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풍경 – 정월대보름

대보름이라 나물을 산 건 아니다. 나물을 좋아하는데 워낙 손이 많이 가 엄두를 잘 못 내다가 동네 수퍼마켓에서 삶아놓은 걸 팔고 있으니 손이 갔다. 다 삶아놓은 걸 가져와 다시 한 번 데치고 양념하여 볶아 그릇에 담았다. 고구마순에는 들깨를 듬뿍 넣었다. 고구마순은 원래 자주색이다. 껍질을 벗기고 씻어서 삶아 말리고 또 다시 삶았을 것이다. 그건 누가 했을까. 누군가 손톱에 자줏빛 물이 들 때까지 작은 의자에 앉아 껍질을 벗겼을까. 다리가 퉁퉁 붓도록 서서 했을까. 깐 마늘은 스치로폼 그릇에 담겨 랩을 씌워 판다. 누가 이 마늘을 다 깠을까. 손에서 마늘냄새가 가실 날 없을 정도로 바쁘게, 손가락이 퉁퉁 불도록 물에 담궈가며 마늘을 물에 담궜다가 일일이 깠을까. 대기업에서는 몇 년전부터 깐메추리알을 포장해서 판다. 이건 누가 깠을까. 삶은 메추리알을 뭉개지거나 부서지지 않게 까려면 약품에 담궜을까. 빙초산같은 것에? 사람이 손으로 깠을까? 문득 궁금해지지만 금세 잊고 만다.

EBS에는 극한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3D직종이라고 하는 어려운 직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택배물류센터, 난로공장, 정육처리기능사, 오징어잡이, 아파트외벽 페인트공, 험하고 어려운 직업을 소개한다. 한 번은 양은냄비를 만드는 공장이 나왔는데 노오란 양은주전자를 일일이 사람이 두들겨 모양새를 만드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위험하고 어려운 직업은 이미 로봇이 대체하는 줄 알고 있었던 내 짧은 상식이 한심스러웠다. 세상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하게 움직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값진 노동을 하고 있는가.

삶은 나물은 일일이 비닐봉투에 담아 가격표를 붙여 가져왔다. 나물 세 종류를 샀으니 비닐봉투 세 개가 나왔다. 얼마 전부터 작은 스티로폼은 재활용품으로 분류하지 않는다던 공지문을 본 기억이 났다. 음식물이 묻은 비닐도 재활용쓰레기로 버리지 말라 써 있었다. 나는 비닐봉투와 스티로폼을 모두 일반 쓰레기봉투에 쑤셔박았다. 쓰레기를 쓰레기에 담는다. 아무 것도 썩지 않을 것이다.

대보름이 가까워오자 각 지자체에서는 대보름행사를 준비한다. 예산을 세우고 기획안을 내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축제에 몰려와 성과를 낼 것인지 준비할 것이다. 대형마트부터 전통시장까지 모두들 오곡을 소포장해서 내놓고 나물을 진열했다. 소매업점에서 파는 나물은 반조리상태부터 완전조리상태까지 다양하다. 건나물 상태 그대로인 것부터 삶기만 한 것, 양념까지 완전히 끝나 가져다 먹기만 하면 되는 형태다. 기사를 검색한다. “유통업계, 정월대보름 마케팅” 이라는 제목부터 “부럼데이”라는 이벤트도 생겨났다.

대보름행사 때문에 소방서는 비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대보름행사장에 갈 것이다. 먹거리를 사먹고 엄청난 쓰레기가 나올 것이다.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울 것이고 썩지 않을 폐기물들은 우리 땅 어디엔가 쌓이고 쌓이겠지. 풍요를 비는 대보름에 쓰레기만 풍요롭다. 누군가의 노동을 잊고 밥을 먹는다. 아무 것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무력한 인간이 나물을 썩썩 비벼 밥 한 그릇을 먹었다.

2016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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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풍경 – 백화점

100807_Nikon 063 사본.jpg 서점은 백화점 안에 있다.
급하게 마련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꼭 백화점으로 갈 필요는 없었는데 마트와 옷가게와 문구점이 이동거리를 생각했을 때 가장 적게 움직일 동선은 백화점에 있는 문구점과 서점, 판매점을 휙 도는 것이다.

걸음을 아껴야 한다. 겨울이니까.
문구 코너에 가서 검은색 클리어파일을 사야했다. 어디선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데 분명히 누군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음원을 틀어놓은 것과 그랜드 피아노의 해머가 두들기는 소리는 명확하게 다르다.
백화점의 가운데는 길게 뚫려 있다. 보이지 않는 기둥이 있는 것처럼 뻥 뚫린 공간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자의 주변엔 아이를 안은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각국에서 온 제 각각의 펜에 둘러싸여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연주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스테들러, 사라사, 시그노, 몰스킨, 이룸, 프랭클린 사이에 서 있었다.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한 권 정도의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부동산과 맞벌이한다>, <미움받을 용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이들의 학습만화와, 장난감만 손에 쥔 사람도 있었다.

자기 확인을 위해 사는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 사람들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없어도 오늘을 넘길 수 있는 물건을 산다. 물건의 필요성은 주관적이다. 물건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굳이 오늘 사지 않아도 될, 시그노 펜 한 자루와, 펜텔의 펜 두 자루와 201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을 내가 검은 파일 위에 올려 계산을 기다린 것처럼.
돈을 내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피아노 연주는 계속 되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생명 없는 물건이 위로가 되는 공간에서 사람이 규칙대로 맞추어 연주하는 음악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건 생명 없는 물건인가 아니면 물건을 사는 행위인가. 물건으로 위로를 받는다면 정말 그 물건은 무생물인가.
백화점에 창문도 시계도 없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오로지 물건을 소개하기 위해 사람들은 내내 서있다. 가만히 진열대에 앉아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물건들은 누군가에게 불려가 꽃이 될 것이다. 위로가 되고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고 자신감을 되찾아줄수도 있다.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적게는 수명, 많게는 수백 명의 손길이 닿는다. 만든 사람들이 손길 하나 하나에 영혼이 묻어 물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순히 자본이 만들어내는 실재하나 실체가 없는 사물에 불과할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시시때때로 모양을 바꾸는 집이었다. 그 안엔 대체가족이 살고 공동체를 이루었다. 사랑하는 법에 대해 혼란스럽던 하울의 친구들은 환경이 변해도 계속 함께 했다. 우리가 사는 성이 그 때마다 변한다해도, 자본이 들고 나더라도, 우리의 사랑도 굳건할 것인가.

사물을 바라보고 주머니에 넣어 행복해진다면, 그 때부터 그 사물의 삶이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독히 외로우면, 말 걸지 않는 사물을 사랑하며 계절을 건너는가.

2016.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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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습니까!

1. 강신주의 글때문에 충격받았다는 글은 어제인가 그제 봤다. 그리고 그게 퍼져서 오늘 오후부터 여기 저기 담벼락에 걸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떻게 이리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반응이었다. 그 글은 2012년 어느 신문에 기고한 칼럼이고, 수치심에 대해 거론하며 노숙자를 끌어 들였는데, 그들은 ‘수치심도 모르는 존재’처럼 읽을 만 했다.

그 글에 대한 분노폭발은 강신주 개인에 대한 분노폭발로 이어졌고 인신공격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 분노의 대열에 쉽게 동참하지 않은 것은 일단 운전중이었고, 대부분의 반응이 ‘어떻게 철학자라는 사람이 이럴 수 있느냐’ 였기 때문인데 이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의 대다수가 나와 비슷하게도 평소, 닭그네나 귀태의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는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형평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권력을 가진 자, 즉 기득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비난과 원색적인 욕설까지 할 수 있다. 때로 그런 것들은 정의로운 발언, 속시원한 이야기, 타인이 하지 못할 이야기를 대신 하여 카타르시스를 전해준다 – 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그러나 그 반대축에 서 있는 약자에 대한 비난은 무식한, 뻔뻔한, 엘리트 지상주의의, 인문학이 뭔지도 모르는, 저 딴 게 학자라고, 일컫는다. 매우 쉽게.

