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신중앙시장은 오늘 장날이었다고 한다. 아침 10시에 그렇게 인파가 몰렸으니 아마 장날인가보다 생각만 했었다. 시장을 둘러보면 식당도 있겄거니 싶었다. 좁은 골목에 보리밥, 칼국수 간판이 보이길래 서둘러 들어갔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식당이 대여섯개 줄지어 있었다. 그 중에 보리밥이라고 생긴 곳으로 쑥 들어갔다. 나는 괜찮지만 남편은 쌀을 좀 먹어줘야 하는 사람이라 밥을 먹자고 했다. 들어가니 장날이 뭘 팔러온 거 같기도 하고 사러 온 거 같기도 한 할매 몇 명이 밥을 먹고 있었다. 오봉이라 불러야 그 맛이 나는 커다란 꽃무늬 쟁반위에 놓인 그릇은 간단한 보리비빔밥이었다. 혹시 다른 메뉴가 있냐고 물으니 보리밥만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벽면에는 오랫동안 3천원을 받았는데 올해부터 4천원으로 올린다는 글씨가 두 군데나 붙어 있었다. 금세 밥상이 나왔다. 얼갈이배추와 부추, 콩나물, 치커리, 미역줄기를 담은 보리밥에 고추장, 아주 진한 된장, 멸치, 삭힌 고추조림, 보리밥 숭늉이었다. 어떻게 먹냐고 물으니 옆에 앉은 할매가 멸치 넣고 고추넣고 된장은 많이 넣지 말라고 일러줬다. 우리는 쓱쓱 비벼 우걱우걱 밥을 먹기 시작했다. 김치 한 조각 없는 밥상에 양파가 달았다.
“딸같은 며느리, 다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할매들의 며느리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았던 한 할매는 ”우리 애는 정말 안 그래. 세상 그런 애가 없어.”라며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제사도 지가 다 바리바리 싸가지고 옵니다. 지도 바쁘고 힘들어예. 우리 아들하고 사업을 세 개를 하거든. 그래도 한 번도 싫다 소리가 없어. 나한테 엄마라고 부릅니다. 아주 잘해예. “ 그러자 다른 할매가 “어무니 아들이 잘하는갑지예.”라고 한다. “그렇지. 우리 아들도 그댁에 잘 하죠. 우리 아들이랑 사업도 하고 좋은 차도 타게 해주고, 뭐 돈 모자란 거 없게 해주니께네. 아주 군소리가 없어. 한 마디도 안해.” “거 다 아들이 잘 해야 되는 겁니더. 요새는 무조건 아들덜이 잘 해야됩니더.” “매느리가 그만치 하면 어무니 아들도 처가에 그만치 한다는 얘깁니더.”
우리는 마주보며 웃거나 인상을 쓰면서 할매들의 이야기를 감상했다. 밥을 다 먹고 밥값이 너무 저렴해 거스름돈을 안 받고 싶다고 했더니 절대 그러면 안된다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경북출신의 나이든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경상도지방을 다닐 때마다 느끼는 철저한 가부장제, 남녀차별에 관한 인식을 자주 접한다. 처음에는 분노했고 한심하게 여기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그저 관찰할 뿐이다. 나는 거기 살지 않으니까. 나는 수도권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는 수도권을 벗어나 살아본 적 없다. 중국에서 잠깐 산 기간에도 국가 최대의 대도시에 살았으니 나는 대도시가 아닌 곳의 정서를 전혀 알 도리 없다. 남성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고, 약자를 존중한 적 없는 문화가 계속해서 자리 잡고 있는 것에도 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뭔지 모른다. 멀리 에스키모에게는 이런 문화가 있다더라, 얘기하면서 이제 우리는 ‘그들이 미개해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인류의 공생을 위해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인권을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하겠지만, 아직 인권의식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한 지역의 오래된 문화를 폄훼할 수는 없다.
경상권에 갈 때는 이천 – 여주를 지나 충북을 거쳐 가게 된다. 첩첩이 산중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과 들, 사방이 막힌 것 같이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 안에 골짜기마다 숨어있는 사연들에 대해서 나는 모르기 때문에 입을 닫기로 한다. 안동시는 1,522km2의 면적으로, 안양 면적 58.46km2의 26배이다. 서울은 605km2이라 하니 서울과 비교해도 두 배다. 안양의 인구는 저 면적에 55만 정도 되는데 안동인구는 16만에 조금 못 미친다. 현황의 숫자만으로도 얼마나 삶이 다를지 사실 감도 잡기 어렵다.
