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사쓰기] 목화솜 다래

– 나는, 아버지 어머니 잘 몰라요.
어려서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해서, 그냥 사방 팔방으로 떠돌아 다니느라. 그래도 잠깐 우리 집에서 살 때가 있긴 했지. 나는 그나마 우리 큰 이모하고 좀 친했고. 식구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도 없고, 그래서 사촌집으로 갔는데 우리 사촌 오빠가 그렇게 나를 때렸어요. 뭐 달라고 해서 안 해준다면 때리고 그렇게 걸핏하면 나를 때렸어요. 오빠한테 맞으면 이웃집 언니한테 갔는데 그 언니가 나한테 참 잘 해줬어요. 언니네 집에 뒷방이 하나 있어요. 거기 숨어 있으라고 하지. 그러면 언니가 고구마 같은 거 삶아 주고 그랬어요. 그러다 그 언니 엄마한테 걸려서 욕 먹고 그랬죠. 왜 자꾸 쟤 받아주냐고. 언제까지 그럴거냐고.
그래서 열 한살에 제주도를 나왔어요. 나와서 내내 남의 집 살이하고.

– 전쟁이 전쟁이.. 우리 엄마가 막내를 전쟁통에 낳았어요. 내가 그 때 여덟 살이었고. 우리 엄마는 산후조리고 뭐고 없었어요. 그냥 한달만에 일을 나간 거예요. 그러니 애기를 어떻게 해. 내가 봐야지. 내가 애를 업고 다니느라, 나도 앤데, 여덟 살짜리가 애를 업고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 손가락 가운데 마디가 퍼렇게 멍이 들어. 깍지를 하도 껴서. 포대기고 뭐고 애기띠도 없죠. 내가 그때는 엄마 원망을 많이 했는데, 나도 이제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 나이가 됐단 말이죠. 이제 나도 곧 엄마를 만나러 가겠지. 그러면 내가 가서 엄마하고 또 잘 살아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 나는 우리 집이 그렇게 못 살지도 않았어요. 가끔 쌀밥도 먹었단 말이죠. 그런데 왜 나를 학교를 안 보내줬을까.
위로 우리 오빠가 하나 있고 언니가 둘이고 내가 막내딸인데, 우리 아버지가 난봉꾼이라 내가 두 살때부터도 집에 없었어요. 계속 딴살림을 했어요. 언니는 둘 다 여우고 오빠가 이제 장가를 가서 집에 들어왔어요. 올케언니랑 오빠랑 나랑 우리 엄마랑 사는데, 오빠네 조카가 여덟이예요. 애기들을 볼 사람이 없다고 나보고 애를 보라고 했어요. 내가 조카들을 키우느라 학교를 못 간 거예요. 나도 학교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우리 오빠가 했던 말이 너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학교 가고 싶으면 니 아버지한테 가서 얘기하라고. 그 말이 나는 너무 슬펐어. 왜 나한테 그랬는지.

– 우리 언니는 수단이 좋았어. 어려서부터 자꾸 어디서 그렇게 쌀을 퍼와. 그럼 그거 가지고 엿 바꿔먹으러 가지. 쌀뿐이 아니야.아무튼 뭘 그렇게 어디서 가지고 왔어.
나중에도 잘 사셨겠어요.
어 잘 살았어요. 그 딸들도 잘 살고요.
지금도 계세요?
우리 언니 치매걸렸지.

자꾸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들 한다. 글이 맥락이 안 맞는다고 답답해했다. 모두들 쓰다가 학교 못 간 억울한 이야기로 빠져나간다. 복숭아 서리, 수박 서리, 먹고 살만한 제일 부잣집 밭에서 한 두개쯤 가져와도 괜찮던 시절이라는 건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얹어주는 공유의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목화솜이 되기 전에 먹으면 아주 맛나다고 했다. 내가 아카시아 진달래 사루비아는 먹어봤다 했더니 그런 거보다 훨씬 맛나다고 했다.

수업을 하면서 나는 눈가가 자꾸 뿌얘졌다.
목울대까지 차오른 학교 못다닌 서러움을 언제 풀어야 할까.
가계도를 그리고 생물학적 가족사를 풀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남의 집 살이”를 했다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되었고 “애보개” 하느라 자기 집에서도 살림살이를 했던 사람도 서넛이었다.

“글만 쓰면 눈물이 나.”
어쩌면 그건 글의 내용이나 지나온 세월에 묻힌 많은 이야기와 동시에, 한 글자 두 글자 꾹꾹 눌러 적으며 “내 이야기”를 써보는 것에 대한 애닮픔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19. 6. 10.

[생애사쓰기]성수종합사회복지관 수업을 시작하며

내일부터 성수종합사회복지관에서 초등문해교육을 마친 어르신들과 생애사쓰기 수업을 시작한다.
초등문해교육을 마친 분들과의 수업은 처음이라, PPT를 손 보다가 접었다. 대신 다음과 같은 프린트물을 만들었다.
<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복지관에서 붙인 프로그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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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보내는 편지>> 수업에 함께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글쓰는 사람 이하나라고 합니다.
앞으로 열 번, 여러분과 만나게 됩니다.

