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권하고 싶은 책 – 백년만의 북 리뷰 :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해로운가

제임스 길리건 / 교양인 펴냄 / 13,000원

영어 원제는 Why some politicians are more dangerous than others.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학자인데, 미국에선 violence와 preventing violence를 집필하여 출간한 바 있는 정신의학자이다. 

 굳이 이 책들의 표지까지 갖다 붙인 것은 듣보잡이라고 공격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소개 : 1966년부터 2000년까지 34년간 하버드대 의대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뉴욕대 정신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십 년간 폭력 행동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폭력 예방책을 연구해 온 폭력 문제의 권위자이다. 
하버드대 법정신의학 연구소 책임자로서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매사추세츠 주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폭력 예방을 위한 사회심리학적 프로젝트를 실시해 교도소 안의 살인율과 자살률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1년 하버드 대학에서 ‘폭력의 뿌리’라는 주제로 강의한 뒤 그 내용을 정리해 <폭력: 국가 전염병에 관한 성찰>로 펴냈다. 이 책은 폭력의 심리적, 사회적 원인을 분석한 문제작으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폭력 연구에서 교과서적 저작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2000년에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으로 청소년범죄예방위원회를 총괄했으며, 2005년에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발표된 아동 폭력에 관한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 알라딘 출처 

이 책은 폭력치사 (자살과 살인)와 각 정당의 집권기에 이상한 수치 변화가 있는 것을 관찰한 정신의학자의 보고서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사실과 수치를 토대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에 집중한다. 


간단하게 말해, 제임스 길리건이 표시한 수치의 그래프는 다음과 같다.

공화당이 집권하는 시기, 폭력치사 수치는 상승한다. 

민주당이 집권하는 시기, 폭력치사 수치는 하강한다. 

이러한 공통된 통계가 나오는 이유는 두 정당의 정책 때문이다. 
사람들은 개인을 보고 투표하는 경우가 있으나 명백하게 정치인은 정당에 속해 있으며, 이 두 정당의 정책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폭력성을 증대시키기고 감소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길리건이 대전제로 깔고 가는 것은 살인과 자살은 같은 종류의 폭력행위라는 것이다. 
사실 살인이라는 대범위안에 나는 타살과 자살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공격성이 내면으로 향하는 자는 자살을 하는 것이고, 외부로 나가는 사람은 타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신의학자는 아니자만)
폭력성과 공격성을 띈 심리상태에서 타해(폭행)을 가하는 사람이 있고 자해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것은 폭력과 공격성의 분출 방향이 다를 뿐이지 그 기저는 같다고 생각하는 바이므로, 나는 제임스 길리건의 대전제에 동의한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이러한 여러가지 통계수치들을 이야기하고 책의 중반부에서 그 차이점이 벌어지는 이유를 말한다.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진영과 공화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진영의 차이점은 죄책감과 수치심의 차이로 정리한다. 언뜻 보면 이 두가지 심리는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명백히 다른 심리상태이다. 


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자부심 (교만)이다.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 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다. (132-133쪽) 


그러니, 이러한 성향이 정당 지지에 대해 확연한 차이점을 가져오는데다가 극 정당을 구성하는 인력들의 기본 정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보수정당은 경쟁을 부추키고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며,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 시켜 상류층을 역으로 보호하는 정책 “이중정복(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로마의 대표적 정책)”을 사용한다. 


정치경제학자 더글러스 힙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민주당 정부는 실업을 줄이고 성장을 끌어올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팽창 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높은 물가 상승률을 무릅쓸 가능성이 공화당 정부보다 높다.(중략) 1951년 이후 일어난 여섯번의 불황 중에서 다섯 번이 .. 공화당 정부때 일어났다. 이 경기 위축은 하나 같이 .. 인플레이션과 싸우느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기업가집단이 상당히 폭력적이고 경쟁위주에 익숙해, 진보집단과의 윤리 도덕적 결정에 대해 상이한 차이점을 보이고, 보수집단은 기업가 집단과 유사함을 예로 든다. 다시 말해 이러한 보수집단은 폭력치사사건을 개인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반면 진보집단은 사회시스템의 문제로 공론화 시키는 경향이 크다는 주장이다. 

