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동자동사람들 / 빨간소금

책 속 저자의 마지막 말 :

• 우리는 타자의 삶을 모른다. 쪽방촌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에도 결국 주민들이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하는 까닭은, 이러한 시도가 전미래 시점에 서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 라는 구원적 미래를 너무나 섣불리 제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은 중요하다. 공통의 구조 위에서 벽장 안팎의 부분적 연결은 드러난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응답은 이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

오늘도 나는 타인의 삶을 재구성하고 집에 돌아왔다. 타인의 삶을 쓸 때마다, ‘모르지 뭐.’ 라고 주문을 외워야 한다. 가끔 주문을 잊으면, 글이 무너진다.

나에게 동자동은 매우 각별한 곳이다.
여러 번 동자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빈곤에 대한 책을 소개한 것도 어쩌면 그때문이다. 나의 성인기의 첫 시작은 동자동 18-37번지, 장학고시원이었는데, 우연찮게도 나는 지금은 사라졌으나 건물만 남아있는 동자동 성분도병원에서 태어났다. 내 동생도 거기서 태어났다.

동자동에 살던 시간을 떠올렸고, 이후 무연고장례의 초기설계 과정을 어깨너머로 들여다 본 기억도 되살아났고, <노랑의 미로>와 <가난의 문법>이 교차했다.

희한하게도, 이 책은 추리소설이 아닌데 그만큼 흡입력이 뛰어나다. 문화기술지가 이렇게 가독력이 좋다는 것은, 흔히 보던 일상뒤에 숨은 그림자의 실체를 하나씩 툭툭 꺼내 내 앞에 던져놓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이한 감정이입을 경험했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의 심연을 까발리는 거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동자동은, 한국사회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는 공동체였다. 이제 여기도 개발한다하니, 어쩌면 서울 하늘 아래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존엄최후사수대도 사라질지 모르겠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이 나라와 서울을 알고 싶다면.

<동자동 사람들>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 정택진 지음 / 빨간소금 펴냄

가난한 빨래

내내 빈곤에 대해 생각중이다. 기생충 여파일까?

아니 사실 기생충을 보기 그 며칠 전부터, 생애사쓰기 수업을 하다가 참가자들의 원고를 읽고 하던 생각이다.

왜 우리는 가난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아마 최근 내가 겪은 개인적인 여러 가지 일들이 오버랩 되기도 해서였겠다.

 

경제감각이 떨어진다는 건 변명이겠지.

암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모두 변명이다.

자기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꼭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대가는 형벌 같은 걸 말하지 않는다.

건강이 약간 흠집나거나, 살이 찌거나, 특정분야의 풍요를 추구하다 전체의 풍요를 망가뜨리거나, 인간관계가 깨어지기도 하고, 외로워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형태가 있겠다.

 

작년에 했던 작업의 협력자 중의 몇 사람이 경제정의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정치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경제정의에는 사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는 게 그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나 역시 기괴하게 변형된 프로테스탄티즘의 “부지런한 노동”을 주입받으며 자랐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논리는 과연 정당하냐는 질문은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면서부터였다.

 

‘주식회사는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느냐에 따라 결정권을 갖게 되지만 협동조합은 1인 1표입니다.’ 라는 논리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 게 수년 전이다.

 

모든 불평등은 우연한 사건들의 중첩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가슴으로 체득한 건 얼마 안된다. 나도 이전엔 ‘노오력’으로 많은 걸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노력으로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 마흔을 넘기고 나서였을거다.

 

그 이전의 세상은 온통 억울함이었다.

 

아이가 직업진로에 대한 학교 과제를 하다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찾고 있었다. 커리어넷이라는 교육부의 진로정보망이었다. 아이는 평균연봉을 보면서 왜 4천만원 이상의 직군이 안 보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이에게 하루에 열 두 시간 일하고 1년에 2천만원도 못 버는 사람이 있는데 하루에 너댓시간 일하고 1년에 1억을 버는 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내가 화가 났다고 느꼈는지 왜 그런 걸 묻느냐고 했다.

아니, 그냥 묻는 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공부 열심히 해서 더 좋은 직업을 갖게 되면 그게 공정한 거 아니야?

