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야기 3 – 정아

“에휴. 이러고 살아서 뭐하나 모르겠다.”
“같이 죽어. 같이 죽어? 엄마 우리 같이 죽어?”
다섯 살 짜리 아들이 정아의 손을 잡았다. 정아는 신발을 신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길고 작은 정아의 눈은 또 초승달이 되었다.

“뭘 같이 죽어? 쪼끄만게!”
“엄마 맨날 죽어?” 정아는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였다. 약 3초간.
“너 어디 할머니 앞에 가서 그 소리 해봐라. 뭐라 그러나.”
등 뒤에 선 여자는 다문 입을 열었다.
“애들 앞에서 숭늉도 못 마신다더니.”
“이러니 내가 살겠니?” 정아는 얼굴도 들지 않고 아이의 신발을 신기며 말하였다.
“이모 안녕.” 아이가 집안에 선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집으로 가?”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여자가 말했다.
“얘 맡기고. 일찍 나갈게.”
“조심해서 가. 엄마 말 잘들어?”

아이는 신발을 신고 뭐가 좋은지 폴짝 한 번 뛰었다. 현관에 놓인 어지러진 신발 때문에 아이가 미끄러질까 염려되었다.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정아의 왼손목에 샤넬팔찌가 찰랑. 움직였다.

정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반지하를 벗어나려면 몇 칸의 계단이 필요하고 그 집의 대문을 나서면 다시 내리막길이다. 골목을 벗어나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난다. 정아의 집까지는 몇 개의 계단과, 몇 번의 오르막을 더 올라야 할 것이다.

“엄마 돈 많이 벌어?” 아이가 말했다.
“그럼. 엄마 돈 많이 벌지. 아빠보다 더 벌지.”
땀이 송글송글 돋아났다. 아무리 화장을 진하게 해도 기미는 쉽게 눈에 띄였다. 눈두덩이에 깊은 아이라이너가 번질까, 새로 산 마스카라로 길게 올린 속눈썹이 번질까 걱정되었다. 정하는 땀을 닦지 않고 길을 걸었다.

“벌어야지 그럼. 벌 수 있을 때 벌어야지.” 아이는 땅바닥의 불규칙한 무늬를 보며 제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건너 뛰며 말했다. 애 할머니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정아가 피곤에 찌들은 얼굴로 인상을 쓰고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나갈 때 아이 할머니는 나가는 정아의 뒷모습에 대고 그렇게 말하곤 했다.

“엄마 아들이 사고만 안 쳤어도 이러고 안 살아.” 정아는 쏘아붙이는 것도 아니고 뇌까리는 것도 아닌 말투로 대답하곤 했다. 아이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부엌의 쪽문에서 바로 길로 떨어지는 정아의 맨다리를 보며 문을 닫곤 했다.

오늘도 같은 말을 할까. 문득 정아는 간밤에 들어오지 않은 남편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냉면이나 한그릇 먹었으면 좋으련만 마음 뿐이었다. 사람들이 간혹 줄을 서기도 하는 허름한 냉면집을 지났다. 아이는 별 말 없이 순순히 걸었다.

“재윤이 놀이방 재밌어?”
“어.” 아이는 계속해서 바닥만 바라보고 걸었다. 불평이 없는 아이다. 그게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매일은 고단하기만 했다. 아침 9시에 나와 밀린 설거지를 하고 가스불을 올려 자갈을 달궜다. 10시부터 주방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11시 반부터는 점심시간 손님들이 몰려왔다. 집게를 들고 몰아치는 전표를 확인하며 고기를 구웠다. 뜨거운 접시에 이력이 난 손은 물집도 잡히지 않은지 오래, 굳은 살 덕에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손끝이 고마울 때가 있다. 오늘은 점심시간을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다. 혜선이가 3시부터 6시까지 대타를 뛰어주기로 했다. 대타를 뛰는 혜선에게는 시간당 3천원씩 9천원을 줘야 한다. 지갑에 그만한 돈은 있을터. 4시쯤 되면 점심손님이 빠져나가고 저녁손님도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라 일수쟁이가 들렀다. 정아는 매일 꼬박꼬박 도장을 찍었다. 오늘은 6시쯤 보자고 이미 전화를 했다. 나가자마자 일수쟁이부터 만날터였다. 남편은 동창과 영동에 주점을 열겠다고 설치고 다니고 있다. 포장마차 해먹은 게 언제라고 또 날뛰기 시작한다. 말릴 기력도 없고 그저 안보고 싶을 뿐이다. 정아는 요즘 이혼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헤어지면 이 동네를 떠나고 싶고, 아이는 키울 자신이 없고, 시어머니가 젊으니 아이를 맡기고 훌훌 떠나는 게 가장 좋을 성 싶다. 얼마 전 사람을 통해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들었다. 파출부 생활 5년에 설거지만 2년이다. 밤에는 업소에서 설거지를 했고 낮에는 업소 청소를 했다. 가서 무엇인들 못할까 정아는 지금보다 그 어떤 것도 나을 것이라 확신했다.

터번캣을 쓴 남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걸어오고 정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시댁에 당도했다. 내년에는 이혼해야지. 정아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샷시문을 열었다.

출렁. 하고 유리가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엄마” 정아는 시어머니를 그렇게 불렀다. 정아의 어깨에 매달린 까르티에 배낭도 한 번 출렁였다.

