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충이의 솔잎

망해가는 마봉춘이 창사특집다큐를 찍으셨던데

아프리카의 한 부족이 관광객의 사진촬영 대상이 되어 돈을 받고 자기들의 삶을 보여주는 생존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나의 내면에 내재된 조상들의 솔잎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의문이 생겼다.

• 적어도 우리 기억속, 우리의 역사속엔 다양한 직업군이 있었고 모든 사람이 문명사회에 진입하기 전에는 성씨가 분류되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아프리카에는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인지, 내가 모르고 있는 것 뿐인지
서구사회와 가까웠고, 그 문명의 유적으로 알려진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모로코는 분명히 전근대 고대국강 형태를 갖추고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존재하였는데,

인류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화를 거듭했다면 정말 중앙아프리카 이남엔 고대국가의 이름이 단 하나도 없었을까?
마야와 잉카와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정말 그 곳엔 지배와 통치가 허용되는 문명이 없이 공동의 평등한 삶만 존재했는가?
단순히 내가 모르는 것인가 혹시 누군가 필요에 의해 삭제했거나 왜곡한 것은 아닌가.

• 송충이의 솔잎은 유전자에 새겨진 정체성의 이야기다. 수십년 수백년 수천년을 그렇게 살아오면서 계발되고 특화된 각자의 성질에 대하여 되도록 정체성에 가까운 환경에서 살아갈 때 사람은 안정감을 느낀다.
오래전부터 농경사회였고, 유목이나 사냥보다 농경에 어울리는 땅에 살던 이 나라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농촌으로 이주해도 歸農이라 말한다.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고향이고 정체성이고 유전자에 새겨진 역사이므로.

서구사회나 다른 민족들 중, 아직도 몽골은 유목생활을 반절정도 유지하고 있고 자연환경이 척박한 곳에서는 타고난 솔잎에 어울리게 사냥을 주로 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글쟁이 집안, 농사꾼집안, 장사꾼 집안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축적되는 노하우가 있고 그 직군으로 살아가는 비법들이 삶에서 삶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며 삶은 비교적 익숙한 환경내에거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동물적 개체가 보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생존의 문제이므로.

21세기.
우리는 모두 자신의 솔잎을
10년 이내 단기간에 쌓아온 스스로 만의, 한 개인의 노하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대와 세를 거쳐 이어져 내려왔고 삶속에 숨어 있는 역사성은 단지 10여년 만에 규정되거나 안정화되지 않는다.

우리가 헤매이는 이유는

너무 멀리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 아스팔트도 독하기 독한데, 지속되는 폭설때문에 제설방제에 사용된 염화칼슘이 그 독한 아스팔트를 뻥뻥 뚫어놓은 도로에서 당황하던 하루 종일을 결정짓는 생각을 해봤다.

9세기 ~ 18세기

식민 지배 이전의 아프리카에는 10,000개 이상의 국가와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4] 이들은 제각각의 정치 조직과 지배 체제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는 아프리카 남부의 산족처럼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는 작은 가족 집단도 있고, 아프리카 남부와 중부의 반투어권 씨족 집단처럼 좀 더 크고 조직을 갖춘 집단도 있으며, 더 나아가 아프리카의 뿔의 씨족 집단, 사헬 지역의 왕국들, 서아프리카의 요루바와 이그보(Igbo) 혹은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해안의 무역 도시와 같은 자치 도시국가나 왕국처럼 더욱 체계를 갖춘 나라도 있었다.

기원후 9세기경 초기 하우사 등 일련의 왕조 국가들이 사하라 이남 사바나에서 서부 지역부터 중부 수단을 지배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는 가나, 가오, 카넴-보르누 제국이었다. 가나는 11세기에 쇠퇴하였으나, 말리 제국이 뒤를 이어 13세기에 서부 수단 대부분을 통합하였다. 카넴은 11세기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서아프리카 해안의 삼림 지역에는 북쪽 무슬림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 왕국들이 성장하였다. 이그보의 은리 왕국(Nri)은 9세기에 세워진 초기 왕국이었다. 또 오늘날 나이지리아 땅에서 매우 오래된 왕국으로, 에제 은리(Eze Nri)가 다스렸다. 은리 왕국은 이그보 우크부(Igbo Ukwu)에서 발견된 정교한 청동 유물으로 유명하다. 이 청동 유물은 9세기경으로 보인다.[35]

요루바의 도시국가와 왕국 가운데 역사상 최초의 나라 이페(Ife)는 이페의 우니(Ooni)라는 성직자 오바(oba, 요루바어로 “왕” 혹은 “지배자”를 뜻한다)가 다스렸다. 이페는 아프리카에서 종교와 문화면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으며, 청동 조각의 독특한 자연주의 전통으로 유명하였다. 이페의 정부 형태는 오요 제국(Oyo)에서 수용하여, 이곳의 오바(임금)은 오요의 알라핀(alaafin)이라고 하였으며, 한때 수많은 다른 요루바 혹은 비(非)요루바 도시국가와 왕국을 다스렸다. 다호메이의 폰 왕국(Fon)은 오요의 지배를 받는 비 요루바 나라 중 한 곳이었다.

