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삼척
오래된 골목을 걸으며
당신의 바다를 만져본다

반짝, 하고 빛나던 별들의 폭발과
무너져 내리던 한 세상에 관하여
돌아보면 돌이 될 거라던 이방인의 주문이
국자에 스뎅그릇에
덜그럭, 소리를 내고 떨어질 때

도깨비처럼 벚꽃잎처럼 천변에 흩날리던
산 자의 영혼에 관하여
꽃잎처럼 뛰어내린 여자들에 관하여
비 내리는 기차역 앞마당에 관하여

비린내가 싫었던
당신의 차가운 우주를 잡아본다
여기 이 손끝에 와닿기를

기억이 소멸되지 않기를
시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가 하나씩 늘어갈수록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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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

 

 

그 때는 몰랐던 것

 

2003년 여름.

중국의 서쪽을 가겠다고 봄부터 마음을 다졌다.

여름방학은 7월과 8월이었다.

7월 한 달은 한국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습학원에 나가 국어와 논술을 가르쳤다. 한 달 생활비가 훌쩍 넘는 월급을 받아 챙겼다. 방학 특강을 맡는 동안 8월엔 여행을 갈꺼라고 호언장담해둔 터였다. 원장은 나를 잡았지만 절대 여행계획이 변경되는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잘한 일이다. 2003년 여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서안을 거쳐 가욕관으로 가 만리장성의 끝을 본 뒤, 둔황에 가서 막고굴을 보고 티벳 아래쪽 감숙성과 사천성을 돌아 성도를 찍고 상해로 돌아오기로 했다. 당시엔 한국인들 중 이 부근을 여행한 사람이 많지 않았고 영어로 된 배낭여행자들의 싸이트를 몇 달동안 뒤졌다. 그 때 온라인으로 알던 한 남자가 이 코스를 다녀온 영향도 컸다. 사진을 잘 찍는 사내였다.

서안까지 가는 데 기차로 18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산사태로 철로가 유실되어 6시간 연착되었다. 서안에서 둔황까지 24시간이 걸렸다. 둔황역에 내리니 밤 12시였다. 자작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사제택시를 타고 1시간 넘게 갔다. 둔황역과 둔황시내는 그렇게 멀었다. 명사산에 올라 모래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느끼고 막고굴을 돌아 나왔다. 하미과를 먹었고 가욕관을 갔다. 만리장성의 끝에 서서 말도 안되는 지평선을 봤다. 하늘은 음침했다. 인터넷으로 연락해 함께 여행을 하겠다고 북경에서 온 여자와 동행을 했다. 여행 중 살을 빼겠다며 식사를 굶는 사람이었다. 견딜 수 없었다. 두려움에 벌벌떨던 그 사람은 란저우에서 비보를 듣고 한국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이틀이상 묵으면 자살이라던 공기오염이 심한 란저우에서 라면을 하나 먹고 맛대가리 없는 커피를 나눠마시고 헤어졌다. 10시간이 걸린다는 샤허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샤허를 가는 길은 내가 여태 가본 중 가장 험한 길이었다. 그보다 더 험한 길은 황룡에서 성도까지 돌아오는 길이었다.

샤허로 가는 길에 회족들이 보였다. 운전기사와 승무원은 승객을 기다리게 하고 회족식당에 들어가 국수를 사 먹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고 싶을까봐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샤허는 온 마을이 사찰로 이루어진 곳이다. 라마승들이 가득했다. 그 사찰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을 위한 식당과 여인숙, 인터넷 까페와 조잡한 물건을 파는 잡화상, 그리고 터미널. 그게 그 마을의 전부였다. 거기부터 시작이었다.

티벳 사람들이 사는 곳.

샤허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7시간짜리 버스를 탔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랑무스. 郞木寺. 원래 그 쪽에서는 랑무스의 우변이 없는 글자를 쓴다. 랑무스는 마을이 卍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슬람 사원도 있지만 주민의 대부분이 티벳불교도이며, 라마승들이 가득하다. 가난한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승려가 되고, 부모와 헤어져 종교인이 된다.

다른 곳으로 나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 아침 7시에 있었고, 도착하는 버스는 저녁에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북경에서 온 내분비과 의사였다. 그녀와 랑무스에서 숙소를 같이 쓰기로 했다.

날씨는 내내 흐렸다.

해발 3천미터가 넘는 곳이었다.