2014. 6. 30.

한 사람이야기 2 – 김언니

김언니는 오늘도 소방서 앞에서 골목을 올라간다.
어이 김언니 오늘도 한 잔?
호객을 하는 사내가 웃으며 말한다. 김언니의 눈동자는 이미 풀어졌고, 머리도 길게 풀어졌다. 앞이 흔들리는지 걷다가 눈을 부릅떴다. 김언니는 눈이 컸다. 눈썹도 짙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인데 얼굴크기도 작지 않았다. 걸을 때는 늘 팔자로 걸었다. 작지 않은 키에 어깨가 단단하여 힘이 좋아 보이는 체형이었다. 김언니를 보고 다들 남자같다고 했다. 매우 선명한 이목구비에 단단한 몸, 종아리와 장단지도 보기 좋은 운동선수 같았다. 목소리도 크고 우렁찼으며 손을 들고 인사를 할 때뿐 아니라 술에 취해 갈지자로 걸을 때도 늘 당당했다. 술에 취해 손을 들어 경례를 붙이며 크게 말하곤 했다. “꼬메시따아쓰!” 술이 더 취하면 크게 웃으며 갑자기 정색을 하곤 “아스딸라 비스따 베이베!” 라고 말하곤 했다. 김언니가 하는 말은 스페인어였다.
 
스페인에서 6년간 학교를 다녔다 했다. 그 누구도 김언니가 어느 과정을 공부했는지 알지 못했다. 김언니가 졸업을 했는지 무엇을 전공했는지 들은 자가 없었다. 김언니와 같이 살던 룸메이트는 김언니의 오래된 일기장에서 김언니가 한인교회에서 학생회를 이끌었다는 증거를 여럿 찾아내었다. 김언니는 언제부턴가 일기를 쓰지 않았고 술을 마셨다. 그건 룸메이트가 김언니를 만나기 전부터였을 것이다. 처음 만난 날에도 카스 한 병을 들고 와 따라 마셨다.
“나는 나발은 안 불어. 맥주는 컵에 따라 마셔야지.” 김언니는 맛있게 맥주를 마셨다.
햄버거를 나르고 스테이크를 굽는 저녁이 끝나면 김언니는 짧은 치마 유니폼에 붙은 돈주머니에서 천원짜리 네 장을 꺼내 바에 올려놓았다. 바텐더 여자는 아무 대답 없이 카스 맥주와 시원한 맥주잔을 내어주었다. 딱 한 병을 마시고 김언니는 옷을 갈아입었다. 가게를 나서 높은 언덕을 올라가 다른 바에 도착했다. 담배를 물고 춤을 추다가 다시 바에 앉아 카스맥주를 마셨다. 언제부턴가 김언니는 500cc 맥주 한 잔과 조니워커 레드를 같이 시켰다. 조니워커 레드 한 샷이 술이면 생맥주는 안주였다. 집열쇠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같이 사는 룸메이트에겐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동생은 매일 저녁 집에 있었으므로, 집 열쇠는 없어도 그만이었다.
 
“김언니! 신발은?”
검은 조끼를 입은 나이트 웨이터가 김언니를 불렀다.
김언니는 술이 너끈히 취한 듯 커다란 눈을 끔벅거렸다. 길게 풀어헤진 웨이브진 머리는 아주 까맸다. 이마에 손을 얹더니 씨발…이라고 읖조렸다. 웨이터는 더 말을 걸지 않고 김언니를 가만히 보았다.
김언니가 맨발로 언덕을 올라갔다. 웨이터가 옆에 선 사내와 김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뭐라고 말을 했다. 길가에 나와 있는 많은 사람들이 김언니를 알았다. 아무도 김언니에게 신발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멍하니 김언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왓쎱?!하고 웃으며 지나가는 흑인들도, 알 수 없는 언어를 지껄이는 백인들도 김언니가 휘청대며 팔자걸음으로 가는 모습을 우스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언니가 언덕을 올라 맨 꼭대기 작은 샤시문을 열었다. 이목구비가 아주 조밀하고 작고 예쁜 여자가 굵은 파마 머리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형광등이 밝게 켜진 바에 앉은 여자가 김언니를 빤히 보았다.
 “미친년. 신발은 어쩌고?!”
 “씨발…” 김언니는 탁자위에 엎드렸다. 담배를 피우던 여자는 카스 맥주 한 병과 맥주컵을 하나 꺼냈다. 엎드린 김언니의 앞에 앉은 여자가 맥주잔에 맥주를 따랐다.
밖에는 소란스런 음악소리가 들렸다. 김언니는 코를 골기 시작했고 여자는 잔에 따른 맥주를 마셨다.
2014. 6. 29.

한 사람이야기 1- 김여사

김여사가 3층에 옥탑하나를 얹은 건물을 지은 것은 그의 나이 마흔 둘이었다.

