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말하다

#1.

동네 수퍼에 못 보던 아가씨가 캐셔를 보고 있다.

고운 얼굴에 피부도 깨끗한 것이 20대 초반같다.
아이라이너도 섬세하게 번짐없이 잘 그렸다.
참 예쁜 얼굴인데 표정은 좋지 않다.
일부 배달부탁드리구요 비닐봉투 하나 주세요. 라는 나의 말에 “네?” 하고 되묻는다.
방금 전 잠시만요 하고 내가 물건을 놓고 저쪽에 가서 크리넥스를 가져온 것이 못마땅했나 생각하게 되었다.
배달용 포장봉투에 물건을 넣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각이나 크기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비닐이 찢어질 지경으로 구겨넣고 있다.
이 아가씨 일 하기 싫군. 속으로 생각하며 눈치를 살핀다.
한 마디라도 상냥하게 하려는 습관이 불거져 나오려는 찰나다.
배달물품을 들고 가려는 아저씨에게 지난 번에 배달오신 분께서 주소를 헛갈리셨다던데 말을 하니
이 아가씨는 듣고 싶지 않은 건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건지 마음의 거리가 멀다.
배달포장을 번쩍 드는 아저씨는 초보라 그렇다며 괜찮을거라고 믿음직스럽게 대답해주신다.
일하기 싫구나. 하는 순간.
그 캐셔 자리 위의 공기를 살폈다. 혹시 더운가. 문이 열려 있어서 답답한가.
이 아가씨가 이렇게 일을 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뭔가.
고운 얼굴에 이 자리가 어울리지 않다고 본인도 생각해서인가. 궁금했다.
수퍼에서 나오는 길에 엊그제 다시 봤던 “베를린”에서의 한석규의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당신이 여기에 목숨을 거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정우가 한석규를 보며 말한다.
그러자 별 시덥잖은 얘기를 한다는 듯이 한석규가 인상을 지푸리며 말한다.
“일이잖아 일. 일이니까 하는 거지 일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냐?”
#2.
당신은 전공이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해?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냐.
남편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들고 나온 건 김훈이었다.
그는 한국일보 기자생활을 모두 다 마친 후에 자기가 하고 싶었던 소설 쓰는 일과 자전거 타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떳떳하게 정년퇴직을 한 사람이 말하는 밥벌이의 지겨움은 너무 가볍게 세상을 날아다녔다.
#3.
이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가 맞다.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자본을 천시하는 태도를 모두 다 가슴에 품고 있다.
자기가 번 돈을 자유롭게 쓰는 것에 대해서 기본적 윤리를 지켜주길 소망한다.
돈으로 착취하는 것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격양된 목소리로 비난한다.
사회정의를 지키는 것은 옳은 일이나 이 나라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무언가 부정한 일을 분명히 저질렀을 것이라는 암묵적 동의를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정당하게 돈을 버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전후 급속도로 성장한 이 나라의 경제구조는 한 방에 일확천금이 가능한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 기회를 잡은 자들이 쉽게 부자가 되었으며 정치의 부침속에 많은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일도 자주 있어왔다.
그러나 그 안에서 꾸준하게 법을 지켜가며 세금을 모두 내가며 돈을 벌어 떼부자는 아니더라도 부를 누리는 사람을 몇 알고 있다.
물론 그렇게 누리는 경제적 부유함엔 분명히 운도 작용했다. 그 운을 잡기 위한 대단히 빠른 감각은 필수였다.
더 이상 사람들은 절약하거나 아끼지 않는다.
검소한 것은 쪼잔한 것이 되었다.
이 나라에서 사치는 필수고, 정기적인 해외여행과 비싼 가방같은 사치품들은 누구나 하나쯤 가져야 하는 필수품이 되었다.
외국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와 놀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들었는데 모두 다 부자뿐이라는 것이다.
#4.
이 나라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매체는 TV이다.
