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혐오와 차별에 낄낄대는 사이, 괴물은 자라난다

“엄마한테 제육볶아달라고 하고 싶은데 패드립인거 같아서요. 뭐라고 해야하죠?” 

주니어네이버 사용자인 어린이들까지 혐오와 차별의 표현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번 안양시 고등학교 사건뿐 아니라 초중고대학까지 점령한 혐오발언에 대해 오마이뉴스에 송고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35061

당신의 구역으로 가세요

노40대존 캠핑장이 뉴스소재가 되었다. 오늘자 JTBC뉴스였다. 업주는 “아무래도 40대 이상 고객들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아서.”라고 하는 말을 듣고 혼자 킥킥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범죄율도 40대가 늘 제일 높다. (이건 몇 년전 포스팅을 한 번 한 적 있다.) 지명수배 전단도 잘 보면 항상 40대가 제일 많다.

뉴스는 노40대존에 이어 부산대 노교수존도 다뤘는데 그 역시 킥킥대고 웃을만했다. ‘다른 손님들을 불편하게 하니까’ 라는 게 그 이유였다.

처음 노키즈존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 차별과 배제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뿐이다. 아이를 데리고 매장에 방문하는 것은 매출은 적고 업주 입장에서 귀찮을 일이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치자. 그래 그렇다고 치자.

처음 특정 연령대를 배제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고 애 딸린 여성들이 “맘충”이 되어갔다. 이 사회에서 업장에 제일 민폐 끼치는 게 중년이상의 남성들인데 왜 “노아재존”은 없고 “노키즈존”만 있는가, 아무래도 구매력때문일거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가 만들어낼 매출액과 그 매출액에 상응하는 내 노동력의 가치만 생각한다면 차별과 혐오는 모든 곳에서 정당해진다. 허름한 옷을 입고 매장에 들어가니 쳐다도 보지 않더라, 는 경험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대놓고 “돈 없는 자 들어오지 말라”고 써 붙이는 정도는 아니었다.

80년대에 아들이 둘이거나, 아이가 둘 셋이면 집을 빌려주지 않는 임대업자가 있었다. 임대업은 자기 입맛대로 임차인을 고르려는 욕구가 강해서 요즘도 아예 “반려동물 안됨”, “싱글 여성만”, “혼자 사는 남자분 안됩니다.”라고 명시하는 경우도 늘어난다.

뉴스는 이어서 서울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을 인터뷰하며 한국은 연령대에 따라 즐기는 문화도 구분되어 있는 것 같다는 답변을 이끌어냈다. 20대는 헌팅포차, 30대는 감성주점, 중년은 나이트, 노년은 콜라텍이라는 거다. 안양만 해도 일번가는 10대, 범계는 2-30대, 평촌은 중년, 인덕원은 중년이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노키즈존을 그대로 두었더니 연령과 직업에 따라 배제하고 혐오하는 일이 익숙해졌다. 배제당하는 당사자인 나도 무감해졌다. 연령대에 따라 들어오지 말라는 암묵적인 매장분위기, 키오스크만 설치한 곳, 외국어로 된 매장이름, 영어로 된 아파트이름, 66사이즈 이상의 옷을 만들지 않는 기업, 끊임없이 이어지는 차별과 배제에 길들여지는 사람들, 어떤 매장에서 어떤 업종에서 누가 고객이 될 수 있을까. 소비에도 계급이 생기고 있다.

어떤 체격에 어떤 외모와 건강을가졌고 어떤 연령대에 어떤 소득수준에, 어느 정도의 학력을 갖췄는가에 따라, 돈을 쓸 수 있는 구역이 세분화되고 있다. 계급에 따른 구역설정, 새로운 제국의 등장, 자본이 지배하는 식민지의 탄생이다.

코로나 혐오

이 상황에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개학 후 각 교실에서 펼쳐질 혐오였다.
중국교포나 이민자들의 아이들은 각지에 흩어져있다. 지역과 학교마다 다르듯이 아이들의 경제상황과 가정형편에 따라 차별도 세밀하게 나눠져있다.

부모 중 누가 중국인이라도, 한국어를 곧잘해서 아이들이 유아교육부터 한국어를 잘 가르쳤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는 경우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중국친구,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더러 학부모회도 잘 참석하고 책도 읽어줄 수 있는 중국인 부모도 있다.

하지만, 경제형편이 어렵거나 한국어가 어려운 경우는 뻔한 혐오와 차별이 기본세팅되어 있다. 문제는 교사들이라고 모두 혐오와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교사들이 모두 인권의식이 뛰어나고 젠더감성이 높은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이 나라의 보통시민이다. 이 사회 전반의 타자에 대한 시선이 고스란히 적용되는 수준이고 외부로 나타나는 본인의 공적인 행동을 구분할 줄 알아서 실수가 적은 것뿐이지,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는 것이다.

