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강을 건널 때

1.

며칠 간 비가 왔다.

흔들의자에 앉아 코에 산소 호흡기를 꽂고 비오는 창밖을 바라보던 어머님은 입원을 하겠다고 하셨다. 죽음을 앞둔 것이 빤했지만 그 중 한 자식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면 가족의 평화는 깨진다.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다시 돌아오라는 얘기를 듣고 우리 집에 머무신 지 3주쯤 되었다.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다른 음식으로 준비해야했고 나는 꼼짝없이 집에서 어머님의 식사만을 준비했다. 이미 식도에까지 큰 종양이 자리를 잡아 굵은 음식을 씹어 넘길 수 없는 상태였다. 고형식을 드시게 하되 최대한 잘게 잘라 먹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다. 나는 욕심을 내었고 아이의 이유식을 준비할 때보다 더 철저히, 영양가와 맛을 생각했다. 내가 집을 비울 때는 고급 식재료를 사러 강남의 백화점에 다녀올 때뿐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고생한다며 주말에 다른 형제의 가족이 집으로 와 어머님의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 뿐이었다.

진통제를 시간에 맞춰 붙이고 떼어드리고 화장실을 가시게 하고 목욕을 시켜드리고. 밥을 차리는 일. 좋은 생선을 사오고 깨끗하고 신선한 재료만을 구했다. 가스불은 하루 종일 끓어대었고 호흡이 힘들어진 말기 암 환자를 위해 에어컨과 공기청정기, 제습기와 가습기를 모두 꺼내놓고 그 때 그 때 습도와 온도를 맞춰 틀었다.

어머님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어진 건 내가 병원에 진통제를 타러 갔다 온 순간이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어머님이 안 보인다고 하셨다. 이미 한 쪽 눈의 눈동자는 한 쪽으로 돌아가 버렸고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어머님을 앉혀놓고 병원에서 의사가 하듯이 혀를 내밀어 보세요. 여기 보세요. 손가락 보이세요? 같은 질문을 하며 어머님의 얼굴을 아이패드로 찍었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진료예약을 하고 환자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니 동영상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병원에서 의사가 한 말은 예상했던 거였다. 준비하시라. 한 달 정도. 라고.

돌아오는 길 운전대를 팔이 빠질 듯이 움켜쥐었다. 5년. 세월과 약, 병원과 모든 치료비가 모두 헛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생명을 더 연장하는 일은 헛되다. 고통 없이 보내드리리라. 이를 악물고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지 않길 바라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님이 물었다.

엄마 이가 꺼매. 봤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이 갈 때가 되면 이가 검푸르게 변한다고 아버님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소매를 눈가로 올리는 것을 보았다.

미국에 사는 큰 아들이 오자마자 본 것은 이제 눈조차 보이지 않게 된 당신의 어머니였다. 멀리 있어 안타까운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어머니는 작아지고, 말이 느려지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한다. 큰 아들은 당신의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겠다고 한다. 멀리 있던 자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어머님을 집으로 모시고 매일 매일 사람이 어떻게 쇠약해지는지, 어떻게 생명을 조금씩 내려놓는지를 보았다. 병 전에 50kg 정도 나가던 몸은 37kg로 줄어들었고 화장실까지 가는 일도 혼자 해 내기 어려워졌으며 며느리에게 빈 몸을 보이는 것에 익숙해지는 데까지, 어머님은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하나씩 벗겨지는 존엄성과 자존심은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누군가의 팔을 잡고 변기에 안고 속옷을 맡기고 비어가는 작은 몸을 내 맡기는 일은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일, 그 뒤편으로 뚝뚝 떨어지는 생명. 어머님의 뒷모습에, 한 걸음마다 뚝뚝 내려앉는 것은 생명. 그 혼들이 우리 집 마룻바닥에 흔적도 없이 내려앉았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 내뿜는 공기는 늪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가득한 질척거리는 질감이 있다. 가족들은 그 공기를 함께 맡는다. 집안에 맴도는 어머니가 버리는 생명을 우리는 하나씩 주워 여기저기에 쑤셔넣었다. 그 생명들을 모아 당신의 이별 앞에서 진하게 애도를 위해서였다. 어머님의 생명 한 줌이 그 자손들의 힘이 될까. 어머님의 삶이 하나씩 뚝뚝 떨어지는 것을 나는 그 뒤를 밟으며 줍고 있었다.

그 며칠 전 어머님은 집에서 생일상을 받으셨다. 오랫동안 연락을 못하고 지내던 내가 처음보는 친척들도 찾아와 어머님의 손을 잡고 통곡을 했다. 어머님의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다. 병색이 완연하다는 건 그만큼 삶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후 점심밥을 드시고 난 다음 우리는 119 구급차를 불렀다. 일반 승용차에 앉아서 병원으로 이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머님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 어떤 가족은 병원에서 다시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눈동자가 돌아간 것이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전 날 밤 네 명의 가족이 앉아 소리를 높이며 싸우기까지 했으나 결정권은 아직 어머니에게 있었다. 엄마의 생명은 아무리 작아졌더라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님은 모든 자식의 마음을 채워주며 살았고 마지막까지 그리할 터였다.

어멈아. 병원에 가기로 했다.

119 구급차가 들어오고 구급차 들것에 누워 어머님은 근처 대학병원으로 가셨다. 비는 하루 종일 왔다. 나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어머님이 없는 집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 날 오후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MRI를 찍은 어머님은 새벽에 급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아침 일찍 들었다.

그 오후에 거동도 하지 못하는 어머님이 MRI 기계에 들어가 뇌 MRI를 찍었다는 거다.

이 상태로 병원에 가시면 결국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말 한마디 못 넘기고 기도삽관 한 채 돌아가실 거라고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치던 내 언어가. 저주스러웠다.

2.

중환자실에서 3일.

매일 병원을 가서 정해진 면회시간에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어머님을 뵙고 왔다.

기도삽관을 한 채 어머님은 의식이 없었다. 뒤늦게 나는 어머님에게 입을 맞추고, 일어나시지 못하리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귀에 대고 일어나시라고 말했다. 소풍을 가자했다. 아이들이 왔다고 했다.

