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엔 생애사쓰기

 

바늘을 가지고 하는 짓이니 바늘질이라고 썼을 뿐이다.
않다, 에 왜 ㅎ이 붙는지도 이해할 수 없고, 돼와 되는 왜 꼭 그렇게 다른지. ㅋㅌㅍㅎ은 별로 발음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 ㅋ이 붙으면 어렵다. 부억은 왜 부엌이라고 쓰는가, 갔다, 왔다, 했다에는 꼭 쌍 시옷인가.
나는 휴대폰을 열어 “한국인이 잘 헛갈리는 맞춤법”을 찾아 왠지, 웬지, 돼, 되, 않고, 습니다, 읍니다, 를 설명해나갔다.

“한국어는 주어와 서술어로 되어 있지만,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요.
했어. 라고 해도 알아듣죠. 하지만 내가. 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묻죠. “왜 말을 하다 말아?””
할매들이 웃었다.

선생님, 이라고 불렀더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지청구를 들은 다음 나는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학생여러분, 이라고 하면 활짝 웃는다. 월요일 생애사쓰기 수업시간. 초등학교 과정을 마친 수강생들은 한 문장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힘들어했다. 글쓰기가 어려워서라기 보다, 나는 목울대까지 꽉 차오른 이야기들이 아우성이라 그렇다고 느낀다. 말 나올 곳은 한 곳인데 수백가지 것들이 튀어나오려 겨룬다. 나는 송창식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아 에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너무 많은데. 할매들이 웃는다.

그새 혼자 부지런히 글을 써 온 사람들이 노트를 내민다. 한 분은 일기장이라며 초등학생 노트 네 권을 비닐에 담아왔다. 나는 이번 주에 이 글을 읽을 예정이다.

살아온 이야기들이 대부분 비슷하다.
이 교실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저학력의 여성노인들은 비슷하게 살았다.

어릴 때 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가 보내주지 않았다.
집에서 동생을 보거나 조카를 돌봤다.
오빠가 장가를 들면서 올케언니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조카를 줄줄이 낳고 올케언니를 도와야 한다고 막내인 나를 학교 보내지 않았다. 혹은, 전쟁통에 아버지는 죽고 엄마는 유복자를 낳았는데 엄마가 일을 하러 가야 하니 막내를 업고 혼자 울었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나무를 하고 나물을 캤고, 목화솜다래를 뜯어먹었다.
참외나 복숭아서리도 했지만 늘 배가 고팠다.

집에는 늘 어쩔 수 없는 가족이 있었고 스무살이 갓 넘어 결혼을 한다.
얼굴 한 번 안 본 사내의 집으로 간다. 결혼 전에는 시집만 가면 팔자 펼 것처럼 어른들이 얘기했지만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사는 장남이거나, 참전용사다. 집안에는 상이군인이 있거나 알콜중독자가 있다.
시어머니나, 시아버지는 폭력을 휘두르거나, 고의적으로 사람을 괴롭히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술을 마신다. 식구가 많으면 열 둘 정도 되고, 아침에 일어나 새벽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면 점심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농사일을 하고 나면 저녁을 차려야 한다.
남편은 잘 지내다가 어딘가에 몰입한다. 밖으로 나도는 남자들은 도박을 하거나 여자를 찾아 다닌다. 집안에 머무는 남편들은 이유가 있어서 때리고 이유가 없어서 때리거나, 집안에서 술을 마신다.
그 와중에 꼬박꼬박 아이는 들어서는데, 한 둘쯤 뱃속에서 죽거나, 태어나서 죽는다.

살자고 집을 나오거나 살자고 남편과 헤어진다. 또는 술에 쩔은 남편이 먼저 죽기도 한다.
아이들과 살다가 연탄가스 중독 사고를 겪고, 아이들 중 한 둘은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살아보려고 갖은 일을 다 한다. 파출부도 해보고 행상도 해보고, 청소일도 해본다. 직장을 구하면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하고 도시락을 대여섯개씩 싸고 버스를 타고 새벽일을 나갔다.

다 늙을 때까지 같이 사는 남편이 있으면, 그 남편은 이제서야 빨래도 좀 하고, 밥도 가끔 한다.
아이들은 대부분 제 밥벌이 하며 살고 손주들도 잘 자란다. 속에 있는 말을 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옛날보다 훨씬 낫다고 자부한다.

패턴이다.
목화솜다래, 어린 동생을 업어 키우는 일, 학교를 못 가는 일, 배가 고팠던 것, 억울하게 죽은 가족, 폭력을 휘두르는 가족, 알콜중독, 도박중독, 연탄가스, 파출부, 행상, 내 가게.