그저, 시장통에 앉아 내내 고구마줄기를 까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노인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한다.
통영국제음악당의 콘서트홀은 1층에서 외부 계단으로 올라갔다. 아마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을텐데 주차장은 이미 만차라 외부 주차장에 대고 올라가느라 내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콘서트홀이 있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있었으니 주차장에서 올라오리라 생각했다.
약 3층 높이의 콘서트홀의 풍광은 꽤 멋졌다.
입장권을 늦게 예매한 탓에 표가 몇 장 없어 5층 객석을 예매한 것을 발권하고 나서 알았다. 객석이 5층씩이나 되나 싶어 엘리베이터를 찾았는데 객석으로 바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는 없다고 했다.
입장권을 확인하고 있는 직원에게 5층까지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으니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5층까지 걸어올라갈 수 없는 사람이고 내려올 때는 더 문제라고 설명했다. 정말 연결 통로가 없느냐고.
이 직원은 없다고만 대답하고 시선을 돌렸다.
나는 10년 넘게 관절염을 앓고 있다. 2층 정도는 불가피하게 계단을 쓰기도 하지만 에지간하면 계단은 피하는 게 내 건강에 좋다. 하루 5-6천보가 한계이고 1만보를 걷게 되면 다음 날 후유증이 오래간다. 반월상연골판 파열로 시작된 무릎문제는 연골이 닳는 퇴행성 관절염으로 이어지고 남들보다 무릎 주변 근육을 훨씬 더 쓰기 때문에 피로도가 상당하다. 특히 제일 안 좋은 건 계단을 내려올 때 받는 충격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니, 그러면 장애인과 노약자는 아예 입장 불가라는 말인가 싶어 황당해 하고 있으니 체격이 좋은 젊은 남자 직원이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제가 관절염이 심해 5층까지 걸어갈 수 가 없어요. 5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없는 줄 상상도 못하고 예매를 잘못했네요. 무슨 방법이 없겠어요?” 물었더니 이 직원은
“아.. 네 고객님. 저희도 그 문제로 민원도 많아 들어와서요. 문제긴 하죠. 저희도 시설 보완을 준비중인데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지만…”
“아니 그러면 저는 공연을 못 보겠네요? 아니 국제음악당이라는 데가 어떻게 이렇게 설계를 하죠? 이건 인권위에 진정을 넣어도 되겠네요.”
라고 화가 차오르기 시작하는 티를 냈다. 젊은 직원은 잠깐 침묵하더니 통영 억양이 섞인 표준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표를 바꿔보겠습니다. 1층에 잔여좌석이 있는지 살펴보고 바꿔드리면 어떨까요?”
이보다 좋은 제안이 있을 수 있나. 나는 반색을 하며 당연히 그러면 좋겠다고 고마워했다.
직원이 매표소로 들어가 한참을 안 보이더니 표 두 장을 가지고 나왔다.
박부가 직원이 나오는 걸 보고 다가가 표를 받으려고 하자 직원이 나에게 꼭 직접 설명을 드리겠다고 하더란다.
로비 의자에 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온 그는 그 옛날 패밀리레스토랑의 직원처럼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꿇어 앉더니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시설 문제가 있어서 불편을 겪게 되셔서 죄송하고요. 지금 1층은 표가 없다고 해서 제가 2층 좌석을 구해봤는데 2층도 어려우실까요?” 라고 했다.
청년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얘기하는데 괜히 승질부렸다 싶기도 했지만 고마운 마음만 남겨서 “아닙니다. 2층은 제가 갈 수 있어요. 2층 정도는 괜찮습니다. 선생님 배려해주신 건 제가 꼭 기억할게요. 선생님 잘못은 아니죠. 건물 설계를 잘못한 건데요.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그가 가져온 표 두 장과 내 표 두 장을 바꿨다.
공연장은 사진과 같다. 5층은 아니고 4층이었을거다. 통영의 숙소들도 4층이 없었다. 아직 4자를 쓰지 않는 거다. 2층의 객석도 2층에 도착하면 반층 정도 더 올라가야 한다. 영화관도 그렇듯이. 
공연이 끝나고 나는 어셔에게 휠체어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맨 앞이나 맨 뒤에 자리를 마련한다고 대답했다.
