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사회

JTBC 뉴스룸을 보면서 PC방 살인사건을 저렇게 계속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내가 느껴온 (분석이 아니라 그냥 직관적으로) 바로는 이쯤되면 이슈몰이에 성공해서 다음 단계로 진입할 때가 되었는데 오늘은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은 듯.
나는 뉴스룸에서 최종적으로 야간노동자 안전에 대한 이야기로 몰아갈 걸 기대했고 그 중간에 심신미약기준과, 촉법소년 얘기정도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늘은 심신미약와 심신상실에 대한 이야기 정도 하고 그쳤다.

하나의 뉴스가 “한걸음 더 들어가려면” 사건 이면에 숨은 진실을 캐내야 한다고 했다. 그 진실은 사회시스템의 빈틈을 찾아내는 것일게다. 우리가 모르는 것들을 밝혀내거나 우리가 미처 찾아보지 못한 미흡한 점들을 알려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경찰의 대응메뉴얼, 건장한 남성이라 그냥 돌아갔다, 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내가 현장에서 마주쳤던 출동경찰들은 30분 정도는 충분히 기다려줬다. 돌아가지 않고 멀찌감치서 필요하면 얘기하라고 대기하는 경찰관들도 있었다. 경찰이 다 썩었다, 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 집 앞에서 고성방가 하는 중년 여성에게 담뱃불붙여주고 얘기들어주는 경찰관도 봤다.(이 중년 여성 나 아님)

야간노동자는 사실 2인 1조로 일할 필요가 있다. 공사현장도, 경찰도 2인 1조가 기본인데 야간노동도 2인 1조가 좋겠지만 이 얘기가 나오면 “최저시급도 올라서 난리인데 미쳤나” 소리가 나오겠지만.

사춘기를 넘기면서 범죄물과 수사물, 르뽀를 즐겨본다. 특히 그것이 알고 싶다는 최애 프로그램. 더 잔혹한 것을 직설적으로 보면서 위로 받는 게 있다. 견디고 살아남은 자의 흔적이다. 그거 내가 겪은 거, 다 별 일 아니구나 살만 해서 여태 살아 저걸 보고 있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일종의 견디는 방법이다.

최근 들어 세상이 너무 무서워요. 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사회이슈와 강력범죄가 언론에 많이 노출될 때는 동일한 사회적 현상이 있다. 언론들이 짠듯이 강력범죄를 계속 노출할 때가 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엔 강력범죄와 잔혹한 살인범이 가장 적절하다. 이 사건으로 이득을 볼 자들이 누구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강남 청소년 폭행사건이나 강서구 PC방에, 또 강서구인데 여성피살 사건도 나왔다.

에지간한 살인사건은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2017년 검찰청 범죄통계를 보면 (이런 건 그냥 구글링하면 PDF를 통채로 받을 수 있다) 2016년 살인전체 발생건수는 948건인데, 그 중 기수는 344건 (살인한 것) 살인미수, 예비, 음모, 방조죄는 604건이다. 하루 한 건 꼴이다.
2007년은 살인가수가 466건이었고 살인미수가 658건이다.
요즘들어 많아진 게 아니다.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반면 성폭력범죄는 늘어나고 있다. 2007년 14,344건인데 2016년은 29,357건이다. 이는 신고가 늘었기 때문이다. 성희롱은 성범죄에 들어가지 않는다. 성범죄는 강간과 준강간, 불법촬영등 형사법에 적용되는 것만 말한다. 성희롱은 형법으로 지배받지 않기 때문에 범죄에 준하지 않는다.

요즘 애들 무서워. 라는 말을 증명하려면 강력범죄(흉악범 > 살인, 강도 등)을 살펴보면 되는데 이건 언제나 20대가 상위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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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들 무서워서 애들 가는 데 안가. 라고 말한다면 폭력범죄 연령별 분포추이를 보면 되는데 지난 10년간 폭력범죄 최상위 연령계층은 40대였다. 그래프를 보면 50대가 40대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조만간 역전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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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차 얘기하지만, 페이스북에 자기 글, 자기 일상 사진 정도 올릴 수 있는 사람들은 아주 밑바닥을 잘 모른다. 나도 잘 모른다. 나도 간접적으로 들은 거고 깊이 관여한 게 아니고 그냥 스쳐가며 본거다. 중학교 때 학교 가는 길에 부탄가스 빈통이 널부러졌다는 정도는 깜도 아닌 경우가 많다. 몰랐던 거다.

노출이 쉬워지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
이런 범죄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게 어떤 작용을 하는가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역량에 달려 있을 것이다.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딱 절반쯤에서 나뉠 거 같은데, 동시대인들이 가고 싶은대로 가겠지.