연예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전국민에게 중계된다. 그들도 비정규직, 계약직 노동자일 뿐인데 스타라는 이유로 더 화려하게 살기를 종용받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자기를 동일시 한다. 현실의 남루함을 지우기엔 가장 쉬운 마약이다.
어느 날부터 전체주의를 몰아내는 풍조가 시작되면서 이상하게 방향은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말이 “나는 누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던 전쟁 직후의 청교도 정신은 모두 스파게티 면발에 말아 먹었는 모양이다.
#5.
청교도 정신이 필요한 건 아니다.
밥벌이를 하기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디서부터인가 꼬여있다는 것이다.
밥벌이를 지겹도록 해보지도 않은 자가 밥벌이의 지겨움을 논하고
돈에 피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자가 돈을 천시하고
노동에 소금꽃을 피워보지 않은 자가 노동을 기피한다.
모두 다 간접경험만을 가지고 세상을 다 아는 체 하며 세상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가. 왜 우리는 계속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는 것인가.
#6.
1963년도에 김수용은 혈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1947년 해방직후에 극작가 김영수가 써서 1948년 공연된 작품이다.
해방 직후 성북동 방공호에 모여살던 이북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극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눈에 띄였던 것은 두 형제다.
형은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 그 형의 일을 돕다가 부인은 병에 걸려 (납중독으로 추정) 운신하지 못하고 늘 머리를 싸매고 있는 노모와 포탄해체 과정중에 폭발로 다리를 다친 딸과 동생을 부양하고 있다. 동생은 그 와중에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룸펜이다.
그리고 동생은 조국의 진정한 해방을 부르짖으며 형은 돈의 노예라고 비난한다.
얼마 전 리메이크하여 예술의 전당 자유연극시리즈에서 공연된 이 작품에서 두 형제는 무대위를 뒹굴며 육탄전을 벌인다.
그럼 니 입에 들어가는 밥은 어디서 나옴매
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공부하고 밥 처먹은 인간이 누구냐 묻는다.
#7.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치던 마르크스는 노동을 숭고하게 여기라 하였지
노동을 천시하여 모두 다 곡괭이를 집어 던지고 피둥피둥 놀면서 자본을 비난하라 하지 않았다.
매우 기괴하게 뒤틀린 2013년.
우리는 수없이 많은 혈맥의 동생, 1963년 영화에서 최무룡이 분했던 원칠이를 본다.
어떤 이유로든 지쳐버린 수많은 원칠이들은, 그저 쉬고 싶은 것인지 놀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내 안에 숨은 원칠이는 매일 아침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출근하는 원팔이가 벌어오는 밥을 먹고 있으니 말이다.
2013. 6. 30.

내게 거짓말을 했던 시간

심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심심하다는 건 어떤 느낌이죠?
언제나 단순한 표현에 대해서 끝없이 캐묻는게 정신분석이다.
음. 그건 마치 뭐랄까..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같이 이야기하고 놀아줬으면..? 좋겠다는 기대?
이게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구요. 약간 뭐랄까.. 유아틱? 하다는 느낌이죠. 그러니까 심심해~ 라고 하는 건 마치 저희 아들이 집에서 분명히 놀고 있는데도 뭔가 더 재미난 거를 찾고 싶다고 말할 때,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놀이상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 같은 건데요.
아무튼 저는 심심하다는 말을 써보거나 누구에게 말해보거나 문장이 되어서 머릿속에 떠돌아 다녔던 기억도 없거든요. 무척 생소한 느낌인데 그게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알긴 아는데 뭔가 제가 꺼렸던 표현이랄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안 써 본 말이 몇 가지 있는데요, 심심하다 외롭다 무섭다 세 가지 정도. 그 중에서 외롭다, 라는 말은 글에는 많이 썼을테고 무섭다 라는 건 누가 어떤 게 제일 무섭냐고 물었을 때 글쎄, 난 별로 무서운 건 없는데.. 라고 서슴없이 대답한 편이었죠. 심심하다는 건, 심심해 본 적이 없다는 건데 늘 뭔가.. 하고 있었고 할 게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어제 느낀 그 심심하다 라는 감정은,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는 것과, 게으름을 피워도 된다는 듯한 제 자신에 대한 허가? 같은 건데.. 음.. 그러니까 이건..