1층에는 서너개의 점포에 세를 주고 2층엔 살림집이 세 가구 정도 들어올 수 있었다. 지하도 꽤 평수가 넓어 어떻게든 세를 낼 수 있을터였다.
동네엔 평수 작은 빌라들이 촘촘히 들어서기 시작했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수퍼와 시장이 생겨났다.
근처엔 더러운 개천이 흘렀고 옥상에 올라 보면 산이 보였다.
고향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어도 그리운 것은 변함 없었다. 구태여 그립다는 단어로 표현할 것은 아니었고 그렇게 한가롭지도 않았다. 돈을 쌓아놓고 건물을 지은 것은 아니라 어느정도의 부채가 있었으며 아이들은 부쩍 자라 대학등록금도 마련해야 할 터였다.

옆 건물엔 두서너살 많은 여자가 1층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올린 머리를 한화려한 여자였다. 건물을 올릴 때 일꾼들 찬을 해다 나르곤 하면 힐끔힐끔 들여다 보는 게 영 거슬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동네에 자리잡고 사는 사람들은 그럴싸한 건물이 한복판에 들어선다며 입방정을 떠는 모양이었는데 그 모양새가 그닥 싫지도 않았다.

건물을 다 짓고 아들 셋을 앞세우고 이사하는 날 옆 집의 올린머리 여자는 빤히 식구들이 짐을 나르고 일꾼들이 왔다갔다 하는 모양을 내리 보고 있었다. 어찌됬든 이웃간이니 인사나 나눠볼까도 싶었지만 놀란 괭이눈 같기도 하고 째진 메기입같기도 한 게 영 밥맛이 떨어져 아는 척 할 맘이 싹 가셨다.

일 년쯤 지난 뒤에 옆 집 여자는 김여사네 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 되었고 때때로 불쾌한 말을 서슴치 않았으나 지척에 사는 입장에 쓴 소리 하거나 얼굴 붉히기도 싫어 참 특색있는 인물이다 생각하고 지냈다.

“나는 자기 처음 이사 왔을 때, 얼굴이 새파래가지고, 세상에 저 여자는 뭔 복이 있어 저렇게 새파란 나이에 이런 삐까뻔쩍한 건물을 지어 이사를 오나 하고 빤히 봤다니까.”

옆집여자가 1년쯤 지나 김여사에게 칭찬이랍시고 한 얘기였다. 올 때마다 빈 손으로 와서 이런 저런 동네 흉이나 늘어놓고 가는 옆집 여자였지만 김여사는 새파란 나이에 뭔 복이 있어, 라는 말이 싫지 않았다.
스무살에 남편을 만나, 그간 부엌없는 집에서, 화장실 없는 집에서 전기 아껴가며 애들 눈 버려가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옆집여자에겐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부잣집에서 태어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편하게 살아온 여편네로 알아주면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김여사는 헤헤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 치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으리라.

소란스런 옆집 여자가 감색 자켓을 하나 빌려서 돌아가고 난 뒤였다.
먼 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다 큰 아들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빈 집으로 긴 햇살이 들이치는 날이었다.

– 하루종일 생각나는 이야기라 휴대폰으로 적어봄..
좀 진지하게 써볼 걸 그랬나..

 

