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1호실부터 14호실
2층, 2호실부터 28호실
스물 여덟명이 머리위에 머리를 머리 옆에 머리를 포개고 살던 고시원 자리는 작은 놀이터가 되었다.
벌어먹고 사는 일은 매일 목숨을 거는 일,
수명을 내놓고 돈으로 바꿔오는 일,
그 흔적을 덮어버린 깔끔한 어린이 놀이터라니,
도시개발은 내 삶을 부정하고
나의 지난한 세월을 모욕한다.
2015. 11. 3. 저녁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18-37이었던 자리.
그는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되면 사진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자기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다고 했다.
그는 나를 어디선가 보았다고 했다.
나보고 TV에 나오지 않았냐고 물었고
서울역 광장에서 본 거 같다고도 했다.
자기는 노숙자라고 말했다.
자기같은 사람을 많이 찍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는 인터넷에 얼굴이 알려져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오늘은 서울역 지하도에서 자면 된다고 했다.
어찌할 수 없던 바위 앞에 앉아
깨끗한 신발을 신고 술을 마시던 그에게
나는 만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그는 오늘도 내일도 여기 있을 거라고 말했다.
주업무가 아닌데 주업무처럼 5월을 보낸 학교 수업 몇 가지.
도망다니고 싶지만 도망다닐 수 없는 입장, 그렇다면 여기가 가장 낮은 현장이라 생각하고 놀다 오는 마음으로 나간다.
같은 안양 내에 있는 몇 개 중학교, 몇 개 초등학교, 몇 개 고등학교, 기관의 프로그램을 신청한 아이들, 다양한 안양의 아이들을 만난다.
같은 학년이라도 학교에 따라 다르고, 같은 학교에서도 아이들에 따라 다르다.
당연히 마음에 걸리는 건 아프고, 약해 보이는 아이들이다. 잘 훈련되어 자기검열에 완전히 적응된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아프다.
몇 군데 학교를 돌아보며, 경제적 조건이 아이들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자꾸 커진다.
안양의 초등학교 3학년,
어떤 아이는 엄마의 승용차로 학원가에 있는 학원에 가서 비이커와 플라스크를 놓고 라면의 나트륨 함량을 구하고, 비싼 교구를 들고 로봇만들기 대회에 나가기 위해 학원가 센터를 드나든다.
어떤 3학년은 원어민 선생과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거나 방학이면 해외여행도 다녀온다.
어떤 3학년은 아직 한글을 다 떼지 못했다. 건강하지 않은 식습관으로 살이 찌고 벌써 가슴이 나온다. 빨지 않은 실내화가 꼬질꼬질하고, 자주 화를 낸다. 친구들이 자꾸 자기를 쳐다보며 수근거려서 매일 매일이 속상하다.
어떤 3학년은 하루종일 학원을 돌다가 형과 라면을 끓여먹고 엄마가 오기 전에 잠이 든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조건과,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은 욕심과, 한 푼이라도 더 아끼고 싶은 불안과, 한 푼이라도 더 투자하고 싶은 허영이 만나 도시를 만든다.
술렁거리는 공기가 아이들의 영혼을 잡아먹는 것 같다. 두렵고 무섭다.
외로운 아이와,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와,
늘 화가 나 있는 아이들,
이 아이들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떤 노인이 될 것인가.
2015. 5. 29.
며칠 전에 본 풍경이다.
집 앞에 나서면 좁은 4차선 도로가 있고 500미터쯤 나가야 16차선쯤 되는 대로가 나온다.
내가 어딜 가든 항상 대로앞에서 우회전이나 좌회전을 하게 마련이고 대로 바로 앞에 횡단보도가 있다. 신호등이 잘 안 보일 때가 있고 여기까지는 동네골목이나 마찬가지라 늘 천천히 움직인다.
가끔 버스가 뒤에서 엄청 빵빵거리지만.
저녁이었다. 7시쯤 되었다. 사방이 완전히 어두웠고 저녁의 동네마트는 북적거렸다. 나는 그 날 우회전을 하려고 뼈다귀해장국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일단 멈췄다. 보행신호가 시작되었고 마트에서 장을 본 사람들이 길을 건넜다.
그 중에 자전거를 탄 꼬마아이가 있었는데 엄마 아빠와 함께 마트에 다녀오는 듯 했다. 아빠의 손엔 마트 비닐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횡단보도에 못 미쳐 아이가 자전거 안장에서 미끄러졌다. 요즘 나오는 어린이 자전거엔 짐칸이 없다. 아이의 궁둥이가 주루룩 빠지면서 바퀴 바로 위의 플라스틱 받침대에 엉거주춤하게 걸쳐졌고 아이는 중심을 잃었는데 신호등이 짧다보니 애 아빠가 애 손과 자전거를 같이 잡고 질질 끌기 시작했다. 애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일찌감치 건너 호주머니에 손 넣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보고 있었다.