투정이죠. 네. 투정같은 거요. 애들 투정.
– 그럼 기억이 있을 때부터 투정을 부려본 적이…?
없어요. 애교를 부려서 뭔가를 더 얻어낸다거나 투정을 부린다거나 하면.. 맞으니까.
감정을 솔직하게 내보이면.. 맞는거죠.
징징대면 맞고 화내면 맞고 울면 맞고 투정부리면 맞고 울음 참으려고 애쓰고 있으면 그게 더 꼴뵈기 싫다고 맞고 뭔가 되게 경직된 것에 익숙했달까.
모든 관계의 의사소통은 사무적이었다. 용돈을 더 받기 위해서 혹은, 필요한 학용품을 찾기 위해서 다 쓴 학용품의 증거물을 제출하고 16절지 종이에 청구서 라고 적어야 했다. 연필 12자루를 다 사용하였으므로 새로 한 다스가 필요합니다. 이에 용돈 1200원을 청구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1200원을 줬다.
무척 권위적이고 사무적이면서, 약간 군대식 같기도 하네요. 라는 말에 기억을 더 더듬어본다.
경찰대를 가라는 얘기도 하셨고, 여군됬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하셨죠. 단순히 국가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그것보다는 어떤 힘에 상징에 대한, 로망같은 게 있지 않으셨을까 해요. 군대라는 강한 조직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랄까. 그런 자리에 제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거겠죠.
심심해, 무서워, 겁난다, 라는 말을 써보지 않았던 35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무섭다라는 말을 작년부터 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나 오늘 삐짐” 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한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나이값 못하고 삐진다 라든가, 무섭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도 불안과 공포는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였다는 것을 늘 잊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그 때는 감정을 표출하기만 하면 폭력이 들어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생존이 더 급했고, 그게 더 절박해서 모든 것을 닫기 시작했고, 닫다 보니까 그게 습관이 되어서, 이제 완전히 막혀버린,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그렇지만 요즘 들어서 그런 정서를 느낀다는 건, 회복이 되고 있다는, 좋은 신호로 보이네요.
우리 자매의 어린시절을 회고할 때 엄마는 늘 너희들은 말을 참 잘 듣는 아이들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늘 덧붙였다. 니가 질질 짜는 거 빼고. 물론 죽여버리고 싶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 동생은 말이 늦었다. 7살이 되어서야 겨우 한 문장을 말할 줄 알았다.
나는 내 동생이 바보라고 생각했지만 그림을 지나치게 잘 그려 이상한 천재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동생은 감정을 몸과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걸 그림으로 풀어낸 것 뿐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감정이 복잡하여 언어보다 그림이나 노래로 더 먼저 표현하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감정의 표출이었다.
돌아오며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늘 좋은 사람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라고.
성격이 좋다. 품이 넓다. 대인배다. 그릇이 넓다. 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고 그런 칭찬은 그런 행동을 강화시켰다.
그런데도 문제는 다 풀리지 않았다.
단순히 어린 시절에 감정표출을 하지 못해 성격 좋은 아이가 되었던 것일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친구와 사사로운 대화를 나누다가 내 감정보다 상대방의 감정을 먼저 떠올리는 나를 친구가 발견했다.
남편이 술을 많이 마셔 집에 들어오기 귀찮아 하는거 같은데 피곤하겠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어쭈 어디 외박을 하려고 감히. 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그건 남의 감정을 먼저 읽는거잖아. 자기 감정은 뒤로 제껴놓고.”