일할 곳이 없던 여성들이 세월을 견뎌온 일.
그나마 어찌저찌 집 한 칸 마련하고 지금은 공부하러 다니니 좋을 것 같지만 공부하러 오는 것도 매번 부끄럽다.

저기에 가면 국문을 깨쳐준다는데, 이 동네에서 30년을 살아서 내가 글자를 모르는 걸 아무도 모르는데, 다들 내가 여고 나온 줄 아는데 행여 나 때문에 아이들이 망신당하지 않을까, 아직도 쩡쩡한 시댁식구들이 창피스럽다고 하지 않을까.

“말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말할 수는 없어. 그런데 말하고는 싶어. 그러니까, 선생님만 보셔. 내가 다음 주까지 써올테니까.”
“저는 비밀을 많이 간직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시간이 있다면 한 사람마다 10시간씩 이야기를 들어도 부족할 판이지만, 글쓰기 수업이니까, 어떻게든 한 문장이라도 써보자고 한다.
힘들다고 얼굴이 울상이 되고, 손이 떨려서 쓸 수가 없다고 해도, 다 괜찮으니까 한 번만 써보자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이런 것도 써보네요.”라고 맨 앞줄에 앉은 분이 말했다.
“저도 많이 배워요. 그리고 저는 돈도 버는 걸요.” 라고 말했다.

학교를 못 가고, 공부를 못 한게, 억울하다면 모를까.
왜 자꾸 부끄럽다는 걸까. 속이 터진다.

 

2019.7.2.

[생애사쓰기] 목화솜 다래

– 나는, 아버지 어머니 잘 몰라요.
어려서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해서, 그냥 사방 팔방으로 떠돌아 다니느라. 그래도 잠깐 우리 집에서 살 때가 있긴 했지. 나는 그나마 우리 큰 이모하고 좀 친했고. 식구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도 없고, 그래서 사촌집으로 갔는데 우리 사촌 오빠가 그렇게 나를 때렸어요. 뭐 달라고 해서 안 해준다면 때리고 그렇게 걸핏하면 나를 때렸어요. 오빠한테 맞으면 이웃집 언니한테 갔는데 그 언니가 나한테 참 잘 해줬어요. 언니네 집에 뒷방이 하나 있어요. 거기 숨어 있으라고 하지. 그러면 언니가 고구마 같은 거 삶아 주고 그랬어요. 그러다 그 언니 엄마한테 걸려서 욕 먹고 그랬죠. 왜 자꾸 쟤 받아주냐고. 언제까지 그럴거냐고.
그래서 열 한살에 제주도를 나왔어요. 나와서 내내 남의 집 살이하고.

– 전쟁이 전쟁이.. 우리 엄마가 막내를 전쟁통에 낳았어요. 내가 그 때 여덟 살이었고. 우리 엄마는 산후조리고 뭐고 없었어요. 그냥 한달만에 일을 나간 거예요. 그러니 애기를 어떻게 해. 내가 봐야지. 내가 애를 업고 다니느라, 나도 앤데, 여덟 살짜리가 애를 업고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 손가락 가운데 마디가 퍼렇게 멍이 들어. 깍지를 하도 껴서. 포대기고 뭐고 애기띠도 없죠. 내가 그때는 엄마 원망을 많이 했는데, 나도 이제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 나이가 됐단 말이죠. 이제 나도 곧 엄마를 만나러 가겠지. 그러면 내가 가서 엄마하고 또 잘 살아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 나는 우리 집이 그렇게 못 살지도 않았어요. 가끔 쌀밥도 먹었단 말이죠. 그런데 왜 나를 학교를 안 보내줬을까.
위로 우리 오빠가 하나 있고 언니가 둘이고 내가 막내딸인데, 우리 아버지가 난봉꾼이라 내가 두 살때부터도 집에 없었어요. 계속 딴살림을 했어요. 언니는 둘 다 여우고 오빠가 이제 장가를 가서 집에 들어왔어요. 올케언니랑 오빠랑 나랑 우리 엄마랑 사는데, 오빠네 조카가 여덟이예요. 애기들을 볼 사람이 없다고 나보고 애를 보라고 했어요. 내가 조카들을 키우느라 학교를 못 간 거예요. 나도 학교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우리 오빠가 했던 말이 너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학교 가고 싶으면 니 아버지한테 가서 얘기하라고. 그 말이 나는 너무 슬펐어. 왜 나한테 그랬는지.

