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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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지는 시간이 늦어진다.

하루가 추웠다. 나만 추웠겠는가. 그도 추웠을 것이고, 당신도 추웠을 것이고, 우리 모두, 조금씩 시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따듯한 것이 생각나서 나는 설렁탕을 사러 간다. 검은 나의 차를 타고 어스름이 내리는 거리에, 네온사인이 들어오는 광경을 본다. 가족들과 밥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이 식당에 삼삼오오 앉아 있기도 하고 야근을 하기 전 허기를 달래려는 남자들이 신발을 반쯤 벗은 채 앉아 설렁탕을 훌훌 먹고 있다.

외롭다고 말을 하면 그 뒷모습이 초라해보일까봐

쓸쓸하다고 말을 하면 내 신발의 뒷축을 감추고 싶을까봐

아프다고 말을 하면 앞선 자의 눈이 아련해 질까봐

오늘도 가면을 쓰고 하루를 지내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긴 한 숨을 쉰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그 모든 대답은 나에게 있는데 애써 들여다 보는 시간이 엄습해오는 걸 느끼는 바로 그 때가 어스름.

침대맡에 앉아 일기를 쓰는 그 한적한 시간에 물밀듯이 밀려드는 안타까움에 대하여.

그럴 나이와 그럴 때가 따로 있다는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밀어내면서

최백호의 신보를 뒤적거리는 밤들이 이어지더라도,

그래 내일은 또 무슨 할 일이 산적해 있다는 것이 다행인 시절.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여름은 멀리에 있다.

 

뒤틀리는 무릎의 통증을 느끼며 삐딱하게 서서 창밖을 바라본다. 휴대폰을 꺼내 그 어스름을 담는 시간. 그저 내가 기억하기 위해, 내 눈보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시간. 그런 시간들이 촘촘히 이어져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나이를 먹고 아이는 자란다.

2013. 4. 10.

 

내일의 전쟁, 오늘의 일상

내일 세상이 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가.

뭐 영국에서 염려됬는지 연락이 왔었다.
BBC 는 매일 매일 북한 소식 전하느라 정신이 없고, 미국은 CNN도 난리를 치는 모양이다.

나는 일단 전쟁은 나지 않는다. 라고 믿고 있긴 하다. 그 이유는

1. 본국보다 영국과 미국에서 더 수선을 떠는 게 매우 의심스럽고
2. 북한의 결속력이 그렇게 전력투쟁 할 만큼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3. 늘 사고치고 강짜 부리는 건 조직이나 사람이나 비슷한데 그들이 원하는 건 정말 전면불사 자폭이 아니고 뭔가 다른, 매우 유치찬란한 것일 경우가 많으며
4. 북한은 남한은 솔직히 쳐주지도 않고 자기들의 적이 미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싶고
5. 북/중의 관계상, 디펜스 21에서 논평한대로 한국 수도권에 중국인이 너무 많아 외교분쟁 가능하다. 여기 한 표 주고 싶고
6. 지금 전쟁분위기와 한반도 위기를 극도로 끌어올리면 양쪽 정부가 자리를 잡는데 매우 유리한 것이, 한국도 미국도 북한도 모두 정권 초창기라는 점이고
7. 동아시아내의 우경화는 필연적이고 이로 인해 권력자들은 우경화의 초석을 다지는 게 매우 중요하고
8. 이 국면에 조용하게 팔짱끼고 있는 한국정부의 태도도 무지하게 의심스러우며
9. 나는 음모론을 믿는 편이고
10. 전쟁 따위 생각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내일의 불확실한 전쟁보다 오늘의 나의 하루가 훨씬 더 중요하다.
나는 불확실한 전쟁보다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이 훨씬 중요하고,
내 아이의 알림장이 더 중요하고,
이 새끼가 왜 매일 줄넘기 하기를 안 지키는가도 중요하고
내일 있는 딸래미의 모의수능도 중요하고
가계부에 어디 빵꾸가 나지 않았나 챙기는 게 중요하고
중요한 내용이 들은 내 하얀색 USB를 어따 처박았는지 찾는 게 중요하고
내일 오전에 있을 강좌 진행이 중요하다.

