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는 독서서클이 있는데 비밀서클이고 학교에서는 알아서 안되는 일이라 했다. 한 학년당 네 명을 뽑는데 선배 중 누가 너를 추천해서 찾아왔으니 내일까지 결정을 해서 답을 달라고 했다. 별 일은 아니고 한 달에 한 번정도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지만 전교조 문제로 교장이 예민할 뿐이라고 했다. 선배는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갔고 나는 “선택받았다”는 느낌이 좋았다. 의식화라고 말하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고 노태우랑 전두환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며 김대중에 대해서도 잘 모르던 수준이었다. 그저 나는 이 사회가 많이 잘못되었고 이 학교도 무척 잘못된 채 굴러가고 있다는 것만 아는 정도의, 막말하는 년에 불과했다.
듣기로,
1989년 전교조가 시작되어 교사들이 해직되고 파면당할 때 내가 다닌 여고의 선배들은 까만리본을 달고 등교를 하고 도시락을 복도에 내놓는 단식투쟁을 했다고 한다. 교무실에서 지정하는 반장, 부반장이 모두 사퇴하고 각 반마다 대표 두 명을 자율적으로 뽑아 (그럼 그 전에는 학교에서 임원을 지정했다는 게 더 이해가 안 간다) 30인회를 구성하고, 이 선배들이 교장실에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여러 가지 민주화과정을 요구했다고도 들었다. 그 때 많은 선생님들이 이런 투쟁에도 불구하고 파면, 해직 당했고 우리학교는 사립이라 더욱 쉽게 잘라낼 수 있었다. 이후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여상 교장으로 있던 학원장이 K대 명예박사과정중이라 K대 출신 석사생들이 대거 교사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풍문도 있었다. 사실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나 정말 K대 출신 교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거의 평균출생년도 1960년생. 당시 30대 초반. 아는 건 겁나게 많고 인문과목 선생들은 서로 바꿔서 수업을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지적능력과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활기찬 사람들이었다. 그 때 교사들과 함께 선배들도 학교를 짤렸는지는 몰랐다.
1992년 학교 담벼락을 공사하는 사이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어느 날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던 아이들이 히터를 틀었다. 새마을과장인 50대의 영어선생이 그걸 발견하고 교실에 있는 아이들을 모두 복도에 불러세웠다.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따귀를 맞았다. 저 끝까지 한 대씩 때린 영어선생은 다시 돌아오며 한 대씩 때렸다. 그 며칠 전엔 어느 졸린 수업시간에 누구 노래 좀 듣자는 아이들의 성원이 있었다. 교사가 그걸 허락했고 복도를 지나가던 교장이 그 소리를 들었다. 교장은 벌컥 앞문을 열고 들어와 “수업 중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라고 소리를 질렀다. 교사는 그 자리에서 그냥 학생과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두 가지 일이 있고 난 뒤 어느 날 학교에 갔더니 책상서랍에 이 유인물이 있었다. 교장실과 교무실에는 뭉치로 뿌려져 있었다고 했다. 나를 불렀던 선배들 네 명이 한 일이었다. 후에 그들에게 그 날 밤의 무용담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몰래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불쾌했고 반장이었던 나는 전교 반장단이 모인 자리에서 교장이 얼마나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낼 수 있는지 정확히 봤다. 그 분노에 숨이 막혀 나는 공황발작 비슷한 걸 일으키며 쓰러졌다. 집안사정으로 자퇴를 했다가 겨우 다시 복학을 한 나에게, 다시 정학이나 퇴학이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건 옳은 일이었다. 뭘 선택할 기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쓰러지는 것 뿐이었다. 아이들에게 질질 끌려 양호실로 돌아갔고 미친 듯이 난리를 치던 교장은 며칠 후 나를 보고는 몸은 괜찮냐고 물어봤다.
다음 해 문학과목을 배우게 되면서 지금은 모대학에 문창과에 출강하는 안모씨가 문학선생이 되었다. 그 지엄한 교장 밑에서도 취해서 들어오는 날도 적지 않았던 그 양반이 어느 날은 술 냄새를 달큰하게 풍기며 들어와
“얘들아. 바다를 보고 싶지 않느냐. 바다! 바다! 아 동해바다! 동해바다로 가자!” 하더니 아이들을 모두 이끌고 학교 수돗가에 세워져 있던 스쿨버스에 애들을 태웠다.