애아빠는 왼손엔 마트봉투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중심 잃은 자전거와 아이를 한꺼번에 질질질 끌고 있자니 아이가 드디어 꼬라지가 났다.
으앙! 하고 한 쪽 다리가 하늘로 한 번 올라갔다가 바닥에 완전히 자빠지려던 아이는 벌떡 일어나서 거세게 울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바로 앞이었고 신호는 이미 끝났다.
애 엄마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고 뭐라 뭐라 말을 했고 아빠는 한 숨을 쉬는 사이 아이가 도로로 돌진했다. 나는 우회전을 할 수 있도록 신호가 바뀌었지만 불안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애 아빠가 아이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나는 아이를 덥썩 들어올려주길 바랐으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고 아이는 두 번째 내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창문을 내리고 “애를 좀 안아요!” 라고 하고 싶어서 창문을 살짝 내렸는데 애 아빠가 아이를 인도 안 쪽으로 깊숙히 밀어넣고 한 손으로 마트봉투와 자전거를 붙잡고 있었다.
아이는 분이 풀리지 않아 계속해서 울었고 애엄마는 아이 등짝을 두 번 후려갈기고는 다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이아빠는 보따리와 자전거를 끌고, 아이는 엉엉 울며 제 부모를 따라갔다.
저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멋지게 건너는 미션을 수행하지 못해 엄청나게 화가 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매일 매일이 도전이고 그래서 힘겨워한다. 아이에 따라 다르지만, 도전을 즐기는 정도도, 실패했을 때 악다구니를 쓰는 정도도 모두 다르다.
그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헤아려 주면 좋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러자마자 나는 얼마나 그러고 있는지 점검해보았으나 역시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도 나는 아이의 투정과 계속대는 깐족댐에 화를 냈다. 왜 그러는 지는 화를 내고 난 다음에 알게 된다. 사과를 하지 못하고 아이를 재웠다. 자기 전에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아홉살을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나 처리할 수 없는 나이이다. 그건 어른이고 애고 미성숙한 인간에겐 언제나 난제다.
오늘은 많이 미안했다.
어떤 한 가지 사건이, 아이에게 전달하는 메세지가 수십가지여서 그게 어렵고 버겨울 때 아이들은 짜증을 내고 깐족대고 장난을 치고 약을 올리고 말을 안 듣고 주제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꺼낸다.
아이가 곤히 자고 나니, 자전거를 못 타서 분통이 터지던 그 아이가 생각난다.
2014. 11. 17.
1.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노는 대부분 추측에서 벌어진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뻔할 때, 그 역시 내 생각이다.
그에게 묻지 않았다. 맞냐고. 내가 보기엔 거짓말 같은데 맞냐고.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다보면 모순을 찾을 수 없다. 대신 평정을 유지하며 관찰해야 한다.
추측은 추측을 낳고 눈덩이가 되어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대부분의 이런 분노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떤 것을 빼앗길까봐 빼앗기기 전에 두려워하다가 두려움은 인정하기 싫은 자아가 분노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겁이 나는 게 아니고, 이 분노는 정당한 나의 권리야!
분노가 정당한 권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작점이 추측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추측은 또 다른 추측을 낳고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져가니까.
추측과 두려움이 분노가 될 때 해야 할 일은 당사자와 대화를 시도하는 일이다.
분노를 표현하지 말고, 화가 나게 된 경위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 문제가 당신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니 나의 불안한 감정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냐고 묻는 것이다.
그래야겠다.
2.
삶이 어떤 전환점을 돌아갈 때 삶은 생명과 에너지를 가진 것이라 관성의 법칙을 가져서 쉽게 전환하지 못한다. 게다가 살아온 세월이 이미 30년이 넘었다면 관성은 습관이 되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에밀 시오랑이 말하길, 우리는 매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을 잊는 것이라 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때로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다. 원래 그랬으니까. 라는 말은 재난사고에만 따라붙는 말이 아니다.
한 생명의 삶에도 분명히 적용된다.
3.
가진 것을 내려놓으면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순간부터 다른 것들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던 그물에서 벗어나는 순간 공기는 상큼할 것이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다시 시큼털털하게 느껴지리라.
계속해서 나는 새로운 아침이라고 우길 필요가 있다. 이 골목의 어귀를 돌아나가면 낯선 것들이, 또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고향의 냄새가 가슴 깊이 찰랑인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4.
허무맹랑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성인이 된 지 꽤 오래되었다면 모든 일들은 당연한 귀결이다. 단지 내 생명의 관성과 탄성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다를 뿐이다.