다들 세상이 내 맘대로 안된다고 하는데 결국은 다 내 맘 가는대로 가더라. 내 맘 아닌 거 같아도 그게 내 맘인 경우가 더 많다.
사진은 2017년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 캡쳐

#40대는_어디가서_술처먹고_싸우지말자

목격자

타인의 고통에 관하여 기술하고자 할 때 사람은 어떤 태도를 갖게 되는가.

이는 특정할 수 없다.

기술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는 행간에 묻어나게 되어 있고, 글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다.

한 개인의 역사를 쓰고 공개하는 순간 나는 그 개인이 익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 속으로 퍼져나가는 순간 개인은 익명으로 돌변한다. 개인의 역사와 성품을 알고 그 개인과 신체적으로 접촉해 본 사람들은 고통 받은 개인을 여전히 개인으로 기억하지만, 그와 관계 맺지 않았던 이들에게 개인은 익명이 된다.

어떤 사람, 이라는 것은 익명성을 갖지만 동시대인의 의미를 갖는다. 대중에게 알려지는 익명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시대를 반영하는 상징이 된다.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는 동시대인과 분절적으로나마 역사를 공유한다. 그 개인이 초등학교를 나왔다면 동시대에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과 역사를 공유하고, 그 개인이 여성이었다면 같은 시대를 사는 여성들이 겪는 공통적 역사를 갖게 된다. 이를테면, 지금의 아이들은 10년이 지나도 모두 슬라임과 액괴를 기억할 것이라든가, 지금의 40대 여성들이 위스퍼라는 생리대는 ‘날개달린 생리대’로 기억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집단의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을 공유하는 순간 개인은 상징성을 가진 익명이 된다. 한 사람의 역사가 상징이 되려면 그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모든 개인은 나름대로의 사건을 갖고 있는데 그 사건이 대중에게 공개될 때 여러 가지 의미가 덧붙여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해석하고자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 일어난 사건은 코드, 즉 상징이 된다. 이 과정에서 대상화는 피해갈 수 없는데, 어떤 주체들은 이 대상화과정을 거부하기 위해 해석을 하지 말아달라는 요청도 한다.

개인의 역사는 그저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범위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인간이라지만, 그보다도 현대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명화가 완성된 사회인 경우, 사회는 그간 구축해 놓은 시스템이 올바르지 않더라도 쉽게 파괴되지 않을 만큼 견고해지면서 모든 개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한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 중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진 일에 대해서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는 말하고자 한다. 언어적으로 또는 비언어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는 경우 신체적으로 표현하거나 생활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드러낸다는 것이다. 신체와 인격 안에 영원히 숨겨둘 수 있는 상흔은 없다고 믿는다.

발화할 수 있는 사람과 발화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발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문해력의 문제이거나 언어구사력의 문제, 혹은 공개에 대한 용기여부가 관여한다. 공개에 대한 용기역시 발화하고자 하는 개인이 속한 사회적 조건 때문이다. 발화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는 망자가 되어버린 경우다. 죽은 사람은 발화할 수 없다. 세상을 떠난 사람은 자신의 몸으로 발화한다. 죽음의 과정과 이유에 대해서 온몸에 상흔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드러낸다. 이것이 개인의 의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렇게 된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망자의 말을 대신 풀어내기도 한다. 무고한 사람이 허망하게 떠날 경우 살아남은 자들은 무력감을 느끼는데, 이 무력감은 인간의 존엄이 사회 어디선가는 지켜지길 바라거나 동시대를 산다는 것에 대한 약속하지 않은 연대의식에 기원한다. 무력감은 분노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회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없어질 때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환경 때문에 안타까워한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결심한다.

한 개인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해 말한다. 나의 무력감을 어찌할 수 없다고 소리칠 때, 누군가 그 손을 잡는다. 거기서 억울한 죽음에 대한 성찰이 일어난다. 적어도 이 나라는 그런 과정을 통해 작동해왔다. 한 개인의 죽음을 통해, 그 죽음의 상흔을 통해, 애도하고 추모하며, 광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오늘 한 목격자가, 한 개인에 대해 목격한 바를 적었다. 혼자 추모할 수 없을 만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본다. 경험도 어려운 일이지만, 목격도 쉽지 않은 일이다. 목격한 자들도 유사한 상처를 입는다.  목격자는 때로 유일한 증인이 되기도 한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들은 맥락 없는 타인의 사건에서 오기도 한다. 왜 같이 고통을 분담하자고 강요하느냐고 묻느냐면, 그건 시대를 같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숙명이라고 말한다.

이글은 완성하지 않기 위해 부러 서둘러 닫는다.

