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탐방] 서울시 1호,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

협동을 안고 다시 세상속으로

빈 벽에 대고 외치기 시작하다

2012년 11월 28일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의 창립총회가 서울시 청소년수련관에서 있었다. 12월 3일 서울시 협동조합 설립 신고 첫 날,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은 서울시 협동조합 제 1호의 영예를 안았다. 야간근무를 하는 대리운전기사의 직업 특성상 새벽 2시 반부터 조합원들이 문도 열지 않은 서울시청 정문 앞에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9명이 함께 겨울밤을 지새고 설립신고를 했다.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 창립총회

대리운전협동조합은 2010년부터 대리기사까페에서 활동을 하던 대리운전기사들이 모여 만들었다. 대리운전을 하는 사람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개설한 온라인 까페에서 업무정보, 초보기사교육, 사고처리 안내를 했다. 경력자가 초보자에게 대리운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초보자들은 선배들의 안내를 받아 대리운전에 적응할 수 있었다. 대리운전산업은 2000년대 후반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업체설립이 손쉬워 우후죽순으로 대리운전소개업체가 난립하기 시작했다. 지원자는 늘어나고 업체는 정부 관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대리운전기사의 근무형태와 처우는 문제가 심각해졌다. 2010년 대리기사 이동국씨가 폭행에 이어 대리운전을 의뢰한 주취자에게 뺑소니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대리기사들에게 개별적으로 받는 보험료를 편취하는 업체도 있었다. 이 사건을 고소고발한 대리기사는 1년동안 경찰서에 50회 출두했다.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호소가 있었다. 당장 자기 일이 될 지도 모르는 폭력문제와 사회적 인식개선을 위해 대리운전 기사들은 온라인까페를 중심으로 교육과 전화 상담을 나누었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서로 돕고 살아남기 위해서였다.대리운전은 생계에 몰린 가장들이 쉽게 진입하는 직업군에 속한다. 업체에 팩스로 신분증을 송신하고 바로 대리기사로 일할 수 있다. 진입장벽은 낮으나 유지가 어렵다. 처음 3일동안 밤길을 헤매며 일을 하나도 못 따고 아침을 맞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업체에서는 대리기사에게 실질적인 정보나 업무에 대한 지침을 주지 않는다. 영업할 권리를 얻는 대신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초보 때 고생했던 기억을 잊지 않은 선배들이 온라인 까페에서 초보기사 교육을 했다. 콜은 어떻게 받고, 의뢰인 대리수행을 한 뒤 어떻게 복귀하며, 대리기사들이 주로 어디서 모이는지 알려주기만 해도 밤길을 덜 헤맬 수 있었다. 사고가 났을 때, 의뢰인이 시비를 걸어왔을 때의 대처도 경력 있는 기사들의 노하우가 큰 도움이 된다.

대리운전기사의 처우개선은 기본 인권문제를 안고 있다. 폭력행위근절, 안전한 운행 등 근무여건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대리운전기사들이 모인 온라인까페는 2010년부터 임의단체를 결성해 정책입안 간담회에 참여하고 까페 회원들의 사고를 접수해 통계를 내서 정책기관에 리포트를 냈다. 통신사의 횡포에 맞서는 기자회견도 했지만 임의단체가 가진 힘은 미약했다. 협동조합이라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바로 나설 수 있었다. 이미 결속력은 탄탄히 자리를 잡아온 터였기에 협동조합 기본법 발효는 큰 힘이 되었다.

설립동의자는 금세 100여명이 모였다. 설립등기를 위해 개인 인감증명서와 등본등을 제출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자기 서류를 제출하지 못하는 동의자들이 많았다. 결국 스물 두 명의 조합원이 모여 정식 조합원으로 출범했다. 그 외 까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회원들은 600여명이다. 2012년 12월 3일 설립이후 22명의 조합원 중 4명이 탈퇴하고 4명이 신규가입했다. 협동조합 조합원들은 출자금을 내야 하는데 대리운전기사의 고용 불안정성을 생각해 묘안을 짜냈다.

“우리가 낼 수 있는 돈이 얼마인가 고민을 했더니 한 달에 50,000원은 낼 수 있겠더라고요. 50,000원씩 12개월을 모으면 600,000원이 됩니다. 출자금 분납이 가능한가 여기 저기 물어봤는데 정관을 우리가 정하면 된다더라고요. 조합원 1인은 출자금 600,000원에 조합비는 똑같이 10,000원을 내죠.” 이상국 사무처장의 말이다.

