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에도 안양과천교육지원청과 함께 하는 “찾아가는 넘나들기 시민교육” 학교 신청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팬데믹에도 불구하고 344개학급이 신청하였으며, 그 중 다섯 개 학교가 2+4 프로젝트를 신청해, 시민단체가 2회 4차시 수업을 진행하고 담당교사가 1회 2차시를 진행하는 연계활동을 시범적으로 시작합니다. 인권, 노동인권, 공정무역에 관한 수업을 준비하게되었습니다.
이룸의 올해 출강분야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권 – 90여개 학급
공정무역과 사회적경제 – 80여개 학급
평화감수성과 평화통일 – 80여개 학급
다양성, 젠더 – 60여개 학급
미디어 – 30여개
노동인권 – 10여개로 여섯 개 팀이 2021년 1년에 걸쳐 안양과 과천 지역의 초중고등학교에 출강합니다.
2015년 총 120만원 예산으로 12개 학급 출강했던 이룸의 민주시민교육이 6년차를 맞아 37배 성장했습니다. 안양과천교육지원청의 꾸준하고 든든한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2020년부터는 안양시청과 과천시청에서도 일부 예산을 추가반영해주어 더 많은 학생들이 민주시민교육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올 한해 이룸은 총 1만여명의 학생들을 만나게 됩니다. 안양과 과천에서는 인생의 한 시기, 지역의 활동가들과 민주시민교육을 고민한 적 있다는 것이 이룸에게 큰 보람이 됩니다. 시민의 힘으로 함께 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강사팀에게도 응원과 격려를 보냅니다.
학교 민주시민교육을 비롯해 일반시민대상의 민주시민교육이 필요한 공동체는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감사합니다.
2020년, 코로나19의 감염에서 내가 먹고 살기 위해 했던 일의 절반은 사업계획서를 수정하는 일이었다. 그 중의 절반은 담당자에게 비용산출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설명하는 일이었다.
“온라인인데 왜 더 비싸요?”
“장소대관 안해도 되는데 이렇게 돈이 들어가요?”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실시간 하시면 되잖아요”
“유튜브에 일주일에 한 건씩 업로드하면 되지 않나요? 애들도 한다던데”
“왜 꼭 해외 사이트를 사용하려고 하시죠? 국산 화상채팅앱도 있다던데요”
나에게 저런 질문을 한 사람들의 80%는 공무원이었고, 정부지원자금을 받아 1년짜리 사업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나머지 20% 정도 된다. 1인미디어의 시대, 4차산업혁명의 시작이라는 주제어가 사람들의 인식을 어떻게 꼬아놨는지 확인했다. 그 실타래를 푸는 작업으로 상반기가 다 지나간 셈이다.
“모바일 기기로 유튜브 실시간 방송을 시작하려면 일단 방송할 채널의 구독자 수가 1천 명이 넘어야 합니다. 계정도 없으시다고요? 유튜브로 송출하려면 발언자 소리가 잘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행사를 제대로 촬영하려면 적어도 3대의 마이크와 3대의 카메라와 이 기계를 잡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편집은 소프트웨어로 하지만 결국 사람 손이 갈 수밖에 없어요”라는 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온라인에서는 모든 사람이 정보와 콘텐츠의 소비자가 될 수 있고 생산자도 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누구나 계정만 가지면 방송도 할 수 있고 책도 펴낼 수 있다.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정보나 콘텐츠를 만들어내려면 사람들이 볼 만한 내용을 구성할 기획력이 있어야 하고, 그 기획에 따라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전개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필요하며, 현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살려낼 수 있는 기계와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온라인으로 회의를 진행한다는 것은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한다. 누구나 접근은 가능하지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수준의 품질은 누구나 만들어낼 수 없다. 기계와 기술만 있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실시간 송출이라는 건 안정적인 통신환경이 필요하다. 일정한 데이터가 기복 없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야 비슷한 용량을 가진 화면이 보이지 않는 통신선을 타고 내 눈앞에 놓일 수 있다는 걸,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만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저 모든 장비와 기계와 통신선이 필요없이 한 장소에 모여 앉으면 되는 일이니까. 마이크를 굳이 갖다 놓지 않아도, 카메라 두 세대가 각도를 달리해서 따로 찍지 않아도, 통신선을 끌어와 장비에 연결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마이크가 없을 때는 듣는 사람은 귀를 기울이거나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면 되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성대와 배의 힘까지 이용해 소리를 키울 수 있는 만큼 더 큰 목소리를 내면 된다. 카메라가 없어도 고개를 돌리거나 잠시 허리를 곧추세우는 것으로 내가 원하는 각도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인간의 신체는 이다지도 위대하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러웠던 것을 온라인 공간으로 옮겨와 복원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투입되어 숙련된 기술과 비싼 장비를 써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온라인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답하다 보면 지치기도 했다. 나름대로 어떤 사람들은 잔꾀를 부려 비용을 절감하거나 필요한 장비를 축소해서 진행하자고 했다. 처음에는 그에 응하기도 했으나 하반기로 갈수록 나도 배짱을 부렸다. “네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해요. 그렇죠.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요. 네네, 하지만 그렇게는 못합니다. 안됩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코로나19의 전염이 다음 해에도 지속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각종 행사의 온오프라인 병행은 2020년을 기점으로 자리 잡을 거라 판단했다. 초기에 시작되는 일들의 기준을 잡아둔다 해도, 일은 반복되면서 폄하되고 훼손되기 십상인데 조금 더 강력한 규칙을 적용해야 융통을 발휘할 범위도 생기지 않겠는가.
기준이 없이 온라인 행사와 교육이 중구난방으로 진행되다 보니 각 예산집행처의 담당자 권한도 강력해졌다. 담당자가 온라인 행사에 투입될 비용의 산출근거를 이해하면 결정권을 가진 상사의 결재를 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예산집행이 결정되는 것이다. 어떤 담당자는 온라인 회의 툴을 왜 미국산을 쓰냐면서 국산도 있다고 “국산품애용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공기관에서 해외결제를 용납해줄 리 없다고 체념한 어느 단체 담당자는 개인사비로 유료버전을 구매해 시비를 마무리했다.
특강이나 교육프로그램 강의 섭외때에도 녹화했다가 쓰면 안되느냐는 질문이 빗발처럼 들이쳤다. 녹화영상을 어디에 배포할 것이며, 어느 플랫폼에 업로드할 것이며, 언제까지 사용할 것인지 계약서를 쓰고 얘기하면 모두들 없던 일로 하자고 말을 바꿨다. 녹화영상은 상호소통이 없어서 임기응변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온라인으로 전환해서 성공적인 그림을 만들고 싶다는 곳도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성공적인 그림은 방송국에서나 가능한 모습이었다.
온라인시스템이 기계화되었다고 해서, 어플에서 모든 걸 해준다고 해서, 그걸 작동하는 사람이 카메라 뒤에 서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다들 모든 걸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앞서 얘기한 기계와 기술이 필요 없이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대부분 해결되는 인체의 신비를 이해하지 않을뿐더러, 화면 뒤에 숨어있는 사람들은 고려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의 방송을 만들기 위해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는 스텝들과 실감이 나는 영상을 찍기 위해 동상과 열사병, 근골격계 질환을 감수하는 제작자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에 올라 깃발을 꽂고 만세를 부를 때, 무거운 등짐을 지고 카메라 뒤에서 묵묵히 허술한 옷차림으로 걸어 올라가는 셰르파들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명 아니었을까.
소프트웨어 하나를 만들려면 수많은 협업과 지난한 노동이 필요하다. 심심풀이로 했던 게임의 오류를 잡아내느라 밤을 새우다 죽어가는 개발자들의 이야기가 소리 없이 사라질 때, 콤마 하나 더 찍어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홈페이지 때문에 애먼 상담원에게 분풀이를 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이다. 기계나 시스템이 돌아가는 원리는 종사자가 아닌 이상 다 알 필요도 없고 다 알 수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변치 않은 단 한 가지 원리까지 무시하면 곤란하다. 2020년에 내가 접한 저 많은 황당한 질문은 모든 일을 사람이 해야 한다는 걸 무시한 태도였다. 4차 산업혁명으로 모든 일을 기계가 대체하게 된다는 게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기계화는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숙련된 노동으로 기계를 조작하고, 기계가 고장날 경우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없는 관리자들만 우왕좌왕하는 상황을 만든다. 기계는 오류가 나기 마련이다. 기계는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같이 있어야 원활하게 작동하며 그 가치를 빛낼 수 있다. 무대를 설치하고 의자를 깔고 내빈석이라는 글자를 출력해 종이에 붙이는 것만이 노동으로 보인 것일까. 촬영을 한 뒤 편집을 하고 업로드를 하는 것은 귀신이 하나?
우리의 시공간을 연결해주는 작업은 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버스나 전철을 타고 가서 행사장에 앉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보이지 않는 타인의 노력만이 앉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덜 움직여도 되는 편리한 개인의 삶은 언제나 누군가의 노동을 깔고 앉아 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편리하고 빠르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노동이 켜켜이 쌓여가는 소리다. 보이지 않는 노동은 귀신같이 일한다. 아무도 모르게, 소리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용자가 고개를 들어봐도 몸을 일으켜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말아야 한다.