관광가이드처럼 버스 앞에 선 문학선생은 “자, 이제 이하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이 버스를 타고 동해바다로 가는거야! 이하나. 뭘 부를거냐!”
“고래사냥?”
“그렇지!! 역시!! 그래! 우리는 동해바다로! 고래를 잡으러 간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 뿌우니이네에~ 열여덟 아이들 앞에서 열 아홉 내가 서른 서너살의 술취한 문학가와 함께 덩실덩실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노래가 끝나고 문학선생은 너무 심취한 나머지 신이 나서 지나가는 요구르트 아줌마에게 100원짜리 요구르트 48개를 사서 아이들에게 돌리고 자기도 하나 마셨다. 광란의 분위기가 멈추기 전에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버스 문을 두들겼다.
“선생님. 헉.헉… 선생님. 교장실.. 헉. 헉. 교장실.. 교장선생님이.. 헉헉. 지금 노래한 거 .. 이하나죠. 헉헉. 둘이 같이 들어오시라는데요. 헉헉.”
안선생과 나는 둘이 같이 교장실로 불려들어가 나란히 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교장은 나와 안선생의 중간지점으로 정확하게 교장명패를 던졌다. 안선생이 술이 취해서 몰랐던 모양인데, 그 스쿨버스는 교장실 창문 바로 아래 주차되어 있었다. 교장실에서 10분 넘게 욕을 먹고 나오는 길에 안선생이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안선생의 1미터 넘는 어깨가 무척이나 무거워보였다. 그 다음해에도 내 문학선생은 안선생이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동지의식을 가지고 문학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가끔 나에게 단편소설을 낭독시키고 본인은 잠을 자기도 했다. 좋다. 좋아. 잘 읽었어. 내가 읽는 건, 김유정의 동백꽃의 대사 “느 집엔 이거 읎지?” 이런 사투리와 적절한 성대모사였다.
<나무가 보내온 편지> 하명희작가의 소설을 전성원편집장의 소개와 양돌규선생의 소개로 읽었다. 나는 그들의 후배가 된다. 내 위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전교조집회에 앞장 서 있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9년, 중학교 2학년때 전교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우리 학교에서도 몇 명의 교사가 해직되었으나 너무 조용히 진행되었다. 등교투쟁도 있었으나 나는 학생회 부회장인데도 알 수 없었고 나는 전교조의 문제보다 학생의 자치권에 관심이 있었을 뿐. 간선제였던 학생회 임원들을 직선제로 돌리는 것에 집중하고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때 우리 학교에서 해직당한 교사 한 명이 전교조 총무로 인터뷰 하는 화면을 보기도 했다.
1993년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전교조집회가 있었다. 나는 우리 한뜻 친구들 여덟명과 함께 그 집회에 참석해 열심히 팔을 휘두르며 전교조노래를 불렀다.
보라 힘찬 우리의 깃발 / 당당한 우리의 선언 / 학교위에 높이 날리며 / 참세상 횃불 춤춘다. / 우리 흘린 피와 땀으로 / 참교육 곧게 세우고 교실 가득 가슴 한가득 / 폭압을 뚫고 가네 / 살아오는 아이들 손잡고 / 교단에서 거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교육 노동자 / 전교조 우리의 사랑 / 전교조 우리의 생명 / 참교육 승리 그날까지 전진하는 동지여 / 보라 푸른 조국의 하늘 / 솟구쳐 오르는 새 날 / 한라에서 백두까지 / 물결쳐라 전교조 /
그 때 누군가, 이게 마지막 전교조 집회라고 했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어찌되었건 나는 다음 해에 고3이었으므로.
한뜻에서 같이 활동하던 친구는 내가 고3이 된 해에 연세대에 입학했다. 1995년 내가 명동호프집에서 시급 2500원을 받으며 300평정도 되는 호프집을 헤집고 다니며 맥주를 나를 때 그 친구가 이른 저녁에 나를 찾아왔었다.
“나 한총련 탈퇴할려고.”
“왜.”
“나는 있잖아………… 이런 건 아닐거라고 생각했어. 왜 여기서도 권력투쟁을 하는 지, 나는 그게 이해가 안간다.”