나는 내일보다 오늘이 중요하고 오늘 몇 시에 자서 내일 몇 시에 안 피곤하게 일어날 수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데. 그건 나에게 오늘이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남편이 그런 말을 했었다.
젊은 아이들이 비전이 뭐냐고 묻는다고.
그러면 그는 “오늘은 버티는 게 내 비전이다” 라고 한다 했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전쟁처럼 치뤄야 할 일들이 많은 경우, 내일을 생각하기 어렵다.
당장 밀려닥치는 전화, 처리해야 할 일, 여기저기서 손내미는 요청, 챙겨야 할 일상들. 그런 것들이 복잡다단하고 회오리가 몰아치는데 언제 내일을 생각하나.

나이를 먹을 수록 걱정이 많아진다고 한다.
오늘 동네 어떤 언니는 애는 학원가서 저녁이나 되야 오는데 심심해 죽겠다고 카톡을 보내왔다. 심심해 죽겠는 일상을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지내본 적이 없어서 그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나이를 먹을 수록 걱정이 많아진다는 건 오늘이 한가해진다는 얘기일게다.
오늘이 한가하니 내일을 생각하고, 내일을 생각하다 보니 어제도 떠오르고 그러는거겠지.

괜시리 쓸쓸해진다.
오늘이 한가해서 내일의 불확실한 전쟁을 걱정하는,
많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나는 전쟁위기보다 더 가까이 와닿는다.

2013. 4. 10.

견디기 힘든 시간

어찌보면
나라는 사람은 참 여러가지를 못 견디는 거 같다.
학원가의 즐비한 버스와 이중주차가 된 승용차들도 못 견디겠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제 밥그릇만 챙기는 꼴을 보는 것도 못 견디겠고
내 새끼가 나약하게 징징대는 꼴도 못 견디겠고
내 개가 인도에 똥싸는 것도 못 견디겠고 (어차피 치우는 거지만 인도엔 흔적이 남은 경우가 있어서)
오늘같이 황사와 미세먼지 많은 공기도 못 견디겠고
내가 던진 말실수도 못 견디겠고
책 안 읽고 보낸 일주일도 못 견디게 싫다.

남들은 다 괜찮은 모양이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고치고 싶고 따지고 싶고 뒤틀고 싶어지는데 남들은 괜찮은 모양이다.
좁아터진 커피집에 사람이 꽉 들어차 공기가 텁텁한데도 문을 꽉꽉 닫고 있길래 문을 열었더니 누군가가 다시 닫았길래 내가 그 곳을 빠져 나왔다. 다들 괜찮은가보다.
나는 안 괜찮은데.

지금 내가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서른 한 살에 낳아 나와 서른 한 살 나이차이가 나는 이 자식이 10시까지 학원에서 코박고 있다가 좀비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청춘을 보낼텐데, 난 그게 화가 나서 못 견디겠는데 다들 괜찮은가보다.

부정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입시미술은 절대 뽑히지 않는다는 원장의 말이 거슬려서 가슴에 와서 박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가 보다. 나는 머리가 띵한데.

… 상당히 까다롭고 예민한 건데
생긴 게 반전이야..
어쩌면 좋지.;

날씨는 왜 좋고 지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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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었어. 아기 기저귀에 쓰는 노란고무줄이 있었어. 그걸로 가속페달을 묶어놓은 버스를 상상해봤어? 내가 학교 다닐 때 타고 다니던 마을버스는 그런 버스였어. 그 버스가 기울어질 정도로 아이들이 많이 탔어. 그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던 길에 시비가 붙으면 버스기사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욕을 했어.

“씨발 내가 너 따위 죽이고 깜빵 한 번 더 가면 돼”

똑같은 교복을 입고 깔깔대던 열일곱 열여덟 아이들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순간이었지. 그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이었어. 순수했고 착했어. 순조롭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이었고, 청천벽력같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안정된 성품의 부모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다수였어. 모험심이 많거나, 책임감이 적은, 바람같은 사람들과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보다 그 반대편이 사는 데는 훨씬 수월했겠지. 몰아치는 폭풍을 헤치고 나갈 에너지를 잘 모아두었다가 자기를 가꾸는 데 쓸 수 있거든.

