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야기 – 10. 남욱

휘경역에서 탄 지하철은 꿉꿉한 냄새가 났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오늘따라 더욱 불쾌하다. 괜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증거겠다. 마음따위 살필 여력은 없다. 짜증이 나면 짜증이 나는 것이고 이 감정을 폭발시킬 어떤 것들을 찾아야 한다. 그게 하루를 견디는 방법이다. 오늘 저녁은 술을 마실 것이다. 그 후엔 여자의 집에서 잠을 자야지. 내일은 어차피 아르바이트 비번이기도 하다. 오전 늦게 일어나 차려주는 라면을 먹고 나서 도서관에 나와야겠다. 인생은 정해진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목적한 대로 온 적 없다. 목적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삶은 완벽하게 뒤틀려 버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게을리 사는 날도 있지만 줄곧 게을리 산 것도 아니다. 덜컹거리는 전철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와 아무 것도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을 스쳐가면 남욱은 끝없이 불안해졌다. 열차가 다리를 건너는 것도 아니고, 강위를 달리는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다리가 꺼지고 사람들이 죽었듯 남욱의 하루도 그렇게 꺼져버릴 것 같았다.
여름, 이 방학이 지나기 전에 등록금을 마련해야 한다. 남욱은 빈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이번 달 월급을 계산하다가 잠이 들었다.
불안하다던 흔들리는 기차는 때론 하나도 불안하지 않은 듯 사람들을 흔들흔들 재웠다. 누구나 그렇듯이 남욱도 갈아타야 할 역에서 눈을 뜨고 부리나케 뛰어내렸다. 붉은 색 라인과 파란색 라인이 만나는 곳이다. 요란스러운 소음이 잠이 덜 깬 남욱을 휘감았다. 혼자만 똑바로 서 있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 했다. 스물 일곱. 아버지가 출근하지 않은 지 몇 달이 되었다. 누나들은 발길을 끊었고, 신입사원 채용을 취소한 기업들이 늘어갔다. 토익 성적은 만점에 가까웠고 어학연수를 다녀온 아이들보다 뛰어났으나 어차피 그래봤자 서울대가 아니라는 것. 남욱의 주변을 스쳐가는 사람들은 몰려오는 적군처럼 힘차게 걸었다. 2대 독자 누나 여섯, 장가가기 글렀다는 주변의 비아냥도 호기롭게 웃어넘기던 건 불과 몇 달 전임에도 불구하고 아득한 과거같았다. 스물 일곱이 아니라 마흔 일곱쯤 된 건 아닐까. 남욱은 번잡한 플랫폼에서 잠시 어지럼증을 느꼈다. 무릎을 약간 굽히고 두 팔로 허벅지를 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한 번 몰아쉰 뒤 다시 일어섰다. 어깨에 맨 무거운 배낭, 오늘따라 옥스퍼드 사전을 가져온 게 후회되었다. 역은 길었다. 계단을 오르고 내리며 파란색의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다시 플랫폼에 섰다. 해가 지고 있을꺼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 승객여러분은 모두 한 발 물러서야 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열차가 도착했다. 한 발 물러나라, 한 발도 물러서기 싫었다. 남욱의 얼굴 앞으로 열차가 들이닥쳤다. 지하를 뚫고 달려온 열차의 긴 호흡이 거센 바람이 되어 남욱을 밀어냈다. 눈을 찌푸리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승강장과 열차 사이가 넓으니 발을 조심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럼 애초에 왜 이렇게 만든 것일까. 세상의 모든 일들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남욱은 이 나라의 모든 일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열차에 올라타고 문이 닫혔다.

남욱이 갑자기 열차의 닫힌 문을 손바닥으로 쳤다.
노트북.
노트북을 두고 내렸다. 붉은 라인의 열차, 앉아서 자던 그 자리 머리 위에 노트북을 놓고 내렸다. 친구에게 일주일 빌린 것이었다. 아 노트북. 남욱은 문 앞의 기둥에 마른 몸을 지탱했다. 다음 역에서 내려 역무실로 뛰어갔다. 노트북의 브랜드를 말하고 노트북 가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직장을 잃어가는 이 시점에 누가 그 노트북을 돌려줄 것인가. 땅속에 놓고 내렸으니 이미 지하의 것이다. 남욱은 역무원이 내어주는 서식에 분실물 상태를 꼼꼼히 적었다. 015로 시작되는 번호를 적었다. 괄호안에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는 연락이 안될 수 있음’ 이라고 적었다.
역무원은 빙긋 웃으며 찾을 수 있을거라고 남욱을 위로했다. 승강장으로 돌아가 다시 파란 열차를 타고 거대한 빌딩 아래 지하에서 내렸다. 지상으로 올라가 버스를 탔다.