나는 아까 그 글을 보고, 왜,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해도 되고, 노숙자에 대한 비난은 하면 안되는가? 라고 생각했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약자의 정의는 무엇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그랬다. 약자 앞에 약하고 강자 앞에 강하자는 주장아래, 강자를 씹어내어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대신 약자는 언제나 사회적 피해자라 “나를 투사하여” 맹목적으로 그들의 편을 들었다.

여기에서 내가 제시하고 싶은 것은 왜, 약자는 객관적으로 평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되는 대상이냐는 것이다. 그게 과연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가?

어제 나이지리아의 한 소설가인 치마만다 아다치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단편적인 이야기의 위험성.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보지 못한 약자계층에 대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2. 가난하다는 건 벼슬이 아니다. 부자인 것도 벼슬이 아니다.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그 모든 것도 단편적이지 않다.

권력과 부를 가진 누군가의 삶은 평생 폭력에 노출되어 이미 정신적으로 좀비(오늘 회자된 낱말이므로 활용해보도록 하자)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돈과 명예보다 삶과 행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쉽게 불행한 부자를 시기하고 비난한다.

적어도, 이 글을 읽을 정도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가난이 몸에 익은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좋게 말해 자유롭다. 쉽게 말해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구걸을 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은 자존감이 바닥에 가닿은 것이 맞다. 그게 항상 그의 의지때문도 아니고 항상 사회적 구조 문제 때문도 아니다. 이야기는 단편적이지 않으므로.

20년전 동자동 뒷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은 주변에 피해를 입히며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담배를 피우며 앵벌이를 해서 냉장고를 바꾸고 보일러를 바꿨다. 싸움을 하다 가스통을 열어 불을 질러 버리기도 했다. 아침 10시에 소주병을 들고 돌아다니다 행패를 부리기도 했고, 새벽부터 출근하여 하루 종일 그들의 오줌을 닦아야 하는 경비원과 청소노동자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몇 백원을 달라고 생짜를 쓰기도 했고,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이불이나 옷을 훔쳐 가기도 했다. 그들에게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늘 여러사람들이 비난한 강신주의 표현에 의한 ‘좀비같은 노숙자’이거나 그보다 조금 형편이 나아 쪽방 한 칸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만큼 법의 외부에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부류들은 또 있는데 바로 고위 권력층이다.

3. 경제적 약자를, 노점상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타당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는다. 당신이 며칠 동안 애를 써서 겨우 접속한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소득공제 자료를 찾고 어떻게 10원이라도 더 환원 받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일을 그들은 안 한다 말이다. 그들이 받는 혜택이 없기에 세금도 내지 않으며, 때로는 어느 학교의 담벼락에 무단으로 조립식 건물을 짓고 통행을 방해하며 몇 년씩 재산권리를 주장하다가 관공서에서 철거를 해서 세금 잘 내는 시민들에게 돌려줄 공원을 만들겠다고 하면 드러누워 폭력경찰 물러가라 ㅇㅇ시장 자폭하라. 등등의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이런 예시도 단편적이다. 우리는 항상 이 단편적 이야기의 반대편도 살펴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긴 걸 여기까지 읽은, 혹은 강신주가 누구인지 아는 바로 우리- 나를 포함하여) 약자를 비난하기 꺼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출발선이 달랐거나 혹은 같은 선에서 출발했더라도 여러가지 개인적 사회적 이유 때문에 많은 기회를 박탈당했을 거라고 잠재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 중의 일부가, 스스로 그 기회를 계속 해서 거절해왔거나, 마음에 맺힌 상처 때문에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규정하고 계속 사회에서 겉돌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을 어떻게든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내부의 인물로 끌어당기기 위함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암묵적 동의 안에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법 안의 테두리에 존재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법과 사회란,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은 보호할지라도 그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내던지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당해보이는” 사회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강신주의 “좀비같고 강시 같은 노숙자들”에 대한 반응이 과한 것은 아닌가 경계해본다. 무릇 학자라면, 더구나 인문학 학자라면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문학이란 인간의 무늬를 곱게 아로 새기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혜택받은 지식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설령 시궁창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더라도 어찌됬건 그들은 문자 해독 능력을 부여받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좋은 뇌를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므로. 때로는 그들이 선택하지 않은 타고난 혜택 때문에, 혹은 주변의 환경 덕분에 그렇게 될 수도 있으나 절대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의해 지식인이 될 수도 있다. 의지도, 타고난 힘이라, 그 역시 혜택이라 쉽게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사회적 공적 자리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모두 “그러면 안돼” 라고 쉬쉬하며 동의하는 어떤 규칙에 대해서 과감히 아니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오늘 나는 강신주의 글을 읽고 한 개인의 의견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가 우려한다. 혹은 잘나가는 대중철학자를 자칭한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전혀 없었는가 확인하고 싶다. 몇 달전 서점에 갔다가 강신주의 책이 비소설, 인문 부분 베스트셀러 대열에 다수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어… 이 양반 심하네. 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게다가 그는 모 방송국의 예능프로그램에까지 출연했으며, 공중파에서 강의도 한다. 적어도 대중들에게 매우 알려진 사람이며 알려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의 역할은 인문철학계의 공지영쯤이다. 공지영에 대한 문학적 성취나 작품성, 언어조탁성을 떠나 공지영을 인정하게 된 계기는 1년에 책 두 권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 공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본 다음부터다. 그래 때로 저런 역할을 해내는 사람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말하자면 예전에 MBC 방송국에서 했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책을 소개할 때 있었던 논란과 같은 거다. 그 프로그램은 도서시장을 분명히 부흥시켰다. 신동엽이라는 이름은 개그맨의 이름으로만 알던 사람들에게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사 읽게 했다. 아무리 좋은 글도, 사람들에게 읽히지 못하면 일기와 다름없다. 세상 가장 평등한 전달 수단이 글자이며 책이라 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 마당에 대중적 철학자 하나 있으면 좋지 아니한가.

공지영이나, 강신주 같은 대중적인 지식인들은 위험하지만 그들의 순기능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이 또 한 번의 단편적이지 않은 접근이겠다. 그가 말한 노숙자에 대한 표현도 내가 읽기엔 달을 보랬더니 손가락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가 노숙자를 비난하기 위한 글을 썼던가. 그 글에서 노숙자는 장치였다. 물론 사람의 삶을 놓고 대상화 한다는 비난은 면하기 어렵겠으나 어떤 삶을 대상화하지 않고 글을 이끌어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강신주가 그만큼이나 되는 사람인가는 세월이 더 흘러봐야 알겠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수치심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리너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왜, 그가 말한 글의 장치에 대한 비유 하나에 이렇게 화를 내는가.

만일 그가, “대통령이랍시고 눈알은 비어 있고 영혼이 없는 미소를 내뱉으며.” 라고 썼다면 뭐라고 답했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만일 “대통령이랍시고 영혼이 없는 미소를 내뱉는” 이라는 수식어를 2011년에 썼을 때와 2003년에 썼을 때라면 얼마나 다른 평가가 나타나겠는가. 내가 믿는 진실과 내가 믿는 상식이 절대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게 지식인의 자세일까? 정말?

2014. 1. 16.

그의 원문글은 다음 링크다.

http://pdf.joins.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2201204080056

2012년 4월의 글이다.

피리부는 사나이, 깃발을 내려라.

