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

1.
몇 년전,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암 생각없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턱에 뭔가가 날아왔고 엄청난 충격이 있었다. 날아와 내 턱에 부딪쳐서 떨어진 건 일수대출 찌라시.

일수대출 찌라시를 뿌리는 사람들은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여기 저기 종이를 던지는데 그 종이는150~200g 정도 되는 아트지 류다. 코팅된 두꺼운 종이라는 얘기.

기껏해야 책 표지 정도 되는 얄팍하고 작은 종이가 바람을 얹고 날아왔을 때 중력이 얼마나 더 해지는지 실감했다. 꽤 오랜시간 아팠고 자칫했으면 종이에 베었을 수도 있었을 거다.

종이를 던진 사람은 스쿠터를 타고 있었으니 온데간데 없고 나는 길거리에 서서 황망해져서 두리번 거리고 있었지만 어떤 방법도 없었다.

길거리에 찌라시를 뿌리는 행위는 적법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계를 유지하는 일일테고 그는 그렇게 사는 게 방법이라고 배웠을 터이다. 한 번이라도 누군가가 그 행위로 인해 타인이 다칠 수 있다는 걸 알려줬거나, 스스로 생각해 본 적 있다면, 방법을 바꿔야겠다고 자각한 적 있다면 그날 내가 봉변을 당할 일은 없었겠다. 나 외에 다른 누군가도 그런 일을 당했을 수도 있다.

2.
올해 겪은 많은 일들이 이런 누군가의 습,으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스스로를 깨지 못하고 질문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 나의 습때문에, 혹은 타인의 습때문에. 때로 나는 피해자가 되고 중간에 끼인 자가 되고, 동조자가 되고 혹은 모르게 가해를 했을 것이다.

행동 하나 하나를 살피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일이라는 주장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이라는 주장에도 모두 동의한다.

길가다 똥을 밟은 이유는 누군가 똥을 싸질렀거나, 누군가 알고도 미리 치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똥을 밟은 것에 분개하느라 똥을 치우지 못하고 가버린다.

3.
뒤통수를 친다는 표현은 그래서 적확하다. 뒤통수를 맞는 일은 대부분 과거에서 발생해 현재의 나에게 닥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없다.

사고와 갈등은 언제나 과거에서 온다.
당신의 과거로부터, 나의 과거로부터.
청산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과거로부터.

애도의 시간, 추모의 세월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고 난 다음날부터 애도일기를 썼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애도가 얼마나 필요한 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는 일반 노트를 사등분해서 만든 쪽지 위에, 주로 잉크로 때로는 연필로 일기를 써 나갔다. 그의 책상 위에는 이 쪽지들을 담은 케이스가 항상 놓여 있었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는 현대저작물 기록 보존소에 보관되어 있었다. 나탈리 레제와 베르나르 코망의 공동작업으로 쪽지는 원고가 되어 책으로 나왔다. 한국에는 웅진출판사에서 2012년에 책으로 냈다.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 무심결에 펼친 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 12.9.애도: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 그 어떤 방어수단도 없는 상황.

28일 오후에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의 고장난 안전문을 고치던 청년이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 숨졌다. 토요일 저녁에 혼자 작업했다. 2인 1조를 지키라는 매뉴얼은 애초에 직원이 없어 지킬 수 없었다. 공사시간동안 열차운행은 쉬지 않았다.
5월 30일 SNS에는 사망한 김 씨의 유품사진이 공개되었다.

▲ 사망한 김씨의 가방에서 나온 유품. 그는 19살 생일을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SNS에는 사람들이 고인의 가방 속 유품 사진을 공유하며 분노하고 한탄했다. 가방 안에서 포장을 뜯지 않은 컵라면과 편의점에서 주는 나무젓가락, 집에서 가져왔을 숟가락이 나왔다. 지금 사람들이 애도하는 방식이다. 언제부턴가 이 나라의 애도엔 분노와 한탄, 자조가 뒤섞였다. 지하철 구의역에는 추모 쪽지가 붙기도 했고 국화도 놓였으나 이내 메트로 직원들에 의해 수거되었다고 한다.
2015년 8월에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2014년 4월에는 독산역에서, 2013년 1월엔 지하철 2호선 성수역에서 같은 사고로 작업자가 죽었다. 30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는 서울메트로노조 오선근 안전위원이 인터뷰를 통해 여태까지의 사고는 모두 2호선에서만 일어났고 그 외 스크린도어에 관련된 사고 모두 서울지하철 1호선에서 4호선사이에서만 일어났다고 말했다.