2014. 6. 29.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그 해 여름, 아르바이트를 해서 탄 첫 월급으로 리바이스 청바지를 샀다. 헐렁하고 여기저기가 찢어진 바지를 85,000원이나 줬다. 내 손으로 돈을 받으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이 리바이스 청바지였다. 리바이스 청바지는 광활한 대지를 가르는 카우보이와 개척자의 유니폼이었다. 채찍을 휘두르며 땅따먹기를 하는 서부의 폭력성 따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살아남아야하는 절실함은 폭력 앞에 눈을 감기 좋다. 헐렁한 리바이스 청바지에는 딱 달라붙는 민소매티가 제격이었다. 나는 그 해 내내 소매가 없고, 매우 짧아서 배꼽이 드러나는 회색 티를 입었다. 물론 다른 옷을 입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회색 배꼽티를 입고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명동거리에 서면, ‘활보’할 수 있었다. 현실은 시궁창이었으나 쏟아지는 시선은 쾌감으로 꽂혔다. 거리에 붉은 햇빛이 길게 늘어지면 맥주 썩은 내가 진동하는 300평짜리 대형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서빙아르바이트였다. 오후 6시까지 출근하여 12시까지 쉴 새 없이 맥주와 안주를 날랐다. 5000cc짜리 맥주통을 한 손에 들고 330cc짜리 맥주컵 6개를 다른 한 손에 들었다. 3000cc짜리 맥주피처는 한 손에 든 채 330cc짜리 맥주컵을 여섯 개까지 같이 끼워들 수 있었다. 여섯 개다. 내 손이 더 컸더라면 한 손에 여덟 개까지 끼울 수 있었겠지만 내 손은 여섯 개가 한계였다. 다른 한 손엔 낙지볶음과 골뱅이무침을 같이 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나 외에 다른 알바생들은 3000짜리 맥주피처를 들면 한 손에는 맥주컵만 들었다. 한 번에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나는 기술을 익혔고 머리를 굴렸다. 다리가 안 보이도록 뛰어다닌다 해도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성취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맥주잔과 맥주피처, 안주를 동시에 들고 300평짜리 호프집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건너가는 일. 대학은 떨어졌고, 재수할 돈은 없었다. 예비합격자 통지서는 내 손으로 찢어버렸으며 엄마가 사는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동생은 기숙사에서 그림을 그리며 매일 눈두덩에 풀로 쌍꺼풀을 그렸다. 새아버지는 간간히 집에 들어왔고 엄마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스스로 벌어 재수를 하겠다는 핑계를 그럴싸하게 둘러댄 나는 그 무렵 서울역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누우면 끝나는 자기만의 방. 벽의 끝에 독서실 책상이 있고, 그 벽의 다른 끝엔 문이 있었다. 책상아래 머리를 집어넣고 자는 일은 영원히 산 채로 나올 수 없는 관 속에 들어가는 일 같아서 모두들 머리를 문에 대고 잤다. 새벽녘 화장실을 가기 위해 가냘픈 베니어합판에 조각조각 둘러붙인 문이라는 것을 열고 나오면 복도엔 여자들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문틈을 뚫고 나와 늘어져 있었다. 환기를 위해 문은 약간 들뜨게 되어 있었다. 조밀하게 밀어붙인다 해도 베니어합판은 견고한 틈새를 만들 수 없는 자재니까. 책을 넘기는 소리, 삐삐를 확인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고시원에서 한 숨을 쉬거나 재채기를 하는 일은 쉽게 용납되었다. 마른기침이 터져 나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면 복도엔 폐혈관 곳곳에 박힌 니코틴 냄새가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단 하나 좋은 것은 냉난방이 잘 된다는 것이었다. 여름엔 복도에 놓인 에어컨이 강력한 바람을 내뿜어줬고, 겨울엔 시멘트 바닥위에 홑겹으로 깔린 얇은 비닐 장판으로 찜질을 할 수 있는 보일러도 뜨끈했다. 서울역 고시원의 정확한 주소지는 용산구 동자동이었다. 서울역사가 새로 생기기 전이니 서울역 광장엔 밤마다 포장마차들이 국수를 말아 팔았다. 그 포장마차의 주인들이 고시원 골목에 모여 살았다. 사람들의 과거를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았으나 앞집에서 부부싸움을 할 때는 그 부부가 혼인관계가 아니며, 여자의 아들은 소매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옆집에 거대한 냉장고가 들어올 때는 얼마 전 지하철에서 마주친 반짇고리를 파는 아줌마가 거기 산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침 10시부터 소주병이 굴러다니는 동자동 골목의 시작엔 벽산빌딩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든 청소부가 있다는 벽산빌딩의 벽에는 노숙자들이 갈겨놓은 오줌 지린내가 진동했고 가을이 되면 골목마다 알록달록한 이불들이 깔렸다. 때로는 벽산빌딩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나가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계단을 내려가면 엄지만화방이 있었다. 붉은 바탕에 노란색으로 엄지, 라고 쓰인 서너 평짜리 만화방엔 재수생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이 드글드글했고 엄지만화방에서 고개를 들면 어쩌다 알게 된 계집애에게 돈을 꿔주고 돌려받지 못한 내가 돈 갚으라고 악다구니를 쓰며 삐삐 메시지를 남기던 공중전화박스가 있었다. 공중전화박스는 대일학원의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나도 그 학원에서 수학강의를 들었다. 대일학원 앞에는 매일 300원만 달라는 아저씨와 담배 두 개비만 달라고 하는 사내도 매일 서성였다. 한 때 힘깨나 썼다는 조폭출신 총각은 내리막길의 끝에서 어머니와 떡볶이를 만들어 팔았다. 창문달린 고시원 끝방을 쓰던 목사아들 정용이녀석은 생활비가 떨어지면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떡볶이 집에 들어가 아양을 떨며 하루 이틀 일을 하고 담뱃값을 벌어내곤 했다.

한 번도 차가 끊기는 적이 없을 서울역 앞길을 걸어 남대문 경찰서를 지나 대우빌딩을 지나 남대문 시장의 양갈래 길을 골고루 건너가며 명동으로 갔다. 고시원으로 옮기는 사이 해가 지기 전에 출근을 하여 홀을 청소했다. 4시까지 출근하면 두 시간을 더 일할 수 있고, 두 시간을 더 일하면 시간당 2500원씩, 매일 5천원을 더 벌 수 있었다. 그 호프집은 왕년에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가수가 운영하던 곳이고 내가 일할 때는 연극영화를 전공한 사람이 사장으로 있었다. 매일 홀이 미어터지게 들어차는 호프집에 얼마나 많은 이권이 걸렸는지 스물 한 살짜리가 알 바는 아니다. 이름은 영스타였다. 촌스럽기도 하지.
저녁 5시 반부터 30분씩, 그리고 30분 쉬는 시간 간격을 두고 통기타 가수들의 공연이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과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기타를 들고 노래를 했다. TV에 나오던 사람도 있었고, 라디오에만 나오던 사람도 있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디제이가 얼굴과 전혀 안 어울리는 근사한 목소리로 멘트를 날렸다. 넥타이를 맨 남자들이 환호성을 외치며 신나는 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일어나서 춤도 추었다. 거친 목소리로 노래를 하던 가수들은 기타 하나를 들고 맥주잔을 든 술 취한 사람들을 뒤집었다 엎었다.