괜찮다고 이제 가셔도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며느리에게 허락된 언어가 아니었다. 나는 딸이 아니라 며느리라서, 모든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제 그만 아프셨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족들은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어머님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숨만 쉬고 계셨다. 거친 호흡에 어딘가 통증이 느껴지는지 의식은 없는데 가느다란 팔다리가 몸부림을 쳤다. 중환자실 앞에 네댓 명의 가족이 줄줄이 서서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경비아저씨가 복 받은 집이라는 소리를 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거나, 오지 않는 며느리, 오지 않는 사위들도 많다며, 친척들은 하나같이 쓰잘데기 없다는 흰소리도 했다. 그가 나에게 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 누구에게도 화가 나거나 당황스럽지 않았다. 그저 저 안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어머님의 짧은 생명 때문에 생각의 고리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매일 밤이 고비였다. 그 삼일동안, 그 짧은 삼일동안 가족들은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중환자실 앞 의자에서 시간을 보내는 형제들과 배우자는 초주검이 되어갔다. 어머님이 처음으로 암진단을 받고 몇 차례의 시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상태가 나빠졌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암센터 주차장으로 들어설 때도 어머님은 당신이 암에 걸렸다는 걸 몰랐다. 가족들이 알리지 말자는 의견을 냈고 나는 그에 대해서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어머님과 시간을 보낸 것은 불과 몇 년이었지만 어머님의 아들들은 어머님과 40년 넘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어떤 의견도 내세우지 않았다.

내가 왜 암센터로 가니?

그 때 나는 대답할 권리도 없었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건 당신이 몸으로 낳은 자식들에게 있었다.

“여기가 더 잘 봐요.” 내 거짓말은 금방 들통날 것이었으나 어머님은 화를 내지 않으시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세심하게 챙겨줘서 고맙다고 할 분이었다.

내가 왜 중환자실로 가니?

라고 묻지도 못한 채 중환자실에 들어가 삼일을 보내는 어머님을 바라보며 이제 이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생전에 대학병원 병실에 입원해 계실 때 어머님 바로 맞은 편 침대에는 전혀 거동을 못하는 할머니가 한 분 있었다. 혼자 배변도 가리지 못해 관장을 해서 똥을 빼내고 소변줄을 차고 있었다. 가끔 의식이 돌아오면 눈을 껌뻑껌뻑 할 뿐이었고 간병인과 자식들이 돌아가며 노구를 뒤집으며 닦아냈었다. 어머님은 맞은 편 침대에 곧게 앉아 그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살 필요는 없다고 뇌까리셨다. 지금 어머님의 모습은 당신이 가장 원하지 않던 모습이었다.

5년 동안 어머님의 몸은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시술은 더 이상 효과를 내지 못했고 암세포는 서서히 늘어났으며 결국 간에서 시작한 암은 폐로 전이가 되었다. 방사선 치료를 10여 차례 받았으나 다른 곳에서 종양이 다시 생겨났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종양은 모두 다른데 어머님 몸에 숨어있는 녀석들은 예상치 못한 여러 곳에서 아주 작은 형태이지만 매우 많이 계속해서 솟아났다. 물방울같이 하얀 종양들이 온 몸에 구석구석 퍼지는 것을 사진으로 보았다. 방사선 치료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항암치료에 들어가기 전 어머님은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낯선 시골 동네로 내려가겠다고 하셨으나 우리는 아무 것도 예비하지 못했고 어머님은 혼자 식사를 해 드실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으며 생활을 작파하고 내려가 보필할 가족이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아무도 그 일을 해 낼 수 없었다. 어머님의 손주들은 어리고 아들들은 돈을 버느라 바빴으며 배우자는 때로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나는 항암 안 할란다.

어머님의 결심은 자식들의 설득으로 금방 무너졌다. 암환자인 부모가 치료를 거부했을 때 쏟아지는 것은 자식들의 두려움이다. 효도하지 못했다는 감정, 방치했다는 죄책감. 엄마가 죽게 생겼는데 무엇이라도 해야 된다는 강박. 어머님의 의지는 자식들의 만족을 위해 그 때 무너졌다. 항암 추적치료제를 받았을 때 병원에서는 손으로 집으면 안 된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 되물었을 때 입안과 혀에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만 했다.

피부에 닿기만 해도 타버릴 지경의 독성을 가진 항암제를 먹어서 몸에 넣는 것이다.

암전문병원에 있는 선배는 독약과 극약의 한 끗 차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어머님은 몇 달간 마른 김에 항암제를 싸서 드셨고 입안이 헐어 치약을 바꿔야 했으며 손과 발의 모든 피부가 벗겨져 발을 디디고 서 있기도 어려워졌다. 머리카락은 빠지지 않았으나 몸속에 들어간 추적치료제가 어머님을 죽이는 건지 어머님의 암세포를 죽이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그 약은 어머님의 백혈구를 마구잡이로 죽여 버리기 시작했다. 백혈구 수치가 떨어져 항암제 투약을 중단했다. 몇 주를 쉬고 다시 항암제를 투약했을 때도 백혈구 수치가 마구잡이로 다시 떨어졌다.

암 진단 이후 단백질을 끊은 것 때문에 4년간 아미노산제재를 드셔야 했고 방사선으로 숨을 쉬기 어려워졌으며 항암제로 백혈구가 죽었다. 무엇이 어머님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나.

나는 어머님의 손을 잡고 강가로 다가가는 꿈을 자주 꾸었다.

누런 강물이 흐르는 강 앞에서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강 앞에 검은 그림자로 멈춰 있었다.

때로 그 강가에 올빼미가 거칠게 날고 흰 달이 뜨고 누런 안개가 피어올랐다.

꿈속에서도 알았다. 언젠가 그 강가에서 손을 놓는 날이 있으리란 걸.

지난 5년간, 나는 매일 그 강가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3.

까무룩 잠이 들은 그 밤.

그 날도 비가 왔다.

2012년 9월 16일 밤 12시 48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031로 찍히는 낯선 번호.

전화를 받으니 병원 중환자실이었다.

밖에 보호자분이 안 보이셔서 전화드렸어요. 환자분이 곧 임종하실 것 같습니다.

언제가 될지 몰라 긴장하고 있던 나와 남편은 순식간에 옷을 꿰입고 각자의 차를 몰아 병원에 가기로 했다. 몇 분간 병원에 있을 가족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 번호 세 개가 모두 대답이 없었다. 신호등도 무시하고 미친 듯이 달려 주차를 하는데 10분이 걸렸다.

