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개가 무섭다

순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형제가 열 둘이었다. 열 두 형제 중에 유일한 딸이었다. 막내 남동생이 하나 있었고, 위로 오빠가 열이 있었다.
아버지는 소작농 관리를 했고 먹고 살만 했다. 1948년, 열 한 살이었다.

여순사건이 났다. 하늘에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땅에선 군인들이 총을 들고 눈에 띄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가늠하지도 못했다.

집에 논이 다섯 마지기가 있었다. 밭도 몇 마지기 있었다. 위에서 쏴대고 아래서 쏴대고 그저 눈에 띄면 죽여 댈 뿐이었다. 당숙모는 말하라는 걸 말하지 않아 방에 갇혀 총에 맞아 죽었다. 아버지의 논에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처럼 흘러 몇 년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다. 동네 노인들은 살만큼 살았으니 집을 지킨다며 남았다. 집에는 늙은 할머니가 있었다. 노인들이 떠난 마을에 시체만 쌓였다. 주인 잃은 개들이 마을을 헤매 다녔다. 논과 밭에 늘어진 시체를 굶주린 개들이 뜯어먹었다. 송장을 뜯어먹은 개의 입가에 피가 흥건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개가 무섭다.

아홉 명의 오빠가 모조리 죽어버렸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정신을 놓았다. 맨발로 산을 계속 오르며 죽은 자식의 이름 열 개를 부르며 헤매고 다녔다. 아버지가 나일론 줄을 구해와 어머니를 묶었다. 밤이 되면 엄마를 가운데 두고 온 식구가 나란히 잤다. 새벽이 되면 엄마가 없었다. 이로 물어뜯었는지 줄을 끊고 달아나 산으로 헤매며 죽은 자식들의 이름을 불렀다. 오빠와 등불을 들고 산으로 들로 엄마를 찾아다녔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에게 옥도정기를 발라주었다. 발과 다리가 다 찢어졌는데 아프다 소리도 안 했다. 엄마는 죽은 자식들의 이름만 불렀다. 엄마는 말라갔다. 허리가 두 손으로 잡힐 지경이었다. 한 번 넋을 놓은 엄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는 연로하신 할머니에 미쳐버린 엄마를 돌보느라 학교를 가지 못했다. 위로 오빠가 하나 남았고 아래 남동생도 하나 남았다. 남동생이 친구들과 어디를 다녀오는 길에 미친 개에게 물렸다. 개에게 물린 아이는 셋이었는데, 사내애 둘은 죽고, 가이나 하나는 살았다. 살아남은 가이나는 아직도 고향에 살고 있다. 남동생도 그렇게 가버렸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개가 무섭다.

화가 치민 아버지는 목소리를 잃었다. 목이 쉬어버리더니 죽는 날까지 말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 사람이 울화가 치밀면 그렇게도 되는가보다.

위로 오빠만 하나 남았다. 오빠는 학교를 다녀서 한양대까지 나왔다. 나는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아이들을 모두 공부시키려고 했는데,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는 미쳐버리고, 아버지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그렇게 살았다.

어디 길을 가다가도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을 보면 엄마가 보인다. 염을 할 때 보니 온 다리가 멍투성이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


※ 전라도 순천 출신 백할머니의 이야기다. 눈물을 숨기느라 애썼다. 어머니와 아버지, 노할머니가 돌아가신 나이가 뒤죽박죽이었는데 아마 어머니는 집에서 염을 했다는 얘기가 나온 걸로 보아 일찍 돌아가셨던 것 같고, 오래 살았다는 얘기는 노할머니의 사망시점과 헛갈리신 것 같다.
막내아들까지 잃은 아버지가 갑자기 목이 쉬었다고 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자살기도가 있었을거라 생각했다. 농약을 좀 마셨다가 뱉었거나, 기도나 성대에 손상이 와서 목소리를 잃는 경우가 있다. 아마 백 할머니는 그런 상상을, 했어도 한 적 없다고 부정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여순 사건은 아직도 원인과 진상규명이 명확하지 않다. 할머니가 살던 마을에서 사람을 죽인 무리가 반란군인지 진압군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무고한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죽어버렸다는 것 뿐. 반란이 무엇이고, 좌익과 우익이 누구이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따져 묻지도 못한 채, 70년이 지났다. 희생자의 가족들이 모두 이 땅에서 사라지면, 누가 왜 사람을 죽였느냐고 물을 수 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는 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죽어버린 아홉 명의 오빠에 대해, 미쳐버린 어머니에 대해, 죽을 떄까지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겠지.