샤허부터가 고산지대였는데 나는 으슬으슬 몸살기운만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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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무스는 천장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장은 사람이 죽으면 잘게 쪼개 독수리에게 먹이로 바치는 장례형태를 말한다. 조장이라고도 한다.

랑무스에 도착한 이튿 날 아침, 나는 북경여의사와 천장터로 향했다.

그녀가 오늘은 장례가 없다더라고 얘기했다. 나는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조금 놀랐다. 누군가 죽어서 독수리의 밥이 되고, 나의 구경거리가 되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개가 가득한 천장터에 힘겹게 올랐다. 천장터에는 신선한, 공기가 있었을 뿐이다. 바닥을 이리 저리 둘러보던 나는 사람의 뼛조각과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건드리진 않았다. 이럴 때마다 지나치게 냉담해지는 것이 나인지라, 사람이 죽었고, 여기서 장례가 있었고, 독수리도 안 먹는 게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내려왔다.

별 게 없다 생각한 우리는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오는 길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북경 여의사가 들어가볼까? 하더니 노크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음식을 해먹고 몸을 누이고 난로를 피울 정도의 공간에 한 라마승이 살고 있었다. 비구니였다. 여자는 바느질을 하다 말고 우리를 맞았다. 매우 쑥스러워했지만 내 동행이 중국인이기도 하고 우리 둘 다 여자인지라 큰 경계심은 없어보였다. 비구니는 우리에게 차를 내주었다.

 

샤허와 랑무스, 이 두 곳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마니차를 돌리며 돌탑을 돌거나 오체투지를 했다. 승려가 가득한 마을에서 늘 불경공부를 하는 소리가 들렸고 승려들은 승복을 입고 법당 근처에서 공부를 하거나 축구도 했다. 샤허에는 어린 동자승들이 들락거리는 작은 극장이 있었는데 30인치짜리 브라운관 티비를 높이 걸어놓고 푼돈을 입장료로 내면 지직거리는 화질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가끔 허섭한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사람들도 있었고 야크떼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침엔 양떼무리가 마을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갔다. 여인숙도 있었고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까페와 식당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니, 내 눈으로 봤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무 경제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누군가 농사를 짓고 먹을 것을 만들어 올테지만 그들은 많이 먹는 것 같지도 않았고 빨래를 자주 하거나 돈을 버는 사람도 매우 적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려이거나, 승려가 아니면 그저 마니차를 돌리며 길을 걸을 뿐이었다. 평생의 목적이 라사에 가는 것이라 했던가. 곳곳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밥을, 구걸해서 먹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르게 아무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거였다.

 

돈을 벌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라사에 가겠다는 꿈을 하나 가지고 평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적게 먹고 적게 일하며 본향을 꿈꾸는 사람들의 삶은 낯설 뿐 아니라, 당혹스러웠다.

 

뭐지.

 

뭐지?

 

아무 것도 안 해도, 괜찮은 건가?

 

오두막에서 만난 그 비구니는 길어진 손톱을 자르거나, 길어진 머리를 자르고 차를 끓여마시고 법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하루에 두 번씩 있는 경연에 참여해 승려들은 박수를 치며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해가 지면 누군가 언덕에 앉아 기도를 했다. 동굴 속에서 하루 종일 기도를 하던 여자가 쑥 나오기도 했다. 주인이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는 야크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흰 야크는 신성하게 여겨진다며 이리저리 꽃을 주렁주렁 달고 관광객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는 몰랐다.

그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라는 걸.

산다는 것은 애써서 뭔가를 만들고 먹고 욕심을 채우고 그 욕심을 버리고 누군가와 싸우고 사랑하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싸우고 뺏고 뺏기며 살아가는데, 그들은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죽으면 뼈를 잘라 새에게 주고 하늘로 돌아가라 빈다. 그 일을 마을 사람들이 하고 누구나 그렇게 하늘로 돌아간다. 조장에 대해서는 척박한 티벳의 환경으로는 화장도 매장도 어렵기 때문에 선택한 생존법일 거라 하기도 한다.

이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성지에 가려고 하는 것은 다음 생에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 생을 살면서 다음 생을 기다린다. 어찌 보면 이 생은 살지 않고 소망만 하며 다음 생을 미리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번 생은 오체투지를 하고 다음 생엔 또 무엇을 할 것인가. 다음 생에도 더 좋은 생을 위해 또 오체투지를 할 것이다. 이들은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이승을 사는 것인지 저승을 사는 것인지, 이번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다음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한 삶이 있었다. 과연 산다는 게 무엇이며, 죽는다는 건 무엇인가.