인류가 처음 기계로 영상을 봤을 때, 귀신의 짓이라 했다. 우리는 여전히 그 노동들을 귀신으로 취급하며 2021년을 맞았다. 노동자는 이름이 있다. 그들의 노동은 귀신놀음이 아니다.
이상선: 지역에서 여러 민주시민교육을 많이 하고 있는데, 관련한 내용들을 길게 보고 논의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경기도 평생교육진흥원의 공모사업에 선정이 됐습니다. 여기서 나눠 주신 얘기들을 녹취하고 정리해서 12월 15일에 종합토론회를 열려고 합니다. 그때 참석해 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사전에 드린 질문지는 다른 분야의 FGI 질문지와도 내용이 비슷합니다. 다만 오늘은 노동 전문가 분들을 특별히 모셨기 때문에 노동 분야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현재 각 단체나 기관에서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하고 계신가요? 어떤 교육을 시행했고 어떤 성과를 거뒀다고 보시는지요. 현황도 곁들여서 얘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한수: 민주노총에서는 일반 시민 대상 강연을 정례적으로 하지 않고요, 아주 가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조합원 대상 교육을 할 때가 많아요. 최근에 한세대에서 조합이 만들어져서 조합원을 대상으로 강좌를 진행하고 있어요. 무엇이 올바른 조합 활동인가,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가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최저임금위원회가 다음 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6월 말까지는 지역 내에서 역세권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시민 대상 캠페인이죠. 조그마한 수첩을 나눠 드려요. ‘노동자 권리수첩’이라고 해서 근로기준법, 임금 계산법, 부당노동행위 대처법을 담은 작은 소책자입니다.
최은식: 한국노총에서도 매년 조합원을 대상으로 교육을 합니다. 산별 교육도 진행하고요. 시민 대상으로는 1년에 한두 번 대중 강좌를 엽니다. 경기도에서 지원하는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하는 것인데 사실상 인문강좌예요. 안양과 군포가 만든 협의회에 한국노총이 참여해서 기초고용질서 지키기 캠페인, 감정노동자 존중 캠페인도 분기별로 진행 중이고요. 법이나 조합 활동에 대한 교육은 꾸준히 이루어지는데 더 기본적인 인권, 민주주의 등에 대한 교육은 부족한 것이 현실이에요.
김상봉: 안양군포의왕 비정규직센터에서도 강의를 많이 하고요. 경기도 청소년 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도 센터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계획한다든지 교재를 개발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고요. 경기도교육청에서 발간한 노동인권 교과서 집필에도 저와 사무국장이 1년간 관여했습니다. 서울에서도 활동 중인데, 강서구 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일하면서 노동인권, 노동조합에 대한 강의를 합니다.
노동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려면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정치, 경제의 판세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개인이 노동자성을 확보할 때 조직력이 강화된다고 봐요. 이런 부분에 중점을 두고 교육활동을 해 왔습니다.
성과는 제 입장에서는 알 길이 없네요. 개개인의 삶이 바뀌는 것이 성과일 텐데 제가 일일이 들여다볼 형편이 못 되니까요.
이상선: 평가 결과를 측정하는 지표가 없나요?
김상봉: 강의 뒤에 설문지 작성을 부탁해서 받아 보기는 하지만 질문 수가 많지 않아요. 강의 후에 참여하신 분들과 얘기를 나눠 보면 열망은 있어요. 그런데 어디에 가서 어떤 자문을 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꾸준히 공부하고 삶을 바꿀 수 있는지, 누구와 이런 얘기를 해야 할지를 잘 몰라요. 그 점이 한계인 것 같습니다.
이상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의 경우에 수강생을 어떻게 모집하세요?
김상봉: 강서구에서는 한 번에 3~4시간씩 15강~20강을 진행합니다. 철학, 역사, 자본주의, 경제, 노동조합을 얘기해요. 노동만 들어가면 지자체에서도 거부감을 느낄 수 있지만 이렇게 전반적으로 구성하니까 깊이 있는 교양 강좌로 봐 주는 것 같습니다. 지원하는 분들은 소속되어 있는 단체나 지역 기관의 홍보를 보고 오시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 뭔가 문제가 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간다는 고민들은 많이 하시니까요.
이상선: 일반 시민 대상으로 그런 교육을 하면 딱딱하고 어렵게 느끼실 것 같아서 여쭤봤어요. 강의 방법에 따라 느낌은 달라질 수 있겠죠. 청소년 대상 교육은 학교에 직접 가서 하시나요? 교장선생님이 거부하시는 일은 없는지 궁금하네요.
김상봉: 3년 전부터 경기도에서 공식적으로 민주시민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서 학교에 직접 가서 수업을 진행합니다. 간혹 불편해하시는 교장선생님을 대할 때도 있어요. 아이들한테 의식화교육을 하지 말라는 거죠. 인권교육을 지나치게 받은 아이들은 나중에 직장에 들어갔을 때 문제를 일으킨다는 거예요. 직장에서 항의가 들어온다면서 반대하세요.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아요.
김재근: 저는 청소년 노동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공인노무사회에서 고용노동부의 지원을 받아서 운영하는 청소년 권익센터에서도 세 가지 정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서울, 강원도, 경상도 등의 지역에서 ‘찾아가는 노동권익교육’을 실시하고 있고요. 30세까지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권익구제 활동을 합니다. 올해는 서너 명 정도를 권익구제한 상태예요. 마지막으로는 매달 청소년들을 상대로 권익 관련 캠페인을 벌입니다. 학생들의 반응이 좋아요.
일을 하다 보면 권익구제가 본인의 권리를 찾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분들을 꽤 많이 만나요. 단체에서 나에게 해 줘야 할 일이라고 요구만 하는 거죠. 노동교육과 시민교육이 병행되지 못해서 생긴 일종의 부작용이라고 봐요.
이상선: 각급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진행하는 건가요?
김상봉: 경기도의 경우 고등학교에서는 거의 의무교육화되었고요. 중학교와 초등학교에서는 학교 단위로 신청을 합니다. 중학교의 신청이 더 많아요.
김재근: 특성화고교 아이들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아이들의 인식 정도를 살펴 보면 주휴수당에 대한 인식 정도는 거의 90%예요. 매년 설정되는 최저임금에 대한 사항도 상당히 잘 알고 있어요.
이상선: 학생들 대상으로 수업하기 어렵죠?
김재근: 교과서가 잘 만들어져 있어요. 인권감수성, 최저임금에 대한 문제를 깊이 다뤘고 인간답게 살려면 어떤 인품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까지 나와요.
김상봉: 이런 활동에 관심을 보이는 장학사가 이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요. 교과서 사용이 의무는 아니고 권장사항인데, 내용이 좋죠.
이상선: 그럼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노동인권 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김상봉: 노동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돼요. 개개인이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죠. 현실적으로는 개인의 삶이 망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각자가 민주시민으로서의 의식을 갖추어야 해요. 노동자들이 인식 변화로 일상을 바꾸고 삶을 바꿔야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밖에서는 구호를 외치지만 집에서는 권위적이라면 이율배반이잖아요. 하나하나 바뀌어야죠. 그러니 노동 분야에 있어서 민주시민교육이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은식: 생활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활동이 노동이잖아요. 그 현장이 아직 민주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예요. 많은 직장의 의사소통이 상명하복이죠. 권위와 경력을 등에 업고 일방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민주주의가 내면화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노동조합만 봐도 그래요.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만든 조직인데, 정작 조합이 민주적으로 돌아가지 않거든요. 왜 만들었는지, 왜 활동하는지 기본을 자꾸 놓치면서 움직여요. 다시 기초부터 단단히 자리잡도록 해야 경제민주화, 정치민주화까지 제대로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봐요. 사실 너무 늦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국민소득 3만 불 시대가 왔는데요.
김재근: 강의에 나설 때마다 처음 꺼내는 얘기가 노동조합에 속한 사람들이 2천만 명이라는 얘기예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노동법에 얽혀 있는 셈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그 사실을 잘 몰라요. 두 번째로는 질문을 해요. 18~19세 고등학생들에게 앞으로 몇 년이나 일할 수 있을 것 같느냐고 물어 보죠. 40년~50년이라고들 대답해요. 하루에 8시간 일한다지만 실질 노동시간은 10시간쯤 되죠. 어마어마한 시간이에요.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노동에 대한 교육을 잘 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상담을 받아 보면 임금, 근로시간에 대한 고민이 대다수였어요. 지금도 여전히 그 문제의 비중이 크지만, 이제는 다른 얘기도 많이 나와요. 휴게시간이 지켜지지 않는다, 직장 내 괴롭힘을 겪고 있다, 사장이 싫어 회사를 못 다니겠다. 이런 부분까지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공유하는 것이 곧 민주시민교육이라고 생각해요. 노동이라기보다는 거의 인생의 문제죠.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하면서 보내니까요.
김한수: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죠. 현재 노동을 하는 사람뿐 아니라 앞으로 노동을 하게 될 사람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해결해야 할 일이에요.
이상선: 이번에는 시민들이 원하는 노동교육의 내용과 방식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시민들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해 포커스를 맞춰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한수: 교육 대상을 설정할 때 일반 시민과 조합원을 구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모두에게 필요한 얘기를 하는 것이니까요. 조직에 속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강의에 참석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생활에 치이니 강좌를 열어도 참석율이 높지 않죠. 고민이 많아요. 가능한 출퇴근 시간 내에 알리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는 상황이에요. 제도화된 학교 교육 프로그램은 그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이상선: 말씀하신 출퇴근 시에 알리는 방법이란 앞서 말씀하신 노동자 권리수첩을 배부하는 것이죠?
