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자의 #metoo

중학교 2학년때였다.
초등학교 4학년무렵부터 의붓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주던 사람이라 살갑게 굴었고,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엄마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두 사람은 갈등이 깊어졌고 그 사이에 나와 내 동생이 있었다.

혼자 늦잠을 자던 일요일 아침에 그가 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왔고 여기 저기를 만졌다. 여기와 저기는, 내가 2차 성징이 시작되었다는 걸 명징하게 나타내주는 두 곳을 말한다.
그일 이후, 나는 다른 일로 그와 격렬하게 싸우다 몇 대를 맞고 집을 나가 밤을 새고 들어온 적이 있고, 그 이후로 오래 지나지 않아 엄마와 그 사람은 헤어졌다.
그때 나는 열 네 살이었고, 지금 나는 마흔 네 살인데, 칠순을 넘긴 우리 모친에게 이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이 사실을 직접 엄마에게 말한다면, 그것으로 엄마의 인생이 물리적으로 깔끔하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신철석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며 교사들의 적절치 않은, 지금으로 따지면 성희롱이나 그때로 따지면 음담패설에 불과했던 그 자잘하고 무수했던 이야기들은 차치하고,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안에서 제 음부를 내 엉덩이에 밀어대던 얼굴도 마주치지 못한 수많은 성기들과 학교 앞에서 제 성기를 내놓고 자위행위를 하던 눈도 마주치지 못한 그 성기들은, 존재가 아닌 그저 좆으로만 남았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동생과 단 둘이 살던 이대 앞 대흥동 자취방에 잠든 사이 들어와 불을 끄고 얼굴을 살피던 리바이스 청남방을 입은 그 놈과, 보광동 반지하방의 화장실 문을 열던 그 놈과, 현관 문이 열린 사이 거실에 들어와 팬티를 훔쳐가 골목 사이에 쌓아두던 놈과, 고시원 방에서 자꾸 여자들의 팬티를 훔치던 그 놈도,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스무 살이 넘어 만으로 스무 살이 되기 두 달전, 나는 라이브 호프집의 밴드 싱어였고, 내가 속한 밴드의 리더의 후배가 운전기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실직상태였는데 그 이전엔 유명가수의 소속사에서 로드매니저와 운전기사로 일했다고 자랑을 했다. 그 당시엔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로 유명한 젊은 가수의 매니저 자리를 따내려고 애를 쓰던 중이었고 호감인지 질척댐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을 자주 나에게 보냈다. 그가 업계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며 나를 술자리로 불렀다. 나는 일감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그 자리에 동석했다. 경향신문사 길 건너 편의 작은 술집이었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신문사 간부는 내 이력을 듣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해주고 자리를 떴고 그 가수는 사실 나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나를 불렀던 연예계 종사자, 그 사람은 키가 180이 훌쩍 넘는 거구에 가장 완력이 좋을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술 자리가 파하고 집에 가겠다는 나에게 그는 화를 내며 길바닥에서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며 깽판을 쳤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수습하려는 나에게 여관이 들어가 눕는 것을 보고 가달라고 그가 애원했다. 서교동의 한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그가 나를 때려 눕혔고, 나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으나 그에게 머리채를 잡혀 다시 바닥에 내다꽂혔다. 같이 입실을 하는 순간 강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그가 소리쳤고, 그는 허리띠를 풀어 온몸을 때렸다. 아, 그리고, 나는 그때 생리중이었다.
아침이 되어 인검이 나왔다. 경찰이 문을 두들겼고 나는 경찰에게 신분증을 보였다. 그때 내 표정이 어떠했는지 나는 기억할 수 없다. 경찰은 내가 미성년자라고 했고 그의 신분증을 조회하더니 기소중지 중인 사람이 미성년자 데리고 이런 데 와도 되냐고 비아냥 거렸다. 그리고 경찰은 나에게 “아가씨 빨리 집에 가요.” 라며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여관을 떴다.
그의 이름은 박명호다.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명확히 기억한다. 그의 커다랗던 몸의 무게도 가끔 기억난다. 나는 그 이후로 그를 몇 번 더 봤으나 밴드리더가 사기사건으로 잠적한 이후 나는 그를 다시 만난 적 없다.