 

12년이나 지나 생각해보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문명이 진입해 랑무스의 사진을 검색해보면 각종 지프차가 여기저기 주차된 모습이 보이지만, 그래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오체투지를 하며 라사로 가겠지. 다음 생을 위해서. 그들은 이번 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라사로 갈 수 있으니.

 

언제 썼는지 기억이 안나는 글을 C드라이브에서 발견하여 옮긴다.

아마도 2015년 초에 적은 듯 하다.

홍콩의 어느 밥집

결혼하고 작은 아이를 낳은 게 2006년이다. 아이는 2006년 봄에 태어났다. 2005년 여름에 대만출장을 남편과 같이 다녀왔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여권이 만료된 것도 모르고 있었고 올 해 초에 해외를 나가야 할 일이 있어 여권을 새로 발급 받았는데 그 일도 무산되었다. 가까운 중국은 어떻게든 맘을 먹으면 다녀올 수 있는데 그 마음 먹는 일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아는 동생이 홍콩행 동반을 강권했다. 꼭 같이 다녀오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은 망설이다가 과감하게 추진해 버리는 그 친구를 보고 이렇게 떠밀리듯 가지 않으면 또 내년이 되겠다 싶어서 비싼 비행기표를 급하게 끊어 주말을 이용해 홍콩을 다녀왔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 내가 바란 것은 그냥 거리를 걷는 것이었다. 간판이 즐비할 그 거리를 그냥 하염없이 걷는 것. 내가 언제나 그리워 하는 상하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테니, 나는 그냥 걷다가 오면 될 일이었다. 꼭 가보고 싶은 곳도 꼭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흔한 국수나 볶음밥 정도였고 어떤 사람들은 무척이나 싫어할, 중국 특유의 냄새였으니까.

홍콩은 스모그가 가득했다. 올 해 들어 중국대륙에 인접한 그 어느 곳도 무사하지 못한 모양이다. 첫 날부터 뿌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 두방울 떨어졌다. 둘째 날, 저녁이 되자 제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들어 정해진 일정이 있어 숙소와 멀리 떨어진 곳을 방문하고 호텔로 돌아가 잠깐 짐을 추린 다음 저녁으로 무얼 먹을 것인가 둘이 궁리했다. 나는 그제서야 hotpot 이라고 하는 중국식 샤브샤브 훠궈를 생각했고 검색을 했다. 마음은 들뜨고 둘 다 머리는 비어 있는 상태라 검색도 잘 하지 못했다. 택시를 타고 음식점으로 이동했는데 훠궈 전문점이 아니었다. 우리는 다른 훠궈집을 찾아 다시 택시를 탔다. 소호근처였는데 홍콩은 운전석이 반대방향이라 내가 계속 방향을 놓쳤다. 주소를 찾았는데 가게가 없었다. 맞은 편에 PUB이 있었고 문앞에 서 있는 종업원에게 중국어로 물어보니 말을 못 알아듣는다. 그제서야 어둑한 조명에서 그녀가 영어를 사용하는 다른 나라에서 왔을 거란 짐작을 했다. 이 근처에 훠궈집이 없었나요? 바로 이 앞 집인데 문 닫고 다른 주인이 들어왔어요. 그럼 이 근처에 추천할 만한 다른 훠궈집을 아는데가 있나요? 그녀는 모른다고 했다. 내리막길을 가르키며 저리로 내려가면 중국음식집이 있을 지도 모른다 했다.

우리는 일단 비가 더 오기 전에 빨리 자리를 이동해야 했고 어디든 가서 중국음식을 먹겠다는 일념에 가득차 있었다. 낮에 유명하다는 국수집에서 국수를 먹고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라는 세계최장 에스컬레이터로 가는 길에 지나갔던 시장이 다시 나왔다. 시장길을 통해 소호가 됐든 란콰이퐁을 가든 아무튼 열심히 걷고 있었다. 숙소 근처 K-POP이 나오는 잡화점에서 비싸다고 둘이 투덜대며 46원(한화 6200원 가량) 이나 주고 산 우산은 이미 반쪽이 짜부라져 있었다.

그나마 백반집 같은 간단한 음식들을 파는 식당도 문을 닫아버렸다. 시간은 9시가 넘었다. 지나가며 봤던 한 식당에 주방장 옷을 입은 아저씨가 문 밖에 서 있었다. 나는 우산 속에서 손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먹는 시늉을 하고 아저씨를 쳐다봤다. 아저씨는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급한 김에 그냥 마구잡이로 들어갔다. 아무도 주저하지 않았다.