김한수: 예.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려면 노동조합 가입여부에 상관없이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제도화가 불가능합니다.
이상선: 수업 형태는 대부분 강의식이죠? 토론도 이루어지나요?
최은식: 토론형 수업도 가끔 하지만 흔한 형태는 아니에요.
김상봉: 저는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본인이 원하는 것을 잘 모른다고 봐요. 선도하는 사람들이 샘플이라도 만들어서 제시를 해 줄 필요가 있어요. 강의식 방법은 구태의연하다, 소그룹 토론이나 놀이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를 듣는데 형식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강의를 통해 무엇을 얻는지가 중요하죠. 목표를 상실한 강의에 놀이 형식을 도입하면 그저 노는 시간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어요. 이런 자리를 통해 민주시민교육에 있어 필요한 부분을 도출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최은식: 수강생으로서 수많은 강연을 들어 본 결과, 강연은 더 이상 좋은 수업 방법이 못 되는 것 같아요. 발화자의 공통적인 태도가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거든요. 요즘 사람들은 그런 태도에 대한 거부감이 있더라고요. 저는 강연 자체는 필요하다고 보지만 강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스페인에는 ‘포데모스’라는 정당이 있어요. 온라인 기반이고 게시판을 통해 운영돼요. 사람들이 논의에 많이 참여하는 이슈가 상위로 올라가는 시스템이에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정치 플랫폼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잖아요. 세상이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문제에 대해 서로 얘기하면서 풀어나갈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전 세계에서 인터넷 망이 가장 발달한 나라인데도 웹 플랫폼에 대한 고민이 너무 부족해요.
이상선: 저희가 이번 사업 제안서에 그 부분을 넣었어요. 웹을 통해 시민들에게 논의 내용을 공유해 보자는 거죠. 시민들을 온라인 채널로 유입시키자는 거예요. 경기도 평생교육진흥원에서도 이 문제를 고민하더라고요. 저희한테 대단히 어렵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했어요. 쉽지는 않겠죠. 접속자들에게는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정보를 주고, 각 단위의 소식을 취합해서 알리기도 하는 형태를 생각하고 있어요.
최은식: 자료를 올리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어요. 그건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어요. 서로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김재근: 청소년 직장체험캠프에 가 본 적이 있는데, 부스가 100개쯤 있었어요. 노동 분야가 가장 썰렁할 줄 알았더니 노동 부스에만 300명이 넘게 다녀갔다는 거예요. 프로그램이 다채롭더라고요. 펀치 기계가 있어서 정답을 맞히면 문화상품권을 주는 곳도 있었어요. 웹 플랫폼에 그런 아이디어를 넣을 수도 있을 거예요.
오프라인 교육에서는 강의 형식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봐요. 특히 아예 지식이 부족한 분야에서는요. 강의만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강의 시간이 세 시간이라면 한 시간은 강사가 내용을 전달하고 나머지 두 시간은 역할극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례를 만들어서 극화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들을 서로 얘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한수: 시내버스 정류장에 버스 도착정보안내 스크린이 있잖아요. 그 스크린에 몇 자씩 띄워 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몇 개 시에 실제로 해 보기도 했거든요. 잘 활용하면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아요.
올해 초에는 개그맨, 노무사, 변호사, 현장 간부가 출연하는 30분짜리 영상을 만들어서 인터넷에 계속 올렸어요. 질문에 답변도 하고, 사례 설명도 했죠. 현장 문제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 내용을 답았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길게는 몇십 분도 기다리잖아요.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강의 들으러 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짧게나마 도움 되는 이야기들을 일상적으로 전달해 주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 같아요.
김재근: 저는 경기도 내 대학교 커리큘럼에도 노동인권 교육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전체에는 무리라면 경영학과나 사회학과 쪽에라도요. 그런데 기업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요. 특강 정도로는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최은식: 외국 사례를 보면,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협상’이 들어간다고 해요. 한쪽은 회사 측, 한쪽은 노조 측의 입장이 되어 몇 시간 동안 모의 토론을 해 보는 거죠. 정규 교과과정에 이 내용이 들어가 있어요. 그 정도 수준까지 가야 해요. 실제로 가장 많이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첨예한 입장 차이를 직접 겪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중요해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교육을 했으면 좋겠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동영상을 보고, 팟캐스트를 듣고, 스마트폰을 계속 보고 있어요. 그런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어요. 좋은 콘텐츠를 가공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출퇴근 시간에 잠깐 동영상을 보고 팟캐스트를 듣는 정도라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김상봉: <송곳>이라는 드라마가 인기 있었잖습니까. 노동상담소장이 나와서 인기를 끌었죠. 당시의 열풍이 재미있었어요. 비정규 노동자가 종일 힘들게 일하고는 집에 와서 드라마를 보는 거예요. 저렇게 해야 한다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그리고 다음날 다시 비정규 노동자로서 출근하는 거죠. 노동 분야에서도 원작 웹툰을 자료로 많이 활용하던데, 저는 그런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어요. 잠깐의 대리만족만 있을 뿐이고 현실은 똑같잖아요.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는 1970년대보다도 못해요. 그때엔 강력한 군사독재에 맞서서 몸으로 싸웠지만 이제는 세련된 싸움을 해야 한다고 하죠. 그럴 수가 없어요. 적이 세련된 상태가 아니니까요.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보는 시각부터가 문제예요. 프랑스 모델을 도입하기에는 일러요. 정규 수업시간에 왜 인권을 가르치지 못하게 합니까. 대통령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노조 탄압부터 막았으면 좋겠어요. 지자체에서 전문가를 모시고 지원사업을 해야 해요. 그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거든요.
물에 빠진 사람들은 일단 건져야 해요. 무식해 보이더라도 확실한 교육활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단 대상화하지 않고, 같이 고민하는 동지로서 활동해야겠죠. 결론은 일단 공부부터 하자는 것입니다.
김한수: 강의식 교육을 실제로 해 보면 효율성이 떨어지니까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거예요.
김재근: 한 교수님과 그런 얘기를 나눴어요. 노동조합의 수를 늘려야 한다. 전체 노동자의 20%가 조합에 가입되는 수준까지 가야 노사정 대타협 같은 자리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거예요. 대선 공약으로 내 주면 좋겠지만 그런 문구를 걸면 위험하겠죠.
이상선: 강의식 수업에 대한 피로감이 있어요. 시민사회에서 여는 강의 계획표를 보면 엄청 훌륭한 강사분들을 모셔 오거든요. 그래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니까 매번 전화를 돌려요. 나온 사람들은 억지로 두세 시간 앉아 있는 거죠. 저희만 해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참여는 하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상봉: 우리가 너무 결말을 빨리 보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데도요. 길게 보면 우리는 계주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거죠. 골인을 하려니 마음이 급해져서 10년 전에 했던 고민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내 구간에서 어떤 징검다리를 놓을지를 고민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김재근: 주민자치센터 같은 곳을 활용해도 좋을 것 같아요. 접근이 쉬우니까요.
최은식: 주민자치센터 혁신이 대통령 공약이었어요. 예산도 260억 신청했는데 자한당이 다 깎아 버려서 없어졌죠. 저는 민방위에서 노동 강의를 하면 좋겠어요. 교육과정에 정식으로 넣었으면 해요. 설령 듣는 사람들이 졸더라도요.
주민자치위원을 한 번 해 봤는데, 이런 단체들에 민주시민교육이 정말 필요해요. 주민자치위원회는 사실상 지역 유지들의 모임이라고 봐야 하거든요. 20년 이상 위원으로 계시는 분들도 있어요.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도 자연히 일방적이에요. 이런 교육을 싫어하실 텐데,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합니다. 주민자치위원회 구성을 조금 바꿨으면 좋겠어요. 거주자, 활동가, 자영업자를 1/3씩 넣는 거죠. 이미 계시는 분들더러 나가 주십사 할 수는 없으니, 활동가를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어떨까 싶어요.
김재근: 대학생들에게 비정규직에 대해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거든요. 경영학과 학생의 요청이었어요. 숙제를 해야 한다면서요.
최은식: 저희 사무실에도 경영학과 학생이 찾아와서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김재근: 그럴 바에야 아예 정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들어가면 좋을 텐데요.
이상선: 민주시민교육 활성화를 위해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또, 어떤 식으로 요구해야 할까요? 지자체에 평생교육센터가 있으니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실시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경기도에서 예산을 많이 투자하고 있거든요. 민주시민조례가 만들어진 곳에서는 그에 기초해서 요청할 수도 있겠죠. 사업장 대표에게 노동교육을 의무화하는 건 불가능할까요?
최은식: 성평등교육은 의무예요. 1년에 한 번은 꼭 받아야 해요. 법으로 규정하면 간단할 텐데 강력하게 반대하겠죠.
김상봉: 광명시는 시청과 시 산하기관 전 임직원이 인권교육을 의무로 받아요. 그 안에 노동 분야도 포함되어 있어요.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실효성이 있죠.
최은식: 맞아요. 정책을 실제로 운영하는 사람들이니까.
