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복수 : .죽는 거 보다 더 힘든게… 살던 세상 바꾸는 일이예요. …죽는건 세상을 버리면 되지만, …살던 곳 바꾸는 건, …세상을 바꾸는 일이니까…

경 : (얼굴을 닦아주며 미소) 복수씨, 위대해요. …세상을 바꿨으니까…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해서 불교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보면 바로 나오는 일이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만이 존귀하다. 라는 말은, 
모두가 각자의 세상을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타인의 세상을 침범하지 말 것이며, 
두 사람간의 갈등은 하나의 우주와 또 다른 우주의 충돌이겠구나. 
라고 혼자. 씨부려 본다. 
2012. 2. 24. 

감당할 만 하니까.

가끔 이 구절이 생각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카톨릭 성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버전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주십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하던 말도 생각난다.
“다 능력이 되니까 그런 일도 생기는거예요.”
“다 감당할 만 하니까 해내시는거예요.”

그래서 간만에 성경을 들춰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매우 고무적이고 희망적인 말이다.
가벼운 환난이라는 말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아무튼 종교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고 감안했을 때. 뭐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는 말일 것이라 판단한다.

그리고 가만히
술 취한 남편이 들고 오는 길에 한 번 자빠진 듯한 형상을 한
비싸 보이는 회를 씹으며 생각하였다.


감당하지 못할 일들만 이어졌으면,
이미 보따리 싸서 인연이 없는 곳으로 피신하였거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지.
견딜만 하고 감당할 만 하니까
아직도 산 채로 오밤중에 깨어난 아들과 “돼지코 공룡 임피의 모험”을 보면서,
이 집에서 회를 먹고 있는거구나..

라고.

할 만 하니까 이러고 살고 있는거다.
정말 못 견딜 일이었으면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니었을 거다.
살만 하니까 살아있는거다.
그저 간혹가다 귀찮을 뿐이다.

2012. 2. 24.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오늘 집에 회를 먹을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도
백퍼 이건 정말 나먹으라고 회를 사들고 꾸역꾸역 걸어오다가 몇 번 자빠진 게 뻔한 채로
널부러져서 감당도 안되게 자고 있는 남편이라는 사람은,
간혹 감당할 일이 없으면 의식의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위장의 보호를 포기하고 뇌의 시냅스를 살짝 끊는 방법인 폭음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이다.

다 왕년에 해봤던 짓이다.

_ 대인의 풍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번역문 비교

독일판/
독문학자 송동준 옮김/1995년 신장본판/
민음사 펴냄
프랑스어판/
불문학자 이재룡 옮김/ 2011 2 6/
민음사 펴냄  
영원한 재귀는 아주 신비스러운 사상이다. 니체는 이 사상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그 언젠가는 이미 앞서 체험했던 그대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 이 어처구니 없는 신화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원한 재귀, 이 신화는 그것의 부정적 이면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있다. 영원히 사라져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삶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런 무게도 없는 하찮은 것이며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삶이 아무리 잔인했든, 아름답거나 찬란했든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잔인함, 아름다움, 찬란함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조금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마치 14세기 아프리카에 있었던 두 나라간의 전쟁과 같다. 비록 전쟁에서 30만명의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죽었다 하더라도 이 전쟁은 세상 상황을 아무것도 바꾸어놓지 못했다.
(1페이지) 1 1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1페이지) 1부 1장 
내게 창문 청소부 한 명을 보내달라고 당신 회사에 전화했을 때 당신을 보내도 좋으냐고 내게 물었어요. 당신은 유명한 외과의사라고 했고, 당국이 당신을 병원에서 내쫒았다고 말했어요. 이 사실은 물론 나의 관심을 끌었어요.”
당신은 매우 호기심이 많군요.”
내가 그렇게 보여요?”
물론이죠. 당신의 시선을 보면 그래요.”
내 시선이 어떻다는 거죠?”
당신은 눈을 깜빡거려요. 그리고 계속 질문을 하죠.”
당신은 대답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246) 5 10
전화를 걸어 창문을 닦을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당신을 찾는 게 아니냐고 물었어요. 당신은 병원에서 내쫓긴 굉장한 외과의사더군요. 그게 내 관심을 끌었어요!”
호기심이 많은 분이군요.”
그렇게 보이나요?”
, 당신이 바라보는 방식이 그래요.”
내가 어떻게 보는데요?”
눈을 가늘게 뜨고 쉴 새 없이 질문을 하잖아요.”
대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요?”
314– 5 10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하긴.. 구판인 송동준 선생 번역본은 헌책방을 열심히 뒤져야나 나올 것이고..
그 중 한 권은 내가 갖고 있다.

