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한 살과의 대화 2.

“어머님 저 왔어요.”
안경너머로 활짝 웃는 청년.
사윗감 아니다. ㅋ
딸래미 학교 동기인데 지난 여름에 동기들이 돌아가며 친구네 집을 방문하고 2박 3일씩 보냈다. 우리 집에도 2박 3일 묵었다 간 한 녀석.

오늘 다른 선배와 놀러와 하루를 자고 내일 다시 학교로 내려간다.

딸아이도 그렇지만 이 또래 아이들은 참 이런 저런 것들도 많이 물어보고 조언도 듣고 싶어한다. 나는 저러지 않았던 것 같다. 어른에게 뭘 물어본 적도 없고 니깟게 나이만 처먹었지 뭘 알겠냐는 표정으로 기성세대를 바라보던 내가 그래 엑스세대다.

자꾸 느끼는 건,
아이들은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받고, 모든 일을 애써 너무 잘 하려고 들며, “즐긴다”는 게 뭔지 그 실체를 알지 못하며 “칭찬을 받으면” 그게 다 이룬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내게 말하길,
칭찬받고자 하는 자기 마음과 잘하려고 애쓰는 자기 마음이 스스로를 얽매서 불편하고 분명히 그로 인해 열등감이 증폭되는 걸 느끼기 때문에 이 감정이 매우 거슬리는데 이게
자기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거다. 돌아보면 제 친구들도 다 그러고 있고 자기도 남 비난을 너무 쉽게 하면서 남들도 자기를 너무 쉽게 비난하기 때문에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압박감도 같이 온다는 것이다.

병든 사회를 물려주었다.
아이들은 칭찬받기 위해 애쓰는 문화에서 어린시절을 고스란히 탕진했고 상받고 잘 해내야지만 자기가 가치있는 인간이 된다고 주입받으며 자라버렸다.

매일 매일 애쓰며 사는 게 고단하고 힘든데 그런 불평을 하면 안될 것 같아 그마저도 늘 숨기고 지낸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놀리고 남을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공격성으로 자기
자신을 감추고 또 거울을 보며 자기자신에게도 손가락질을 하는 거다.

넌 한심해. 나도 한심해. 근데 가끔 니가 더 한심해.

이건 어쩌면 일베사상의 근간 아니었나.
나도 등신 너도 등신 우리모두 등신. 근데 쟤가 오늘은 최고 등신. 그러니까 놀리자.

2015. 1. 13.

스물 한 살과의 대화 1.

큰 아이와 몇 시간에 걸쳐 띄엄띄엄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의 고민은 과를 바꾸는 것인데 그 바닥에는 취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다. 나는 대학 4년간 해야 할 일은 가장 넓게 보고 넓게 경험하는 일이라 생각해왔고 아이에게도 그러길 바란다고 권해왔다.

직장들어가 승진하는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면 어쨌거나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우선이고 전공과 먹고 사는 문제는 연관이 없지도 있지도 않은 개인의 그 때 그 때의 사정에 달려 있으니 취업을 우선시 해서 결정하지 않길 바란다 했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지금 20대들의 상황은 생각보다 매우 나쁘다. 스펙 좋은 아이들은 특정 계층에 몰려 있고 어차피 내 새끼들은 그 계층과 승부를 볼 수 없으며 그런 일로 스트레스 받길 원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예측불허인 일들은 산처럼 몰려올테니 그저 한 순간 한 순간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느냐 했다.
덧붙여, 이 글로벌한 세상에 이 나라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고 인공재해로 인해 한 나라가 작살나는 경우도 많은 위험시대에서는 어느 나라에 가서도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했다.
예를 들어, 네가 낯선 도시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떨어져 한 끼 식사를 벌어먹을 수 있는 거리에서 펼칠 수 있는 재주 같은 건 꼭 키웠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아이가 물었다.

“엄마때는 우리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취업도 잘 되고?”

“좋았다고 할 수 없지만 너희보다야 나았지.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냥 잘 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다 다들..
대학 졸업하고 취업이 되었다가 모두 취소통보를 받았지. 네 아빠도 ㅎ대기업에 취업이 됐다가 취소당했다 하지 않더냐.
그 전조증상 같은 것도 있었어. 고 3때 한 달에 한 분씩, 친구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거야. 자살은 없었어. 심근경색, 뇌졸중, 간경화 뭐 그런 스트레스성으로 줄초상이 이어지는데… 굿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었어.

