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해봐야지

사람들을 살면서 때때로 이유없는 불행을 맞닥뜨린다.
자기 실수가 아니고, 원인을 만든 것도 아닌데 갑자기 어떤 사고가 터져 진퇴양난에 봉착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겪는다. 
그 불행을 마주하는 방법에 따라 나머지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나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사건과 사고가 연달아 터질 경우 우울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길을 걷다가 음주자가 운전하는 차에 치이거나, 아무 이해관계 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당하는 경우부터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으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떠안는 경우가 있다. 불행이 터지면, 사고의 인과관계를 찾으려 애를 쓴다. 어떤 연구는 사람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는데 그 분류는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나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사건과 사고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이 있고 내부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이건 개인의 기질과 연결되는데 그 어떤 원인도 외부나 내부 일방에서 오지 않으며 인간의 두뇌로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자연계가 작용해서 닥치는 사건이었고, 내가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암호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 시간동안 사건의 당사자는 피해자, 희생자가 되어 긴 우울의 터널에서 헤매인다.

온 공기를 뒤덮은 뿌연 먼지가 내 삶을 관통한다.
며칠 뿐이겠지만 사람들은 심각하게 이민을 상상해본다. 이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는 상상을 쉽게 하는 것은 여기에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다. 미래를 포기하게 되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을 때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다.
나로부터 초래하지 않은 사건 사고를 자주 당하게 되면 사람의 뇌는 능동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피해갈 방법에 골몰하거나 그저 닥치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거나, 혹은 생을 마감해버린다. 탐구할 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게 나와 전혀 무관한 곳에서 시작된 일인가 생각하기도 한다.

오늘의 미세먼지는 요 며칠 사이의 결과이지만 최근의 원인은 아니다.
중국이 원인이다, 한국도 책임이 있다는 공방은 쓸모가 없어 보인다. 미세먼지의 원인은 인류 모두에게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자처했다. 환경보호를 우선으로 내건 어떤 나라들은 자국에 공장을 짓지 못하게끔 정책을 조정했다. 그들의 생활을 책임질 필수품들은 모두 중국에서 생산되었고 우리는 중국의 저임금, 고노동, 인권침해로 만들어진 싼 물건을 쉽게 소비하고 버리며 비하하고 칭찬하기를 반복했다. 중국으로 공장이 몰려가고 사람들의 소비는 늘어났다. 쓰레기가 넘쳐나고 경제는 성장동력을 잃었다. 더 이상 개발할 게 없어진 사람들은 비틀고 뒤집고 꺾고 휘어진 물건들을 만들며 연기를 뿜어냈다. 더 많이, 더 빨리 소비해야 경제가 돌아가고 정권이 유지되었으니, 규제를 완화하고 디젤차를 승인하고 공장을 돌리고 전기를 생산하고 밭을 갈아엎고 나무를 자르고 산을 베어 전기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소비해야 유지되는 세상을 위해 중국이나 한국이나,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세계의 공장을 자처했다.

2014년, 10년만에 찾은 중국 상하이에 자전거는 드물었다. 수천만대의 자전거는 전기자전거나 오토바이로 대체되었고 학교에 가득하던 자전거 대신 폭스바겐 자동차가 가득했다.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쓰기 위해 더 많이 놀러다니기 위해 우리도 디젤차를 쓰기 시작했고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들은 그저 불안해서 전기를 더 만들어 쓰지 못하면 버렸다.

10년 전 오늘 내가 어떻게 살고 있었느냐가 오늘의 나를 결정하듯이, 10년 전 사람들이 벌인 일의 결과는 오늘의 자연이 말해준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지.”라는 말을 하는 건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 소시민들의 태도다. 미세먼지가 최악이라는 월요일, 정부의 강력한 제재조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서울시내 차량 통행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시민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공생하고자 하는 욕구를 텅 빈 서초대로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발전기를 멈추고 공장을 쉬게 하고, 운전을 하지 않고 물이라도 뿌려야 하지 않나.
공기청정기는 전기로 돌아간다. 작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더 큰 공동체의 위험을 계속 부추기는 것이 무슨 해법이 되겠는가.