메뉴를 보니 싸게 점심 저녁 메뉴를 파는 집이고 음식맛이 훌륭할 것 같지 않았다. 세트메뉴를 주로 파는 집이었고 면 전문도 밥 전문도 요리 전문도 아니었다. 볶음밥을 먹어보겠냐고 동행에게 물었다. 나의 동행은, 이런 식당에 들어올 일도, 들어와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대부분의 주문을 나에게 일임했으나 나는 항상 괜찮겠냐 되물어봤다. 빈 자리에 앉으려고 가방을 내려놓자 아저씨가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다 주며 등이 다 젖었다고 조금이라도 닦으라고 했다. 친절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두운 밤에 영업시간이 끝났는데 들어오라고 한 것도 뭔가 그냥 밥을 사먹는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볶음밥을 하나 시키고 요리를 하나 주문하고 싶다 하니 아저씨가 돼지족발을 추천했다. 그렇게 달라고 하고 국물이 필요한데 탕은 마땅한 게 보이지 않아서 국수를 한 그릇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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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푸짐한 볶음밥을 한 그릇 내주었다. 우리는 정신없이 볶음밥을 먹었다. 나의 동행도 맛있다며 잘 먹었다. 곧 홍콩 특유의 돼지족발이 나왔다. 중국의 돼지족발은 상당히 맛있는 편인데 역시나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가득해서 한국 사람 중엔 잘 못먹는 사람도 많다. 동행은 자기에게 약간 하드코어한 음식이라고 웃으며 조금씩 살점을 베어 먹었다. 홍콩 사람들이 잘 먹는 양배추 볶음에 굴소스를 얹은 야채 요리도 한 접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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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는 중에 식당 청소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 왜소한 남자가 들어와서 고무장갑을 끼고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앉은 곳을 빼고 다른 테이블엔 이미 의자가 올려져 있었다. 한 사람이 또 들어와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갔다. 우리가 밥을 다 먹어가자 아저씨는 광동어가 가득 배인 부통화 (대륙의 표준어 / 普通話)로 나에게 대만사람이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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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놀라워했다.

한국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부통화를 잘 하느냐고 되물었다. 대륙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얘기했다. 아저씨의 식당엔, 아마 한국인이 들어오거나 외국인이 들어오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저씨는 중국 표준어를 하는 한국사람을 처음 본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저씨는 의자를 옆에 놓고 앉아 나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광동어가 가득한 억양과 분명히 않은 발음을 알아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들을 만은 했다. 홍콩 어때요? 홍콩 좋네요. 여기 사람들은 뭔가 좀 자유로와 보이고, 개방적인 거 같아요. 대륙에 비해서. 그렇지. 홍콩은 좀 그런 게 있죠. 하지만 여기 생활은 아주 고됩니다. 홍콩은 경찰이 아주 좋아요. 친절하구요. 우리는 경찰을 신뢰하죠. 아. 저는 어릴 때부터 홍콩영화를 많이 봤어요. 영화에 홍콩 경찰은 꼭 나오잖아요. 그렇군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줄도 몰랐어요. 직업상으로도 좋나요? 좋은 직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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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내내 담배를 피우며 왔다 갔다 했기에 나도 담배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은 터였다. 아저씨가 내 담배를 만지며 이건 한국담배냐고 물었다. 아니 이 담배는 영국담배인데 한국에서 가져온 거예요. 라고 얘기하자 앞에 앉은 나의 동행이 아저씨 담배 하나 드리라며 웃었다. 나는 두 가치를 꺼내 드렸다. 아저씨는 좋다며 고맙다 하고 품에 넣었다. 잠시 후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아주 맑아서 좋다며 홍콩은 담배가 너무 비싼데 한국은 얼마나 하냐고 물었다. 홍콩은 수입담배가 한 갑에 50원(한화 6700원꼴) 정도였다. 아저씨는 나에게 담배를 두 가치 줬으니 밥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게 어딨냐고 웃었다.