뭐 취업할라니까 IMF터져서.. 다들 공짜로 일하고 전문 자격증 따고 그랬어. 엄마는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하고 살아서, 잘 몰라. 너 같은 고민을 해 본적이 없다.”

취업고민 해 본 적 없다. 그래서 늘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있지도 않은 시절에 비정규직으로 떠돌았고 퇴직금으로 스타킹 한 박스 받아본 적 없다. 그래도 먹고 살 수 있었다. 내가 뛰는 만큼 스물 한 두살에도 잠을 줄이면 몇 백씩 벌기도 했으니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은 벽이 점점 좁아지는 큐브속에서 두려움에 떨고만 있다.

어차피 옛사람들이 말하는 입신양명 못할 거,
그저 즐겁고 행복하길 바랄 뿐.

2015. 1. 12.

새마을운동을 부르는 시대

1.
아이가 보는 마인크래프트 게임중계 유투브 영상이다. 양띵의 마인크래프트에 나오는 장면.

마인크래프트는 정육면체 블록을 이용해서 기본적으로 집을 짓고 양식을 구하는 등 생존을 시작하고 발전하면 마을과 도시를 만들거나 여러가지 모드를 사용해서 다양한 세계를 구축하는 게임.

최근 초딩들에게 각광받는 게임이며 일부 학교에서는 방과후 컴퓨터수업에도 활용한다. 정육면체를 이용해 공간활용에 대한 학습이 가능하다.

그 일선엔 아프리카티비에서 게임중계를 한 양띵이라는 게임중계자가 있다.
양띵은 미소와 옴므 등과 함께 양띵크루를 만들어 합동으로 진행을 하고 있는데 지난 해 양띵은 유투브 한국인 크레에이터중 최고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지금은 CJ E&J와 계약을 체결해 앱을 출시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양띵의 이런 행보를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이 처자는 1990년생으로 2007년부터 아프리카티비 BJ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뒤져보니 얼마 전 “민주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하는데 그에 대해서도 적극 사과를 했단다.

아이가 유투브로 양띵 방송을 볼 때 나도 옆에서 가끔 지켜보는 편이다. 욕설도 나오고 편안하니 초딩부터 청년층까지 재미있게 볼 만한 컨텐츠를 생산하는 건 분명하다.

욕설에 대해서는 나는 매우 관대한 편이며, 영어 섞어쓰는 보그병신체보다는 욕설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 또한, 방송에서도 불현듯 욕이 튀어나왔다가 자제합시다~ 같은 말도 이어지기 때문에 금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어제 본 방송에 새마을농사 미션이 있었는데 플레이어 (마인크래프트는 게임하는 사람의 시각에서 화면이 움직인다)가 새마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치다 이 장면을 봤고 아이에게 이게 뭐냐고 물으니 새마을농사를 짓는거라고 대답했다.

2.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시대에서 큰 비중을 가져온 일이며 그 평가는 여러 갈래다.

나는 (김영미 저 / 푸른역사 펴냄)을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고 그 책에 이어 새마을노래를 벨소리로 하고 다니는 골수 새마을키드 한 분을 인터뷰 한 적이 있다. 박근혜정부가 새마을운동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에 대해 알레르기가 일어나지만 새마을운동을 단순히 박정희 독재의 상징으로 바라봐도 되는지 궁금하다. 참여한 국민들이 있었고 저항보다 동원에 적극적이었어야 했던 가난이 있었다.

박정희가 그렇게 오랫동안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시대상이라고 본다.
4.19를 주도했던 세력들은 대체 어디서 뭘 했고 당시 국민들은 뭘 했길래 소장이 쿠테타를 일으키고 18년동안 독재를 하게 내버려뒀는가. 이미 이건 역사가 되어버렸다.

내가 느끼는 문제는, 복고와 보수주의가 같이 오면서 우경화가 그 바닥에 깔어 있다는 것이다.
공안정국, 조작질은 이 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고 우경화도 전세계적으로 전방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내가 보는 것은 현상이다.