병원의 후문 쪽에 주차했는데 후문은 잠겨 있었다. 남편은 나보다 늦게 병원으로 들어왔다. 정문으로 뛰어가던 나는 남편에게 후문이 잠겨 있으니 정문 가까이에 주차를 하라고 일렀다. 엘리베이터는 마치 200층 꼭대기에서 내려오듯이 더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 들어가 복도에 있는 가족들을 찾았는데 그날따라, 모두들 중환자실 앞 의자에서 한 목숨처럼 잠들어 있었다. 세 명의 성인남자 중 아무도 간호사가 보호자를 찾는 소리에 대답하지 못했다.

중환자실 호출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는 순간,

의료진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 어머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CPR은 동의하지 않으셔서 하지 않았습니다.

김○○님, 2012년 9월 17일 0시 56분. 임종하셨습니다.

서 있는 것이, 불경스러웠다.

나는 주저앉았다.

세 아들은 바보같이, 어린애같이, 심장이 터질 듯이,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 같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님의 몸은 온기가 남아 있었으나, 이상한 물질감이 있었다. 굳어간다는 것, 그 1분 1초 사이에, 어딘가 묵직한, 표현할 수 없는 둔탁함이 느껴졌다. 36kg 정도의 작은 몸. 어머님은 그렇게 그 강의 배를 타 버리셨다.

세 아들과 세 며느리, 다섯 명의 손주, 배우자, 그 누구도 어머님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장례식장은 예약을 할 수 없다.

중환자실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던 나에게 남편은 단호하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어머님의 둘째 아들은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장례식장을 알아봤다.

가족들은 슬픔을 잠시 미뤘다.

장례식장을 어디로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게 우선이었다. 돌아가신 분을 병실에 눕혀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입원했던 병원의 장례식장은 한 자리가 남아 있었지만 밀어닥칠 손님들을 생각하면 규모가 작았다. 아버님은 이 병원 장례식장은 주차비가 비싸서 안된다고 극구 반대하셨다. 산등성이에 조용한 장례식장이 있는 근처 병원에 연락을 했다. 검은색 성장을 한 사람이 나타나 어머님의 시신을 운구차에 실었다. 어머님의 둘째 아들이 시신을 운구하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남편의 옷가지를 챙겨 정해진 장례식장으로 갔다.

그 사이 사촌들이 모두 뛰어와 장례절차를 의논하고 있었다. 남편이 미리 들어둔 상조회사에서 나와 장례절차와 계약해야 하는 것들을 말하고 있었다.

여기는 탈관을 혀 안혀?

우리는 탈관을 혀.

원래 해?

원래 다 탈관한다고. 우리는 탈관하는거여.

나는 탈관이 뭔지도 몰라 뒤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와 20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사촌형님이 챙겨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다.

장례식장 담당직원과 필요한 물품을 정리했다.

쟁반은 몇 개만 하고 고무장갑 두 개만 하고 이거 빼. 이거 필요없어. 물티슈 개수 똑바로 세줘야 돼요. 수육 비싸 안돼. 편육으로 해.

가족들은 상복을 고르고 각자 사이즈를 적어넣었다. 다 큰 아이들이 상복을 입을 수 있나 없나도 가늠했다.

형님 옆에서 식사대접에 필요한 것들을 듣는 사이 남자들은 모여서 수의와 관, 장지에서 일할 사람들을 섭외하고 제상에 무엇을 올리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마쳤다.

다들 집으로 띄엄띄엄 번갈아 가며 돌아갔다가 옷을 챙겨입고 나타났다.

아침 해가 떴다.

집으로 돌아가 어머님의 손주들을 모두 깨워 차에 실었다.

일단 장례식장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내려놓고 아침 10시가 되자마자 나는 근처 백화점 유니클로 매장에 갔다.

검은 바지 세 벌과 검은 티셔츠 세 벌, 검은 조끼 세 벌을 사고 여자들이 입을 내의를 위 아래로 사서 거대한 쇼핑백에 잔뜩 쑤셔 넣었다.

사촌형님과 근처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더 사왔다. 장례식장에서 제공하는 물품들은 모두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들인데 일반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비쌌기 때문에 커피믹스나 종이컵, 인스턴트 라면들을 잔뜩 사서 차에 실었다.

미리 앞당겨서 했던 칠순잔치의 어머님 사진을 가지고 대형마트의 사진현상소에 들러 영정사진을 만들어 달라 했다. 사진은 몇 시간 만에 준비되어 마트에 사진을 찾으러 다녀왔다.

장례식의 시작은 소비였다. 계산서와 계약서가 오고가고 마트를 드나들어야 했다. 각자의 집에서 준비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상조회사와 거래처 은행에서 일회용품을 몇 박스씩 보내주었다.

날씨가 흐렸다.

몸이 부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조문객들이 대낮부터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래된 내 친구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나는 낮부터 술을 마셨다. 가족들은 돌아가면서 작은 방에 들어가 잤고 손님이 들어오면 정신을 차리고 잔뜩 부은 얼굴로 나와 조문객을 받고 인사를 나눴다. 서른 넘은 사촌조카가 부의금을 받았다.

눈물을 감추려고 술을 마셨고 나는 술에 취했다.

만취상태를 용서받는 며느리가 되었다.

자네만큼 애 쓴 사람도 없네. 라는 말을 믿었다.

장례식장에서 술에 취한 며느리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 날 밤을 견디는 방법은 그 외엔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나는 변명한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으나 그 시간을 고스란히 버틸 재간이 나에겐 없었던 거다.

둘째 날, 해가 뜨기 시작했다. 산 속 언덕에 있는 장례식장은 고즈넉했다. 가장 큰 슬픔을 겪어내기에 충분히 위로가 되는 풍광이 펼쳐졌다. 발 아래 안양시내의 전경이 펼쳐졌고 하늘이 맑고 높게 올라섰으며 흰 구름이 조금씩 떠다니기 시작했다. 멀리서 햇빛이 어디론가 쏟아지고 있었다. 젖었던 유리창이 조금씩 말라가며 손님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첫 날 오후에 미국에서 가족들이 비행기를 타고 왔고 나의 아버지도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둘째날 도착했다. 나의 큰아버지와 사촌오빠들이 들렀고 전주와 강북에 사는 친구도 다녀갔다. 가족들의 각자의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섰고 어머님이 낳아 기른 아들의 지인과 거래처에서 화환이 계속 도착했다. 높은 포장탑차가 장례식장 앞에 서서 화환을 토해내고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복도는 온통 국화로 가득해 더 이상 놓을 곳이 없었다. 첫 날과 둘째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육개장을 계속 먹었고 발목이 조여 오는 걸 느꼈다.