저녁내내 지하철공사에서 연락이 오나 기다렸다. 생각해보니 노트북에는 소유자의 연락처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남욱이 아르바이트 하는 햄버거집 주방 끝에 서서 멍하니 노트북 생각을 하고 있자 오늘 그 집에서 자려고 했던 여자가 와서 말을 걸었다.
“오빠 무슨 일 있어?”
남욱은 노트북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친구의 것이고, 일주일을 빌렸으며, 어느 역에서 내릴 때 머리 위에 두고 내렸으며 분실물 신고를 하고 왔으니 찾을 수 있을거라고 했다.
“노트북이 얼마나 해?” 여자가 되물었다.
남욱은 여자를 봤다.
“비싸.”

짧은 치마를 입고 소스통을 팔에 끼고 홀을 돌아다니며 테이블을 닦고 재떨이를 비우던 여자를 가만히 봤다. 남욱은 여자가 모아둔 돈이 있을까 생각했다. 여자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얼마일까 생각했다. 여자가 혼자 사는 방도 지하에 있었다. 월세가 30만원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친구의 노트북은 여태 이 집에서 고기를 구운 석달치 월급이 고스란히 들어갈 판이었다. 여자는 노트북의 가격이 얼마쯤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몇 번을 같이 밤새 술을 마시고 여자의 집에서 잠을 자고 나왔다. 남욱은 여자가 노트북을 어디서 파는 지나 알까 궁금해졌다. 가만히 여자를 보고 섰는 남욱의 시선을 알아채고 여자가 남욱앞에 서서 턱을 괴었다. 주방은 조금 높게 돋군 자리에 있어 남욱이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욱은 여자의 머리통을 한 번 쓰다듬었다.
“찾을 수 있겠지?” 놀란 강아지 같은 눈을 한 여자가 남욱을 쳐다보며 말했다. 남욱은 한숨을 참으며 입꼬리를 길게 늘려 웃어보였다.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을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욱은 몇 날밤이나 탐닉했던 여자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2014. 7. 15.

한 사람이야기 – 9. 마후라아줌마

그 길의 1층은 대부분 옷가게들이었다. 서울시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옷을 팔았다. 유난히 큰 사이즈의 옷이나 큰 신발, 맞춤 와이셔츠, 용과 태극기가 그려진 하얀 면티부터 요란한 금박무늬의 가운들, 화려하지만 전혀 고급스럽거나 세련되지 않은 드레스, 브랜드이긴 한데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 앉은 자리에서 세월을 울컥울컥 집어삼킨 듯한 소품을 파는 가게, 도장을 파는 가게, 초상화를 그리는 가게, 귀금속, 여행용 트렁크, 시장으로 들어가는 좁다란 골목, 수제화를 파는 집, 목적을 가진 손님들이 드나들만한 가게들이 즐비했다. 다른 곳에서는 흔치 않은 가게인데 여기서는 줄줄이 비슷한 가게들이 가득했다. 셔터를 모두 내린 길 역시 범상치 않았다. 4차선 도로는 유독 좁게 느껴졌고 드문드문 지나가는 택시, 노변에 주차한 차들 사이로 인적도 끊겼다. 밤 10시가 넘어가면 주말을 제외하고는 걷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은색의 셔터만 이어진 길거리는 마치 다른 시공간으로 가는 기차가 서 있는 듯 했다. 은하철도 999가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그 정류장은 바로 여기다. 어두운 골목 사이로 노란 백열등이 켜져 있고 누군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생업을 마무리 하고, 때로 어떤 사람은 몇 시간동안 천국에 있고 싶다며 해피스모크를 찾는 거리,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고 벌건 대낮에 속옷을 벗어 흔드는 여자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거리였다. 무리지어 걷는 흑인들은 이 곳 먼 타향에서 괜한 눈치를 보고 이 도시는 언제나 너무 덥거나 너무 춥다며 어깨를 움츠리고 걷는 저 멀리 스칸디나비아라는 반도에서 온 사내들과 80년대 달력에서 튀어나온 듯, 아니면 저 먼 미래에서 온 듯, 시대와 역사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제 멋대로 돌아다니는 이 거리는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니었다. 철모를 쓰고 긴 언덕으로 올라가는 헌병들과 그들의 군화소리를 들으며 긴장하는 어린 사내들과 몇 십년을 다른 사람의 얼굴을 그리다 늙어버린 영감과 몇 십년간 다른 사람의 목둘레를 재며 늙어가는 초로의 사내도 이 거리의 주인은 아니었다. 모두가 타인이고 모두가 이방인인 이 거리에 단 한 사람 주인공이 있다면, 그건 바로 밤 10시 59분에 정확하게 이 길을 훑듯이 당당하고 힘차게 지나가는 한 여자였다.