무거운 시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괴로운 마음을 안다. 
그건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것도 안다.
죽음을 통해 뭔가 다른 것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것도 안다. 
죽고 싶다라는 말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 세상을 바꾸고 싶다. 라는 절절한 호소였다는 것도 
아주 뒤늦게 알았다. 
무거운 시간들이 흘러간다. 
눈이 녹아가고 있는데 봄이 와도 화려하지 못할까 두렵다.
지리멸렬하다는 단어가 가슴에 맺힌다.
인연도 사랑도 모두가 업보다
지은 것이 많아 풀어야 할 것이 많다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사는 모습들이 애당초 이런 것이라는 것
그저 조금 더 쉽게 가고 싶어서 
울고 불고 안달했다는 것을
이제 안다
그저 걸으면 될 일이다
해는 뜨고 달이 진다
내가 걷는 동안 
내가 엎드려 쉬는 동안
시간은 가고 아이들을 자란다
겨울나무는 소리없이 자라고
봄나무는 요란하게 노래할 뿐
그저 걸으면 될 일이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묵묵히 걸으면 될 일이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고개를 쳐들고
그 날 그 날 
그저, 가야 할 곳을 잊지 말고 
걸으면 될 일이다 
2012. 2. 14. 

이틀

이틀이 지났다.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듯
시간이 이어져 하루가 되는데,
모든 것이 뚝.뚝. 끊겨 있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었나
의심하는 순간 이미 알고 있다
꿈이길 바라는 마음을

똑똑
노크한다

부른다
엄마 – 라고.

전화기를 본다

없다 아무도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보안경비를 건다

밤은 가고
나는 잔다
너도 잘 것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밤.

나는 안다

그 어딘가에
헤메는 우리의 두 손과
더듬는 우리의 두 발을

머쓱한 그 자리의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젖은 물들.

2012. 2. 10.

ER

여기는 모두가 살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다.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붙잡기 위해, 공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 오는 곳이다.

살기 위해 오는 사람들 가운데
죽기를 원했다가 다시 살기를 원해 오는 생명이 있다.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노인이 끊임없이 말하기 위해 노력한다.
언제나 지나간 것은 미련스럽고
딱 한 번만이라고 말한 순간은 이미
늦은 때이다.

주춤하고 서 있는 골목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휘파람 불며 걷고 싶다.
너도 그러길 바란다.

2012. 2. 7.