대리운전기사는 전업률이 높고 소속기관이 불확실해 처음 조합원이 되겠다고 신청을 하면 6개월 이상 준 조합원의 자격을 얻고 6개월이 지나 조합원심의위원회를 열어 정조합원 가입여부를 정한다. 조합의 행정과 관련된 대부분의 모임은 새벽 4시 이후이거나 일요일 오후에 한다. 처음엔 새벽에 문을 연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고 청소년수련관을 잠시 빌리기도 했다. 공익재단 행복세상에서 새벽시간을 이용해 모임을 지속했다. 직원들이 출근할 때까지 회의와 교육을 계속하는 모습을 본 재단측에서 아무 때나 회의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무와 행정을 맡고 있는 조합원도 현직으로 대리기사수행을 하고 있다. 조직의 역량에 걸맞게 길게 가기 위한 방편이다. 조합원들은 비번일 때 돌아가며 상담전화를 받고 행정업무는 꼼꼼히 기록한다.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 임의단체 활동
임의단체 시절의 단체행동


밀림처럼 복잡한 도시의 밤

대리운전협동조합은 필요해서 만든 협동조합이다. 구성원들은 그간의 대리운전 산업 구조로 인한 피해를 입었고 이에 대한 사회적 보호장치는 전무했다. 조합이 탄생한 것은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대리운전은 80년대 음주단속 개시 후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자가운전자가 늘어나고 음주운전 단속이 강화되며 대리운전산업이 성황을 이뤘고 스마트폰의 탄생이전에 대리운전기사들은 모두 각자 자기 비용으로 PDA를 구입해 대리운전 영업을 해왔다.
대리운전산업은 현재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고객이 될 수 있는 대상이 늘어났고 기사가 될 수 있는 사람도 늘어났다. 하지만 대리운전 업계에서는 이 사업이 향후 지속적으로 성장하긴 어렵다고 한다. 음주자가 줄어들었고 경기침체의 고착화가 예상되면서 대리운전을 맡기지 않으려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한 명의 대리운전기사가 일을 하는 패턴을 살펴보면 산업구조를 가장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한 사람의 대리운전기사는 자기 신분증을 팩스로 전송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특별한 심사는 없다. 등록은 대리운전 업체에 한다. 콜센터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대표번호를 쓰는 업체를 말한다. 대표적인 업체 아래에 영업대리점과 콜센터가 분할되어 있다. 대리기사가 되면 동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대리콜을 기다린다. 대리콜을 받기 위해서 대리운전 기사전용 앱을 휴대폰에 깔아야 한다. 이 앱은 전용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개발해 업체와 제휴를 맺어 제공한다. 앱 비용은 대리기사가 부담한다. 업체는 그 프로그램을 이용해 가상계좌를 만들고 수수료를 떼지만 앱 비용을 대지 않는다. 대리기사 한 사람은 콜전용 앱을 세 개정도 깔아야 순조롭게 영업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업체에서 앱 세 개를 주로 사용해 콜 의뢰를 기사에게 보낸다면 기사는 세 개의 앱을 구매해서 사용해야 한다. 전용 앱은 자기가 운전수행을 할 수 있는 반경 km를 골라서 설정하고 거기에 뜨는 대리의뢰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콜이 떴는데도 의뢰를 수락하지 않으면 바로 패널티가 붙는데 돈으로 500원의 벌금을 부과하거나 30분간 배차 중지를 하는 경우가 있다. 대리기사가 주로 근무하는 시간은 9시에서 새벽 1시. 너댓시간 근무 중 30분간 배차중지는 당연히 손해다. 대리기사는 앱 하나 가지고 영업을 할 수 없고 다른 앱을 같이 돌리며 신속하게 콜의뢰를 받아내야 한다. 콜 의뢰를 하나 받으면 업체에서 앱으로 콜 의뢰를 띄우고 이를 수락해 기사수행을 하면 낯선 곳에 내리기 마련이다. 최대한 이동거리를 줄이며 대중교통을 이용해 그 부근에서 다시 이동할 콜의뢰를 받아야 한다. 불안정한 근무일 수밖에 없다. 대중교통이 끊긴 시간이면 비용 때문에 택시를 이용할 수 없고 전용셔틀버스를 타곤 한다. 봉고차나 작은 승합으로 이동하는 셔틀은 불법운영인 경우가 많다. 업체가 섭외하는 것이 아니고 대리기사들을 대상으로 한 영업이 횡행하는 것이다. 이 셔틀이 없으면 대리기사들은 벌어서 길에 버리는 셈이 된다. 콜 의뢰 한 건에 20%에서 많게는 37.5%까지 콜업체에서 수수료를 떼어간다. 서울 수도권은 영업이 많아 수수료가 적은 편이고 경기남부는 25%까지, 지방 도시는 정액제로 수수료를 떼는 업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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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포그래픽에 나와 있듯 하루 평균 4건의 대리운전수행을 하는 것이 평균이라고 치면 (사실 초보자들은 이에 훨씬 못 미치지만) 하루 수입 중 절반은 영업투자비용이 되는 셈이다. 야간근무는 발암물질이라는 의학계 보고처럼 대리운전기사 5년차에 소리 없이 이가 내려앉거나 근골격계, 혈관계 질환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면장애는 너무 흔해 말도 하지 않는다.
운전이라는 작업 특성으로 인한 질병 외에도 의뢰인의 무차별 폭행도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1년에 1회 이상 폭행을 당한 대리기사는 전체의 절반이다. 실수로 의뢰인의 차량에 사고를 낸 경우 대부분 대리기사 개인부담으로 처리해야 한다. 야간주행의 위험은 사망사고까지 이어진다.