친척들은 빠짐없이 어머님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했다.

분주하게 쟁반을 들고 앞치마를 동여맨 형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자네 어머님이 생전에 우리한테 해주신 거 생각하면 이건 새 발의 피밖에 안되네.

내가 모르는 어머님의 지인과 내가 모르는 멀고 먼 친척들이 모여 내 손을 잡으며 얘기 많이 들었네. 고생 많이 했네. 어머님 좋은 데 가셨을 것이네. 라고 위로를 건넸다.

사람들은 모여서 어머님과의 추억을 한 자락씩 꺼내놓았다. 들으면 뭉클한 이야기들만이 가득했다. 언제 나의 어머님이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는지, 마음이 서늘할 때 위로가 되었는지, 오갈 곳이 없던 마음을 어머님께 어떻게 던져두었는지, 낯선 서울땅에서 어머님이 차려준 밥을 먹고 기운을 낸 이야기며, 가족들과 싸우고 전화를 할 때마다 뭐라고 힘을 돋구어주셨는지를 이야기했다. 어머님 삶의 모든 이야기들이 장례식장에서 펼쳐졌다.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이야기들이 둠벙둠벙 춤을 추듯 장례식장에서 꽃을 피웠다.

담양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 후 서울에 올라와 자리를 잡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산동네에서 근검절약으로 진정 “타의 모범”이 된 어머님의 생활이 들려왔다. 흑석동에 마련한 작고 초라한 집의 현관을 거쳐 가지 않은 친척들이 한 명도 없었다더니 모두들 나의 어머님 덕에 직장을 얻고 집을 구하고 풍파가 있어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때마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먹을 것을 챙겨주고 친인척의 아이들에게도 차별 없이 공정하게 대해주었다는 이야기들, 누군가 해내야 하는데 할 수 없었던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집안의 큰 어른이었다는 걸, 강조하거나 소리 질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데도 계속 해서 들려왔다.

하늘이 맑아지면서 이것이 삶의 완성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하늘도 그렇게 어렴풋했다. 점심이 지나 입관을 할 테니 상주가족들은 입관실로 모이라 했다. 우리는 안에 들어가지 않고 유리창을 통해 어머님을 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사촌형님들이 의자를 가져다주어 지팡이를 짚고 유리창 안을 바라보았다. 어머님은 작았다. 내가 본 어머님의 모습 중에 가장 작고 작은 모습이었다.

사람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작아진다고 했다. 우리가 매일 죽음과 멀어지기 위해 애를 쓰기 때문에 그걸 잊게 된다 했다. 삶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투쟁의 연속이다. 중년이 지나 어느 순간이 되면 도망치는 일을 멈춰야 한다. 자기가 작아질 때부터.

작고 작은 어머님의 얼굴에 고운 화장이 입혀지고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수의를 입고 얼굴을 덮고 아들이 들어가 어머님을 관 속에 넣었다. 나는 의자에서 한 발자국도 일어날 수 없었다. 통곡소리가 멍멍하게 들려왔다. 아무 기력이 없었다. 어머님을 관 안에 넣고 사촌형님들이 병원 응급실에서 휠체어를 가져왔다. 나는 그대로 휠체어에 옮겨 앉아 응급실에 누워 링거주사를 맞았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물리치료사가 어디를 다쳤냐고 물었다.

첫 날엔 술에 취해 주절거리고 둘째 날은 링거를 맞았다. 몸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동서가 오늘은 술 드시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미안하다 대답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4.

어머님은 살아 돌아오지 않으신 거다.

사람이라는 게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단백질이나 무기질, 탄수화물과 지방, 칼슘이나 인 같은 화학기호로 나타낼 수 있는 물질이 사람의 육신이라면,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도 알아낼 수 없는 어떤 것이 그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혼이라 부른다.

혼은 몸속에 있을 때 말을 하고 웃음을 짓고 몸을 움직이고 눈빛을 보낸다. 사람의 몸에 혼이 들어 있을 때 몸은 계속해서 말을 한다. 혼이 지어내는 생각들을 여러 가지 몸짓에 담아 밖으로 내보낸다. 그 몸짓을 알아듣거나 말거나, 그것은 듣는 자의 몫이다.

이제, 어머님의 혼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다.

예컨대, 어머님이 했던 이야기는 분명히 여기저기에 남았으나 어머님의 혼이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한들, 우리는 육신으로만 소통하는 인간인지라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정녕 끝인 것인가.

아침 일찍 공기는 적당히 촉촉했고 검고 커다란 영구차가 장례식장 아래 주차장에 자리잡았다. 가족들의 은색 승용차 두 대와 시신을 실은 리무진과 가족들이 탈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7시. 내가 처음으로 맞는 온전한 장례식의 마지막 날이었다.

다양한 일을 겪어왔으나 처음부터 끝을 지킨 장례식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임종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일만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장지는 연고가 없는 충남 당진의 어느 마을이었다. 오래 전 시부모님과 큰 시부모님 내외가 마련해 둔 곳이었다. 버스와 승용차, 운구차를 나눠 탄 어머님의 가족들이 함께 장지로 향했다. 어머님의 아들들이 모는 각자의 승용차는 유난히 빛나 보였다. 저런 물질적인 것도, 장례를 지켜보는 타인들과, 가시는 분께 어떤 위로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놓을 곳이 없을 만큼 쏟아지던 화환과 빛나는 자동차와 멀끔한 자손들이, 그 사람의 삶을 축약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어머님은 생전에 세 명의 아들을 낳아 온전히 길렀고, 아버님과 스무 살쯤에 결혼해 헤어짐 없이 해로하셨다. 손윗동서의 아이들을 잠시 맡아 기르다시피 했고 집안의 모든 동기간, 조카들과 화목하게 지내셨다. 때마다 전화를 하고 속을 풀어주고 인사치례를 하는 일은 모두 어머님의 몫이었다. 그들에게 어머님은 언제나 마지막 구원투수였다.

큰 엄마,를 부르며 울던 다 큰 중년 남자가 있었고, 작은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는 늙어가는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어머님에게 여러 번 마음의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건강하실 때 더 많이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한 것과, 편찮으실 때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들 했다.