너는 나와 왜 다르냐

오래전에 봤던 영화, 엘리펀트맨. 한국에서는 “코끼리 사나이”로 알려져 있다.
중증다발신경섬유종. 이라는 병을 앓는 환자인데, 영화의 배경에서는 그저, 기형, 괴물로 치부되던 시절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공개되는 주인공 코끼리 사나이의 얼굴은 거대한 신경섬유종으로 마치 코끼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속에서 코끼리 사나이는 인간서커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구경거리가 된다. 경악과 충격, 공포를 자아내는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이 서커스단에는 샴쌍둥이와 난장이등이 속해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애인 인권유린의 행태가 자행되던 시절. 
사실, 이런 인권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한 게 사실 몇 십년 되지도 않았다. 
우리의 동춘서커스를 비롯한, 수많은 서커스에 외소증이라고 이름이 바뀐 난장이들이 나와서 곡예를 했고 사람들은 그걸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그 때 그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한수산의 “부초”는 서커스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고등학교 때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이후로 그 어떤 서커스도 기분 좋게 볼 수 없었고,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을 했는데 공연내내 질질 짜다 참담한 심정으로 돌아온 기억이 난다. 
얼마전에 노트르담 드 파리 (Notre Dame De Paris)의 뮤지컬을 보았다. 
그 전에, “파리의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민음사판의 원작소설을 읽었다. 
노틀담의 꼽추. 라는 축약된 이름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15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이다. 
위고는 건축의 시대가 끝나고 문자의 시대가 왔음을 말하며, 그로 인해 대변혁이 일어남을 알린다. 그리고 이 소설은 철저한 신분으로 인한 소외계층을 집중 조명한다. 
쉽게 말해 빈민굴에 해당되는 기적궁에 살고 있는 라 에스메랄다와 성당에서 종지기로 사는 콰지모도, 그리고 에스메랄다 주변의 인물군상을 표현한다. 
물론 그 위엔 비겁하고 이기적인 기득권 세력도 나타난다. 
뮤지컬은 많은 부분을 축약했지만 넣어야 하는 요소들을 빼지는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모든 스토리의 요부의 요소를 갖추었다. 
오페라의 여주인공들, 인류 역사의 모든 이야기들속의 전통적 전형적 여주인공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공통점이 있다. 여기 위고는 몇가지 요소를 더 삽입했다. 
이국적인 외모, 이방인, 집시, 다른 머리색깔, 다른 피부색깔, 춤추고 노래하는 여자. 
즉, 
1. 집시- 춤추고 노래하는 – 예술적인 색채 – 예민한 – 그러나 순결한 – 고대 제전의식의 무녀의 형태 – 마녀로 등극 가능 – 희생양 
2. 이방인 – 외국의 유입자 – 다른 인종 – 빈민 –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 법 밖의 존재 – 무법 – 떠돌이 난민 (refugee) – 하층계급 
이 두 가지 공식을 끼워맞춰 소외계층의 한 맥락으로 놓고 
콰지모도는 고아 – 기형아 – 다른 외모 – 일반적이지 않음 – 남들과 차별화되고 다른 것은 나쁜 것으로 치부됨 – 악의 상징 – 인간의 요소를 갖추지 못함 – 반인반마와 다름없음 – 짐승보다 약간만 높은 상태로 하여 또 다른 소외계층의 한 맥락으로 놓는다. 
코끼리 사나이와 노트르담 드 파리의 주인공들은 소외된 자들이다. 
이 소외된 자들은 통계적으로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외모를 지닌 것으로 시작한다. 
예술속에서 외모 – 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얼굴이나 생김새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을 상징할 수 있다. 검은 머리를 가진 이국의 집시는 매우 불결하고 저급하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 
이게 이 나라에서도 통용되어 단일민족이라는 말도 안되는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한다. 
대한민국이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단일민족만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뜻이기 보다 
다른 민족이 절대 침투할 수 없을 정도로 기득권이 철저하게 공고한, 절대 유입과 개방의 여지가 없었던 왕조가 국명을 바꾸고 체제를 바꾸더라도 5천년동안이나 유지된 매우 배타적이고 수구적인 체제였다는 것의 반증이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으로 새로운 유입세력의 신선함을 악으로 호도하는 것은 기득권의 지배논리에서 아주 쉽게 유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분류하고, 장애시설을 혐오시설이라 분류하고, 하층계급이나 성노동자, 노숙자등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로 분류해 별도 관리하려는 노력을 꾀한다. 
신체의 장애가 있는 자를 장애인이라 칭하고 장애인 등록증을 발급하고 별로의 관리를 한다는 것은, 신체의 장애가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질환자들은 장애인이라 칭하지 않고 별도 관리를 하지 않으나, 일단 외형적으로 보이는 쉽게 판독이 가능한 “우리와 다른 부류”는 쉽게 특별한 법의 보호 아래 놓는 대신 일반적 법의 테두리 밖으로 내놓겠다는 의지이다. 
이것은 외국인이나 이주민에 대한 이 나라의 정책과 일맥상통한다.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사이트 가입을 할 수가 없고 인터넷 쇼핑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진 나라. 이 것은 당신들의 특권이고 이건 우리 기득권, 즉 지배세력이 곤고하게 지켜줄 것이니 당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새로이 유입되는 세력을 철저히 배척하고 분리하는데 협조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의 주민등록번호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를 유입시켜주는 것이다. 
학교에서 자연갈색의 머리색을 가진 아이들은 너는 왜 머리가 노랗느냐고 선생에게 타박을 받고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오기를 강요받아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외국인이 유입된다는 것을 절대 전제하지 않고, 이 학교에 다니는 모든 아이들은 모두 같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다. 그만큼 개방의 정도가 취약했으므로 모두 거기에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다. 
새로운 유입세력에 난감해 하는 것은 바로 오늘 뉴스에서, 어제 뉴스에서, 그리고 내일 뉴스에서도 볼 수 있는 수많은 사례에 있다. 비대위에 불편해 하는 한나라당이 바로 쉽게 보이는 경우이고, 
아래 링크를 걸게 될. 충격적인 기사 하나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만큼, 배타적이고, 수구적이다. 
충격적인 기사 하나를 보고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왜 너는 나와 다르냐. 는 이유로 조롱하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반성한다. 법륜스님 말씀대로 후회하지 말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 
+ 지난 일요일 정봉주 콘서트에 갔었다. 
김c가 출연해서 그런 소리를 했다.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맞는 체제와 정부를 갖게 된다. 
여러분 싫죠? 근데 나는 아닌데 다른 사람만 그런 걸까요?
우리가 그런 거..겠죠? 싫어요 저도. 싫지만 어떡해요. 그런걸.”
장애 소녀, 8년동안 철창에 가둬 – 경향신문 링크