신고만으로 영업이 가능한 대리운전업체가 난립하면서 저가 대리운전이 등장했다. 하루에 4콜을 받아 100,000원의 수익을 올리던 사람들이 5콜을 받아야 100,000원을 벌 수 있다면 방법은 한 가지, 빨리 달리는 것뿐이다. 저가 대리운전은 결국 대리운전기사와 고객의 생명 모두를 담보로 잡는 행위다.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을 넘어, 사회인으로 일어서기

대리운전협동조합 이상국 사무처장은 “대리운전에 지원하는 기사들은 기본적인 책임감이 있다”고 말했다. 더 편히 벌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최대한 정직하게 밤근무라도 해서 정당하게 돈을 벌고자 하는 가장들이 모였다. 자기의 개인정보와 위치정보가 모두 노출되어 있다. 대리운전협동조합은 안정적 수익을 올리면서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이들이 모여 만들었다.

수년전 야간작업특수건강진단실시조사에서 대리운전협동조합원들은 눈에 띄게 다른 수치를 나타냈다. 일반 대리운전기사들은 감정노동자의 스트레스를 상회하는 수치를 보였지만 조합원들은 감정노동에 대한 스트레스가 현저히 낮았다. 의료진은 이러한 결과에 상당히 놀랐고 조합원들은 다른 대리운전기사들의 서면조사를 직접 수행하는 조사원의 역할을 했다. 대리기사들이 모이는 집합장소에서 자기 시간을 할애하며 조사를 도왔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조사지표가 권익 상승에 이바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울노동권익센터에서 이동노동자쉼터를 준비할 때도 간담회에 참여해 의견을 냈다. 이동노동자쉼터를 운영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었지만 조직의 역량이 그 정도까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한 중간지원조직에서 쉼터를 운영하는 것이 향후 더 많은 이동노동자들을 위한 복지의 기틀을 다지고 사회기반서비스를 확충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카카오톡이 대리운전 서비스를 내놓을 때도 협동조합원들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상국사무처장은 조합을 대표해 카카오드라이브의 자문위원을 맡았다.

“우리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면 사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더라고요. 전문가들이 대리운전기사뿐 아니라 이동노동자, 야간노동자의 권익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속 연구·발표 해주셔야 사회적 파급력이 있어요.” 아무리 외쳐 봐도 빈 벽에 바람뿐이던 거친 세월을 지나 대리운전협동조합은 이제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가느다란 끈을 잡게 되었다.

대리운전협동조합은 조합원의 권익과 보호를 위한 사업을 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직무연수모임이다. 신입 회원이 생기면 단체카톡방에 들어간다. 19명의 경력직과 1명의 신입으로 꾸린다. 신입회원이 어디서 상하차하고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지 정보를 전달하면 다음 대리기사수행에 유리한 정보를 알려준다. 선배들의 노하우를 특별지도 받는다. 맨 땅에서 혼자 고군분투하지 않고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저 정보를 알고 넘어가는 것과 누군가 나를 도와줄 지원군이 든든하게 있다는 것은 어두운 밤거리에 낯선 사람의 낯선 차를 안전하게 운전하는 데에 큰 힘이 된다. 대리운전협동조합의 조합원과 회원들은 비회원들보다 수익이 높다. 새벽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선배의 노하우를 듣고 서로 공부하며 얻어낸 성과다.

협동조합설립 이후 익명의 기부자가 있었다. 500만원의 기부금으로 조합원들은 소액대출 계(契)를 만들었다. 대리운전기사들은 수시로 사고에 노출된다. 의뢰인의 차를 손상하게 했다거나 사고가 났을 경우 자부담으로 해결하는 편이다. 생계의 끝에 내몰려 시작한 대리운전자가 처음 이런 사고를 당하면 100만원이내의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제2금융권이나 불법대출업체를 찾아보게 된다. 현재 전국에는 이런 대리기사들을 대상으로 한 불법대출업체가 많다. 평균 24%의 선이자를 떼고 콜 앱의 운행기록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다. 대리기사들은 어차피 매일 비슷한 장소에서 일을 하고 신분과 위치가 다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불법대출업자들이 믿는 신용이다. 대리운전협동조합은 회원과 조합원들이 불법대부업에 발들이지 않도록 곗돈을 활용해 무이자로 소액대출을 해준다. 무이자인 대신 대출금액의 10%를 출자금으로 낸다. 이 출자금은 따로 모아 또 다른 조합원과 회원에게 무이자 소액대출의 종자돈이 된다.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입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제대로 된 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리운전협동조합은 대리운전기사가 근무 중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며 노동환경개선을 이루고자한다. 불법승합차셔틀대신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콜버스가 등장했으니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만일 대리기사를 위한 셔틀버스가 합법화된다면 더 많은 야간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수혜를 입을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사는 사회의 당사자 운동은 사실 가려져 있던 다른 집단에게도 공동의 이익을 배분하는 효과가 있다. 대리운전기사의 처우와 노동환경개선은 결국 이동노동자와 야간근무자들의 노동환경개선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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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노동권익센터의 “이동노동자쉼터” 休 – 배터리충전기는 이동노동자의 하루를 책임진다.