천지간에 엄마와 동생 단 세 명이 세상을 건너오며 평생을 살아온 나는, 사촌들이 찾아와 일을 봐주는 것이 어색했고 원래 그러는 것인가 궁금했고, 이 가족이 매우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당신들의 직접적인 일이 아닌데도 삼일 내리 장례를 지키는 일은 결국 나도 동일한 경우가 생겼을 때 삼일 내리 장례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한국의 일반적인 가족들의 관혼상제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매우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나, 사촌들이 없었다면 첫 날은 만취하고 둘째 날은 쓰러져 버리는 며느리는 아무 것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는 길엔 바닷가가 보이는 휴게소가 있었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었고 가족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드문드문 웃기는 이야기를 하고 농담도 주고받았다. 저녁나절 아이들을 집에 데려가 재우며 어머님의 장지에서 태울 것을 준비해왔다. 내가 가져온 것은 진료기록과 영상이 담긴 씨디, 처방전, 병원 영수증, 남은 진통제 따위였다. 그것들은 꼭. 태워 버리고 싶었다.

휴게소에서 상복을 입고 커피를 사 마셨다. 모두들 화장실에 들어가 참았던 것을 내려버리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드문드문 황금빛이 보이는 길로 들어섰다. 차를 돌릴 수 없는 길 끝에 다다르기 전에 가족들은 버스에서 모두 내렸고 나는 잘 걷지 못하는 통에 갈 수 있는 곳까지 차를 타고 올라갔다.

맏손자가 영정을 들었고 첫 손주였던 딸아이는 분에 차 있었다.

딸아이는 자기가 집안의 첫 손주이고 할머니 손에 자란만큼 자기가 영정을 들어야 한다고 투덜댔다. 여기 살지도 않는 사촌동생이 할머니 사진을 들고 가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표시를 계속 내었다. 딸아이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나 모든 절차를 뒤집을 만큼 여유 있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충분히 네 마음을 알고 있으니 여기서는 그만하자고 달래었다. 아이는 입을 잔뜩 내밀고 장례식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장을 할 곳은 앞면이 툭 터진 곳이었다. 아래로 논과 들판이 잘 보였고 가리는 것이 없어 그늘이 들 틈이 없었다.

어느 새 사람들이 작은 포크레인을 가지고 땅을 파고 있었다.

땅을 파던 사람들은 먼 친척뻘 된다 했다. 그들은 흙이 아주 좋다고 활짝 웃어보였다. 비가 왔는데도 질지 않고 촉촉하게 물기가 배어 있어 먼지도 날리지 않는 게 여기가 명당이 틀림없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아버님은 흡족한 표정이었다가 금방 울상이 되었다가 다시 웃곤 하셨다. 일꾼이라고 칭하는, 그들이 땅을 다 판 뒤 관을 드는 건 어머님의 둘째 아들의 친구들이 하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상조회사에서 나온 장례지도사의 도움을 받아 관을 내렸다. 집안과 동네마다 하관하는 방법이 다르다 하는데 아버님 집안은 탈관을 한다. 관을 빼고 시신만이 땅바닥에 놓였다. 아주 작디작은 어머님이 흰 끈 세 개에 놓여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졌다. 저리 가면 더 빨리 사라지실 것이 분명했다. 죽음으로 향해가며 더욱 더 작아졌던 어머님은 흔적도 없이 떠나가실 게다. 시신이 내려지는 순간 곡소리가 시작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통 장례법에서는 이 따 곡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터지는 울음을 누가 말릴 것은 아니었다.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이 돌아가며 삽으로 흙을 떠서 시신 위에 뿌렸다. 누군가 시신으로 뛰어들어 붙들고 울까 겁이 났다.

시신 위로 흙이 뿌려지고 조금씩 시신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머님의 둘째 아들은 선글라스를 쓰고 삽을 들고서 흙을 덮는 일에 열중했다. 흙을 덮으며 발로 밟아 땅을 다졌다. 오래전에 친구를 염해서 보냈다는 사람이라 뭔가 능숙해보였다.

내 옆에 앉은 사촌큰형님이

삼촌은 저럴 때 보면 참 멋지다며 나를 툭 쳤다.

포크레인이 흙을 떠넘기고 남편과 남자들이 땅을 다지는 사이 나는 다른 식구들과 아버님과 불 속으로 태울 것을 던졌다.

클리어파일에 촘촘히 모아둔 어머님의 진료기록, 예약증이 붙은 영수증, 처방전, 미처 다 드시지도 못한 아미노산제, 남은 진통제를 하나씩 쏟아붓으며 영상기록이 담긴 씨디도 던졌다. 장례지도사가 시신을 잠시 담고 있었던 관을 불 속으로 던졌다.

이제 안 아프셔도 돼요.

나는 짐승처럼 외쳤다.

이제 안 참으셔도 돼요.

이제 안 아프셔도 돼요.

다 끝났어요.

항암추적치료제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백혈구 수치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부작용은 끝을 보자는 듯이 용트름을 할 때, 한국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그 병원에서는 임상실험을 받아보겠느냐고 권유했다. 나는 오랜 시간 담당의사와 상담을 하고 원서로 된 논문을 받아 읽고 가족들에게 병원에서 권하는 치료에 대해 설명했다. 모두들 내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에미 네 생각은 어떠냐?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이건 실험이예요.

그래, 그럼 하지 말자.

병원에 임상실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순간 그들은 내 예상대로 말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얼굴이 하얗던 의사는 나에게 슬픈 눈빛을 하고 잠시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진통제라도. 간문제니까 신장에서 해독되는 게 있다고 들었어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되의뢰서를 써 줄테니 집 근처 병원을 다니며 진통제 처방을 받으라 했다. 그 때부터 받았던 진통제는 패치로 된 것이었고 내가 보살피지 않는 순간에 어머님은 진통제 패치를 갈아 끼우는 순간을 자주 놓치셨다. 아프기 직전에 갈아야 했는데 아플 때까지 참으려 했고 통증이 엄청날 텐데 아프다 소리 한 번 하지 않으셨다. 마지막 순간엔 폐쇄공포증과 불안장애도 겹쳐 안정제를 드셔야 했는데 그 역시 내키지 않는다며 밤새 뒤척이셨다. 끝까지, 단 한 번도 아프다 소리치지 않았던 어머님의 진통제는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관을 태우는 불속에 남은 진통제와 진통제 패치, 진료기록을 끼워두었던 클리어파일까지 모조리 집어던졌다.

어느 새 봉분까지 솟아올랐다.