인기절정의 개그콘서트에서 일베의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고, 여성비하, 외모비하가 공중파를 타며 일반화 되는 오늘, 일베의 용어를 쓰면 개망나니가 되고 호로자식이 되며 일베는 일베가 아닌 사람들을 비하하고 공격하길 즐긴다. 오유나 다음까페의 커뮤니티에서는 페이스북 유저들을 꺼려하고 페이스북 골수유저들은 오유와 다음까페를 무시하는 이 요상한 현상.

서로간의 교차하는 컨텐츠를 가지고 싸우거나 타 집단의 용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거침없이 비난을 해도 되는 이 분위기.

70년대를 불러내고 정신승리를 부르짖는 이 분위기. 모 논객이 토 나온다고 했던 바로 그 분위기. 그 현상을 보는 거다.

나는 이 나라의 젊은이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거나 정신적 세뇌를 받아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돈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외롭고 우울하고 처참한 세상에서 현대인을 움직이는 건 “멋져 보이는, 좋아 보이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새마을운동이 아름답고 숭고한 일로 보일 수 있다. 그 말은 새마을운동을 대체할 다른 역사적 컨텐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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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 2

살수록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는 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자꾸 겪게 된다는 뜻이다.

이따봐용맘미. 라고 카톡을 보내는 딸아이의 수줍은 미소는 왜 이리도 처연한가.

하루 종일 술독에 절궈져 초저녁부터 코를 고는 사내 앞에서 티비를 틀어놓고 춤을 추는 아이의 허벅지가 튼튼하다.

늙은 개와 손바닥만한 아파트단지를 두 바퀴 돌았다. 이제는 누구 앞에서도 울고 싶지 않은 나이가 되었구나.

하늘에 초승달이 날을 세운 채 반짝인다.
이 가슴에 와서 꽂힐 것처럼. 누구를 노려보는지.

2014. 12. 28.

초승달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콧수염 사내가 말했지. 요즘들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사내가 참 그립네.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온다는 말은 참담하다. 수많은 비극을 겪어야만 한다는 건지.

“칭얼칭얼”을 하지 못해 그 자리에 “씨발씨발”을
넣는 어른들이 있네. 익숙했던 풍경은 수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반복되고, 우물속에 빠진 두레박에 어린 계집애 둘이 떨고 있는 그림이 되네.

달님 달님
우리를 살리시려면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달님은 귓구녕이 막혔는지 대꾸가 없네. 손톱이 파이도록 기어 올라온 우물가에 입을 떡 벌리고 서 있는 호랑이 한 마리.

떡 하나 줄께 잡아먹지 말렴. 제발. 너도. 고양이가 되는 건 어떻겠니. 누군가를 잡아먹는 건 너무 고달픈 일 아니겠니.

2014. 12. 28.

이태원 어느 술집

간판엔 뭐라 뭐라 글자가 써 있는데

당췌 이놈의 지구가 흔들려 알아먹을 수다 없었다.
소리가 나는 플라스틱, 유치찬란한 발을 열고 들어선 그 집은 술도 팔고 차도 팔고 뭐 또 다른 것도 파는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은 자꾸 나더러 집으로 가라 했다.
만원짜리 카스맥주 한 병을 두고
이 길에만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고
내가 말했다.
세월이 오래 지나 빚을 진 것만 같은데
술 취한 그 사람 1과, 술 취한 그 사람 2와, 술 취한 그 사람 3을
이 거리에 버려두고 나 혼자 멀리 떠났다고
만원짜리 카스맥주 한 병을 놓고 주절거려 봤지만
긴 얼굴에 푹 파인 드레스, 납작한 가슴의 그 사람은 여자이며 남자이고 예수이며 마리아처럼
나에게 자꾸 집으로 가라 했다.
이것만 마시고 집으로 가라 했다.
썩을 놈의 지구는 맨날 술에 쩔어 있는지
온 시야가 뿌옇게 되는 밤이면 뿌옇게 남은 그 얼굴이 생각나는데, 남자이며 여자이고, 가장 완벽한 인간이던 그 사람이.
젠장맞을 간판이 기억이 나야 말이지.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 겨울

 

1992년 봄. 낯선 선배가 찾아와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 따라 나오라고 했다.

