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집

나에겐 아들이 하나 있다.
이 아이는 2006년도에 한국에서 태어났고, 2006년 12월에 처음 아파트에 입성했다.
난곡의 판자촌을 깎아 만든 재개발 단지였다. 유모차를 밀고 높은 언덕을 올라다녀야 하는 길이었다.
시흥의 뒷길을 돌아 멀리서 그 아파트를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성채가 모여 있는 듯 했다. 그만큼 생경스럽고 낯선 곳이었다. 내가 사는 곳이었지만, 언제나 기괴하고 이상야릇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산안개가 아파트 단지를 뒤덮었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림역과 기온차이도 3도 정도 났다. 미림여고를 지나 버스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올 때는 귀가 멍멍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2009년 7월에 지금 살고 있는 평촌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 곳은 모두가 아파트로 이루어진 신도시이다. 20년이 되어가는 대한민국 신도시 1기 도시 중의 하나로, 대부분의 아파트들이 조금씩 낡아가고 있지만, 적절한 20-30대 평수가 골고루 있고, 사교육시설등이 잘 되어 있고 구획정리가 깔끔한데다가 인구밀집도가 높아 생활편의시설이 많다. 이런 편리성 때문에 20-30대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키우기 좋은 도시로 평가해 이주를 해오는 경우가 많다. 기존의 안양이나 평촌 들녘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신도시라는 것이 원래 외부인을 유입하기 위한 곳이므로.

아이는 그렇게 기억이 생성될 무렵부터 아파트촌에 살았다.

이 아이가 자라나면서 문화의 격차가 생겨나고 있다.
일단 아이는 흙길을 잘 걷지 못한다. 산에 데려가면 자꾸 미끄러지곤 한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물이 마르면 물이 마르는대로 그 느낌이 달라지는 산길과 흙길을 잘 걷지 못하는 것이다.
“벽장속의 요정”이라는 김성녀 주연의 모노드라마 연극에는 40여년을 벽장에 숨어 살던 정치범 아버지가 세상에 처음 나와 포장된 도로 위를 걸으며 튕겨져 나갈 거 같고, 미끄러질 거 같다고 하던 것과 상반되는, 그러나 역시 낯설다는 것에 대해선 동일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파트단지를 나와 안양천변을 걸어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이 많은 관양동 인근의 밤산책을 나갔다가 반지하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아이가 물었다.
_ 엄마 저기는 뭐야?
_ 집이지.
라는 내 말에, 저기가 사람이 사는 곳이냐고 물었다. 집이 땅 속에 있어? 라고.
아이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반지하방. 엄마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다 한 번씩 거쳐갔던 주거시설. 반지하방. 거기도 사람이 살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이는 낯설어 했다.

또 몇 달 전에는 내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가면..” 이라고 말했을 때,
아이가 “마당이 뭐야?” 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원래 집은 대문이 있고, 마당이 있고, 그 안에 건물이 있고, 건물에 들어가는 현관문이 따로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마당이 없는 집에서 유년기를 모조리 보냈고, 앞으로도 몇 년은 더 아파트에서 살아야 할 아이에게 마당이란 매우 먼 곳의, 동화나 영화에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처음 크레파스를 쥐고 집을 그릴 때도 아이는 아파트를 그렸다.
그러면서도 엄마 아파트는 왜 모두 네모모양이야? 라고 묻긴 했다.
세모난 아파트, 동그란 아파트가 있으면 재미날 거 같아. 라고 말하긴 했다.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긴 하지만, 함부로 놀러가지 못하는 곳.
마당과 골목이 없는 곳.
경비아저씨와 관리사무실이 있는 곳.
누군가 우리집을 지켜주는 대리인과 노동의 대리자가 존재하는 곳.
그 대신에 마당도, 대문도 없는 네모난 공간.
우리집과 저 친구의 집이 똑같고, 우리집은 몇 평이고, 친구의 집은 몇 평인 것으로 한 번에 수치상의 가늠이 되는 공간.

그러나, 그 집엔 다락방이 있고, 좁은지 넓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집엔 뭔가가 있는, 그 집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닌.

그런 자리에서 아이가 자랐다.