오늘도 그리하여
굿나잇.
배신의 계절 2014
한 해에 몰아오니 오히려 다행이다.
내년에는 더 심한 일과 더 많은 횟수가 몰려와도 조금 더 덤덤할 수 있을거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의 공백을 굳이 채워넣을 필요도 없다.
사막을 걷는 여행자의 유일한 희망이 두 다리뿐이라면, 지금 이 연옥을 걷는 나의 유일한 희망은 모든 파도를 바라볼 수 있는 나 자신과 그 옆에 앉아 모래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 아들이다.
비우는 시간 마흔의 가을.
어울리지 않는 악세서리를 떼어내면 맨얼굴로 더 환하게 웃으리라.
2014. 9. 21. 새벽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가까운 곳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한다.
초등학교부터 한 동네에서 살던 녀석들과 겨울밤 거의 매일 모여 삼치구이에 소주를 마시던 생각을 한다. 꼭 삼치를 시켜달라 하고 꼬닥꼬닥 졸던 녀석이 있다. 집에 가서 자라고 욕지거리를 해도 있다 갈꺼라 했다. 그 때 우리는 서른을 몇 년 남겨두고 있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았으나 늘 취해서 헤어지곤 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만나면 퇴행현상을 보인다. 우리는 늘 별 일 없이 만나서 별 일 없이 헤어졌다. 퇴근길에 집 앞에 와서 나와. 라고 말하면 그냥 나가던 시절이다.
비오는 저녁 운전은 해야 하는데 아이는 전화를 해서 끊지 않는다. 나와, 하면 나가던 시절에서 무려 14년 정도가 지난 저녁이 되니 차를 돌려 동네 친구에게 간다. 동네 친구와 남의 영업집에서 삼치를 구워 소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 내일을 생각해서 동네 친구의 까페에서 히비스커스차를 마신다.
내일따위 없던 시절에서 아주 멀리 돌아왔다. 그 먼 길을 돌아돌아 다시 동네친구를 만나게 되는 비오는 밤, 길거리에 풍선이 굴러다녔다. 흰색과 연분홍색 고운 풍선 네 개가 하나로 묶여 있다. 어느 아이가 잃어버렸을지, 아니면 행사장에서 굴러온 것인지, 누가 힘겹게 얼굴이 벌개지도록 불어댄 풍선인지 기계로 한 방에 부풀린 풍선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왠지 저 풍선엔 누군가의 숨이 담겨 있어 차로 치이면 안될 것만 같다. 우회전으로 들어오는 차도 풍선이 신경쓰이는지 속도를 낮췄다. 풍선을 불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던 때를 굽이굽이 돌아오면 풍선을 부는 게 노동이 되는 세월이 기다린다. 그래도 마음속엔 풍선을 함부로 터트리면 안된다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누군가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풍선이 빗속에 굴러다닌다. 누군가의 숨결이 잦아드는 그 밤에도 그랬겠다.
2014. 9. 2.
평생을 복수와 증오심으로 살던 사람이 있었다.
그 증오는 그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그렇게 30여년을 보내고 난 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원망하고 이제 그만 증오하라고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은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해 온 핏줄이었다. 그 사람이 복수심을 멈추는 날은 그의 생명도 끝날 것이 자명했다. 그 사람의 뇌가 멈추든, 심장이 멈추든,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멈출 것이었다.
사람이 복수심을 갖게 되는 것이 이다지도 사소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 며칠을 보냈다.
야구방망이를 차 트렁크에 싣고 다녔다는 어느 잘생긴 가수의 이야기도 떠올렸다. 갑자기 그 모든 분노의 에너지가 다시 다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런 날이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시켰는데 바리스타가 내 주문을 잊었다. 나는 한 참을 기다려 너무도 힘겹게 그에게 내 커피를 달라고 말했고 커피를 받아 매장 밖으로 나오면서 울었다. 지하철역에서는 공원을 지나는 두 여고생에게 아무 이유없이 칼을 휘두른 남자의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카푸치노를 손에 들고 눈물을 감추던 나는 조용히 뇌까렸다. “이해해. 왜 그랬는지 나는 알아.” 코를 풀면서 말이다.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거기까지 가게 되는 과정 중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책임지는 일은 우주를 떠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쉽게, 그 말들을 한다. 책임지겠다. 라고.
나는 진심으로 신의를 다했다고 주장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왜곡된 내 결함의 반영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상대방이 쥐똥만큼 악의를 가지고 내 선의를 이용해 먹었다는 걸 알게 된 먼 훗날, 그 누구도 보름달이 뜬 밤에 부싯돌을 꺼내놓고 칼을 갈 수 있다.