우리 학교에는 독서서클이 있는데 비밀서클이고 학교에서는 알아서 안되는 일이라 했다. 한 학년당 네 명을 뽑는데 선배 중 누가 너를 추천해서 찾아왔으니 내일까지 결정을 해서 답을 달라고 했다. 별 일은 아니고 한 달에 한 번정도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지만 전교조 문제로 교장이 예민할 뿐이라고 했다. 선배는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갔고 나는 “선택받았다”는 느낌이 좋았다. 의식화라고 말하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고 노태우랑 전두환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며 김대중에 대해서도 잘 모르던 수준이었다. 그저 나는 이 사회가 많이 잘못되었고 이 학교도 무척 잘못된 채 굴러가고 있다는 것만 아는 정도의, 막말하는 년에 불과했다.

 

듣기로,

1989년 전교조가 시작되어 교사들이 해직되고 파면당할 때 내가 다닌 여고의 선배들은 까만리본을 달고 등교를 하고 도시락을 복도에 내놓는 단식투쟁을 했다고 한다. 교무실에서 지정하는 반장, 부반장이 모두 사퇴하고 각 반마다 대표 두 명을 자율적으로 뽑아 (그럼 그 전에는 학교에서 임원을 지정했다는 게 더 이해가 안 간다) 30인회를 구성하고, 이 선배들이 교장실에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여러 가지 민주화과정을 요구했다고도 들었다. 그 때 많은 선생님들이 이런 투쟁에도 불구하고 파면, 해직 당했고 우리학교는 사립이라 더욱 쉽게 잘라낼 수 있었다. 이후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여상 교장으로 있던 학원장이 K대 명예박사과정중이라 K대 출신 석사생들이 대거 교사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풍문도 있었다. 사실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나 정말 K대 출신 교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거의 평균출생년도 1960년생. 당시 30대 초반. 아는 건 겁나게 많고 인문과목 선생들은 서로 바꿔서 수업을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지적능력과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활기찬 사람들이었다. 그 때 교사들과 함께 선배들도 학교를 짤렸는지는 몰랐다.

 

1992년 학교 담벼락을 공사하는 사이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어느 날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던 아이들이 히터를 틀었다. 새마을과장인 50대의 영어선생이 그걸 발견하고 교실에 있는 아이들을 모두 복도에 불러세웠다.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따귀를 맞았다. 저 끝까지 한 대씩 때린 영어선생은 다시 돌아오며 한 대씩 때렸다. 그 며칠 전엔 어느 졸린 수업시간에 누구 노래 좀 듣자는 아이들의 성원이 있었다. 교사가 그걸 허락했고 복도를 지나가던 교장이 그 소리를 들었다. 교장은 벌컥 앞문을 열고 들어와 “수업 중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라고 소리를 질렀다. 교사는 그 자리에서 그냥 학생과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두 가지 일이 있고 난 뒤 어느 날 학교에 갔더니 책상서랍에 이 유인물이 있었다. 교장실과 교무실에는 뭉치로 뿌려져 있었다고 했다. 나를 불렀던 선배들 네 명이 한 일이었다. 후에 그들에게 그 날 밤의 무용담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몰래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불쾌했고 반장이었던 나는 전교 반장단이 모인 자리에서 교장이 얼마나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낼 수 있는지 정확히 봤다. 그 분노에 숨이 막혀 나는 공황발작 비슷한 걸 일으키며 쓰러졌다. 집안사정으로 자퇴를 했다가 겨우 다시 복학을 한 나에게, 다시 정학이나 퇴학이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건 옳은 일이었다. 뭘 선택할 기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쓰러지는 것 뿐이었다. 아이들에게 질질 끌려 양호실로 돌아갔고 미친 듯이 난리를 치던 교장은 며칠 후 나를 보고는 몸은 괜찮냐고 물어봤다.

 

다음 해 문학과목을 배우게 되면서 지금은 모대학에 문창과에 출강하는 안모씨가 문학선생이 되었다. 그 지엄한 교장 밑에서도 취해서 들어오는 날도 적지 않았던 그 양반이 어느 날은 술 냄새를 달큰하게 풍기며 들어와

“얘들아. 바다를 보고 싶지 않느냐. 바다! 바다! 아 동해바다! 동해바다로 가자!” 하더니 아이들을 모두 이끌고 학교 수돗가에 세워져 있던 스쿨버스에 애들을 태웠다.