이 아이가 좀 더 자라, 반지하방에 살고 있는 친구와,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질 수도 있겠고,
우리가 다른 형태의 주거형식을 택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의 형태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을 때, 아이가 갖게 되는 마음의 폭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다.

내 마음대로 내 집을 개선하지 못하고, 정해진 양식과 주어진 형식에 따라 객관식의 답을 맞추듯 다지선다로 골라야 하는 삶이 지겨워지려고 하는데,
어쩌면 그런 선택지를 고르는 인생은, 2006년생 내 아이에겐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당연한 인생의 법칙이 될 지도 모르겠다.

2013. 1. 3.

한국사회, 가족의 파시즘 – 강준만 글 발췌

냉정한 사회과학적 분석의 메스를 들이대자면, 한국의 어머니 역사는 어머니가 ‘자궁 가족’의 수장으로서 그런 전쟁 (입시전쟁) 체제에 순응해 온 슬픈 역사다. 그 역사는 ‘보수적 과잉반응’, ‘보상적 인정 투쟁’ 이라고 하는 세 가지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보수적 과잉 순응이다. 이는 어떤 체제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오히려 그 체제에 과잉 순응함으로써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어머니의 카드는 아들이다.

둘째, 보험적 투자협정이다. (중략)
“한국의 특수한 모성 이데올로기 속에서 한국 중산층 어머니는 서구의 어머니처럼 아이의 감정적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공감하는 어머니가 아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하나의 투자의 대상으로 파악하면서, 아이의 성적과 대학 진학, 이에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성공에 책임을 지는 것을 어머니 역할로서 받아들이고 있다….이러한 한국사회의 모성 이데올로기는 아이를 하나의 상품으로 그럴 듯 하게 만들어 내기 위해, 어머니로 하여금 아이들과 전적으로 함께 지내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 윤택림
“근 1-2 세기 동안 지속된 식민지적 격동기와 혼란기를 살아가면서 여자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전력투구했으며 특히 부계 혈통주의의 전통에 따라 아들에게 투자를 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이 커지니까요. ‘여자의 적은 여자’ 라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만, 아들을 둔 어머니들을 남녀 고용 할당제를 반대하며, 불합리한 결혼제도를 앞장서서 존속시킵니다. 여자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개별 가족내의 어머니로서 강해졌지만 여전히 여자로서는 매우 취약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조한혜정

셋째, 보상적 인정 투쟁이다. 아들에게 뭘 바랄 게 전혀 없을 만큼 유능하고 당당한 어머니들이 많다. 그래도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인정 투쟁’을 피해갈 순 없다. “니네 아들 무슨 대학 다니니?” 여기서 기죽는 어머니들이 많다. 아들에게 뭘 바라서가 아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인정 투쟁의 도구다. 어머니의 유능함을 입증해주고 자존심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중략)
교류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어머니의 인정 투쟁은 변형된 권력투쟁인 셈이다. 투쟁이 습속이 돼 관성에 의해 굴러가는 면도 있다.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완화 되기는 커녕 계속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대중에겐 다른 선택이 없는 점도 있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끄는 新자궁 가족모델과 이에 따른 ‘도구적 모성’은 한국사회의 전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 세계적으로 살펴볼 때 가족주의가 강한 나라일 수록 부정부패가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한국에서 개인은 혼자 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대표선수다. 한국인은 국가의 이익과 가족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가족의 이익을 앞세우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부정부패가 성행하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중략)
집단적 위선의 향연을 꼬집고 ‘가족 파시즘’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이득재는 한국의 가족주의를 ‘가국체제’, 즉 가족과 국가의 논리가 끈끈하게 결합된 체제로 보면서, 가족을 파시즘의 씨앗이자 파수꾼으로 규정했다. 이런 시각에 근거하여 이명원은 한국의 가족주의는 국가주의로 표상되는 집단주의의 하위구조이기 때문에 지난 역사를 통하여 작동되었던 가부장적 ‘국가 파시즘’ 체제는, 가족단위 내에서 가부장적 ‘가족 파시즘’ 체제로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오, 가족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느 순간에도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살점이면서, 나를 낳고 키워준 사랑과 감사의 궁극적 상징이자, 때로는 내 삶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끔찍하게도 들러붙는 수초 같은 것’ – 김용희

어머니 수난사 – 강준만 발췌

오늘 낮에 친구와 나눈 대화. 경상도 남자들의 해외망명(?) 욕구에 대한 원인은 가족파시즘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 페북의 어느 글을 읽고 다시 강준만의 책을 꺼내 일부 발췌해 적는다.