오늘 공연은 2층 합창석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객석에 앉아 휠체어없이 밖을 다닐 수 없는 내 친구를 생각했고 의족을 쓰는 지역 선배를 생각했다. 다리가 휠대로 휘어 서 있으면 양쪽 다리가 마름모를 만들던 통영활어시장의 회뜨는 할매도 생각했다. 뇌병변을 앓거나 뇌성마비가 있거나. 당장 이 자리에 있다면, 나와 같은 일을 겪을 사람은 떠올려보면 한 두명이 아니다.
지역연계와 섬연계 기획전 등 다양한 연계전시가 이어진다. 섬연계라니 나같이 도시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자에게는 그저 놀라울 뿐. 섬연계까지 볼 수는 없어서 주제전과 지역연계전인 전혁림 특별전만 보고 왔다.
통영시내 셔틀버스는 있는데 섬 셔틀배는 없다고. ㅎ
주제전은 구 산아SB(조선소) 연구소 건물에서 진행된다. 주차장이 널직하고 진행요원들도 충분히 배치되어 있다. 마당에는 사진처럼 각 섬을 상징하는 조형물들이 있는데. 보시다시피. 뭐 딱히 우와. 하긴 쫌.
주제전은 바다, 생명, 시간을 주제로 한 Take Your Time.
일반 성인 입장료 12,000원.
마지막 티켓팅은 5:15이고 전시는 6시까지 관람 가능한테 – 이 내용이 홈페이지에 없다!
* 직관적 홈페이지 디자인 좋은데 제발 정보를 중요하게 만들자.
전시장은 모두 컴컴하다. 사방이 까맣다. 작품이 돋보이고 집중도가 높다.
1층부터 7층까지 전시가 이어지는데, 그렇다. 계단에도 미디어아트 설치가 있어서 계단으로 올라야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다행히 층마다 다른 전시는 아니고 한 작품이 1층부터 7층까지 이어진다.
한 층 올라 각 층의 보통 2개실의 전시를 보고 또 한 층을 오르는 식이다. 엘리베이터는 차단봉을 설치해뒀는데 진행요원에게 엘베를 쓰겠다고 하면 차단봉을 열고 엘베 버튼까지 눌러준다.
(일단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다 분노하고 왔으니 여기서는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엘베를 타봤더니 엘베는 환한 형광등 그대로다. 그야말로 전시를 보던 분위기를 홀딱 깨주는 것. 전시에 집중하기 위해 올라갈 때는 엘베를 포기했다.
대부분 관람객들은 7층까지 천천히 걸어올라갔다가 엘베를 타고 내려왔다. 중간에 미디어아트 관람실에 낮은 빈백의자가 있어서 쉴 수는 있겠으나, 충분하지 않다. 
4층인가 5층에 미디어아트 모니터만 대여섯대가 전시된 방이 있는데 한 작품을 표현한 모니터에 빛비침이 심해서 반대편 작품과 좌우 양측의 미디어 작품이 계속 반영되었다.
작가가 이걸 봤을까. 작가도 허락한 일일까? 무지하게 궁금했다.
전반적으로 주제가 명확히 반영된 작품들이 있었고 나쁘지 않았으나 주제전이라기엔 통영이라는 지역성을 조금 더 강조했으면 어떨까 싶었다. 쉽게 말해, 바다와 생명, 시간은 알겠는데 그 안의 사람과 노동의 이야기가 쏙 빠진, 잘 정돈된 느낌이 강했던 건지, 내 기대가 촌빨인건지 모르겠고.
7층에서 엘베를 기다리며 서울의 대형 미술관에서는 휠체어를 빌려볼까 생각했다. 등록증이 없으면 못 빌리지 않을까. 눈높이도 안 맞겠지 등등 여러 생각을 했다.
보행약자의 삶의 질은 이렇게 곤두박질친다.
아무튼.
엘베를 쓸 수 있으니 엘베 내부 조명을 어떻게든 너무 홀딱 깨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고.
전시 기획에 장애와 안전은 뒷전이라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들었다. 건강하고 튼튼한 자들을 위한 예술잔치.