그 날은 4시에 나와 같이 출근해 100개쯤 되는 테이블과 400개쯤 되는 의자를 같이 닦는 두 살 위의 아르바이트생과 벽에 기대 마감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9시에 무대에 올랐던 밴드의 리더는 그 날 매니저까지 앉혀 놓고 늦도록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적당히 취한 그가 화장실을 가다가 벽에 기대어 당신들이 빨리 집에 가기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말했다.
“느그 오늘 우리 가게 가서 술 한 잔 하지 않을래?”
뚱뚱하고 변죽좋은 내 옆의 언니는 반색을 하며
“아저씨 가게가 어딘데요?” 라고 물었다.
“마포에, 서교호텔 뒤에 내가 오늘 가게 오픈이야. 단란주점을 하나 열었거든. 무대도 있다 아이가. 그냥 내 놀이턴데, 오픈날이니까 여기 식구들하고 다 같이 가서 회식이나 한 번 하자. 오늘은 내가 기분좋게! 한 잔 살꺼거든?!”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나란히 서 있던 알바생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손님이 몇 명 남지 않았고 평소에는 뭉기적거리던 알바들이 갑자기 잽싸게 움직여 순식간에 영업이 끝났다. 서교호텔이 어딘지도 모르던 나는 택시를 탄 여러 사람들과 부산 사투리를 억세게 쓰는 밴드리더가 차렸다는 단란주점으로 갔다. 무대가 있었고 칸막이만 되어 있는 낮은 소파들이 들어차 있었다. 손님은 없었고 술을 마시다가 예의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그렇게 되듯, 돌아가며 노래를 했다. 고등학교 때 중창단에서 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노래를 했고, 중간에 성악레슨도 받아봤다. 노래를 한 곡 부르고, 술 취한 동료들의 박수를 받고 또 한 곡 노래를 끝내고 내려오자 가게 주인인 밴드리더가 나를 따로 불렀다.
“니 키보드 칠 줄 아나?”
“어릴 때 피아노 쳤는데요. 코드는 잡을 줄 알아요.”
“코드 잡을 줄 안다고?”
“예.”
“니 내일부터 무대 함 서볼래?”
“예?”
“우리 밴드에 그 노래하는 딸아 안있나. 갸가 오늘 갑자기 그만 두겠다고 하는기야. 내 그래서 아까 느그 매니저하고 한 참 그 얘기를 한기다. 갑자기 가스나가 그만 두겠다고 하면 내는 낼부터 으찌냐. 니 낼부터 내랑 무대 함 서볼래? 요새는 기계가 반주 다 한다. 엠알이라카거든. 다 된다. 키보드 코드만 잡고 흉내만 내면 된다. 함 해볼래? 니 쟁반 들고 맥주 나르는 거보다 수입은 훨 날끼다. 내 그보다는 훨씬 더 쳐주꾸마. 니 한 달에 얼마 받노?”
“4시부터 12시까지 해서 60만원 정도 되는데요..”
“우리가 요새는 업소를 세 군데 뛰거든? 한 군데 30만원씩 해서 내 90주께. 시간도 짧고 안 좋나? 해봐라 마. 이런 기회 쉽게 오는 거 아이다. 니 소리 참 좋다. 해라. 좋제? 어떻노?”

그 다음날 오후 2시까지 서교호텔 그 가게로 갔다. 소리를 맞춰보고 작년에 팔려나간 피아노와는 완전히 다른 야마하 키보드를 잡았다. 리더는 악보를 몇 개줬고, 오늘은 소리만 맞춰보자 했다. 당시 성행했던 라이브호프집에서 키보드를 치는 여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뻔했다. 우순실, 심수봉, 손현희, 흘러간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의 수상곡과 햇빛촌의 유리창엔 비, 그리고 박미경의 빠른 신곡들이 주를 이뤘다. 목을 아끼며 노래를 하기 위해 애썼지만 거친 소리를 내기 위해 담배를 빠르게 피워댔다.

하루 일과는 서교동 단란주점에서 시작되었다. 느지막이 모여 다같이, 때로는 나 혼자 키보드를 두들기며 연습을 하기도 했다. 리더의 그랜저를 타고 노원역에 도착해 개업한 지 얼마 안된 집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리더는 기타를 쳤는데 주법은 촌스러웠고, 목소리는 조용필 모창가수임이 선명했다. 아무래도 음악을 한다고 말하기도 곤란했고, 내가 뭘 배울 수 있을 지도 애매했다. 노원역에서 30분 무대를 마치고 바로 명동으로 이동했다. 내가 맥주를 나르던 그 집에서 매니저, 아르바이트생들과 인사를 하고 나는 무대로 올라갔다. 가장 손님이 많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종로에 가서 마지막 무대를 닫았다. 종로의 둘리호프는 라이브가수들에 대한 평가가 철저한 편이라 매니저가 자주 내 건반실력에 대해 타박을 했다. 리더는 매니저와 내가 직접 얘기하지 않게 했고 나름대로 보호해주는 차원이라고 여겼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던 풍경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해 여름,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던 것처럼 느낀 것은 서교동까지 가는 길엔 버스를 탔는지, 택시를 탔는지 그 때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남자가 우리 밴드가 가는 길에 어슬렁거렸고 가끔은 리더의 그랜저를 그 남자가 운전하기도 했다.