관광가이드처럼 버스 앞에 선 문학선생은 “자, 이제 이하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이 버스를 타고 동해바다로 가는거야! 이하나. 뭘 부를거냐!”

“고래사냥?”

“그렇지!! 역시!! 그래! 우리는 동해바다로! 고래를 잡으러 간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 뿌우니이네에~ 열여덟 아이들 앞에서 열 아홉 내가 서른 서너살의 술취한 문학가와 함께 덩실덩실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노래가 끝나고 문학선생은 너무 심취한 나머지 신이 나서 지나가는 요구르트 아줌마에게 100원짜리 요구르트 48개를 사서 아이들에게 돌리고 자기도 하나 마셨다. 광란의 분위기가 멈추기 전에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버스 문을 두들겼다.

 

“선생님. 헉.헉… 선생님. 교장실.. 헉. 헉. 교장실.. 교장선생님이.. 헉헉. 지금 노래한 거 .. 이하나죠. 헉헉. 둘이 같이 들어오시라는데요. 헉헉.”

 

안선생과 나는 둘이 같이 교장실로 불려들어가 나란히 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교장은 나와 안선생의 중간지점으로 정확하게 교장명패를 던졌다. 안선생이 술이 취해서 몰랐던 모양인데, 그 스쿨버스는 교장실 창문 바로 아래 주차되어 있었다. 교장실에서 10분 넘게 욕을 먹고 나오는 길에 안선생이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안선생의 1미터 넘는 어깨가 무척이나 무거워보였다. 그 다음해에도 내 문학선생은 안선생이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동지의식을 가지고 문학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가끔 나에게 단편소설을 낭독시키고 본인은 잠을 자기도 했다. 좋다. 좋아. 잘 읽었어. 내가 읽는 건, 김유정의 동백꽃의 대사 “느 집엔 이거 읎지?” 이런 사투리와 적절한 성대모사였다.

 

<나무가 보내온 편지> 하명희작가의 소설을 전성원편집장의 소개와 양돌규선생의 소개로 읽었다. 나는 그들의 후배가 된다. 내 위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전교조집회에 앞장 서 있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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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85617221

1989년, 중학교 2학년때 전교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우리 학교에서도 몇 명의 교사가 해직되었으나 너무 조용히 진행되었다. 등교투쟁도 있었으나 나는 학생회 부회장인데도 알 수 없었고 나는 전교조의 문제보다 학생의 자치권에 관심이 있었을 뿐. 간선제였던 학생회 임원들을 직선제로 돌리는 것에 집중하고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때 우리 학교에서 해직당한 교사 한 명이 전교조 총무로 인터뷰 하는 화면을 보기도 했다.

1993년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전교조집회가 있었다. 나는 우리 한뜻 친구들 여덟명과 함께 그 집회에 참석해 열심히 팔을 휘두르며 전교조노래를 불렀다.

보라 힘찬 우리의 깃발 / 당당한 우리의 선언 / 학교위에 높이 날리며 / 참세상 횃불 춤춘다. / 우리 흘린 피와 땀으로 / 참교육 곧게 세우고 교실 가득 가슴 한가득 / 폭압을 뚫고 가네 / 살아오는 아이들 손잡고 / 교단에서 거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교육 노동자 / 전교조 우리의 사랑 / 전교조 우리의 생명 / 참교육 승리 그날까지 전진하는 동지여 / 보라 푸른 조국의 하늘 / 솟구쳐 오르는 새 날 / 한라에서 백두까지 / 물결쳐라 전교조 /

 

그 때 누군가, 이게 마지막 전교조 집회라고 했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어찌되었건 나는 다음 해에 고3이었으므로.

한뜻에서 같이 활동하던 친구는 내가 고3이 된 해에 연세대에 입학했다. 1995년 내가 명동호프집에서 시급 2500원을 받으며 300평정도 되는 호프집을 헤집고 다니며 맥주를 나를 때 그 친구가 이른 저녁에 나를 찾아왔었다.

“나 한총련 탈퇴할려고.”

“왜.”

“나는 있잖아………… 이런 건 아닐거라고 생각했어. 왜 여기서도 권력투쟁을 하는 지, 나는 그게 이해가 안간다.”