멍하니 앉아 있는 가족들에게 아버님이 이제 가자 이르셨다.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던 가족들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어머님의 새 봉분을 바라보며 산을 내려갔다. 하늘이 맑았고 구름이 고왔다. 들녘에 곧 곡식이 여물 것이라고 바람이 살살 불어왔다.

가시는 날이 좋아 마지막까지 복을 받으신 분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만 했다.

이제 매주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에 갈 일이 없고, 어딘가를 가다가 전화를 받고 유턴을 할 일이 없을 테고, 매달 100만원어치 영양제를 살 일도 없고, 의료계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할 일도 없고, 간암에 대한 의대전공서적도 어디론가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더 이상 예약증을 받고, 주차사전등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머님의 환자카드도 버려도 되고, 주민번호도, 잊어도 되는 거였다.

5.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세무문제 처리를 할 일이 있었다. 어머님과 무관한 일인데 내가 모아둔 영수증이 5년치에 달했다. 모든 영수증을 추려서 날짜별로 정리하고 클립이나 작은 집게를 이용해서 정리했다.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거래명세서를 일일이 출력해 정리했다. 탈상은 원칙대로라면 백일이 지나야 하지만 가족들은 삼우제가 끝나야 탈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멋대로 정한 원칙이거나 말거나, 어쨌거나 탈상도 하지 못했는데 돈 문제 때문에 영수증을 추리고 있으니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간다는 게 야속했다.

내 하늘이 무너졌어도 세상은 여전히 쉬지 않고 돌아간다. 세월은 누구를 기다리거나, 누군가의 애도를 위해 멈춰주지 않는다. 영수증을 정리해 남편에게 넘겨주고 장례를 치른 다음 나는 병원을 찾았다. 온 몸이 부풀어 오르고 양말자국이 발목에 선명하게 남았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7kg가 늘어나 있었다. 병원에 가서 장례를 치렀다고 얘기하고 화장실을 잘 가지 못한다 하니 이뇨제를 처방해주었다. 오래 먹으면 좋지 않으니 일주일만 먹고 이후에도 문제가 있으면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하니 다시 오라 했다.

이뇨제를 먹으니 화장실에 갈 수 있었고 매일 1kg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지 오일 째 되는 날 삼우제를 지내러 산소를 다시 찾았다. 젖은 흙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 듯 보였고 아버님은 승용차를 끌고 산소까지 올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타이어를 태워먹고 결국 진입을 포기한 아버님은 차를 바꿔야겠다고 하셨다.

가족들은 어머님한테 와서 자꾸 그러시면 좋아하시겠냐고 아버님을 달래기도 하고 퉁박을 주기도 했다. 아버님의 충격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돌아가실 거라는 걸 예측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아버님은 쉽게 어머님을 놓지 못하셨다.

발인한 날처럼 맑았던 삼우제날, 돌아오는 하늘도 높고 맑았다. 이제 제대로 가을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장례식장은 9월 중순인데도 꽤 추웠고 내내 비가 오다가 개였던 게 하늘이 어머님이 돌아가신 걸 알고 날씨를 맞춰준다고 억지를 부려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임종을 본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전해 들었을 뿐이고 친구가 죽은 것도, 친구의 오빠가 죽은 것도, 엄마가 전해준 가족들의 다양한 죽음의 형태도 순조로운 게 없었다. 노환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경우가 단 하나도 없이 나는 실종, 자살, 사고의 죽음만을 간접적으로 들으며 성장기를 마쳤다. 그에 비하면 어머님의 죽음은 비록 병사라 할 수도 있겠으나 5년간 꾸준히 그 길을 같이 걸어온 나에겐 자연사와 다름없었다.

어머님이 암환자라는 이름을 걸고 병원을 본격적으로 다녀야 했을 때 나는 암에 대한 여러 가지 책들을 찾아보며 암에 대한 개념을 잡으려 했다. 도대체 이 병은 무슨 병인가, 고칠 수 있는 병인가, 아니면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인가, TV에 나오는 암완치는 무슨 이야기고, 암을 극복했다는 이야기는 진실인가, 완치는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나름대로 한 암에 대한 철학은 암은 인간이 늙어가는 과정중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인간 수명이 늘어나면서 그 발병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과, 영양부족보다는 영양과다에 그 원인이 있을 수 있고, 심장이 거세게 펌프질을 하면서 순환하는 피가 종양을 쓸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암은 자연발생적인 노환의 한 종류로 이해하게 되었다. 현대의학이 발전하기 전, 즉 사진촬영이 불가능할 때는 암을 노환의 한 종류로 봤다는 조선시대의 문헌자료가 있다. 젊은 사람의 경우도 있었겠으나 노인의 경우는 그저 나이가 들어 몸이 쇠하여 죽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사람의 몸속에 생겨나는 종양은 쓸데 없이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이 문제다. 그걸 우리는 악성 종양이라 부른다. 암환자를 묻으면 사람은 죽었으나 그 안의 종양은 죽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사람 속에 사는 종양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세포는 계속해서 분열하다 결국 소멸하게 된다. 종양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분열횟수의 끝이 없다는 것이다. 악성종양은 계속 자기분열을 반복하고 무한히 증식하며 스스로 혈관을 만들어 사람 몸 속 여기저기에 뿌리를 내린다. 세포는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해야하는데 악성종양은 영양분을 빨아서 증식만 할 뿐,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세포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괴생명체가 되어 계속해서 커져나가기 때문에 다른 세포를 파괴하고 세포가 파괴되면서 장기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이 악성종양이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것이다.

어머님의 몸속에 살던 놈들은 유달리 독한 놈들이었다. 처음 암진단을 받고 대부분 5년의 생존율을 보인다는 통계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전이가 될만한 시점에 전이가 되었고 폐로 넘어가 폐를 타고 식도로 올라갔을 때, 어머님의 CT 촬영사진을 집으로 가져야 컴퓨터로 열어보고 입을 막고 울었다.

온 몸에 하얀 물방울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빈 곳이 없었다. 암환자는 혈액검사로 여러 가지 수치를 잰다. 그 중 AFP 수치라고 하는 간암을 식별하는 수치가 있다. 환자의 상태와 정비례하진 않는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항암치료까지 갔던 병원에서 처음 쟀던 AFP 수치는 2000이 넘었다. 일반적으로 수치가 500이 넘으면 암을 의심하게 된다. 마지막 어머님의 수치는 2만이 넘어 있었다. 수치가 1만이 넘었을 때 이게 가능한 수치냐고 물었는데 간호사는 흔한 케이스는 아니지만 그게 꼭 환자의 건강상태와 정비례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해줬다.