친구는 혼자 앉아 맥주 몇 잔에 담배를 한 갑 몽땅 뽀개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 한총련을 탈퇴했고 그 다음해에 연세대 사태가 있었다. ㄷ여대 노래패에서 활동한다던 친구는 지금 뭘하는 지도 모른다. 다들 흩어져 그냥 애엄마로 사는 건지 아무도 뉴스에 나오지 않고 페북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생각이 났다.
잊었던 노래가락도 생각나고, 그 노천극장의 깃발들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되었는데 나는 뭔가 어설픈 시대에 발만 걸쳤다가 어설프게 밀려났거나 내가 뒤돌아 나왔거나 내 밥상에 밥그릇을 챙기느라 멀리 본 적이 없다. 그저 이렇게 책으로 다시 읽고,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추억만 하는 무력한 삶이다.
10대는 뭘 주도적으로 할래도 할 수가 없는 시기라 그냥 묶여서 노예처럼 산 게 분명하다.
아니라고 해봤자, 그 때 온전한 자기 선택이 어디 있었나. 무서운 일이다. 그게 습관이 되어버렸으니.
성인이 되기 전에 선택과 자기의사표시를 억제당한 채 자라나서 성인이 된다는 건 판단과 정서적 장애를 수반하고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말이다.
20대가 되어 성인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술 마시고 저임금 고노동에 기꺼이 투신하는 일이다. 20대는 너무 어려서, 또는 어리지 않아서 아무 것도 가다듬지 못한 채 바쁘게 뛰어만 다녔다.
좌절할만큼 좌절했다고 느껴서 자신감이 어느 정도 붙은 게 30대였다면, 그 때는 대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지 알 수가 없었고 어떤 날엔 신문지를 밟고 서서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고 발톱을 깎다가 멍하니 눈의 촛점을 풀어버리기도 했다. 오늘만 산다는 대사는 원빈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제의 일도 기억나지 않는 무기력에 있었고, 분명히 길을 잘 못 들어선 거 같다는 불안함, 삶을 더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공황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상처받은 것들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고 매일, 오늘 하루만 버티자고 눈을 감다가 마흔이 되어버렸다.
올 해의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은 내가 지난 만 39년간 저질렀던 혹은 믿어왔던 것들의 결과물이다.
끝을 맺지 못했던 일과
한 발만 걸치고 툭하면 내빼려던 도망자정신과
나를 봐달라는 유치한 일곱살의 고착과
돌이킬 수 없는 가족과의 결별을 애도하지 못한 일과
좋은 사람이 되게 위해 쉽게 지갑을 열었던 습관과
강인해 보이기 위해 뒤집어써서 아예 녹아 눌러붙어버린 플라스틱 가면과
소중한 것이 생기면 상실이 두려워 뒷걸음질 쳤던 일과
상처입은 고양이처럼 몸을 옹크리고 앉아 살갗이 짓무르도록 햛아대던 일들이
올 한 해에 모두 결과물이 되어 나타났다.
많은 사람을 만난 만큼 소중한 사람과 헤어진다. 하나의 가치를 버린 만큼 또 다른 생각을 줍는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기억도 나지 않는 산문을 다시 찾아 읽어야겠다.
멀리서 날아온 친한 동생을 만나기 위해 남산에 있는 모호텔에 갔다. 비행기 도착하고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그런 거 없이 그냥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방에 들어가 차 한 잔을 마시는데 그 비싸고 유명한 호텔방이 얼마나 클래식하던지.. 1980년쯤 되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로 수십년을 버티는 호텔임이 분명했다.