진보나 보수는 성향과 철학의 차이이지 옳고 그름의 가치는 아니다.
단지 이 나라에서는 예외인 것이 보수를 자칭하는 것들이 파렴치범인 경우가 더 눈에 띄기 때문인데, 진보를 자칭하는 것들 중엔 더 파렴치한데도 불구하고 사회 중심에 있지 않고 비주류로 비껴나 있기 때문에 덜 주목받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 사회불만이 진보로 투영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회불만의 일부는 개인불만에서 출발해 죄책감과 공감능력으로 포장되어 발전할 때 타인의 힘을 빌리려고 한다.
타인의 힘을 빌리는 방법 중 하나는 설득이다. 설득은 논리와 감성이 고루 자격을 갖춰야 가능하다.
공감능력과 죄책감이 진보의 무기라면, 자수성가형 노력과 수치심이 보수의 무기다.
죄책감은 수치심보다 더 공감력을 이끌어내기 쉬운 집단의 성격을 띈다. 수치심은 개인적인 일로 전환되기 쉽다. 수치심을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파괴할 줄 알아야 하는 일이지만, 죄책감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본성은 보수적이다. 있는 것을 지키려는 보수성은 모든 생물에게 공통적이다. 그런 이유로 진보는 늘 보수에 밀리는 바람이 되기 쉽다.

최근 들어 진보입네 하고 여러가지 주장들을 펼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얼마나 편협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다시 느낀다. 물론 나도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이번 대선을 거치기 전에는 그러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가 있었고 그 가치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건 말하자면 나는 옳은 가치를 믿는 사람, 즉 나는 옳은 판단을 하는 사람, 여기서 비약된 논리는 나는 곧 “옳은 사람”이라는 거다.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는 진보진영의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자기가 믿는 가치가 너무나 옳아서, 타인들의 의견- 반대파의 의견은 “옳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그들은 모두 미쳤고 그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며 그들은 모두 사리판단을 할 줄 모른다. 그래서 진보는 진보가 아닌 자를 쉽게 욕하고 쉽게 밀쳐낸다.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그들은 진보가 쉽게 욕하는 “수꼴”과 다를 바 없다. 나와 가치관이 다르고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귀를 닫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무 발전도 가져오지 못한다. 왜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귀를 기울여 듣고 반대진영에 서 있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 조근조근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연대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자칫 잘 못하면 패거리를 형성하겠습니다. 가 될 수 있다.
우리 편이 되어주세요. 라는 문화는 김어준의 곽노현 쉴드에서 분수령을 이뤘다. 김어준은 바로 이런 식의 패러다임을 전복시켜버리는 가공할 능력을 지녔다. 우리끼리 편을 먹고 저들을 싸워 이기자. 라는 논리가 정당하게 들리는 건 그 때부터였다. 그러나, 두 번의 선거를 치르고 대한민국에서 “진보”라 일컬어지는 진영은 처절하게 패배했다. (이 나라에서의 보수/진보 개념에 대한 논쟁은 일단 미루고 편의성을 위해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다)
말하자면, 한나라당이 자리를 차고 앉아 세상을 휘젓는 꼴이 보기 싫어 억울함이 하늘꼭대기까지 닿은 비새누리당진영이 외친 구호들은 한마디로 찌질하기 그지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렇다.

우리는 옳고 당신들은 그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한나라당이기 때문에. 당신들은 이명박과 박근혜와 한 패이기 때문에. 라는 논조는 아무 동의도 얻어낼 수 없다. 이 나라의 반이상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모든 사람들이 정치평론가가 된 SNS 대한민국에서, 이제 그 자리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한 때 나도 한 패거리였던 진영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래서는 또 망하는 길밖에 없겠다는 생각만 든다.
종북 빨갱이를 몰아내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들도 외롭고, 우리도 외롭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진보라는 사람들은 여전히 고함만 지르고 있다. 여전히 깃발을 높이 세워 북을 치며 전진한다. 그리고 소리 높여 구호만 외친다. 그들은 그들의 행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고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래서는 앞으로도 필패다. 그리고 몇 몇 진보의 패거리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슬슬 뒤로 물러나 부동층으로 옮겨가며 정치에서 멀어질 것이다. 깃발을 내리고 주저 앉아 귀를 열어라. 지금의 반 한나라당 정서는 여전히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쥐떼로 보일 수 있다.
2013. 5. 27.

라면의 중의

트위터에 들어가 봤다.
라면 얘기가 얼마나 있나 좀 보려고.
대한항공 비지니스석 라면 사진도 있다.
내가 이 사건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 건, “청장년층의 배알을 뒤틀을 만한 대기업의 상무이사”가 비행기 비지니스석에서 진상을 부렸다는 게 포인트다.

대중에게 질투와 시샘을 받기 충분한 자리인데 대부분 기업의 이정도 되는 이사들 중에는 일정 비율의 개새끼가 존재한다. (어머 개님들 미안)

1/5 쌍놈새끼 이론에 기반하는데 동서고금 어느 조직에도 1/5는 그러하다… 는 논리다.

평소에 저 쌍놈새끼 계급장 한 번 떼고 덤벼보자 하고 싶던 을분들이 지구최고 미인 승무원일 대한항공 여승무원을 괴롭히고 때리기까지 했다는 게, 남성들의 오빠의식을 강렬하게 자극할 수 있다.
(보잉사 여직원이었어봐라 이렇게까지 안 됐다. 해외항공사 여승무원들은 건강함이 우선이지만 국내항공사는 일단 미모가 갑이다. 게다가 노선별로 미모의 등급이 있다는 건 모두 다 아는 사실)

몇 가지 댓글을 보다가 눈에 박히는 건 “비행기가 룸싸롱인지 아나” 라는 거였는데 생각해보니 룸싸롱에서 해장으로 라면을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상하이의 전설적인 어느 마담은 삼겹살도 구워줬다더라. 향수병 달래라고. (룸빵문화의 전세계적 전도사는 당연히 한국) 어떤 새끼는 잔치국수를 달라고도 한다더라 해장국을 사오라는 새끼도 있다더라의 오래전 풍문이 기억났다.

포스코의 모체는 포항에 있고, 포항의 경제구조가 포스코에 있고, 그리하여 의문의 술집 여종업원 연쇄자살사건도 조용히 넘어갔었고, 에지간하면 다 그렇게 됨니더. 했던 르뽀 프로그램의 어느 아지매도 생각났다.

그래 이 왕상무는 룸빵이 생각난 것일게다. 어제 숙취가 안 풀려 죽을 찾은 것일게다. 숙취가 아니라 술이 덜 깼을 수도 있다. 아직도 룸빵인지 비행기인지 잘 구분이 안 되었을 수도 있다.

정부 차원에서도 호재를 만났다. 국정원 사건과 남북문제 여러가지를 면피할, 애국적 사건이다. 대중의 공분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여승무원에게 라면을 여섯번 끓여오라고 했다고 신상털고 성지순례 하는 만국의 중생들이여.. 오늘 밤도 수많은 여성동지들이 당신의 상무님의 라면을 끓여바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새끼는 멸치국물 낸 잔치국수를 가져오라고 지랄을 하고 있겠지. 그래 오늘은 일요일이라 룸빵도 노는 날이겠지만, 월요일은 또 주말에 집에 있었으니 한 잔 빨아줘야 되지 않겠느냐.

대기업의 주요임원과 아름답고 고매한 스튜어디스와 테러에 히스테리 걸린 비행기라는 공간과, 게다가 밥도 스파게티도 아닌 그 흔해 빠진 라면이라는 게, 게다가 요즘 중요한 전략인 “라면 먹고 갈래요” 를 모욕하였으며, 향수와 성공신화를 동시에 자극하는 비지니스클래스의 라 면. 이라는 게 정말 팔리기 좋은, 매우 핫! 한 이슈가 되었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출근한 임원들이 무슨 결정을 내릴까 참 궁금하다.
왕상무는 대한항공에서 최소 1년간 라면 봉사를 해야 마땅한데, 기왕이면 당신이 다닌 룸빵 언니들한테도 좀 끓여주면 참 좋겠다.

2013. 4. 21.

예술인에게 복지란 무엇인가

페이스북에서 예술인복지재단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쓰는 글.

내가 읽었던 글은 이거.

http://www.kawf.kr/notice/sub01View.do?selIdx=388

예술인 복지법에 대해서 몇 마디를 나누다가 조금 더 얘기를 간단히 하자면 내 생각은 그렇다.

예술가라는 존재 자체가 뭔가에 대해서 원론적인 생각은 피하고 싶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펼치는 예술의 장르가 바로 그의 언어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이 그의 언어이고, 음악을 하는 사람은 음악으로 말한다.