바다에 배가 가는데, 자꾸 폭풍이 몰아치면 무슨 기운으로 고기를 잡겠어. 근데, 날씨가 계속 좋으면.. 고기도 잡을 수 있고, 하늘도 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할 수도 있거든. 폭풍만 만나면서 살면, 그런 여유는 없지. 하루 하루 버티고 견디는 게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그래서 가정 환경이 안정적이어야 공부를 잘한다고 말하기도 하는거야. 맨날 집에 뭐가 박살나는데 뭔 정신으로 책을 들여다보나. 그런 집구석에서 아이들은 하루하루 숨죽이며 버티는 거거든. 그 와중에 공부를 하는 애들은, 유별난 독종이라고들 하는데, 뭐 꼭 그게 독종이라 그러겠어? 그건 그냥 그 아이가 버티는 방법인데 사회에서 좀 좋아하는 방법을 고른 것 뿐이잖아. 책에다 코 박고 있으면 집중이 잘 되는 뇌를 가지고 태어났나보지. 그게 뭐 꼭 훌륭하다고 말하긴 어려운 거 아니겠냐고.

그렇게 폭풍이 쉴 새 없이 불던 날이 있었어. 이번엔 정말 큰 건이 터진거야. 그 때 내가 열일곱살이었는데. 와 정말 살다 살다 결국 이런 일도 터지는구나. 싶더라고. 욕이 절로 나와. 씨발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되지? 내가 뭘 잘못 했는데? 난 하라는대로 다 하고 살았잖아. 내가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했냐, 집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했냐. 열일곱의 나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고 지각도 안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 게다가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세 번이나 읽었다고. 그 때 욥의 심정이 뭔가 생각했어. 와 정말 좆같겠구나. 씨발.

내 생일이 8월 말인데.

그 날 학교에 자퇴서를 쓰러 갔지. 담임선생님이 무슨 일인지 다 알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 인정받는 아이였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내년에 만나자고 힘내라고 다 격려를 해줬어.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그 마을버스를 탔어. 나는 사복을 입고 있었지. 나는 학교에 소속된 아이가 아니니까. 사복을 입고 싶었어.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아니라고 완강하게 외치고 싶었던 거 같애. 내가 이만저만한 그지같은 일이 생겨서 학교에 못 다니게 됬다구요!! 라고 나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원망을 퍼붓고 싶어서.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난 아무것도 잘 못 한 게 없는데! 내가 왜 자퇴서를 써야 되냐고!!

그건 지금 생각해도 충분히 억울할 만한 일이거든.

그래 그 마을버스를 타고 오는데.. 버스 안에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거야. 자리가 비었더라고. 애들은 다 학교에 있었거든. 게다가 내 생일인데 말야. 날씨가 겁나게 좋은거야. 진짜 허벌나게 좋더라고. 햇빛이 막 미치게 내려쬐고 말야. 8월 말, 내 생일 즈음엔 주로 태풍이 오지. 그게 참 이 엿같은 팔자를 반영한다고 생각하던 나이였는데. 와 .. 날씨는 왜 좋고 지랄. 약올려?

날씨 좋으면 놀러가고 싶잖아. 사람들의 표정도 좋잖아. 길에 웃는 사람들도 많잖아. 나는 미치겠는데 말야. 내 세상은 무너졌는데 햇빛이 짱짱해. 태양이 비웃는 거 같은거지.

그건 니 문제야. 나는 멀쩡하단다.

슬펐지. 그래서 그 날 어디 쪼그리고 앉아서 뭘 적었을 거야.

내 세상이 무너지는 날, 누군가는 빨래를 널고 세탁소에 옷을 맡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누군가가 태어나고 누군가가 죽기도 한다.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은 회사에 가고 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사겠지. 수박을 사오는 누군가의 엄마도 있을 것이고 아이스크림을 베어먹으며 골목을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다. 내 세상은 무너졌는데, 그건 내 세상만 무너진 일이었다.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간다. 비록 내가 사라진다 해도, 세상은 아무 일 없이 돌아갈 거다.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어..