지난 봄, 내가 사는 아파트엔 외벽 도색작업이 있었다. 도색작업이 있을 예정이니 창문을 닫고 커텐을 치라는 방송이 있었다. 외벽 도색작업은 기가 막혔다. 아래는 화단 그대로, 맨 땅에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었다. 작업자는 줄 두 개에 매달려 12층부터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관리사무실에 전화해 안전장치에 대해 물었다. 한참을 기다려 받은 대답은 이런 거였다.
아파트 주민협의체 (대부분 입주자대표회의다)에서 관리사무실에 외벽도색을 진행하도록 하고 관리업체는 건설사에 외벽도색을 의뢰하고 건설사는 하청업체에 도색작업을 의뢰하고 하청업체는 작업자를 찾아 외벽도색이 이루어진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맥 없는 목소리로 민원이 있었다고 말해보겠노라 했다. 입주자에서 관리업체, 건설사, 하청업체를 건너는 사이 도색작업은 끝이 났다.

지하철안전문공사도 비슷한 과정이 있다. 고장이 난 문이 있고, 지하철공사가 있고, 서울시가 있고, 안전문 설치업체가 있고 하청업체가 있고 비정규직과 계약직 노동자가 있다. 입찰가격에 10%을 깎아야 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고, 예산을 줄이기 위해 더 싸고 더 빠른 업체를 찾고 업체들은 수익을 내기 위해 안전비용을 삭감하는 사이. 사람이 죽고 다친다.

주목할 것은, 애도의 물결이다. 이제 사람들은 잊지 않고 저 고매한 철학자가 했던 것처럼 쪽지에 애도의 글을 적는다. 사고 현장을 찾고, 기억하기 위한 물품을 만들어 몸에 지닌다. 온라인에는 추모공간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항의한다. 타인의 고통에 더욱 공감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성숙의 결과일까 의심한다. 함께 분노한다는 것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무고한 죽음이 사람들의 삶 가까이 다가온다. 옆 사람의 숨결처럼, 고인의 슬픔이 내 품안에 들어선다는 건, 모두들 견디고 있다는 얘기다.

견디는 자들이 한데 모여 나의 팔을 엇갈리게 뻗어 옆 사람의 손을 잡아야, 대오는 단단해진다. 한 사람의 죽음이 씨앗이 되어 세상으로 흩어질 때, 영혼이 세포가 되어 공기를 떠돌 때, 우리는 옆 사람의 손을 꽉 잡고 걸어야 한다.

책이 된 《애도일기》의 해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번역이 끝났어도 여전히 번역이 안 된 채로 마음 안에 남아 있는 단어 하나가 있다. ‘슬픔’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시대의 슬픔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 남는 한 이 슬픔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이 해야 할 추모는 기억하고 따져보는 것이다. 애가 닳도록 쓰리고 아파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가야 할 곳은 더 이상의 희생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을 모으는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죽음이 가야 할 곳은 “기억했다”는 기념비 앞이다. 떳떳하게 죽기 위해 오늘을 견디는 모두에게 더 나은 내일이 있길 소망한다.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별표 부분은 책 서문에 적힌 문장을 발췌한 것입니다.

1994년 10월 21일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닌 탓에 한 살 어린 친구들과 동급생이었다. 학교를 4년 다니다 보니 유명해져서, 나름대로 편하게 살았다. 술담배를 하거나 일탈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교사를 어려워하지 않았고, 한 살 많은 나에게 선생님들도 나름대로의 대접을 해 준 셈이다. 고 3 때, 아침 7시 50분까지 등교를 해야 했는데, 학교는 월계동이고 우리집은 경기도 양주라서 새벽차를 타고 나가야 했다. 가을이 되어 급기야 담임에게 도저히 시간을 못 맞추겠으니 아침 자율학습을 빼달라고 통보했다. 나는 그런 애였다. 사정하는 게 아니고, 못 나오겠으니 처리는 당신이 맘대로 하시라고 선언하고 뒤돌아 나가버리는 애였다.