물론, 그 중에 보편적 언어, 즉 지금 내가 쓰는 글과 우리가 흔히 하는 말에도 익숙한 사람이 있지만, 보편적 언어 대신 다른 수단의 언어를 선택한 사람들이 주로 예술을 하게 된다. 그건 그의 언어가 보편적 인간의 언어의 범주를 넘어서거나, 보편적 언어가 그들에게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글쟁이는 글은 참 잘 쓰는데 눌변도 그런 눌변이 없는, 말씨는 엉망인데 글씨는 참 수려한, 그런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글도 대단히 훌륭하고 말도 대단히 훌륭한, 보편적 언어를 극대화 시켜서 언어의 예술을 구사하는 사람도 있다.

+보편적 언어 – 라는 용어를 이 글에서 만들어 사용하기로 한다.

보편적 언어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보편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에 애를 먹는다. 어떤 이들은 기획이나 서류를 작성하는데에도 매우 젬병이기도 하고 일종의 공포증을 가질 수도 있다. 대화가 반복해서 어긋나다보면 누구나 그렇기 마련이다.

예술인복지법이라는 게 제정되고 그 혜택을 받기 위해선 행정적인 절차가 당연히 뒤따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누가 예술인인지 구별한다는 거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술인이라는 걸 과연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을까. 이 나라에서는 데뷔라는 것을 해야 할 것이고 자신이 이루어낸 어떤 성과물을 제출해야 할 것이다.

전시회 경력, 공연 경력,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발표 매체가 어디인지 등등의 경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게 아니고 학교를 졸업해서 당장 뭔가 시작하려고 하는 아직 성과가 없는 사람들은 이런 혜택을 받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떤 부분을 보면 예술인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 지자체에서도 일자리창출 사업이라고 해서 여러가지 새로운 직업군을 “창조” 해 내고 있는데 이미 기존에 많은 비판이 있어왔듯 이것은 새로운 “비정규직 창출”에 지나지 않는다.

명확히 할 것은 예술가, 즉 작가와 기획자는 완전히 구별되어야 한다. 작가이면서 기획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기획에 참여하게 되면 개인의 창작의 범주는 위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작가가 작가로 살기 어려운 이유는 대부분 생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작가가 작가로 살기 어려운 부분은 작품을 만들어 내고 펼칠 무대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빵도 먹어야 하지만 빵만큼 중요한 것이 개인의 작업이다. 개인의 작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려면 장소가 필요하고 그 장소를 사용할 비용이 필요하고 작업을 할 재료가 필요하고 그래서 생활고에 시달린다. 만약 한 작가가 작가가 아닌 사회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비용과 시간이 할애되기 마련이다. 작가에겐 비예술인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한 법이다.

예술인 복지법과 예술인 복지재단과 같은, 예술인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고자 하는 시도가 중요한 것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역에 놀고 있는 장소를 그들에게 사용하게 해주고 더 많은 전시와 공연을 하게 해주고 그 꿈과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지금 갖추어 놓은 시설과 인력을 충분히 분배하기만 해도 큰 예산과 대단한 법제정이 필요없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

대관료를 내야 하는 상업갤러리, 갤러리와 작가는 5:5, 운반비는 개인부담, 초대전인 경우 작품이 안 팔리면 작품 하나 기증하셔야 돼요. 뭐 이런 시스템. 공연장도 대관해야 하고 리플렛도 자기가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 어디에 소속되지 않으면 개인레슨이라도 하든가, 학원 강사를 뛰든가 생활고와 작품 생산 비용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 홀대받고 천대받아도 내 작품을 세울 장소만 있다면 한 번쯤 손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젊은 작가들, 그들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건, 많은 서류와 재능기부 정도가 아닌가.

행정적 절차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창작에 필요한 시간을 할애해서 새로운 직업에 뛰어들으라고 할 게 아니고, 그들이 더 많이 작업을 할 수 있고, 그들이 더 많이 발표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것이 예술인의 복지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까 한다.

비어있는 공공시설에 전시와 공연을 하게 하고, 비어있는 공공시설에 작업실을 허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한 걸음 멀리 나아가리라고 생각한다.

자꾸 새로운 뭔가를 배워서 새로운 직군으로 진출하라고 하지 말고, 예술인들에게 당신들이 하는 것을 조금 버리고 사회로 나오라고 제도 안으로 들어오라고 강요하지 말고, 자꾸 새로운 것을 만들라고 하지 말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은, 개인의 가계부 뿐만 아니라 전 사회에 걸쳐서 발휘되어야 할 기본 덕목이다.

아무리 창조경제를 한다고 해도 있는 거 홀대하고 새롭게 만들어 봤자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꼴이다.

 

2013. 4. 10.

다 쓰고 나니 북받치네.

가정환경조사서라는 솥뚜껑

내일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학교 입학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고 지냈다가 필요한 서류를 챙기기 위해 검토를 했다. 학교에서 나눠준 유인물 묶음에 입학식에 제출하는 서류가 있었다.

가정환경조사서 / 예방접종증명서 / 저녁 돌봄 지원서 세 가지다.

저녁 돌봄은 신청하지 않을 것이라 취학통지서를 받고 준비해 온 예방접종증명서를 민원사이트에서 출력했다. 각종 전염병에 대해서 미리 접종을 완료했다는 증명서인데, 입학식 전에 미리 접종을 받은 기관과 연락을 취해서 전산망에 올려달라고 요청을 해야 했다. 이런 서식은 최근에 전산화가 되었기 때문에 올해 입학하는 아이들은 어느 정도의 수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가정환경조사서를 펴놓고 가족사항을 적는데 짜증이 밀려왔다.

아마 그 전에 봤던 학교 유인물에 영어와 한자가 마구 뒤섞여 있었던 것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다른 이유의 몇 가지 사건 때문에 좀 짜증이 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 말이 있다.

살면서 다들 그렇게 말하듯이, 옛 말 그른 거 하나도 없다.

이 속담은 매우 쉬운 말로 전하고 있지만 그 말은 사실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다.

가정환경조사서는 나에게 트라우마다.

내가 초등학교 즉, 그 때 말로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는 80년대였다. 그 시대에 나의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그 사람들은 3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같이 살지 않는 편이 각자에게 훨씬 좋은 경우이다. 더 같이 억지로 살았다가 어떤 불행이 펼쳐졌을 지 예상할 수 없다.

이혼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잘못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별에 대해서 굳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미 한국이라는 이 고리타분한 보수의 나라에서, 조선조 이상하게 왜곡된 유교사상이 깊이 물들어 있는 이 환경에서, 이혼만은 절대 불경스러운 일이라며 참고 지내다가 결국 더 큰 불행을 앞두고, 아니면 이미 불행해 질대로 불행해 진 상태에서 서로에게 칼을 겨누며 헤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당신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혼은 단지 두 사람만의 관계에서 작용하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이다.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기에, 헤어지는 결혼부부들은 이 나라에 그리 많지 않다. 이 국가의 결혼은 수많은 인간관계와 불필요한 친족관계 때문에 얼기설기 꼬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 물론, 되도록이면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이 좋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굳이 인간의 일부 나라에서 일부일처제를 고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깊이 따져본다면, 그 역시 주장의 논거는 희박하다. 단순히 그런 거 아닌가.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원래 그래 왔으니까. 글쎄 그 보다는 사회체제가 더욱 복잡해 지지 않았으면 하는 암묵적 동의 아닐까 싶은 것이다.

성장 후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이혼녀의 딸로 살면서 받았던 여러 가지 상처들이다. 정작 당사자는 오죽했겠는가. 교회에서 주보를 나눠주는 시간에 사람들 많은 데서 “이집사 이혼했다며?” 라는 말도 들은 사람이 모친이다. 그게 그 때는 수모였다. 그런 시절이었다. 내가 늘 의아했던 것은 담임선생님에게 살짝 귀뜸한 일이 왜 전교에 소문이 퍼졌는가 하는 거다. 내가 고의적으로 누설을 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이혼자녀”라는 것이 매우 흔치 않은 사례였다. 전교에 단 두 명이 이혼자녀로 알려져 있고 그건 꼬리표가 되었다.

