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라 기억이여 치유하라 상처여

내앞에 깜빡이를 켜고 지나가는 405번 버스, 그리고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강남세브란스병원

이길을 지날때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안고 달렸는가 생각한다
서초 사거리에서 유턴을 하던 일, 급하게 여기 저기 전화를 하며 다시 예술의 전당 아래 우면산 터널을 지난 일 그런 것들 말이다.

여기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이 보이고 그 아래 검찰청과 경찰청이 이어져 있나. 한때 나꼼수라는 팟캐스트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정봉주 전위원이 여기서 크리스마스의 구속이 결정된 날 사람들이 모여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구속 환송회를 했다

프로파일러의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이 사회에서 경찰과 검찰이 존재하고, 누군가를 단속하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강제하고 재판하고 판단하고 단죄하고 구형하는 시스템, 그런 권리가 과연 인간에게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만든 시스템 위에 군림하는가 생각한다. 법안에 있는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밖에있는 누군가를 내쳐야 하는 것이 법의 기본이라던 아무리 읽어도 삐딱함이 느껴지는 조르주 아감벤을 떠올린다.

인간 세상에 대해서 유지되는 그 시스템의 효율성에 대해서 사람들은 한 번이라고 고민하고 살까. 특정한 계급이 세상을 엄호한다는 핑계아래, 한없이 자행되는 폭력의 연속성을 생각한다.

인간이 얼마나 처참하게 걍팍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의 인격의 밑바닥을 보고 싶을 때마다, 나는 살인범이 사람을 죽이고 토막내고 그러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영화를 즐긴다. 어쩌면 그건, 그래, 내가 겪은 폭력의 역사는 매우 고상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 침묵하고 살고있다
말해야 한다.

나보코프의 말이 떠오른다.
말하라. 기억이여.

나는 얼마나 말 할 수 있 는 가.

386은 꿈이다

나에겐 386세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내가 겨우 초등학교를 다닐 때쯤 종로에 나가면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고 학생들은 늘 “데모” 중이었다. 
비싼 등록금 내주고 소팔고 논팔아 학교 보내줬더니.. 하는 세대는 그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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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의 작업, 그에 필요한 재료를 사러 엄마와 강북시중심을 돌다보면 늘 백골단과 마주쳤고 최루탄이 어디 터지나 신경써야 했다. 
 
나의 엄마는 67학번쯤 되는데, 야간통행금지에 걸렸다가 풀려난 이야기, 닭장차라고 하는 저 탈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박정희가 화폐개혁을 또 한다더라 는 말을 포장마차에서 했다가 막걸리보안법에 걸려 몇 달동안 생사를 모르다 다리를 못 쓰게 되어 나타난 거래처 아저씨의 인야기를 전하며, 이 나라에서 데모를 하는 것은 삼대가 망할 일을 애써 도모하는 것이며, 여자의 경우 성고문도 비일비재 하니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는데, 오히려 엄마가 이야기를 전하는 그 어법은 무용담과 같아서 나에겐 환상적인 저항의 문법이 되었다. 
 