눈치를 많이 보고 자란 사람은 남의 감정을 빨리 읽어내는 능력이 발달한다. 그것 뿐만 아니라 나는, 내 감정은 일단 뒤로 제끼고 남의 감정을 먼저 읽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걸 그 친구의 발견으로 깨달았다. 그게 며칠 전이다.
그 한 마디로 많은 문제가 갑자기 풀렸다.
힘없고 약한 어린 아이가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거나 생명의 위협을 수시로 느끼며 살아오는 와중에 책임질 것이 늘 있었다.
그럴 때 내가 택한 방법은 타인의 감정을 먼저 읽어 벌어지는 감정의 교류를 먼저 수습하는 일이었다.
나의 감정은 뒤로 제쳐 놓아야 화가 나서 나를 위협하는 상대에게서 나를 보호하고, 그리고, 나의 동생을 보호할 수 있었다.
언제나 돌아서서 다시 생각하면 내가 화를 냈어야 하는 정당한 부분에서 화를 내지 못했다는 것을 늘 깨닫곤 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왜 그 때 그 말을 하지 못했을까. 이런 것들은 내가 사회적 지위를 얻으면서 조금씩 해결되었지만, 지금도 남의 감정을 먼저 읽는 습관은 쉽게 내 몸을 떠나지 않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몸살과 감기를 앓았다. 정신분석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의 감기몸살도 앓지 않았다.
이 날 나는 그 간 내가 해마다 앓았던 몸살감기들이 쉬고 싶은데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쉬면 안된다는 것. 쉴 수 없었다. 내 일기장의 첫 머리는 늘 “삶은 늘 치열해야 한다” 라고 또렷하게 적혀 있었으므로.
하루 종일 내 마음의 바닥에서 요동만 치다가 겉으로 내뱉어지지 못한 감정들은 그 날의 일기가 되었고 그 날의 글이 되었다.
때로는 사진이 되었고 그것으로도 해결이 안되면 그게 꿈이 되었다.
언제나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는 하루종일 미뤄두었던 내 감정들이 총천연색으로 스펙타클하게 펼쳐지곤 했다.
잠은 언제나 모자랐고 꿈은 언제나 생생했다.
30년이상 묵은 감정들이 터지기 시작했을 때는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아 낮에도 끝없이 백일몽을 꾸고 하루 종일 허공을 헤맸다.
꼭 이렇게 불규칙한 잠의 원인들이, 단순히 당시의 환경이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때문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30년만에 긴 시간을 보내면서 아버지도 나처럼 꿈을 잘 꾸는 사람이며, 그 역시 총천연색으로 된 꿈을 주로 꾸며, 꿈을 메모하기 위해 곁에 펜을 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결론은 한 가지 원인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서나 적용된다. 어떤 사람의 성격이 단 한 가지의 환경적 원인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진 내가, 더 이상 표출되지 못하는 감정들이 내 안에서 좀비처럼 나를 거꾸로 잡아먹는 일을 그만두려면 이제부터라도 꺼내놓아야 하기에, 아마 그래서 작년엔 트위터에서 그렇게 정치인들에게 욕지거리를 해댔던  것이다. 대상을 압축시켜 원망을 쏟아내면 어느 정도 급한 소갈은 가능하므로.
분노보다도, 가볍게 웃을 줄 아는 감정부터 연습하기가 쉽다. 그게 나에게도 주변에게도 좋을 것이다.
웃기면 웃고, 내가 크게 웃는다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이제는 집에서 크게 웃고 가볍게 깔깔대고 아이를 간지럽히고 하릴없이 누워있는 연습도, 하고 있다.
이야기너머 자기역사쓰기 특강을 하셨던 “김민영”선생님이라는 분이 자기 역사의 글 맨 앞에 이런 소제목을 달았던 게 기억난다.
마흔 – 이제는 솔직해야 할 시간.
내년에 마흔이다. 나 역시, 내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 지기 위해, 서른 아홉을 걷고 있는 중인 모양이다.
 2013. 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