그럼 누구나 열심히 하면 성적이 잘 나오나?

.. 아니.

모든 사람이 공부 잘 하고 싶다고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니?

.. 아니.

 

아이가 덧붙였다.

엄마,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하잖아.

 

어차피 세상이 불공평하다니.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 중엔 잔디밭이 깔린 집에 사는 아이도 있었고 교사한테 촌지를 건넸다는 이유로 더 사랑받는 경우도 봤는데 나는 반지하에서 몇 년째 살고 있었는데도, 세상은 어차피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신분세탁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내가 무슨 신데렐라쯤 된다고 생각한 걸까.

 

인간은 이성을 가졌는데, 어차피 불공평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공정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면 안될까? 라고 물었더니 아이가 ‘그걸 왜 나한테 요구하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가만히 봤다.

 

내가 만난 대대로 부잣집인 아이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본인의 노력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 중의 일부도 그런 면이 있었는데,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그대로 쏟아낸다는 거였다. 스스로의 감정처리를 하는데 서투르고 자신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타인에게 마구 퍼붓는데 염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당해보였고 어떻게 보면 솔직해보였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무례했다.

“부자가 착하기까지 해.” 라는 건, 감정이 얽히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이들은 무척 예의바르고 단정했지만 어떤 곳에서 자신을 부정당했을 때 그 에너지를 가장 만만한 사람에게 쏟아 부었다. 그렇다고 부자들은 그렇더라, 고 일반화할 수 있을까? 그 역시도 자신 없다. 내가 몇 명이나 만나봤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더라”고 쓰는 건 내가 가진 콤플렉스때문이겠다.

부자들은 대체로 취향이 있었는데 마흔 이전에 내가 만난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건 짜장 또는 짬봉, 물냉 또는 비냉, 후라이드 또는 양념 정도였지, 어떤 그릇이나, 가방이나, 구두의 수준이거나, 어떤 연주나, 어떤 화풍이나, 어떤 조명기구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취향이 생기면 삶이 무거워진다. 골라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불만스러운 것들도 많아진다. 스테인레스 컵에 물을 마시는 게 끔찍하면 도자기 컵을 사야 하며 질질 새는 물병으로 곤혹을 치르고 나면 조지루시 보온병을 사러 가야 하니까.

 

가난을 쉽게 전시하고 빈곤을 관람하는 시대.

누군가에게는 바꿀 수 없어서 익숙하고 당연한 운명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미치도록 끔찍한 기억이 되어서 기를 쓰고 계단을 기어오른다.

 

예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들은 말이 기억난다.

“가난한 사람들은 소리가 많이 나요. 기운이 없고 건강이 좋지 않으니 물건을 살짝 내려놓지 못해요. 가난한 사람들은 물건을 복도에 많이 내놔요. 집이 좁아서 다 들어가질 못하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있잖아요. 보행보조기라든가, 커다란 소쿠리 같은거요.”

 

가난하면 자기 삶을 외부에 노출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물건들 중에 1년에 몇 번 쓰지도 않는데 부피가 큰 것들이 있고 매일 쓰는 물건이지만 도저히 좁은 집에 들여놓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오래된 아파트의 작은 현관에 도저히 들어가지 않는 쌍둥이 유모차라든가, 노인의 전동스쿠터라든가, 쨍하게 마를 빨래 같은 것들.

 

그동안 나는 골목마다 널려 있는 빨래들을 꽤 많이 찍었다. 그건 부지런한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그들이 코를 죄던 노동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햇빛이 잘 드는 골목에 내 걸어야 하는 빨래들. 햇빛을 담는 대신 먼지를 안고 돌아온 빨래들이 하루치의 노동을 준비한다. 스팀다리미가 없어서, 건조기가 없어서, 스타일러스가 없어서 골목에 내놓은 빨래들.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세탁기를 돌리고 대나무에 끼워 베란다에 내 걸어야 했던 상하이의 내 꿉꿉한 빨래들. 딱히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누군가 말하는 것이다.

“그게 가난이야. 네가 근면이라고 우겼던 바로 그거 말야.”