그날 여관방에서 나온 정오쯤에 햇빛은 뜨거웠고, 한 여름이었다. 원피스를 입었는데 어깨끈이 찢어졌던 것 같다.
택시를 타고 고시원으로 돌아가, 공동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했다. 마음대로 하루를 쉬거나, 아프다고 일을 거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이후, 나는 그를 경찰에 고발하거나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도 그 사실을 제대로 서술한 적 없다. 그때를 회상하는 글을 쓸 때면 “성폭행을 당했다.” 라고만 적었다. 최근 벌어진 #미투운동을 보면서 자꾸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선명해졌다. 한 가지 더 추가된 것은, 내가 왜 그 일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세상을 등지거나 당시엔 우울증조차 겪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감정을 모두 꼬깃꼬깃 접어서 아무도 못 보는 곳에 쑤셔 박고 산 세월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후의 내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습관처럼 매일을 살았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만큼의 절망을 만났을 때, 살아남는 방법은 습관처럼 사는 것이리라. 나는 그렇게 습관처럼 그 시절을 살아냈을 뿐이다.

그 이후에 있던 수많은 성희롱은 딱히 불쾌한 지경도 아니었다. 그저 같잖다고 느꼈을 뿐이다. 어쩌면 내 감정을 단단하게 만들면서 넘기고 넘겼을 것이다. 매번 닥칠 때마다 고통스러워 봤자, 나만 다친다는 걸 깨달은 동물적 감각일 것이다.
결혼 후, 애 엄마가 된 뒤에도, 마흔즈음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일로 엮인 자리에서 한 차례의 성추행과 성희롱이 있었다.

한 사람은 지역행사에 왔던 젊은이였는데 술자리에서 옆에 앉은 사람을 쓰다듬는 것이 습관 같았다. 다음날 그의 선배였던 나의 지인에게 전화를 해서 엄중하게 경고하는 걸로 넘어갔다. 그의 선배는 나에게 깍뜻하게 최선을 다해 사과했다. 한 사람은 지역에서 알게된 엄마 또래의 지식인이었는다. 일 때문에 같이 회의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 식사에서 그 분은 맥주 몇 잔을 했고 나는 어르신들이 많은 자리라 술을 삼가했다. 겨우 그 정도 술에 거나해진 그 분이 내 차 조수석에 앉아 운전하는 나에게 “한국 차는 키스하기가 참 안 좋다”는 둥, 부인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둥, 으례 쓰는 촌스러운 멘트를 날려 피식 웃었다. 나는 그 이후로 그를 안 만났으나 그분은 아마 본인의 언행을 기억못할 것 같다. 상습법이기엔 너무 어설펐다.

미투운동은, 나도 당했다, 라는 것을 넘어 나도 고발한다, 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내가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 굳이 불편하게 공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이 글을 쓰려고 일주일 넘게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왜 그 사건을 고발하지 못했으며, 지금의 나는 왜 이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내려 하는가. 성폭행과 아동학대의 생존자는, 언론지상에 유사한 폭력사건이 공개될 때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다. 묻어뒀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무의식적 가해가 다시 일어난다. 그 기저엔 죄책감도 있다.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죄책감 말이다.

며칠 전, 나의 늙은 개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엔 캣맘들의 밥을 얻어먹고 사는 씩씩한 길냥이들이 몇 마리 있다. 놀이터에서 놀던 남자 아이들이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던 노란점박이 고양이를 발견하고 고양이를 뒤쫒았다. 아이들은 내가 늙은 개의 목줄을 잡고 걸어다닐 때면 자기가 서 있던 자리에서 “강아지다. 아 귀엽다. 만져보고 싶다.” 라고 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않는다. 내가 목줄을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늙은 개만큼이나 덩치도 큰 길냥이들은, 아이들이 쉽게 쫒아가고 쉽게 접근하고 쉽게 위협한다. 아무도 그 옆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고양이와 친해지고 싶어서인지, 괴롭히고 싶어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가까이 가도 되기 때문이겠지. 옆에 서 있는 보호자가 없으니까.
아이들이 고양이에게 돌을 집어던져도, 숨어 있는 고양이에게 나뭇가지로 쿡쿡 찔러대도, 길고양이의 밥그릇에 신나를 부어 같이 살던 고양이가 죽어도, 살아남은 고양이는 먹어야 한다. 그 하루를 위해서, 먹이를 찾고,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그때 내가 고발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런 것이었을 거다. 내 옆에 보호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테고, 나는 그날도, 그 다음날도 살아야 했으니까.