 

강남역 10번 출구

강남역은 서울시 강남구와 서초구의 경계에 걸쳐 있다.
강남대로와 테헤란로가 맞닿는 곳에 강남역이 있다. 강남대로 동쪽은 강남구 역삼1동, 강남대로 서쪽은 서초구 서초 4동이 된다. 강남역 1,2,3,4,11,12번 출구는 강남구이고 마주보는 강남역 5,6,7,8,9,10번 출구는 서초구가 된다. 서울시 통계(2012년부터 2015년 통계의 평균치)에 따르면 강남역 9번 출구 주변 일 평균 유동인구는 17,334명, 저녁평균 유동인구는 6,646명이다.

▲ 23일 월요일 정오. 추모메세지는 서울시 여성재단으로 옮긴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잘 알려진대로

2016년 5월 17일 오전 1시 7분쯤, 강남역과 신논현역 중간지점 번화가의 한 프랜차이즈 노래방 공용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 노래방은 90년대에 여타노래방과 차별화된 “편안한 럭셔리”컨셉의 인테리어와 서비스로 각광을 받은 곳으로 현재 전국 23곳의 체인점이 있다. 다른 노래방보다 입구와 간판, 외부벽면까지 무척 밝고 깨끗한 느낌이며 조도도 상당히 높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당일 피해자는 강남역 인근 1층 주점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이 노래방의 화장실을 이용했다고 한다. 주변 건물 중 조명이 상당히 밝은 편이라 아무도 이런 극악무도한 범죄를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골목은 밤이 되면 술집과 식당의 불이 켜지지만 근처엔 일반 상점과 대형 옷가게, 사무용 빌딩, 어학원과 취업준비 학원이 강남대로를 따라 늘어서 있다. 월요일에서 화요일이 되는 밤은 한산하지도 않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점은 서울시 유동인구 조사보고서의 조사지점인데 주중 평균 하루 11,278명, 저녁에만 2,242명이 오가는 것으로 밝혀진 곳이다. 서울시 평균치의 세 배를 훨씬 웃돈다.

5월 17일 오전 서초경찰서 강력3팀은 사건발생 9시간 만에 피의자를 긴급체포했고 보도자료를 통해 이 사건을 발표했다. 피의자는 화장실 안에 숨어 6명의 남자가 화장실을 사용하는 1시간 30분을 기다려 일면식도 없는 피해자 여성을 흉기로 공격해 숨지게 했다. 17일 오후 온라인에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까페가 개설되었고 시민자발적인 추모행사가 제안되었다. 국화꽃 한 송이와 추모메시지든 추모객들이 17일 밤부터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여들었다. 주말 21일엔 사건장소를 한 바퀴 돌고 오는 추모행사가 있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강남역 10번 출구에 포스트잇에 추모메세지를 적고 헌화를 하는 추모의식을 가졌다. 24일 화요일에 비 예보가 있어 추모현장을 지키던 자원봉사자들이 23일 새벽부터 이를 수거하기 시작했다. 추모메세지를 담은 쪽지들은 서초구청과 서울시로 옮겨졌다. 일단 서울시민청에서 24일 화요일부터 피해자를 위한 추모공간을 운영한다. 동작구 대방동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의 여성플라자 1층엔 추모공간에 있던 메시지를 영구 보관하는 추모공간을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23일 오후 여성가족재단에 확인한 결과 공간을 마련해놓고 추모쪽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 여혐을 혐오하는 여성들이 여중생을 폭행했다는 피켓을 든 남성이 서 있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고요히 피켓과 1인 시위자를 번갈아 보며 한참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살인의 소비

“강남역 묻지마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언론이 이 소식을 쏟아냈다. 종편방송은 사건현장이 수습되는 모습까지 내보냈다. 오열하는 피해자의 남자친구의 모습도 전파를 탔다. 이 화면은 유투브에도 게시되었다. 일부 언론은 피의자가 신학대학생이었으며 불우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는 제목을 달아 뭇매를 맞았다.
서울의 최고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밝은 곳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여론은 여성혐오냐 정신질환자의 범죄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진보 페미니즘 커뮤니티로 알려진 메갈리아와 메르스갤러리엔 여성혐오에 대한 고백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뒤이어 어느 커뮤니티에도 속하지 않은 여성들이 자기가 겪었던 여성혐오, 여성이라 위험했던 순간을 고백했다. 일베 사이트는 여성혐오 뿐 아니라 강남역 추모를 혐오하는 게시글이 넘쳐났다. 일부 일베 회원은 추모현장 포스트잇 제거나 1인 시위 계획을 게시했고 회원들은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모습도 보였다.
18일부터 시작된 추모열기는 주말에 정점을 찍었다. 대로변 전철역 앞은 숙연했으나 그 사이 좋게 보면 열띤 토론이, 나쁘게 보면 분란이 일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낯선 자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그에 대한 반대의견을 전개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휴대전화로 촬영되어 SNS에 올랐다. 때로 경미한 폭행이 일어나거나 야유와 항의도 있었다. 자극적인 모습은 SNS에 게시되어 소비되었다.