 

2017년 1월 18일

독립문 평화의 집에서.

박근혜양은!

“내 담주에 교회 댕겨오니라 늦을끄야. 그래도 좀 봐둬.” 라고 지난 주에 미리 얘기하고 글쓰기 수업에 늦게 오신 84세 갑순씨,
앉자 마자 분통을 터뜨리신다.

“나라가 나라가, 나라가 이게 뭔 꼴이고.
내는 막 미쳐버리겠다.”
고 하신다.

갑순씨는 박근혜를 ‘박근혜양’이라고 칭하셨다.

“이게 뭐꼬 이게.
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을 벌려놓고 말이다.
내사 마 내가 그 광화문에 나도 나가서 막 미치고 싶다 안카나.
내도 막 소리지르고 막 그 위에 드러누버버리꼬 싶다.
내가 나이만 더 젊었으믄 거 나가서 나도 소리 지르고 그러고 싶다.
박근혜양은 무릎꿇고 빌어야 된다.
잘못했다고 말해야한다.
아이고 내가 마.. 이게 뭐꼬 이게.”

내가 1번 찍으신 어르신들이 더 배신감이 큰 거 같다 했더니
“거럼. 배신이지. 배신이다. 우째 이리 망쳐놓을 수가 있나.
우리가 전쟁 다 겪고 진짜 배곪아 가며 이래 만들어 놓은 나라다.
그래도 나는 새마을운동 때문에 나무 껍질 벗겨먹던 시절 벗어났다고 그래도 박대통령 존경했다. 근데 이게 뭐꼬 이게.
어매 내가 막 밤에 잠이 안 온다.
내는 죽는 것도 안 무섭다. 내가 막 매달려 죽어부리고 싶다.
내 좀 보라고. 내 고생한 게 다 뭐냐고 응 이 말이야아.”

안동출신 갑순씨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앞에 앉은 서울태생 춘예씨는 눈이 벌겋다.
“아 그만 얘기해요 형님.
난 눈물이 나.”

춘예씨 옆에 고흥사람 연례씨가 날 보며 말한다.
“어. 여긴 계속 울었어. 울드라고. 서럽다고.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어. 1번은 안된다 했잖아. 걔들은 안돼.
그거 이제 돈 해먹은 거 다 받아내야지. 전부 다 받아내야돼.”

부산싸나이 영석씨도 한마디 한다.
“그 최태민이가 목사 아이가. 그라믄 그래도 좋은 점만 배우면 될낀데 우째 그래 못된 거만 배워처먹었나 모르겠다.”

네 사람은 한참동안 분통을 터뜨리며 얘기했다.
배신이다 배신.

평생 1번만 찍고 산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어르신들을 만나다 보면,
어버이연합 알바 나가는 분도 만나고, 민주평통 행사 나가시는 분들도 만나게 된다. 이분들은 조국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하고 나가시는 분들이다. 추선희 같은 사람의 입담에 끄덕끄덕 할 수도 있다.
1번은 좋은 거니 1번만 찍는다는 분들도 있다. 정의당이 1번이거나, 노동당이 1번이라해도 그래도 1번을 찍을 분들이다.