걸어서 남산을 돌아 명동까지 내려가 아주 오랜만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노점을 기웃거리며 뭔가를 주섬주섬 사기도 했다. 각자의 기억에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커피집에 들어가 커피도 한 잔 마셨다. 음악이 사라진 명동에서 우리가 다시 잡은 세월은 아마 12년이 넘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온 동생은 만날 사람이 있어 거기서 헤어지고 나는 가방을 호텔 로비에 맡겨두었기 때문에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올라갔다. 가방을 찾으면서 투숙객이 아니라 하니 찾아가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달라고 한다. 이름을 적고 전화번호를 적은 다음 주차권을 내밀어 동생방 호수로 얹어달라고 했다. 직원이 다섯 시간 무료주차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돌아서서 묵직해진 가방을 들고 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방향을 찾아보고 있는데 누가 어정쩡한 자리에서 나를 자꾸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정복을 입은 호텔 직원인데, 아까 가방을 찾는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고 회전문 앞에 서 있을 일은 없는데 가방 찾는 데스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보고 있으니 뭔가 이상해보였다. 가만히 쳐다보니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최근 들어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도 자꾸 잊는 통에 한 10초 정도, 정말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연두색 등산점퍼에 주황색 가방을 거의 둘러메다시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 사람은, 1995년부터 1997년경까지 내가 살던 서울역 뒤 동자동의 장학고시원에서 그 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이었다. 나보다 늦게 고시원에 들어와 나보다 일찍 고시원을 떠났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스물 여덟 정도 되었고, 고시원을 나가 고시원 바로 앞에 쪽방을 하나 얻어 살다가 차근차근 돈을 모아 월세방으로 나갔다는 것까지만 안다. 곱상한 얼굴이고 피부가 참 흰 사람이었데 그 당시에 그 호텔에서 벨보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 웬일이야. 세상에 아직도 여기에 있어?” 나는 반갑게 그의 팔을 툭 치며 인사를 했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서로 묻는 것은 뻔했다. 잘 살지? 결혼은 했지? 애 몇 살이야? 와 우리 몇 년만이지? 한 15년 됐나? 그래 15년 된 거 같다고 이야기하고 돌아나오니 15년도 더 된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 오래 있어. 25년 30년까지도 근속을 하니까. 오래된 사람들은 잘 안나가.”
평덕이오빠. 전라도 어디메에서 올라왔었다. 느릿하고 구수한 사투리를 쓰던 그는 말투는 조금 빨라졌고 머리숱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가 본 나는 피부가 매우 거칠어졌고 살이 많이 쪘겠지. 알아보기 어려웠을거다. 내가 가방을 찾으며 이름을 적지 않았으면 그는 알아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여기 있으니까, 커피 마시러 와.”
오빠가 그렇게 말했다. 반갑다고 하면서 또 보자고 하고 돌아나왔지만 나는 그에게 가방에 있는 명함을 건네지도 않았고 전화번호를 주고 받지도 않았다.
그런 시절이 있다. 나에게는.
내가 힘껏 밀며 버티는 거대한 벽. 고통과 가난이 가득한 영혼들이 아우성치며 나를 잡아채가려고 하는 거대한 검은 벽. 무너지면 절대 안된다고 내 등뒤로 힘껏 밀어대며 사람들 앞에서 하하호호 웃고 있는 거대한 벽. 그 시절의 사람들을 만나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그 벽이 다시 내 등을 후려치며 와르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벽.
많이들,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사는데 나 혼자 너무 멀리 도망온 것 같은 느낌. 죄책감은 아닌데, 내가 누군가를 배신한 것만 같고, 내가 너무 동떨어져 온 것 같고, 어딘가 모르게 빚을 진 것 같은 느낌.
말하자면, 가만히 서 있는 기차에서 혼자 내려 뚜벅뚜벅 걸었다가 운 좋게 누군가의 승용차에 무임승차를 한 것 같은 느낌. 절대로 나는 무임승차 하며 살지 않았는데 자꾸만 그렇게 느껴지는 불편함. 그리고, 내가 앞서 달려왔다는, 내가 남들보다 무언가를 더 얻었다는 오만함도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함. 더불어 밀려오는 불길함. 그 벽이 무너질까봐. 다시 그 때로 돌아갈까봐.
6층이나 되는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호텔뒤의 골목으로 우회전과 좌회전을 해서 맞딱뜨린 곳은 다시 그 서울역, 벽산빌딩 앞이었다.
아무리 돌고 돌아도, 과거는 다시 오고 또 재현되고 골목어귀에 숨어 있다가 어깨를 툭툭 친다. 낙엽 하나 떨어지는 무게에 놀라 죽을 수도 있고, 그것 참 곱다 하며 책갈피에 끼울 수도 있을텐데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호텔에 전화를 하여, 오늘 그 사람이 근무하는 날이냐 묻고 커피 한 잔 하러 가겠다고 그래서 “추억”이라는 걸 나눴을 때 내 벽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닌 탓에 한 살 어린 친구들과 동급생이었다. 학교를 4년 다니다 보니 유명해져서, 나름대로 편하게 살았다. 술담배를 하거나 일탈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교사를 어려워하지 않았고, 한 살 많은 나에게 선생님들도 나름대로의 대접을 해 준 셈이다. 고 3 때, 아침 7시 50분까지 등교를 해야 했는데, 학교는 월계동이고 우리집은 경기도 양주라서 새벽차를 타고 나가야 했다. 가을이 되어 급기야 담임에게 도저히 시간을 못 맞추겠으니 아침 자율학습을 빼달라고 통보했다. 나는 그런 애였다. 사정하는 게 아니고, 못 나오겠으니 처리는 당신이 맘대로 하시라고 선언하고 뒤돌아 나가버리는 애였다.