어느 저녁, 상계동의 일이 끊기고 난 다음이었던 것 같다. 아마 겨울의 시작이었을 거다. 고시원에서 어스름을 타고 미끄러지듯 명동에 들어섰다. 넘어가는 햇빛이 아닌 네온사인과 간판 불빛에 길어진 내 그림자를 보았던 기억은 그 날이 아닐 수도 있는데, 땅바닥 치고는 요염했던 보도블록에 깔린 내 그림자는 그 시절의 배경이다. 영스타에 들어서자 무대 위 내 옆에서 베이스기타를 치던 필리핀사람 미스터봉이 대기의자에 구부정한 허리로 앉아 있었다. 작은 키에 눈썹이 짙고 눈이 크던 매니저가 들어서는 나를 보고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업무에 충실하고 능청스럽지만 지저분하지 않은 사람이라 적잖이 신뢰하던 사람이다.
“연락 없었어?”
“누구요?”
“니네 리더.”
“없었는데요?”
매니저는 뒷짐을 지고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내 앞 순서인 쌍둥이 남자 듀오가 노래를 마치고 있었다.
매니저는 그들이 무대를 정리하는 것을 보고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날랐네.”
“예?”
“니네 리더. 돈 떼먹고 도망갔어.”

미스터봉은 집으로 갔다. 나는 혼자 빈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매니저는 나에게 물었다.
“너 기타 칠 줄 알지?”
“잘 못 쳐요.”
“내일 다섯 시에 나와. 너 혼자서라도 올라가봐. 노래로 카바하면 될 거야.”

매니저의 배려로 그 무대에 이른 시간에 일주일 정도 섰다.
밴드가 차지했던 시간은 업소의 골든타임, 밤 9시였다. 그 시간에는 3인조 이상의 밴드가 서는 것이 규칙이었다. 가장 손님이 많은 시간, 흥겹고 시끄러운 소리가 필요했다. 매니저는 홍대에서 활동하던 5인조 재즈 밴드를 불러왔다. 나는 6시 타임을 채우고 그 자리에 앉아 5인조 재즈밴드의 노래를 들었다. 내가 있던 밴드와 차원이 달랐다. 내가 속했던 밴드는 마치, 아무도 찾지 않는 지방의 온천장에 어울리는 팀이었다면, 매니저가 새로 불러온 그 밴드는 바로 그 자리가 차고도 넘치는 팀이었다.
저런 팀에 들어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저런 사람들에게 배웠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며칠을 내가 딱히 할 일 없는 저녁시간에, 이미 공연을 끝낸 무명가수가 되어 그들의 연주를 들었다. 장난감 병정을 부른 키 작은 가수가 3천만 원짜리 수제 기타를 샀다며 나에게 보여줬다.

우리 밴드가 세 군데 업소에서 벌어들인 돈이 매달 천만 원이 넘고, 내가 아무리 적게 받아도 세 배는 더 받았어야 했다는 사실은 영스타의 사장이 알려줬다. 리더가 대형 행사를 준비하다 잠적했고, 수천만 원의 빚을 졌다는 것은 영스타의 매니저가 알려줬다.

길어진 그림자를 배경으로 기타를 메고 서울 시내를 헤맸다. 라이브호프라는 간판이 있는 곳에 무작정 들어가서 오디션 안 보냐고 물었다. 더러는 그 자리에서 오디션을 보기도 했고 더러는 자리가 찼다고 했으며 더러는 라이브를 더 이상 하지 못한다고 했다. 수유역에 한 군데 자리를 잡았다. 영스타에서 7시 공연을 하던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 사람이 은평구에 한 군데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영스타를 다시 찾아갔다가 꾸준하지 못하고 들락날락거린다고 10시 공연 대선배에게 통박을 듣기도 했다.