“쟤 엄마 이혼했대.” 라는 말.

가정환경조사서에 억지로 아빠를 적어 넣기도 했다. 아빠라는 존재가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단지 같이 살지 않을 뿐이었고 자주 만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환향녀가 화냥년이 되던 세상을 지나, 사람이 죽어도 열녀가 났다고 숭앙하던 극악무도한 세상을 지나, 전쟁을 거쳐 수많은 남자들이 죽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척을 지는 것은 대단히 불손한 일로 여겨지던 세상에서, 이혼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강요했으며, 결핍된 것은 모자란 것이고, 그 모자란 것은 정상에서 벗어난 일이며, 정상에서 벗어난 것은 옳지 않다는 폭력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흔히들 결손가정이라고 말했다. 최근에 들어서야 결손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좋지 않다며 굳이 그런 낱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국가와 사회가 정해놓은 가족의 이미지는 아빠 엄마 자식 둘로 이루어진 것이 정상, 그 외의 것은 비정상으로 여겨지던 규칙이 있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은 매우 폭력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일할 수 없고, 모든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 그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변화할 수 있고, 다른 것들과 같을 수 없다. 다양성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지만, 정치가 시작되고,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범주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통치하기 쉬운 조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줄을 세워, 이 줄에 들어서지 못한 자들은 이방인이라고 말을 하면, 그들은 법이 굳이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생긴다. 조르주 아감벤이 말했던 호모사케르의 존재 이유와 법철학이라고 하는 어려운 이름의 학문의 요점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법은 법 안에 있는 사람만 보호할 수 있고, 법 밖에 존재하는 것들은 외면해도 되는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 그 편이 통치하기에 편하다. 누구도 반발하지 않으려 드는 것은 법안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되지 않고 법 안에 속한 존재가 되어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호받고 싶기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하고 불안할수록 사람들에게 법은 마치 커다란 성채처럼 느껴진다.

그 성채 안에 들어간 자만,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규칙과 윤리, 도덕과 원칙, 이 것들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성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 폭력이 가득한 성채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는 사회를 만드는 일, 그 안에서 떨궈져 나오면 어쩔 것인가 하는 두려움을 이용하면 사람들은 “고분고분” 해진다.

 

사회적 질서를 위해, 사회적 문란함을 없애기 위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정해놓았던 “올바른 가족상”에서 벗어났던 나는, 지금 그 “올바른 가족상”에 또 얼마나 멀리, 혹은 얼마나 가까이 서 있는지 모르겠으나, 가정환경조사서에 남편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적으면서 학력을 적는 란이 없다는 것을 새삼 희한하게 느꼈다.

 

없어야 마땅한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세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줄 서지 않으면 보호해 주지 않을테야. 이 나라는 전쟁이 언제 터질 지 모르는 나라니까. 게다가 삼면이 바다니 도망갈 데도 없고, 그 위엔 당신을 잡아 먹으려는 괴수들이 드글거리거든” 이라는 협박을 들으며 고분고분 줄 서던 기억.

 

가정환경조사서, 부모의 화목 정도와 내 집의 경제를 책임진 자들이 기업에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는지 확인했던 그 고리타분한 서류가 30년을 돌아 나에게 다시 왔다. 내가 학부형이 되면 실내화를 빨지 않아도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건 꿈이었으며, 이제는 학교에 경찰관이 나타나 학교폭력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학교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움츠러진 몸씨, 주눅든 말씨, 머뭇거리는 마음씨가 모두 문제가 된다고 했던 것은 정해진 매뉴얼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는 읽었다. 당당하고 큰 소리로 말하도록 합니다. 그 이유는 굳이 그가 덧붙여 읽지 않아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쫄면 피해자가 되니까” 라고.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말보다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키우고 조금 뻔뻔한 태도를 가지라고, 조용하거나 얌전한 성격은 법으로도 보호해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법과 폭력의 반복이 거듭되는 동안, 이제는 피해자가 될 성격과, 가해자가 될 성격의 유형이 나뉘고 있다. 모든 아이들이 당당하고 큰 소리로 말하고 “싫어. 저리 가. 하지 마”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의 폭력이 사라지는가.

 

이 사회는 사회의 조직보다 언제나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더 많고, 사회가 개인을 지배한다는 것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면서 “당신이 잘해야 국가가 잘할 수 있다”고 강요하고 있다.

 

대체 이 파렴치한 구조의 사상은 언제쯤 끝이 날까.

의리와 대의를 위해 싸우는 무사도 아닌, 징징대며 삥이나 뜯는 골목상권의 양아치 같은 이 조직은, 예전엔 자라였고 여태 솥뚜껑으로 남아 있다. 거리 곳곳이 솥뚜껑이다. 밥도 짓지 않은 무겁기만 한 솥뚜껑이, 솥은 어디로 간 지 뵈지도 않은 채 여기 저기서 날아다니고 있다. 이 나라의 전쟁과 테러는 솥뚜껑들이 해내고 있다.

 

2013년 3월

직업의 기로에서 서서 야근없는 세상을 꿈꾸자

1.

30대 초반
누가 나에게 직업을 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물었다. 나는 “적성”이라고 대답했는데 나보다 20년은 더 산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직업선택의 가장 중요한 건
“가장 잘 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2.

생각해보면
적성이라는 건 근무조건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만약에, 좋은 학교 비국영수과목 교사인데, 급여는 연봉 6천 정도 되고, 30평대 주택을 제공하고, 방학은 유급으로 칼 같이 쉬고, 애들도 사고치는 놈 하나도 없이 건전하고, 교사잡무 하나도 없고, 교장마저 민주적이라면.

과연 몇 명이나, 그 직장을 마다하고 “적성에 안 맞아서 못 다니겠다” 하겠는가.

굳이
교사를 예를 든 건 교과외 잡무 고려하지 않고 학교선생이 만고땡이라는 편견들 때문이다.

연봉 1억짜리 의사인데(종합병원에서 이 정도 주지도 않지만) 종합병원이라 하루에 2시간 자고 과장이 완전 개새끼라 허구헌 날 불려가 조인트 까이고 지방대 출신이라고 동료들에게 왕따 당해서 맨날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데도 이 사람이 과연 연봉 하나 바라보고 버티겠는가.

3.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서 좋은 일은 계속해서 칭찬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고들 하지만 티비보고 놀고 먹는 거 싫어하는 사람 별로 없다. 그런 게 직업이 되지는 않는다.

좋아하긴 하는데 타고난 재주가 젬병이거나 죽어라 노력해도 안되는 경우도 있다.

강풀이라는 만화가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가가 되었지만 몇 년을 해도 그림이 별로 늘지 않는다. 본인도 고백한 것이 가장 큰 컴플렉스가 그림 못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전공하지 않은 게 후회된다고도 했는데 강풀은 그림보다 스토리다.

그렇다고 강풀의 스토리가 박제동이나 허영만 스타일도 아니다. 강풀은 딱 웹툰에 어울리는 그만의 스토리에 그만의 그림이 맞는 거다. 자기 분야를 개척한 셈이고 좋아하는 일에 도전해 피나는 노력을 해서 큰 성과를 이룬 셈인데.

이 사람은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대중적 스토리를 잘 짜내는 재능이 있다. 그건 이야기꾼의 소질이 아닐 수도 있다. 시대를 잘 읽거나 다른 사람과 공감을 잘 하는 성품과 때로는 유치하고 깊이 없이 잘 흥분하고 선동하는 재주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 본다.

되고 싶은 게 미스코리아인데 팔다리 짧고 얼굴이 타고나게 크다면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여전히 미스코리아가 좋다면 그와 관련된 분야중에 다른 일을 하면 될 것이다.