2학기에 들어서는 졸려서 살 수가 없었다. 야간 자율학습은 밤 11시에 끝나는데 새아버지가 매번 나를 데리러 운동장에 차를 대놓고 기다렸다. 11시에 월계동에서 출발하여 잽싸게 밟으면 집에 12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씻고 야식먹고 공부를 조금 더 하다 보면 2시가 넘어 잠들었고 아침에는 5시에 일어나야 학교를 갈 수 있으니, 나는 6시에 일어나 아침자율학습을 째기로 한거다.
그 날은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잘 못 일어나는 사람들이 우리집 여자들인지라, 그 날은 모두 다 늦잠을 잤다. 유달리 일찍 일어나는 새아버지도 그 날은 늦잠을 잤다. 새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도 동생도 같이 차에 탔다. 동생의 학교가 더 가까워 동생을 먼저 내려주고 차가 창동으로 들어설 때쯤, 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다리가 무너졌다고?”
조수석에 앉은 엄마가 라디오 소리를 크게 올렸다. 강북에 살아 강건너 가는 일이 드문 나에게 한강다리는 혜은이의 제 3한강교가 끝이었다. 그렇게 많은 다리가 있는줄도, 다리마다 이름이 다른 줄도 잘 모르고 지냈다.
8시가 넘어 학교에 도착하니 아침자습이 끝난 시간이었다. 나는 지각한 것은 생각도 안하고 교실로 마구 뛰어 올라가 한강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호들갑 떨며 아이들에게 전했다. 내가 시끄럽게 라디오 뉴스를 전하고 있는데 덩치 큰 국어선생이 들어와 내 뒤통수를 갈겼다.
“야. 이하나. 지각했으면 가만히 있어야지 뭐 이렇게 시끄러워 아침부터.”
“아 그게 아니고 지금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니까요오!!” 나에게 그 뉴스는, 희생자를 생각하지 않는, 일종의 쑈같았다. 걸프전의 생중계를 고스란히 본 나에게 재난과 사건사고소식에 사람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건 마치 게임 시뮬레이션 화면 같은 것이었으니까. 걸프전을 CNN으로 보면서 느꼈던 것. 폭탄이 떨어질 때 참 아름다웠으니까. 광활한 사막에 떨어지는 불꽃놀이, 나에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은 언제나 죽고 어디서나 죽게 마련이니.
“이 새끼가, 지각한 거 무마할라고 수 쓰고 있어.” 국어선생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나를 자리에 앉히려고 다그쳤다.
“아 진짜라니까요.”
고 3쯤 되면, 선생과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경이 되지 않나, 나는 앞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빨리 티비를 틀어보라고 했다. 교실에는 뒤통수가 뚱뚱한 브라운관 티비가 있었다. 티비 아래 서 있던 아이가 손을 뻗어 MBC를 틀었다. 비오는 한강에, 다리 상판이 아래로 뚝, 썰어낸 듯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쉬는 시간동안 티비를 틀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무 일 없는 듯 자율학습을 했다. 누군가는, “저 중에 고3이 있었다면, 좋겠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죽음은 교실에 언제나 가득했다. 우리는 햇빛 한 번 못 보고 매일 매일 도시락을 싸러 집에 다녀오곤 했으니까. 타인의 죽음과 또래가 학교 가던 길에 무참하게 아무 이유없이 생명을 잃은 일에 대해서 우리는 분개할 시간도, 울 정신도 없었다. 우리에겐 수능이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고, 이미 중간고사를 끝내고 내신성적을 정리할 때였을 뿐이다. 그 다음 해, 우리중 많은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내가 명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안타깝다거나, 슬프다거나, 억울하다거나, 누군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도, 하나의 쑈처럼 보였다. 나는 일주일 내내 그 뉴스쇼를 지켜보았고 전혀 슬프지 않았다. 잠을 설치긴 했고, 뉴스를 끄지 못했으나, 같이 울거나 뭐가 문제라거나,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게 보낸 20년의 세월을 지나, 20년만에, 세월호가, 그 세월을 관통해 다시 침몰했다.