2004년 상하이의 여름이 20일 넘게 39도에 육박할 때, 공장을 닫고 모든 야간조명을 껐다. 2003년 사스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대학에서는 마스크를 나눠줬다. 지금도 국제회의가 열리는 날 베이징의 모든 공장이 문을 닫으면, 하늘이 파랗게 돌아온다.
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뿐이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는가.
우겨도 보고 화도 내보고 달래도 봐야 하지 않나.
우리도 이렇게 해볼테니 너희도 이 정도는 해달라가 협상의 기본 아니었던가.
너희가 먼저 하지 않으면 우리도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건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조건을 걸지 말고 일이 되게 하려는 태도는 내 패를 먼저 보여주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게 빠르다.
공기청정기를 방마다 놓고, 차량에도 공기청정기를 달면 경치하나 포기해도 괜찮을 것이다. 재난은 가장 낮은 곳부터 덮친다. 현장노동자, 야외근무자, 공기청정기가 없는 가정, 호흡기가 약한 사람,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 더 많이 노출되고 더 많이 습격당하는 건 가장 가난한 곳부터다.

기득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재난문자를 보내야 할 상황이라면 재난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이 전염병이었다해도 이렇게 대처할 것인가?
왜 아무 것도 하지 않는가.
이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하지 않겠나.
보이지 않는 것의 공포는 가늠할 수도 없는 것이다.

 

2019. 3. 5.

그 때는 몰랐던 것

 

2003년 여름.

중국의 서쪽을 가겠다고 봄부터 마음을 다졌다.

여름방학은 7월과 8월이었다.

7월 한 달은 한국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습학원에 나가 국어와 논술을 가르쳤다. 한 달 생활비가 훌쩍 넘는 월급을 받아 챙겼다. 방학 특강을 맡는 동안 8월엔 여행을 갈꺼라고 호언장담해둔 터였다. 원장은 나를 잡았지만 절대 여행계획이 변경되는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잘한 일이다. 2003년 여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서안을 거쳐 가욕관으로 가 만리장성의 끝을 본 뒤, 둔황에 가서 막고굴을 보고 티벳 아래쪽 감숙성과 사천성을 돌아 성도를 찍고 상해로 돌아오기로 했다. 당시엔 한국인들 중 이 부근을 여행한 사람이 많지 않았고 영어로 된 배낭여행자들의 싸이트를 몇 달동안 뒤졌다. 그 때 온라인으로 알던 한 남자가 이 코스를 다녀온 영향도 컸다. 사진을 잘 찍는 사내였다.

서안까지 가는 데 기차로 18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산사태로 철로가 유실되어 6시간 연착되었다. 서안에서 둔황까지 24시간이 걸렸다. 둔황역에 내리니 밤 12시였다. 자작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사제택시를 타고 1시간 넘게 갔다. 둔황역과 둔황시내는 그렇게 멀었다. 명사산에 올라 모래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느끼고 막고굴을 돌아 나왔다. 하미과를 먹었고 가욕관을 갔다. 만리장성의 끝에 서서 말도 안되는 지평선을 봤다. 하늘은 음침했다. 인터넷으로 연락해 함께 여행을 하겠다고 북경에서 온 여자와 동행을 했다. 여행 중 살을 빼겠다며 식사를 굶는 사람이었다. 견딜 수 없었다. 두려움에 벌벌떨던 그 사람은 란저우에서 비보를 듣고 한국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이틀이상 묵으면 자살이라던 공기오염이 심한 란저우에서 라면을 하나 먹고 맛대가리 없는 커피를 나눠마시고 헤어졌다. 10시간이 걸린다는 샤허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샤허를 가는 길은 내가 여태 가본 중 가장 험한 길이었다. 그보다 더 험한 길은 황룡에서 성도까지 돌아오는 길이었다.

샤허로 가는 길에 회족들이 보였다. 운전기사와 승무원은 승객을 기다리게 하고 회족식당에 들어가 국수를 사 먹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고 싶을까봐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샤허는 온 마을이 사찰로 이루어진 곳이다. 라마승들이 가득했다. 그 사찰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을 위한 식당과 여인숙, 인터넷 까페와 조잡한 물건을 파는 잡화상, 그리고 터미널. 그게 그 마을의 전부였다. 거기부터 시작이었다.

티벳 사람들이 사는 곳.