혐오와 차별에 대해 교육자가 강경하게 응대하지 못하고 본인의 속내를 들키는 순간 교실은 아수라장이 된다.
“왕따 당하는 애들은 이유가 있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교사라는 직군이 엘리트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계다.

자신이 학교 다닐 때 말 한 번 안 섞어봤을 법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면 그 자신도 괴로울 것이다. 도무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이끌어낼 지는 경험한 자도 잘 모를 일이고 경험했다고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때로는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학교 현장에서는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까. 그것도 궁금하다.

 

2020. 2. 22.

삶을 말할 때

가끔 내가 분노를 느끼는 건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하게 산다.”,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폐지나 줍고 산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볼 때다.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자발적 가난은 정신적 풍요를 기본으로 한다. 있다고 치자. 가난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좋은 조건이다.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하려는 사람은 가난하고자 경제활동을 하는 게 아니다.
각자 먹고 살 양식쯤은 갖고 살고자 한다.정말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경제적으로 곤궁함이 없는 중년을 맞이했다면 그건 백프로 운빨이다. 사회복지로 혜택을 받기 시작한 건 불과 10여년이다. 건강보험이 적용된 건 2000년부터다. 보험공단이 그때 생겼다.

가족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돈을 모을 수 없다. 버는 대로 약값과 병원비로 들어간다. 한 사람이 일을 못하면 0원이 아니라 마이너스다. 마이너스 100만원에서 마이너스 200만원도 가능하다. 이런 사람이 가족중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구성원들이 그걸 나눠서 부담해야 한다. 그러니 늘 돈이 없다. 건강이라는 건 마음의 건강도 말한다. 경제적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태에 머무는 가족이 있다면, 그 역시 가족구성원이 부담해야 한다.

건강한데 열심히 일하는데 가난하다면
그건 학력과 사회적 기반의 문제다.
학력과 사회적 기반은 그 윗대가 결정한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부모는 학교를 보낼 수 없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가난은 대물림된다. 학교를 왜 보낼 수 없었나, 가난했기 때문에 혹은 그 부모도 교육의 필요성을 느낄 여유가 없어서.

전쟁이 있었던 나라다.
전쟁통에도 공부를 하러 다닌 사람은 소수다. 적어도 하루 동냥질을 해서 동생들 입에 풀칠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거나, 팔 잃은 아버지가 돼지죽이라도 얻어오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전쟁통에도 괜찮게 살았대.
자랑 아니다.
남들의 고통을 발판삼아 돈을 벌었으면 자랑은 하지 말아야지.

우리 집은 예전부터 부자였대.
그럼 일제강점기에도 부자였다는 말인가?
친일을 했다는 얘기밖에 더 되나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버지가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그렇다면 그 아버지는 부양의 의무가 적었거나, 아주 뛰어난 소수의 엘리트였거나, 어떤 권력에 부역했거나다.

불과 수년전까지는
그래도 정당하게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렇게 믿긴 한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것을 기본 default로 놓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경제적 여유가 어디에서 왔는지 고찰하지 않는 자가 있다. “노력하지 않아 가난하다”는 말은 개인과 역사에 대한 성찰이 없는 자라고 정의내린다.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는 사람이다.

 

작년 글 스크랩

2018년 5월 14일

차별의 세상

1.
몇 년전 주민참여예산의 지역위원으로 있을 때 (자원해서 하는 거니 별 거 아닌 그냥 오지랖) 동네 유지쯤 되는 분이 오래된 놀이터를 리모델링해서 크리켓장을 만들자 했다.
나는 원래 놀이터를 리모델링할거면 놀이시설을 보강하고 그 앞의 아파트 아이들도 쓰게 하면 어떻냐고 의견을 냈는데

그이 왈.
그 동네는 애들도 없고 놀이터 나와 놀 애들도 없고
요즘 애들은 다 자기네 (아파트) 놀이터에서 노니까
놀이터는 더 필요없다며 노인복지에 치중하는 게 옳다고 밀어부쳤다.
나는 그 사람과 입씨름 하고 싶지도 않고 너무 얼척이 없어서 입을 닫았는데
대부분 그 사람 말이 옳다 하더라.

그 대부분이라 함은,
지역에 땅이나 집이나 상가를 가지고 있는
그러니까 부동산 소유자들이었고
동네에서 오래 산 권력층이었다.그 주장을 펼친 사람은 다음해에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해 그 동네 시의원이 되었다.그 사람이 말한,
그 동네엔 아이들이 있었고, 그 아파트는 아주 오래된 곳이라 놀이터가 엉망이었다. 아이들은 다른 친구네 아파트에 가서 놀았는데 2천세대쯤 되는 대단지의 놀이터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 있지만 3-4백 세대만 사는 작은 놀이터엔 들어가기 어려웠다. 들어가는 문마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비싼 아파트는 아파트입구부터 어딘지 모를 부담감이 있었다.