같이 온 이 친구도 한국 사람인가요? 한국에서 왔나요? 키가 무척 크네요. 라고 하시길래 이 친구는 한국사람인데 영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친구의 핸드백을 보고 와 이거 비싼 가방인데, 직업이 좋은 모양이라고 하시길래 영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친구라고 대답해드렸다. 아저씨는 대단하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여기서 밥을 먹고 어디로 갈건가요? 란콰이퐁에 가 볼 생각이예요. 아 거기 아주 번화하죠. 놀기 좋아요. 사람들이 많죠. 외국인도 많죠? 아저씨도 끄덕끄덕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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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자기가 만든 돼지족발에 기름기는 모두 빼고 영양가만 남은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주방에서 작은 양푼에 우리가 먹은 볶음밥을 해서 나오더니 우리 그릇에 몇 수저를 덜어주고 청소하는 아저씨에게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볶음밥을 싹싹 먹고 돈을 내려고 하자 이 아저씨가 정말 돈을 받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지 마시라고 재촉하자 120원이라고 밥값을 알려주었다. 적은 돈도 아닌데 받지 않으려 하다니 그 마음이 고마워서 내 동행은 명함에 한자이름까지 적어서 아저씨에게 드렸다. 내가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괜찮냐 묻자 웃으며 V자를 그려주셨다. 우리는 돈을 내고 명함을 드리고 가게를 나오는데 앞쪽에 물걸레질을 해서 길이 미끄럽다며 우리가 나가는 길까지 따라나와 조심할 지점을 가르쳐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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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조금씩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짜부러진 우산을 둘이 쓰고 팔짱을 끼고 어두운 시장통을 빠져 나왔다. 내 옆에 선 동행은 “좋다.” 라고 말했다.

“좋지?”

“응. 좋네. 좋은 사람이네.”

우리는 아주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참 좋은 음식을 먹었고 란콰이퐁의 소란스러움은 우리를 감흥시키지 못했다. 란콰이퐁을 한 바퀴 돌아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한 사람의 친절이 오랫동안 홍콩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것을 알았기에, 비오는 어두운 길거리도 무척 정겹기만 했다.

 2013년 12월 14일의 일을 17일에 적음

남도에 다녀오다

거기 가면 따뜻하겠지.

날씨 앱을 꺼내 보며 생각했다. 숫자가 말해주는 온도는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 숫자를 기록했던 어떤 날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숫자는 언제나 막연하다.

두 번째 남도로 가는 길. 남도에 얽힌 이야기는 숱하게 많다. 스물 한 살부터 스물 세 살까지 살았던 고시원에는 모두 남도 사람들이었다. 전라도 순천, 벌교, 목포, 장흥, 고흥, 보성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 왁자지껄 했는데 전주 사람은 북도는 껴주지 않는다고 찬밥이었다. 남도에 대한 환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것을 다녀온 지난 가을, 그 풍요로운 땅에 홀딱 반했다.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바다와 산이 가깝고 그 사이에 들이 펼쳐졌다는 것은, 불편함을 담보로 하되 이런 풍광은 댓가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먼 곳의 여행을 할 때마다 기가 막힌 경치가 늘 신기했다. 그 풍경들은 그만큼 먼 길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게 자연이 가까이 오겠느냐 묻는 것에 대한 댓가라 생각했다. 운전을 해서 가는 남도는 대여섯시간이 걸렸다. 피로따위, 참을 수 있는 길. 고흥에 간다는데, 운전 따위 못하겠느냐고 실실 웃었다.

상위에 차려진 음식은 언제나 싱싱했다. 냉동창고에 들어가 본 적 없는 풀과 물고기가 그대로 상 위에 음식이 되어 올라오는 곳, 파도가 거세 양식도 어렵다 했다. 험난한 자연환경이 외려 득이 되는 곳. 고흥에 다녀오면 바다와 들을 멀리 하고 사는 것이 이렇게 비루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햇살이 좋은 오전, 그 집에 갔다. 마당에 있는 작은 나무에 노란 것이 달렸다. 제주도 귤나무를 심으셨다는데 열매가 열렸고, 그냥 따서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귤을 집에서 따 먹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동네에 유자가 지천으로 널렸는데 딸 사람이 없어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땅에 떨어지면 고양이나 들쥐의 먹이가 될 것이고, 나무에 달린 감은 까치의 밥이 되겠지. 문득 까치 같은 날짐승도 유자를 먹을까 궁금해졌다. 시큼할텐데.