샤허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7시간짜리 버스를 탔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랑무스. 郞木寺. 원래 그 쪽에서는 랑무스의 우변이 없는 글자를 쓴다. 랑무스는 마을이 卍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슬람 사원도 있지만 주민의 대부분이 티벳불교도이며, 라마승들이 가득하다. 가난한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승려가 되고, 부모와 헤어져 종교인이 된다.

다른 곳으로 나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 아침 7시에 있었고, 도착하는 버스는 저녁에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북경에서 온 내분비과 의사였다. 그녀와 랑무스에서 숙소를 같이 쓰기로 했다.

날씨는 내내 흐렸다.

해발 3천미터가 넘는 곳이었다.

샤허부터가 고산지대였는데 나는 으슬으슬 몸살기운만 돌았다.

DSCN3611 사본

 

랑무스는 천장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장은 사람이 죽으면 잘게 쪼개 독수리에게 먹이로 바치는 장례형태를 말한다. 조장이라고도 한다.

랑무스에 도착한 이튿 날 아침, 나는 북경여의사와 천장터로 향했다.

그녀가 오늘은 장례가 없다더라고 얘기했다. 나는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조금 놀랐다. 누군가 죽어서 독수리의 밥이 되고, 나의 구경거리가 되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개가 가득한 천장터에 힘겹게 올랐다. 천장터에는 신선한, 공기가 있었을 뿐이다. 바닥을 이리 저리 둘러보던 나는 사람의 뼛조각과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건드리진 않았다. 이럴 때마다 지나치게 냉담해지는 것이 나인지라, 사람이 죽었고, 여기서 장례가 있었고, 독수리도 안 먹는 게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내려왔다.

별 게 없다 생각한 우리는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오는 길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북경 여의사가 들어가볼까? 하더니 노크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음식을 해먹고 몸을 누이고 난로를 피울 정도의 공간에 한 라마승이 살고 있었다. 비구니였다. 여자는 바느질을 하다 말고 우리를 맞았다. 매우 쑥스러워했지만 내 동행이 중국인이기도 하고 우리 둘 다 여자인지라 큰 경계심은 없어보였다. 비구니는 우리에게 차를 내주었다.

 

샤허와 랑무스, 이 두 곳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마니차를 돌리며 돌탑을 돌거나 오체투지를 했다. 승려가 가득한 마을에서 늘 불경공부를 하는 소리가 들렸고 승려들은 승복을 입고 법당 근처에서 공부를 하거나 축구도 했다. 샤허에는 어린 동자승들이 들락거리는 작은 극장이 있었는데 30인치짜리 브라운관 티비를 높이 걸어놓고 푼돈을 입장료로 내면 지직거리는 화질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가끔 허섭한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사람들도 있었고 야크떼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침엔 양떼무리가 마을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갔다. 여인숙도 있었고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까페와 식당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니, 내 눈으로 봤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무 경제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누군가 농사를 짓고 먹을 것을 만들어 올테지만 그들은 많이 먹는 것 같지도 않았고 빨래를 자주 하거나 돈을 버는 사람도 매우 적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려이거나, 승려가 아니면 그저 마니차를 돌리며 길을 걸을 뿐이었다. 평생의 목적이 라사에 가는 것이라 했던가. 곳곳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밥을, 구걸해서 먹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르게 아무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거였다.

 

돈을 벌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라사에 가겠다는 꿈을 하나 가지고 평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적게 먹고 적게 일하며 본향을 꿈꾸는 사람들의 삶은 낯설 뿐 아니라, 당혹스러웠다.

 

뭐지.

 

뭐지?

 

아무 것도 안 해도, 괜찮은 건가?

 

오두막에서 만난 그 비구니는 길어진 손톱을 자르거나, 길어진 머리를 자르고 차를 끓여마시고 법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하루에 두 번씩 있는 경연에 참여해 승려들은 박수를 치며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해가 지면 누군가 언덕에 앉아 기도를 했다. 동굴 속에서 하루 종일 기도를 하던 여자가 쑥 나오기도 했다. 주인이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는 야크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흰 야크는 신성하게 여겨진다며 이리저리 꽃을 주렁주렁 달고 관광객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는 몰랐다.

그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라는 걸.