비참하지. 나 없이도 조직이나, 세상이나, 내가 속했던 사회가 돌아간다는 게 진짜 짜증나잖아. 그게 얼마나 슬퍼. 나 없으면 죽을 거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인간은 그냥 그렇게 먼지같은 존재야. 근데 그걸 깨달았는데도, 그 때 한 생각은. 아 나는 정말 무용지물. 여기서 끝났거든.

근데..나는 무용지물이다 – 에서 모든 인간은 다 그렇지만 그래도, 무용지물은 아니다. 이런 고차원적인 생각으로 발전하는데.. 20년이 걸린 거 같애. 뭘 억지로 해서 티비에 나오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그 경박한 욕심을 버리는데 말야.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걸까. 한심한가? 근데 또 그것도 아니거든. 뭐가 한심해. 인간은 원래 다 한심해.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래. 더 한심한 인간도 다 잘 살아. 밥 잘 먹고 잘 자고 똥만 잘 싸고 잘 살아.

날씨를 뭐 어떻게 할꺼야.

날씨 좋다고 하늘에 돌 던지면 나빠지나.

아니면 돈이 많아서. 내 기분이 맞는 날씨를 찾아 비행기를 타고 가나? 갔는데 거기 날씨가 바뀌면? 그럼 말짱 꽝이잖아.

기분이 나빠. 날씨 좋아서 더 나빠. 날씨가 나빴으면 좋겠어. 비가 주룩주룩 왔으면 좋겠어. 그럼 뭐..기다려야지. 비 오는 날까지. 뭘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오늘은 집에 가서 적는거야.

와..오늘은 정말 좆같은 날이었습니다. 씨발. 오늘을 최악의 개같은 날로 정하면, 내일은 덜 개같겠지요. 하하하. 잠이 오나. 잠이 안 오겠지. 안 오면 뭐 못 자는거지 뭘 어떻게 하나. 꼭 자야되나. 하루 안 잔다고 죽지 않아. 그냥 내일 좀 피곤할 뿐이야. 세상에 .. 그렇게 큰 일은 없어. 다 어떻게 보면 그냥 먼지같은 일이야. 할매들한테 어떻게 사셨나요? 물어봐봐. 그 새털같이 많은, 개털보다 많은 날들이 한 줄이 되거든. 그 해에는 애를 낳았지. 2년이 넘어가고 그 해에는 둘째를 낳았지. 아마 큰 애가 아팠던가.. 안 죽었으면 다 별 일 아닌거가 되는 거 같애.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도 않잖아. 안 죽으면 됐지. 뭐. 살아있으면 언젠가 억울하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혹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살려두는 게 나을 거 같애. 언젠가 붙잡고 말해줘야지. 너 때매 뒈져버리는 줄 알았어. 알고는 있냐? 라고.

2013. 3. 15.

 

근데 그 때 그렇게 억울했는데 말야.

그 때 내가 꼭 그렇게 억울해하지 않을 수도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아? 자퇴서를 안 쓰는거야. 버티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거든. 근데 나는 내가 더 비참해지는 방법을 택한거지. 누가 알아줄까봐. 그냥 훈장 하나 달고 싶었던거야. 그래서 훈장을 달았지. 트라우마. 내 트라우마. 내가 골라서 내 가슴속에 새긴거야. 그냥 학교 버티고 다녔으면.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혹시 알아. 학교에서 장학금을 줬을 수도 있어. 그 일은 생각보다 무척 금방 해결됬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 때 왜 자퇴서를 썼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 그냥 내가 그런 인간이구나. 깨달은 걸로 만족이야. 어쨌거나 쉬는 동안 공부를 좀 해서 성적을 올리고 다음 해에 당당히 재입학을 했고 학교도 잘 다녔으니까. 그게 막 가슴아파할 일은 아닌거 같애. 내가 그냥.. 모르는 길이 있으면 일단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지랄같은 성격때문이겠지 뭐. 내 트라우마, 내 상처ㅡ 그런 거 말야. 뭐든지, 일단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왔을 때, 결국 어느 방의 문을 여는가는. 내가 선택하는 거더라고. 등 떠밀려 들어갔어도, 나올라면 나오는거지 뭐.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아닌 이상.