공화당 집권기에 폭력치사 사건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 개인의 실업률과 빈부격차의 차이에 크게 주목하는데, 보수집단을 지지하는 지도를 그려봤을 때 옛남부(Old South)와 거친 서부(wild West)로 집중된다. 이것은 ‘카우보이와 인디언’이라는 역사적 유산과 상징과 결부된 주들이 여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보수집단 – 권위주의적 인격 – 수치심에 젖은 사람 – 경계선 성격장애, 나르시시즘, 편집증, 반사회적, 우파권위주의의 인격구조 – 노예제도가 있던 11개 주(옛남부), 켄터키, 오클라호마 같은 2개 접경주, 서부 산악 주와 사막 주, 대부분의 중서부 대평원 

진보집단 – 평등주의적 인격 – 죄의식에 젖은 사람 – 우울증, 강박관념, 도덕적 마조히즘 유형 – 두 해안지역, 태평양 연안주와 북대서양 연안 주, 뉴잉글랜드와 위스콘신, 미네소타 (스칸디나비아 유산이 강한 북중부), 일리노이, 미시건 등. 

공화당은 경제에 강하고, 민주당은 경제에 약하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저자는 실업률과 실업지속도가 단 한 번의 예외없이 모든 공화당 정부때 올라갔고 모든 민주당 행정부 때 내려갔다는 것을 말한다. 
불황의 경우, 민주당의 불황은 86개월, 공화당은 246개월의 수치가 나타났으며 공화당은 정권을 잡은 동안 민주당보다 매년 2.3배나 더 긴 불황을 가져왔다는 통계수치를 이용한다. 
“공화당이 민주당으로부터 물려받은 단 한 번의 불황은 111년동안 1921년 단 한 번 일어났는데 겨우 4개월만에 끝난 반면, 민주당이 네 명의 공화당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4번의 불황은 끝나는 데 모두 27개월이 걸렸다. “

말하자면 저자가 인용한 내용 그대로 “공화당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높은 소득세, 높은 자본 이득세, 높은 법인세, 높은 사망(상속)세와 과도한 규제로 경제 성장을 질식시키는 경쟁자 민주당과는 달리 자기네 정당은 경제를 성장시키는 정당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은 모두 개 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차이가 실업과 불황을 가져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개인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증폭시켜 자살과 살인같은 폭력치사가 전염병처럼 창궐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저자는 상당한 진보주의자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정치적인 것보다는 이 사람은 정신의학자로서 폐쇄된 교도소에 대한 긴 연구기간, 그리고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연구를 하다 보니 인간은 폭력에 노출될 수록 폭력적이 되고 (비폭력적인 범죄자를 가장 폭력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교도소 수감이다. 라는 주장) 그 폭력은 인간의 취약한 심리,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에 대해 연구를 지속하다 보니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연구가 민주당이나 미국내 진보세력들에게 상당히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은 뻔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이라고 생각해봤으나, 
기껏해서 50년 남짓 된 공화제 정부(민주주의라고 보긴 어렵다) 체제하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은 말하자면 김영삼 정부때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고작 네 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어떤 특정한 통계를 갖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 중에 과연 진보정당이라고 할 것이, 김대중, 노무현..정부도 과연 진보정당집권기였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혹자들은 박정희 시대에 경기부양책으로 인해 이 나라가 잘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일일이 수치와 통계와 그 후의 벌어진 후폭풍 (지금까지도 이어지는)에 대해서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설득하려면 2-3일 가둬놓고 가르쳐도 모자랄 판이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 이제서야 갑론을박 하고 있는 진보타령에 대해서도, 사실 진보.. 라기 보다는 중도진보..라든가 대부분이 보수우파인 나라에서, 과연 좌파..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이건 물론 상대적인 기준을 갖다 대면, 우리나라에서 그만하면 좌빨진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좌파의 원류인 유럽에 갖다 대면 당신은 국수주의자요. 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상황이니 적용하긴 어렵다. 