김재근: 교육이 활성화되어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강제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강하게 요구할 필요가 있어요. 법적 의무교육이 몇 가지 있거든요. 개인정보보호, 장애인 인식, 안전. 그에 노동교육을 더하는 거죠. 추가적으로 하나 정도는 더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이런 교육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기업에는 시에서 가점을 줄 수도 있죠.
최은식: 주민센터에서부터 변화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가장 작은 단위의 공공기관이고, 일종의 공공재잖아요. 주민센터마다 교육 공간이 다 있어요. 라인댄스, 에어로빅, 노래교실 같은 강좌가 운영되고 있죠. 예전부터 이곳을 이용해 온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터주대감들의 사유지 같다는 느낌이 있어요. 체육관도 배드민턴 협회가 점유하다시피 쓰고 있잖아요. 이런 공간부터 시민들 몫으로 돌리는 작업이 필요해요. 그 안에 민주시민교육을 넣을 수 있다면 아래에서부터 위로 번져 가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선: 민간조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아요. 네트워크가 없지는 않지만 여러 분야를 포괄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네트워크가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활성화를 위한 제언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재근: 느슨한 연대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여기저기서 이루어지는 비슷한 활동들을 보면 같이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외부에서 강사를 힘들여 모시는 것도 좋지만 내부에서 육성한 강사를 통해 역량을 키워 나가는 활동도 필요하잖아요. 지원비를 가지고 경쟁하는 모양새가 연출되는데, 좋아 보이지는 않아요.
이상선: 일단 이번 FGI에서 나온 제안을 정리해 각 단체에 공유할 생각이에요. 내년도 사업에 참고해 주십사 하고요. 강제를 할 수는 없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수준 높은 정책토론회를 진행하면 좋겠다는 분들도 있고, 플랫폼을 구축했으면 한다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 각 단위에서 교육 활동을 원활히 하실 수 있도록 지원하되 단위들을 모두 모아 주기를 바라는 의견들이 있더라고요.
최은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앞으로 단위들을 묶는 역할을 하실 계획인가요?
이상선: 쉽지 않을 텐데, 일단은 일련의 프로그램이나 강의 계획안을 서로 교환하면서 조정하는 회의 정도를 주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김상봉: 민주시민교육의 어떤 분야의 강사분이든 결국 다른 분야의 공부도 하셔야 해요. 서로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정말 열심히 스터디해서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봅니다.
이상선: 교육 프로그램을 조율하는 일은 시민사회 전체의 연대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이번 계기로 한 번 얘기를 묶어 보고 정리해 보는 일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김재근: 최근에 서울에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예술가들을 만났어요. 독서토론회를 꾸준히 열고 있더라고요. 워낙 작은 조직이라 큰 지원은 받지 못하고, 30만 원을 받았어요. 간식비인 거죠. 그 지원금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거예요. 예술 분야가 발전할 수 있는 사회가 선진 사회일 텐데, 보고 있자니 안타까웠어요. 안양에도 혹시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발굴해서 시민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면 좋겠어요.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도 해 주고요.
최은식: 저는 요즘 기초단위 지자체가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하려면 그분들과 마주보고 얘기할 일이 적지 않은데, 그분들에게 민주시민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에게는 정말 많은 공공재가 있지만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해요. 공간도 있고 사람도 있거든요. 그런데 프로그램을 운영하자면 공간과 사람이 모두 부족한 거예요. 지자체의 담당자들이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한수: 노동 문제를 열어 놓고 처음 토론해 보네요. 새로운 내용도 있고, 고무적인 얘기들도 들었습니다. 공론화 자체가 큰 성과라고 보고요.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더 바란다면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작은 성과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서 같이 진행하고 그 성과를 공유했으면 해요.
김상봉: 논의의 시발점이 되는 좋은 자리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한 번씩이라도 더 만나서 지역사회에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힘차게 사업 진행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이한열열사의 추모제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에 노을이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치환이 나와 거칠고 익숙한 목소리로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르고 있었다.
시청 뒤 NPO센터에서 있을 행사에 가러 나온 길이었다.
행사 시작전인 센터 안은 꽤 무더웠다. 냉방이 필요했는데 아직 장치를 가동하지 않은 듯 했다.
북태평양에서 바람이 불어온다는 며칠, 바깥 바람이 상당히 시원했다.
베이스와 낮은 드럼 소리의 진동이 거리를 쿵쿵 울리는 시청 뒷골목에 앉아 있었다.
사위가 곧 어두워질 것이었고 아직 여기 저기 햇빛이 남아 있었다.
선배를 만나 벤치에 앉아 일 이야기를 하다, 80년대의 이야기를 잠시 들었다.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 앞,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이면도로에 작은 원동기가 하나 섰다. 뭔가 들은 것 같은 비닐봉투를 안장에 얹은 작은 원동기에서 노인이 내렸다. 그는 내가 바라보는 방향의 가장 끄트머리 벤치에 앉았다. 주섬주섬 품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천천히 입에 쑤셔 넣었다. 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가 빵을 먹는 모습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 70년대 학번들의 낭만과, 80년대 학번들의 전투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빵이 들어가는 노인의 입 매무새가 자꾸 눈에 들어와, 87년쯤, 저 사람은 몇 살이었을까, 딴 생각을 했다.
칠순은 훌쩍 넘었을 거 같은 노인의 저녁은 시원한 북풍이 부는 시청 뒷골목의 벤치 위에서 마른 빵 하나. 오늘치 빵 하나의 노동은 어떠했을까.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대통령 탄핵을 거머쥐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한 오늘, 박종철과 이한열이 죽고 30년이 지난 지금, 노인의 삶을 얼마나 달라졌을까.
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대오는 흩어져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스처럼 낮게 깔리는 귀신에 사로잡혀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마른 빵을 위해, 마른 잎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걱정말라는 노래의 가사를 믿어도 될까.
20170609
글쎄 이 글이 가난에 대한 이야기일까, 노동에 대한 이야기일까, 밥벌이나 경제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냥 내 얘기라고 치자.
오늘따라 자꾸 나에게 가난에 대해 묻는다.
사람들이 묻는다.
스치는 글이 그렇고, 읽는 책이 그렇다.
잠시 가족들이 본다고 켜둔 TV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이 그렇다.
고단함, 가난, 그리고 노동에 대해서 자꾸 말한다.
오늘은 “주우웬(朱文)” 라는 중국 작가의 소설 “가난한 자는 죄다 때려눕혀라” 라는 단편도 읽었겠다, 가난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가난을 알까.
누군가 나에게 가난해보고 싶다는 치기 어린 말을 했을 때, 내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가난이 뭔지 알고 감히, 네가 그런 말을, 그것도 감히, 내 앞에서, 어떻게 네가 나에게! 라고 발악을 했었다.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던 걸까.
가난해보고 싶다는 말은 어린 아이의 말이었고, 그 아이는 마음이 빈한하기 짝이 없어 어떻게든 전일성을 맞춰보고 싶은 욕구였을거다. 그 마음은 몇 년이 지난 다음에 깨달았다. 누군가 나에게 가난에 대해 묻거나, 가난에 대해 언급할 때면, 먼저 분노가 일었다. 다시 말하고 싶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서 다시 말할 수 있으려면 마음속에 깊이 가라앉아야 한다. 침잠하는 것. 오래 숙성된 간장은 짠맛이 아래에 가라앉고 깊은 감칠맛만 위로 떠오른다 하는 것처럼, 제대로 된 조선간장처럼, 묵어야 한다. 맛있게.
2.
그렇다. 가난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가난하지 않고 부자 소리를 들을 만큼 풍족하게 산적도 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나의 부모님은 배울 만큼 배워 돈을 벌고 있었고, 둘 다 장사를 하다 만나 공동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전 국가의 경제 성장이 다 같이 이루어질 때라 조금만 움직이면 돈을 벌지 않는 게 오히려 어려운 시절이었을 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는 할 수 있는 일도 벌일 수 있는 일도 무궁무진했으므로. 근대국가의 기초와 산업화를 동시에 만들어 내던 시절이었다. 모든 게 속도전이었고 빠르게 움직이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난 이후, 우리 집 가계는 불같이 일어났고 상당한 수준의 소득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때 우리가 부자라는 걸 알았다. 나에게 없던 물건들, 그리고 남들에게 없던 물건들이 생겼으며 더 이상 걷지 않고 아빠의 차를 타고 다녔으며 글자로 모르는 나에게 풍족한 물자가 주어졌고 게다가 매일 종이인형을 사러 갈 수도 있었다. 매일 매일.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몰락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점점 하락세를 거듭해 결국 살던 동네를 떠나고 세간살이를 정리하고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시기가 열렸다. 이 가난은 계속되어 중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여러 가지의 사건들을 거쳐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고, 엄마가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에 뛰어든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없던 물건들이 생겼고, 있던 물건들이 바뀌었으며, 반지하방에서 연립주택으로, 연립주택에서 더 넓은 집으로, 그리고 아파트로 옮겨갔다. 아파트에서 고급세단을 타고 다닐 때, 그 때 다시 몰락이 시작됬다. 그 때 나는 성인이 되었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발생했다.