누구나 언제나 갑작스러운 경제적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사회적 안전망에 구멍이 많은 나라에서 느닷없는 해고와 파산은 어쩌면 모두가 한번쯤 거쳐 가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타인을 도우며 뿌듯함을 느낀다. 더 나아가 사회적 공헌을 하는 자신을 긍정하기 쉽다. 인간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때 자기 성취감이 높아진다.
“기본적으로 소득이 해결되어야 그 다음이 있는 거죠. 먹고 사는 일이 어느 정도 해결이 돼야 사회적 발언도 하고 남도 돕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게 됩니다. 내가 언제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범죄에 대한 공포는 영혼을 갉아먹어요. 안전망이 구축되지 않으면 기본적인 소득도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그 다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그때 내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죠. 내 자부심은 사회기여로 연결됩니다. 그게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요, 그래야 노동자 권리 찾기도 할 수 있겠죠.”
대리운전협동조합 이상국 사무처장은 대리운전기사들의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지역사회기여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리기사들은 어디다 말을 할 데도 없어요. 친구들에게도 말하기 어렵고, 산업구조도 엄청 복잡하죠. 우리는 마음을 닦아내는 일도 해야 합니다. 열악한 환경이라고 도움만 받지 말고 지역사회에 기여도 해야 합니다. 카카오드라이브에는 대리기사의 사진과 이름이 뜹니다. 이 제도를 탐탁치 않아하시는 분도 있어요. 대리운전기사에 대한 사회적인식이 낮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직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면 고객과의 신뢰도 높아집니다.
위치와 신분이 모두 노출된 대리기사들은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여성안심귀가동행서비스 같은 사회안전문제를 대리기사들의 촘촘한 네트워크와 정보로 충분히 협력할 수 있어요. 8만 명 정도가 늘 서울시내에 있는 겁니다. 야간에 일하면서 길에 쓰러져 있는 주취자 신고도 많이 합니다. 관할서가 다르다고 여러 번 전화하다보면 저희 일을 놓쳐요. 저희도 일을 하면서 사회적기여를 할 수 있는 망이 구축되면 좋죠. 뜻있는 지자체, 기관, 기업 누구라도 손잡을 용의가 있습니다. 사회적기여가 가져오는 기대는 공헌뿐 아니라 결국 대리기사들의 마음이 꽉 차오를 겁니다. 그 과정에서 대리기사 직업에 대한 사회적인식도 올라갈 것이고요. 그러면 사회에서 더욱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요?”

한국은 언제부턴가 불야성의 땅이 되었다. 모두가 잠드는 밤은 없다. 야간근무자의 수치를 정확히 파악할 대표적인 통계조차 없다. 이러저러한 통계들을 뒤섞어 보면 2010년 이후 공식적으로 11% 정도의 야간근무자가 있다고 하지만 비정규직, 단기아르바이트까지 포함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도시의 밤을 지키고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현장근로자가 대리운전기사이다.

업체와 고객의 사이에서 이리 저리 치여도 무조건 걷고 뛰고 사과하는 대리운전기사들은 이미 사회적공헌을 하고 있다. 함께 해서 이룬 것이 있으니 사회적 기여를 하고 싶다는 대리운전협동조합. 수년 간 도시의 밤을 지켜온 것처럼 소외된 곳에서 협동의 씨앗을 뿌릴 수 있을 것이다.

 

서울노동권익센터 이동노동자쉼터 “휴”

대리운전협동조합의 인터뷰는 서울노동권익센터의 이동노동자쉼터와 그 부근에서 진행했다. 신논현역에서 반포IC까지 이르는 구간은 대리운전의 메카다. 화려한 강남역에서 조금 뒤로 물러선 곳에서 대리기사들은 더운 날도 추운 날도 길에 서서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며 대리의뢰를 기다렸다. 이제는 이동노동자쉼터에로 출근하고 모임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대리운전을 의뢰한다면 쉼터에서 편하게 5분이라도 쉬었던 사람이 더 반갑지 않을까.
이동노동자쉼터 休는 저녁 6시부터 오전 6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서울노동권익센터의 간사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대리운전기사들도 서로 배려한다고 전했다. 하루 이용자는 4-50명. TV를 놓지 않아 서로 대화를 하게 만들고 냄새나는 음식물은 자발적으로 반입금지했다. 현재는 야간이용자가 많아 주로 대리운전기사들이 이용한다.
한 이용자는 퀵서비스의 경우 종로구 장교빌딩 주변이 집결지라 그쪽에도 이동노동자쉼터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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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협동조합과 대리운전”업”협동조합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과 대리운전”업”협동조합은 다르다.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은 본 기사의 주체이며 대리기사들이 모여 만든 협동조합이다. 대리운전“업”협동조합은 대리운전업체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협동조합이다.대리운전협동조합과 대리운전업협동조합