2.
그때쯤 옆 동네에 새로 초대형 단지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 건너편에 원래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더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 것 같아 지자체에서 아파트 단지 안에 초등학교를 새로 지었다.
새로 지은 초등학교의 학부모들이 연립주택 아이들과 분리배정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작년엔가 과천의 어느 동네에서는 지역아동센터의 이전을 놓고 동네 주민들이 반대하는 일이 있었다. 가난한 집, 빈곤계층 아이들이 드나드는 것이 싫다는 이야기로 비춰졌다.
어떤 보도에서는 개인주택에서 운영되는 지역아동센터가 마을에 들어오면 “아이들 때문에 시끄럽다”는 이유가 주된 것이었다. 내부의 사정은 알 수 없었다.

3.
집 앞 상가건물에 여호와의 증인 선교회관 간판이 있는 걸 보았다.
고등학교때, 우리 반에 여호와의 증인인 친구가 있었다. 우리학교는 기독교계 학교라 종교시간도 있고 예배시간과 각 학급에 신앙부장이 있었다. 내가 그 신앙부장이었고 조회 종례때 간단한 묵상을 진행했다. 그 친구는 기도하지 않았는데 그때의 나는 상당한 골수신자였음에도 그의 종교를 이해하고 싶었다.
전체 주간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애국자를 파트로 나누어 불러야 해서 음악시간에 연습을 했다. 그 친구는 애국가를 부를 수 없었기에 입을 닫고 있었고, 음악선생이 그 친구의 따귀를 때렸다. 친구가 울었고 나는 친구를 꼭 안아줬던 기억이 있다.

4.
얼마 전 만난 중학교 아이들은 친한 친구, 가족일수록 자기 외모에 대한 품평을 많이 한다는 불만을 말했다.
“대체 인권의식이라는 건 있지도 않은 것 같아요. 나는 불편하지 않은데 왜들 그러는 건지 너무 화가 나요.”
“스무 살까지는 화장하지 말라고 하면서 스무 살이 넘으면 민낯으로 다니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건 너무 웃기지 않나요? 구시대적이예요.”

5.
수많은 차별이 존재한다.
빈부, 나이, 성별, 외모, 종교에 의해 우리는 사다리 아래에서 악다구니를 쓰고 서로를 가른다. 장애는 그 중에 하나다. 타인을 재단하고 차별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재된 폭력은 무심하게 온다. 내 하루의 24시간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구별짓고 사는가.
정신을 차리고 산다는 게 과연 가능이나 할까.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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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와 왜 다르냐