산다는 것은 애써서 뭔가를 만들고 먹고 욕심을 채우고 그 욕심을 버리고 누군가와 싸우고 사랑하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싸우고 뺏고 뺏기며 살아가는데, 그들은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죽으면 뼈를 잘라 새에게 주고 하늘로 돌아가라 빈다. 그 일을 마을 사람들이 하고 누구나 그렇게 하늘로 돌아간다. 조장에 대해서는 척박한 티벳의 환경으로는 화장도 매장도 어렵기 때문에 선택한 생존법일 거라 하기도 한다.

이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성지에 가려고 하는 것은 다음 생에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 생을 살면서 다음 생을 기다린다. 어찌 보면 이 생은 살지 않고 소망만 하며 다음 생을 미리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번 생은 오체투지를 하고 다음 생엔 또 무엇을 할 것인가. 다음 생에도 더 좋은 생을 위해 또 오체투지를 할 것이다. 이들은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이승을 사는 것인지 저승을 사는 것인지, 이번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다음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한 삶이 있었다. 과연 산다는 게 무엇이며, 죽는다는 건 무엇인가.

 

12년이나 지나 생각해보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문명이 진입해 랑무스의 사진을 검색해보면 각종 지프차가 여기저기 주차된 모습이 보이지만, 그래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오체투지를 하며 라사로 가겠지. 다음 생을 위해서. 그들은 이번 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라사로 갈 수 있으니.

 

언제 썼는지 기억이 안나는 글을 C드라이브에서 발견하여 옮긴다.

아마도 2015년 초에 적은 듯 하다.

MADE IN CHINA

얼마 전 아이를 데리고 후배들을 만났다. 후배 한 명은 우울증이 온 것이 아닌가 고심하고 있었고, 다른 한 후배는 그런 정신적 괴리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에게는 대화를 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나의 아이는 어른들의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못내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장소를 옮기면서 후배와 함께 잰 걸음으로 호텔의 상가에 들어갔다. 그 호텔의 상가는 남대문 시장의 수입상가와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므로, 적당한 가격에 아이에게 어울리는 장난감을 사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핸드백과 스카프, 빅사이즈 옷과 셔츠나 넥타이를 파는 점포를 지나 나는 장난감 가게 앞에 도달했다. 환호성을 지른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멋진 자동차를 축소해 놓은 미니어처도 있었고, 아이가 좋아하는 중장비 자동차도 있었지만, 내가 고른 것은 아이가 가지고 놀기에 적당한, 성인 남자의 엄지 손가락만큼 작은 자동차 6대가 한 개의 비닐지갑 안에 들어있는 것이었다. 얼마 전 약국에서 산 어린이용 비타민제에 끼워져 있는 자동차와 동일한 제품 같아 보였다. 아이는 자동차가 맘에 들었는지 제 손에 들고 우리가 밥을 먹으러 가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아이는 잃어버릴까 봐 – 라고 말하며 자동차를 쉽사리 꺼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자꾸 비닐 지갑 속으로 자동차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분주한 식당에서 속사포 같은 이야기들을 쏟아 내며 자꾸 흐트러지는 정신을 가다듬어 드문드문 대화를 빠르게 이어갔다. 후배와 식사를 마침과 동시에 우리는 대화도 정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을 기약하며 지하철 역에서 헤어졌다. 아이는 제 손에 자동차를 들고서 쫄랑 쫄랑 나를 따라 걸었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 새로 산 자동차들을 제 아빠에게 자랑하기도 하고 뒤로 당겼다가 앞으로 슝- 하고 나가는 자동차가 신기했던지 한 참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그 많은 미니카 중에 가장 맘에 들었던지 책장 사이에 쑤셔 박아 나름대로 숨겨 놓기도 했다.

 장난감을 산 지 이틀이 지난 날, 나는 아이와 자동차를 함께 가지고 놀았다. 내가 원해서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아이가 같이 놀자고 매달렸기 때문이었는데, 몇 개의 자동차는 이미 더러 고장이 나 버려서 뒤로 당겼다가 놓아도 앞으로 가지 않았고, 몇 개의 자동차들은 회전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나는 자동차들을 들어 올려 꼼꼼히 살펴 보았다. 작은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고 어떻게 조립을 했을까 싶을 만큼 작은 자동차였다. 그리고 자동차의 아래쪽엔 MADE IN CHINA 라는 글씨가 선연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중국의 어느 공장에서 화학물질 냄새를 맡아 가며 이 자동차를 조립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삐뚤게 붙여진 자동차들의 스티커들을 보다가 손톱보다 작은 스티커를 사람 손으로 붙였을 거라고 확신했다.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져 왔다.