그러나! 

최근들어, 불거지는 여러가지 이익집단(이라고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겠다만, 개개의 분열된 사회문제들)들의 갈등에 대하여,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보적 성향을 띈다.이 현상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진보들은 “공감능력이 뛰어나게 발달한 사람들”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제임스 길리건은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다고 정리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경쟁을 선호하고 강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본인은 전혀 상류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수치심을 더 강하게 느끼는 성향을 타고 났거나, 살면서 발달된 것일 뿐.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로 치부하긴 어렵다는 것이지만, 
사회가 적어도 살만하게 돌아가려면 보수집단의 집권이 그닥 유리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2010년에 발표된 이 나라의 통계 하나를 적어보겠다. 

한국인 2010년 한 해동안 1만 5,566명 자살, 
인구 10만명당 31.2명 자살 OECD 1위, 
세계 2위(1위가 궁금한가. 1위는 리투아니아였다. 평균 남성 70명, 여성 14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10-30대 사망원인 1위 자살, 
출산율 222개 나라중 217위

이 책을 번역한 이희재씨의 글이 읽을 만 하여 뒤에 적으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분할 정복 전략이 주효하려면 범죄율이 높게 유지되어야 한다. 범죄는 주로 못 사는 사람이 저지르고 그 피해도 주로 못 사는 사람이 입는다. 잘사는 사람은 사설 방범업체가 철통같이 지켜주므로 범죄율이 올라가도 피해를 별로 보지 않는다. 절대 다수의 못사는 사람들은 범죄에 그대로 노출되므로 범죄를 저지르는  똑같이 못사는 사람에 반감을 품고, 말로만 범죄 엄단을 내세우는 공화당을 찍게 마련이다. 

길리건 박사는 미국의 중산층과 서민 99퍼센트가 좀 더 사람답게 살려면 1퍼센트의 분할 정복 전략에 휘둘리지 말고 어떤 당이 99퍼센트를 위한 정책을 내놓는지를 보고 투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중요한 것은 정당이 추구하는 정책이지 인물이 아니다. 

[2010년 통계 인용] 한국은 잘 사는 사람에게는 천국이고 못 사는 사람에게는 지옥임을 높은 자살율과 낮은 출산율이 말해준다. 

자기 목숨을 끊는 행위를 지금은 자살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자진(自盡) 이라는 말을 썼다. 진이 빠져서 당하는 죽음, 어쩌면 한국인의 자살은 배경없고 힘없는 개인에게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기면서 극단적 경쟁을 강요하고 소수의 상층부에게는 권력과 금력의 무경쟁 세습을 무한정 허용하는 불공평한 경쟁 지상주의 사회에서 버틸대로 버티다가 탈진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택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2012.2.28.

총선이 얼마 안 남았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민주통합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아 물론 당명을 바꾼 새누리당도 절대 진보정당이 아니다. 
여기까지. 

엄마는 실직중

실업과 실직사회에 대한 글을 읽다보니 한 생각인데, 실직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렇게 크다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애엄마들의 황망함에 대해서 누가 고려를 해보았는가다.

임신/출산/육아의 과정을 거치며 직장을 그만두는 엄마들의 경우, 이게 아무리 자발적이라도 하더라도 임금노동시장에서 밀려났다는 박탈감으로 인해 실직과 유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이걸 지워주는 건 실직이 아닌 이직으로 생각해야 하겠지만, 이 나라의 사회적 분위기상, 엄마라는 것은 매우 숭고한 일이지만 그것을 절대 프로의식 가득한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아준다는 거다.

개인적으로 임금노동시장에서 일하다가 급작스러운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물론 그건 내가 선택한 몫이라고 누가 트집을 잡아도 할 수 없다만.