무덤의 정체성

옛부터 큰 일을 준비하거나 마음의 큰 결심을 할 때 조상의 묘를 찾아가 예를 갖추는,
그런 게 있었는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거 같았다.
(있었것지..어디서 주워드었것지)

그래 어제, 큰 결심을 하고 어머님과, 할머니의 묘를 찾아 인사를 했다.
조상을 찾고 어쩌고 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뿌리를 찾고 조상을 따지고 묘를 쓰고 하는 것은 정체성을 명확히 찾으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간은 없다.
내 안에 흐르는 피와 유전자, 그 정서의 모든 것들이 바로 다 위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들이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 뭐 이런 충효주의 사상 말고.

사람이 성장기에 부모와 선대로부터 들어온 집안의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엔 자기 인생의 단서와, 성격과 기질의 단초가 될 열쇠들이 들어 있다.

물려받은 유전자는 존재하고, 그 중에 유달히 강한 부분이 있고 약한 부분이 있다. (강/약의 얘기는, 좋다 나쁘다의 평가가 아니다) 그런 물려받은 부분은 서른쯤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그 때부터 자기가 만들어나가는 일이 생긴다.

물론 예전엔 훨씬 더 일찍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기들 시작했지만, 지금은 학교를 지나치게 오래 다니는 까닭에 모든 것이 늦어졌다. 물론 인간 수명의 연장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 수명이 40-50세 사이였을 때, 공자가 말한 이립(而立)이 스물이었다면, 지금은 그 수명이 연장된 만큼, 인간수명의 반절쯤에서 두번째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른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각종 심리학 서적들이 난립한다.
그 심리학 서적들은 세상을 원망하지 말고 너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네 마음의 문제가 있다, 네 마음을 다스려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30년간 해보지 않은 일을 15,000원짜리 책 몇 권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이미 어색해진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거나, 모든 것을 참아드릴테니 어디 한 번 우리집안의 흑역사를 말해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부부간의 불화로 동거중이거나 아니거나, 양육자가 자녀에게 자녀의 뿌리를 조곤조곤 이야기 해주지 않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너에겐 이만한 역사가 있다. 너에겐 이만큼 많은 너의 혈육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모여 너를 만들었고, 너는 그래서 소중하다 라는 메세지가 은연중에 전달된다.

지금 서점에서 “서른살 징징징”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바로 이 세대들은 급격한 산업화와 물질의 갑작스러운 홍수로 그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많이 잃었다. 그래서 그들은 헤매인다. 나는 누구인가. 사춘기때 하지 못한 숙제를 이제서 하고 있다. 마음은 아직도 열두살, 애니어그램, MBTI, 진로상담. 그런 것들로 자기들의 규격을 알고자 한다. 사람에게 규격은 없다. 모두 역사와 역사속에 살아 있을 뿐.

한 인간의 정체성이 생로병사와 가족의 의례로 명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사실 얼마 전이다.
그렇게 두 달 전에 가신 어머님께 다녀왔다.
그리고 30여년전 돌아가신 할머니에게도 다녀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울었고, 웃었고, 다짐을 되새겼다.

만일 나에게 새털만큼의 권력이라도 주어진다면, 그 권력을 가볍게 놓아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갖겠다고.
그리고 사람이 되겠다고. 참사람이 되겠다고. 감정으로 타인을 대하지 않고, 늘 깨어 있겠다고.
그리고 자유롭겠다고. 자유롭기 위해 힘을 갖고, 자유롭기 위해 돈을 갖고, 자유롭기 위해 지혜를 갖겠다고.
욕심내지 않고 내가 배운 모든 것을 나누며 가겠다고.
세상 사는 동안, 세상은 나에게 쌀 한 톨 보태주지 않았다고 했던 그 말 거짓말이었다고.
이제 깨달았다고.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고. 그걸 돌려주겠다고. 모두 다.
나보다 못배운 자, 나보다 가난한 자, 나보다 슬픈 자, 그들에게 나누겠다고.
다시는, 당신들을 먼저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잘 살아서 웃으며 그 강을 건너겠다고.