4.
예전에 통기타들고 한밤중 시내를 쏘다니며 밥벌이를 하던 시절에 내가 따라다니던 9살 많은 언니가 있었다.

노래판이 개판이니 어쩌니 하던 나에게 그 언니가 물었다.
“그래서 니가 하고 싶은 게 뭔데?”
“글쓰는 거”
“그럼 뭐 글판은 깨끗할 거 같냐? 다 똑같애. 어디가나 개새끼는 존재한다. 니가 그 시궁창에서 버틸만큼 좋아하는 거만 할 수 있는 거야.”

돌아보니 그랬다.
노래와 무대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사람들은 모두 그 판에 남았고 나는 도망쳐 나왔다.
아이돌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5.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딴지라디오의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춘심애비가 한 말은 그거다. 직업은 “덕질”의 승화.

덕질이라는 말은 오타쿠 – 오덕- 의 통신의 변형체로 좋아하는 일에 매니아급으로 매진한다는 말이다. 약간의 편집증을 동반하기도 하는 취미를 말하는데, 결국 이런 덕질의 결과는 전문가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덕후들이.. 판타지소설과 무협지, 게임이나 드라마로 먹고 살 수 없을까 궁리한다.

그앓실에서 주장하는 바는 덕질이라 함은 좋아하는 일이고 대단히 몰입하게 되는 일인지라, 중간이상 가지 않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세상에 어이가 없어보여도, 대부분의 작가들은 덕질의 결과물로 밥을 벌어 먹고 살아간다. 그림을 그리던 뭘 만들던 글을 쓰던, 그건 에지간히 미치지 않고서는 지속적으로 해내기가 상당히 어려운 지리멸렬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교수나 박사들도 마찬가지다. 공부도 덕질인거다. 별자리만 보고 있는 인간이라면, 그것도 덕질이고, 운 좋으면 그 덕질의 결과물로 천문학자가 되는 게 정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6.

문제는 먹고사니즘이다.
먹고 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정말 꼭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세상에 모든 사람들 중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 프로나 되나. 전혀 없지 않나. 한 5% 되나? 라는 의구심을 갖는다면 다시 세상을 고요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팔짱을 끼고, 등을 의자에 붙인 채 사람들을 바라봐야 한다.

좋아하는 일이 아닌 거 같다면, 그 반대급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와 저건.. 나는 때려죽여도 저건 못 해. 하는 종목들 말이다.

채식주의자가 정육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알콜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주류감별사를 할 수는 없다.
야채를 파는 일이나, 그저 회사에서 종이만 들여다 보고 있는 일도 어느 정도는 다 견딜 만 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일인 것이다. 이상적인 직업은 대부분, 반절은 놀고 반절은 취미생활을 하면서 누가 돈도 주면 좋을, 그런 것들을 말한다.

40-1. 지금 이 시점에 생각하건대, 이상적인 직업은 없다.
이상적인 밥벌이를 하는 사람은 지독한 덕후이거나, 물려받은 유산이 많은데 누가 건드리는 경쟁자도 없어서 돈 걱정을 안하고 살도록 태어난 천하의 행운아이거나, (예를 들면 100년짜리 저작권을 보유해서 매 년 억대 이상의 돈을 손에 쥘 수 있다면?) 아니면 뼈를 깍는 노력으로 오로지 드라마 주인공만이 가질 수 있는 지독한 집중력과 몰입력을 발휘해 그 자리까지 올라간, 매우 기괴한,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이상한 인간일 수도 있다.

결론은 그거다.
이상적인 직업은 없다.
할 만 하니까 밥 먹고 사는 거다.
이 짓 하다가 뒈질 거 같애. 그러면 그만 두는 게 맞다.

그러나,
약간의 불만, 약간의 불화, 조직간의 약간의 갈등, 거래처의 개새끼, 김부장 썅노무새끼. 이런 이유일 경우, 그런 이유로 인한 전업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한다. 개새끼를 처단하고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드럽고 치사하니 내가 여기를 떠나야 하는가. 혹은, 내가 견딜 수 있는 지경인가 아닌가.

7.

그러나 2013년 오늘,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직장의 문제와 이직, 인생뒤집기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이 직업관을 가지지 못하고 40대와 50대를 송두리채 날리고 환갑이 되어 퇴직을 한 다음에 아. 이제 너무 기운이 빠져버렸는데, 자기 직업에 어울리는 일을 찾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직업관에 대한 정확한 교육의 부재,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하도록 바쁘게 휘몰아치는 사춘기, 또한, 직업에 귀천이 있으며, 직업엔 연봉차이가 있으며, 그리하여 그게 우리의 신분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의 행복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으리라고 강요당한, 말도 안되는 교육을, 게다가 12년이나! 존내리 길게 받았던 것이다.

2002년 이후라고 본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그리고 이전에 있던 IMF로 인한 정리해고, 이제는 염치도 송구스러움도 없는, 당연한 정리해고 인원감축으로 한 사람이 서너명의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일들이 당연해졌고 그 시스템에서 세상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게 지금의 30대 이상의 직장인들이다.

과다업무.
그러니 열정을 가지라고 강요하는 거다. 열정이 없으면 버틸 수가 없는 과중한 업무가 몰아치는 거다.
좋아하지 않고, 미치지 않고, 제정신으로 즐겁게 출근하고 퇴근할 수 없는 업무량.
야근과 특근, 주말에도 자진하여 회사를 나가야 하는 미친 업무량에서 버틸 수 있는 건,
아 나는 이 일을 미치도록 사랑합니다.
라고 살짝 뇌를 틀어버려야 가능한 일이다.

8.

그리하여 세상은 이제 우리에게 “열정이 없는자는 뒈져도 모름” 이라고 안면을 까고 있다.
그건 모두 누군가가, 집약된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아니 왜.
왜 늘 뜨겁게 살아야 하지?
그렇게 부글부글 끓으면서 굵고 짧게 살다가 일찍 죽으면 누가 좋은거지?
병원과 장례식장과 각종 상조회와 일회용품을 만드는 중국의 공장들?

좀 천천히 살면 안되나?
좀 놀면서 살면 안되나?
누구나 한 번 태어나 한 번 죽는 건데, 그렇게 다들 미쳐 날뛴다고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 말이다.

9.

최근에 제주에 아무 생각없이 내려가는 청년들이 많다고 들었다.
감귤농장에서 귤을 따면 하루이틀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작년부터 내 주변의 30대 초반들이 하나 둘씩 사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모아둔 돈푼이나 있으면 자기계발을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래저래 복장 터지는 마음으로 몇 건의 아르바이트로 연명을 하고 있다.
부모님의 집에서 다음 행보를 구상하는 친구들도 있다. 내 주변만 그런 줄 알았더니 내 주변의 주변도 그러하다.
결혼하고 가장이 된 40대들도 갑자기 사직서를 내고 외국으로 나가버리는 경우가 늘어난다.
기술이민을 고민하는 친구들도 늘어나고 이미 나가 있는 사람들도 많으며 이 나라에서 영구히 뭘 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이는 자는 매우 적다.

그러니까, 이 나라의 20대 이상 젊은 청춘들은 대부분 이 나라를 떠날 수 있으면 떠나야지 라고 마음의 보따리를 꽁기꽁기 싸고 있는 거다. 국가의 큰 인력이 되는 2-40대들이 이 나라를 슬금슬금 떠나고 국민연금에 탈퇴하고 나면, 이 나라는 노인들의 나라가 되겠지.
386은 늙어가고 일할 사람은 없어질 게다. 젊은이들은 어디선가 내가 왜 열정적으로 살아야 하느냐고 물으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길 원할 지도 모르고, 그 중에 여전히 미쳐 있는 뜨거운 인간들은 세상을 주도하며 살아 나갈 것이다. 그리고, 자본가들에게 필요한, 야근에 미친 한국의 젊은이들은 모두 사라져 있을거다.

10.

취업과 이직에 대해서 고민하는 나의 수많은 동지들에게 이 글을 바치며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런 것이다.