도대체 배 이름은 왜 세월호라 지은 것인가.
묻어두었던 긴 세월동안의 공감하지 못했던 타인의 죽음과 고통이, 굽이쳐 휘돌아 거대한 해일이 되어 몰려오는 오늘이다. 성수대교 붕괴 후 20년, 2014년 10월 21일이 방금 지나갔다.
1.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노는 대부분 추측에서 벌어진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뻔할 때, 그 역시 내 생각이다.
그에게 묻지 않았다. 맞냐고. 내가 보기엔 거짓말 같은데 맞냐고.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다보면 모순을 찾을 수 없다. 대신 평정을 유지하며 관찰해야 한다.
추측은 추측을 낳고 눈덩이가 되어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대부분의 이런 분노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떤 것을 빼앗길까봐 빼앗기기 전에 두려워하다가 두려움은 인정하기 싫은 자아가 분노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겁이 나는 게 아니고, 이 분노는 정당한 나의 권리야!
분노가 정당한 권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작점이 추측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추측은 또 다른 추측을 낳고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져가니까.
추측과 두려움이 분노가 될 때 해야 할 일은 당사자와 대화를 시도하는 일이다.
분노를 표현하지 말고, 화가 나게 된 경위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 문제가 당신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니 나의 불안한 감정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냐고 묻는 것이다.
그래야겠다.
2.
삶이 어떤 전환점을 돌아갈 때 삶은 생명과 에너지를 가진 것이라 관성의 법칙을 가져서 쉽게 전환하지 못한다. 게다가 살아온 세월이 이미 30년이 넘었다면 관성은 습관이 되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에밀 시오랑이 말하길, 우리는 매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을 잊는 것이라 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때로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다. 원래 그랬으니까. 라는 말은 재난사고에만 따라붙는 말이 아니다.
한 생명의 삶에도 분명히 적용된다.
3.
가진 것을 내려놓으면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순간부터 다른 것들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던 그물에서 벗어나는 순간 공기는 상큼할 것이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다시 시큼털털하게 느껴지리라.
계속해서 나는 새로운 아침이라고 우길 필요가 있다. 이 골목의 어귀를 돌아나가면 낯선 것들이, 또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고향의 냄새가 가슴 깊이 찰랑인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4.
허무맹랑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성인이 된 지 꽤 오래되었다면 모든 일들은 당연한 귀결이다. 단지 내 생명의 관성과 탄성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다를 뿐이다.
신생아 목욕시키는 건 꽤나 귀찮은 일이다.
페친의 포스팅을 읽다가 나도 그게 참 두렵고 어려웠던 기억이 났다.
게다가 내 아이는 봄에 태어나 배밀이를 하기 전까지 뜨거운 여름을 보냈기 때문에 늘 땀이 흥건하여 매일 씻겨야 했다. 백일까지는 아이 아빠가 많이 씻겨주었는데 아홉살이 된 올 해 여름 끝물에 드디어 혼자 머리를 감게 되었다. 한 번 해보라고 시켰더니 곧잘 해내어 많이 칭찬해주었다. 오늘도 아이는 내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에 혼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로 잠들었는데 아무래도 감기가 걸릴 것 같아 자는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었다.
생각해보면.
딸아이는 어릴 때 제 할머니가 키웠는데, 나를 처음 만난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도 혼자 머리를 못 감았다. 머리는 긴데 혼자 감을 수 없다 하니 가끔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머리를 감겨달라 했다. 머리도 혼자 묶을 줄 몰라 머리도 묶어줘야 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그 때는 그런 속내를 들켜선 안되는 시기였기에 입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열 한 살이나 되어 혼자 감지도 못하고 묶지도 못하는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내가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희한한 케이스라고 생각했던 거다.