비오는 밤

기억이 잊혀지는 게 구슬프다.
내가 잊어가는 것도 구슬프다.
빗소리는 더 이상 양철지붕을 때리지 않는다.
곱게 화단에 내려 앉아 값비싼 향나무를 적시고 비싼 개밥을 먹고 사는 개들의 똥무덤을 적실 것이다.

하나씩 잊혀져 가는 게 구슬프다.
온 몸을 감싸던 외투를 벗는 계절이라 슬프다.
태양이 빛나고 꽃이 피더라도 답답하던 옷에 배어 있던 체취가 그리운 날이 있더라.
갑자기 눈이 왔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날이 흩어진다.

올 겨울은 너무 길었지. 올 겨울은 너무 힘들었지, 그래서 빨리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꽃은 기다릴 수가 없네.

그 겨울의 시작부터 믿기지 않았으니까. 결국은 그래도 겨울은 가고 봄은 오는 건데, 이렇게 쉽게 가고 이렇게 쉽게 와도 되는 건가..
이렇게 쉽게 가고, 이렇게 쉽게 올꺼면 왜 그렇게 잔혹했나.. 싶은게지.

곧 저 멀리 남쪽 마을엔 산수유가 핀다는데, 삼중창 유리밖에 잘 들리지도 않는 빗소리가 들린다고 우기면서, 갈 봄 여름없이 꽃피네 꽃피네. 라고 중얼중얼.
개 한마리 애기 하나 드르렁 거리는 애매한 계절의 비오는 밤이다.

2013. 3. 13.

도시의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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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내 신변을 환기할 필요가 있었다.

스트레스 저항력이 약해지는지, 이제는 몸의 증상으로 치환되는 일이 너무 잦아지는 중이다.
사소한 일을 마치고 나서 갑자기 진땀이 나고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까지 아파져 급하게 휴대폰 어플을 켜고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의 극장에 영화예매를 했다.
바지만 다른 것으로 갈아입고 외투를 챙겨입고 부랴부랴 어두워 지는 밤길을 달려 극장까지 오는 길에 운전을 조심해야겠다 는 생각을 계속 했다. 귀향이 시작되었는지 도로엔 차가 그득했다.
하늘은 푸르스름하고 땅은 네온사인과 차량불빛으로 온통 붉었다.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서너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제 엄마에게 쉬- 쉬- 하며 까치발을 들었다. 귀엽게 생긴 그 아이를 보고 “아이고 어떻게 하지?” 하며 말을 건넸다. 아이는 수줍은 듯 제 엄마 뒤로 숨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극장 매표소가 보이는 장소에서 애기엄마가 두리번 거리기에 화장실 방향을 알려주고 예매해 둔 표를 기계에서 뽑아냈다.
영화는 두 시간일 것이고 저녁은 아직 먹지 않았으니 간단하게 팝콘판매대에서 핫도그와 사이다를 시켰다. 음식을 파는 애들은 하나같이 날렵하고 얼굴이 작고 어린 남자아이들이었다. 군대도 안 갔다온 거 같은 소년도 청년도 아닌 사내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팝콘이며 탄산음료를 뽑아냈다.
핫도그는 내가 예매한 영화 홍보용 포스터로 둘러 싸진 멋드러진 지함에 들어 있다. 그 박스를 한참 들여다 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끊임없이 영악하고 영민해야 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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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앉은 의자 앞에 두 어린아이가 앉아있다. 초등학교 2-3학년이 되었을까. 두 아이는 남매 같기도 하고 쌍둥이 같기도 하다. 아이들은 아이패드 미니 정도 되는 작은 타블렛을 들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영화 광고판 앞으로 가서 섰다. 여자 아이는 검은색원피스 스타일의 패딩코트를 입었고 남자 아이도 검은색 패딩 다운 자켓을 입었다. 이 시간에 영화관에 아이 둘만 있는게 이상하게 느껴져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핫도그 지함을 바라보다가, 또 영화 안내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을 바라보았는데 저만치 서 있던 아이들의 움직임이 묘하다. 남자 아이가 울고 있다.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찍어누르고 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달래는 듯 하다. 확실한 건,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의 아이 둘이라는 것이다. 방치, 방임, 이런 단어들이 생각났다. 주변의 사람들은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두 아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아이들에게 다가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부모들은 어디에 간 것일까. 아이들은 이 시간에 저 비싼 기기를 들고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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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관에서 영화가 끝난 모양이다. 부모로 보이는 남녀가 나오며 아이들을 끌어 안았다. 여자 아이가 제 아빠로 보이는 파란 점퍼를 입은 덩치 큰 남자에게 팔을 휘둘렀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고 항의하는 목소리가 바로 내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들렸는지 들리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 아이는 연신 눈물을 닦아 냈다. 퍼머를 한 단발머리, 고운 얼굴의 엄마가 사내 아이를 끌어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울고 있었다.
남들이 볼까 얼른 눈물을 훔쳤다.
왜 내가 울고 있는가.
2013. 2. 8.