마후라 아줌마.

사람들은 그니를 마후라 아줌마라고 불렀다. 마후라의 정확한 표준어가 스카프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사람들이지만 스카프 아줌마라고 하는 것은 왠지 한국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한국어 사용자가 아닌 외국인들이야 그니를 미스스카프라고 불렀지만, 이 동네에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이를 마후라아줌마라고 불렀다. 오래전엔 “빨간 마후라”라는 뻔뻔한 제목의 노래도 있지 않았나. 일본을 거쳐 들어온 적절치 못한 단어라 해도 상관치 않고 너도 나도 애국심에 불타 불러제끼던 노래 아니었나.

마후라 아줌마는 오늘도 정확히 10시 59분에 햄버거집 앞을 지나갔다. 그이가 그 시간에 이 길을 지나간다는 것을 알아채고 입에 올린 것은 그 시간에 하루종일 쏟아진 쓰레기를 치우던 주방보조 알바생들이었다. 또래의 사내 서너명이 같이 쓰레기를 담다보면 바퀴벌레 십 수마리가 한꺼번에 출몰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두운 계단에 서서 키스를 나누는 동성애커플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특징적 장면들을 잡아내어 이야기거리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 중 서울의 어느 대학에 다니는 안경을 쓴 청년이 도드라졌다. 마후라 아줌마가 그 자리를 지나가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이 청년은 시계를 확인했다. 일주일쯤 지나 마후라 아줌마가 매일 정확한 시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확신하고는 쓰레기를 치우는 시간이 아니더라도 정확히 10시 57분쯤 밖에 나가 마후라 아줌마가 지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는 마후라 아줌마가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냈다. 청년은 흥미진진한 보물지도를 발견한 소년처럼 매니저에게 마후라 아줌마를 발견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매니저는 이미 몇 년 된 사람이라고 뚱하게 대답했다. 신나서 이야기하던 청년이 뻘쭘해질까 걱정되었는지 매니저는 그래 오늘은 무슨 색이더냐고 물었다. 청년은 여태 관찰한 바를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마후라 아줌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언제나 한가지 색깔로 치장을 했다. 빨간 블라우스에 빨간치마, 빨간 마후라와 빨간 스타킹, 그리고 빨간 구두. 어느 날은 보라색 자켓에 보라색치마, 보라색 스타킹에 보라색 구두, 노란색이 전부인 날은 모자를 쓰기도 했고 초록색으로 온통 감싸고 지나가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옷색깔과 같은 색깔의 마후라를 길게 늘어뜨리고 지나갔다. 머리는 붉은 자주색같아 보였는데 어두침침하여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붉거나 주홍색계열임은 틀림없었다. 어깨를 넘는 길이에 앞머리를 잔뜩 부풀려 올렸고 머리모양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매일 매일 몸을 감싸고 있는 색깔만 바뀔 뿐이었다.

청년은 처음엔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한 달넘게 마후라아줌마를 보고 있자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그 시간에 휘리릭 지나가는 듯 했다. 마후라아줌마를 다른 곳에서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그 길가에서 그 시간에만 발견되었다. 이 동네에서 10년을 넘긴 사람도, 20년을 넘긴 사람도 그이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청년이 이런 저런 사람에게 그이에 대해 물으면 모두들
“아 마후라아줌마?” 라고 반문할 뿐 아무도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다.

곧 청년도 그리 되었다. 아르바이트 석달차, 오늘도 마후라아줌마가 10시 59분에 지나갔다. 마후라아줌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버스처럼 휘리릭 지나가는 사람. 이 정류장에 매일 지나가는 버스보다도 사람들은 그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 버스가 지나가면 다음 버스가 오는 것처럼, 청년에게 마후라 아줌마의 행진은 그저 하루가 끝났다는 신호에 불과했다.