사람을 마구 잡아가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정부가 있다고 알려준 것은 역설적으로 “절대 데모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라고 강조했던 엄마였다. 그 때 엄마의 언어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엄마도 뭔가 그 “데모꾼” 들에 대한 호의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용기와 체제전복에 대한 꿈과, 사생활과 가족의 생계보다 더 큰 대의를 생각할 수 있는 그들에게 계급이라는 것을 덧붙여 나와 다르지만 그 팔자도 나름 부러운 상황이었던 것 같다. 
나의 모친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밥그릇을 포기하고 대의를 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에게는 늘 자신의 생활과 자신의 몇 안되는 혈육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했고, 어떤 대의가 사회적으로 실천될 때, 약간의 혜택을 조금 더 특별하게 받고자 했다. 그건 본인이 끊임없은 불가항력의 힘에 이끌려 인생의 파도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것이 억울함으로 남았고, 그에 대한 미미한 보상을 세상에 요구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결과적으로 나에겐 엄마가 투쟁해야 할 권력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엄마의 규칙대로 살길 바랐던, 그것도 매우 강경하고 카리스마가 심한 사람이었으므로, 나에겐 저항의 문법이 필요했다. 어릴 때는 욕지거리를 배워 사용해보기도 했지만 이후엔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메커니즘이 얽히고 설켜 결국 내 삶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낀 건 아마 중학교 때쯤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거였다. 그게 내가 열 네살쯤 때의 일이었다. 전교조가 시작되었고, 6월 항쟁이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당시 시사저널은 좋은 언론이었고, 한겨레가 창간되기 전이었다. 그 때 선두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386이었다. 전교조를 시작한 나의 선생님들은 1960년 생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그 분들의 “애제자” 로 쉽게 발탁되었다. 그 분들이 읽어보라고 적어준 책의 리스트는 점점 늘어나,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전태일 평전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따로 있었고, 그들이 즐겨 읊는 시가 따로 있었으며, 그들에게 가치가 있는 작가는 따로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답습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은 저항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386의 정서를 많이 흡수한 것은 내가 만났던 그 세대의 사람들이 줄곧 나에게 친절했기 때문이다. 
 줄곧 그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려 했고, 나는 기쁘게 그것들을 받아들였으며, 더욱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다시 그들에게 환영받는 입장이 반복되었다. 
 그들이 대열에서 벗어나 각자 흩어지고, 우리세대는 한총련의 마지막을 맞이했으며, 나는 그 입시전쟁에서 복합적 이유로 밀려나 그 대열에 끼지도 못했는데, 대열은 연세대 사태로 와해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조국을 휩쓸었다. 대학 가서 뭔가 해 볼 것 같던 친구들은 취업에 몰두했고, 그들은 높은 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자격증을 따기 위한 삶을 살아갔다. 나 역시, 그런 대의나, 저항에 대해서 잊고 살았다. 그 때, 우리가 저항했던 적들은 모두 시야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 적들은 땅으로 스며들어 우리들이 마시는 물까지 오염시켰다. 그게 바로 경쟁과 경제위주의 삶, 약육강식, 적자생존, 2등은 기억하지 않는 시기가 2002년 월드컵과 노무현을 어깨에 메고 시작되었다. 
 
 2002년 종로서점의 폐점이 이 시대의 시작을 울리는 경고였다고 생각한다. 
 월드컵이 열리고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레드컴플렉스를 극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컴플렉스를 극복했다기 보다, 이념을 버리고 소비를 택한 소비자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이 대선에 승리한 것으로 진보진영이 한 발 나선 것처럼 보였지만, 그 때 부터 사람들은 선거나 투표권이 소비자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만일, 전두환이 이 시점에 다시 출마를 해, 숨겨둔 돈이 100억조 정도 있는데, 그돈으로 시장경제를 다시 활성화 시키고 당신들의 아파트값을 유지해주며 해외정복을 시작해 부동산 경기를 재 점화하겠다는 공약과 함께 실천을 시작한다면. 나는 전두환도 재선에 이길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광주에서는 곡소리가 이어지겠지만, 이미 그런 것들은 괘념치 않는 사회 아닌가. 북한 주민들을 그리도 걱정하는 사람들이 한 국가의 테두리 안에 살고 있는 5월마다 제사상이 이어지는 광주를 잊고, 대추리를 잊고, 노근리를 잊고, 자살자가 가장 많은 동두천을 외면하고 지내지 않던가. 
 
 이 시대가 진보가 그나마 밥술 좀 얻어먹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시대는 위험사회(율리히 벡), 그리고 고도성장이 멈춘 것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태, 그리하여 더 이상 발전하거나 팽창하지 않을 각자의 재산에 대해서, 그 재산을 빼앗기면 가난과 죽임과 파산과 종말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시대, 그래서 이 사람들은 더욱 더 보수保守적일 것이다.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한 것. 그 지키기 위한 방패로 누군가는 진보를 택하고 보수진영을 택할 뿐, 진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는 진보나 보수라는 구분 자체가 모호한 상태이다. 성장을 하기 위해 파괴를 서슴치 않아야 한다는 종(縱)적 팽창에 대한 주장인가, 혹은 성장을 멈추더라도 나누면서 가야한다는 횡(橫)적 팽창을 꿈꾸는가 그 정도의 차이다. 
 