파란 하늘의 어머님 산소에서부터 노을지는 할머니 무덤곁에서.
나는 아주 인간답고 인간다운 결심을 그 분들 비석 앞에서 보이지 않게 깊게 새겨넣고 왔다.

孺子金海金氏五任之墓
孺子金海金氏五任之墓
全州李公基東, 漢陽趙氏香之墓
全州李公基東, 漢陽趙氏香之墓

특별한 계절

셀프주유소에서 카드를 긁고 있는데 (순서상 카드 먼저 긁고 주유) 주유소 아저씨가 다가오신다.
아저씨가 주유총을 잡으시고 물으신다.
할 줄 알아요?
아저씨 라기엔 연세가 많으신 편.
아버지 뻘도 더 되신 듯 하다.
네! 잘 합니다! 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저씨는 총을 잡다가 놓고 한 번 해보랜다.
익숙하게 걸쇠를 딱 받쳐놓으니 어 정말 할 줄 아시네 하신다.
예전에 알바도 했었습니다. 오래전에요.
아저씨가 씩 웃으신다. 그러냐고.
한 16년전쯤이죠. 라고 했더니 그 때도 셀프주유소가 있었냐고 물으신다.
아니요.
순간, 경유차와 휘발유차를 구별하고 차종마나 주유구가 달랐던 걸 기억하느라 종종걸음치던 그 겨울이 떠올랐다.

아저씨가 다시 물으신다.
그럼 한 서른 대여섯됬나?
서른 여덟입니다.
아 그럼 토끼띠인가? 하셔서 네!
하니 아저씨 아들이 토끼띠라 잘 아신다 하신다.
우리 아들은 토끼띠 6월 생인데..
저는 음력으로는 7월입니다.
한 달 늦게 나왔구만 하던 아저씨의 주름진 얼굴 위로 다시 한 문장이 지나간다.

그 해 여름은 진짜 더웠지..
애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37년전 여름, 더웠던 것을 기억하는 노년의 남자는, 당시 젊은 아빠로 아내가 만삭으로 힘겹게 땀을 흘리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정말 더웠다고 말했던 엄마가 떠오른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산같이 쌓인 머슴밥을 막던 겨울의 공기가 코끝에 스치던 그 계절도 떠오른다.

한여름의 열기를 기억한 늙어가는 남자와
한겨울의 공기를 기억하는 내가 주유소에서 노란 노즐을 잡고 섰다.

지금은 봄,
이 역시 또 누군가에겐 특별한, 아주 특별한, 4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그런 공기겠지..

2012. 4. 28.

썩지 않는 사과

⒞Hana Lee_120424 @Gwanyangdong

봄빛은 찬란한데 당신 마음은 여전히 지옥이구나
누군가에게 갖고 있는 욕심들이 그대를 지옥에 몰아넣는구나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인정받고 싶고, 숭앙받고 싶은 당신의 노력들을
매일 매일 입으로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이로구나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따듯한 눈빛으로 안아주길
수고했다고 어깨를 쓰다듬어 주길
따스한 밥상을 함께 하길
당신이 원하는 것들은 그리 큰 것들이 아닐 것이다.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리하여 마음 한 켠에 미안함이 있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고
고맙다고 말할 시간을 놓쳤고
수고했다고 말할 시간을 놓쳤다.

놓쳐버린 시간이 너무 가슴아파 술에 취해 울고 있는 것이지.
눈물은 수치라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언제나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신이 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일으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어나는 것은 그대 스스로 해야한다.
내가 일으켜 주는 것은 언젠가 당신이 다시 무너질 수 있음을 말한다.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깨우치지 못하면
다음 번에 쓰러졌을 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때 당신은 일어날 수 없으므로.

당신의 마음을 봐야만 한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버겨워도
조금이라도 기운이 있을 때 마음을 사랑하라.

모든 것이 다 그대만의 잘못은 아닐진대
그리하여 나는 오늘 이렇게 억울함을 조금 가라앉히는 것이다.

2012. 4. 27.