2014년 7월 11일

한 사람이야기 7 – 지원

웃고 있었다.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낀 채,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앞에 앉은 갈색머리의 남자도 호기롭게 웃었다. 지원의 큰 입은 웃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가지런한 치아, 붉은 입술, 넓게 퍼져 광대근육 바로 아래로 올라붙는 입꼬리가 시원했다. 앞머리를 길게 내리고 안경을 썼다. 사람들이 왜 안경을 쓰느냐고 물으면 그저 눈이 나쁠 뿐이라고 했다. 콘택트렌즈는 불편하고 무섭다고 대답했다. 이물감도 거추장스러웠고 눈 건강에도 해로울 듯 했고, 더군다나, 안경은 지원이 가리고 싶은 긴 얼굴을 감춰주었다. 지원이 바에서 나와 맥주잔을 들고 주방쪽으로 향해 가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지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엉덩이는 봉긋 솟아올랐고 허리는 잘록했다. 가슴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어깨를 쭉 펴고, 가슴을 내밀고, 맥주잔을 든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캣워크를 하는 모델처럼 걸었다. 장점은 살리고, 약점은 가리랬다고, 지원은 긴 바지나 긴 원피스를 즐겨 입었는데 하나같이 몸에 딱 달라붙는 디자인이었고 다소 짧은 종아리는 9cm가 넘는 힐로 감췄다. 하의가 신발 등위까지 내려왔기 때문에 키가 작은지, 다리가 짧은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지원이 그렇게 걸을 때는 모델을 하다 은퇴한 20대 후반의 여자로 보였다.

생맥주를 따라온 지원이 앞에 앉은 남자에게 컵받침을 새 것으로 바꿔주며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고맙다고 인사하자 지원도 “땡큐”라고 입술을 오므리며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원은 오늘 노란바탕의 딱 달라붙는 니트원피스를 입었다. 남자는 연신 지원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고, 지원은 귀기울여 들었다. 금전출납기를 열어 돈을 넣고 닫을 때도, 웨이츄리스들의 주문을 받아 술을 만들 때도, 병맥주를 딸 때도 연신 웃음을 잃지 않았다.

가게는 지하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지원이 보였다. 지원은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해야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에 대해 불평을 한 적은 없다. 가끔 만사가 귀찮거나 몸이 안 좋거나 일이 너무 바쁠 때면 웃지 않을 뿐이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 하고 소리를 내었다. 지원은 거의 모든 순간 웃으며 헬로, 라고 인사했다.

지원의 앞에 앉은 남자가 일어서서 계산을 하고 팁통에 만원짜리 하나를 넣었을 때 지원은 다시 한 번 활짝 웃었다. 자꾸 뒤돌아보며 문을 여는 남자에게 지원은 손을 흔들며 바이,라고 말했다. 주방에서 보조일을 맡고 있는 청년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원 앞에선 청년은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누나, 함춘임이 누구예요?”

“왜?”

“이거 아까 낮에 대타 뛰다가 받은 건데, 누구한테 물어봐야 되나 하고..”

지원은 청년의 손에 든 봉투를 나꿔챘다.

“누구예요?”

“나야.”

“아, 누나 이름이 함춘임이예요?”

“옛날 이름.” 봉투는 등기우편이었다.

지원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청년은 웃으면 안되겠다는 걸 알아챘는지 뒤로 물러나서 잠깐 멈칫했다. 지원이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

“그래도 나는 지원이야. 알았지?”

청년은 마음이 가벼워져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누나 오늘 정말 예뻐요.”

“땡큐” 지원은 다시 입술을 오므리며 발음한 뒤 입꼬리를 길게 올리고 미소지었다.

바에서 설거지를 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쓰레기를 버리러 간 사이 지원은 등기우편을 열어보았다.

 

지원의 주민등록지는 이 가게로 되어 있었다. 지원은 7년전 일로 다시 법원을 가고, 그 남자를 만나거나 마주보아야 한다고 서류에 적혀 있었다. 짐도 없이 거리로 나왔다. 눈이 부어 앞이 보이지 않았고 이도 몇 대 부러진 상태였다. 기억을 더듬어 옛 인연을 찾아 이 가게로 왔다. 춘임이었던 때, 찾아온 인연은 그녀를 내치지 않고 집에서 며칠을 같이 지내다 방을 구하기 위해 우사단 길을 걸었고 칵테일 만드는 법을 가르쳤으며 주민등록을 가게로 옮기게 했고 금전출납기와 장부를 맡겼다. 지원에게 장부를 맡긴 여자는 주방에서 스테이크를 굽고 있는 주방장에 옆에 서서 웃고 있었다. 작은 키의 그녀가 주방을 돌아나와 지원에게 왔다.