 나에게 꿈과 저항을 알려준 386세대는 지금 50대가 되었고, 이번 대선을 지나면서 극명한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시사인에 만화를 그리는 굽시니스트는 “50대 이상 평범한 엄마들이 아는 유일하게 친근하고 스토리가 있는 정치인”으로 박근혜의 당선이유를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대선이후 멘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뒷짐을 지고 있다. 이리 저리 여러곳에서 모두 실망한 사람들은 대통령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국민수준이 더 중요하다는 이상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386이 대열에서 벗어날 때쯤, 신자유주의, 혹은 경기 부양의 마지막 정점을 향해 그래프를 바짝 끌어올리는 총력전을 벌이고 있을 때, 이들은 후배들을 양성할 시기를 놓쳤다. 많은 후배들이 대열에서 벗어나 어학연수를 떠났고, 혹은 돌아오지 않았고, 혹은 학위를 따서 금의환향했다. 
 어떤 50대가 나에게 말했다. ‘가난과 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지도 않은 세대 아닌가. 중학교 입시와 고등학교 입시가 사라졌던 세대가 아닌가.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그렇게 쉽게 간 세대가 단군이래 없었을 것이다. 취직도 얼마나 쉽게 되었던가. 학교 앞에 대기업의 차가 와서 학생들을 모시고 가던 세대다. 취업을 하고 나서 경기는 얼마나 좋았나. 10% 성장율까지 보인 고도성장의 세대다. 세계 역사상 그런 유래가 없을 만큼 실컷 먹고 잔치 벌린 가장 풍족한 세대가 아닌가. 그러면서 뭐가 힘들다고 징징대는 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도 50대지만, 우리는 정말 편하게 살았다.’ 라고.
 
 그 사람의 이야기에 바로 다른 50대가 “그건 당신 생각”이라고 일갈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었겠군.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덤으로 억울함이 솟구쳐 올라오기도 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적어도, 
 기본 규칙과 규율이 있고, 그에 대해서 변치 않는 적용이 있고, 열심히 하면, 이렇게 가면, 성실히 하면, 이 길이 正道다. 라는 룰이 지켜져야 하지 않나. 
 이제 인생의 절반정도를 살았는데 지금 느끼는 것은 나보다 어린 세대, 혹은 내 자식들이 엄마 이 길이 正道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글쎄..어떤 인간이 정권을 잡고 누가 교육감이 되고 누가 입시제도에 손을 대느냐에 따라 정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아랫세대들에게 정답과 규칙을 가르쳐 줄 수 없는 세상. 그 때 그 때 다르다고, 융통성있게 살아야 한다고. 정답은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게 오늘의 현실. 
 
공분을 논하기 바쁜 인터넷 場에서 조만간 “경상도 50대 개새끼론”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용어에 광분하지 마시라. 한 때 20대 개새끼론이 유행이었다.) 
저항할 게 없어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제 그냥 맥이 빠져버린 것이다. 
 
저항은 언제나 지속된다. 운명에 대해, 관습에 대해, 삶에 대해, 불가항력적인 권력에 대해, 내 욕구에 대해, 인간은 끊임없이 저항해야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저항이 모든 이에게 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저항은, 저항하고 싶은 자에게만 가치가 있다. 
 
그런데, 맥 빠져 버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몇 백년전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 “레 미제라블”에 이렇게들 광분하시는지. 
당신들의 마음속에 장발장에게 투영한 그 부글거리는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지, 들여다 본 적 있는가. 
 
  
 
 
 

Up the hill

up the hill 이다. Hooker hill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
고만고만한 juicy bar ( 두 잔 값을 내고 한 잔을 마시면 한 잔의 가격이 아가씨에게 돌아가는 체제) 들이 있고 맨 위에 스텀퍼라는 댄스클럽 ( normal한 pop음악) 이 있고 그 밑 우측엔 프렌즈라는 곳이 있었다. 사진으로 간판이 보인다. 프렌즈에는 당시 흔치 않던 포켓볼 다이가 있었고, 다트판도 있었는데, 한국인들이 갈만한 장소였다.