카카오드라이버

카카오드라이브

대리운전협동조합을 비롯한 대다수의 대리운전자들은 카카오드라이브를 매우 환영한다고 전했다. 수수료는 20%로 정했지만 일단 프로그램비를 지불할 필요 없고 운전자들은 모두 피보험자로 등록되어 보험료도 카카오에서 지불한다. 카카오드라이브는 대리의뢰를 하면 고객에게 배정기사의 기사신분증을 전송한다. 대리운전기사들은 카카오드라이브가 업계의 혁신을 가져와 그동안 횡포를 부렸던 업체들이 변화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고양이 마을로 돌아가다》-  나쁜 자본주의와 이별하기

 

히라카와 가쓰미 지음 / 남도현 옮김 / 이숲 펴냄

 

문득 서평을 쓴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읽으라고 초강추라고. 꼭 읽으라고.” 한 줄이면 될 것 같다.
한 권에 책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을 할 필요가 뭐가 있냐는 생각이 드는 건 굳이 쪼개어 해체하거나 느낌을 덧붙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고양이와 같이 사는 나에겐) 제목이 참 매력적이다.
고양이 마을로 돌아가다니. 고양이는 인간이 키우는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위상을 높였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양이를 모시고 산다고 말한다. 어쩌면 지구의 주인은 고양이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진지하게 들을 때 나 역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도시에 산다. 전혀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고양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양이를 대하는 도시민의 태도가 그 도시의 인간미를 측정하는 지수가 된다고도 한다. 작은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모여 그 도시 시민이 생명을 대하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이 책은 멀리가지 않고 도시의 골목을 거닐며 자본주의에 대해 성찰한 한 사업가의 명상이다. 주장이라고 보기엔 논조가 부드럽고 이야기라 하기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또한 책상에 앉아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언저리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고양이 마을도, 그가 관찰한 고양이들을 지켜보다가 나온 이야기다. 이전에 출간했던 저자의 책중에 《‘소비를 끊는’ 공중목욕탕 경제의 권유》라는 책도 있는데, 이 책에도 공중목욕탕과 가업을 잇지 않으려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처럼 동네를 산책하며 고심했던 소재들이 등장한다.

책은 1장과 2장으로 나뉘어 있따. 1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이야기를, 2장은 골목길에서 찾은 자본주의와 자본이 바꿔놓은 우리 일상의 이야기들을 한다. 일본과 한국은 여러 모로 닮아있다. 한국은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저자의 이야기가 더 정겹게, 실감나게 들릴 것이다.

작가는 1950년 도쿄 출생으로 사업가이자 저술가이다. 벤처사업가 중 하나라고 알려졌는데 참신한 업종을 창업한 경력이 있는데 저술한 책을 보니 기존의 체제와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히라카와 가쓰미가 쓴 그간의 책은 《반전략적 비스니스의 권유》, 《주식회사라는 병》, 《경제성장이라는 병》, 《이행기적 혼란-경제성장 신화의 종말》, 《소상인小商人에의 권유-경제성장에서 축소 균형의 시대로》,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 《소비를 그만두다》 등이다. 그러니까 기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계속 제시하고 주장하고 있다.

묵직한 경제학원론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겉핣기식 책은 아니다. 발로 쓴 글은 어딘가 깊이가 있는 법이다. 혼자 읽고 음미하기도 좋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독서모임에서 자신의 일상과 비교해가며 함께 이 책을 읽는 것도 매우 좋겠다.

 

나는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지만 (이런 문제는 그때가 돼야 알 수 있겠지만), 인간의 죽음을 법제화한다는 생각에는 거부감이 든다. 그리고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는 자연사를 ‘존엄사’라 부르는 것에도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발상에 ‘당사자의 책임’이라는 근거를 끌어들인다는 점이 못마땅하다. (중략)
내가 존엄사 법안에 반대하는 이유는 죽음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사건이며, ‘죽음’이라는 개념이 일반적 정의가 필요한 법과 어울리지 않아서다. 죽음이 개인의 문제라는 인식에서는 법안의 취지나 내 생각이나 똑같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죽음은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집단적, 집합적인 면이 있고, 또 역사적인 면이 있다. 이런 측면이야말로 죽음을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법안에는 이런 부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임상 차원에서 죽음은 역시 개별성이 문제시된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죽음이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대책이 있기에 이 문제를 획일적으로 다룰 수 없다. (중략) 결국, 죽음은 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닌 무엇이다. (58-59)

“처음부터 지금까지 실마리는 없었다.” 헤이안 시대(794~1185) 진언종을 창시한 구카이가 지은 『삼교지기(三敎指기)』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실마리는 인간의 지성 밖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할 뿐이다. (98)