친구는 혼자 앉아 맥주 몇 잔에 담배를 한 갑 몽땅 뽀개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 한총련을 탈퇴했고 그 다음해에 연세대 사태가 있었다. ㄷ여대 노래패에서 활동한다던 친구는 지금 뭘하는 지도 모른다. 다들 흩어져 그냥 애엄마로 사는 건지 아무도 뉴스에 나오지 않고 페북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생각이 났다.

잊었던 노래가락도 생각나고, 그 노천극장의 깃발들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되었는데 나는 뭔가 어설픈 시대에 발만 걸쳤다가 어설프게 밀려났거나 내가 뒤돌아 나왔거나 내 밥상에 밥그릇을 챙기느라 멀리 본 적이 없다. 그저 이렇게 책으로 다시 읽고,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추억만 하는 무력한 삶이다.

 

2014. 12. 29.

 

 

마흔

10대는 뭘 주도적으로 할래도 할 수가 없는 시기라 그냥 묶여서 노예처럼 산 게 분명하다.
아니라고 해봤자, 그 때 온전한 자기 선택이 어디 있었나. 무서운 일이다. 그게 습관이 되어버렸으니.
성인이 되기 전에 선택과 자기의사표시를 억제당한 채 자라나서 성인이 된다는 건 판단과 정서적 장애를 수반하고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말이다.

20대가 되어 성인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술 마시고 저임금 고노동에 기꺼이 투신하는 일이다. 20대는 너무 어려서, 또는 어리지 않아서 아무 것도 가다듬지 못한 채 바쁘게 뛰어만 다녔다.

좌절할만큼 좌절했다고 느껴서 자신감이 어느 정도 붙은 게 30대였다면, 그 때는 대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지 알 수가 없었고 어떤 날엔 신문지를 밟고 서서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고 발톱을 깎다가 멍하니 눈의 촛점을 풀어버리기도 했다. 오늘만 산다는 대사는 원빈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제의 일도 기억나지 않는 무기력에 있었고, 분명히 길을 잘 못 들어선 거 같다는 불안함, 삶을 더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공황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상처받은 것들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고 매일, 오늘 하루만 버티자고 눈을 감다가 마흔이 되어버렸다.

올 해의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은 내가 지난 만 39년간 저질렀던 혹은 믿어왔던 것들의 결과물이다.

끝을 맺지 못했던 일과
한 발만 걸치고 툭하면 내빼려던 도망자정신과
나를 봐달라는 유치한 일곱살의 고착과
돌이킬 수 없는 가족과의 결별을 애도하지 못한 일과
좋은 사람이 되게 위해 쉽게 지갑을 열었던 습관과
강인해 보이기 위해 뒤집어써서 아예 녹아 눌러붙어버린 플라스틱 가면과
소중한 것이 생기면 상실이 두려워 뒷걸음질 쳤던 일과
상처입은 고양이처럼 몸을 옹크리고 앉아 살갗이 짓무르도록 햛아대던 일들이

올 한 해에 모두 결과물이 되어 나타났다.

많은 사람을 만난 만큼 소중한 사람과 헤어진다. 하나의 가치를 버린 만큼 또 다른 생각을 줍는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기억도 나지 않는 산문을 다시 찾아 읽어야겠다.

2014. 11. 21.

자전거 타는 아이

며칠 전에 본 풍경이다.
집 앞에 나서면 좁은 4차선 도로가 있고 500미터쯤 나가야 16차선쯤 되는 대로가 나온다.
내가 어딜 가든 항상 대로앞에서 우회전이나 좌회전을 하게 마련이고 대로 바로 앞에 횡단보도가 있다. 신호등이 잘 안 보일 때가 있고 여기까지는 동네골목이나 마찬가지라 늘 천천히 움직인다.
가끔 버스가 뒤에서 엄청 빵빵거리지만.

저녁이었다. 7시쯤 되었다. 사방이 완전히 어두웠고 저녁의 동네마트는 북적거렸다. 나는 그 날 우회전을 하려고 뼈다귀해장국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일단 멈췄다. 보행신호가 시작되었고 마트에서 장을 본 사람들이 길을 건넜다.