그 윗쪽에서 스텀퍼 사이에는 오란씨와 소주를 섞은 소주케틀kettle을 1.5리터 PET 병을 자른 것에 담아 팔았는데, 일반 미군 사병들이 자주 사 마셨다. 그 아이들은 보통 16세부터 시작해,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저학력층 아이들도 적지 않아 자기 이름 정도 겨우 쓰는 아이들이었고, 하루에 50단어만 사용한다는 전설의 계급층이었다.

맨 꼭대기엔 남산모텔인가 여관인가 하는 엉뚱한 여관이 골목의 마무리를 했고, 그 골목의 왼쪽으로 틀어서 내려가면 매번 불이 나서 문을 닫는 나이트클럽이 있은 유명한 계단(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도 연출) 연결된 길이 있다.

간혹 미군 헌병대가 나타나면 골목이 좀 얌전해졌고, 비상이 걸리거나 미군범죄가 일어나면 모든 일반사병은 외출금지가 걸려 이 골목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병들을 상대하는 저렴한 술집들이 있어, 고위 장교나 다른 외국 비지니스 맨들은 이 곳을 찾지 않았는데, 유독 스웨덴 네덜란드 등 스칸디나이아 근처 복지국가쪽 엔지니어들은 이 곳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우리나라에 발전기를 파는 북유럽 A모회사 팀들이 특히 이 골목을 좋아했다.

당시 매우 인상깊은 커플이 하나 있었는데 50대의 북유럽 엔지니어 커플로, 비혼이었는데, 아줌마는 작고 마른 체형에 아주 머리가 길고, 아저씨는 콧수염이 난 바이킹 같이 생겼었다. 이 둘은 주말마다 이 골목의 입구에서 헤어져 밤새 각자 놀다가 동 틀무렵 헤어진 곳에서 다시 만나 집으로 돌아갔다.
Honey, did you have fun?
Yes, I did. How about you?
Me, too!
I’m very grad to hear that you had fun!

스텀퍼stumper 에는 이태원에서 잔뼈가 굵은 듯한 한국인 디제이 아저씨가 있었는데 언제든지 내가 Gloria Gaynor의 I will survive 를 틀어달라고 하면 두 번 세 번씩도 틀어주곤 했다.

이 사진이 찍힌 지점의 좌측쯤에 있던 업소에서 그 당시에 여성접대부가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 관광특구로 개발되고 이태원이 내국인에게 업소를 오픈해야 하는 규정이 생긴 뒤 IMF가 터지고 이 골목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때 흥이 좋은 (군인들에게도, 민간인들에게도 아무 불행한 사건도 없는) 때에 이 골목은 사람으로 꽉 차서 걸어올라가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때 나는,
스물 셋에서 스물 다섯,
하루종일 미니스커트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고 계단을 뛰어다니며 햄버거와 스테이크를 나르다가 12시에 마감을 하면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떨구는 대신 카스 한 병 마시고 카스 두 병을 마시러 이 골목의 프렌즈를 김언니와 올라갔었다.

알콜중독으로 비명횡사할 것 같던 김언니는 일본남자와 결혼해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는 지금 고등학생 딸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는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제 에비가 사다 준 설렁탕 반그릇을 먹은 아이가 “아 행복하다” 라고 말한다.