 

 

우연은 어떻게 오는가

점심시간 내내 포켓몬을 잡다가 분식집에 들어가 건빵이와 충무김밥과 순두부찌개를 시켰다.
“나 보광동 살 때 이런 분식점 순두부 자주 시켜먹었어.”

건빵이가 “나도”라고 말했다. 제일 만만하고 표준화된 맛. 냄새가 나거나 비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음식. 반찬이 허술해도 충분히 한 끼를 채울 수 있는 것. 나는 빈집에서 출근을 준비하다 순두부를 시켜 먹고 그릇을 지하방 알루미늄 새시 문 밖에 내놓곤 했다.

분식집에서 순두부를 나눠 먹고 있는데 동생이 인터넷에서 찾았다며 카톡으로 2001년 이태원 사진을 보내왔다. 건빵이와 나의 밀레니엄은 보광동과 이태원에서 교차한다. 우리는 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 동네에 살았다. 내가 그 동네에서 떠날 때쯤 건빵이가 그 동네에 들어섰다. 언젠가 한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10년이 거의 다 지나 엉뚱한 곳에서 만났다. 우리는 가끔 보광동의 이야기를 한다.

동생이 보내준 사진을 보며 가끔 회식을 하러 갔던 일송정을 이야기했고 그 길 건너 시장 입구에 있던 뚝배기 만둣국집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집의 만둣국을 자주 먹으러 갔고 건빵이는 그 옆의 옆에 순대국집이 맛있었다고 얘기했다. 동생은 반도리노라는 구둣가게의 간판을 지목하며 ㅋ을 여러 개 보냈다. 나는 거기서 구두를 맞춰 신었다. 매일 저녁 9시에는 웨이츄리스들이 라인댄스 공연을 했다. 나를 비롯한 웨이츄리스들은 춤을 출 때 마룻바닥에 구둣발을 내 딛을 때마다 탭댄스처럼 소리가 딱딱 나야 흥이 났기 때문에 소리가 잘 나는 바닥으로 구두를 맞추곤 했다. 라인댄스는 카우보이부츠를 신어야 더 좋지만 우리는 짧은 치마의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에 카우보이부츠를 신고 서빙을 하다가 춤을 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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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보내준 2001년 이태원 뒷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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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보내준 2001년 이태원 사진. 해밀턴 셔츠 사장은 안면이 있다. 아디다스 옆이 반도리노라는 수제화맞춤전문점이었다.

<동생이 보내준 2001년 이태원>

동생이 “내가 나중에 반도리노에서 언니 구두 사줄게”라고 했지만, 나는 이제 구두를 신을 수 없다. 동생은 언제나 “나중”을 말한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8차선 도로의 인도쪽에 폐휴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밀고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우회전을 하기 위해 인도쪽 차선으로 갈아타던 중 속도를 냈다면 큰 사고를 낼 수도 있었다. 운전을 하던 건빵이가 위험하다며 걱정을 했다.

집에 돌아와 내일 업무를 준비하다 야광조끼를 검색했다.
한 벌에 만 원 정도면 일반 야광조끼를 살 수 있고 2만 원 정도면 그물로 된 야광조끼를 살 수 있다. 고휘도 야광 반사테이프는 한 롤에 1400원정도 한다.

작년에 취재차 관악구에 있는 푸드뱅크에 간 적 있다.
푸드뱅크 이용자들은 종이봉투를 들고와 물건을 가져갔다. 집집마다 넘쳐나는 에코백이 처치곤란이라고 이 역시 또 다른 환경오염이라고 성토하던 자리에서 그때 그 장면을 떠올렸었다.

몇 주 전에 현수막으로 에코백을 만드는 데 공임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봤다. 현수막으로 가방을 만드는 인건비는 개당 3천원이면 가능하다고 했지만 현수막을 세탁해와야 작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폐현수막을 이용해 재작업을 하는 비용은 개당 5천 원 정도 든다. 새로 찍어내는 시장가방은 5천장 정도 대량으로 주문할 경우 개당 3천원 남짓이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친환경과 재활용은 돈이 더 든다.

한 사람에게 야광조끼를 입힐 수 있는 비용은 2만원.
관에서 한다면 예산을 사용해 복지관에 비치해두고 홍보 조금 하고 알아서 찾아가라고 할테지. 폐지를 가져다주는 고물상을 찾아갈 상상을 그들이 할 수 있을까.