수치가 5천이 넘어가면서 나는 어머님의 차트를 보기 시작했고 진료기록을 떼서 따로 집에서 번역을 해서 읽었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영상사진에서 무너졌다. 이제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5년 동안 모시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초반 3년간은 어머님이 식사도 다 차려내셨고 살림도 다 하셨다. 나는 명절에만 주력해서 음식장만을 도왔다. 마지막 2년간은 명절을 우리집에서 보냈고 작은 집에서 보낸 적도 있다. 집 근처 다니던 병원에서 영 탐탁치 않은 진료를 반복해서 받고 암치료로 1,2위를 다툰다는 대형병원으로 옮기면서 어머님의 모든 의학적 일을 내가 도맡아 했을 뿐이다. 돌아가시기 전 우리집에 머무셨던 것도 불과 3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겐 그 시간이 끝나지 않았던 시간처럼 멍청하게 멈춰 있었다.

이 집에 머무셨던 동안의 그 텁텁한 공기가 있다. 가끔 그게 느껴진다. 창가에 놓아드린 흔들의자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가만히 계셨던 어머님의 모습이 선연하다. 아이는 여러번 물었다. 할머니 죽은 거야?

할머니 돌아가신 거야.

할머니 다시 못 와?

다시 못 오시지.

왜 다시 못 와?

일곱 살이던 아이는 그 때부터 물었다.

왜 사람은 죽는 것인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인 아이는 어차피 죽을 것인데 사람은 왜 태어나느냐고 물었다.

얼음이 얼어가는 천변을 걷다가 그 날도 아이가 다시 물었다.

엄마, 사람은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

나는 대답했다.

잘 죽으려고.

잘 죽는 게 뭐야?

할머니 장례식 기억나지?

어.

꽃도 많이 오고, 사람도 되게 많이 왔지?

어.

그렇게 죽기 위해서 사는거야. 어차피 태어났으니까, 그건 되돌릴 수 없거든. 하지만 기왕 태어난 거 평생을 열심히 살면 할머니 장례식처럼 사람들도 많이 오고 모든 사람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면서 그리워하게 되거든. 훌륭하게 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죽고 난 다음에 에이 잘 죽었다, 할 수도 있잖아. 그런 거 말고, 죽을 때, 할머니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할머니의 몸은 없지만, 우린 모두 할머니를 기억하잖아.

그럼 나는 왜 태어났어?

엄마가 너 보고 싶어서.

왜?

모든 사람은 저기 별이었거든. 그 중에 엄마가 맘에 드는 별이 있어서 갖고 싶어졌거든. 그래서 너 오라고 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걸 아이도 알고 있을터였다. 하지만 아이는 웃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죽음이 몸나(我)가 죽고 얼나(我)가 살아나는 과정이라고 했다.

시작해서 끝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상대를 끝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나서 죽는 것이 몸나이다. 몸나가 죽어서 사는 것이 얼나이다. 얼나는 제나(自我)가 죽고서 사는 삶이다. 말하자면 형이하(形而下) 생명으로 죽고 형이상(形而上)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몸나로 죽을때 얼나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몸나의 인생을 단단히 결산을 하고 다시 얼나의 새 삶을 시작한다. 몸삶을 끝내고 얼삶을 시작한 얼삶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1956)

이 말이 내내 아리까리했다. 언뜻 언뜻 알겠으나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얼마 전 누군가와 예술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죽어야 값이 올라간다는 얘기를 하며 웃었다. 그 때 문득 깨달았다. 죽어야 값이 올라간다는 것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추한 배금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거기서 힌트를 얻은 셈이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혼이 지어내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몸이 전해주는 살아있는 시간동안, 우리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은 계속 변화하고 흔들린다. 이리 저리 부딪히고 혼도 흔들린다. 한 사람의 영혼이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타인에게 전하는 동안 우리는 그 사람의 몸짓을 보느라 그 사람의 영혼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영혼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보통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죽을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의 영혼을 본다. 그의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몸짓을 통해 우리에게 전했던 이야기는 그 사람의 몸이 멈추면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 사람의 몸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와 그 사람의 몸이 전했던 이야기들이 장례식장에서 꽃을 피우고 몸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몸에 다시 새겨진다. 그렇게 한 사람의 영혼이, 다석 선생이 말한 “얼나”가 다시 깨어나는 것이라는 걸. 죽어야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걸 안다.

어머님의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백골이 진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님의 무덤에 가면 생전에 어머님의 몸을 통해 들었던 그 영혼의 이야기들을 듣는다. 굳이 무덤에 가지 않아도 도처에 어머님의 몸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전화기를 보면

윗사람이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던 말이 생각나고

아이를 보면

남 앞에서 제 새끼 아끼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시던 말이 생각나고

전복을 보면 전복껍질이 참 예쁘다며 수세미 받침이나 비누 받침으로 쓰셨던 게 생각나고

언제나 고맙다, 애썼다고 하셨던 게 여기저기 스며있다.

CT 촬영사진으로 봤던 어머님의 장기 속 물방울 같던 종양들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어머님의 집엔, 어머님이 쓰던 물건들이 있다.

돌아가신 다음 해 추석에 부엌 찬장에서 만 원짜리 다섯 장이 나온 적이 있다.

우리는 어머님이 미리 세뱃돈을 놓고 가셨다며 아이들에게 나누어줬다. 30년간 써오신 가계부에는 가족의 역사가 들어있다. 몸은 죽었지만 그 사람은 죽지 않았다는 얘기가 뭔 지 알 거 같다. 어머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오로지 당신의 장례식 단 한 번뿐이었다. 그래서 이청준은 장례식을 축제라고 했던 모양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명예나 권력을 남기라는 미련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영혼이 불려온다. 그가 평소에 남겼던 모든 기운과 이야기는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몸을 통해 되풀이되고 역사가 된다.

사람이 몸으로만 산다면 어찌 허무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겐 꼭 기억되기 마련인지라,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런 말이었나보다. 명절이 돌아온다. 가족들은 꼬막을 삶고 게를 찌며 어머님을 생각할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서 또 아이들을 낳으면 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저희들의 할머니가 생전에 잘하시던 음식이 있었고 명절이면 모두 모여 그걸 먹었고, 돌아가신 날의 장례식이 얼마나 고왔는지에 대해서. 어머님은 그렇게 대를 이어 살아가실 것이다.