억울하기도 했다. 보호받을 곳은 아무 것도 없었고, 나는 자격증이나 기술도 없었다. 인문계를 졸업한 스무살 여자애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 종일 서 있어야 얼마간의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로 국한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나에게 땡전 한 푼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을 때,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부채를 짊어지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고, 내가 10년을 넘게 죽도록 일을 해도 갚을 수 없는 액수라는 것도 알았다.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부채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나와 내 동생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 감당하겠다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사업을 날려먹은 엄마가 속세에서 잠시 피신하며 나에게 남겨준 것 중 내가 꼭 해결해야만 했던 것은 동생의 밀린 등록금, 재산을 처리하기 위한 연체된 세금,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던 동생에게 필요한 돈 정도였다.
거기에 충실했다. 그 나이에 그 누구보다 많이 벌기 위해 주야로 뛰었다. 하루에 서너 시간을 자더라도 일거리가 있으면 덤볐고 나에겐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해서 안정된 직장에 지원해보지 못했다. 물론, 비정규직이거나 계약직이었지만 잘하면 정규직만큼의 대우를 받을 만한 것들에서는 내가 자격증도 기술도 없고 스무 살 보다 서너 살 더 먹은 아가씨는 채용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거지는 아파트에서 오피스텔로 오피스텔에서 고시원으로 전락했고 고시원에서 2년 반을 버틴 후 옥탑방으로 옮겼고 옥탑방에서 월세방으로 옮겼고 그 다음에 현관 안에 화장실이 있는 반지하방에 혼자 사는 직장 선배가 살고 있는 곳으로 더부살이를 자청해 들어갔다. 미술전문고등학교를 다니던 동생의 등록금은 당시 대학 등록금과 맞먹었고 때때로 붉은 고지서가 날아들어 작게나마 더 이상의 소송을 막는 정도의 기능을 했다. 그렇게 얼마 안됐던 보증금도 야금야금 줄어들었다.
몇 년간 정해지지 않고 일거리가 생기는 대로 했던 각종 아르바이트들은 순간순간 위기를 모면할 만큼의 돈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때 그 때 위기를 모면하다 보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체력소모도 심해 되도록 하루에 6시간 정도는 잘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한 달의 월세 정도는 보장받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스물네 살 무렵이다. 영업직보다 급여는 분명히 적지만, 묶여 있는 시간이 많아 지출이 덜하고 식대를 보장해 주는 곳으로 옮기려 애썼다. 가난했는가. 가난했다. 그렇지만 끼니를 굶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가난은, 소나무 껍질을 벗겨 죽을 끓여먹는 정도의 가난이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아무리 열악한 주거환경이라도, 적어도 대문 안에 화장실이 있었고, 세탁기는 없어도 샤워는 할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벗겨먹을 소나무 껍질 대신 라면이라는 게 있었고, 차비가 있으면 친구를 찾아가 한 끼를 배부르게 때우고 올 정도의 주변머리는 있었다.
혼자 설렁탕을 사먹다가 집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며 더 급하게 먹었던 기억도 있고 그 상황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악이 뻗쳐 공중전화 박스에서 밤새 삐삐를 쳤던 기억도 있으며, 여름바지 한 벌을 가지고 겨울까지 내내 영업을 다니던 때도 있었다.
스물 네 살이었을 거다. 쥐꼬리만 한 기본급여가 보장되던 직장의 소득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 때 당시 120만 원 정도를 벌 수 있었는데 매달 30만 원 정도의 월세를 내고 집에 훼밀리 주스를 한 병 정도 사다 놓을 수도 있었다. 전기세도 낼 수 있었고 가스 요금도 낼 수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 넣어둔 훼밀리 주스병을 보고 이제 어느 정도 고생이 끝나간다며 흐뭇해했다. 동생이 그 비싼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였다. 그 때부터 그 정도 수준에서 머물렀다. 다시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하루에 12시간씩 서 있는 일은 없었고 앉아서 할 수 있는 일로 아르바이트의 종류가 변했다. 돈이 생기면 공부를 했고 앉아서 돈 버는 인간이 되기 위해 애썼다.
내가 처음 했던 아르바이트는 편의점이었고 그 다음엔 커피숍이었고 그 다음엔 호프집이었다. 여기까지는 그 때 스무 살 또래들이 했던 전형적인 알바의 변화다. 호프집에서 통기타 가수로 점프를 한 번 했고 이리 저리 행사와 업소를 다니며 노래를 하고 MC를 봤다. 12월 31일 남대문 시장 새벽 2시 무대 같은 건 일거리만 있으면 고마웠다. 그래도 더 벌어야 해서 아침에 일어나 지하철역에서 검표를 했고 오전과 오후엔 주유소에서 알바를 했다. 편의점보다 시급이 조금이라도 더 비쌌기 때문에 기름 냄새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밥도 잘 주었다. 통기타 가수 생활은 사기꾼과 협잡꾼의 난무와 누군가 본격적으로 나이트클럽으로 전향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을 때였다. 더 나가다가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했다. 신용카드 회원모집, 보험회사 영업, 옷가게 알바, 햄버거 스테이크 하우스의 웨이츄리스를 거쳤다. 한 번도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못했던 것은 매달 받는 급여가 적다고 느꼈기 때문이며 나에겐 내 나이에 어울리는 연봉이 절대적으로 적은 액수였다.
스테이크 하우스는 이태원에 있는 곳이었는데 필수적으로 영어를 해야 했고 내가 가장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고급 기술이라는 걸 알아채고 영어공부에 매달렸다. 그 집을 나올 때 나는 초벌번역을 인맥을 통해 하게 되었고 영어 과외를 맡았다. 어학학원에 영어공부를 더 하기 위해 다니면서 영문법 책이나 문제집을 타자로 치는 일도 하게 되었고 누군가 워드 작업을 알바거리로 부탁하기도 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가장 학비가 저렴한 중국대륙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웹사이트 기획, 기사취재, 어설픈 통번역, 유학원 가이드 등 주로 말과 글을 사용하는 돈벌이를 했다. 그러니, 앉아서 돈 버는 직업군이 되는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그 때는 그저 내가 어떤 거대한 파도를 만나 쓰러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전에, 혹은 그 과정에 나의, 혹은 나의 가족의 어떠한 요소가 가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은 분명히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되는데 우리가족은 언제나 외부에 원인을 돌렸다. 그게 습관적이며,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2.
나의 일에만 집중해서 생각해봤다. 설령 부모가 어떤 일을 벌려놓고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자녀인 내가 그 일들을 처리해야 했으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을 때 말이다.
나에게 그 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건전한 직업관이었다. 어떤 직군의 일이 결과적으로, 장기적으로 나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태어나서부터 스무살이 될 때까지, 나의 양육자였던 사람들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경제는 매우 편협했다. 나와 가장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은 생모인데, 우리 엄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개인사업자였다. 비정규직이거나, 계약직도 해 본 적이 없고 언제나 돈을 융통하거나 스스로 벌어 자영업을 고수해왔다.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다. 나는 회사라는 조직체가 뭔지 모르고 성인이 되었다. 회사라는 곳에 직원이 되면 상여금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십대 후반에 알았다. 그리고 4대 보험이라는 것도 있고 직원이 일을 하다가 다치면 그에 대한 댓가도 치러준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몇 년을 다니다가 퇴직을 하게 되면 퇴직금을 준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회사라는 곳은 적어도 수개월의 고용보장이 되고 운 좋으면 몇 년까지도 고용보장이 된다는 것은 불과 몇 년 전에 깨달았다. 면접을 보러 가면 면접비를 준다는 것도, 결혼 후에 알았다.
회사를 다녔어야 했구나. 라고 후회하기도 했다. 모자라보여도, 점심을 해결해주고 보너스를 주는 곳에 다녔으면 그렇게 미친 듯이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지 않았어도 조금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영업직은 대부분 차비도 스스로 해결하고 밥도 스스로 해결하고 외부에 보여야 하는 본인의 외모도 깔끔하게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어 지출이 상당하다는 것을, 이십대 중반 넘어서 알게 되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날품팔이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영업직의 한계였다. 내가 능력이 더 뛰어나 고액을 벌어들이는 능력 있는 영업인이었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나는 그 때 고작, 스물 둘, 스물 셋. 경제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는 그 어떤 영업도 순탄하게 해내기 어려웠다.