2012. 2. 1. 

재벌은 살찌고 국민은 자살한다.

국산품 애용 운동이 벌어진 시절이 있었다. 
식민시절 물산장려 운동 등은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자본을 벌게 하여 국가의 부강을 만들어가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어차피 자본주의, 돈 없으면 국가도 없다. 
80년대, 90년대까지도 국산품 애용이 칭송받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 밥통, 일제 보온병을 쓰면 매국노 취급을 당했고 쉬쉬하면서 몰래 들여와 썼다. 
미제 좋아하면 미제국주의의 잔재라고 호되게 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학교에선 알파벳이나 외국어글자가 크게 쓰여진 티를 입고 가면 야단을 받았고 교칙으로 금지했다. 
개인적으로 중학교때 전체 조회가 있는 날, 아무 생각없이 엄마가 사다 준 영문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갔다가 (반장이라 맨 앞에 서야 하는데) 교무실에 불려가 개망신을 당한 기억이 있다. 
외국인들은 한국에 오면 한국산 자동차가 가득한 것을 보고 놀랍다고 하며, 
사람들은 삼성과 LG가 타임스퀘어에 광고가 올라가는 날 벅차하며 애국심에 눈물 흘렸다. 
IMF가 불어닥치던 시절, 장롱에서 금반지를 빼서 내놓던 순박하고 책임감 강한 국민들은 그래도 우리 물건 써줘야 한다며 삼성핸드폰 국내점유율을 세계가 놀랄만큼 만들어 주었다. 
국내 지형에 강한 휴대폰이라며 노키아가 망해나갔고, 모토롤라도 유례없이 하위로 추락했다. 
국산 기업에 대한 이 나라 국민들의 애정은 망극할 지경이라, 
월마트, 노키아, 카르푸가 망해나가는 희한한 나라로 자리매김했다. 
외국기업의 물품을 수입추진할 때 거래처에게 늘 강조했던 건, 이 나라는 “월마트와 노키아, 까르푸가 망해나가는 나라다” 라는 거였다. 그들에게 한국만의 감수성에 맞추는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의 기업들은 나보다 무럭무럭 자랐다. 
회장들은 모두 휠체어를 타고 비자금을 조성했고 어떤 불법적인 증여나 상속도 모두 면제 받았다. 그들은 국가의 경제력을 책임지는 중대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밀어주고 당겨주던 그 기업들은 아무도, 전문경영진으로 구성해 국가와 국민에 보답하지 않는다. 
보름달을 만들던 삼립은 각종 간식을 모두 점령해 빵과 커피는 물론, 떡까지 장악한다. 
동네빵집은 사라지고 모두 다 삼립이 이름을 바꾼 SPC와 CJ 뜨레주르의 양대 산맥의 종업원이 되었다. 
LG의 자녀들이 100% 주주로 있는 아워홈이라는 외식업체는 순대도 판다. 
작년에 논란이 되었던 롯데마트 통큰 치킨, 신세계 계열사인 이마트의 피자, 동네 골목을 치고 들어온 SSM 수퍼마켓, 전국민이 대기업의 종업원이 될 추세이다. 
이게 전세계적인 추세인가? 신자유주의 끝물에 한국만큼 재벌이 거대해지는 나라도 있나?
이 나라의 재벌은 Chaebol 이라는 영문고유명사가 있다. 
이 고유명사는 한국의 재벌문화에 대해서 연구한 국내의 한 학자가 직접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해 영어단어로 인정이 된 경우이다.
기업은 흑자다. 공공요금은 치솟는다. 물가는 오르고, 국민은 자살한다. 