꿈에서 보았던 거친 물살의 강을 건너가셨다. 그 강가에서 우리는 손을 놓았다. 그 강가로 걷는 것이 그 때 나에겐 삶의 이유였다. 나도 그 강가에 서서 배를 타고 싶었다. 거친 물결을 넘어간 어머님이 그 배를 치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 강의 저 편에서 그들은 또 다른 삶을 산다. 강물은 쉬지 않고 흐른다. 나는 손을 놓고 다시 돌아간다. 언제고 다시 그 강가로 갈 것이다. 그리고 강을 건너겠지. 누군가의 손을 잡고 강가에서 이별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다.

2015년 2월 14일

[전시]즐거운 나의 집 – 2015.2. 서울 아르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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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로 지어진 김수근의 작품.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내 아르코미술관.

남영동 대공분실을 건축한 김수근의 건축물 안에서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본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중첩시켜 보는 것일 지도 모르겠으나 어찌됬건 한국건축에 앞장선 사람이 지은, 둔탁하고 육중한 건물에서 홈 스윗홈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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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무엇인가

<즐거운 나의 집>전시 프로그램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우리는 세 종류의 집 속에서 동시에 거주한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기억의 집

현재 살고 있는 집

그리고 살아보고 싶은 꿈의 집

이 세 가지가 하나 된 산에 사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참 행복한 사람이다.

이 말은 어쩌면 대부분의 우리가 처한 현실 – 역설적으로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주거조건에 처해있다는 말로 들린다.

우리가 많이 묻는 질문 “아직도 거기 살아?” 라는 것들.

태어나서 여태까지 서른 번을 넘게 이사를 다닌 나에게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은 열군데가 넘어 하나 하나 순차적으로 기억해 낼 때 마다 꼭 종이와 연필이 필요하다.

전시는 인트로에 해당하는 영상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도시와 우리가 살았던 공간에 대한 스냅사진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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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들어서는 것처럼, “다녀왔습니다” 라는 발판의 인사.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이 나온다. 익숙한 물건들, 누군가의 집에 꼭 있던 물건들. 양주, 상패, 애매모호한 성질의 물체들이 줄지어 놓여있다. 낡은 브라운관 티비엔 사물에 대한 텍스트가 흘러나온다. 오래전 어떤 접대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색깔의 소파에 앉으니 갑자기 장식장이 있던 어느 거실로 돌아가는 듯 하다. “홍은동입니다.”라고 전화를 받던 앞치마를 맨 여자가 나타날 것만 같은 물성의 감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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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으로 들어가면 지지고 볶는 소리가 난다. 하얀 테이블에 미색 자기들이 놓여있고 식탁에서 나눌 법한 대화들이 소설과 문학작품에서 튀어나와 테이블과 그릇에 붙여져 있다. 문득, 그 공간에서 나는 눈물이 올라왔다. 따뜻하고 독립된 부엌 한 번 가져본 적 없던 유년이었으나 부엌과 밥상은 누구에게나 그립고 아련한 원형이다. 밥을 먹는다는 행위와 밥을 차려낸다는 것과 함께 먹는다는 것.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중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밥을 먹는 일이 아닐까.

이어지는 침실에서는 함께 잠을 잔다 하더라도 잠이 뒤엉켜 섞이거나 서로 잠을 자는 모습을 바라보며 같이 행위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관계와 잠을 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잠에 빠져들면 인간은 모두 개인이 된다. 꿈과 꿈이 엉키는 일도 없고 잠이 합쳐지는 경우도 없다. 가장 독립적 공간인 화장실도 누군가와 공유하기 어렵다. 근대 중국에서는 배변의 문제를 함게 해결하는 공동체중심의 개방형 화장실도 있었으나 아무리 공간을 나눠쓴다 하더라도 배설의 문제는 개별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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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부엌은, 함께 해야만 그 가치가 상승되는 유일한 공간이 아니겠나.

우리가 살던 집에서 느끼는 푸근함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2층으로 이어지는 전시공간에는 오늘 우리가 사는 집에 대해 말한다. 충격이 시작된다. 현대의 집은 돈으로 귀결되고 부모의 재산과 나의 수입에 비례하여 주택 DTI를 설치미술로 구현했다. 놀랍고도 비참한 결과에 불쾌해질 수도 있다. 그만큼 이 사회는 뭔가 기이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당한 노력에 대한 댓가를 가늠할 수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선대에 이루어놓은 자산이 없으면 미래가 불확실한 빚더미에서 시작하고 빚더미로 끝나는데 과연 이 게임에서 돈을 버는 자는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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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순 마감 마지막 기회. 라는 말이 도시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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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가 살고 싶은 집은 협력전시기관의 철학과 홍보가 같이 담겨있다.

본 전시는 ㈜글린트와 아르코미술관이 협력한 전시라는 게 마지막 장에서 펼쳐진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느가 하는 질문에 <즐거운 나의 집>전시는 글린트의 주장에 따른다. 공유주택, 쉐어하우스, 함께 사는 집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건국이래 주택문제는 단 한 번도 해결된 적 없다. 집이 좁고 낡았다며 시멘트를 들이붓고 발라대더니 땅값은 정신없이 오르고 다닥다닥 붙은 층간소음 작렬하는 공동주택에, 붙박이 장롱 문짝 하나에 300만원이 되는 평당 1400, 2000이 예사로운 나라, 땅과 집을 가진 권력자들은 절대 이 기득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며, 펄벅의 <대지>에서 왕룽이 말했듯이 “땅이 곧 생명”이라고 믿고 있는 이 수많은 땅주인과 건물주들은 땅이 마지막 생명이며 자손만대 길이 남을 영생의 복권이므로. 과연 대안은 가능한가? 인심좋은 지주들의 선량한 기부에 힘입어서? 그 외에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일까?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에서 다음 전시는 “우리가 살고 싶은 집”으로 이어진다는데 창밖으로 정말 살고 싶은 집의 풍경이 보였다. 남의 사생활, 누군가의 고즈넉한 집이지만 저런 집 한 채 꿈꾸며 살아도 죽기 전에 한 번 이뤄보기 힘든 나라. 참으로 착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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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같은 고시원을 나와 벌집같은 아파트로 들어섰다. 달라진 것 같지만 달라진 건 하나 없다. 집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언제까지나 집의 물성을 무시하고 추억만 곱씹으며 살아야 할까.

2015.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