어릴 때부터 무수하게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여고를 나오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어릴 때 몇 살까지 엄마가 머리를 감겨줬는지 말해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내 이야기를 먼저 해버리는 바람에 아이들이 입을 닫았을 지도 모른다. 나도 선명하지 않은 기억은 조각조각 여기 저기 처박혀 있다가 가끔 이런 자라닮은 솥뚜껑들을 보고 문득문득 떠올라 조합이 된다. 사람마다 우울해지기 쉬운 케이스가 있다고 하는데, 그건 아마 이렇게 많은 기억들을 쪼개놓고 살다가 한 번에 조합을 하면서 오늘만 사는 게 아니라 과거도 같이 살아가는 뇌구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맘에 들거나 안 들거나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 유전자적 구조이거나, 성장과정의 수많은 이야기들 때문이거나. 그건 내가 부모를 택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동생이 아직 태어나기 전이니 나는 네 살이었거나 동생이 태어난 해라면 다섯 살이었을 거다.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일을 하다가 일찍 들어온 엄마가 나보고 혼자 샤워를 하라고 했다. 그 때 우리 집은 큰 방이 두 칸, 작은 방이 한 칸에 안에 욕조도 있는 목욕탕까지 딸린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중에 가보니 연립주택과 유사했지만 그 때는 그런 구조를 모두 아파트라고 불렀다. 나는 목욕탕에 들어가 혼자 할 수 없다고 징징거렸다. 무슨 연유인지 욕조엔 물이 한 가득이었는데 아마 당시엔 단수가 되는 일도 종종 있었거나 물을 받아놓고 쓰는 문화가 습관이 되어 있어서 욕조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씻어야 하는데 머리를 감을 수 없다고 징징대기 시작하자 동생을 임신해 배가 어지간히 나왔던 엄마가 벌컥 컴컴한 목욕탕에 들어와서 왜 혼자 머리를 못 감냐고 소리를 지르더니 내 머리채를 잡고 욕조안에 깊이 처박았다. 그리고 이제 감으라고 했다.
욕조 옆에는 2조식의 무지개 세탁기도 있었는데 나는 그 세탁기통에도 한 번 들어간 적이 있다. 엄마가 벌컥 들어서 집어넣고 죽여버린다고 했던 건데 그게 같은 날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칠곡계모사건이 터졌을 때 아이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는 기사를 보고 아 그래도 우리 모친은 버튼을 누르진 않았어. 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상한 것은 나는 그런 기억이 매우 선명한데도 불구하고 물에 대한 공포도 없고, 욕조에 대한 공포도 없고, 세탁기나 폐쇄된 공간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있을 만한데 없다는 게 더 이상하다. 건강하다는 얘기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몇 번 안되기 때문이다.
엄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외롭게 자랐고 외롭게 살았다. 청춘도 외로웠고 결혼을 해서도 외로웠다. 아버지와 엄마는 서로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하지 못했고 같이 살면서도, 헤어져서도 엄마는 외로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애초에 그닥 외로운 사람도 아니고 그다지 부정적이거나 우울한 사람도 아닌 듯 하여 엄마와 헤어지고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만 엄마의 문제는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채 칠십을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가 헤어지고 난 뒤 혼자서 쭉 산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서 딸 둘을 키우는 그 짧은 기간마다 모든 화를 나에게 풀었다. 엄마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돈벌이도 못하고 현실에 보탬도 안되는 쓸모없는 년들”이라는 개념이었다. 나는 그 개념을 당시에 알 지 못해 싸우지 못했고 그저 지속되는 매타작에 반복하여 저항할 뿐이었다. 매번 한 번도 지지 않고 바득바득 소리 지르고 반항하는 큰 딸년인 내 덕분에 진이 다 빠진 모친은 내 동생은 돌아보지도 못했다. 스물 한 살이 되어 독립해서 나올 때까지 지속되던 폭력도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그게 내가 여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생명력이라는 생각이 오늘에서야 든다. 엄마가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들면 나는 도망을 치거나 손으로 막거나 일일이 따져 대들거나 골목을 튀어나가거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저항했다. 주눅이 들면 사람이 이상해진다는 얘기를 듣고 공황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쇼도 해봤는데 돌아오는 건 두 배의 저주와 두 배의 폭력이었을 뿐. 게다가 우리 모친은 여고 때 육상선수 출신이라 내가 온 동네를 뛰어다녀도 금방 잡혀오기 일쑤였다. (이 부분에선 좀 웃어야)
마흔을 넘겨, 혼자서 80년대에 딸 둘을 키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은 이제, 엄마의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결국 본인이 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단 한 번도 진실한 모습을 들여다보거나 마음의 거울을 보거나 단 한 명의 타인 앞에서도 그 속내를 꺼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으려고 한다.