새벽에 배를 타고 낚시를 나가겠다던 내 남자친구는, 현금을 안 뽑아와서 선주에게 계좌이체가 되냐고 물었다. 선주의 부인이 좋다고 했다. 도시락이 있냐고 물으니 과자뿐이라면서 계란이 좀 있는데 가져가라 한다. 건담이가 4개니 2천 원 정도 받으시겠냐고 물었고 선주의 부인은 뭘 그런 걸 돈을 받냐고 쑥스러워했다. 천원짜리 두 개를 테이블에 얹어놓고 배를 타고 나갔다. 바다 갯바위 부근에 묶어놓은 뗏목까지 데려다주는 건데 돌아갈 생각이 들면 선주에게 전화를 하면 다시 데리러 온다. 일종의 택시 같은 거다.
몇 시간이 지나 딱히 회 쳐먹기도 어려운 것들만 걸리는데 옆 뗏목에서 철수하는 걸 보니 의욕이 떨어졌다. 아이가 낚시를 하고 싶어한다고 전화도 한데다가 이런 저런 이유가 겹쳐 낚시를 접었다. 선주에게 전화를 하니 아침에 데려다준 노인 말고 젊은 남자가 와서는 요즘 고기가 잘 안 잡힌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다음에는 더 좋은 포인트를 찾아놓을테니 꼭 다시 오라는 말도 했다. 건담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버스정류장 부근에서 장비를 정리하고 있는데 낚싯배를 운영하는 아침의 그 선주 부인이 버스정류장을 쪼르르 달려나왔다.
“버스 기다리시나예?”
“아뇨. 짐이 이리 많은데 버스를 우예 탑니까. 데리러 올낍니다. 아를 데려왔는데, 아가 낚시를 해보고 싶다케가 저쪽 가서 칠라고 접었심다.”
“아, 내는 버스 타고 오셨는지 알고. 새벽에 혼자 오셨길래. 여는 버스타고 오시는 분들 많아예. 택배로 짐 부치고 몸만 왔다가, 택배로 다시 짐 부치고 몸만 가는 분들도 있어예. 내는 버스 타고 가시는지 알고, 아침에 현금이 없다카길래 차비 갖고 나왔는데.”
“아이고 차비를 아지매가 왜 주심니꺼? ”
“요새 현금들 안 들고 다니잖아예. 아침에 현찰이 없다케가 그 생각이 나가꼬. 곤란할까봐 가꼬 나왔지예.”
“고맙심더. 담에 꼭 올께요.”
남친은 아지매가 좋다고 호들갑이었다.
2.
아이와 점심을 먹으러 길을 나섰다. 돼지국밥집을 발견한 아이가 돼지국밥을 먹자고 했다. 딱히 믿음이 가지 않는 간판이었다. 아무래도 체인점인 것 같았는데 근처에 신뢰가 가는 간판이 안 보였다. 우리는 들어가 돼지국밥 두 그릇을 시켰다. 정은정샘이 애정하는 문양의 쟁반에 반찬이 담겨져 나왔다. 양파와 풋고추를 담은 그릇을 빼고 사진을 찍었다. 다른 반찬을 가져다 주러 온 주인 아저씨가 내가 빼놓은 그릇을 다시 쟁반위에 턱 얹었다. 자기만의 규칙을 고집하는 사람일거라 짐작했다.
돼지국밥은 맛이 없었다. 돼지잡내가 심하게 났다. 아이는 오랜만에 먹는 돼지국밥이 반가운지 공기밥을 턱 말아 신 나게 먹었다. 밥을 거의 다 먹을 때쯤 가림막이 높아 안 보이던 옆 홀에서 남자 넷이 일어났다. 검은 피부의 외국인이 작업복을 입고 일행과 함께 나갔다. 항구가 바로 앞에 있었다.
3.
국밥을 먹고 난 뒤 내리 쫄쫄 굶은 남친 주려고 충무김밥을 샀다.
순식간에 2인분이 포장되어 나왔다. 방파제에 김밥을 펴놓고 아이에게 먹으라 했더니 한 점 먹고 안 먹는다.
“왜 안 먹어? 맛없지?” 아이에게 그게 맛있을리 있나.
“이거 진짜 김.밥.이네. 맛없어.”
“이거 여기 오징어랑 같이 먹는거야.”
“안 먹어. 나 라면 먹을래.”
지금의 아이들에겐 어색한 맛. 어른들에겐 한 시절을 관통하는 음식일지도.
4.
몇 시간 후 마을 어귀에서 여러 팀이 낚시를 하고 있는 방파제에서 아이가 처음으로 갯지렁이를 끼우고 낚싯대를 던지며 줄을 풀어보기도 하고 제법 잘 따라하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난 다음 바람을 피해 한 번 방향을 바꿔보고 난 뒤였다.