_ 블로그에 이렇게 줄바꿈을 해서 쓰는 것은 가독성과 쉽게 쓰기 위한 블로그 작성의 특유한 글쓰기 입니다. 詩라고 오인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혼으로 글을 쓰는 詩人들을 모독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버리는 것 버려지는 것

전복을 먹어봐야 전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것은 아니다.
소고기를 먹는다고 내가 도축을 하는 것은 아니므로.
내가 먹는 먹거리들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먹는 콩나물이 어떻게 길러지는지, 내가 먹는 시금치가 어디서 왔는지, 비가 잦아서 작년 시금치 농사가 나빴다는데, 수퍼와 마트엔 어떻게 줄줄이 시금치가 나와 있는지.
규격을 맞추기 위해 비닐봉투 안에서 자라는 애호박을 보며 간혹 참담함을 느낀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에 추운 날 잿빛 교복을 어쩔 수 없이 입고 베개만한 쿠션을 끌어안고 강당으로 줄줄이 걸어가던, 거세된 젊음이 자꾸 생각난다.

누군가에게 힘이 될 음식을 만들기 위해 세일하는 전복을 샀다가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전복은 나에게 오기 전에 푸른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살았겠지. 어린 아기의 새끼손톱보다 작은 빨판으로 뭔가를 먹으며 몸을 키웠을테고 내가 잘라내 버린 빨간 입으로 바다의
파도를 마셨을것이다.
전복의 사이사이에 낀 검정들을 깨끗하게 씻어내며 그간 찾아뵙지 못한 아쉬움과 죄책감을 함께 씻는다.. 라고 적어도 괜찮겠다.

무언가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고등어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 있고, 갈치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오래전엔 그 떠오르는 사람들이 헤어진 옛 애인이거나, 지금은 연락조차 되지 않아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지는 슬픈 사연의 어떤 여인..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 기억의 연상의 대상들은 세월이 지나고 내 삶의 변화에 발맞추어 다른 대상으로 변해왔다.
이제는 갈치를 보면 생각나던, 파출부 다니며 일수써서 까르띠에 가방을 사던 너무나 무거운 삶을 살던 정아언니가 아니고, 갈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내 아들이다.
샤브샤브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은 육수를 기가 막히게 만드는 시동생이고, 고등어를 더 이상 못 먹게 된 남편이 생각나고, 계란을 보면 계란하나로 대여섯가지의 요리를 만드는 열여덟살 딸아이다.

그리고 이제 전복은 나에게 시어머니를 부른다. 시어머니의 부엌 씽크대엔 전복껍데기가 있다. 그리고 그 위엔 날긋한 초록색수세미가 있다.
“너무 고와서 버리기가 아깝잖니” 하시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전복죽을 끓인다.
그리고 나도 전복껍데기에 붙은, 내가 미처 떼어내지 못한 살점들을 뜯어낸다.

묻는다.
무엇이 되겠느냐.
너희들의 살점은 병든 육신에 큰 힘이 되길 기원하니, 너희들의 고운 껍데기는 누군가에게 칠보가 되어, 장롱이 되기도 하고, 미술품이 되기도 하고, 화장대가 되기도 하고, 귀중한 것들이 된다고.

나는 칠보를 만들 줄 모르니, 수세미라도 올려놓고 너희를 기억하려고.
그리고 그 고운 빛 볼 때마다..
지나간 젊은 어느 날, 담양의 대나무숲에서 바람 맞고 앉았을 내 딸래미만한 열여덟의 어느 처녀를 생각하며.
전복껍데기를 보며, 너무 예뻐서 버리기가 아깝다는 시들지 않은 젊음을 꼭 기억하리.

2012. 4. 24.

봄 밤

밤벚꽃 아래 남자고등학생 애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덩치에 안 어울리는 놀이기구를 타고 놀고 있다. 공기는 차가운데 아이들의 목소리는 뜨겁다. 별 것 아닌 농담에 깔깔대는 앳된 사내의 목소리에 사춘기와 변성기를 지낸 여물지 않는 수컷의 성성함이 낯설다.
그저 아이들은 웃고 있을 뿐인데, 그 소리들을 제어해 본 적 없는 치기에 아파트 단지가 우렁우렁하다.
줄여입은 교복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작은 아파트 단지를 겅중겅중 달려가는 아이들의 기다란 종아리 뒤에 숨어버리는 이 공간이 이다지도 좁은 줄 처음 알았다.
나의 개는 끊임없이 생명이 움트는 땅의 냄새를 맡고, 하루종일 메말라 있던 나의 눈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 어느 순간 저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스스로 목소리를 제어할 줄 아는 그런 날이 오면, 오늘은 단 몇 걸음에 달려가던 이 아파트단지가 갑자기 거대한 괴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봄밤은 미친년 옷고름 씹어먹듯 흥야흥야 간다.