오래전에 봤던 영화, 엘리펀트맨. 한국에서는 “코끼리 사나이”로 알려져 있다.
중증다발신경섬유종. 이라는 병을 앓는 환자인데, 영화의 배경에서는 그저, 기형, 괴물로 치부되던 시절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공개되는 주인공 코끼리 사나이의 얼굴은 거대한 신경섬유종으로 마치 코끼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속에서 코끼리 사나이는 인간서커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구경거리가 된다. 경악과 충격, 공포를 자아내는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이 서커스단에는 샴쌍둥이와 난장이등이 속해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애인 인권유린의 행태가 자행되던 시절. 
사실, 이런 인권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한 게 사실 몇 십년 되지도 않았다. 
우리의 동춘서커스를 비롯한, 수많은 서커스에 외소증이라고 이름이 바뀐 난장이들이 나와서 곡예를 했고 사람들은 그걸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그 때 그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한수산의 “부초”는 서커스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고등학교 때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이후로 그 어떤 서커스도 기분 좋게 볼 수 없었고,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을 했는데 공연내내 질질 짜다 참담한 심정으로 돌아온 기억이 난다. 
얼마전에 노트르담 드 파리 (Notre Dame De Paris)의 뮤지컬을 보았다. 
그 전에, “파리의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민음사판의 원작소설을 읽었다. 
노틀담의 꼽추. 라는 축약된 이름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15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이다. 
위고는 건축의 시대가 끝나고 문자의 시대가 왔음을 말하며, 그로 인해 대변혁이 일어남을 알린다. 그리고 이 소설은 철저한 신분으로 인한 소외계층을 집중 조명한다. 
쉽게 말해 빈민굴에 해당되는 기적궁에 살고 있는 라 에스메랄다와 성당에서 종지기로 사는 콰지모도, 그리고 에스메랄다 주변의 인물군상을 표현한다. 
물론 그 위엔 비겁하고 이기적인 기득권 세력도 나타난다. 
뮤지컬은 많은 부분을 축약했지만 넣어야 하는 요소들을 빼지는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모든 스토리의 요부의 요소를 갖추었다. 
오페라의 여주인공들, 인류 역사의 모든 이야기들속의 전통적 전형적 여주인공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공통점이 있다. 여기 위고는 몇가지 요소를 더 삽입했다. 
이국적인 외모, 이방인, 집시, 다른 머리색깔, 다른 피부색깔, 춤추고 노래하는 여자. 
즉, 
1. 집시- 춤추고 노래하는 – 예술적인 색채 – 예민한 – 그러나 순결한 – 고대 제전의식의 무녀의 형태 – 마녀로 등극 가능 – 희생양 
2. 이방인 – 외국의 유입자 – 다른 인종 – 빈민 –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 법 밖의 존재 – 무법 – 떠돌이 난민 (refugee) – 하층계급 
이 두 가지 공식을 끼워맞춰 소외계층의 한 맥락으로 놓고 
콰지모도는 고아 – 기형아 – 다른 외모 – 일반적이지 않음 – 남들과 차별화되고 다른 것은 나쁜 것으로 치부됨 – 악의 상징 – 인간의 요소를 갖추지 못함 – 반인반마와 다름없음 – 짐승보다 약간만 높은 상태로 하여 또 다른 소외계층의 한 맥락으로 놓는다. 
코끼리 사나이와 노트르담 드 파리의 주인공들은 소외된 자들이다. 
이 소외된 자들은 통계적으로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외모를 지닌 것으로 시작한다. 
예술속에서 외모 – 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얼굴이나 생김새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을 상징할 수 있다. 검은 머리를 가진 이국의 집시는 매우 불결하고 저급하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 
이게 이 나라에서도 통용되어 단일민족이라는 말도 안되는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한다. 
대한민국이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단일민족만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뜻이기 보다 
다른 민족이 절대 침투할 수 없을 정도로 기득권이 철저하게 공고한, 절대 유입과 개방의 여지가 없었던 왕조가 국명을 바꾸고 체제를 바꾸더라도 5천년동안이나 유지된 매우 배타적이고 수구적인 체제였다는 것의 반증이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으로 새로운 유입세력의 신선함을 악으로 호도하는 것은 기득권의 지배논리에서 아주 쉽게 유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분류하고, 장애시설을 혐오시설이라 분류하고, 하층계급이나 성노동자, 노숙자등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로 분류해 별도 관리하려는 노력을 꾀한다. 
신체의 장애가 있는 자를 장애인이라 칭하고 장애인 등록증을 발급하고 별로의 관리를 한다는 것은, 신체의 장애가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질환자들은 장애인이라 칭하지 않고 별도 관리를 하지 않으나, 일단 외형적으로 보이는 쉽게 판독이 가능한 “우리와 다른 부류”는 쉽게 특별한 법의 보호 아래 놓는 대신 일반적 법의 테두리 밖으로 내놓겠다는 의지이다. 
이것은 외국인이나 이주민에 대한 이 나라의 정책과 일맥상통한다.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사이트 가입을 할 수가 없고 인터넷 쇼핑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진 나라. 이 것은 당신들의 특권이고 이건 우리 기득권, 즉 지배세력이 곤고하게 지켜줄 것이니 당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새로이 유입되는 세력을 철저히 배척하고 분리하는데 협조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의 주민등록번호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를 유입시켜주는 것이다. 
학교에서 자연갈색의 머리색을 가진 아이들은 너는 왜 머리가 노랗느냐고 선생에게 타박을 받고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오기를 강요받아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외국인이 유입된다는 것을 절대 전제하지 않고, 이 학교에 다니는 모든 아이들은 모두 같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다. 그만큼 개방의 정도가 취약했으므로 모두 거기에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다. 
새로운 유입세력에 난감해 하는 것은 바로 오늘 뉴스에서, 어제 뉴스에서, 그리고 내일 뉴스에서도 볼 수 있는 수많은 사례에 있다. 비대위에 불편해 하는 한나라당이 바로 쉽게 보이는 경우이고, 
아래 링크를 걸게 될. 충격적인 기사 하나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만큼, 배타적이고, 수구적이다. 
충격적인 기사 하나를 보고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왜 너는 나와 다르냐. 는 이유로 조롱하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반성한다. 법륜스님 말씀대로 후회하지 말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 
+ 지난 일요일 정봉주 콘서트에 갔었다. 
김c가 출연해서 그런 소리를 했다.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맞는 체제와 정부를 갖게 된다. 
여러분 싫죠? 근데 나는 아닌데 다른 사람만 그런 걸까요?
우리가 그런 거..겠죠? 싫어요 저도. 싫지만 어떡해요. 그런걸.”
장애 소녀, 8년동안 철창에 가둬 – 경향신문 링크

2012.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