“나 와인 한 잔만 줘.”

지원은 냉장고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마개를 따고 길쭉한 와인잔에 따라 건넸다.

“아 예쁘네 이거. 이거 뭐야?”

“로제와인, 어제 장사장님이 신제품이라고 가져왔어.”

와인을 든 여자가 지원을 빤히 봤다.

“그거, 내가 일부러 모르는 척 했다?”

“뭐?”

“아까 그 등기우편. 내가 성욱이한테 난 모르니까 너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아 언니!”

여자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 새끼니?”

“어.”

“미친 새끼.”

키 작은 여자는 와인잔을 들고 총총히 걸어 주방으로 돌아갔다.

지원은 펴 놓은 매출장부로 쓰는 다이어리에 글자를 적었다.

‘쇼리언니 로제와인 1병 카를로로시– 장사장 증’

 

 

2014. 7. 6.

한사람이야기 4 – 곤화

유리로 된 샷시문은 닫을 때마다 불안했다. 유리창에 반짝, 소주케틀이라는 맞은편 가게의 글자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험한 골목에 가게를 낸 것은 염려하지 않았으나 가게 문을 닫을 때마다 불안이 다시 떠오르곤 했다. 골목이 험하다는 건 드나드는 사람들이 험하기 때문이다. 험한 사람들이 드나들어서가 아니라 흥분한 사람들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흥분한 이유는 어두운 밤 좁은 골목길 현란한 간판과 더불어 소주케틀이라는 술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젊었다. 소주케틀은 과일맛이 나는 탄산음료에 소주를 부어 만든 소주 칵테일이다. 커다란 1.5리터 페트병의 윗부분을 잘라내어 탄산음료를 절반정도 담고 소주를 한 병 붓는다. 간단한 제조법으로 만든 소주케틀은 1개의 페트병에 2000원에 팔렸다. 주말에는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샀다. 머리가 짧고 얼굴은 하얀, 더러 여드름도 난 미국병사들이 소주케틀을 들고 골목에 가득했다. 헌병은 맨 위 디스코클럽 앞에 서 있고 아이들이라고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는 청년들이 담배를 물고 주말을 가득 채웠다. 곤화는 소주케틀을 들고 서 있는 아이들이 만 20세가 안 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곤화의 가게에 들어오지 않았다. 2천원의 소주케틀로 밤을 홀라당 보낼 수도 있는데 4천원짜리 병맥주는 아이들에게 고급술이 되었고, 2천원짜리 라면을 먹으러 들어오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아직 골목은 반쯤 차 있었다. 반쯤 비어있다는 얘기도 된다. 다른 주말엔 새벽 4시까지 문을 열어놓지만 오늘은 일찍 닫는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나. 곤화는 여기까지 온 게 어디냐고 되묻는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하이, 하고 손 흔드는 아이들이 있다. 곤화의 치즈라면을 먹어본 아이들인 모양이다. 요란한 음악소리가 등뒤로 넘어가면 붉은 조명이 켜진 작은 바들이 아직 영업중이다. 더러 문을 닫은 곳도 있다. 아주 오래전, 곤화가 이 골목에 들어서기 전에 저 바 뒷부엌에서 한 여자가 끔찍하게 죽었다. 곤화는 가끔, 그 여자의 꿈을 꾼다.

골목이 끝나자 다시 쿵쾅거리는 음악소리가 길을 메웠다.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도로에 얼굴색과 머리색이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한 손에 맥주를 들고 한 손은 호주머니에 꽂은 남자들이 많다. 곤화는 골목을 내려가 시장통으로 직진했다. 시장통 끝에는 기가 막힌 만둣국을 파는 집이 있다. 오늘도 만둣국집 아이들이 가게에서 자고 있다. 곤화는 어디선가 잘 크고 있을 아이를 생각한다. 눈물 따위. 라고 입을 다물어도, 눈물이 마른 것은 아니다. 만둣국집을 지나 살인사건이 났던 햄버거집 2층으로 올라간다. 생각해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동네에서 죽었다. 유명해지는 죽음이 있고, 잊혀지는 죽음이 있다. 호텔 뒤에서 칼부림이 나 세 명이 죽었다는데 소문만 무성하고 보도되지 않았다. 어느 클럽에서 마리화나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경찰은 오지 않는다.