전교조가 생각났다.

89년도였다.

그 때 매우 이상한 계기로 학교 (당시 중딩)에서 소요가 일어났는데, 계획하던 백일장및 사생대회 날짜를 자꾸 학교측에서 연기하는 것이었다. 비가 오면 연기하는 건 맞는데 다른 때 같으면 그냥 갈 정도의 비였는데 두 세번정도 연기가 되니 불만이 생긴 것.

근데 이런 일로 소요가 일어나기엔 너무 사소하지 않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3학년들이 갑자기 학교를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우르르 3학년들을 따라 나가기 시작했다. 몇몇 교사들이 뛰쳐나와 아이들을 말렸지만 1500명의 학생을 교사 몇 명이 제지하기엔 어려웠다.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회임원임에도 불구하고 전교조로 인해 학교에서 누군가 파면당하고 해직당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마 3학년들이 이 사건에 대해서 알았던 모양이고 교문출근투쟁들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두어명의 선생님이 해직되었고 나는 그 선생님들을 잘 알지 못했지만, 백일장 문제로 아이들이 튀쳐나갈 때 어떤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되었던 장모 선생님이 나중에 TV에 전교조 임원으로 인터뷰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별 생각없이, 학교를 다녔고 학생회 임원을 지속했다.

당시 89년도 나는 그 학교의 학생회 부회장이었고 부회장 당선시 교실 환경미화 학습신문을 만들 때 “왜 학생회 임원은 교사회식을 준비해야 하나” 라는 사설을 실어 6개월동안 교사들과 심한 충돌을 빚었다. 결국 담임교사의 지시로 그 학급신문은 교실에서 떼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격하게 반항을 하기도 했다. 일부 교사는 대놓고 수업시간 내내 나를 째려보는 짓거리까지 했는데, 고의적인 왕따를 유발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도 역력했고 이유없는 체벌과 차별대우도 감내해야 했다.

당시 학교내에서 벌어지던 스승의 날 선물 문제를 없애고자 이럴바에 각 학생들의 푼돈을 모아 공동으로 선물을 드리고 개별 선물을 없애버리자는 안을 내어 이를 학생회에서 통과시켰고, 이 부분을 추진하다가 촌지와 다름없다며 일부 선생님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서 무산되었다.
내가 그 때 추진했던 것은 전교생 500원씩 내기였다.

3학년이 되어 학생회장이 되자마자, 작년 스승의 날 선물문제로 나에게 너는 선생을 뭘로 보냐고 언성을 높였던 가정선생이 당선인사를 하러 교무실을 방문하자 마자
“어머 이하나 회식은 언제 해?” 라고 물었던 것이다. 그 교사는 이름도 기억 안나는 사각형의 턱으로 남았다.
나는 교사회식을 추진하지 않았고, 모친 역시 이에 동의해 자동으로 맡게 되는 육성회장(당시 육성회장은 학생회장 엄마가 무조건적으로 맡게 되어 있었음)이 되어 육성회 자리에서 육성회장이라는 이유로 60만원을 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에 동의할 수 없고 1/n 해서 각자 5만원씩 더 내면 되겠다. 라고 발언했다.

3학년 학생회장을 지내는 동안 남자아이들이 여학생이 학생회장이 되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다며 지나가는 나에게 양동이에 물을 담아 뿌리기도 했고 좀 짖궃고 유치한 장난들을 많이 쳤다. 그 해에 각 학교마다 교복을 입는 게 유행이 되기 시작해 개방적이던 당시 백.. 모모 교장선생님과 학생회 임원들간의 상의를 거쳐 교복을 디자인을 선택했고 (근데 지금보니 안 예쁘더라. 후배들 미안), 임원 간선제였던 학생회장 선출안을 수정해 전교생 직선제로 돌리는 데 공을 들였다.