“헐. 내 지렁이.” 아이가 내 남자친구에게 자기 지렁이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낚시용품을 파는 낚시방에 가면 갯지렁이를 큰 다라이에서 꺼내 작은 종이박스에 담아준다. 아이는 지렁이박스를 바닥에 두고 고양이 밥도 주고 라면도 뽀개먹고 난 다음이었다.
저쪽에 앉아 수조에 물을 채우러 온 횟집 차가 후진을 하는데도 꼼짝도 안 하던 여자의 일행이 왔다 갔다 자리를 몇 번 옮기고는 낚싯줄이 다른 사람들과 엉켜 안 좋은 소리도 나더니만 우리는 그 일행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와 훔쳐갈끼 없어서 아 지렁이를 훔쳐가노. 인성 쓰레기네. 그것도 어린이날에. 미친 거 아이가.” 남친이 그들보고 들으라는 듯 화를 냈다.
통영시내 활어시장에서 그 일행을 다시 만났다. 길막고 서 있는 걸 보니 그들이 지렁이를 훔쳐간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사람 사는 건 다 그래야 구색이 맞는 거라고, 지금 사는 이 집에 이사한 지 얼마 안됬을 때 경비아저씨가 했던 말을 내내 기억하고 있다. 이날 우리는 뽈락이랑 쏨뱅이만 잡아 다시 놔주고 회는 활어시장에서 사 먹었다. 살아있는 것을 미끼로 쓰고, 살아있는 것을 잡고, 또 살아있는 것을 그 자리에서 죽여서 먹고, 그리고 또 살겠다고 나서는 것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은 딱히 그닥 숭고한 존재가 아니고 나 역시 숭고해질 생각은 없다. 존재마다 다르게 갖는 생명의 의미와 그에 대한 태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할 뿐이다.
돌봐야 할 것들이 없다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스케줄이 없다면 다음 스케줄이 있는 때까지라도
한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나는 여기 저기 매인 게 많고 소속된 게 많고 맘껏 떠나기에 뿌리를 너무 많이 뻗어버려서.
가끔 지나간 사진을 들춰 본다.
여수 돌산의 작은 마을은
정말 사람이 안 사는 것처럼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관광+낚시를 활성화하고자 전략을 세운 것 같았으나 그날은 토요일인데도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항구를 지키고 있던 개가 목줄에 묶여서 몇 번 짖어댔을 뿐. 작은 항구가 있는 마을엔 가끔 개집이 하나 놓여있고 거기에 누가 키우는지 모르는 세상 단 한마리의 개가 있곤 하다.
나는 왜 도시에서 태어나 빙빙 돌다 바닷가 남의 동네에 와서 기웃거리고 사나. 어촌에서 태어나 고기를 낚는 아버지와 물질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어디쯤에서 또 헤매고 있을까.
떠나오면 어디든 그리운 법.
헤세는 고향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 했다.
고향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다.
통영 중앙시장이 활어가 싸다길래 가봤다. 중앙시장은 활어시장과 붙어 있는데 항구의 출입구와 바로 맞닿은 곳은 통영활어시장이고 바로 옆에 중앙시장이 있다.
통영시장 앞 통영항
이순신 컨텐츠로 밀어부치는 느낌. 활어시장 입구
통영활어시장은 위치로 봐서는 그야말로 항구에서 막 잡아온 활어를 받아다 팔 수 있을 것이다. 항구 바로 앞에 주차장이 있고 4차선 도로 앞에 활어시장이 있다.
통영활어시장만큼 싼 곳이 없다길래 회를 먹으러 갔다.
시장 한 가운데 쪼그려 앉은 아지매들이 소쿠리에 각종 바닷고기를 놓고 흥정을 한다. 감성돔, 민어, 점성어, 도다리, 능어, 송어, 제철에 올라오는 온갖 고기들이 있다.
입구쪽과 안쪽 가격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생선을 잘 아는 사람이 흥정을 잘 해야.