매달 들어오는 돈이 다르니 저축도 요원했다. 갚아나가야 하는 돈이 있었고 언제나 무언가가 밀려 있었다. 들어오는 대로 해결하는 일의 반복은 저축은커녕 급할 때 단 돈 십만 원이라도 빌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저축이 없고 늘 부침이 심하며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하고 주기적으로 업종을 바꾸는 환경에 익숙했다. 장기적 계획이라는 건 세워 본 적이 없다. 어떤 계획을 세울 때마다 허무했다. 또 어떤 일이 벌어져서 다 무너지겠지. 라고 한숨 쉬었다. 좋게 말해 노마드지, 실제로는 계속해서 밀려나는 도시 빈민에 불과했다. 내가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한 적 없고 당장 풀칠을 하기 위해 아무 데서나 일을 했다.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미처 하지 못했다. 집안의 경제 형편이 롤러코스터를 타다 보니 돈은 무척이나 허무하고 요망한 것이었다. 나는 백원의 가치가 무엇인지 몰랐고 만원과 십만원을 사용하는 법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으나 나는 돈을 경시했다. 돈은 어차피 사라지는 것, 내가 아무리 악착같이 벌어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남들에게 쉽게 들켰다. 그 성향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쟤는 돈보다 명예, 본인의 기쁨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아이라는 걸 알아챈 사람들이 많았다. 급여를 제대로 못 받은 적도 있고 약속한 돈을 떼어먹히기도 했다. 나는 세상이 험하고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했으나, 셈이 빠르지 않고 돈에 대해서 철저한 개념이 없다는 것이 너무 빤히 들여다 보였다는 것, 그래서 그들에게 기회를 줬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누군가 나에게 돈이 뭐냐고 물으면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언제나 모자란 것이고 없으면 벌면 되는 것이라고 쉽게 대답했다. 성실하게 일을 하고 꾸준하게 참고 꼬박꼬박 모아오는 사람들은 이런 나의 퉁명스런 대답에 놀라곤 했다. 나는 돈이 뭔지 몰랐다. 늘 내야 하는 것들이었고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하는 교환수단, 나에게 머물지 않는 것들이라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모아야한다는 생각도 잘 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뜯길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런 일이 많았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축은 매우 허망한 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작은 것을 모아서 큰 것을 이루는 기쁨을 배우지 못했다. 작은 것들도 모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내 통장은 9000원이 남아 지갑에서 2000원을 꺼내 현금인출기에 넣었다가 10000원을 만들어 수수료 700원을 지불하는 통로였다.
3.
결혼을 하고, 생계를 책임져 주겠다는 사람이 생겼다. 물론 나도 그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돈에 대한 개념은 두 사람이 양극단에 서 있었고 나에게 돈은 모아봤자 얼마 되지도 않고 언젠가 털리는 것이었으나 남편에게 돈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아둬야 하는 것이었다. 비상상황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대처하는 방법이 달랐다. 나는 돈 떨어지면 이런 호사도 못 누리니 있을 때 실컷 먹는 사람이고 남편은 돈 떨어지면 이런 호사를 못 누리니 오늘 조금 덜 누리는 사람이다. 양쪽 집의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들의 태도가 그러했다. 없을 때 생각해서 그 때가 너무 가슴 아파서 반지하 살던 거, 전기 끊겼던 거 슬퍼서 온 집안에 쓰지 않는 전등도 죄다 켜놓는 사람이 우리 엄마고, 없을 때 생각해서 그 때가 너무 가슴 아파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등불만 켜는 사람이 시어머니였다. 경제관념의 차이는 갈등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나는 내가 벌지 않는데 내 입에 밥이 들어가는, 그것도 아주 좋은 밥이 들어가는 상황을 참아내지 못했다.
모든 것이 억울했다. 내가 저 사람만큼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내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냈는데 남은 게 없다는 것이,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피터지게 살았는데 저 사람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질투했다.
그 갈등을 극복하는데 8년이 걸렸다. 이제는 내가 남편의 경제관념에 매우 순응하며 지낸다. 은행 수수료, 소소한 주차비, 안내도 되는 몇 백 원을 아무 생각 없이 던져버리던 생활에 큰 문제점이 있었다. 오늘을 버티면 돈을 안 빌리고 이자도 안내도 되는데, 그 오늘을 버티지 못해서 돈을 빌리고 이자를 내는 생활이 내 가족의 경제생활에 가장 큰 줄거리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돈은 허망하고, 돈은 있다가도 없고,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모자라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런 이유로 이 쓸데없는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하루만 살기로 했던 것이 올바르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돈은 허망하고, 있다가도 없고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모자라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풍족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바꾼 것이다. 그 생각을 바꾸는 데 8년이 걸렸고, 이제 돈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도 거의 사라졌다.
가난이 유전되는 것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이 있다. 물론, 사회적으로 절대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족 중에 누군가 갑자기 아프거나, 그에 대한 사회보장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배우지 못해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지 못했고 제대로 된 경제관념을 들어본 적 없다. 고용이 불안정하여 위험한 일을 해서 재해를 당하거나 질병을 얻고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하지 못한 식사를 하고 그래서 건강을 해치고 그나마 있던 직장도 더 다닐 수 없는 일들이 반복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완전히 가난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나에겐 적어도 몇 가지 재능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것인지, 자라면서 스스로 즐거워서 발달시킨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라는 사람 하나가 소득을 일으킬 수 있는 몇 가지 힘이 있었다.
건강했고, 동작이 빨랐고, 기회를 잘 움켜쥐었고, 사람들 앞에 서는 일에 스스럼이 없었으며 무대공포도 없었고, 뭐든지 빨리 배웠다. 이런 것들이 내가 가진 자산이었다. 그 자산으로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였지만 사실 꽤 많은 걸 가지고 있었고 그걸로 그 세월을 버텼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지 않다. 건강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 늘 주눅 들어 있고 평생의 가난으로 인해 빠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늘 불안정하여 빨리 배우지 못할 수 있다. (지속적인 가난은 뇌의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지능을 떨어뜨린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단적으로 생각해서 매달 연체고지서가 날아오거나 매 주 빚 독촉 전화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건강한 판단을 할 수 없다) 내가 말하는 건강은 단순히 팔다리와 근육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건강도 포함한다. 무언가 배울 수 있는, 판단할 수 있는, 계산을 할 수 있는, 지속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뇌의 건강함 말이다.
이럴 때 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 개입해야 한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에서는 불같은 경제성장이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일어설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의 기틀이 안정적으로 돌아선 다음에 각 계층은 점점 안정된다. 그리고 그 역전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부모로부터 후대에까지 물려받는 물적, 비물질적 자산이 축척되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기운 차릴 수 있는 개입, 배우지 못한 사람이 글자라도 읽을 수 있어 조금 더 나은 일을 하게 만드는 사회적 개입, 아픈 사람이 가난할 때 가족들이 매달리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개입이, 절실하다. 개인이 해 낼 수 있는 역량밖에 있는 고난은 실로 엄청나다.
가난이라는 것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일이다. 라는 건 거짓말이다. 매우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며 오롯이 혼자서의 힘으로 절대 해 낼 수 없는 편에 가깝다. 가난한 자에게 고기를 주지 말고 그물을 주라는 옛말처럼, 그물을 주되 그 그물의 관리법과 좋은 어장과, 사물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까지 애써줘야 한다는 것, 가난한 사람이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 않더라도 최대한 그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여러 사람의 힘이 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제 누군가 나에게 가난해 보고 싶다고 이야기 한다면 허허 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가난을 극복하기 어렵듯이, 돈에 대한 애정도, 가난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 환경도 하루 아침에 폭삭 소멸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곤고해졌을테니.
더 이상 서 있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지 10년이 지나 이제는 앉아만 있는 일을 한다. 그래서 목이 아프고 어깨가 결리고 손가락이 저릿저릿하다. 살이 찌고 배가 나왔고 소화가 잘 안된다. 그렇다고 이제 다시 서 있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다리도 망가져서 오래 서 있지도 못한다. 어찌됬건 우리는 계속해서 품을 팔아 밥을 먹고 살고 가난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가 파는 품엔 내 목의 근육도, 내 다리의 연골도 조금씩 갉아먹으며 내놓는 것 아니었나. 어쩌면 나의 생명의 일부를 계속해서 돈이나 밥으로 바꿔가며 소멸해가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다 인간은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얼마 전 아이를 데리고 후배들을 만났다. 후배 한 명은 우울증이 온 것이 아닌가 고심하고 있었고, 다른 한 후배는 그런 정신적 괴리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에게는 대화를 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나의 아이는 어른들의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못내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장소를 옮기면서 후배와 함께 잰 걸음으로 호텔의 상가에 들어갔다. 그 호텔의 상가는 남대문 시장의 수입상가와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므로, 적당한 가격에 아이에게 어울리는 장난감을 사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핸드백과 스카프, 빅사이즈 옷과 셔츠나 넥타이를 파는 점포를 지나 나는 장난감 가게 앞에 도달했다. 환호성을 지른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멋진 자동차를 축소해 놓은 미니어처도 있었고, 아이가 좋아하는 중장비 자동차도 있었지만, 내가 고른 것은 아이가 가지고 놀기에 적당한, 성인 남자의 엄지 손가락만큼 작은 자동차 6대가 한 개의 비닐지갑 안에 들어있는 것이었다. 얼마 전 약국에서 산 어린이용 비타민제에 끼워져 있는 자동차와 동일한 제품 같아 보였다. 아이는 자동차가 맘에 들었는지 제 손에 들고 우리가 밥을 먹으러 가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아이는 잃어버릴까 봐 – 라고 말하며 자동차를 쉽사리 꺼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자꾸 비닐 지갑 속으로 자동차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분주한 식당에서 속사포 같은 이야기들을 쏟아 내며 자꾸 흐트러지는 정신을 가다듬어 드문드문 대화를 빠르게 이어갔다. 후배와 식사를 마침과 동시에 우리는 대화도 정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을 기약하며 지하철 역에서 헤어졌다. 아이는 제 손에 자동차를 들고서 쫄랑 쫄랑 나를 따라 걸었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 새로 산 자동차들을 제 아빠에게 자랑하기도 하고 뒤로 당겼다가 앞으로 슝- 하고 나가는 자동차가 신기했던지 한 참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그 많은 미니카 중에 가장 맘에 들었던지 책장 사이에 쑤셔 박아 나름대로 숨겨 놓기도 했다.