중딩인데..
참 거국적인 일 했다. ㅎㅎㅎ

아무튼 그 이후 고등학교를 들어가서는 좀 조용히 지내고 서클활동을 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이 학교에도 파란많은 전교조 역사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89-90년도에 수많은 교사들이 해직되면서 나의 여고에도 해직과 파면의 바람이 불었는데 이에 대해 학교의 학생들이 항거를 표시하는 의미의 행동을 했다는 얘기 몇가지였다.
교복자율화로 사복을 입던 학생들이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등교했고,
점심시간엔 도시락을 복도에 내놓고 단식투쟁을 했단다.
당시 그 학교에선 반장/부반장을 교사 직권으로 임명하는 제도였는데 학생들이 이에 반발해 반장/부반장을 무효화시키고 각 반에서 두 명씩 임원을 투표를 통해 재신임해 30인회를 결성(당시 15반) 교장실과 이사장실에 항의방문과 투서를 전달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하여,..
나의 자랑스러운 그 선배들의 모교는,
그 엄청난 대지에 여고/여상/여중이 설립된 그 땅에서.. 여고에서 매점까지 왕복 빠른걸음으로 15분이 걸리는 그 거리를.. 주파하든 말든 학교에서 14시간을 보내는 여고생들에게 절대 매점을 열어주지 않았다.

당시 돌던 루머로는, 이사장이, 여고에서 전교조가 가장 먼저 발생했으니 매점따위의 편의시설을 내 줄 수 없다고. 했단다.

음…

쓰다가 보니 고등학교의 이야기는 예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장황하게 썼던 지라.
네이버 블로그 싹 다 막아뒀는데.
다시 열어보겠다.

그리고 링크나 걸어야지..

엊그제, 관악을 이정희 후보의 문자소동으로
여러가지 의견들이 오가고 있다.
운동권에 입성한 적 없는 내가 귀동냥으로 들은 여러가지 정보들이 뒤죽박죽하다가 이제 겨우 정리가 되어가는데, 그저 생각나는 건, 그 때의 분위기다.

고등학교 때 갔던 연세대 노천극장에서의 전교조 집회.
전교조 우리의 희망 – 이라고 불렀던 노래.

그 때는, 사실. 전교조 선생님들이 있으면,
학교에서 따귀를 맞거나, 육격포탄을 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학생회 임원이 되도 빚내서 회식시키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반장이라고 도시락 두 세개 싸가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촌지를 내지 못해 얻어맞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무조건 외우는 주입식 교육도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 그 때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다. 학생인권조례 당연히 필요한 거 이제서야 생겼다.
근데, 많이 변했다.

당시의 사람들도 권력을 알았고, 진영을 떠나 모두 늙어간다.
세월은 가고 고인 물을 썩고, 욕심들을 늘어가고 곪은 상처는 터진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게 2012년이 가고 있고, 나는 그냥 그 옛날의 그 공기가 좀 그리웠을 뿐이다.

http://tankhana.blog.me/120120468921

 – 오래전에 썼던 폭력학교에 대한 포스팅 6개나 됨 ㅋ

2012. 3. 21.

키티를 잡아먹은 호랑이

얼마전에 문득 이런 키티 시리즈가 떠올랐다.
키티가 호랑이옷나 다른 동물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인데,
누군가는 이걸보고 호랑이가 키티를 잡아먹었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키티 안에 있던 호랑이가 스물스물 나와서 껍질을 뒤집고
키티를 감싸안은 것은 아닌지.

한 사람의 분노와
한 사람의 슬픔과
한 사람의 우울은
이렇게 속에 껍질을 뒤집고 숨어 있다가
스르르 입을 통해 나와서 그 존재를 모두 감싸 안아 버리는 형국.

그래서 그 존재가, 분노와 슬픔이나 우울에 감싸안겨 버리는 형국.
결국 옷을 벗을 수 있는 건 키티 자신 뿐이다.

2012. 3. 2.

엄마는 실직중

실업과 실직사회에 대한 글을 읽다보니 한 생각인데, 실직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렇게 크다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애엄마들의 황망함에 대해서 누가 고려를 해보았는가다.