 누군가 이 자동차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집으로 돈을 부쳤으리라, 누군가 그 냄새에 코가 마비되어 피를 토했을 지도 모르겠다. 인권유린의 사각지대라는 말 따위는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이 것을 만들었으리라. 하루에 12시간을 일하고도 우리 돈으로 30만원도 채 되지 않는 월급을 받고 좋다고 신명 나게 웃었을 누군가를 생각했다.

 오래 전 나는 사탕을 먹을 때마다 신경숙의 소설을 생각했다.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에서 주인공은 짝꿍의 엄지 손가락이 기형적으로 뒤틀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주인공이 그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짝꿍은 나는 사탕공장에서 일하는 데 하루에 몇 백 개씩 사탕을 리본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손을 뒤틀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조용히 손을 내려놓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리본 모양으로 묶여진 사탕을 먹을 때마다, 볼 때마다 씁쓸한 마음에 달콤함이 저만치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자동차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차가워진다. 누군가 생산을 하고 컨베이어 벨트에 빠르게 물건을 올려놓기 위해 그 어떤 단상도 할 수 없는 삶이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과연 나는 그들이 만든 물건을 구매하는 것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산업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자들의 인권을 위해 내가 깃발을 들고 나설 수 있을 것인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인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쳐들어 왔다. 나는 자동차를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이걸 봐봐. 이걸 만든 사람들을 생각해봐. 하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고질병은 고칠 수 없는 것일 게다. 즐거움 속에 숨겨진 인생의 비애를 포착해 내는 기질은 사춘기시절 감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수반된 것이었고, 나는 아직도 그런 삶에 버거워 하고 있다. 왜 나는 좀 더 단순하게 살 수 없는가, 그저 이건 MADE IN CHINA 니까 벌써 고장이 나버렸잖아. 하고 넘겨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들은 과연 양심의 소리인 것인가, 아니면 한동안 생업의 현장에서 밥벌이를 했던 나의 비애가 가져다 주는 자기 연민의 확대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그저 아프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주는 기쁨도 있을 것이라고. 나보다 더 그들이 행복할 수 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아이와 자동차를 가지고 놀았다. 뒤로 힘껏 당겼다가 손을 놓는다. 자동차는 급회전을 하면서 저 멀리에 가서 부딪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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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 

2004년 12월 1일 -자전거 고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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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일

이 날.
이 날 아마 날씨가 약간 춥긴 했고,
며칠 째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을거다.
과외를 가는 길이었고,
길을 잘 못 들었는데 자전거마저 고장이 났었지.
그래서 길에서 만난 자전거 수리공에게 자전거를 고쳤는데, 아마 그 수리공이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을거야.

근데 그 터무니없는 값이라는 게 12위안이거나 20위안이었을게야. 그 때 아마 스타벅스 커피가 30위안이 좀 안됬나 그럴껄.

이 날도 분명히 시엔시아루 스타벅스에서 6시간 정도를 뭉개면서 외국인 유학생이라는 특권 아래서 무료 시음료도 몇 잔 받아먹고 그랬을지도 몰라.
이 날이 아니었다 해도, 그 전 날 그랬거나, 그 다음날 그랬거나. 아무튼 스타벅스를 도서관 삼아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전거 수리공과 흥정을 하는 거지. 한 잔의 커피값도 안되는, 그 저녁의 노동에 대해서.
손톱밑의 때는 평생을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호적은 분명히 없을 게 뻔한, 자기 이름이나 겨우 쓰면 다행인. 그 남자와 길바닥에서 말야.

그리고 슈주허를 넘으며 생각했겠지.
나는 대체 뭔가.
나의 돈은 무엇이고, 저이의 돈은 무엇인가.

가난이 내 영혼을 잠식하면,
나는 사기꾼이 될까 거지가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전거를 밀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