그 중에 자전거를 탄 꼬마아이가 있었는데 엄마 아빠와 함께 마트에 다녀오는 듯 했다. 아빠의 손엔 마트 비닐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횡단보도에 못 미쳐 아이가 자전거 안장에서 미끄러졌다. 요즘 나오는 어린이 자전거엔 짐칸이 없다. 아이의 궁둥이가 주루룩 빠지면서 바퀴 바로 위의 플라스틱 받침대에 엉거주춤하게 걸쳐졌고 아이는 중심을 잃었는데 신호등이 짧다보니 애 아빠가 애 손과 자전거를 같이 잡고 질질 끌기 시작했다. 애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일찌감치 건너 호주머니에 손 넣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보고 있었다.
애아빠는 왼손엔 마트봉투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중심 잃은 자전거와 아이를 한꺼번에 질질질 끌고 있자니 아이가 드디어 꼬라지가 났다.

으앙! 하고 한 쪽 다리가 하늘로 한 번 올라갔다가 바닥에 완전히 자빠지려던 아이는 벌떡 일어나서 거세게 울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바로 앞이었고 신호는 이미 끝났다.

애 엄마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고 뭐라 뭐라 말을 했고 아빠는 한 숨을 쉬는 사이 아이가 도로로 돌진했다. 나는 우회전을 할 수 있도록 신호가 바뀌었지만 불안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애 아빠가 아이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나는 아이를 덥썩 들어올려주길 바랐으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고 아이는 두 번째 내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창문을 내리고 “애를 좀 안아요!” 라고 하고 싶어서 창문을 살짝 내렸는데 애 아빠가 아이를 인도 안 쪽으로 깊숙히 밀어넣고 한 손으로 마트봉투와 자전거를 붙잡고 있었다.
아이는 분이 풀리지 않아 계속해서 울었고 애엄마는 아이 등짝을 두 번 후려갈기고는 다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이아빠는 보따리와 자전거를 끌고, 아이는 엉엉 울며 제 부모를 따라갔다.

저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멋지게 건너는 미션을 수행하지 못해 엄청나게 화가 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매일 매일이 도전이고 그래서 힘겨워한다. 아이에 따라 다르지만, 도전을 즐기는 정도도, 실패했을 때 악다구니를 쓰는 정도도 모두 다르다.

그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헤아려 주면 좋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러자마자 나는 얼마나 그러고 있는지 점검해보았으나 역시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도 나는 아이의 투정과 계속대는 깐족댐에 화를 냈다. 왜 그러는 지는 화를 내고 난 다음에 알게 된다. 사과를 하지 못하고 아이를 재웠다. 자기 전에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아홉살을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나 처리할 수 없는 나이이다. 그건 어른이고 애고 미성숙한 인간에겐 언제나 난제다.

오늘은 많이 미안했다.
어떤 한 가지 사건이, 아이에게 전달하는 메세지가 수십가지여서 그게 어렵고 버겨울 때 아이들은 짜증을 내고 깐족대고 장난을 치고 약을 올리고 말을 안 듣고 주제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꺼낸다.

아이가 곤히 자고 나니, 자전거를 못 타서 분통이 터지던 그 아이가 생각난다.

2014. 11. 17.