무섭다는 말

예민한 아이는 새벽녘 제 부모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으면 곧잘 잠에서 깬다.
새벽 2시 50분.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가 에미를 부른다.
엄마 저기 뭐가 있어.
엄마 저기 뭐가 이상해.
빛에 비친 그림자였거나, 안방에 숨어 들어온 늙어가는 개였을게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를 다독여 다시 재우고 나도 모르게 아이가 가르킨 방향을 외면한다.

무섭다는 말.
언제 해봤을까.
기억이 없다.

아이 무서워.
아이 두려워.

이 아이는 나를 대신해, 무섭고, 두렵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는데,
내 기억속의 나는 당췌, 무섭다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어 본 적이 없다.

아이가 묻는다.
엄마는 세상에서 뭐가 제일 무서워?
글쎄…
한 참을 생각해도 싫은 건 있어도 무서운 게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견고하게 만들어 온 밖에 내세우기 위한 자아는 이제 세월의 더께를 입어 더욱 더 곤고해진다.
딱딱하게, 움직이지도 않고, 석고상에 이끼가 끼듯.
무섭다는 말, 해 본 적도 없이, 이제는 무섭다고 말하기도 쑥스러운 나이를 먹었다.

그 모든 것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스스로 무장하여 갑옷을 입혀 대문앞에 세워놓은 저 것이.
이제는 나인 척 하고 수십년을 살아서, 자기가 나 인 줄, 내가 자기인 줄, 나도, 그것도 착각하고 있다.

경리장부 20년 주물러, 자기가 대표이사 인 줄 아는 경리직원처럼.
그렇게 되어버렸다. 주객의 전도.

무섭다는 말.
누구에게 할까.

어느 봄밤, 아이를 재우고 나와 벚꽃 사진을 찍는 나를 마주쳐, 술에 취한 채 흐느적대면서, 옆에 한 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그 날의 당신을
이 밤, 생각한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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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1.

2004년 12월 1일 -자전거 고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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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일

이 날.
이 날 아마 날씨가 약간 춥긴 했고,
며칠 째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을거다.
과외를 가는 길이었고,
길을 잘 못 들었는데 자전거마저 고장이 났었지.
그래서 길에서 만난 자전거 수리공에게 자전거를 고쳤는데, 아마 그 수리공이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을거야.

근데 그 터무니없는 값이라는 게 12위안이거나 20위안이었을게야. 그 때 아마 스타벅스 커피가 30위안이 좀 안됬나 그럴껄.

이 날도 분명히 시엔시아루 스타벅스에서 6시간 정도를 뭉개면서 외국인 유학생이라는 특권 아래서 무료 시음료도 몇 잔 받아먹고 그랬을지도 몰라.
이 날이 아니었다 해도, 그 전 날 그랬거나, 그 다음날 그랬거나. 아무튼 스타벅스를 도서관 삼아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전거 수리공과 흥정을 하는 거지. 한 잔의 커피값도 안되는, 그 저녁의 노동에 대해서.
손톱밑의 때는 평생을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호적은 분명히 없을 게 뻔한, 자기 이름이나 겨우 쓰면 다행인. 그 남자와 길바닥에서 말야.

그리고 슈주허를 넘으며 생각했겠지.
나는 대체 뭔가.
나의 돈은 무엇이고, 저이의 돈은 무엇인가.