– 우리 언니는 수단이 좋았어. 어려서부터 자꾸 어디서 그렇게 쌀을 퍼와. 그럼 그거 가지고 엿 바꿔먹으러 가지. 쌀뿐이 아니야.아무튼 뭘 그렇게 어디서 가지고 왔어.
나중에도 잘 사셨겠어요.
어 잘 살았어요. 그 딸들도 잘 살고요.
지금도 계세요?
우리 언니 치매걸렸지.

자꾸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들 한다. 글이 맥락이 안 맞는다고 답답해했다. 모두들 쓰다가 학교 못 간 억울한 이야기로 빠져나간다. 복숭아 서리, 수박 서리, 먹고 살만한 제일 부잣집 밭에서 한 두개쯤 가져와도 괜찮던 시절이라는 건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얹어주는 공유의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목화솜이 되기 전에 먹으면 아주 맛나다고 했다. 내가 아카시아 진달래 사루비아는 먹어봤다 했더니 그런 거보다 훨씬 맛나다고 했다.

수업을 하면서 나는 눈가가 자꾸 뿌얘졌다.
목울대까지 차오른 학교 못다닌 서러움을 언제 풀어야 할까.
가계도를 그리고 생물학적 가족사를 풀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남의 집 살이”를 했다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되었고 “애보개” 하느라 자기 집에서도 살림살이를 했던 사람도 서넛이었다.

“글만 쓰면 눈물이 나.”
어쩌면 그건 글의 내용이나 지나온 세월에 묻힌 많은 이야기와 동시에, 한 글자 두 글자 꾹꾹 눌러 적으며 “내 이야기”를 써보는 것에 대한 애닮픔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19. 6. 10.

[생애사쓰기]성수종합사회복지관 수업을 시작하며

내일부터 성수종합사회복지관에서 초등문해교육을 마친 어르신들과 생애사쓰기 수업을 시작한다.
초등문해교육을 마친 분들과의 수업은 처음이라, PPT를 손 보다가 접었다. 대신 다음과 같은 프린트물을 만들었다.
<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복지관에서 붙인 프로그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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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보내는 편지>> 수업에 함께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글쓰는 사람 이하나라고 합니다.
앞으로 열 번, 여러분과 만나게 됩니다.

저는 2013년부터 어르신들 뿐 아니라, 중년층, 장애인가족들과 함께 생애사쓰기 수업을 해왔습니다. 생애사라는 것은 나의 삶을 돌아보는 역사를 뜻합니다. 이 수업을 할 때마다 많은 분들이 울고 웃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 순간도 어렵지 않은 날들이 없었고 쉽게 지나간 시절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이룬 게 없다.”
“내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다.”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모두 허무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한 성공한 삶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가난은 왜 부끄러웠을까?
우리는 역사에서 늘 비껴나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열심히, 정직하게 살았다고 믿습니다.
특히 자기 삶을 쓰겠다고 모이시는 분들은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꽃을 키우듯 일궈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이제 열 번의 수업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우리 삶의 아름다운 고갱이들을 캐내 보겠습니다. 생애사쓰기 수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19.6.3.

성수동 1가

성수동1가.
복지관이 있는 건물은 여러 기관들이 모여있다.

재활의원, 아트홀, 종합사회복지관, 구립성수도서관. 1층에는 서가가 있어서 공공도서를 꺼내볼 수 있고 2층에도 큰 서가가 있어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다. 북까페도 있어서 커피 한 잔 마시며 모임도 하고 책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이 건물로 가는 길은 조금 특별한데, 길 한쪽에 쿠팡 물류센터가 있다. 택배 차량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오늘 이 복지관에 가는 길에 마늘을 파는 트럭을 지나쳤다. 그리고 복지관 앞에 세 대의 트럭이 서 있었다. 한 대의 트럭은 과일을 팔고 있었고 팔을 벌린 사람이 세 사람쯤 서 있으면 될 만한 거리에는 다섯 켤레에 3천원 하는 양말을 파는 트럭이 있었고 그 한쪽 끝에는 찹쌀도너츠를 파는 트럭이 있었다.

수업은 1시 시작인데 할매들은 11시부터 나와 이미 2시간동안 글자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30분 일찍 도착해 10분 전에 교육장소의 복도로 간다. 작은 틈새공원에 벤치가 비어 있어 잠깐 바람을 맞고 앉아 있었다.