커피 한 잔 하러 와

멀리서 날아온 친한 동생을 만나기 위해 남산에 있는 모호텔에 갔다. 비행기 도착하고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그런 거 없이 그냥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방에 들어가 차 한 잔을 마시는데 그 비싸고 유명한 호텔방이 얼마나 클래식하던지.. 1980년쯤 되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로 수십년을 버티는 호텔임이 분명했다.
걸어서 남산을 돌아 명동까지 내려가 아주 오랜만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노점을 기웃거리며 뭔가를 주섬주섬 사기도 했다. 각자의 기억에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커피집에 들어가 커피도 한 잔 마셨다. 음악이 사라진 명동에서 우리가 다시 잡은 세월은 아마 12년이 넘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온 동생은 만날 사람이 있어 거기서 헤어지고 나는 가방을 호텔 로비에 맡겨두었기 때문에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올라갔다. 가방을 찾으면서 투숙객이 아니라 하니 찾아가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달라고 한다. 이름을 적고 전화번호를 적은 다음 주차권을 내밀어 동생방 호수로 얹어달라고 했다. 직원이 다섯 시간 무료주차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돌아서서 묵직해진 가방을 들고 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방향을 찾아보고 있는데 누가 어정쩡한 자리에서 나를 자꾸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정복을 입은 호텔 직원인데, 아까 가방을 찾는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고 회전문 앞에 서 있을 일은 없는데 가방 찾는 데스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보고 있으니 뭔가 이상해보였다. 가만히 쳐다보니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최근 들어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도 자꾸 잊는 통에 한 10초 정도, 정말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연두색 등산점퍼에 주황색 가방을 거의 둘러메다시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 사람은, 1995년부터 1997년경까지 내가 살던 서울역 뒤 동자동의 장학고시원에서 그 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이었다. 나보다 늦게 고시원에 들어와 나보다 일찍 고시원을 떠났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스물 여덟 정도 되었고, 고시원을 나가 고시원 바로 앞에 쪽방을 하나 얻어 살다가 차근차근 돈을 모아 월세방으로 나갔다는 것까지만 안다. 곱상한 얼굴이고 피부가 참 흰 사람이었데 그 당시에 그 호텔에서 벨보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 웬일이야. 세상에 아직도 여기에 있어?” 나는 반갑게 그의 팔을 툭 치며 인사를 했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서로 묻는 것은 뻔했다. 잘 살지? 결혼은 했지? 애 몇 살이야? 와 우리 몇 년만이지? 한 15년 됐나? 그래 15년 된 거 같다고 이야기하고 돌아나오니 15년도 더 된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 오래 있어. 25년 30년까지도 근속을 하니까. 오래된 사람들은 잘 안나가.”
평덕이오빠. 전라도 어디메에서 올라왔었다. 느릿하고 구수한 사투리를 쓰던 그는 말투는 조금 빨라졌고 머리숱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가 본 나는 피부가 매우 거칠어졌고 살이 많이 쪘겠지. 알아보기 어려웠을거다. 내가 가방을 찾으며 이름을 적지 않았으면 그는 알아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여기 있으니까, 커피 마시러 와.”
오빠가 그렇게 말했다. 반갑다고 하면서 또 보자고 하고 돌아나왔지만 나는 그에게 가방에 있는 명함을 건네지도 않았고 전화번호를 주고 받지도 않았다.

그런 시절이 있다. 나에게는.
내가 힘껏 밀며 버티는 거대한 벽. 고통과 가난이 가득한 영혼들이 아우성치며 나를 잡아채가려고 하는 거대한 검은 벽. 무너지면 절대 안된다고 내 등뒤로 힘껏 밀어대며 사람들 앞에서 하하호호 웃고 있는 거대한 벽. 그 시절의 사람들을 만나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그 벽이 다시 내 등을 후려치며 와르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벽.

많이들,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사는데 나 혼자 너무 멀리 도망온 것 같은 느낌. 죄책감은 아닌데, 내가 누군가를 배신한 것만 같고, 내가 너무 동떨어져 온 것 같고, 어딘가 모르게 빚을 진 것 같은 느낌.

말하자면, 가만히 서 있는 기차에서 혼자 내려 뚜벅뚜벅 걸었다가 운 좋게 누군가의 승용차에 무임승차를 한 것 같은 느낌. 절대로 나는 무임승차 하며 살지 않았는데 자꾸만 그렇게 느껴지는 불편함. 그리고, 내가 앞서 달려왔다는, 내가 남들보다 무언가를 더 얻었다는 오만함도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함. 더불어 밀려오는 불길함. 그 벽이 무너질까봐. 다시 그 때로 돌아갈까봐.

6층이나 되는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호텔뒤의 골목으로 우회전과 좌회전을 해서 맞딱뜨린 곳은 다시 그 서울역, 벽산빌딩 앞이었다.
아무리 돌고 돌아도, 과거는 다시 오고 또 재현되고 골목어귀에 숨어 있다가 어깨를 툭툭 친다. 낙엽 하나 떨어지는 무게에 놀라 죽을 수도 있고, 그것 참 곱다 하며 책갈피에 끼울 수도 있을텐데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호텔에 전화를 하여, 오늘 그 사람이 근무하는 날이냐 묻고 커피 한 잔 하러 가겠다고 그래서 “추억”이라는 걸 나눴을 때 내 벽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2014. 10. 25. 141025_iphone5s 1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