토드는 가족 분류를 설명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점을 지적한다. 외혼제 공동체 가족이 분포된 곳은 러시아, 중국, 베트남, 구(舊)유고슬라비아, 쿠바, 헝가리 같은 국가들이다. 즉, 사회주의 국가들은 거의 외혼제 공동체 가족 구조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나는 이런 지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즉, 공산주의 국가처럼 ‘권위주의’와 ‘평등주의’라는 두 가지 규제력을 통해 통치되는 공동체는 원래 외혼제 공동체 가족 체계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도 하나의 구상인 것이다.
*토드 『세계의 다양성(La Diversite du monde. Structures familiales et modernite)』의 저자 엠마누엘 토드

많은 사람이 일본 전체가 순식간에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경험했다. 만약 원전 사고의 영향이 도쿄까지 미쳤다면, 수도의 기능이 마비됐을 뿐 아니라 모든 정치 기능이 수도에 집중된 일본 전체의 기능이 마비됐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기능을 분산하고, 수도 이전을 고려하는 등 집중을 막으려는 논의는 정치가 사이에서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고 있다. 국가만이 아니라 세계도 집중이 아니라 분산을 통한 공존을 구체화하는 것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자연에서 배워야 할 지혜다. 효율만을 중시하는 중앙집권 체계와 지속을 위한 공존 체계라는 두 가지 사고방식이 서로 싸우는 것이 오늘날 상황이다. (126)

지구의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이토록 많은 쓰레기를 배출한다. 문명인의 생활은 어쩌면 쓰레기를 만들고, 쓰레기를 치우는 삶이다. 개도, 고양이도, 가축도, 야생동물도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 그들의 배설물을은 시간이 흐르면 땅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집을 짓거나 부수지 않는다. 보금자리는 자연 그대로 풀숲이나 나무뿌리 사이, 혹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에 있다. 해가 뜨거운 여름에는 어디가 시원한지, 추운 겨울에는 어디가 따뜻한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아니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간다. 인간만이 자연에 도전하고, 자연과 대립하고, 자연을 가공한다.
최근에 ‘지속 가능한 사회’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인간을 제외하면 어떤 생물도 지속 가능한 사회라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간다. 지속 가능한 사회는 오로지 인간에게 국한된 개념으로 다른 생명체한테는 너무도 당연해서 염두에 둘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133-134)

사무실 뒤쪽에는 나무가 많은 공원이 있는데, 뒷문으로 나가 잠깐 쉬다 보면 이네무리 군이 햇볕을 쬐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다. 이네무리 군이 나무 아래서 오줌을 누고 나서 요령 있게 모래로 덮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은 참으로 정교하게 조직돼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중략)
우리는 고양이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134)

정치가는 자기 정치 생명의 큰 부분을 주식회사에 의존하고 있다. 주식회사의 경영자들 또한 성장을 지속시키지 못하면 그 소유자인 주주들에게 버림받을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다. 혀재 국가는 주식회사에 의해 지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국가가 구사하는 경제 성장 전략은 실제로 주식회사의 전략이고 국가가 말하는 성장 시나리오의 내용 또한 주식회사 경영자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136)

문명의 발전은 어떤 가혹한 자연조건에서도 살아갈 조건을 갖추도록 도구와 기계를 만들어냈다. 가혹한 자연조건을 완화하고,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어느 정도 에너지가 필요할까? 우리는 자연이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면서 자연과 관계 맺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한하다고 생각했던 자연은 소진할 것이며, 오늘날 바로 그런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140)

찬찬히 바라보면, 정상경제를 우리가 발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일하고 살아가는 바로 이 땅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일하고 살아가는 바로 이곳을 소중히 여기고, 품격 있는 국가로서 실현할 수 있는 경제를 새롭게 구상해보자. 품격 있는 국가는 품격 있는 의식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153)

자본의 풍경 – 동네마트에서 소유의 경계를 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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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동네엔 동네 슈퍼라고 하기엔 큰 마트가 하나 있다. 대부분 이런 동네마트는 중견유통기업이 몇 개씩 점포를 가지고 있다. 때로 어떤 점포는 대기업에 인수되기도 한다. 몇 년 전 동네에 마트대란이 벌어진 적 있다. 갑자기 동네마트가 세 개가 동시에 들어서고 기업형 슈퍼마켓도 하나 들어왔다. 1년 사이에 한 곳이 장렬히 전사하여 폐업하고 그 자리엔 비슷한 형태의 마트가 들어왔다. 정확한 명칭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동네마트”라고도 부르는데 어느 지면에서는 “지역마트”라고도 하고 “중견마트”라고도 한다.