2학기에 들어서는 졸려서 살 수가 없었다. 야간 자율학습은 밤 11시에 끝나는데 새아버지가 매번 나를 데리러 운동장에 차를 대놓고 기다렸다. 11시에 월계동에서 출발하여 잽싸게 밟으면 집에 12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씻고 야식먹고 공부를 조금 더 하다 보면 2시가 넘어 잠들었고 아침에는 5시에 일어나야 학교를 갈 수 있으니, 나는 6시에 일어나 아침자율학습을 째기로 한거다.

그 날은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잘 못 일어나는 사람들이 우리집 여자들인지라, 그 날은 모두 다 늦잠을 잤다. 유달리 일찍 일어나는 새아버지도 그 날은 늦잠을 잤다. 새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도 동생도 같이 차에 탔다. 동생의 학교가 더 가까워 동생을 먼저 내려주고 차가 창동으로 들어설 때쯤, 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다리가 무너졌다고?”

조수석에 앉은 엄마가 라디오 소리를 크게 올렸다. 강북에 살아 강건너 가는 일이 드문 나에게 한강다리는 혜은이의 제 3한강교가 끝이었다. 그렇게 많은 다리가 있는줄도, 다리마다 이름이 다른 줄도 잘 모르고 지냈다.
8시가 넘어 학교에 도착하니 아침자습이 끝난 시간이었다. 나는 지각한 것은 생각도 안하고 교실로 마구 뛰어 올라가 한강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호들갑 떨며 아이들에게 전했다. 내가 시끄럽게 라디오 뉴스를 전하고 있는데 덩치 큰 국어선생이 들어와 내 뒤통수를 갈겼다.

“야. 이하나. 지각했으면 가만히 있어야지 뭐 이렇게 시끄러워 아침부터.”
“아 그게 아니고 지금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니까요오!!” 나에게 그 뉴스는, 희생자를 생각하지 않는, 일종의 쑈같았다. 걸프전의 생중계를 고스란히 본 나에게 재난과 사건사고소식에 사람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건 마치 게임 시뮬레이션 화면 같은 것이었으니까. 걸프전을 CNN으로 보면서 느꼈던 것. 폭탄이 떨어질 때 참 아름다웠으니까. 광활한 사막에 떨어지는 불꽃놀이, 나에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은 언제나 죽고 어디서나 죽게 마련이니.
“이 새끼가, 지각한 거 무마할라고 수 쓰고 있어.” 국어선생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나를 자리에 앉히려고 다그쳤다.
“아 진짜라니까요.”

고 3쯤 되면, 선생과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경이 되지 않나, 나는 앞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빨리 티비를 틀어보라고 했다. 교실에는 뒤통수가 뚱뚱한 브라운관 티비가 있었다. 티비 아래 서 있던 아이가 손을 뻗어 MBC를 틀었다. 비오는 한강에, 다리 상판이 아래로 뚝, 썰어낸 듯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쉬는 시간동안 티비를 틀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무 일 없는 듯 자율학습을 했다. 누군가는, “저 중에 고3이 있었다면, 좋겠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죽음은 교실에 언제나 가득했다. 우리는 햇빛 한 번 못 보고 매일 매일 도시락을 싸러 집에 다녀오곤 했으니까. 타인의 죽음과 또래가 학교 가던 길에 무참하게 아무 이유없이 생명을 잃은 일에 대해서 우리는 분개할 시간도, 울 정신도 없었다. 우리에겐 수능이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고, 이미 중간고사를 끝내고 내신성적을 정리할 때였을 뿐이다. 그 다음 해, 우리중 많은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내가 명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안타깝다거나, 슬프다거나, 억울하다거나, 누군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도, 하나의 쑈처럼 보였다. 나는 일주일 내내 그 뉴스쇼를 지켜보았고 전혀 슬프지 않았다. 잠을 설치긴 했고, 뉴스를 끄지 못했으나, 같이 울거나 뭐가 문제라거나,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게 보낸 20년의 세월을 지나, 20년만에, 세월호가, 그 세월을 관통해 다시 침몰했다.

도대체 배 이름은 왜 세월호라 지은 것인가.

묻어두었던 긴 세월동안의 공감하지 못했던 타인의 죽음과 고통이, 굽이쳐 휘돌아 거대한 해일이 되어 몰려오는 오늘이다. 성수대교 붕괴 후 20년, 2014년 10월 21일이 방금 지나갔다.

2014.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