한 식구가 먹을 만큼만 심은 작은 밭에 무와 배추가 커다랗게 자라고 있었다. 그 옆에 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누구 먹으라고 나란히 놓았을까. 누군가 먹으라고. 와서 달라고 말하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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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도 매달린 채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어가고 있었다. 삼시 세끼 밥을 먹고 노인들만 사는 마을에서 이 모든 작물을 거둬들이는 일은 작정해야 할 일이다. 고향집에 간 아들은 아무도 따지 않은 유자나무위에 올라가 유자를 따기 시작했다. 유자나무에는 가시가 있다. 팔순을 넘긴 노인이 일일이 거둬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만든 것을 만나보지 못한 유자는 작고 쪼글쪼글했다. 겉껍질은 시꺼멓고 울퉁불퉁했다. 검게 변한 귤도 마찬가지였다. 내다 팔기에 애매한 과일이다.

충청도의 힘이라는 책을 쓴 저자는 자이랑 식품에서 일하는 남덕현이라는 사람이다. 작은 책이라는 잡지에 젓갈 담그는 얘기를 쓴 걸 읽었다. 보기에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외면한다고. 가라앉는 새우 단백질 때문에 팔리지 않는 젓갈이 속상한 이야기다. 유자를 생각했다. 보기에 좋지 않아 아무도 돈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 집의 작은 마루엔 유자냄새가 가득했다. 70년을 해로한 두 노인은 유자 껍질을 잘게 잘라 마당에 내놓고 말리고 있었다. 한약방에서 약으로 쓰기에 내다 판다 하셨다. 그게 뭐 얼마나 큰돈이 되겠는가. 그냥 버리기에 아까워 햇빛에 맡겼을 터.

냉난방이 완벽하고 햇빛도 걸러 받아들이는 아파트에 사는 나는 버리기에 아까운 모든 것들을 노란 비닐봉투에 담아서 내다 버려야 한다. 햇빛에도, 바람에도 맡길 수 있는 게 없다. 모두 다 입으로 들어가 똥이 되지 않으면, 씨앗 하나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도시.

남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수산시장에서 갓잡은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을 사온 그날 밤, 우리집은 쓰레기장이 되었다. 스티로폼 박스는 네 개가 넘었고, 그 안의 물건들을 포장한 퍼런 비닐과 녹아가는 얼음을 씽크대에 버리고 생선 뼈다귀, 내 옷에 붙은 들풀의 씨앗 하나 모두 다 떼어내 쓰레기통에 곱게 넣어야 한다. 먹고 남은 게껍질은 가위로 잘게 잘라 노란 쓰레기봉투에 넣어야 더 많이 들어간다. 생선을 나누어 담는다고 나는 지퍼백을 다섯 개나 꺼냈고 냉동실 칸칸마다 각종 비닐로 쌓인 먹을 것들이 가득한 걸 알아챘다. 냉동실은 블랙홀, 이제 하루가 지나, 돌바지락이라 부르는 살조개는 다 먹어버렸으니 남은 꽃게를 차곡차곡 냉동실에 잘 넣거나 쪄먹어 치워야 할 일이 되었다.

 

순천을 지나오면서부터 추웠다. 집에 도착한 다음날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베란다엔 유자냄새가 가득한데 그 집에서처럼 향긋하지 않다. 신바람이 나서 꽃게를 4kg 정도 사왔는데 언제 먹나 싶다. 잎새주를 사왔는데 남편은 웬지 당기지 않는다며 냉장고에 그대로 두었다. 식탁 위엔 며칠 전에 사온 식빵이 굴러다니고 냉장고엔 일주일된 스타벅스 케잌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그 사이 식구들은 컵라면과 봉지라면을 사다 찬장에 쟁여놓았다.

남도의 것을 사온다고 내 집이 남도가 되지 않는다. 장소가 바뀐 먹거리들은 짐짝처럼 물러가겠지. 아쉬울 뿐인가. 슬프기까지 하다.

그 동네의 편의점에서도 원두커피를 찾아 캡슐원액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에 거 참 커피 맛대가리 없다고 마실 때, 옆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전화통화 하던 걸 들었다.

“돗돔을 하나 잡았는디. 먹을 사람이 있는가?” 하던 얘기.

어쩌다 생기는 것에 대한 반가움, 우리 집엔 그런 게 있던가.

어쩌다 생기는 게 뭔가, 생각나면 주문하면 될 일이다.

동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지, 물건은 언제나 움직일 수 있다. 돈만 내면, 무엇이든 주문할 수 있고,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구할 것은 오로지 돈. 그러니 무엇이 환영받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도시에선 아무도, 아무 것도, 그 어떤 음식도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뜬금없이 걸려 올라온 돗돔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온다. 나는 남은 꽃게를 냉장고에 넣을 것인가, 냉동실에 넣을 것인가, 얼음팩에 넣어 딤채에 넣을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2013.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