임신을 하게 되고 급하게 일을 정리하면서 임신중에 무슨 태교니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내내 출산예정 일주일전까지 모니터 앞에 앉아 폭풍업무를 봤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육아휴직을 출산이후로 잡아놓는 것을 가정했을 때, 마음으로도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할 만큼 업무 인수인계를 해줘야 하는 게 바로 코 앞에 닥친 일이기 때문에 미친 듯이 일을 해대지 어디 뱃속에 있는 애 생각할 여유나 몇 번 있었겠느냐 말이다.

이 사회에서 바라는 엄마는,
성녀이길 바라면서 초능력자이길 바라고, 감정정리도 깔끔하길 바란다.

<짤방이 너무 귀엽군>

남자들은 부인이 애엄마가 되는 그 순간 자기 엄마와 동일시 하며 성모마리아적인 자기 자식의 어미를 기대한다. (물론 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어른들은 젊은 엄마들에게 에미가 되서 할 짓이냐 에미가 그게 뭐냐 라고 강요하는 반면,

배우자들은 대체 당신이 집에서 하는 일이 뭐라고. 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우리 마누라 너무 수고하지..라고 하면서 귓전에는 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윽박지르듯이 하던 말 “집구석에 하는 일이 뭐 있다고!” 라는 말이 맴돌 것이다.

설령 그 중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내내 잘 버티고 있는 엄마들도 직장내 승진에서 밀려나거나 야근, 회식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어처구니 없는 사회에서 반실직과 다름없는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사회에서 그깟 돈 몇 푼 버는 것보다 정말 대단하고 힘든 일을 하고 있다고 칭찬해줘도 모자랄판에, 나도 밖에서 돈 버느라 힘들다고 징징대는 어린 신랑들이 천지 삐까리다.
게다가 많은 초보아빠들은 애 안았다가 내가 떨어뜨려 죽이면 어떻게 하나, 라는 공포에 시달린다고 한다. 같이 자다가 깔아뭉개면 어쩌나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모두 다 미성숙한 상태에서 만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혹시 어린 아이가 수단이 되거나 목적이 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지만, 이건 이미 시간이 오래 흐른 다음에 깨닫는 개인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사회라도, 어미의 노릇을 하는 것과 아비의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차대하고 심각하고 고귀한 일인가 제도적으로 혹은 분위기라도 만들어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실직당하고 하루 종일 공원에서 빈 가방 들고 헤매는 늙은 아버지의 심정과 우는 애 업고 슬리퍼 신고 터덜터덜 동네를 거니는 젊은 엄마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

임신/출산/육아를 거치면서 사실상 실직상태에 몰린 엄마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의 숭고함과 자아발견과 자아계발에 지대한 가치를 학습받으며 자란 세대다. 동생 한 번 업어보지 않고 자란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은 매우 낯설고 어색한 일이다.

쉽게 말해 언제는 유능한 여자가 되어 불평등에 반대하여 투사가 되라더니 이제와서 숭고한 마리아가 되라는 말이냐고 따져 물을 수 있다.

실직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할 방법은 사회적 평등과 가족의 이해겠지만, 지금 이 따위 나라에서 두 가지를 다 거머쥐는 것은 요원해 보이는 일이다.

그렇다고 각자 알아서 하되 돈 있으면 되도록 전문상담사를 만나라고, 우울증을 조심하라고  쉽게 말해도 되는 일인가?

2012. 2. 27.