찹쌀도너츠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은 남녀였다. 얼핏 보기에 나보다 어려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부부일까? 또는 남매일지도 모른다. 혈연관계일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득의 크고 작음을 떠나 무척 고될 것이다. 하루종일 바깥바람을 맞으며 길에 서서 일하는 것은 정말 고단한 일이다. 나처럼 모니터 앞에 앉아 자판이나 두들기는 족속들은 견디지 못하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길에서 주전부리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한다. 나는 범접하지 못할 삶의 부지런함에 경탄한다. 새벽에 일어나 식재료를 준비하고 이른 아침 차를 끌고 밖에 나왔을 것이다. 남은 식재료는 오래 두지 못할 것이고 그날 준비한 분량을 다 팔지 못하면 손해가 날 것이다. 화장실도 참고, 밥 먹는 것도 참고 일을 해야겠지.

남대문시장의 기업은행 앞에 가면 호떡을 파는 부부가 있었다. 2년전일이다. 그 부부가 거기서 호떡장사를 한 지 꽤 되었다고 들었다. 재작년 거기서 호떡을 사며 건빵이가 남자에게 물었다. 식사는 하고 일하십니까. 남자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점심은 거른다고 했다. 준비한 호떡을 다 팔면 집에 돌아간다고 했다. 여자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내내 호떡을 빚고 있었다. 침 삼킬 시간도 없어보였다.

고된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건, 식구이기 때문이겠지. 식구란 그런 것이니까.

소박한 거리에 앉아서 나는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워진 나머지 포켓몬고를 열고 체육관 배틀을 시작했다. 외면하는 것은 편리한 방법이다.

이 거리의 어딘가에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살고 있는데, 조만간 같이 점심을 먹자고 청해야겠다. 근처에 형부식당이라고 5천원짜리 카레를 만들어 파는 집을 봤는데, 무척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 것만 같았다. 부지런히 새벽부터 음식을 준비할 사람들에게 돈을 내고 밥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삶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허망하고 가소로운 일이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노동하지 않는 자가 인생을 논해도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나의 안온한 삶이 언제나 부끄럽고 부끄럽다.

 

2019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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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네 

여름이 낮아질 때 – 성수종합복지관 첫 수업 기록

– 선생님, 이제 우리 가르치려면 큰 일 났어요.
– 아주 속이 터지실거예요.

어르신들이 킥킥대고 웃었다.
– 아이고 선생님이 엄청 젊으네.

팀장이 지원서류와 저작권동의서를 묶은 종이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빠르게 지원서류를 훑었다. 1931년생부터 1952년생까지, 무려 20년이나 차이나는 사람들이 “어르신”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노인 수업을 할 때마다 이런 것들이 꺼림칙하다.

베트남 참전용사가 자유총연맹을 가면 625참전용사들과 세대차이가 나서 너무 힘들다고 했던 얘기를 기억한다.
1931년생이면 해방 때 이미 알 거 다 알고 기억할 거 다 기억하던 사람이고, 1952년생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만 기억할터였다.

모두 얼마 전에 초등교육과정을 마쳤다고 했다.
준비해 간 오늘의 교육자료를 나누자 모두들 입을 달삭이며 소리내어 읽었다. 참가자들은 오전 10시부터 모여 2시간동안 한글교실 수업을 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점심도 굶고 연달아 4시간 수업을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초등교육과정을 끝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며 정말 훌륭하십니다, 라고 말하다가 코끝이 찡해졌다.
주책없이 솟구치는 것들이 있다.

PPT에 담았던 내용을 모두 입으로 풀었다.
– 그렇게 하면 선생님이 너무 힘드실텐데.
맨 앞에 앉은 분이 말씀하셨다.
– 저를 좀 보세요. 에너지를 좀 써야할 것 같지 않으신가요?
할매들이 와르르 웃었다.

더듬 더듬 글을 읽는 사람들의 출석도 부를 겸 내가 써 간 글을 한 문장씩 돌아가며 읽었다. 더러 더듬거렸고 더러 틀렸다. 어느 정도의 문해력인지, 어느 정도의 글쓰기가 가능한지 알아야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글 잘 쓰는 사람은 종이를 앞에 두면 마구 휘갈겨 써내려 갈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조선 – 기록의 나라에서 시작해, 민간의 기록이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시니어들의 삶의 노하우가 축적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대통령의 재임순서를 나열하자 받아 적는 분도 있었다.
나는 원고지를 나눠주고 자신에게 편지를 써보자고 권했다. 30분 정도 걸렸는데 대부분 원고지 1매를 못 채웠다. 기본 글쓰기의 순서가 전혀 안 잡혀 있었다.