머리를 양갈래로 내려 묶은 젊은 여자 앞에 곤화가 앉았다. 둘은 카스 맥주를 시켜 몇 병을 비웠다. 곤화 앞에 앉은 여자가 울었다. 곤화는 냅킨을 달라고 해서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곤화는 여자에게 올 해 몇 살이냐고 묻는다. 곤화의 얼굴근육은 움직이지 않는다. 너 많이 어렸구나 라고 말했다. 여자가 피식 웃는다. 눈가가 벌겋다. 곤화는 종업원을 불러 하이네켄 두 병을 시킨다. 여자와 곤화는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더러 웃기도 한다. 곤화가 가슴을 펴고 등을 의자에 바짝 붙인다. 앞에 앉은 여자와 거리를 만들고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곤화는 몸을 다시 숙여 젊은 여자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 본다.

“정말 돈 벌고 싶어?”
“벌어야 돼요.”
“너 먹고 사는 것만 벌면 되잖아.”
“동생 학교 보내야죠.”
“내년에 졸업이라며.”
“내년에 엄마가 출소해요. 방도 구해줘야 되고. 한 달에 삼백만원만 벌면 금방 될 거 같아요.”
“정말 그렇게 벌어야겠어?”
“안 그러면 어떡해요. 방법이 없는데.”
“그렇게 벌 수 있는데가 있긴 해.”
곤화는 맥주잔 앞에 놓인 땅콩을 입에 넣었다. 오물거리는 곤화의 입술이 더욱 작아보였다. 곤화는 땅콩접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 쉬는 날도 없고. 낮에도 일을 해야 되고.. 밤에는 더 바쁘고..내가 그걸 한 4년 했어. 그래서 지금 사는 집 전세잖아. 4-5천 정도는 모았지… 집을 살 정도까지 버는 건 아니고..”
“어딘데요?”
“말해주기 싫다.”
“예전에 저 아는 언니가 빠찡꼬에서 동전바꿔주는 거 하면 돈 많이 번다던데. 손님들이 잭팟 터지면 팁도 막 준다면서요.”
“……. 그런 거 아니야.”

곤화는 땅콩을 다시 입에 넣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랗고 붉은 네온사인들이 더러 꺼지고 더러 반짝였다. 곤화가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자 앞에 앉은 여자는 더 묻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언니는 그 루즈가 되게 잘 어울려요.”
“그래?” 곤화가 활짝 웃었다. 속쌍커풀진 눈은 강아지를 닮았고, 코도 입도 작았다. 하얀 피부에 굵게 말은 파마가 잘 어울렸다. 씨익 웃는 곤화의 표정은 매우 천진했다. 내일은 즐거운 소풍날, 이라고 말하는 듯한 웃음이다. 곤화는 젊은 여자와 이야기를 하다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웃을 때마다 빨간 립스틱이 반짝거렸다. 맥주잔에 묻은 곤화의 립스틱 자국도 반짝거렸다.

하늘끝이 파래졌다. 둘이 마신 맥주병이 창가에 나란히 서 있었다.
“야 해뜬다.”
곤화는 계속 땅콩을 먹고 있었다. 서너개를 한 번에 집어 입주변에 손을 대고 하나씩 까넣었다.
“미경언니 왔을라나..?”
“처 자고 있겠지뭐. 요새 만나는 사람도 없잖아?”
“스테디는 없지” 젊은 여자가 재미난 일이 생각난다는 듯이 웃었다.
“가자 야. 나 피곤하다.” 파란 하늘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파란 청바지를 입은 곤화는 계산서를 들고 빨간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사람이야기

2014. 7. 1.

한 사람이야기 3 – 정아

“에휴. 이러고 살아서 뭐하나 모르겠다.”
“같이 죽어. 같이 죽어? 엄마 우리 같이 죽어?”
다섯 살 짜리 아들이 정아의 손을 잡았다. 정아는 신발을 신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길고 작은 정아의 눈은 또 초승달이 되었다.

“뭘 같이 죽어? 쪼끄만게!”
“엄마 맨날 죽어?” 정아는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였다. 약 3초간.
“너 어디 할머니 앞에 가서 그 소리 해봐라. 뭐라 그러나.”
등 뒤에 선 여자는 다문 입을 열었다.
“애들 앞에서 숭늉도 못 마신다더니.”
“이러니 내가 살겠니?” 정아는 얼굴도 들지 않고 아이의 신발을 신기며 말하였다.
“이모 안녕.” 아이가 집안에 선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집으로 가?”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여자가 말했다.
“얘 맡기고. 일찍 나갈게.”
“조심해서 가. 엄마 말 잘들어?”