이어지는 미투고발은 대부분 이름을 가진 자들에 대한 폭로다. 내가 고발할 수 있는 그자들은,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만, 전혀 유명하지 않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고, 이미 다른 죄로 구속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커녕 얼굴도 제대로 못 본 가해자들도 수두룩하다. 그들에 대한 고발도 얼마만큼의 사회적 가치를 가질까. 나는 그 부분을 고민했다.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나의 가해자는 유명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굳이 이런 사소한 얘기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며 기억을 다시 쑤셔 박을 지도 모르겠다.

모든 가해자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알량한 권력이 있었다. 더 큰 권력 앞에서 개처럼 꼬리를 내릴 비겁한 권력이었고, 그 좁쌀만한 힘 앞에 무너졌다는 게 나를 분노케 한다. 프레임 논쟁따위가 끼어들만큼 여유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인간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인생을 뒤집었고 삶의 기준점을 바뀌게 하며 숨 쉬는 방법과 걸음걸이를 바꾼다.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으로 산다. 이 분노와 수치심이 모여, 세상을 뒤엎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건은 절대 없던 일이 되지 않으며, 우리는 절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방법은 하나다.

싸우는 우리가 이긴다.

2018. 2. 27.

#metoo #withyou
#싸우는우리가이긴다

 

덧붙이자면, 부탁하건데, 피해자를 불쌍하게 보거나, 어줍잖은 위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싸울 수 있다고 믿는다.

순대국과 숙대

점심시간이 지난 순대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직원과 눈이 마주치면, 순대국 한 그릇을 외치고 자리에 앉는 법이다.
순대국이 나오기 전 반찬이 나왔다.
자동문이 열리네 안 열리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허리가 완전히 굽은 노인이 들어섰다.
계산대 근처 테이블에 앉은 노인에게 서빙하던 여자가 다가간다.
“할머니 뭐 드려? 순대국 하나 포장? 똑같이?”
노인의 목소리는 멀지 않아도 안 들릴 것 같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도 모르겠다.
몸을 숙이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큰 소리로 순대국 포장을 묻던 여자가 주방에 대고 외친다.
“순대국 하나 포장. 밥 따로 포장!”

“밥 따로 포장?”
“어. 밥 추가해서.”
국밥집에서 포장을 할 때 밥은 원하는 사람에게만 딸려간다. 대부분 밥은 집에 있는 걸로 먹는다는 얘기다.
국밥집의 뜨거운 밥을 포장해버리면 그 온기와 끈기 때문에 맛이 떨어져서인지, 나도 포장할 때 밥을 달라고 하지 않지만,
음식을 나르던 사람들은 노인의 순대국 포장 주문을 받으며 밥을 싸가겠냐고 물은 모양이다.

허리가 완전히 굽은 노인이 엉거주춤하게 걸어 반대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약간 기울어진 고개는 살짝 좌우로 떨렸다.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저 할머니 불쌍해서 어쩐대.”
“그래도 저 할머니가 숙대 나온 할머니야.”

숙대나온 할머니, 우리 엄마가 올해 일흔 한 살인데, 저 정도 걸음걸이면 여든 다섯은 넘었을라나.
30년대에 태어나 식민지를 거치며 숙명여전을 다녔던 이력이 순대국집에도 알려진,
노인의 학력은 순대국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다른 생명의 창자를 씹으며 내내 생각해도 알 도리가 없었다.
  1. 2. 23.