티비를 줄이되, 특히 예능프로그램을 삼가하라.
연예인 기사를 읽지 마라.
여성독자를 타겟으로 한 월간잡지를 읽지 마라.

예능프로그램과 연예인기사는 매일 매일 “니 인생은 찌질해” 라고 강조해 줄 것이며
월간지는 “너는 정말 간지가 안나” 라고 강조해 줄 것이다.

이런 악의 축 세 가지만 끊어도, 세상은 조금 편안해진다.
개의치 말고 거침없게,
열정? 난 피곤하니 천천히 가겠다. 라고 말하며.
야근없는 사회를 위해 오늘도 누워보자. 뒹굴뒹굴.

2013. 2. 20.

그럴 수도 있지?

1.

며칠전에, 동네 엄마에게 제안을 받았다.

근처에 어린이 전용 수영장이 생겼는데 수영복이랑 수건만 챙겨서 보내면 씻기고 말리고 차에 태워서 보내준단다.
4명 그룹짜며 보내면 할인해 준단다. 아들도 같이 보내지 않겠니. 하고. 그 엄마 아들은 초딩 2학년.
얼만데요? 물어보니 할인해서 주 2회 강습에 3개월 선납하면 52만원이랜다.

딱 짤라 거절하기 곤란했다.
어린이 수영에 대한 나의 생각은
_ 절대 혼자 머리감고 옷 갈아입고 수영장에서 자빠지지 않을 나이에 보낸다. 이기 때문에.

오후에 다시 전화가 왔길래 그렇게까지 시킬 필요 없는 거 같은데 아무튼 제안해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6개월내에 수영마스터”를 강조하신다.
..

수영은.. 재밌자고 하는 거 아닌가;;;
나도 이제 배우는데;;
내 대답은 “수영선수 시킬 것도 아닌데..” 였다.
아무튼 고맙다고는 했다.

2.

그 날 오후에 만난 동네 또 다른 엄마.
낮에 수영 제안 받은 얘기 했더니 아 거기까지 연락이 갔구나 한다.
요즘 우리 아들 뭐 하냐고 물어봐서 유치원에서 방과후를 매일 하니까 애가 좀 피곤한 거 같아서
(내가 시킨 거 아님!!! 지가 한다고 그랬음!!!) 태권도만 보내고
일 있어서 애 좀 맡겨야 할 때는 블록놀이방 보내는데 본인도 좋아하고 수업 하나 하겠다고 하도 졸라서 주 1회만 보내고..
태권도에서 주말 수업 하는데 그것도 보내달라고 해서 토요일 오전에 보낸다. 했다.

미술학원 다니지 않았어요? 하길래
인제 흥미를 잃은 거 같아서 안 보내요, 하면서 “미대 가야 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했더니
그 엄마왈 “그러게.. 체대를 갈 것도, 미대를 갈 것도 아닌데..” 라고 한다.

이 엄마는 최근 남편이, “내가 지금 행복한가” 하는 고민에 빠져 난감하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기도 교육때문에 자꾸 누군가에게 떠밀리는 느낌이라 괴롭다고 한다.
뒤쳐지지 말라고 시키는 건데 이게 뭔가 싶다는 거다.

나는 얼마전에 초등학교 4학년 수학문제를 봤는데 도저히 공부 하라 소리 할 수 없게 생겼던 얘기를 하며, 이게 변별력을 위해 만든 문제라면,
내 새끼가 수학천재면 풀 것이고, 아니면 마는거지..
굳이 공부 잘해 대학 잘 가 직장 잘 들어가 대기업의 부속품으로 7-8년 근속하고 나이 마흔에 인생 이모작 해야되는거면, 난 그것보단 장바닥 전투력과 사회성이 더 중요하지 않겠나 라고 얘기 했다.

그러게요..라며 그 엄마는 멍한표정을 지었다.
애가 뒤쳐지지 말아야 하니까. 라는 그 엄마에게
뭐 공부가 많이 떨어져요? 물으니, 아니 그건 아닌데..

내 기준에 공부가 많이 떨어져요? 는 글을 못 읽거나 계산을 못하는 경우, 혹은 본인이 성적이 너무 떨어지거나 학교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하는 경우를 말한다.

글쎄 나는 예체능이나 애가 사춘기를 넘길 수 있게 꽂힐만한 뭔가는 꼭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공부는. 글쎄.. 억지로 시키면 올라가서 뛰어내리든가 가출하든가 둘 중 하나 아닐까 싶은데.. 정도로 얘기하고.

그 엄마가 뭔가 더 얘기하고 싶었으나, 저녁이 늦어,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3.

이웃에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가
학교 – 보습학원- 태권도를 마치고 요일별로,
학습지 선생님, 미술학원, 피아노 레슨을 받는 아이가 있다.
10시 정도에 받아쓰기 공부를 하다가 자는 모양인데,
이 친구는, 주로.. 한 페이지 푸는데 1시간 이상 걸리는..
집중력이 아주 떨어지는 아이다. 그렇다고 ADHD는 아니고, 그냥 재미가 없어서 하기가 싫은 아이.
그 엄마는 애 옆에 앉아 있으면 자꾸 소리 지르게 되고 그래서 자리를 뜨면 애는 딴 짓하고 손톱 쳐다보고 있고, 그러다 보니 애는 또 숙제를 늦게 하고 그래서 엄마가 또 화를 내고..
반복이라고 한탄한다.

4.

오늘 같은 태권도를 다니는 형아의 엄마에게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사범님한테 야단을 맞았다며 울고 들어왔는데 애는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하지 못하고 너무 서럽게 울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싶다며 우리 아들한테 좀 물어봐 달란다.

아들이 설명해주는 상황은,
어떤 꼬맹이가 그 형한테 자꾸 까불고 놀리고 그래서 형이 참다가 화가 나서 “나쁜 말”을 했단다. 무슨 나쁜 말? 이냐고 물으니 입에 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말을 돌린다.

그 엄마는, 아들이 울며 들어와 놀랐고,
그 나이때는 다 그런 거 아니냐.
우리 애가 먼저 잘못한 거 아닌데 왜 야단을 맞아야 하나 이런 생각인 거 같았다.

좀 친한 사이라 나는

“언니 남자애들은 현장에서 바로 잡아 주지 않으면 뭘 잘못했는지 전혀 깨우치질 못해요. 기억을 못하니까. 나중엔 별로 감도 안 오나보더라고. 나중에 얼르고 달래고 설득하는 게 통하는 건 여자애들 스타일이지.
그리고 태권도는 무조건 연장자가 참고, 욕을 하면 욕한 애가 무조건 더 혼나는 거고, 꼬맹이는 야단을 쳐도 잘 모르니까, 형들이 양보하고 참고 가르쳐라 이게 메뉴얼인 거 같더라구요.
큰 애들이 화를 못 참아서 손 한 방만 나가도 작은 애들은 나가 떨어지니까 일이 더 커지잖아요. 그래서 그런거겠지.”라고 얘기했더니
이 엄마는..

많이.

놀랐나보다.

그래 그래 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정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5.

엄마들은 아이들이 야단맞고 들어오면 싫은걸까. 모두?
관심이 있으니까 교사로서 야단도 치고 그러는 거 아닐까?

라는 질문을 트윗에 올리니.
트위터에 어떤 분이 요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 별로 없다며.
자기 자식을 야단칠 권리는 부모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물론 다 그렇다고 말할 수 없고 쉬운 일반화를 시킬 수 없으므로)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니가 잘못했으니까 선생님이 야단을 쳤을 것이고,
야단맞을 짓을 했을 것이고,
선생님은 집단을 규율하는데 있어서 어떤 규칙이 있을 것이고,
설령 불공평한 일이 있었거나, 다 똑같이 잘못했는데 혼자만 걸려서 억울하다 하더라도 그 억울할 일을 하지 않았으면 될 것이며,
선생님이 정말 너에게 관심이 없고, 돈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교육업자면 절대 너를 야단치지 않을 것인데. 라는 생각은.
옛날 부모들의 생각이라는 의견도 들었다.