새롭게 태어나는 소중한 생명은 
임금노동시장에서 열나게 업무만 처리하다 온 사람에게 
매우 낯설고 어색하고 이해할 수 없으나 
절대 미워해서는 안되는 성역과도 같은 존재다. 
낯설고 낯설고 또 낯설다
– 짤방은 올해 7살이 되어 느물거리는 내 새끼임-

주말 마트 휴업이 필요한 이유

1. 마트에 가야한다 하니 남편이 다녀와서 치킨을 시켜 달라 함.  (개 사료및 간식이 딱 떨어졌다. 집 앞과 근처 동물병원 역시 문을 닫았다) – 혼자 시켜먹을 줄 모름 – 나는 마음이 조급함

2. 주차장 만차, 게다가 몇몇 차주들의 야릇한 주차 – 스트레스 상승

3. 사람 많음. 혼잡 복잡 판매원들이 적극적 마케팅 – 피로도 상승
인구밀집도가 높아져 공기도 불쾌
매장이 크고 카트를 밀며 다니는 일에 육체적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허기짐까지 발생

4. 타인과의 장바구니 비교
– 내 카트가 꽉 차 있으면 돈 많이 나가는 일에 스트레스,
내 카트가 비어 있으면 상대적 빈곤감에 스트레스

5. 타인의 배우자에 대한 비교

박스자율포장대에서 혼자 포장을 하다가
포장하고 애 보고 하는 아빠들을 보며 급 분노 상승.
– 나는 왜 명절에도 “혼자” 5-60만원어치의 장을 봐야 하는가. 에 대한 뒷끝작렬 서러움 쓰나미
집에 다쳐서 누워있는 남편에 대한 분노 폭발
여기서 빨리 안 오냐고 전화오면 끝장나기 직전의 임계점 도달

6. 계산하며 남편카드로 결제 집에 있는 남편에게 SMS가 도착해
나의 현재 행동반경이 노출되는 것에 대한
사생활침해에 대한 불쾌감이 갑자기 급분노 상승
(분노에 분노가 덮혀 가속도를 밣기 시작)

7. 주차장에서 나오면서 김종배의 이털남을 들으며 주의를 분산시키려 하는데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 내용이 나와 사회적 분노로 승화

8. 마트 주차장 앞 “소비자는 대형마트 휴업을 반대합니다.” 라는 문구에 사회적 분노 추가

– 결국 집에 오는 길에 혼자 교동짬뽕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혼자 왔기 때문에 짬뽕과 짜장을 동시에 맛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탄식 추가

9. 집 지하 주차장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박스 하나 장바구니 하나 혼자 들고 올라가는 것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 탈진과 인생무상에 대한 개엿같은 기분까지 추가.

결론.

주말마트는 국민건강에 매우 해로우므로
절대적으로 휴업하는 것이 옳음.

나꼼수를 생각한다.

최근들어 불거지는 나꼼수에 대한 이슈와,
그로 인해 분열이니 통일이니에 대한 얘기들과
생각을 주로 같이 하는 한 트친의 트윗을 보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한다.

길게 수식하지 않고 최대한 간결하게 적겠다.

1. 나꼼수의 공적 인정. 

– 정치에 대한 관심, 주류언론에 대한 비판, 해적방송의 위대할 손 (위대할 수 있다), 애플본사에서 한국을 특별방문할 정도로 팟캐스트의 위상을 드높인 점.
(더불어 아이폰 판매도 증가했는가? – 김어준 왈 “씨발 그건 내 알바 아니고” 까지)
여러가지 진보진영에 대한 담론 증가.
이 모든 공적 인정.

슬로건 –
정치도 유쾌할 수 있다 – 전국민의 가벼운 정치로의 접근,
쫄지바 씨바 – 전국민의 상처받은 자존심 회복
정치가 생활의 스트레스다 – 전국민의 향햑열을 불태운 점 (가카와 같은 공적)

이 모두 인정. 

2. 나꼼수의 정체성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읽는 순간, 이 방송과 김어준의 목적과 정체성을 알 수 있다.
“노무현의 노제에서 소방차 뒤에 서 울며, 내 남은 시간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께요.”
라고 했던 그의 결심, 여태 검은 넥타이를 메고 다니는 김어준의 행보,
오로지 가카만을 위한 방송을 통해 이미 드러나는 정체성.

– 이 방송은 노무현을 위한 진혼곡이다.
복수를 꿈꾸는 김어준, 그를 위한 방송을 준비하고 딴지일보와 본인 특유의 특성을 드러낸다.

