4후퇴, 4.19혁명, 이승만하야, 5.16 군사쿠데타를 말하다 보면 한 개인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사회적 사건 옆에 가족과 개인의 서사를 보태 적다 보면 팔자 때문이라기보다 나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 나의 사생활을 뒤틀기도 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의도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여러 사안들에 대해서 묻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사람들이 기억하는 해방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랐다. 태어났을 때 이미 일제가 지배하고 있었고, 집안에 딱히 민족과 일제를 설명할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그들에게 해방은 ‘국가의 패망’이었다. 어린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에는 일본의 패전을 슬퍼하며 울던 사람들과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공존했다.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다.

박복한 팔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쉬워질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성들의 경우 바람난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항상 있었다. 어떤 수업을 들어가도 한 명 이상 같고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자기 어머니를 두고 새어머니를 얻어 식까지 올린 아버지도 있고 오랫동안 두 집 살림을 하거나, 아예 집을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박복한 팔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쉬워질 것이다. 인과관계를 찾을 필요도 없고 그저 그런 운명에 의해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던 일들을 설명하기 쉬워진다. 박복한 팔자는 한 사람에게 귀착되고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이유는 없다. 팔자때문이니까.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뉴시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들이 겪어왔던 일들은 우리가 같은 땅에서 같은 제도 아래 같은 역사를 겪었기에 파생된 일들이다. 한 나라에서 같이 사는 건 운명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같은 시험을 보고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재난을 겪어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듯이, 같이 보고 겪은 것들 때문에 인생이 뒤집어지기도 한다. 내가 저지른 게 아닌데 내가 피해를 본 일들이 있다면 그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 욕심을 채우는데 눈이 먼 권력자들의 성급한 결정때문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말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오래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일들이 다 나 때문은 아니라고.

올해 만난 당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에게 나눠주면서, 들어줘서 고맙다고 해준 덕에 나 역시도 잘 버텼다. 건강이 허락될 때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던 당신들이 조금만 더 건강하면 좋겠다.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야 할 때마다 서글펐다. 당신들의 삶은 충분히 반짝이고, 이미 넘치도록 아름답다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모두 고마웠다고.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 노인생애사

결혼은 아버지가 소개해 준 사람이랑 했다. 막상 결혼해서 시댁에 가보니 너무 가난했다. 집이란 게 기어들어가고 기어나갈 형편이었다.

서울에 정착하기로 했다. 서대문 앞에 살았다. 거기서 아이들 사남매를 키웠다. 홍제동 꼭대기에서 아침에 밥을 먹고 출발하면 서대문 독립문 앞에서 수돗물을 받을 수 있었다. 물지게를 지고 가서 물을 길어서 집까지 걸어오면 점심시간이 넘은 오후 2, 3시였다. 매일 매일 사는 게 너무 고단했다.

돈을 벌어야 하니 아들을 업고 학교 옆 축대 옆에서 주전부리를 파는 장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남편이 보수적이라 내가 밖에 나가 장사하는 걸 알리지 못했다. 나는 장사해서 번 돈으로 시골에 소를 한 마리 샀다. 소가 커서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커서 또 소를 팔면 큰 재산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막내딸이 돌도 안 되었는데 애 아빠가 병이 들었다.

입원을 해서 2년간 병원생활을 하니 샀던 소도 팔아야 했다. 막내는 퇴원해서 돌아온 제 아빠를 못 알아보고 아저씨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동네에 이집 저집 놀러 다니며 “우리아빠는 몸이 아파서 집에 있어요.”라고 말하고 다녔다.

남편은 이후로도 일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굶겨 죽일까봐 매일 매일이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살았다. 힘들어도 힘들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학교 앞에 애를 업고 쭈그리고 앉아 장사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엄두도 안 난다. 아이들이 학교를 못 가게 되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다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10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다가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남은 건 빚뿐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생선도 팔고, 파출부도 다니고, 청소일도 했다. 돈 버는 일은 다 했다.

*서울 모복지관 강모노인의 생애사 중의 한 토막.

이 분은 한글을 뗀지 얼마 안되어 글자가 많이 틀렸지만 수업 중에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내가 재구성하고 있다. 아이들이 굶어죽을까봐, 학교 못 갈까봐. 그게 제일 두려운 일이었다는 말,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살았다는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