남대문 시장에 연말 세일 행사가 있어서 노래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일자리를 소개해 준 것은 스크래치를 배우지 않아 디제이 생명이 곧 끝날 것이라고 말하던 대머리의 영스타 디제이였다. 나이 많은 디제이는 영스타의 일이 끝나면 남대문 대형상가에서 노래를 틀어줬다. 그의 작은 디제이박스에 앉아 시장에서 유통되는 대중음악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무명가수가 유명해지는 과정에 시장 디제이의 역할도 만만치 않다고 강조했지만 자신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나는 그의 작은 디제이박스에서 나와 남대문 한 복판의 의류종합상가 앞에 설치된 가설무대에서 노래를 했다. 12월 말이었다. 손가락이 곱았다. 추위로 얼어버린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숨을 뱉을 때마다 수증기가 뽀얗게 뿜어져 나왔다. 실수가 있어도 박수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30분에 10만 원짜리였다. 게다가 내가 거처하던 곳과도 가까워 택시비도 들지 않았다. 30분을 쉬는 동안 앞머리가 긴 아이들이 힙합바지를 입고 나와 얼어붙은 몸으로 춤을 췄다. 그 아이들이 쉬는 동안 나는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랐다. 2시쯤 되어 일당이 담긴 봉투를 들고 키보드를 어깨에 메고 아직도 밝은 불빛을 헤쳐 고시원으로 몸을 돌렸다. 내 등 뒤 조명에 길어진 내 그림자가 길바닥에 놓였다.
그 해 겨울, 남대문 행사가 끝나고 녹번동에 있는 지하 호프집에서 30분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30분 키보드를 치며 노래를 하고 1시간은 취객들의 노래자랑의 사회를 봤다. 영화의 OST를 불러서 이름을 알린 선배를 다른 업소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그림자가 길어지던 시간에 지하철에서 만났던 어느 선배는 얼마 전에 앨범을 냈다고 했다. 네가 막노동꾼이냐고 나무랐다. 노래하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굴면 안 된다고 했다. 음악을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했다. 제대로 따위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고, 나는 고작 스물 두 살이었다.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일주일을 굶을 수도 있었다. 내가 지하 호프집에서 취객들을 웃기며 사회를 보는 사이 동생은 기숙사에서 쫓겨났고 엄마의 집은 사라졌다. 고시원 창문달린 방에 처박힌 동생은 학교를 간다고 나갔다가 이제는 우리 집이 아닌 양주 산골짜기의 그 건물을 찾아가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기타와 키보드를 누구나 쓸 수 있는 고시원 휴게실에 펼쳐놓았던 것은 더 이상 취객들 앞에서 노래하지 않을 때였다. 퇴근 후 고시원 식구들과 늦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엔 노래방에 가서 아무도 개의치 않고 엉망진창으로 노래를 불러댔다. 삐삐번호를 두어 번쯤 바꿨을 때 고시원에서 나와 이대앞 옥탑방으로 이사했다. 고시원에서 끄집어져 나온 나와 내 동생의 짐은 엄지만화방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가득 찼다. 천장까지 꽉 맞게 쌓아올려 꺼내 볼 수 없었고 자다가 무너지면 바로 압사할 것 같던 책들과 엄마가 한 번도 쓰지 않은 딱지 붙은 코렐그릇이 담긴 아이스박스까지 모두 2.5톤 트럭에 실렸다. 명동에서부터 서울역까지 태양의 어스름에, 내 등 뒤 늘어선 번쩍이는 조명등에 길게 늘어졌던 그림자를 보고 걷지 않을 줄만 알았다. *‘아직도 해거름에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은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새벽이면 남몰래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길이 운명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숨 쉬는 순간마다 돈이 필요했고 벌 수 있었고 가장 빨리, 치욕적이지 않게 벌 수 있는 수단을 운 좋게 거머쥐었을 뿐.
영스타는 사라진 지 오래됐고 그 자리엔 건강식 샐러드바를 자랑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세월을 굽이돌아 아이를 안고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는 길엔 사보이호텔 뒷문을 지난다. 그 코너에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어스름의 길이 놓여있다. 슬리퍼를 신고 기타를 들어다 주던 키만 크던 옛 애인의 발이 부끄러웠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갔던 것이다. 96년도에서 97년도쯤의 일이다.

2014년 6월 25일
이하나

*부분은 도종환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 글은 <이야기너머>문학치유강좌의 일환으로 적습니다.

너는 별이었으니까

아이가 물었다.
엄마 사람은 왜 살아?
행복해지려고 살지?
어차피 죽잖아.
그러니까 죽기 전까지 행복하려고 살지?

 

사람은 죽으면 뭐가 돼?
뭐가 되긴 뭐가 돼. 끝이야.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글쎄…
그럼 정말 아무 것도 없어?
음……………….. 별이 되는거야.
뭐가 된다고?
별이 된다고.
그럼 엄마도 별이 돼?
그렇지.
그럼 나도 별이 돼?
응.
왜 별이 돼?
너는 원래 별이었으니까.
근데 여기 왜 왔어?
엄마가 오라고 해서.

 
– 임철우의 “그 섬에 가고 싶다”가 떠오른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이는 더 묻지 않고 잠들었다.
아이가 어릴 때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내가 할머니가 되어 죽게 되면 나의 손주에게 할머니는 네가 볼 수 없는 안드로메다로 돌아갈 거니까, 나중에 거기서 만나자고 하면서 히히덕거리며 가고 싶다고.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다고.

 

 
are you 도민준?

 

 

하지만 머잖아 내 딸아이도 어쩔 수 없이 깨닫게 되리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란 넓고 거대한 것이며, 그 거대한 우주 속에 한톨 씨앗으로 홀로 떨어져 있는 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자그맣고 미미한 존재인 것인가를.

그리고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란 기쁨과 즐거움, 사랑스러움 뿐만이 아닌,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슬픔, 한숨, 추하고 비틀거리고 뒤틀린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라는 서글픈 사실을 말이다. 내가 그랬고, 아내와 우리 부모들이 그러했으며, 아직 살아 있거나 혹은 예전에 살다 간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들 그러했듯이…….
임철우 <그 섬에 가고 싶다>

듣는 자의 몫

1. 너 걔랑 놀지 마.

–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쉽게 하는 말.
너는 대체 왜 걔랑 노니? 딴 애랑 놀아!
동생이나, 자식들에게 쉽게 하던 말이다.

오늘 어떤 사진을 보고 있자니 아 그래도 얘한테는 걔가 유일하게 같이 노는 친구구나.. 다른 애가 아무도 없구나..

걔랑 놀지 말라고 하던 내가 해야 할 일은 친구가 되어주거나, 다른 친구를 소개해주는 일이었겠지, 걔랑 놀지 말라고 할 일은 아니었다.