아무튼 이 동네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대에 설 때, 나는 종종 긴장한다.
내 앞에서 계산을 마친 사람이 영수증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자기 물건을 잽싸게 치우지 않을 때다. 온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한다. 앞 사람의 물건 옆에 내 물건이 떠밀려가고 있다. 앞 사람이 비닐봉투나 장바구니에 물건을 다 담지도 않았다. 식은땀이 날 것만 같다. 저 사람의 물건과 내 물건의 경계에 가름대라도 놓아야 할텐데 동네 마트에는 대형마트에 있는 빨간 막대가 없다. 계산원은 개의치 않고 바코드를 빠르게 찍는다. 나는 물건을 올려놓은 이쪽에서 계산기 너머의 저 쪽의 물건들을 살핀다. 앞 사람이 내 물건을 가져갈 가능성은 고의보다 우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계산기의 바코드 인식기를 통과한 물건은 내 물건이고 인식기를 통과하기 전의 물건은 아직 마트의 것이다. 나는 마트의 물건을 나의 소유물로 전환하는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내 물건이 바코드 인식기를 통과해, 마트의 판매물품이 아닌 나의 소유물로 그 경계를 옮겨 완전히 내 것이 되기까지 20여초 남짓의 시간이 걸린다. 카드나 현금, 지불수단이 계산대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계산기를 한 번 더 통과하고 계산원이 영수증을 출력할 때까지 마트의 출입구쪽에 놓인 내 물건들은 마트의 것도 아니고 온전히 나의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있다. 앞서 계산한 사람은 콩나물 한 봉지와 무 하나를 들었다. 비닐봉투에 푹 쑤셔넣고 계속 그 자리에 서서 영수증을 다시 보고 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계산원은 내 물건을 밀어내기만 할 뿐 물건이 가야 할 자리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 모양새다.
드디어 앞서 계산한 사람이 자기 물건을 챙겨 자리를 떴다. 나는 장바구니에 계산한 물건들을 주워 담으며 잽싸게 카드를 꺼내 계산원에게 주고 싸인을 하고 영수증을 챙긴다. 이 역시 20여초 안에 해결될 일이다. 앞서 간 사람이 머문 시간이 얼마나 되나 세어본다. 하나, 둘, 셋, 세어보면 1분도 안 되는 시간이다. 30초 정도에 수많은 감정이 일어났다가 가라앉는다.

중견마트도 대형마트만큼이나 근무조건이 좋지 않다. 더 열악한 곳도 많다. 계산원은 때로 물건 진열을 하다가 뛰어와야 하고 배달을 선택한 손님을 위해 박스를 챙겨와 물건을 담아야 하고 주소지를 확인해야 한다. 고객의 물건이 소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은 없다. 빨리 계산을 마치고 싸놓은 동전을 풀어야 하거나 영수증용지를 교체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일은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온 부품을 조립하는 것과 별 다르지 않다. 정신을 압도하는 진열대와 정육, 생선, 과일코너가 외치는 유혹을 고스란히 들어야 한다. 그 사이사이에 댄스곡이 쿵쾅거린다. 좁은 통로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불편을 감수하고서도 기어코 물건을 사서 계산대에 올려놓고는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일. 그 누구의 궁금증이나 불만을 참아낼 시간이 없다. 앞서 계산한 사람의 이야기, 이를테면 왜 이렇게 양파 값이 올랐는지 궁금해 하거나, 지난번에 사간 복숭아가 금방 상했다는 불만 따위를 들어줄 시간이 없다. 내 뒤에 나와 같이 물건을 사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혹은 빨리 계산을 마친 직원이 다른 일을 하거나 10초라도 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공장의 컨베이어벨트는 계속 돌아가는 것처럼, 바코드 인식기도 쉬지 않고 삑삑거린다. 느린 사람의 속도를 기다려줄 체제는 없다. 돈은 빠르게 돌고 돌아 영혼을 압도해야 한다. 그래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으니까.

 

2016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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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풍경 – 정월대보름

대보름이라 나물을 산 건 아니다. 나물을 좋아하는데 워낙 손이 많이 가 엄두를 잘 못 내다가 동네 수퍼마켓에서 삶아놓은 걸 팔고 있으니 손이 갔다. 다 삶아놓은 걸 가져와 다시 한 번 데치고 양념하여 볶아 그릇에 담았다. 고구마순에는 들깨를 듬뿍 넣었다. 고구마순은 원래 자주색이다. 껍질을 벗기고 씻어서 삶아 말리고 또 다시 삶았을 것이다. 그건 누가 했을까. 누군가 손톱에 자줏빛 물이 들 때까지 작은 의자에 앉아 껍질을 벗겼을까. 다리가 퉁퉁 붓도록 서서 했을까. 깐 마늘은 스치로폼 그릇에 담겨 랩을 씌워 판다. 누가 이 마늘을 다 깠을까. 손에서 마늘냄새가 가실 날 없을 정도로 바쁘게, 손가락이 퉁퉁 불도록 물에 담궈가며 마늘을 물에 담궜다가 일일이 깠을까. 대기업에서는 몇 년전부터 깐메추리알을 포장해서 판다. 이건 누가 깠을까. 삶은 메추리알을 뭉개지거나 부서지지 않게 까려면 약품에 담궜을까. 빙초산같은 것에? 사람이 손으로 깠을까? 문득 궁금해지지만 금세 잊고 만다.

EBS에는 극한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3D직종이라고 하는 어려운 직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택배물류센터, 난로공장, 정육처리기능사, 오징어잡이, 아파트외벽 페인트공, 험하고 어려운 직업을 소개한다. 한 번은 양은냄비를 만드는 공장이 나왔는데 노오란 양은주전자를 일일이 사람이 두들겨 모양새를 만드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위험하고 어려운 직업은 이미 로봇이 대체하는 줄 알고 있었던 내 짧은 상식이 한심스러웠다. 세상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하게 움직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값진 노동을 하고 있는가.