아들의 집

나에겐 아들이 하나 있다.
이 아이는 2006년도에 한국에서 태어났고, 2006년 12월에 처음 아파트에 입성했다.
난곡의 판자촌을 깎아 만든 재개발 단지였다. 유모차를 밀고 높은 언덕을 올라다녀야 하는 길이었다.
시흥의 뒷길을 돌아 멀리서 그 아파트를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성채가 모여 있는 듯 했다. 그만큼 생경스럽고 낯선 곳이었다. 내가 사는 곳이었지만, 언제나 기괴하고 이상야릇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산안개가 아파트 단지를 뒤덮었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림역과 기온차이도 3도 정도 났다. 미림여고를 지나 버스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올 때는 귀가 멍멍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2009년 7월에 지금 살고 있는 평촌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 곳은 모두가 아파트로 이루어진 신도시이다. 20년이 되어가는 대한민국 신도시 1기 도시 중의 하나로, 대부분의 아파트들이 조금씩 낡아가고 있지만, 적절한 20-30대 평수가 골고루 있고, 사교육시설등이 잘 되어 있고 구획정리가 깔끔한데다가 인구밀집도가 높아 생활편의시설이 많다. 이런 편리성 때문에 20-30대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키우기 좋은 도시로 평가해 이주를 해오는 경우가 많다. 기존의 안양이나 평촌 들녘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신도시라는 것이 원래 외부인을 유입하기 위한 곳이므로.

아이는 그렇게 기억이 생성될 무렵부터 아파트촌에 살았다.

이 아이가 자라나면서 문화의 격차가 생겨나고 있다.
일단 아이는 흙길을 잘 걷지 못한다. 산에 데려가면 자꾸 미끄러지곤 한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물이 마르면 물이 마르는대로 그 느낌이 달라지는 산길과 흙길을 잘 걷지 못하는 것이다.
“벽장속의 요정”이라는 김성녀 주연의 모노드라마 연극에는 40여년을 벽장에 숨어 살던 정치범 아버지가 세상에 처음 나와 포장된 도로 위를 걸으며 튕겨져 나갈 거 같고, 미끄러질 거 같다고 하던 것과 상반되는, 그러나 역시 낯설다는 것에 대해선 동일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파트단지를 나와 안양천변을 걸어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이 많은 관양동 인근의 밤산책을 나갔다가 반지하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아이가 물었다.
_ 엄마 저기는 뭐야?
_ 집이지.
라는 내 말에, 저기가 사람이 사는 곳이냐고 물었다. 집이 땅 속에 있어? 라고.
아이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반지하방. 엄마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다 한 번씩 거쳐갔던 주거시설. 반지하방. 거기도 사람이 살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이는 낯설어 했다.

또 몇 달 전에는 내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가면..” 이라고 말했을 때,
아이가 “마당이 뭐야?” 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원래 집은 대문이 있고, 마당이 있고, 그 안에 건물이 있고, 건물에 들어가는 현관문이 따로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마당이 없는 집에서 유년기를 모조리 보냈고, 앞으로도 몇 년은 더 아파트에서 살아야 할 아이에게 마당이란 매우 먼 곳의, 동화나 영화에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처음 크레파스를 쥐고 집을 그릴 때도 아이는 아파트를 그렸다.
그러면서도 엄마 아파트는 왜 모두 네모모양이야? 라고 묻긴 했다.
세모난 아파트, 동그란 아파트가 있으면 재미날 거 같아. 라고 말하긴 했다.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긴 하지만, 함부로 놀러가지 못하는 곳.
마당과 골목이 없는 곳.
경비아저씨와 관리사무실이 있는 곳.
누군가 우리집을 지켜주는 대리인과 노동의 대리자가 존재하는 곳.
그 대신에 마당도, 대문도 없는 네모난 공간.
우리집과 저 친구의 집이 똑같고, 우리집은 몇 평이고, 친구의 집은 몇 평인 것으로 한 번에 수치상의 가늠이 되는 공간.

그러나, 그 집엔 다락방이 있고, 좁은지 넓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집엔 뭔가가 있는, 그 집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닌.

그런 자리에서 아이가 자랐다.

이 아이가 좀 더 자라, 반지하방에 살고 있는 친구와,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질 수도 있겠고,
우리가 다른 형태의 주거형식을 택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의 형태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을 때, 아이가 갖게 되는 마음의 폭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다.

내 마음대로 내 집을 개선하지 못하고, 정해진 양식과 주어진 형식에 따라 객관식의 답을 맞추듯 다지선다로 골라야 하는 삶이 지겨워지려고 하는데,
어쩌면 그런 선택지를 고르는 인생은, 2006년생 내 아이에겐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당연한 인생의 법칙이 될 지도 모르겠다.