– 이 방송은 “편들어주기”를 지향한다.
곽노현 교육감 사건 때 이미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김어준이 어떤 경로로 “편들어주기”로 정립했는지 나는 김어준이 아니라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무 편도 없어서 무참하게 개박살나고 망신당하고 결국 죽음에 이른 노무현을 보낸 사람으로 “편들어주기”로 누군가가 망신당하는 것이라도 막고 싶었던 것일게다.

나꼼수는 노무현을 편들어 주지 못한 자괴감에서 시작해
곽노현 편들기와 정봉주 편들기로 이어진다.

3,

유시민의 말대로 (그 사람이 거기 있었고 민중이 그를 발견한 것 – 이거 참 명언이다)
나꼼수가 거기 있었고 사람들이 찾아서 들었고 알아서 열광했고 모두들 편을 들어주었다.
모든 시스템은 정점을 찍으면 내려오게 되어 있다.
나꼼수의 곽노현 편들어주기에서 시작된 논란이 비키니 사건을 거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4.

나꼼수의 1회분은 BBK 관련이다.
이 때 주진우는 출연하지 않았고, 김용민은 말이 없었다.

나꼼수는 이 정권 전부를 까기 위한 방송이 절대 아니고
오직 가카만을 위한 방송이 맞다.
하다 보니 여기 저기서 요구가 들어와 몇 가지 손을 내민 적은 있으나
다시 KTX 민영화와 1026 부정선거 (혹은 선관위 디도스 사건)에 대해 집중하는 점을 보여준다.
이 방송은 가카가 폐기처분되면 같이 사라질 방송이다.

방송이 시작된 2011년,
김어준이 다 지난 (다 지났다고 그들이 주장하고 싶은!) BBK사건을 끄집어 내고 나와
BBK 저격수 중에 역사상 가장 경박하고 유쾌한 정치인인 정봉주와 함께 시작한 것.
여기 BBK 저격수로 활동했던 박영선이 영입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라.
– 재미가 없자나!

5.

일각에서 나꼼수가 한명숙 밀어주기를 한다는 얘기가 있다.
현 시점에서 가카에게 노무현에 대한 가장 큰 복수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한명숙이다.
정동영은 아니다.
나꼼수의 정체성은 약간 흐트러지긴 했으나 목표점은 하나다.
그건 변치 않은 듯 하다.

6.

방송의 한계다. 
모든 방송은 초반엔 시대와 대중을 끌다가 폭발적인 시민대중의 참여와 혓바닥에 의해 결국 대중에게 이끌려 가고 만다.
(이게 일종의 인간역학을 연구하는 인간들이 말하느 멱함수나 BURST 현상과도 어우러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7.

나꼼수는 이제 봉주 편들어주기에 집중하며
봉주와 대척점에 있는 가카에게 다시 집중한다.
그리하여 자기들로 인해 희생당했다고 “여겨질 수 있는” 정봉주를 위해 프로그램명도
“봉주 X회” 로 변경한다.

8.

가장 빠른 대선 레이스는 오세훈과 김어준의 합작품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2011년 김어준의 “나는 꼼수다”가 시작하였다.
김어준은 가장 빠른 대선 레이스가 오세훈으로부터 촉발되었다. 라고 말하지만
나꼼수가 깔아놓은 자리에 오세훈이 불을 지른 것이다.
자리를 펴줬더니 춤을 추는 자가 있었던 것.

9.

왈가왈부 할 것도 없다.
나꼼수는 정봉주가 출옥할 때까지, 혹은 가카가 폐기될 때까지.
봉주 X회, 혹은 나는 꼼수다. 라는 목적을 가지고 오로지 가카만을 위해
오직 가카 한 분을 위한 방송을 계속 할 것이다.

이들의 자세도 이제 더 이상 “소설을 써봅니다.” 혹은 “라고 추정!” 이라고 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꼼수는 복수와 승리를 거머쥘 대상을 찾을 것이고 오로지 가카에게 집중해야 할 시점에 도착했다.