파도소리만 가득하던 깜깜한 어느 바닷가가 매섭게 그립다.
부싯돌을 꺼내놓고 칼을 갈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매일 밤 아름다운 파도가 치면 좋겠다.
2014. 9. 3.
새벽녘 두어 번 뒤척였다고 휴대폰 어플이 알려준다. 내가 잘 잤는지, 잘 못 잤는지, 그런 것도 기계에게 묻고 사는 한심한 삶.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씹다버린 사과모양의 전자제품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지 사과가 나인지, 이미 그 경계는 허물어 진 것 같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을 찾아 헤맨다. 쓰리고 아린 상처를 적확하게 표현해 줄 단 한 줄의 문장을 찾아 긴 터널을 쑤석거려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어스름은 삽시간에 사위를 덮고 아이들이 내 새끼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 아이도 돌아오지 않는 저녁. 늙은 개 한 마리는 네 다리를 곧게 뻗고 편안하게 자기 시작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아프다고? 씨발 나도 좆나 아프다고! 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빨을 드러낸 작은 개새끼는 커다랗고 하얀 아름다운 진돗개를 보고 주제넘게 짖고 있다. 빈 식탁은 굴러다니는 몇 가지의 펜만 싸안고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하는 버려진 땅처럼 울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분다. 고통의 무게는 가늠하지 않는 것이며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한 것이라고 남들 앞에서 쉽게 말해도 머리통을 짓누르는 이 두통의 무게는 펜잘이나 게보린 수백 알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세상천지 아무도 남지 않은 그 느낌을 알고 싶어서 사막에 서보는 자가 있고, 마음의 고통과 몸의 고통을 일치시키기 위해 손목에 커터칼로 글씨를 쓰는 아이가 있다. 사랑, 이라고. 말해 본 적 없는 사연 때문에 가짜 자아를 만들어 자신을 둘로 나누는 청년이 있고 세상은 모두 내 편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며 계속해서 돈을 꾸고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 글줄께나 쓴다는 그 어떤 문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각자의 마음들이 어느 집 밥상위에서 작두를 탄다. 피칠갑을 하고 갯벌을 기어가던 어느 미친년이 했던 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갈꺼여 갈꺼여.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 지문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저 작은 전자기계 속으로 들어가 휘적거리며 다녀야 할까. 말라비틀어진 씨앗은 어디서 열리는 것인지 기계에다 대고 말을 하면 저 년이 알려줄까.
2014. 9. 1.
새벽녘 두어 번 뒤척였다고 휴대폰 어플이 알려준다. 내가 잘 잤는지, 잘 못 잤는지, 그런 것도 기계에게 묻고 사는 한심한 삶.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씹다버린 사과모양의 전자제품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지 사과가 나인지, 이미 그 경계는 허물어 진 것 같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을 찾아 헤맨다. 쓰리고 아린 상처를 적확하게 표현해 줄 단 한 줄의 문장을 찾아 긴 터널을 쑤석거려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어스름은 삽시간에 사위를 덮고 아이들이 내 새끼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 아이도 돌아오지 않는 저녁. 늙은 개 한 마리는 네 다리를 곧게 뻗고 편안하게 자기 시작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아프다고? 씨발 나도 좆나 아프다고! 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빨을 드러낸 작은 개새끼는 커다랗고 하얀 아름다운 진돗개를 보고 주제넘게 짖고 있다. 빈 식탁은 굴러다니는 몇 가지의 펜만 싸안고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하는 버려진 땅처럼 울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분다. 고통의 무게는 가늠하지 않는 것이며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한 것이라고 남들 앞에서 쉽게 말해도 머리통을 짓누르는 이 두통의 무게는 펜잘이나 게보린 수백 알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세상천지 아무도 남지 않은 그 느낌을 알고 싶어서 사막에 서보는 자가 있고, 마음의 고통과 몸의 고통을 일치시키기 위해 손목에 커터칼로 글씨를 쓰는 아이가 있다. 사랑, 이라고. 말해 본 적 없는 사연 때문에 가짜 자아를 만들어 자신을 둘로 나누는 청년이 있고 세상은 모두 내 편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며 계속해서 돈을 꾸고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 글줄께나 쓴다는 그 어떤 문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각자의 마음들이 어느 집 밥상위에서 작두를 탄다. 피칠갑을 하고 갯벌을 기어가던 어느 미친년이 했던 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갈꺼여 갈꺼여.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 지문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저 작은 전자기계 속으로 들어가 휘적거리며 다녀야 할까. 말라비틀어진 씨앗은 어디서 열리는 것인지 기계에다 대고 말을 하면 저 년이 알려줄까.
2014.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