아이는 신발을 신고 뭐가 좋은지 폴짝 한 번 뛰었다. 현관에 놓인 어지러진 신발 때문에 아이가 미끄러질까 염려되었다.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정아의 왼손목에 샤넬팔찌가 찰랑. 움직였다.

정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반지하를 벗어나려면 몇 칸의 계단이 필요하고 그 집의 대문을 나서면 다시 내리막길이다. 골목을 벗어나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난다. 정아의 집까지는 몇 개의 계단과, 몇 번의 오르막을 더 올라야 할 것이다.

“엄마 돈 많이 벌어?” 아이가 말했다.
“그럼. 엄마 돈 많이 벌지. 아빠보다 더 벌지.”
땀이 송글송글 돋아났다. 아무리 화장을 진하게 해도 기미는 쉽게 눈에 띄였다. 눈두덩이에 깊은 아이라이너가 번질까, 새로 산 마스카라로 길게 올린 속눈썹이 번질까 걱정되었다. 정하는 땀을 닦지 않고 길을 걸었다.

“벌어야지 그럼. 벌 수 있을 때 벌어야지.” 아이는 땅바닥의 불규칙한 무늬를 보며 제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건너 뛰며 말했다. 애 할머니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정아가 피곤에 찌들은 얼굴로 인상을 쓰고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나갈 때 아이 할머니는 나가는 정아의 뒷모습에 대고 그렇게 말하곤 했다.

“엄마 아들이 사고만 안 쳤어도 이러고 안 살아.” 정아는 쏘아붙이는 것도 아니고 뇌까리는 것도 아닌 말투로 대답하곤 했다. 아이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부엌의 쪽문에서 바로 길로 떨어지는 정아의 맨다리를 보며 문을 닫곤 했다.

오늘도 같은 말을 할까. 문득 정아는 간밤에 들어오지 않은 남편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냉면이나 한그릇 먹었으면 좋으련만 마음 뿐이었다. 사람들이 간혹 줄을 서기도 하는 허름한 냉면집을 지났다. 아이는 별 말 없이 순순히 걸었다.

“재윤이 놀이방 재밌어?”
“어.” 아이는 계속해서 바닥만 바라보고 걸었다. 불평이 없는 아이다. 그게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매일은 고단하기만 했다. 아침 9시에 나와 밀린 설거지를 하고 가스불을 올려 자갈을 달궜다. 10시부터 주방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11시 반부터는 점심시간 손님들이 몰려왔다. 집게를 들고 몰아치는 전표를 확인하며 고기를 구웠다. 뜨거운 접시에 이력이 난 손은 물집도 잡히지 않은지 오래, 굳은 살 덕에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손끝이 고마울 때가 있다. 오늘은 점심시간을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다. 혜선이가 3시부터 6시까지 대타를 뛰어주기로 했다. 대타를 뛰는 혜선에게는 시간당 3천원씩 9천원을 줘야 한다. 지갑에 그만한 돈은 있을터. 4시쯤 되면 점심손님이 빠져나가고 저녁손님도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라 일수쟁이가 들렀다. 정아는 매일 꼬박꼬박 도장을 찍었다. 오늘은 6시쯤 보자고 이미 전화를 했다. 나가자마자 일수쟁이부터 만날터였다. 남편은 동창과 영동에 주점을 열겠다고 설치고 다니고 있다. 포장마차 해먹은 게 언제라고 또 날뛰기 시작한다. 말릴 기력도 없고 그저 안보고 싶을 뿐이다. 정아는 요즘 이혼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헤어지면 이 동네를 떠나고 싶고, 아이는 키울 자신이 없고, 시어머니가 젊으니 아이를 맡기고 훌훌 떠나는 게 가장 좋을 성 싶다. 얼마 전 사람을 통해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들었다. 파출부 생활 5년에 설거지만 2년이다. 밤에는 업소에서 설거지를 했고 낮에는 업소 청소를 했다. 가서 무엇인들 못할까 정아는 지금보다 그 어떤 것도 나을 것이라 확신했다.

터번캣을 쓴 남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걸어오고 정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시댁에 당도했다. 내년에는 이혼해야지. 정아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샷시문을 열었다.

출렁. 하고 유리가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엄마” 정아는 시어머니를 그렇게 불렀다. 정아의 어깨에 매달린 까르티에 배낭도 한 번 출렁였다.

2014. 6. 30.