저는 2013년부터 어르신들 뿐 아니라, 중년층, 장애인가족들과 함께 생애사쓰기 수업을 해왔습니다. 생애사라는 것은 나의 삶을 돌아보는 역사를 뜻합니다. 이 수업을 할 때마다 많은 분들이 울고 웃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 순간도 어렵지 않은 날들이 없었고 쉽게 지나간 시절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이룬 게 없다.”
“내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다.”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모두 허무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한 성공한 삶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가난은 왜 부끄러웠을까?
우리는 역사에서 늘 비껴나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열심히, 정직하게 살았다고 믿습니다.
특히 자기 삶을 쓰겠다고 모이시는 분들은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꽃을 키우듯 일궈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이제 열 번의 수업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우리 삶의 아름다운 고갱이들을 캐내 보겠습니다. 생애사쓰기 수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19.6.3.

[생애사쓰기]가난이 부끄러워서

“노조활동 한 적 없어요. 어용이었어요.”

수요일 생애사쓰기에 참여한 60대 여성의 말이다. 써온 목차에 “노조활동”이라 써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물었을 때였다.

“무슨 노조를 했겠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일자리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나는 바닷가에서 자랐어요. 재첩 따고 다시마 걷으면서 살았어요. 그게 너무 고되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공장이 얼마나 좋았는데요. 앉아서 손가락만 까딱까딱하면 돈이 나오는데요. 왜 노조를 합니까. 짤리면 방법이 없어요. 돈 벌 데가 없는데요. 거기 사무실 가면 회의한다고 빵도 주고 음료수도 줘요. 그냥 앉아있다가 오는 거예요. 쉬고 좋잖아요? 그렇게 지냈어요. 어용노조하면서. “

이 사람의 글은 서늘하다.
세상을 뒤에서 바라보는 습관이 묻어났다. 한 발 뒤에서, 언제나 객관화해야 한다는 삶의 강박이 있었다. 그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흔적이다.

… 선생님, 이렇게, 누구 편을 들어서 같이 화내주고, 불합리하지만 내 사람이라 편들고, 뭐 그런 거 잘 못하시죠?

이 수업의 수강생들은 자꾸 나보고 점쟁이같다고 한다. “어머 다 들켰네.”라는 게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내 질문을 받은, 재첩 따는 게 힘들었다는 그 분은
“맞아요. 저는 끊임없이 저 자신을 담금질하며 살았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아들에게 크게 혼이 났네요. 제가 편을 안 들어줬어요. 엄마는 왜 매번 그런 식이냐고. 아주 그냥.. 아주 크게 혼쭐이 났어요. 안 그러려고 노력해요. 잘 안되네요.”

네,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요. 저도 좀 그런 편이거든요.

나는 수업을 마무리하며 김은화 씨의 책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의 표지 뒷 면을 읽어내려갔다.

“이건 책을 만들 때 투자한 사람들에게 먼저 보내주는 건데요. 음.. 이런 내용입니다.
공장노동자부터 요양보호사까지, 40년간 가족을 먹여 살린 어머니의 삶을 딸이 인터뷰하다, 라고 써 있어요. 그런 내용이고요. 제가 좀 읽어볼게요.

‘엄마는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새벽 6시면 일어나 할아버지 밥상부터 오빠 도시락까지 하루 열 끼를 챙겼다. 아침 9시에 집 앞의 물류 회사로 출근, 저녁 6시에 돌아오면 밥 먹고 설거지하느라 바빴고, 새벽에는 근육통으로 끙끙 앓았다. 주말에는 빨래하고 장 보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런 엄마가 육십을 넘겨 말했다. 자기는 인생에서 이룬 게 없다고. 도대체 엄마의 노동은 무엇이었을까? ‘ “

재첩이 지겨웠던 그 분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모두들, 지금은 평촌에 집 한 채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글에서 “가난의 부끄러움”을 매번 느꼈다.

이날은 내가 질문을 했다.

“그런데요. 가난이, 왜 부끄럽죠?
우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몇 주째, 선생님들이 써 오신 글을 보면 공통된 게 있는데요, 가난이 부끄러웠다. 가난해서 부끄러웠다, 거든요. 근데,이 가난이, 누구를 속이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내가 도박이나 술에 빠져 가족들이 일궈놓은 것을 하루 아침에 날렸거나, 그래서 생긴 가난이 아니잖아요? 어린 데도 일을 했고, 모든 식구가 나가서 일했는데도 가난했던 거잖아요?
그러면, 음… 부끄럽기 보다 ‘화가 난다’면 모르겠는데, 대체 이게 왜 부끄럽죠? 우리는 왜, 언제부터,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했을까요? 왜죠?

저도 가난했을 때가 있었는데요.
저는 화가 났거든요. 선택에 제한을 받으니까.
부끄럽진 않았어요. 어쩌라고, 열심히 하는데. 하루종일 일을 하는데도 가난한걸.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가난한데 어쩌라고. 그런 마음이었거든요.”

부끄러울 수도 있지.
굳이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 부끄러움이 죄책감이 되거나,자기 삶을 비하하는 일이 되지 않길 바라서였다.

눈물을 싹 닫고 일어선 재첩 이야기의 그 분은 서*이 씨. 글 뭉치를 나에게 내밀며 원고를 좀 봐달라고 했다.

이 수업의 내 강사비는 두 시간에 7만원.
담당자에게는 첨삭지도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어쩌겠는가.
서*이 씨의 이야기는 안 읽어볼 수가 없는 걸.

*
수업 전후 준비와 지도에 10시간이 넘게 드는 이 수업은 평촌도서관에서 주관한다. 안양시 평생교육원 기준으로 강사비를 책정하며, 경력과 저서에 무관하게 시간당 30,000원으로 책정했다. 내가 초등학교 수업보다 강사비가 형편없다 했더니 담당자는 시간당 30,000원인데 그보다 높지 않냐며 매우 당당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