장난감을 산 지 이틀이 지난 날, 나는 아이와 자동차를 함께 가지고 놀았다. 내가 원해서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아이가 같이 놀자고 매달렸기 때문이었는데, 몇 개의 자동차는 이미 더러 고장이 나 버려서 뒤로 당겼다가 놓아도 앞으로 가지 않았고, 몇 개의 자동차들은 회전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나는 자동차들을 들어 올려 꼼꼼히 살펴 보았다. 작은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고 어떻게 조립을 했을까 싶을 만큼 작은 자동차였다. 그리고 자동차의 아래쪽엔 MADE IN CHINA 라는 글씨가 선연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중국의 어느 공장에서 화학물질 냄새를 맡아 가며 이 자동차를 조립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삐뚤게 붙여진 자동차들의 스티커들을 보다가 손톱보다 작은 스티커를 사람 손으로 붙였을 거라고 확신했다.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져 왔다.
누군가 이 자동차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집으로 돈을 부쳤으리라, 누군가 그 냄새에 코가 마비되어 피를 토했을 지도 모르겠다. 인권유린의 사각지대라는 말 따위는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이 것을 만들었으리라. 하루에 12시간을 일하고도 우리 돈으로 30만원도 채 되지 않는 월급을 받고 좋다고 신명 나게 웃었을 누군가를 생각했다.
오래 전 나는 사탕을 먹을 때마다 신경숙의 소설을 생각했다.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에서 주인공은 짝꿍의 엄지 손가락이 기형적으로 뒤틀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주인공이 그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짝꿍은 나는 사탕공장에서 일하는 데 하루에 몇 백 개씩 사탕을 리본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손을 뒤틀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조용히 손을 내려놓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리본 모양으로 묶여진 사탕을 먹을 때마다, 볼 때마다 씁쓸한 마음에 달콤함이 저만치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자동차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차가워진다. 누군가 생산을 하고 컨베이어 벨트에 빠르게 물건을 올려놓기 위해 그 어떤 단상도 할 수 없는 삶이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과연 나는 그들이 만든 물건을 구매하는 것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산업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자들의 인권을 위해 내가 깃발을 들고 나설 수 있을 것인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인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쳐들어 왔다. 나는 자동차를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이걸 봐봐. 이걸 만든 사람들을 생각해봐. 하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고질병은 고칠 수 없는 것일 게다. 즐거움 속에 숨겨진 인생의 비애를 포착해 내는 기질은 사춘기시절 감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수반된 것이었고, 나는 아직도 그런 삶에 버거워 하고 있다. 왜 나는 좀 더 단순하게 살 수 없는가, 그저 이건 MADE IN CHINA 니까 벌써 고장이 나버렸잖아. 하고 넘겨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들은 과연 양심의 소리인 것인가, 아니면 한동안 생업의 현장에서 밥벌이를 했던 나의 비애가 가져다 주는 자기 연민의 확대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그저 아프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주는 기쁨도 있을 것이라고. 나보다 더 그들이 행복할 수 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아이와 자동차를 가지고 놀았다. 뒤로 힘껏 당겼다가 손을 놓는다. 자동차는 급회전을 하면서 저 멀리에 가서 부딪히곤 했다.
30대 초반
누가 나에게 직업을 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물었다. 나는 “적성”이라고 대답했는데 나보다 20년은 더 산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직업선택의 가장 중요한 건
“가장 잘 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2.
생각해보면
적성이라는 건 근무조건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만약에, 좋은 학교 비국영수과목 교사인데, 급여는 연봉 6천 정도 되고, 30평대 주택을 제공하고, 방학은 유급으로 칼 같이 쉬고, 애들도 사고치는 놈 하나도 없이 건전하고, 교사잡무 하나도 없고, 교장마저 민주적이라면.
과연 몇 명이나, 그 직장을 마다하고 “적성에 안 맞아서 못 다니겠다” 하겠는가.
굳이
교사를 예를 든 건 교과외 잡무 고려하지 않고 학교선생이 만고땡이라는 편견들 때문이다.
연봉 1억짜리 의사인데(종합병원에서 이 정도 주지도 않지만) 종합병원이라 하루에 2시간 자고 과장이 완전 개새끼라 허구헌 날 불려가 조인트 까이고 지방대 출신이라고 동료들에게 왕따 당해서 맨날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데도 이 사람이 과연 연봉 하나 바라보고 버티겠는가.
3.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서 좋은 일은 계속해서 칭찬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고들 하지만 티비보고 놀고 먹는 거 싫어하는 사람 별로 없다. 그런 게 직업이 되지는 않는다.
좋아하긴 하는데 타고난 재주가 젬병이거나 죽어라 노력해도 안되는 경우도 있다.
강풀이라는 만화가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가가 되었지만 몇 년을 해도 그림이 별로 늘지 않는다. 본인도 고백한 것이 가장 큰 컴플렉스가 그림 못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전공하지 않은 게 후회된다고도 했는데 강풀은 그림보다 스토리다.
그렇다고 강풀의 스토리가 박제동이나 허영만 스타일도 아니다. 강풀은 딱 웹툰에 어울리는 그만의 스토리에 그만의 그림이 맞는 거다. 자기 분야를 개척한 셈이고 좋아하는 일에 도전해 피나는 노력을 해서 큰 성과를 이룬 셈인데.
이 사람은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대중적 스토리를 잘 짜내는 재능이 있다. 그건 이야기꾼의 소질이 아닐 수도 있다. 시대를 잘 읽거나 다른 사람과 공감을 잘 하는 성품과 때로는 유치하고 깊이 없이 잘 흥분하고 선동하는 재주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 본다.
되고 싶은 게 미스코리아인데 팔다리 짧고 얼굴이 타고나게 크다면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여전히 미스코리아가 좋다면 그와 관련된 분야중에 다른 일을 하면 될 것이다.
4.
예전에 통기타들고 한밤중 시내를 쏘다니며 밥벌이를 하던 시절에 내가 따라다니던 9살 많은 언니가 있었다.
노래판이 개판이니 어쩌니 하던 나에게 그 언니가 물었다.
“그래서 니가 하고 싶은 게 뭔데?”
“글쓰는 거”
“그럼 뭐 글판은 깨끗할 거 같냐? 다 똑같애. 어디가나 개새끼는 존재한다. 니가 그 시궁창에서 버틸만큼 좋아하는 거만 할 수 있는 거야.”
돌아보니 그랬다.
노래와 무대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사람들은 모두 그 판에 남았고 나는 도망쳐 나왔다.
아이돌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5.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딴지라디오의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춘심애비가 한 말은 그거다. 직업은 “덕질”의 승화.
덕질이라는 말은 오타쿠 – 오덕- 의 통신의 변형체로 좋아하는 일에 매니아급으로 매진한다는 말이다. 약간의 편집증을 동반하기도 하는 취미를 말하는데, 결국 이런 덕질의 결과는 전문가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덕후들이.. 판타지소설과 무협지, 게임이나 드라마로 먹고 살 수 없을까 궁리한다.
그앓실에서 주장하는 바는 덕질이라 함은 좋아하는 일이고 대단히 몰입하게 되는 일인지라, 중간이상 가지 않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세상에 어이가 없어보여도, 대부분의 작가들은 덕질의 결과물로 밥을 벌어 먹고 살아간다. 그림을 그리던 뭘 만들던 글을 쓰던, 그건 에지간히 미치지 않고서는 지속적으로 해내기가 상당히 어려운 지리멸렬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교수나 박사들도 마찬가지다. 공부도 덕질인거다. 별자리만 보고 있는 인간이라면, 그것도 덕질이고, 운 좋으면 그 덕질의 결과물로 천문학자가 되는 게 정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6.
문제는 먹고사니즘이다.
먹고 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정말 꼭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세상에 모든 사람들 중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 프로나 되나. 전혀 없지 않나. 한 5% 되나? 라는 의구심을 갖는다면 다시 세상을 고요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팔짱을 끼고, 등을 의자에 붙인 채 사람들을 바라봐야 한다.
좋아하는 일이 아닌 거 같다면, 그 반대급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와 저건.. 나는 때려죽여도 저건 못 해. 하는 종목들 말이다.
채식주의자가 정육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알콜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주류감별사를 할 수는 없다.
야채를 파는 일이나, 그저 회사에서 종이만 들여다 보고 있는 일도 어느 정도는 다 견딜 만 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일인 것이다. 이상적인 직업은 대부분, 반절은 놀고 반절은 취미생활을 하면서 누가 돈도 주면 좋을, 그런 것들을 말한다.
40-1. 지금 이 시점에 생각하건대, 이상적인 직업은 없다.
이상적인 밥벌이를 하는 사람은 지독한 덕후이거나, 물려받은 유산이 많은데 누가 건드리는 경쟁자도 없어서 돈 걱정을 안하고 살도록 태어난 천하의 행운아이거나, (예를 들면 100년짜리 저작권을 보유해서 매 년 억대 이상의 돈을 손에 쥘 수 있다면?) 아니면 뼈를 깍는 노력으로 오로지 드라마 주인공만이 가질 수 있는 지독한 집중력과 몰입력을 발휘해 그 자리까지 올라간, 매우 기괴한,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이상한 인간일 수도 있다.
결론은 그거다.