임신/출산/육아의 과정을 거치며 직장을 그만두는 엄마들의 경우, 이게 아무리 자발적이라도 하더라도 임금노동시장에서 밀려났다는 박탈감으로 인해 실직과 유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이걸 지워주는 건 실직이 아닌 이직으로 생각해야 하겠지만, 이 나라의 사회적 분위기상, 엄마라는 것은 매우 숭고한 일이지만 그것을 절대 프로의식 가득한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아준다는 거다.

개인적으로 임금노동시장에서 일하다가 급작스러운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물론 그건 내가 선택한 몫이라고 누가 트집을 잡아도 할 수 없다만.

임신을 하게 되고 급하게 일을 정리하면서 임신중에 무슨 태교니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내내 출산예정 일주일전까지 모니터 앞에 앉아 폭풍업무를 봤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육아휴직을 출산이후로 잡아놓는 것을 가정했을 때, 마음으로도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할 만큼 업무 인수인계를 해줘야 하는 게 바로 코 앞에 닥친 일이기 때문에 미친 듯이 일을 해대지 어디 뱃속에 있는 애 생각할 여유나 몇 번 있었겠느냐 말이다.

이 사회에서 바라는 엄마는,
성녀이길 바라면서 초능력자이길 바라고, 감정정리도 깔끔하길 바란다.

<짤방이 너무 귀엽군>

남자들은 부인이 애엄마가 되는 그 순간 자기 엄마와 동일시 하며 성모마리아적인 자기 자식의 어미를 기대한다. (물론 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어른들은 젊은 엄마들에게 에미가 되서 할 짓이냐 에미가 그게 뭐냐 라고 강요하는 반면,

배우자들은 대체 당신이 집에서 하는 일이 뭐라고. 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우리 마누라 너무 수고하지..라고 하면서 귓전에는 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윽박지르듯이 하던 말 “집구석에 하는 일이 뭐 있다고!” 라는 말이 맴돌 것이다.

설령 그 중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내내 잘 버티고 있는 엄마들도 직장내 승진에서 밀려나거나 야근, 회식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어처구니 없는 사회에서 반실직과 다름없는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사회에서 그깟 돈 몇 푼 버는 것보다 정말 대단하고 힘든 일을 하고 있다고 칭찬해줘도 모자랄판에, 나도 밖에서 돈 버느라 힘들다고 징징대는 어린 신랑들이 천지 삐까리다.
게다가 많은 초보아빠들은 애 안았다가 내가 떨어뜨려 죽이면 어떻게 하나, 라는 공포에 시달린다고 한다. 같이 자다가 깔아뭉개면 어쩌나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모두 다 미성숙한 상태에서 만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혹시 어린 아이가 수단이 되거나 목적이 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지만, 이건 이미 시간이 오래 흐른 다음에 깨닫는 개인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사회라도, 어미의 노릇을 하는 것과 아비의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차대하고 심각하고 고귀한 일인가 제도적으로 혹은 분위기라도 만들어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실직당하고 하루 종일 공원에서 빈 가방 들고 헤매는 늙은 아버지의 심정과 우는 애 업고 슬리퍼 신고 터덜터덜 동네를 거니는 젊은 엄마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

임신/출산/육아를 거치면서 사실상 실직상태에 몰린 엄마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의 숭고함과 자아발견과 자아계발에 지대한 가치를 학습받으며 자란 세대다. 동생 한 번 업어보지 않고 자란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은 매우 낯설고 어색한 일이다.

쉽게 말해 언제는 유능한 여자가 되어 불평등에 반대하여 투사가 되라더니 이제와서 숭고한 마리아가 되라는 말이냐고 따져 물을 수 있다.

실직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할 방법은 사회적 평등과 가족의 이해겠지만, 지금 이 따위 나라에서 두 가지를 다 거머쥐는 것은 요원해 보이는 일이다.

그렇다고 각자 알아서 하되 돈 있으면 되도록 전문상담사를 만나라고, 우울증을 조심하라고  쉽게 말해도 되는 일인가?

2012. 2. 27.

새롭게 태어나는 소중한 생명은 
임금노동시장에서 열나게 업무만 처리하다 온 사람에게 
매우 낯설고 어색하고 이해할 수 없으나 
절대 미워해서는 안되는 성역과도 같은 존재다. 
낯설고 낯설고 또 낯설다
– 짤방은 올해 7살이 되어 느물거리는 내 새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