메리 크리스마스

두 아들이 뇌전증을 앓고 있는 백씨는, 오전 내내 터진 수도를 고쳤다.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봤자 안 좋은 소리를 해댈게 뻔했다.
관리를 잘 못해서 그렇다느니, 날씨가 이렇게 추우면 알아서 수도관을 보온해야지 뭘 했느냐고 말할 사람이다.
날이 추워지자 집안은 온통 한기다. 다 큰 아이들의 옷은 무겁고 두껍다. 한 겨울에 쪼그려 앉아 다 장성한 아이들의 빨래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생각을 끊어버려야 한다. 생각을 하면 안된다. 아파트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사시사철 뜨거운 물이 나온다던데. 수도세도 훨씬 싸게 나온다는데.
미리 미리 준비를 했어야 한다던데 그 긴 세월 빚을 갚느랴고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2월에 졸업을 하는 작은 아이는 복지카드가 있으면 장애인작업장에라도 취업을 할 수 있다. 약만 꾸준히 먹으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아이는 그래도 큰 아들보다 나으니까.
엊그제는 아랫집 사는 미친년이 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자기 털신을 아들이 훔쳐갔다고 지랄을 해댔다. 이사온 지 몇 달 된 저 미친년은 억센 부산사투리를 쓰며 뻑하면 우리집 애들이 자기 물건을 훔쳐갔다고 지랄이다. 대문 앞에 새 밥이고 고양이 먹이를 가져다 놔서 안 그대로 지저분한 동네를 더 엉망진창을 만든다. 이 동네 십년을 살면서 누구하고도 깊게 말 섞어 본 적이 없는데 저 여자 때문에 모든 평화가 깨졌다.
“다 늙어빠진 여자 털신을 젊은 아이가 왜 훔쳐가는데요?” 백씨는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댔지만 미친년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내가 아줌마 털신 신고 다니는 꼴을 한 번도 못 봤는데 무슨 털신을 훔쳐갔다고 합니까? 아줌마 맨날 그 분홍색 목욕탕 쓰레빠 신고 다니는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요!”
미친년은 보라색 덧신에 분홍 목욕탕 쓰레빠를 신고 있었다.
“그럼 누가 가져갔는데! 내 털신을! 느그 아들 말고 여기 내꺼 훔쳐갈 사람이 또 있나!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고 있으니 남의 물건이나 탐내는 거 아이가!!!”
미친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경찰이 왔다. 한 두번이 아니다. 순경들이 아랫집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 보고 한숨을 쉬더니 여자를 데리고 갔다.
경찰서에 도착한 홍씨는 윗집 아들이 털신도 훔쳐가고, 전화기도 훔쳐갔다고 다 털어놓았다.
삐쩍 말라서 눈을 까리하게 뜨는 게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저 위쪽에 사는 양희자는 내 돈을 훔쳐갔어요.”
홍 씨는 경찰에게 떠들어댔다. 경찰이 볼펜을 들고 뭔가를 끄적끄적 적었다.
“그래서 잡아줄껍니꺼?”
“뭘요?”
“그래서 내꺼 찾아줄껍니꺼?”
“아주머니. 네 일단 알겠는데요. 증거가 있어야 이걸 수사를 할 수 있거든요. 그 앞에 방법 CCTV가 있으니까 저희가 좀 찾아는 볼께요. 이제 집에 돌아가셔서 쉬세요.”
순경이 홍 씨에게 비타민음료수를 까줬다.
“내가 아가 없어요. 내가 여태까지 아새끼 하나를 못 낳아봤다 아임니꺼. 그래서 저렇게 나를 무시하는 게라니까요.”
“아이고 그럴 리가 있나요. 아무튼 아주머니 날씨도 추운데 들어가셔도 돼요. 저희가 털신 찾게 되면 알려드릴께요.”
“꼭입니더. 내 털신 찾으면 알려주이쏘.”
홍 씨는 파출소에서 나와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며칠 전 복지관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상주여자가 길 한 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다.
“행님. 여서 뭐합니꺼?”
말을 건 홍 씨는 입을 닫자 마자 아차 싶었다. 괜히 말을 걸었다. 엄한 소리나 해 댈텐데 쓸데없는 짓을 했다.
“아, 저를 아십니꺼?”
상주 여자가 홍 씨를 첨본다는 듯이 대답했다.
홍 씨는 번쩍 머리가 시원해졌다.
“아입니더. 사람을 잘못봤심더. 미안합니데이.”
“아 그란데 내가 여기 복지관을 가야 하는데 입구가 어딘지 혹시 아시니껴?”
“여가 복지관 아니라요? 여 계단 올라가이소마.”
홍 씨는 손으로 복지관 입구를 가르쳐줬다.
완전히 미쳐가는구마. 홍 씨는 생각했다.
갈수록 태산이구만. 제정신이 아닌 거 같더니 나날이 심해지는 것 같다.
한 늙은 남자가 홍씨를 가만히 봤다. 홍 씨는 기분이 나빠져서 집 앞에 침을 퉤 뱉고 초록색 대문을 쾅 닫았다.
별 시덥잖은 노인네들이 다 지랄이고 지랄이. 홍 씨는 목에 건 수건을 들고 일바지의 아랫단을 툭툭 털었다.
홍 씨를 바라보던 노인은 복지관으로 들어갔다. 로비에 상주 여자가 서 있었다.
노인이 인사를 했는데도 상주 여자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반찬도시락 서비스를 다시 받으라고 복지사가 전화를 해왔었다.
담당 복지사는 오늘도 눈을 초승달처럼 꼬리를 말고 웃었다.
“저기, 선생님.”
“네 아버님.”
“제가 지금 오다가 그, 우리 프로그램 같이 했던 상주 아주머니하고, 부산 아주머니를 봤는데 말입니다.”
“네.”
“근데 저를 못 알아보시는 거 같더라고요.”
“아……. 가끔 그러세요.”
“하이고 이런.”
“네 좀.. 최근들어서 잦아지시는 거 같아요. 방금 보셨어요?”
“네. 부산아주머니는 전혀 못알아보는 거 같고. 상주 아주머니는 로비에 아주 이상하게 서 있던데.. “
“저희도 걱정이네요.”
신 노인은 복지사에게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서류를 다시 확인해주고 피아노연습실로 향했다.
젊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다니. 입이 썼다.
복도에서 식당에서 자원봉사 하는 김 씨가 아는 체를 했다.
“어르신 오늘 동지라 팥죽 했어요. 이따 꼭 식사하고 가세요.”
교수 부인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인지 참으로 사람이 기품있고 차분하다.
“네 여사님 고맙습니다.” 신 노인은 허리를 숙여 깊이 인사하고 피아노 교실로 들어갔다.
신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김 씨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리자 휠체어를 탄 청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 휠체어를 능숙하게 밀고 사무실로 향했다. 김 씨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서 있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둘째집 조카가 생각났다.
여름에 교회 수련회에 갔다가 수영장에서 머리를 다쳐 지금 병원에 누워 있은지 6개월째다. 목 아래로 아무 것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스물 네 살의 조카는, 제 누나가 휴직계를 내고 병간호를 하고 있다. 조카가 물리치료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 이후로 병원에 한 번도 못 간게 석달째다. 우리 조카도 언젠가 일어나서 휠체어라도 탈 수 있게 될까. 그래도 막내 동생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린 건 아니니 다행인걸까. 김 씨는 손에 쥐고 있던 고무장갑을 으스러지라 꽉 쥐었다.
조카네 강아지는 잘 자라고 있을까. 큰 조카가 맨날 병원에 있으면 강아지는, 혼자 집에 있게 되는걸까. 1년동안 해외를 나간다 해서 잠시 키워줬던 그 강아지라도 다시 데려올까. 강아지 이름은 메리다. 촌스럽기도 하지. 어쩌면 요즘애들인데 개 이름을 그리 촌스럽게 지었을까. 메리를 몇달이라도 맡아 키우면, 그러면 조카의 병실에 갈 수 있을까.
같이 식당 봉사를 하는 이 씨 아주머니는 마흔이 넘은 아들이 뇌병변이다. 네 살에 다쳐 마흔 다섯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조카는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눈물도 흘릴 줄 아니까 다행인걸까. 김 씨는 서둘러 식당으로 갔다. 몸을 움직여야 해. 자꾸 생각을 하면 안돼.
식당에서 팥을 삶는 냄새가 고소하게 났다.
– 지난 크리스마스에 썼던 글을 여기 안 올려서, 이제서야 올립니다.