생선을 고르고 흥정을 마치면 아지매들이 잽싸게 회를 뜨기 시작한다. 생선을 도마에 놓고 칼로 정확하게 뼈를 발라낸 뒤 껍질과 살점 사이에 칼을 집어넣어 살살 밀다가 손으로 생선 껍데기를 확 벗겨낸다. 비늘을 다듬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다. 껍질과 내장, 뼈를 다 발라낸 생선은 소쿠리에 다시 넣어 물에 헹군다. 아지매마다 수도꼭지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콸콸 물이 나온다. 모두들 어부바지와 장화를 신고 있다. 목욕탕의자만큼 작은 의자에 앉은 아지매가 허리를 펴지 못하고 구부정한 상태로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앉으며 회써는 도마를 초벌손질 도마 위에 올린다. 포장비닐 안에 들어있는 흰 수건 위에 손질을 마친 생선을 올려 물기를 꽉꽉 짜낸다. 오로지 악력으로 물기를 짠다. 다시 살점을 꺼내 흰 도마위에 얹고 먹기 좋게 회를 썰어준다. 배바지는 배바지대로, 세꼬시는 세꼬시대로. 흰색 스티로폼 도시락에 대나무포장재를 얹은 위에 횟감을 썩썩 얹는다. 매운탕을 먹을거냐고 묻고 먹을 거라 하면 뼈는 다른 흰 비닐봉투에 얹어준다. 흰 비닐에 각각 도시락을 담고 검은 봉투에 한 번 더 담아주면 아지매의 역할은 끝난다.
우리가 감성돔 한 마리에 도다리 세 마리를 삼만원 주고 사서 회를 썰고 있는 사이, 비어 있던 옆자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분명히 통영 사투리인데 이야기가 심상치 않다.
“니 어데 갔다왔노? 고기를 이래 놓고 몇 시간을 안 나타나면 우짜노? 오다가 뭔 일 났는지 알았다.”우리 회를 써는 아지매가 옆 자리 여자를 보고 말한다. 옆 자리에 나타난 여자는 야구모자를 쓰고 안경을 쓴 젊은 여자다. 시장에서 제일 젊은 여자로 보였다.
“아가 아파가지고예. 캄뽀디아에 전화를 했는데예. 전화가 안되지 뭡니까. 아 그래가지고예. 전화를 계속 하고 머 이래 이래 하다가, 연락이 안 되가꼬.” 여자가 하는 말을 나는 못 알아듣겠는데 부산 출신 동행은 들으며 웃고 있고, 앞자리 옆자리 아지매들은 빠른 사투리로 지청구를 했다. 앞자리에서 해산물을 팔던 아지매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댔다.
“안 오니까는 걱정을 했지. 뭐 사고라도 났는가 싶어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동행을 바라보자 캄보디아 사람인데 애가 아파서 고향에 전화한다고 자리를 비웠다고 해준다. 다시 여자를 보니 이목구비가 좀 달라보인다. 사투리는 제대로였다.
횟감을 들고 시장을 둘러치고 있는 초장집으로 들어간다. 초장집은 1인당 4천원 정도의 상차림비용을 받는다. 음료수와 술값은 별도고, 매운탕은 10,000원을 받는다.
시원시원한 사장님이 있는 초장집
누가 갖다줬다고 그냥 먹으라고 주신 생미역
초장집 메뉴판
만원에 매운탕 추가
해산물 이렇게 만원
꾹꾹 눌러담은 삼만원어치 회
초장집 아지매의 말씨가 구성지고 맛깔난다. 원래 장어구이도 하는 집인데 노인네들이 와서 장어값이 비싸네 어쩌네 한다고 짜증이 잔뜩 올랐다.
“할배요. 그거 그리 돈 생각하고 먹으면 다 맛이 없는깁니다. 그냥 먹을 때는 맛있게 자셔야지. 그렇게 비싸네 어쩌네 돈 생각할 거 같으면 딴 데 가이소 마.”
전채음식이 하나도 없어서 해산물이 좀 먹고 싶다 했더니 동행이 1만원을 들고 나가 해삼멍게개불을 사왔다. 해삼은 주로 딱딱해서 잘 못 먹었는데 여기만큼은 오독오독 잘 씹히고 고소했다. 굴은 소량으로 안 판다 해서 맛을 못 봤다.
저쪽 끝에 수도권에서 온 듯한 커플이 앉아 초장집 아지매에게 이런 저런 걸 물었다.
“고등어회가 어디 어디가 맛있다던데, 거기 아세요?”
“어데?”
“ㅇㅇ이라고..”
“거기가 맛나다하요?”
“블로그 봤는데요. 인터넷에 올라온거요.”
아지매가 걸레로 바닥을 훔치며 낮지 않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 집이 맛나다해요? 대체 누가 그런 걸 올린대요? 난 그것이 참말로 궁금하네.”