2013. 1. 3.

한국사회, 가족의 파시즘 – 강준만 글 발췌

냉정한 사회과학적 분석의 메스를 들이대자면, 한국의 어머니 역사는 어머니가 ‘자궁 가족’의 수장으로서 그런 전쟁 (입시전쟁) 체제에 순응해 온 슬픈 역사다. 그 역사는 ‘보수적 과잉반응’, ‘보상적 인정 투쟁’ 이라고 하는 세 가지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보수적 과잉 순응이다. 이는 어떤 체제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오히려 그 체제에 과잉 순응함으로써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어머니의 카드는 아들이다.

둘째, 보험적 투자협정이다. (중략)
“한국의 특수한 모성 이데올로기 속에서 한국 중산층 어머니는 서구의 어머니처럼 아이의 감정적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공감하는 어머니가 아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하나의 투자의 대상으로 파악하면서, 아이의 성적과 대학 진학, 이에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성공에 책임을 지는 것을 어머니 역할로서 받아들이고 있다….이러한 한국사회의 모성 이데올로기는 아이를 하나의 상품으로 그럴 듯 하게 만들어 내기 위해, 어머니로 하여금 아이들과 전적으로 함께 지내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 윤택림
“근 1-2 세기 동안 지속된 식민지적 격동기와 혼란기를 살아가면서 여자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전력투구했으며 특히 부계 혈통주의의 전통에 따라 아들에게 투자를 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이 커지니까요. ‘여자의 적은 여자’ 라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만, 아들을 둔 어머니들을 남녀 고용 할당제를 반대하며, 불합리한 결혼제도를 앞장서서 존속시킵니다. 여자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개별 가족내의 어머니로서 강해졌지만 여전히 여자로서는 매우 취약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조한혜정

셋째, 보상적 인정 투쟁이다. 아들에게 뭘 바랄 게 전혀 없을 만큼 유능하고 당당한 어머니들이 많다. 그래도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인정 투쟁’을 피해갈 순 없다. “니네 아들 무슨 대학 다니니?” 여기서 기죽는 어머니들이 많다. 아들에게 뭘 바라서가 아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인정 투쟁의 도구다. 어머니의 유능함을 입증해주고 자존심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중략)
교류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어머니의 인정 투쟁은 변형된 권력투쟁인 셈이다. 투쟁이 습속이 돼 관성에 의해 굴러가는 면도 있다.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완화 되기는 커녕 계속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대중에겐 다른 선택이 없는 점도 있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끄는 新자궁 가족모델과 이에 따른 ‘도구적 모성’은 한국사회의 전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 세계적으로 살펴볼 때 가족주의가 강한 나라일 수록 부정부패가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한국에서 개인은 혼자 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대표선수다. 한국인은 국가의 이익과 가족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가족의 이익을 앞세우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부정부패가 성행하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중략)
집단적 위선의 향연을 꼬집고 ‘가족 파시즘’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이득재는 한국의 가족주의를 ‘가국체제’, 즉 가족과 국가의 논리가 끈끈하게 결합된 체제로 보면서, 가족을 파시즘의 씨앗이자 파수꾼으로 규정했다. 이런 시각에 근거하여 이명원은 한국의 가족주의는 국가주의로 표상되는 집단주의의 하위구조이기 때문에 지난 역사를 통하여 작동되었던 가부장적 ‘국가 파시즘’ 체제는, 가족단위 내에서 가부장적 ‘가족 파시즘’ 체제로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오, 가족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느 순간에도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살점이면서, 나를 낳고 키워준 사랑과 감사의 궁극적 상징이자, 때로는 내 삶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끔찍하게도 들러붙는 수초 같은 것’ – 김용희

어머니 수난사 – 강준만 발췌

오늘 낮에 친구와 나눈 대화. 경상도 남자들의 해외망명(?) 욕구에 대한 원인은 가족파시즘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 페북의 어느 글을 읽고 다시 강준만의 책을 꺼내 일부 발췌해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