컬링 vs 팀추월

<컬링 VS 팀추월>

올림픽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수백년된 나무를 베어내는 걸 몰랐더라도, 순실이가 개입했다는 걸 몰랐더라도, 난 스포츠가 만들어내는 감동의 드라마 따위에 관심을 잃은 지 꽤 되었다. 교훈적인 이야기는 진부했고, 현실에서 의미를 찾는 것도 귀찮았다.

올림픽 개막식이 이슈가 되고, 올림픽에 대한 관심은 북한이 온다는 것 하나.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올림픽을 이끌어가는 건 아닌가 의심도 했다.

그러던 중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두 가지 일어났다.

여자 컬링이 사상 최초로 상위권에 진입했다는 것.

그 안에 숨은 스토리가 재미있었다. 동네 언니와 친구가 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시작한 취미생활이 국가대표까지 오르게 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21일 저녁, 여자 컬링 대표팀은 조별 예선 7승 1패로 현재 덴마크와 경기를 치르고 있다. 경북 의성의 의성여고 출신인 네 명은 잘 알려진대로 영미랑 영미친구, 영미 동생, 영미 동생 친구로 구성된 지연과 혈연의 팀이다.

의성은 마늘로 잘 알려진 고장이기도 하지만 몇 달전 발표된 조사결과에 의하면 인구소멸도 1위로,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도시 1위이기도 하다. 시사인에서 취재한 기사를 보면 의성엔 산부인과가 없고 노인인구만 남아 의성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사람들도 인근 대도시로 다시 나가야 하나 고민한다는 얘기가 있다.