삶은 나물은 일일이 비닐봉투에 담아 가격표를 붙여 가져왔다. 나물 세 종류를 샀으니 비닐봉투 세 개가 나왔다. 얼마 전부터 작은 스티로폼은 재활용품으로 분류하지 않는다던 공지문을 본 기억이 났다. 음식물이 묻은 비닐도 재활용쓰레기로 버리지 말라 써 있었다. 나는 비닐봉투와 스티로폼을 모두 일반 쓰레기봉투에 쑤셔박았다. 쓰레기를 쓰레기에 담는다. 아무 것도 썩지 않을 것이다.

대보름이 가까워오자 각 지자체에서는 대보름행사를 준비한다. 예산을 세우고 기획안을 내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축제에 몰려와 성과를 낼 것인지 준비할 것이다. 대형마트부터 전통시장까지 모두들 오곡을 소포장해서 내놓고 나물을 진열했다. 소매업점에서 파는 나물은 반조리상태부터 완전조리상태까지 다양하다. 건나물 상태 그대로인 것부터 삶기만 한 것, 양념까지 완전히 끝나 가져다 먹기만 하면 되는 형태다. 기사를 검색한다. “유통업계, 정월대보름 마케팅” 이라는 제목부터 “부럼데이”라는 이벤트도 생겨났다.

대보름행사 때문에 소방서는 비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대보름행사장에 갈 것이다. 먹거리를 사먹고 엄청난 쓰레기가 나올 것이다.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울 것이고 썩지 않을 폐기물들은 우리 땅 어디엔가 쌓이고 쌓이겠지. 풍요를 비는 대보름에 쓰레기만 풍요롭다. 누군가의 노동을 잊고 밥을 먹는다. 아무 것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무력한 인간이 나물을 썩썩 비벼 밥 한 그릇을 먹었다.

2016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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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풍경 – 백화점

100807_Nikon 063 사본.jpg 서점은 백화점 안에 있다.
급하게 마련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꼭 백화점으로 갈 필요는 없었는데 마트와 옷가게와 문구점이 이동거리를 생각했을 때 가장 적게 움직일 동선은 백화점에 있는 문구점과 서점, 판매점을 휙 도는 것이다.

걸음을 아껴야 한다. 겨울이니까.
문구 코너에 가서 검은색 클리어파일을 사야했다. 어디선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데 분명히 누군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음원을 틀어놓은 것과 그랜드 피아노의 해머가 두들기는 소리는 명확하게 다르다.
백화점의 가운데는 길게 뚫려 있다. 보이지 않는 기둥이 있는 것처럼 뻥 뚫린 공간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자의 주변엔 아이를 안은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각국에서 온 제 각각의 펜에 둘러싸여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연주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스테들러, 사라사, 시그노, 몰스킨, 이룸, 프랭클린 사이에 서 있었다.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한 권 정도의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부동산과 맞벌이한다>, <미움받을 용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이들의 학습만화와, 장난감만 손에 쥔 사람도 있었다.

자기 확인을 위해 사는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 사람들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없어도 오늘을 넘길 수 있는 물건을 산다. 물건의 필요성은 주관적이다. 물건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굳이 오늘 사지 않아도 될, 시그노 펜 한 자루와, 펜텔의 펜 두 자루와 201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을 내가 검은 파일 위에 올려 계산을 기다린 것처럼.
돈을 내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피아노 연주는 계속 되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생명 없는 물건이 위로가 되는 공간에서 사람이 규칙대로 맞추어 연주하는 음악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건 생명 없는 물건인가 아니면 물건을 사는 행위인가. 물건으로 위로를 받는다면 정말 그 물건은 무생물인가.
백화점에 창문도 시계도 없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오로지 물건을 소개하기 위해 사람들은 내내 서있다. 가만히 진열대에 앉아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물건들은 누군가에게 불려가 꽃이 될 것이다. 위로가 되고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고 자신감을 되찾아줄수도 있다.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적게는 수명, 많게는 수백 명의 손길이 닿는다. 만든 사람들이 손길 하나 하나에 영혼이 묻어 물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순히 자본이 만들어내는 실재하나 실체가 없는 사물에 불과할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시시때때로 모양을 바꾸는 집이었다. 그 안엔 대체가족이 살고 공동체를 이루었다. 사랑하는 법에 대해 혼란스럽던 하울의 친구들은 환경이 변해도 계속 함께 했다. 우리가 사는 성이 그 때마다 변한다해도, 자본이 들고 나더라도, 우리의 사랑도 굳건할 것인가.

사물을 바라보고 주머니에 넣어 행복해진다면, 그 때부터 그 사물의 삶이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독히 외로우면, 말 걸지 않는 사물을 사랑하며 계절을 건너는가.

2016.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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