“어머 아주머니 표정이 안 좋으셔요. 맛 없는집이예요?” 여자가 웃었다.
“마, 가보이소. 가봐야 알제. 뭐든지 다 자기가 묵어봐야 이게 맛나나 안 맛나나 확인이 되제. 가보이쏘. 가보고 댓글 달아보소.”
커플이 가면 안되겠다고 속닥거린다.
여자가 계속 아지매에게 맛집을 물었다.
“시락국은 거가 아이고, 거 말고, 그 대로변에 큰 집이 있어. 거 말고 그 안에 들어가면 쪼만한 데가 있어요. 거가 제대로지. 그 아지매가 서울아지맨가 그래. 그 집 간판? 그 집 간판 없을걸. 간판 못 봤는데? 여보, 당신 그 집 간판 봐쓰요? 못 봤제? 응. 그 집 간판 없다. 없을기다. 낸 본 기억이 없어. 원조는 무슨, 여기 뭐 죄다 원조지 그래 따지면. 60년이고 50년이고, 우리도 여기 24년 됬쓰요. 그럼 뭐 우리도 원조지. 방송 나온 집? 방송 다 나왔쓰. 돈 내고 방송 나오라케. 우리도 아니 초장집도 돈 내고 방송 나오라카대. 안 나간다캤어. 뭔 초장집에서 돈 내고 방송엘 나가. 그 시락국은 일찍 닫아. 새벽 4시에 열고 9시에 닫아. 거가 원래 뱃사람들 먹는 데지. 외지 사람들 먹는 데가 아니예요.
충무김밥은, 명가가 좋다. 거가 재료를 좋은 거 써. 밥이나 김은 다 똑같애. 그 무침 있자나. 반찬. 오징어 이런 걸 존 거 쓴다. 거가 좋고. 꿀빵은 원래 꿀봉이가 원조다. 갸가 그거 하고 나서 돈 좀 번다카니 여기 저기서 따라해가 톳빵이고 뭐고 난리다. 아주.
다찌집? 다찌집은 다 거기서 거기지. 근데 외지사람들이 둘이 가면 사실 다찌집에서 별로 안 좋아해. 그게 왜그냐하믄, 통영 사람들이 술을 엄청 마셔요. 서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그만큼 못 마셔. 한 상에 4만원 이래 하면, 술을 추가해야 돈이 된다고. 술에다가 안주가 기본으로 나가자나. 술 한 병에 만원 받는데 안주가 새로 나간다고. 근데 둘이 가서 술하고 안주를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노. 그 집은 술이 계속 나가야 돈이 된다 말이다. 근데 둘이 가서 두 병 마시고 한 상 받으면 그 다 먹지도 몬한다. 여러 명 가서 여러 병 먹어야 좋아하지.
아 택시? 멀다캤는데 가깝드라꼬? 통영사람들이 승질이 급해가 다 그러고 다녀요. 걸어가도 되는데 그걸 못 기다리는기라. 버스도 다른 도시보다 정거장 사이가 짧아. 근데도 그걸 못 참아. 택시 탄다꼬. 버스 정거장 하나 거리가 문 열고 닫는 시간인기라. 승질이 엄청 급해.”
아지매의 말을 들으며 낄낄대느라 불편했던 마음이 모두 사그라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아지매가 말하는 식당의 간판을 적었다.
동피랑 올라가는 길. 다음을 기약하며 패스.
통영에서 그렇게 회를 먹고 동피랑 마을 아래 커피집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집으로 가려고 운전대를 잡았다. 회를 써는 아지매들을 보며 눈물이 나더라고 내가 말했다. 동행은 생선이 불쌍해서 울었냐 할매가 불쌍해서 울었냐고 물었다.
그게 아니라. 그 삶에 대해서, 내가 너무 비겁하게 사는 거 같아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수십년을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채, 여름엔 더워서 물것이 상할까봐. 겨울엔 추워서 손에 감각을 잃은 채로. 하루종을 물에서 생선을 건지고 또 썰어대던 손목. 그 앞에서 문학이니 예술이니, 모두가 나발이다.
부끄러웠다. 내 삶이. 이렇게 살아도 되나. 선 채로 나불대며 입으로나 떠들고, 앉아서는 모니터 앞에 앉아 헛된 주장들만 쏟아내는 이 따위 삶은 얼마나 비겁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