작년인가 재작년 여름, 덥다는 이유로 차를 끌고 나가 인덕원 골목을 지나다 어느 가게 담벼락에 붙은 수도를 틀어 마구잡이로 세수를 하던 노인을 보았다. 폐지를 가득 실은 수레를 옆에 두고 얼굴이 물을 마구 묻히던 여읜 팔뚝을 기억하고 있다.

아파트 생활자들은 마트 앞에서 폐지를 담아가는 노인을 만난다. 때로 그들이 떨어뜨린 박스를 주워서 리어카에 담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
사회 곳곳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다. 어느 한 순간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우연이 겹치면 가난은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정비하지 못한 하천의 둑이 넘쳐 반지하방에 물이 넘쳐 들어오는 것처럼.

보광동의 배달 순두부를 기억하는 두 사람은 각자의 기억을 가진 채 평촌에 같이 산다. 우리가 기억하는 보광동은 다른 모습이다. 폐지를 줍는 노인의 뒷모습을 같이 바라본다. 모든 것은 우연이다. 우연은 필연적으로 온다고 했던가. 무엇이 필연이고 무엇이 우연인지 아무래도 모르겠다. 사회는 불평등을 기반으로 구성된다고 누군가 말한 적 있다. 그게 누구인지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모두들 살아남고자 한다. 지금 이것보다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월요일로 가는 밤, 바람이 분다.

2019년 5월 26일

삶을 말할 때

가끔 내가 분노를 느끼는 건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하게 산다.”,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폐지나 줍고 산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볼 때다.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자발적 가난은 정신적 풍요를 기본으로 한다. 있다고 치자. 가난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좋은 조건이다.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하려는 사람은 가난하고자 경제활동을 하는 게 아니다.
각자 먹고 살 양식쯤은 갖고 살고자 한다.정말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경제적으로 곤궁함이 없는 중년을 맞이했다면 그건 백프로 운빨이다. 사회복지로 혜택을 받기 시작한 건 불과 10여년이다. 건강보험이 적용된 건 2000년부터다. 보험공단이 그때 생겼다.

가족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돈을 모을 수 없다. 버는 대로 약값과 병원비로 들어간다. 한 사람이 일을 못하면 0원이 아니라 마이너스다. 마이너스 100만원에서 마이너스 200만원도 가능하다. 이런 사람이 가족중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구성원들이 그걸 나눠서 부담해야 한다. 그러니 늘 돈이 없다. 건강이라는 건 마음의 건강도 말한다. 경제적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태에 머무는 가족이 있다면, 그 역시 가족구성원이 부담해야 한다.

건강한데 열심히 일하는데 가난하다면
그건 학력과 사회적 기반의 문제다.
학력과 사회적 기반은 그 윗대가 결정한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부모는 학교를 보낼 수 없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가난은 대물림된다. 학교를 왜 보낼 수 없었나, 가난했기 때문에 혹은 그 부모도 교육의 필요성을 느낄 여유가 없어서.

전쟁이 있었던 나라다.
전쟁통에도 공부를 하러 다닌 사람은 소수다. 적어도 하루 동냥질을 해서 동생들 입에 풀칠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거나, 팔 잃은 아버지가 돼지죽이라도 얻어오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전쟁통에도 괜찮게 살았대.
자랑 아니다.
남들의 고통을 발판삼아 돈을 벌었으면 자랑은 하지 말아야지.

우리 집은 예전부터 부자였대.
그럼 일제강점기에도 부자였다는 말인가?
친일을 했다는 얘기밖에 더 되나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버지가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그렇다면 그 아버지는 부양의 의무가 적었거나, 아주 뛰어난 소수의 엘리트였거나, 어떤 권력에 부역했거나다.

불과 수년전까지는
그래도 정당하게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렇게 믿긴 한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것을 기본 default로 놓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경제적 여유가 어디에서 왔는지 고찰하지 않는 자가 있다. “노력하지 않아 가난하다”는 말은 개인과 역사에 대한 성찰이 없는 자라고 정의내린다.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는 사람이다.

 

작년 글 스크랩

2018년 5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