– 자, 선생님들, 저를 보세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시자고요.
누구나 종이를 받으면 당황해요. 하루종일 소설을 쓰거나 글을 쓰는 작가들도 빈 종이만 보면 도망치고 싶습니다. 한 번에 후다닥 글을 써내려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 못 봤어요. 맞춤법, 띄어쓰기, 작가들도 모두 힘들어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죠? 틀려도 된다. 맞춤법 틀리면 어떻게 할까요? 네. 고치면 돼요. 띄어쓰기 틀리면 어떻게 할까요? 네, 고치면 됩니다. 대신,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는 연습을 해봐요.
일단 생각을 먼저 하는 거예요.
상상을 해보시죠.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모두 받아줄 수 있는 사람, 우리 엄마도 안 해줬던 거, 우리 아버지도 못해줬던 거, 내 동생, 내 자매, 내 자식, 남편, 아무도 못해줬던 거, 다 이해하고 받아주는 친구 한 명.

자리에 앉은 참가자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없어. 라는 뇌까림도 들렸다.

네 없어요. 없죠. 그런 사람은 없죠.
그러니까 상상의 인물을 하나 만들어봐요. 다 되는 사람 딱 하나 있다고.
“글을 쓰면 되겠네요.” 한 사람이 말했다.

– 네,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자구요. 그래서 하나씩 이야기의 순서를 정해보는거예요. 어떤 이야기부터 할까? 일단 자초지종을 설명해야겠죠? 이야기의 순서를 잡아보죠. 메모를 하는 게 좋은데, 꼭 글자로 메모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림도 되고, 기호도 괜찮아요. 나만 알아보면 돼요. 그리고 그 순서에 따라서 한 문장씩 쓰는 겁니다.

그런 사람 없지.
그런 사람이 어딨나.
그 말이 귀에 남았다.
엄마 또래인 참가자들이 “선생님 강의가 정말 정말 재미있네요. 아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라고 환히 웃어주었다. 나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고개를 꾸벅 숙여 맞절을 했다.

수업 시간마다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어려웠다. 평촌도서관부터 나는 수강생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기로 했다. 중국에서는 Mr의 의미로 선생을 붙인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선배라는 말보다는 그 말이 좋다. 여성노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어머니인 것은 아니다. 혹시 자식을 먼저 보냈으면, 뼈 아플 말이기도 하다.

– 글쓰기를 하시다가, 어느 날 도저히 못 쓰겠고, 눈물이 그치지 않거든, 여기 복지관 선생님께 이야기해서 상담을 받으셔야 해요. 누구나, 그런 거 하나쯤 있잖아요. 평생을 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거. 있으시죠? 한 두 개쯤 있으실거예요.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글을 쓰시다보면 그게 떠오를 거예요. 정신력이 강하고 나약하고가 아닙니다. 그냥 내가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잘 봐야 해요.
겨우 빠져나온 웅덩이가 있어요. 동굴이 있고, 무시무시한 바위가 있었어요. 잘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글을 쓰다가 어느 날 그게 떡 하니 내 길을 막을 거예요. 그 이야기가 내 뺨을 막 때릴 거예요. 그럴 때는 잠깐 쉬고, 그 동굴을, 바위를 가만히 보세요. 내가 이걸 다시 잘 볼 수 있나. 생각하셔야 해요. 내가 중간에 그만두면 선생님한테 미안하니까, 복지관에 미안하니까. 아뇨.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여기서 두 시간동안은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 나 자신만 생각하세요. 이기적으로 하세요. 숙제 안 해서 선생님한테 미안하다,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쉬는 시간에는 오십이 넘도록, 육십년을 살도록, 글자를 쓰지 못해서 남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살았노라고, 은행도 피해다니고 관공서도 피해다녔다고, 멋지게 생긴 참가자가 말했다.

나는 칠판에 글을 네 줄 썼다. 이런 식으로 써보시죠 오늘은.
땡땡아,
그동안 수고 많았다.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그렇게 잘 헤쳐왔니. 나는 내가 너무 기특하고 예쁘다. 고맙다. 땡땡아. 이제 여기서 내가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 글로 한 번 써보자!

나는 참가자들이 쓴 원고지를 모두 걷어 집으로 가져왔다. 10회의 수업이 끝나는 날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10번은 충분하지 않지만, 태양이 더 뜨겁고 낮게 내려오는 이 여름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시원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수 십년을 글자를 쓰지못하고 읽지 못한 삶의 무게를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문맹율이 기록적으로 낮은 나라에서 이 사람들은 수 십년을 모른 채로 버텼다. 반지하 방의 푸념따위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다.

– 성수종합복지관 첫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