나의 생명력이 끝없는 엄마의 매타작에 대한 저항에서 기원했다면, 엄마의 생명력은 끊임없는 원망과 저주에 기원한다. 그래서 당신은 주변에 은은하게 피해를 주면서도 매우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불사조처럼 백살은 너끈히 넘기고 살 것같은 나의 모친이 언제쯤 기운이 빠질 지, 언제쯤 생명을 다 할 지 알 수 없다. 과연 엄마의 장례식에 누가 올까 궁금하다. 아직도 엄마는 욕망이 끓어 넘쳐 “돈벌이도 못하고 자기 삶에 보탬이 안되는 훼방꾼
같은 년들”의 기본개념은 곤고하다. 그 생각은 내가 스스로 물려받아 가끔 나를 자학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되곤 한다.
부모가 아이를 바라보는 생각은 고스란히 눈동자를 통해 전달된다. 엄마와 손잡고 걸어본 적 없어도 나는 엄마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바라봤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타인앞에 내 딸일 때는 지상최고의 여성이 되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당신 인생을 망친 주범이 된다. 엄마가 나에게 들었던 각종 매와 연탄집게와 빗자루, 등산용 지팡이 따위는 오늘도 가끔 나를 내려친다. 여전히 나는 저항하고 있다.
그게 아니지 않냐고. 엄마 생각은 분명히 틀린거라고. 아닌 건 아닌거라고. 돈이 없으면 안 먹으면 되지 왜 선생 김밥을 엄마가 싸야 되냐고. 생일파티 안해도 된다고. 나는 죽어도 외상으로 두부를 사올 수 없다고. 여전히, 오늘도, 내일도, 아마 그 다음날도, 엄마는 아직도 손에 매를 들고 있고 나는 여전히 그 매를 어떻게 하면 낚아 채서 던져버릴까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가까운 곳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한다.
초등학교부터 한 동네에서 살던 녀석들과 겨울밤 거의 매일 모여 삼치구이에 소주를 마시던 생각을 한다. 꼭 삼치를 시켜달라 하고 꼬닥꼬닥 졸던 녀석이 있다. 집에 가서 자라고 욕지거리를 해도 있다 갈꺼라 했다. 그 때 우리는 서른을 몇 년 남겨두고 있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았으나 늘 취해서 헤어지곤 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만나면 퇴행현상을 보인다. 우리는 늘 별 일 없이 만나서 별 일 없이 헤어졌다. 퇴근길에 집 앞에 와서 나와. 라고 말하면 그냥 나가던 시절이다.
비오는 저녁 운전은 해야 하는데 아이는 전화를 해서 끊지 않는다. 나와, 하면 나가던 시절에서 무려 14년 정도가 지난 저녁이 되니 차를 돌려 동네 친구에게 간다. 동네 친구와 남의 영업집에서 삼치를 구워 소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 내일을 생각해서 동네 친구의 까페에서 히비스커스차를 마신다.
내일따위 없던 시절에서 아주 멀리 돌아왔다. 그 먼 길을 돌아돌아 다시 동네친구를 만나게 되는 비오는 밤, 길거리에 풍선이 굴러다녔다. 흰색과 연분홍색 고운 풍선 네 개가 하나로 묶여 있다. 어느 아이가 잃어버렸을지, 아니면 행사장에서 굴러온 것인지, 누가 힘겹게 얼굴이 벌개지도록 불어댄 풍선인지 기계로 한 방에 부풀린 풍선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왠지 저 풍선엔 누군가의 숨이 담겨 있어 차로 치이면 안될 것만 같다. 우회전으로 들어오는 차도 풍선이 신경쓰이는지 속도를 낮췄다. 풍선을 불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던 때를 굽이굽이 돌아오면 풍선을 부는 게 노동이 되는 세월이 기다린다. 그래도 마음속엔 풍선을 함부로 터트리면 안된다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누군가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풍선이 빗속에 굴러다닌다. 누군가의 숨결이 잦아드는 그 밤에도 그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