내가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건지,
내가 이상한 사람인건지.

그래서 큰 아이 자격증 학원에서 애 야단쳤다고 죄송하다는 식으로 그렇게 누누히 강조했나.

아니, 근데 보습학원 같은 데서는 막 엎드려뻗쳐도 시키고 매도 때리고 하던데
이건 뭐지.

공부를 안하는 건 야단맞아도 되지만, 다른 사안은 “그럴 수도 있지. 공부하느라 힘든데” 하고 넘어가는 건가?

다 미친건가?

내가 너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나?

그럴 수도 있지, 싸울 수도 있지, 욕할 수도 있지, 때릴 수도 있지, 저 아이가 열받게 했대잖아요. 이게 바로 학교폭력의 가해자의 시발점인데.

6.

그럴 수도 있지, 사대강 팔 수도 있지. 토건 중요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해군기지 건설할 수도 있지. 국가 방위력 중요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성폭행 할 수도 있지. 꼴렸다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 있는거야? 다??

2012. 4. 12.

나꼼수를 생각한다.

최근들어 불거지는 나꼼수에 대한 이슈와,
그로 인해 분열이니 통일이니에 대한 얘기들과
생각을 주로 같이 하는 한 트친의 트윗을 보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한다.

길게 수식하지 않고 최대한 간결하게 적겠다.

1. 나꼼수의 공적 인정. 

– 정치에 대한 관심, 주류언론에 대한 비판, 해적방송의 위대할 손 (위대할 수 있다), 애플본사에서 한국을 특별방문할 정도로 팟캐스트의 위상을 드높인 점.
(더불어 아이폰 판매도 증가했는가? – 김어준 왈 “씨발 그건 내 알바 아니고” 까지)
여러가지 진보진영에 대한 담론 증가.
이 모든 공적 인정.

슬로건 –
정치도 유쾌할 수 있다 – 전국민의 가벼운 정치로의 접근,
쫄지바 씨바 – 전국민의 상처받은 자존심 회복
정치가 생활의 스트레스다 – 전국민의 향햑열을 불태운 점 (가카와 같은 공적)

이 모두 인정. 

2. 나꼼수의 정체성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읽는 순간, 이 방송과 김어준의 목적과 정체성을 알 수 있다.
“노무현의 노제에서 소방차 뒤에 서 울며, 내 남은 시간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께요.”
라고 했던 그의 결심, 여태 검은 넥타이를 메고 다니는 김어준의 행보,
오로지 가카만을 위한 방송을 통해 이미 드러나는 정체성.

– 이 방송은 노무현을 위한 진혼곡이다.
복수를 꿈꾸는 김어준, 그를 위한 방송을 준비하고 딴지일보와 본인 특유의 특성을 드러낸다.

– 이 방송은 “편들어주기”를 지향한다.
곽노현 교육감 사건 때 이미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김어준이 어떤 경로로 “편들어주기”로 정립했는지 나는 김어준이 아니라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무 편도 없어서 무참하게 개박살나고 망신당하고 결국 죽음에 이른 노무현을 보낸 사람으로 “편들어주기”로 누군가가 망신당하는 것이라도 막고 싶었던 것일게다.

나꼼수는 노무현을 편들어 주지 못한 자괴감에서 시작해
곽노현 편들기와 정봉주 편들기로 이어진다.

3,

유시민의 말대로 (그 사람이 거기 있었고 민중이 그를 발견한 것 – 이거 참 명언이다)
나꼼수가 거기 있었고 사람들이 찾아서 들었고 알아서 열광했고 모두들 편을 들어주었다.
모든 시스템은 정점을 찍으면 내려오게 되어 있다.
나꼼수의 곽노현 편들어주기에서 시작된 논란이 비키니 사건을 거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4.

나꼼수의 1회분은 BBK 관련이다.
이 때 주진우는 출연하지 않았고, 김용민은 말이 없었다.

나꼼수는 이 정권 전부를 까기 위한 방송이 절대 아니고
오직 가카만을 위한 방송이 맞다.
하다 보니 여기 저기서 요구가 들어와 몇 가지 손을 내민 적은 있으나
다시 KTX 민영화와 1026 부정선거 (혹은 선관위 디도스 사건)에 대해 집중하는 점을 보여준다.
이 방송은 가카가 폐기처분되면 같이 사라질 방송이다.

방송이 시작된 2011년,
김어준이 다 지난 (다 지났다고 그들이 주장하고 싶은!) BBK사건을 끄집어 내고 나와
BBK 저격수 중에 역사상 가장 경박하고 유쾌한 정치인인 정봉주와 함께 시작한 것.
여기 BBK 저격수로 활동했던 박영선이 영입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라.
– 재미가 없자나!

5.

일각에서 나꼼수가 한명숙 밀어주기를 한다는 얘기가 있다.
현 시점에서 가카에게 노무현에 대한 가장 큰 복수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한명숙이다.
정동영은 아니다.
나꼼수의 정체성은 약간 흐트러지긴 했으나 목표점은 하나다.
그건 변치 않은 듯 하다.

6.

방송의 한계다. 
모든 방송은 초반엔 시대와 대중을 끌다가 폭발적인 시민대중의 참여와 혓바닥에 의해 결국 대중에게 이끌려 가고 만다.
(이게 일종의 인간역학을 연구하는 인간들이 말하느 멱함수나 BURST 현상과도 어우러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7.

나꼼수는 이제 봉주 편들어주기에 집중하며
봉주와 대척점에 있는 가카에게 다시 집중한다.
그리하여 자기들로 인해 희생당했다고 “여겨질 수 있는” 정봉주를 위해 프로그램명도
“봉주 X회” 로 변경한다.

8.

가장 빠른 대선 레이스는 오세훈과 김어준의 합작품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2011년 김어준의 “나는 꼼수다”가 시작하였다.
김어준은 가장 빠른 대선 레이스가 오세훈으로부터 촉발되었다. 라고 말하지만
나꼼수가 깔아놓은 자리에 오세훈이 불을 지른 것이다.
자리를 펴줬더니 춤을 추는 자가 있었던 것.

9.

왈가왈부 할 것도 없다.
나꼼수는 정봉주가 출옥할 때까지, 혹은 가카가 폐기될 때까지.
봉주 X회, 혹은 나는 꼼수다. 라는 목적을 가지고 오로지 가카만을 위해
오직 가카 한 분을 위한 방송을 계속 할 것이다.

이들의 자세도 이제 더 이상 “소설을 써봅니다.” 혹은 “라고 추정!” 이라고 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꼼수는 복수와 승리를 거머쥘 대상을 찾을 것이고 오로지 가카에게 집중해야 할 시점에 도착했다.

10.

아무도 듣지 않아도 그만일 방송이었다.
그러나 알아서 찾아들은 방송이고 떠날 때도 말없이 떠나든가 말든가 상관없다.
나꼼수에게 무엇을 기대할 순 없다.
물론 기대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대해봤자 실망만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들은 수차례 방송에서 언급하듯이
다시 가카에게 집중. 하려고 늘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떠날 자는 떠나고,
함께 할 자는 함께 하면 된다.

그리고 떠날 때
그동안 고마웠다. 라고 한 마디 해주면 참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동안 고마웠다,
나는 이제 뉴스타파로, 이털남으로, 반민특위로, 희뉴스로, 저공비행으로, 등등등등.
으로 간다. 빠이.라고.

11.

나?
나는 계속 들을 것이다.
난 김어준을 오랫동안 좋아해왔고 편은 들어주지 못해도 매우 냉정하고 까칠한
친구같은 마음으로 그냥 같이 하고 싶으니까.

2012. 2. 26.

나꼼수를 까는 것도
옹호하는 것도
모두 개인의 자유다.
그로 인해 갑론을박이 이어져도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거시적으로 봐서는 긍정적이다.

비난하는 자를 비난하는 것도
옹호하는 자를 옹호하는 것도
모두 괜찮다.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하여 세상이 다양해져야 우리 뿐 아닌 인류가 가진 전체주의공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극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