한 사람이야기 2 – 김언니

김언니는 오늘도 소방서 앞에서 골목을 올라간다.
어이 김언니 오늘도 한 잔?
호객을 하는 사내가 웃으며 말한다. 김언니의 눈동자는 이미 풀어졌고, 머리도 길게 풀어졌다. 앞이 흔들리는지 걷다가 눈을 부릅떴다. 김언니는 눈이 컸다. 눈썹도 짙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인데 얼굴크기도 작지 않았다. 걸을 때는 늘 팔자로 걸었다. 작지 않은 키에 어깨가 단단하여 힘이 좋아 보이는 체형이었다. 김언니를 보고 다들 남자같다고 했다. 매우 선명한 이목구비에 단단한 몸, 종아리와 장단지도 보기 좋은 운동선수 같았다. 목소리도 크고 우렁찼으며 손을 들고 인사를 할 때뿐 아니라 술에 취해 갈지자로 걸을 때도 늘 당당했다. 술에 취해 손을 들어 경례를 붙이며 크게 말하곤 했다. “꼬메시따아쓰!” 술이 더 취하면 크게 웃으며 갑자기 정색을 하곤 “아스딸라 비스따 베이베!” 라고 말하곤 했다. 김언니가 하는 말은 스페인어였다.
 
스페인에서 6년간 학교를 다녔다 했다. 그 누구도 김언니가 어느 과정을 공부했는지 알지 못했다. 김언니가 졸업을 했는지 무엇을 전공했는지 들은 자가 없었다. 김언니와 같이 살던 룸메이트는 김언니의 오래된 일기장에서 김언니가 한인교회에서 학생회를 이끌었다는 증거를 여럿 찾아내었다. 김언니는 언제부턴가 일기를 쓰지 않았고 술을 마셨다. 그건 룸메이트가 김언니를 만나기 전부터였을 것이다. 처음 만난 날에도 카스 한 병을 들고 와 따라 마셨다.
“나는 나발은 안 불어. 맥주는 컵에 따라 마셔야지.” 김언니는 맛있게 맥주를 마셨다.
햄버거를 나르고 스테이크를 굽는 저녁이 끝나면 김언니는 짧은 치마 유니폼에 붙은 돈주머니에서 천원짜리 네 장을 꺼내 바에 올려놓았다. 바텐더 여자는 아무 대답 없이 카스 맥주와 시원한 맥주잔을 내어주었다. 딱 한 병을 마시고 김언니는 옷을 갈아입었다. 가게를 나서 높은 언덕을 올라가 다른 바에 도착했다. 담배를 물고 춤을 추다가 다시 바에 앉아 카스맥주를 마셨다. 언제부턴가 김언니는 500cc 맥주 한 잔과 조니워커 레드를 같이 시켰다. 조니워커 레드 한 샷이 술이면 생맥주는 안주였다. 집열쇠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같이 사는 룸메이트에겐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동생은 매일 저녁 집에 있었으므로, 집 열쇠는 없어도 그만이었다.
 
“김언니! 신발은?”
검은 조끼를 입은 나이트 웨이터가 김언니를 불렀다.
김언니는 술이 너끈히 취한 듯 커다란 눈을 끔벅거렸다. 길게 풀어헤진 웨이브진 머리는 아주 까맸다. 이마에 손을 얹더니 씨발…이라고 읖조렸다. 웨이터는 더 말을 걸지 않고 김언니를 가만히 보았다.
김언니가 맨발로 언덕을 올라갔다. 웨이터가 옆에 선 사내와 김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뭐라고 말을 했다. 길가에 나와 있는 많은 사람들이 김언니를 알았다. 아무도 김언니에게 신발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멍하니 김언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왓쎱?!하고 웃으며 지나가는 흑인들도, 알 수 없는 언어를 지껄이는 백인들도 김언니가 휘청대며 팔자걸음으로 가는 모습을 우스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언니가 언덕을 올라 맨 꼭대기 작은 샤시문을 열었다. 이목구비가 아주 조밀하고 작고 예쁜 여자가 굵은 파마 머리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형광등이 밝게 켜진 바에 앉은 여자가 김언니를 빤히 보았다.
 “미친년. 신발은 어쩌고?!”
 “씨발…” 김언니는 탁자위에 엎드렸다. 담배를 피우던 여자는 카스 맥주 한 병과 맥주컵을 하나 꺼냈다. 엎드린 김언니의 앞에 앉은 여자가 맥주잔에 맥주를 따랐다.
밖에는 소란스런 음악소리가 들렸다. 김언니는 코를 골기 시작했고 여자는 잔에 따른 맥주를 마셨다.
2014. 6.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