2. 유기를 수차례 당하고 결국 내 손에 들어온 늙은 시츄가 한 마리 있었다.
목줄을 걸고 산책을 나갈라 치면 당췌 움직이질 않았다.
몇 번을 거듭한 끝에 산책을 나서긴 했지만 20분 정도 걷고 나면 바닥에 배를 깔고 앉아 일어나질 않았다. 잡아 끌고 궁둥이도 쳐봤으나 영 요지부동. 나는 그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때 나는 “이 시키 뺑끼쓰고 지랄” 이라고 쉽게 말했다. 개가, 게으르다고 비난했다.
그 개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노환으로 죽었다.

며칠 전 아지와 한 시간 정도 산책하는데 아지가 힘들어 보였다.
그 때 그 게으른 시츄는 게으른게 아니라 다리가 아파서 못 걸었을 수도 있다는 걸, 수년이 지난 며칠 전에 깨달았다. 사실이거나 아니거나.

3. 말할 수 없는 존재는 우리와 언어가 다른 개나 동물들이 아니다. 발화언어의 형식이 달라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감정과 이유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단지 그 표현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문제다.

열 여섯에 보낸 편지

중 3이었다. 반장이었다. 매년 그래왔다. 학생회장이기도 했다. 남녀공학에서 여학생회장이 나온 것에 반발이 거셌다. 그 해에는 유독 리더십에 대해서 고민했다. 
체력장이 있었다. 오래달리기가 난코스였다. 심장이 안 좋다고 주장하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시대마다 각광받는 로망의 병이 있다. 사춘기소녀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 안겨 세상과 이별하거나, 따뜻한 사람들의 손길에 활짝 웃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병 말이다. 내 이전 세대에서는 그게 결핵이었다면, 내 시대에는 선천성 심장병이었다. 불경스럽겠지만, 그 때는 병에도 낭만이 있었다. 심장이 안 좋다고 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단 한 번도 쓰러지거나, 양호실도 가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그저 얼굴이 좀 희고, 매우 게으른 편이었다. 

실적주의였을까. 전체주의였을까, 아니면 계속해서 사내아이들에게 도전받는 내 리더십에 대한 확인을 위한 요식행위였을까. 나는 우리반은 800미터 오래달리기를 전원 완주 통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만들겠다고도 말했다. 공부를 많이 하던 시대가 아니라 아이들의 체력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걸핏하면 쓰러졌던 건 나다. 내가 완주할 수 있으면 그 누구도 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체력장은 입시에 반영되었다. 적용비율은 매우 적었어도 나는 1점도 뺏길 수 없다고 여겼다. 모두가 20점을 받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우리반은 모두 20점을 받아야 했다. 

체력장 당일 오래달리기는 맨 마지막 순서였다. 체육부장이 뻔히 있는데도 그 학교에서는 반장이 모든 일을 다 했다. 나는 구령을 붙여가며 대열의 안쪽에 섰다.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에 아마 스물 여덞명 정도였을거다. 첫 번째 팀은 아무도 문제없이 시간내에 동일하게 완주했다. 개별적으로 뛰어도 무방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같이 뛰는 게 가장 좋았다. 800미터을 구령 붙여가며 다 뛰고 난 다음 두 번째 팀이 뛸 차례였다. 

눈썹이 진하던 아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하나야, 나 안 뛰면 안돼?”
“왜?”
“자신없어.”
“다 했는데?”
“그래도 자신 없어.”
그 아이는 큰 눈에 서양아이처럼 속눈썹이 짙었다. 

“내가 같이 뛸께.”

나는 두번째 팀의 대오를 맞추고 다시 그 옆에 섰다. 그리고 처음처럼 구령을 맞추며 나에게 자신없다고 한 아이의 손을 꽉 쥐었다.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3분 20초 정도 됐을 것이다. 내 손을 쥔 아이가 뒤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꽉 쥐고 허리를 한 팔로 감쌌다. 한 명이 더 처지기 시작했다. 나는 부반장인지 체육부장인지에게 구령 붙이는 것을 넘겼다. 
나와 두 아이는 내 양손을 잡고 대열의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구령을 같이 붙이며 더 뛰었다. 나는 그 두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로 800미터를 한 번 더 완주했다. 
담임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반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오래달리기를 완주했다. 정해진 시간내에. 

그 이후로 체력장을 하다가 아이들이 죽는 일이 있었다. 중3때의 내 행동이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일이 됬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소름이 끼쳤다. 

사람들을 본다. 
많은 사람들은 멀리 보지 않는다. 넓게 보지도 않는다. 그걸 멸시하는 건 옳지 않다. 내가 가는 길과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비난하는 것도 옳지 않다. 멀리 보거나, 올바른 것을 판단하는 것도 개인의 역량이다. 그 사람의 건강, 깜냥에 따라 시야는 달라진다. 
능력이 부족한 것은 차별받아선 안된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일을 그만둬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봐야한다. 

손을 잡고, 내 속도를 늦추고, 설령 내가 잠시 멈추더라도. 같이 가는 게 옳다. 
떠나겠다는 자를 붙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걸음을 맞춰야 하는 것은 구령을 붙이는 자가 할 일이다. 

중 3, 과거의 나는 이미 없다. 나는 그 때의 내가 아니다. 그 때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도덕적인 인간이었다.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 그 때의 나를 떠올린다. 열 여섯의 내가 마흔에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꽤 많다. 

2014. 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