재벌은 살찌고 소비자는 죽어간다. 
각종 자동차는 국내에서 비싸게 팔고 수출이 아니면 살 길이 없다는 박정희의 신념을 이어받아 이 나라는 여전히 재벌에게 관대하고 재벌을 위해 나라가 굴러가고 국민들은 봉이 된다. 
신형 휴대폰을 개발한 회사들이 수십조의 흑자를 내면서 별도의 운영체제를 개발하지도 않고, 새로운 OS로 업그레이드 해주지도 않는다. 그저 팔아먹으면 그만이고 억울하면 새로 사세요. 지원금 드립니다. 이게 지들 나름대로의 서비스다. 
그러면서 죄없는 서비스 직원들만 조져, 소비자들에게 서비스를 잘 받았느냐고 확인을 하고 점수를 매기라 하고 불만사항을 접수하고 고운 음성으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운운한다. 
닥쳐라 더러운 돼지들아. 
대기업이 수조원대, 수천억원의 흑자를 내면 사회의 모든 자원을 낼름낼름 받아먹은 만큼 기술개발을 하고 재투자를 해야지 전 국민의 종업원화를 꾀해 동전이나 뜯어가고 쉽게 현금으로 만들 수 있는 소매업까지 장악하라고 밀어준 거 아니다. 
오래전부터 국산품 애용이 상당히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느꼈지만 최근들어 극에 치닫는 듯 하다. 전국민을 종업원화 해서, 전국민 정규직이라도 시켜줄 것인가? 그것도 아니잖는가?
사회환원 하라고 강요하는 거 아니다. 
재투자 재개발, 국가가 할 수 없는, 중소기업이 할 수 없는 거대한 프로젝트, 엄청난 투자금이 필요한 연구개발. 힘쓰란 말이다. 골목에서 천원떼기 백원떼기 팔아먹지 말고. 그런 건 당신들 아니어도 충분히 할 사람 많다. 
어차피 이윤추구하는 기업이다.
그들에게 윤리적인 걸 강요할 수도 없고, 사회복지재단이 되라고 할 수도 없다.
작작 해 처먹으라는 거다.
꼼수도 부릴만큼 부려야지, 아주 영악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리지 않는 이상, 수가 너무 얕아 구린내가 풍긴다.

2012. 1. 25.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이유

서른이 넘도록 각자의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완벽한 이방인이다.
외국인과 결혼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이유는, 이 사람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 나와 비슷하겠거니 하는 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외국인과의 결혼은 이 사람은 나와 완전히 다른 문화의 사람이라는 것을 대전제로 깔고 시작하는 반면, 같은 국적과 같은 언어, 혹은 게다가 동향의 사람일 경우 나와 같으리라는 엄청난 착각을 대전제로 깔고 시작한다.

법륜스님의 말씀대로 부부는,
큰 일로 절대 싸우지 않는다.
말하자면 큰 일이 벌어졌을 경우, 그 어떤 집단과도 동일하게 내부에서 엄청난 단결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위기 상태에 빠지거나, 집안의 어떤 불우한 일이 발생했을 경우 외부의 침략으로 간주하고 전투적으로 뭉치게 되어 있다.
이는 아주 소규모집단인 가족에서도 일반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집단의 규칙이다.