의성 사람들은 설령 인구소멸가능성이 1위더라도,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런 도시에서 세계 1위를 할 지도 모르는 여성 스포츠팀이 나타났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체육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 동네 언니, 동네 친구가 뭉쳐 올림픽까지 왔다는 건, 수년간 인기를 끈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과 비슷해 보인다. 이 팀의 인기는 혈연과 지연으로 꽉 짜여진 이 나라의 정서에 맞아 떨어지면서도 그들이 비수도권출신으로 성공스토리를 써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과거사를 밝힌 의성의 전 구의원의 글도 이슈가 되었는데 가정형편이 부유하거나 뛰어난 엘리트가 아니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칠판에 <컬링 배울 사람> 이라고 쓴 글을 보고 하나씩 모여들었다는 건, 보는 사람들에게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나만큼 평범한 친구”를 만나 말도 안되는 도전을 했다는 얘기로 들린다.

단언컨대 이번 동계올림픽 최고의 스타는 컬링여성대표팀이며, 그 이유는 영미와 영미친구와 영미동생과 영미동생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컬링팀의 인기가 치솟는 사이에 여성 팀추월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팀추월이 무슨 경기인지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팀워크를 이루지 못하고 한 사람을 따돌린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 흥분했다. 한 명의 주자를 이끌지 못하고 낙오시킨 채 결승점을 통과하고, 실소를 뿜은 한 선수가 있었다. 밤새 대표팀 자격박탈과 빙상연맹 해체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이 일어났고 이틀밤이 지난 오늘 이 청원에 동의한 사람들의 숫자가 50만명이 넘었다. 분노를 금치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놀라웠다.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는 이야기와 선수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에 이어 빙상연맹의 오래된 파벌문제와 전명규 부회장의 공과논란이 엘리트체육교육에 관한 성토로 이어졌다.

하룻밤새 30만명 넘게 청원했다는 얘기를 듣고 몇 개 커뮤니티 게시판을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은 따돌림 당한 것으로 보이는 노선영 선수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고 그 사연에는 각자 겪었던 공동체 내에서의 따돌림 경험이 섞여 있었다. 수십개의 게시글을 읽고 나서 나는 분노의 원인을 여럼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 나라는 라인을 잘못타면 망하기 십상이고, 알량한 권력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기 쉬우며 자기 의사를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어느 편에도 끼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 억울한 경험은 고스란히 공동체의 기억속에 쌓여 있었다.

2016년부터 이어져 결국 대통령 탄핵까지 이어진 촛불혁명의 불쏘시개는 정유라였다. 최순실과 정윤회의 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특혜를 받았던 아이. 그래서 달그락 훅, 하는 것으로 명문대학을 다녔고, 수십억의 기업체 후원을 받았으면서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주장을 했던 정유라에게 사람들이 분노했던 건, 특혜였다.

안 그래도 출발선이 다른 아이가, 특혜까지 받았다는 것, 평등과 호혜를 거스르는 일이다. 꽤 많은 인류가 민주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더 넓은 평등과 더 많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함인데, 돈과 권력을 가진 집안의 아이가 그 이유로 특혜까지 받는다면 수많은 민중이 민주주의를 지향해봤자 다 헛거다.

동료가 쳐진 것을 두고도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고, 인터뷰에서 피식 웃어버린 김보름 선수에 대한 비난을 보며 사람들은 정유라를 떠올렸을 것 같다. 스피드 스케이팅이 엘리트체육이 아니면 도전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건 동계올림픽을 보는 사람이라면 아는 일이고, 게다가 대학과 파벌로 나뉘었다는 얘기까지 알려지면서 이 집단감정의 오버랩은 점점 강화되는 듯 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적폐는, 평등과 자유를 저해하는 수많은 집단의 구조일 것이다. 팀추월을 보며 화를 낸 이유도, 컬링을 보며 환호하는 이유도, 모두들 좀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라고 본다.

누군가의 실수, 누군가의 행운 따위를 말할 필요는 없겠다.

나는 이 두 사건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토리가 무엇이고, 지금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았을 뿐이다.

2018년 지금 이 나라 민중들의 원하는 스토리가 무엇인지, 왜 무한도전이 수년간 인기를 끌 수 있었는지,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세상은 우리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게 미래를 만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