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두운 밤
두레박에 물 길어올리듯
그깟 반쯤 깨진 두레박엔 물이 반밖에 안 찼을 테지만
낡은 펌프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물을 긷는 갈증
소리가 절반을 해갈한대도
하루는 코 한 올이 풀린 그물 같은 것
빠져나갈 물고기가 아쉬워
뒤척이는 어부의 이부자리처럼
배는 곪지 않아도
먹고 살 일이 까마득해
먼 바다에 나가 안개만 먹고 노래했으면
그리운 것이 많아
목이 타는 밤, 그런 밤
밤과 밤을 넘나드는 알 수 없는 짐승의 소리
아무 것도 그립지 않았으면
베개가 딱딱한 그런 밤,
해가 뜨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밤과 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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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4월의 바다

꿈은 기억 위에 돋아난다.
상상했던 모든 것들은 과거에서 온다.
들었거나 읽었거나 봤거나 느껴봤던 것들.
기억 속에 숨어있거나 그 밖에서 혼자 울고 있었더라도.
꿈꾸지 않았던 일들은 늘 일어나고 만다. 다시 과거가 된다.
바다를 바라보고 산철쭉이 혼자 섰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 분홍옥매와 꽃잔디와 뜬금없는 난까지.
바다앞에서 나를 잊지 말라 했던가.
바다는 예전의 바다가 아니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으라 했던가. 그건 방향제로 악취를 덮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덮는다고 덮어질까. 눈이 녹으면 벌겋게 드러나는 황토처럼, 꽃이 지면 질퍽해진 목련그늘 아래처럼.
기억이 기억을 덮고, 세월이 세월을 덮으면,
바다는 다시 예전의 그 바다가 될까.
살아있는 자의 손을 꼭 잡는다.
바다 앞에서 우리는 모두 속수무책이므로.
그림자가 길다.
3년 후, 4월의 바다170416_iphone6+ 215

기역의 바다

허리가 기역자로 고부라진 할머니를 보면 미원 맛이 최고라던 고흥의 박 씨네 할머니가 생각나곤 해. 도무지 일어날 수도 앉을 수도 없을 것 같던 노인이 하루 종일 뭔가를 하고 있었거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노인이 하는 일이라곤 온통 먹거리를 만드는 거였어. 그 집 마당엔 뭔가 펼쳐져 있었는데 계절별로 아마 다른 것들이었을 거야. 가을에 갔을 때는 유자껍질이 있었으니 그 전엔 고추가 있었겠고, 봄에는 또 다른 게 있었겠지. 헛간 옆에는 마늘과 양파가 매달려 있었고 서대라는 생선도 여기 저기 있었어. 하루 종일 널었다 걷었다 빻고 다듬고 하는 것들은 내가 슬리퍼를 꿰차고 집 앞 수퍼에 가면 10분도 안 돼서 사올 수 있는 것들. 섬에서 80년을 나무처럼 살았다던 두 노인 내외는 그런 먹거리들을 모두 손으로 다듬고 만져가며 마련했어. 그 집의 할머니는, 먼 바다가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집에 살면서도 한 번도 허리를 편 적이 없을 것 같이 완전히 허리가 굽어 있었지. 희한한 건, 그 집의 영감님은 키가 크고 훤칠했는데 허리가 얼마나 꼿꼿한지 먼 바다에 떠가는 작은 배도 한 눈에 알아차릴 것 같았거든. 두 사람은 언젠가부터 다른 바다를 보고 있지 않았을까.

쪼그리고 앉으면 무릎이 턱에 닿던 고흥의 할머니를 생각해. 자식들이 가는 모습을 보며 이 빠진 입을 앙 다물던 모습을 보고 말았거든. 바위 위를 가볍게 넘나들던 노인을 보며, 나는 또 다른 노인들을 생각해. 우리는 어디서 헤어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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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삼척

삼척

삼척
오래된 골목을 걸으며
당신의 바다를 만져본다

반짝, 하고 빛나던 별들의 폭발과
무너져 내리던 한 세상에 관하여
돌아보면 돌이 될 거라던 이방인의 주문이
국자에 스뎅그릇에
덜그럭, 소리를 내고 떨어질 때

도깨비처럼 벚꽃잎처럼 천변에 흩날리던
산 자의 영혼에 관하여
꽃잎처럼 뛰어내린 여자들에 관하여
비 내리는 기차역 앞마당에 관하여

비린내가 싫었던
당신의 차가운 우주를 잡아본다
여기 이 손끝에 와닿기를

기억이 소멸되지 않기를
시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가 하나씩 늘어갈수록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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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