이들이 겪은 공포, 이들이 겪은 가난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놀다가 폭탄이 떨어져 반쯤 날아가버린 집을 바라보던 열 살남짓의 어린아이, 배가 고파 나무뿌리를 캐다가 푹푹 삶아먹던 어린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 어느 날 갑자기 총살당한 삼촌, 날 버리고 도망간 엄마, 널부러진 시체의 산, 의붓동생을 업어 키우느라 학교를 포기했던 어린이, 피난 길에 부모를 잃은 어린이, 자고 일어나면 피난민 천막이 산을 메워버린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제발 생각 좀 하고 사세요.”라고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될까.

나는 흥분한 어르신들에게 이 얘기를 마무리하자며 부탁했다.

“그러니까 어머님 아버님, 다음에는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찍어주세요. 젊은 사람들한테 인기 많은 사람 찍어주시면, 저희가 잘 해볼께요. 잘 감시해볼께요.
2016년 12월.
(기록해놓고 업로드를 안 해 이제 올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나 우리 아버지 얘기 할 거 있어.
 
(1936년생, 여, 전남 구례 출생)
 
우리 아버지는 서른 여덟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열 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내가 태어나기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는데.
왜정때니까
아버지가 징용을 피해서
어릴 때니까
엄마한테 자세히 알아놓을 걸 안 들어놓은 게 한이 돼.
옛날엔 도라꾸(트럭)라 그랬어요.
인부들을 싣고 아버지가 객지로 막 다녔어요.
징용에 안 갈라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서당 열고,
한문 한글 다 하고,
밖에 나가서 일 하고.
집에 잘 안 오고 그랬는데.
 
함경도로 평안도로 객지로만 다녔을 때.
내가 9살 때까지.
내가 아홉 살 때.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우리 아버지가 교육열이 강한 분이라,
나를 초등학교 입학 시켜놓고
또 객지로 돈 거야.
나는 그 때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나 놓고, 아버지랑 객지 다니러 가는데
엄마한테 가지 말라고 치마자락 붙잡고 막 따라 가고
울었던 생각이 나.
엄마가 여기서 학교 잘 다니고 있으면
열심히 다니면
꼭 온다 한 거야.
 
815 해방 됐는데,
어렴풋이 그게 음력 칠월칠석날일거여.
저녁에 우리 친구 하나가,
우리 놀러가자 하고
그 같이 놀던 동네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를 떼어놓고 간다 해서
그럼 우리도 놀러가자 하고 갔는데,
우리 안 가 그러는데
그러니까 실갱이를 한 거지.
근데 그때,
언니 친구가
나를 보고, 이래 돌아보더니
순이야 순이야
니 엄마 아버지 오셨다 해서
어메 나, 지금도 머리가 막 쭈삣쭈삣 설라고 그러네.
열 살 조금 넘었을 때니까.
그때가.
 
그래가지고
아이고 지금도 목 매어서 얘기 못하겠네.
학교 댕긴다고 1년을 떨어져 살았어.
 
거기서 그러고
이제 해방도 되얏고, 징용 갈 일이 없으니까,
세간살이도 사고 아버지 월급도 받고
대충 뭐가 생각이 나는데
9살 때는 엄마 아빠만 갔으니까 모르지.
(그 세간살이도 사고 이래가지고)
도라꾸에 실어가지고
도라꾸를 먼저 고향으로 보냈는데
도라꾸 기사가 사기를 치고
사라져버린거야.
응. 도라꾸랑 같이. 그렇지.
엄마 아버지랑 기차 타고 가고
이제 차만 먼저 보냈는데.
그리 돼 버린 거야.
살림을 홀딱.
 
그래도 사람이 무사히 들어와서 다행이다 하고
응 우리 엄마 아버지가 그리 말하드라고.
참말 행복하게 살았지.
 
 
여수 반란사건 났잖아.
무지한 백성들 그냥 막 갖다가
처단하고
눈만, 눈만 껌뻑거려도 잡아가고 그러던 때.
그런 때여 그때가.
여기서 안 죽이면 저기서 죽이고.
그때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가신 거지.
육이오 사변 나기 전 해.
그리고 육이오 나고.
 