이상적인 직업은 없다.
할 만 하니까 밥 먹고 사는 거다.
이 짓 하다가 뒈질 거 같애. 그러면 그만 두는 게 맞다.
그러나,
약간의 불만, 약간의 불화, 조직간의 약간의 갈등, 거래처의 개새끼, 김부장 썅노무새끼. 이런 이유일 경우, 그런 이유로 인한 전업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한다. 개새끼를 처단하고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드럽고 치사하니 내가 여기를 떠나야 하는가. 혹은, 내가 견딜 수 있는 지경인가 아닌가.
7.
그러나 2013년 오늘,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직장의 문제와 이직, 인생뒤집기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이 직업관을 가지지 못하고 40대와 50대를 송두리채 날리고 환갑이 되어 퇴직을 한 다음에 아. 이제 너무 기운이 빠져버렸는데, 자기 직업에 어울리는 일을 찾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직업관에 대한 정확한 교육의 부재,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하도록 바쁘게 휘몰아치는 사춘기, 또한, 직업에 귀천이 있으며, 직업엔 연봉차이가 있으며, 그리하여 그게 우리의 신분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의 행복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으리라고 강요당한, 말도 안되는 교육을, 게다가 12년이나! 존내리 길게 받았던 것이다.
2002년 이후라고 본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그리고 이전에 있던 IMF로 인한 정리해고, 이제는 염치도 송구스러움도 없는, 당연한 정리해고 인원감축으로 한 사람이 서너명의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일들이 당연해졌고 그 시스템에서 세상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게 지금의 30대 이상의 직장인들이다.
과다업무.
그러니 열정을 가지라고 강요하는 거다. 열정이 없으면 버틸 수가 없는 과중한 업무가 몰아치는 거다.
좋아하지 않고, 미치지 않고, 제정신으로 즐겁게 출근하고 퇴근할 수 없는 업무량.
야근과 특근, 주말에도 자진하여 회사를 나가야 하는 미친 업무량에서 버틸 수 있는 건,
아 나는 이 일을 미치도록 사랑합니다.
라고 살짝 뇌를 틀어버려야 가능한 일이다.
8.
그리하여 세상은 이제 우리에게 “열정이 없는자는 뒈져도 모름” 이라고 안면을 까고 있다.
그건 모두 누군가가, 집약된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아니 왜.
왜 늘 뜨겁게 살아야 하지?
그렇게 부글부글 끓으면서 굵고 짧게 살다가 일찍 죽으면 누가 좋은거지?
병원과 장례식장과 각종 상조회와 일회용품을 만드는 중국의 공장들?
좀 천천히 살면 안되나?
좀 놀면서 살면 안되나?
누구나 한 번 태어나 한 번 죽는 건데, 그렇게 다들 미쳐 날뛴다고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 말이다.
9.
최근에 제주에 아무 생각없이 내려가는 청년들이 많다고 들었다.
감귤농장에서 귤을 따면 하루이틀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작년부터 내 주변의 30대 초반들이 하나 둘씩 사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모아둔 돈푼이나 있으면 자기계발을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래저래 복장 터지는 마음으로 몇 건의 아르바이트로 연명을 하고 있다.
부모님의 집에서 다음 행보를 구상하는 친구들도 있다. 내 주변만 그런 줄 알았더니 내 주변의 주변도 그러하다.
결혼하고 가장이 된 40대들도 갑자기 사직서를 내고 외국으로 나가버리는 경우가 늘어난다.
기술이민을 고민하는 친구들도 늘어나고 이미 나가 있는 사람들도 많으며 이 나라에서 영구히 뭘 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이는 자는 매우 적다.
그러니까, 이 나라의 20대 이상 젊은 청춘들은 대부분 이 나라를 떠날 수 있으면 떠나야지 라고 마음의 보따리를 꽁기꽁기 싸고 있는 거다. 국가의 큰 인력이 되는 2-40대들이 이 나라를 슬금슬금 떠나고 국민연금에 탈퇴하고 나면, 이 나라는 노인들의 나라가 되겠지.
386은 늙어가고 일할 사람은 없어질 게다. 젊은이들은 어디선가 내가 왜 열정적으로 살아야 하느냐고 물으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길 원할 지도 모르고, 그 중에 여전히 미쳐 있는 뜨거운 인간들은 세상을 주도하며 살아 나갈 것이다. 그리고, 자본가들에게 필요한, 야근에 미친 한국의 젊은이들은 모두 사라져 있을거다.
10.
취업과 이직에 대해서 고민하는 나의 수많은 동지들에게 이 글을 바치며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런 것이다.
티비를 줄이되, 특히 예능프로그램을 삼가하라.
연예인 기사를 읽지 마라.
여성독자를 타겟으로 한 월간잡지를 읽지 마라.
예능프로그램과 연예인기사는 매일 매일 “니 인생은 찌질해” 라고 강조해 줄 것이며
월간지는 “너는 정말 간지가 안나” 라고 강조해 줄 것이다.
이런 악의 축 세 가지만 끊어도, 세상은 조금 편안해진다.
개의치 말고 거침없게,
열정? 난 피곤하니 천천히 가겠다. 라고 말하며.
야근없는 사회를 위해 오늘도 누워보자. 뒹굴뒹굴.
실업과 실직사회에 대한 글을 읽다보니 한 생각인데, 실직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렇게 크다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애엄마들의 황망함에 대해서 누가 고려를 해보았는가다.
임신/출산/육아의 과정을 거치며 직장을 그만두는 엄마들의 경우, 이게 아무리 자발적이라도 하더라도 임금노동시장에서 밀려났다는 박탈감으로 인해 실직과 유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이걸 지워주는 건 실직이 아닌 이직으로 생각해야 하겠지만, 이 나라의 사회적 분위기상, 엄마라는 것은 매우 숭고한 일이지만 그것을 절대 프로의식 가득한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아준다는 거다.
개인적으로 임금노동시장에서 일하다가 급작스러운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물론 그건 내가 선택한 몫이라고 누가 트집을 잡아도 할 수 없다만.
임신을 하게 되고 급하게 일을 정리하면서 임신중에 무슨 태교니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내내 출산예정 일주일전까지 모니터 앞에 앉아 폭풍업무를 봤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육아휴직을 출산이후로 잡아놓는 것을 가정했을 때, 마음으로도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할 만큼 업무 인수인계를 해줘야 하는 게 바로 코 앞에 닥친 일이기 때문에 미친 듯이 일을 해대지 어디 뱃속에 있는 애 생각할 여유나 몇 번 있었겠느냐 말이다.
이 사회에서 바라는 엄마는, 성녀이길 바라면서 초능력자이길 바라고, 감정정리도 깔끔하길 바란다.
<짤방이 너무 귀엽군>
남자들은 부인이 애엄마가 되는 그 순간 자기 엄마와 동일시 하며 성모마리아적인 자기 자식의 어미를 기대한다. (물론 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어른들은 젊은 엄마들에게 에미가 되서 할 짓이냐 에미가 그게 뭐냐 라고 강요하는 반면,
배우자들은 대체 당신이 집에서 하는 일이 뭐라고. 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우리 마누라 너무 수고하지..라고 하면서 귓전에는 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윽박지르듯이 하던 말 “집구석에 하는 일이 뭐 있다고!” 라는 말이 맴돌 것이다.
설령 그 중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내내 잘 버티고 있는 엄마들도 직장내 승진에서 밀려나거나 야근, 회식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어처구니 없는 사회에서 반실직과 다름없는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사회에서 그깟 돈 몇 푼 버는 것보다 정말 대단하고 힘든 일을 하고 있다고 칭찬해줘도 모자랄판에, 나도 밖에서 돈 버느라 힘들다고 징징대는 어린 신랑들이 천지 삐까리다. 게다가 많은 초보아빠들은 애 안았다가 내가 떨어뜨려 죽이면 어떻게 하나, 라는 공포에 시달린다고 한다. 같이 자다가 깔아뭉개면 어쩌나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모두 다 미성숙한 상태에서 만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혹시 어린 아이가 수단이 되거나 목적이 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지만, 이건 이미 시간이 오래 흐른 다음에 깨닫는 개인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사회라도, 어미의 노릇을 하는 것과 아비의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차대하고 심각하고 고귀한 일인가 제도적으로 혹은 분위기라도 만들어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실직당하고 하루 종일 공원에서 빈 가방 들고 헤매는 늙은 아버지의 심정과 우는 애 업고 슬리퍼 신고 터덜터덜 동네를 거니는 젊은 엄마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
임신/출산/육아를 거치면서 사실상 실직상태에 몰린 엄마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의 숭고함과 자아발견과 자아계발에 지대한 가치를 학습받으며 자란 세대다. 동생 한 번 업어보지 않고 자란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은 매우 낯설고 어색한 일이다.
쉽게 말해 언제는 유능한 여자가 되어 불평등에 반대하여 투사가 되라더니 이제와서 숭고한 마리아가 되라는 말이냐고 따져 물을 수 있다.
실직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할 방법은 사회적 평등과 가족의 이해겠지만, 지금 이 따위 나라에서 두 가지를 다 거머쥐는 것은 요원해 보이는 일이다.
그렇다고 각자 알아서 하되 돈 있으면 되도록 전문상담사를 만나라고, 우울증을 조심하라고 쉽게 말해도 되는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