10.

아무도 듣지 않아도 그만일 방송이었다.
그러나 알아서 찾아들은 방송이고 떠날 때도 말없이 떠나든가 말든가 상관없다.
나꼼수에게 무엇을 기대할 순 없다.
물론 기대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대해봤자 실망만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들은 수차례 방송에서 언급하듯이
다시 가카에게 집중. 하려고 늘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떠날 자는 떠나고,
함께 할 자는 함께 하면 된다.

그리고 떠날 때
그동안 고마웠다. 라고 한 마디 해주면 참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동안 고마웠다,
나는 이제 뉴스타파로, 이털남으로, 반민특위로, 희뉴스로, 저공비행으로, 등등등등.
으로 간다. 빠이.라고.

11.

나?
나는 계속 들을 것이다.
난 김어준을 오랫동안 좋아해왔고 편은 들어주지 못해도 매우 냉정하고 까칠한
친구같은 마음으로 그냥 같이 하고 싶으니까.

2012. 2. 26.

나꼼수를 까는 것도
옹호하는 것도
모두 개인의 자유다.
그로 인해 갑론을박이 이어져도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거시적으로 봐서는 긍정적이다.

비난하는 자를 비난하는 것도
옹호하는 자를 옹호하는 것도
모두 괜찮다.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하여 세상이 다양해져야 우리 뿐 아닌 인류가 가진 전체주의공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극뽀옥!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복수 : .죽는 거 보다 더 힘든게… 살던 세상 바꾸는 일이예요. …죽는건 세상을 버리면 되지만, …살던 곳 바꾸는 건, …세상을 바꾸는 일이니까…

경 : (얼굴을 닦아주며 미소) 복수씨, 위대해요. …세상을 바꿨으니까…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해서 불교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보면 바로 나오는 일이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만이 존귀하다. 라는 말은, 
모두가 각자의 세상을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타인의 세상을 침범하지 말 것이며, 
두 사람간의 갈등은 하나의 우주와 또 다른 우주의 충돌이겠구나. 
라고 혼자. 씨부려 본다. 
2012. 2. 24. 

감당할 만 하니까.

가끔 이 구절이 생각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카톨릭 성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버전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주십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하던 말도 생각난다.
“다 능력이 되니까 그런 일도 생기는거예요.”
“다 감당할 만 하니까 해내시는거예요.”

그래서 간만에 성경을 들춰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매우 고무적이고 희망적인 말이다.
가벼운 환난이라는 말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아무튼 종교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고 감안했을 때. 뭐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는 말일 것이라 판단한다.

그리고 가만히
술 취한 남편이 들고 오는 길에 한 번 자빠진 듯한 형상을 한
비싸 보이는 회를 씹으며 생각하였다.


감당하지 못할 일들만 이어졌으면,
이미 보따리 싸서 인연이 없는 곳으로 피신하였거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지.
견딜만 하고 감당할 만 하니까
아직도 산 채로 오밤중에 깨어난 아들과 “돼지코 공룡 임피의 모험”을 보면서,
이 집에서 회를 먹고 있는거구나..

라고.

할 만 하니까 이러고 살고 있는거다.
정말 못 견딜 일이었으면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니었을 거다.
살만 하니까 살아있는거다.
그저 간혹가다 귀찮을 뿐이다.

2012. 2. 24.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오늘 집에 회를 먹을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도
백퍼 이건 정말 나먹으라고 회를 사들고 꾸역꾸역 걸어오다가 몇 번 자빠진 게 뻔한 채로
널부러져서 감당도 안되게 자고 있는 남편이라는 사람은,
간혹 감당할 일이 없으면 의식의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위장의 보호를 포기하고 뇌의 시냅스를 살짝 끊는 방법인 폭음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이다.

다 왕년에 해봤던 짓이다.