아주 작은 일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나와 같으리라는 착각”에서 시작된다. – 이 역시 법륜스님이 하신 말씀.

쓰레기통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쓰레기통을 화장실에 두지 않는 문화에서 나고 자랐다.
나의 모친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벗어난 이후 절대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두지 않았다.
불결하다는 게 그 주된 이유였으며, 수세식 화장실에서는 모든 휴지가 다 녹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녹지 않는 특별한 재질의 물품을 쓰지 않는 이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나는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두고 사는 것을 불결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독립을 해서 혼자 살 때도 절대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두지 않았다. 쓰레기통은 외려 화장실의 바깥 좀 가까운 곳에 두고 그 곳에 가지고 나와 물건을 버렸다. 예를 들어 생리대나, 수채구멍에 쌓인 머리카락 같은 것들이 해당된다. 이것은 관습이 된다. 그리고 엄마의 주장은 대부분 자식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고착된다.

반면,
남편은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두고 사는 문화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하여 독립을 하고서도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꼭 두었다.
그 이유는 수세식 변기라 할지라도 변기의 크기나 형태에 따라 간혹 변기가 막히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뒷처리에 사용된 휴지는 반드시 따로 분리를 해서 버려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화장실에서는 절대로 변에 관련된 종이만 발생되지 않는다. 머리카락이나, 어떠한 물품을 뜯은 포장들이나 물기가 묻은 것들을 다른 쓰레기통에 버릴 때 오히려 벌레가 생기거나 집안 전체가 불결해질 수 있다. 그리하여 남편의 본가는 여전히 화장실에 쓰레기통이 있고 가사일에 늘 부지런하신 시어머니께서 수시로 화장실의 쓰레기통을 닦고 말리는 일을 해오셨다.

결혼을 하고 난 뒤 나는 화장실에 휴지통을 두지 않았다.
내가 그런 문화에서 나고 자랐고 아무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쓰레기통이 없는 화장실에서 당황했다.

여기서 문제는 내가 과연 나의 문화가 합당하기 때문에 그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 것이 진정성이 있는가다.
기실, 주부의 자리에 있던 엄마나, 그 자리를 이어받은 나도, 결정적으로, 화장실에 있는 쓰레기통을 비우고 싶지 않다는 게 합리적 논거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내 가족이라도, 내 새끼라도 쉽게 말해 “똥닦은 휴지”를 내 손으로 치우는 일이 싫다는 것이다.
희생이라고 생각하거나 쓸데없는 집안일을 더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모두 “하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여러가지 합리화의 근거들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화장실에 쓰레기통이 있거나 없거나 당황하거나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편은 화장실에 쓰레기통이 없으면 매우 당황하고 불편해한다.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남편은 있어야 한다면, 둘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엔 있는 게 맞다.

여기서 내가 나의 진정한 마음의 욕구 “똥 닦은 휴지를 내가 치우고 그 냄새나는 쓰레기통을 내가 닦고 씻고 말려야 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관철했다면-
우리 부부은 매우 추접스럽고 민망한 소재인
“화장실에서 똥닦은 휴지를 왜 수세식 변기에 버리지 않고 별도의 쓰레기통에 따로 보관하느냐” 에 대해서 24시간 이상을 싸웠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이유는 이러하다.
대부분,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고, 그 마음의 근간엔,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상반되는 작업을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아주 견고하게 굳어버린 자아의 욕구가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뿌리를 걷어내는 작업은 평생에 걸쳐 지난하게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결혼 이후 내가 곧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비치하는 것으로 별 갈등없이 마무리되었지만 그 외에도 각종 매우 사사로운 것들로 끊임없이 갈등하게 되는 것이 동거인들 사이의 문제다)

왜 안되는가,
왜 용납하고 싶지 않은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나의 욕구와 상관없이 나의 양심이나 신념에 기반하는 것들도 있고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철저히 나의 욕구에 기초하는 것들도 있다. 이런 것들을 분별해 내는 과정은 쉽지 않으나, 내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들이 된다.

2012.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