 
▶옆 자리 할머니가 말을 보탰다.
▶징용을 안 가셨는데 돌아가셨네.
 
 
징용 안 갈라 했는데 그렇죠잉.
나도 태어나기만 거기서 태어났지
객지로 객지로 다녀서.
친구가 없어요.
 
아버지는 열세 살에 돌아가시고
형제는 오남매인데, 남동생 하나 먼저 죽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 아버지가 건설업, 감독정도 되는 거지.
내가 어릴 때 따라다닐 때 보며는,
함경도 갔던 생각이 나는데
여섯 살, 다섯 살인가.
지금도 이북애들 보면 집들 나오는 거 보면
그때 내가 봤던 집 그대로 나오는 게 있어.
일자 집인데, 일자 집 여기 이렇게 나란히 있어.
한 세대씩 줘서 거기서 인제 몇 세대가 사는데,
어리니까 데리고 다닌 거지 이리 저리 다녀야 하니까.
어떤 때는 기차도 타고 다니고.
 
우리 증조 할아버지부터 벼슬아치 집안이라는데
자식도 딸 둘 아들 하나 삼남매 중에 우리 엄마가,
몸종까지 일 봐주는 사람까지 다 대동해서 시집을 보내서
일을 할 줄 몰라.
당췌 일을 할 줄 몰라.
그러니 시골에서는 이리 저리 벌어먹을라면
품이라도 팔아야 하는데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
김도 못 매고 아무 것도 못하는거야.
품팔이도 못 한거야.
일을 할 줄 몰라서.
그래서 우리가 엄청 고생했어.
18살 때까지 살다가 인제 거기 살다가 연천으로 갔어.
소개를 해서 고모할머니가.
거기 살만한 집이 있다 해서.
연천이 제 2고향이 되어버렸어.
 
제가 1936년생인데.
그때 연천이 종전 막 되고 난 다음이니까
머 아주 하꼬방에 판자집에 뭐 움막에 그냥 난리도 아니고
거기가 그니까 휴전선 바로 아래 니까 아주 그냥 머.
 
그래서 내가 이제 컸으니까
빵 만드는 집에 취직하고, 돈 벌고
결혼해가지고 살림 놓고 살았지.
그래서 그때부터는 고생을 덜 했어.
 
우리 어머니가 재주가 없어가지고
고생을 많이 했어.
우리 어머니는 몇 년도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는데
일흔 아홉에 에 부산서 돌아가셨어.
 
왜정때 징용 피해 이리 저리 객지로 돌아
여순반란 나서 아버지 죽어
전쟁 나고 구례 사는데 지리산으로 패잔병 숨어들고,
밤이면 밤마다 이 빨치산들 와서 있는 대로 다 집어가.
트럭 사기 당했지.
빨갱이들한테 밤마다 털리지
어머니는 능력이 없지.
오남매가 고생을 많이 했지.
 
우리 엄니가 그때는,
참 어떻게 저렇게 자식들한테 저럴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가 그때 서른 넷 다섯인데.
 
자기 집에서 아씨 아씨 하던 사람이,
얼마나 황당했겠어.
 
재가는 무슨,
양반집이라 재가도 못하고
재가 하면 그 동네에서 쫓겨나지. 난리나.
우리 어머니도 대단하고,
우리 아버지도 참 대단한 분이야.
그때는 딸들은 안 가르쳤어요.
아들 딸 안 가리고 능력대로 가르치겠다고 우리아버지가.
나를 가지고 그렇게..
내가 조금 똑똑했는지,
공부 잘 하면 대학까지 꼭 보내주마 했는데
돌아가셨어.
엊그제 같어. 그게.
나는 아버지 얘기만 하면
이렇게 지금도
눈물 나와.
눈물이 나서……
 
 
2017년 1월 16일.
서울, 동대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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