가난이 내 영혼을 잠식하면,
나는 사기꾼이 될까 거지가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전거를 밀었을거야….

도시, 한 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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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재우다 잠들었고
새벽 2시 반이 넘어 깼다.
내가 자고 일어나면 무조건 밖에 나가는 줄 아는 개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길의 짧은 산책

아무도 없는 새벽,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나간 게 이런 풍경.
모두가 벽으로 둘러쳐진 아파트, 똑같은 풍경이라니

참으로 재미없고 정떨어진다.

아파트 생활 6년.
다시 또 생각한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2013.1.30.

어느 추운 밤 이야기

1.

딴따라나 재주꾼이나
그가 사는 곳, 그가 머무는 자리가 바로 작업실이고 무대다.
어디에 가면 화양연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바닥을 치는 자존감의 발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산이 좋지 않으면 저 산도 좋지 않다.

2.
할머니는 언제나 오만가지 재주 있는 년이 밥굶는다 했다. 오만가지 재주 중에 하나씩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3.
한 밤의 도로엔 바스러진 유리조각과 신속히 달리는 렉카차가 있다. 멍하니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과 이 나라의 척박함에 진절머리 내는 청춘이 있다. 그래도 내일은 낫지 않을까 하고 믿어보고 싶지만 대부분의 내일은 어제와 비슷했다. 그저 그 중에 맘에 들었던 어제를 꼼꼼히 복기하고 재현하는 일로 내일과 모레를 채워보는 것이다.

4.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저 듣는 자들이 있다. 세상에 수없이 넘쳐나는 문자들이 나무를 베어낸 종이로 책이 되어 팔린다.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가. 초대형 서점에 서서 수없이 많은 무명씨들의 감정의 배설물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나 역시 어딘가에 끊임없이 싸지르고 있다.

5.
도시는 끊임없는 배설의 공간.
사람들은 악귀같이 꾸역꾸역 욕망을 먹고 짐승보다 격하게 싸지르며 밤을 탕진한다. 멍하니 있는 시간은 비생산적이고 스스로를 컨베이어벨트에 올린 채 끼륵끼륵 기어간다. 욕하고 째려보고 분노를 배설하여 허기지면 위산과다를 못 참고 또 꾸역꾸역 음식을 마신다. 모두 나와 같이.

6.
태생이 그런 것을 어쩔 수 없다는 섭리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신들은 광폭한 절대 권력을 가졌다. 호메로스가 음모론의 기초라는 얘기를 들었다. 오이디푸스의 재앙은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었다는 말이 있다.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절대 선이 아닌 이유가 그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잘나고 용맹했다. 그게 그를 망쳤다. 공자의 知天命과 오이디푸스의 저주는 닮아있다. 그리스의 난잡한 신들은 지금의 재벌과 권력자의 모티브다. 인간이 사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 가장 현명한가. 그 답에 적어도 한 발은 가까워진 거 같기도 하다.

7.
움베르트 에코는 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은행원이 되어서라도 파리에 살고 싶다” 고 말했다 한다.
그 말을 열 번쯤 곱씹어 본다.
은행원이 그닥 나쁜 직업 같지도 않다. 수많은 군상을 관찰하고 퇴근은 제 시간에 할 테니까.

8.
더럽게 피곤한 밤이 깊어간다.
적어도 내게 삶은 언제나 치열해야만 했고 그래서 그게 정당했다.
그렇지 않게 살던 시절이 가장 괴로운 나날이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늘 조금은 부족하고 외로워야 행복했다.
문 닫기 직전의 마지막 손님으로 앉은 라면집에서 추위에 김이 서려 허얘진 안경을 내려 놓고 있자 그니가 말했다.
“너 중국에 있을 때, 안경 바꿔야 되는데 돈이 없다고 했었잖아. 진짜 불쌍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돗수가 안 맞아 눈이 피곤해도 아마 나는 행복했던 기억만 남긴 게 분명하다. 그 때는 가난했고 조금 외로웠다.
오이디푸스의 저주와 공자의 知天命 과 그리스 신들의 교만한 장난질이 안경에 서린 김 같았다.

– 어느 졸라리 추운 날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