온라인 쇼핑몰에는 여성용 호신용품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가스총이나 스프레이, 호신용경보기나 호신봉부터 주먹에 끼고 상대방을 가격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너클이라는 용품은 반지형태와 펜던트형태로도 출시되고 있다.

언론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초점에서 벗어나 추모공간과 추모행위로 이동했다. 일베와 매갈리아의 대격돌이라는 이분법적 논쟁과 여혐과 남혐의 충돌이라는 논리도 퍼져나갔다. SNS에는 매일 여혐과 남혐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의 흰색과 분홍색이 섞인 리본. 2016년 5월 23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간이란 무엇인가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는 언론에 더 이상 소개되지 않았다. 경찰은 본 사건이 여성혐오범죄보다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에 가깝다고 결론 내렸다.

검찰청 발표 통계자료 (2014)

항목

남성

여성

전체 범죄자수

1,515,159

336,748

전체 피해자수

869,618

443,507

살인 범죄자

866

170

살인 피해자

511

404

성폭력 범죄자

24,710

428

성폭력 피해자

1,375

27,129

정신장애 살인 범죄자

초범 26

재범 38

묻지마 살인 건수

201314

201410

 

통계자료는 신고 접수된 사안에 국한되는 맹점이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후 SNS에는 수없이 많은 여성들의 공포가 나열되었다. 성평등을 저해하는 행위나 사소한 성희롱과 성추행의 가장 큰 문제는 가해자들이 “이것이 범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치는 행위부터, 속옷을 입었냐고 검사하는 중고등학교의 남성교사가 있었다. 여성들의 고백은 이 나라에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 성희롱과 성추행에 무덤덤해진 상태로 살아왔다는 걸 드러냈다. 우리의 깊은 치부가 까발려지는 순간이다.

이번 일은 하나의 비극적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공론화되는 단계를 순차적으로 보여줬다. 사건이 발생했고 순수한 추모가 있었다.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가해자를 옹호하는 자들까지 등장했다. 그 이면에는 그들 역시 “죽을 만큼 살기가 힘들다”고 외치지도 못하는 마음이 보였다. 그러나 어떤 환경적 문제와 개인적 결함도 범죄가 허용되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는 도덕과 윤리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강남역에서 한 여자가 무고하고 억울하게 죽었다. 범인은 고의적으로 여성을 기다렸고 그는 정신질환이 폭력적으로 발현된 인간이다. 이것이 그저 단순한 살인사건이라거나, 정신질환자의 사회적 방기로 일어난 사건이라거나, 복합적인 성별 불평등에 기인한 사회적 현상이 집약된 사건이라는 의견이 모두 각자의 이해가 될 것이다. 모두의 다양한 의견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였다.
강남대로와 테헤란로가 만나고, 강남구와 서초구가 만나는 자리에 반목하고 화합하는 사람들이 교차되었고, 혐오와 공감이 한 자리에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메갈과 일베가 만났다. 2016년 봄, 지금 이 나라를 지배하는 모든 상반된 정서가 강남역 10번 출구에 응축되어 폭발했다.

한 여성이 무고하게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반성을 불러냈다. 추모의 기억이 오래 지속되어야 할 까닭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길에서 만나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 전부일 수도 있다. 누가 누구를 왜 어떻게 죽였는지를 넘어 비극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것은 질문하는 것이다. 무엇이 인간이냐고 끊임없이 질문했던 프리모 레비처럼, 이 비극적인 역사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묻고 되묻는 일 뿐이다.

공감하는 인간은 추모와 애도를 통해 자기치유를 시도하고 상처받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자 한다. 누군가 이를 조롱하거나 평가하고 규정지을 때, 눌러왔던 분노가 터지곤 한다.
애도가 조롱을 만날 때, 추모가 평가를 받을 때, 투사가 태어나고 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폭풍을 바라보는 사람의 등을 때릴 필요는 없다. 누군가 억울하다고 말할 때는 제발 좀 닥치고 듣자. 타인의 공감과 애도를 평가하지 말자. 나의 사연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듯이 타인의 역사를 내가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 우리의 삶이 달라졌듯이, 강남역 10번 출구가 성평등의 새로운 출구가 되길 바란다. 한 사람의 죽음이 오래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어떤 죽음도 오롯이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 무엇보다 숭고하게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다.

 

(본 글은 코코뉴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www.koconews.org/news/articleView.html?idxno=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