_ 대인의 풍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번역문 비교

독일판/
독문학자 송동준 옮김/1995년 신장본판/
민음사 펴냄
프랑스어판/
불문학자 이재룡 옮김/ 2011 2 6/
민음사 펴냄  
영원한 재귀는 아주 신비스러운 사상이다. 니체는 이 사상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그 언젠가는 이미 앞서 체험했던 그대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 이 어처구니 없는 신화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원한 재귀, 이 신화는 그것의 부정적 이면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있다. 영원히 사라져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삶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런 무게도 없는 하찮은 것이며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삶이 아무리 잔인했든, 아름답거나 찬란했든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잔인함, 아름다움, 찬란함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조금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마치 14세기 아프리카에 있었던 두 나라간의 전쟁과 같다. 비록 전쟁에서 30만명의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죽었다 하더라도 이 전쟁은 세상 상황을 아무것도 바꾸어놓지 못했다.
(1페이지) 1 1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1페이지) 1부 1장 
내게 창문 청소부 한 명을 보내달라고 당신 회사에 전화했을 때 당신을 보내도 좋으냐고 내게 물었어요. 당신은 유명한 외과의사라고 했고, 당국이 당신을 병원에서 내쫒았다고 말했어요. 이 사실은 물론 나의 관심을 끌었어요.”
당신은 매우 호기심이 많군요.”
내가 그렇게 보여요?”
물론이죠. 당신의 시선을 보면 그래요.”
내 시선이 어떻다는 거죠?”
당신은 눈을 깜빡거려요. 그리고 계속 질문을 하죠.”
당신은 대답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246) 5 10
전화를 걸어 창문을 닦을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당신을 찾는 게 아니냐고 물었어요. 당신은 병원에서 내쫓긴 굉장한 외과의사더군요. 그게 내 관심을 끌었어요!”
호기심이 많은 분이군요.”
그렇게 보이나요?”
, 당신이 바라보는 방식이 그래요.”
내가 어떻게 보는데요?”
눈을 가늘게 뜨고 쉴 새 없이 질문을 하잖아요.”
대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요?”
314– 5 10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하긴.. 구판인 송동준 선생 번역본은 헌책방을 열심히 뒤져야나 나올 것이고..
그 중 한 권은 내가 갖고 있다.

무거운 시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괴로운 마음을 안다. 
그건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것도 안다.
죽음을 통해 뭔가 다른 것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것도 안다. 
죽고 싶다라는 말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 세상을 바꾸고 싶다. 라는 절절한 호소였다는 것도 
아주 뒤늦게 알았다. 
무거운 시간들이 흘러간다. 
눈이 녹아가고 있는데 봄이 와도 화려하지 못할까 두렵다.
지리멸렬하다는 단어가 가슴에 맺힌다.
인연도 사랑도 모두가 업보다
지은 것이 많아 풀어야 할 것이 많다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사는 모습들이 애당초 이런 것이라는 것
그저 조금 더 쉽게 가고 싶어서 
울고 불고 안달했다는 것을
이제 안다
그저 걸으면 될 일이다
해는 뜨고 달이 진다
내가 걷는 동안 
내가 엎드려 쉬는 동안
시간은 가고 아이들을 자란다
겨울나무는 소리없이 자라고
봄나무는 요란하게 노래할 뿐
그저 걸으면 될 일이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묵묵히 걸으면 될 일이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고개를 쳐들고
그 날 그 날 
그저, 가야 할 곳을 잊지 말고 
걸으면 될 일이다 
2012. 2. 14. 

이틀

이틀이 지났다.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듯
시간이 이어져 하루가 되는데,
모든 것이 뚝.뚝. 끊겨 있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었나
의심하는 순간 이미 알고 있다
꿈이길 바라는 마음을

똑똑
노크한다

부른다
엄마 – 라고.

전화기를 본다

없다 아무도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보안경비를 건다

밤은 가고
나는 잔다
너도 잘 것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밤.

나는 안다

그 어딘가에
헤메는 우리의 두 손과
더듬는 우리의 두 발을

머쓱한 그 자리의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젖은 물들.

2012.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