알무라비툰은 사하라 사막의 베르베르 왕조로, 11세기에 광활한 북서 아프리카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36]바누 힐랄과 바누 마킬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아랍 베두인 부족의 연합체로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집트를 거쳐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이주하면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융합하여, 지역 주민이 아랍화되고, 아랍 문화는 이슬람을 기초로 지역 문화의 여러 요소를 흡수하였다.[37]

아래 내용은 위키디피아

http://ko.m.wikipedia.org/wiki/아프리카#section_3

연정언니

숭고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하다.
다 큰 성인의 벌거벗은 몸을 앞으로 뒤로 옆으로.
겨드랑이와 항문주변까지 구석구석 밀어내어 피부의 죽어버린 껍질을 벗겨내는 일.
단지 완력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고 요령과 기술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힘의 조절이다.
힘을 빼야 할 때 빼고, 강하게 밀어야 할 때 밀어야 하는 것일진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완급 조절을 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크게 실수하고 잘 넘어지거나
친구간에 크게 싸움이 나고 우격다짐을 하는 일이 그런 이유다.

비록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도,
돈을 받는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되어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다거나,
누군가에게 살뜰한 아낌없는 대접을 받는 일은,
천국에 와 있는 듯한 몽롱함까지 가져다 준다.

인체를 이해하고, 때로는 사랑하기도 하리라.
청결함에 대해서, 건강함에 대해서,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노동의 숭고함에 대해서, 팔다리를 움직이는 일에 대해서,
물과 기름과 땀의 구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겪고 느끼고 지켜보았을까.

체구가 작은 그녀는 나에게 더 큰 돈을 받고 뜨거운 타올을 얹어 온 근육을 풀어내고
밟고 문지르고 두들기고 눌러주기를 한 시간여.
고개를 숙일 때마다 찢어질 거 같던 등짝의 고통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쥐약을 먹고 일한다는 그녀의 깔깔대는 웃음은
박카스 한 병에 다시 일어나는 일상이며,
맨소래담과 잘게 썰은 오이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기술자다.

5천원의 팁을 얹어 드리며 꾸벅 인사를 한 나는 맨몸뚱이였는데
갸날픈 체구의 검은 속옷을 입고 흰 타올을 허리에 두른 그녀가 말하기를
일주일은 주간, 일주일은 야간이니 전화번호를 가져가라 한다.
그녀의 호칭은 연정언니.
사우나파크의 세신관리사.

2013. 2. 2.

난곡, 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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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이유 – 아름다운 집
서울 신림동
Nikon D5000 Nikor 18-70mm / Digital Printing /
76.2cmX101.6cm (30X40) 액자 미포함 사이즈
2009. 11. 촬영
1st Edition – Digital Printing /76.2cmX101.6cm (30X40)/ 경기도 안양시 안양6동 이야기너머 작은 도서관 소장중

2006년 12월
돐이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우리는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주인이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었고, 아이가 어려서 아파트 생활에 도전해보기로 했으나 근처의 아파트 단지들은 매우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값이 만만치 않았다. 세입자로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척의 정보로 옮기게 된 곳이 관악구 신림동, 난곡이었다.
나는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했고, 서울의 남쪽 끝, 안양에서 넘어가는 산비탈에 새롭게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는 것만 몇 년 째 구경하던 차였다.
난곡이라는 지명이 무엇을 뜻하는 지, 내면에 숨어 있던 기억이 조금씩 불거져 나올 때쯤, 택시를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사가 해 준 문구가 귀에 딱 박혔다. “난곡이 천지개벽을 했구나. 서울이 버린 동네. 대한민국이 버린 동네.” 인터넷으로 난곡에 대해서 검색을 해봤다.

난곡에 살던 사람들을 밀어내고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아파트단지는 2300여세대.
주공 1단지와, 2단지, 그리고 그 밑에 영구임대주택은 3단지로 분류되었으나, 길이 나뉘어져 있었고, 입구도 완전히 달랐다. 분양가는 평당 1200만원에서 평당 1400만원. 월세는 24평 기준 5000만원 보증금에 월 70만원 정도. 안양의 삼막사에서 경인교대앞을 지나 호암터널을 지나는 산길에서 내려오거나, 난곡사거리에서 올라오는 그 길의 아파트 단지는 신림역보다 해발 300미터 정도가 높다는 소문이 있었고, 피부로 느낄 만큼 확연하게 날씨가 달랐으며, 산안개가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의 꼭대기를 감싸고 돌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성채, 사람이 살아서는 안되는 불길한 예감이 흐르고 있다고 미친 척 지껄여도 신빙성 있게 들릴 만큼, 때로는 신비롭고, 때로는 기괴한 분위기를 뿜어낼 줄 알았다.
봄이 되면 산에서 아까시 냄새가 흘러내려왔고, 밤꽃 냄새가 지천에 진동했다. 조금만 걸어올라가면 관악산과 삼성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펼쳐졌고, 차 지나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절간 같은 곳도 있었다.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갑자기 트럭에 실려 자 이제 여기서 한 번 살아보라고 강제로 이주 당해 몇 십년을 일궈먹고 살면서 골목과 골목을 통해 같은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오줌을 싸고 옆집에 수저가 몇 개 인지, 누구네 서방이 마누라를 얼마나 두들겨 패는지 적나라가 알 수밖에 없던, 모든 집을 지나가야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구비구비 돌아가던 난곡에 살던 사람들은 그 아파트에 단 한 사람도 남을 수 없었을 게 뻔했다. 원주민이라고 말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 승용차를 끌고 다니고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냈으며, 대부분 대학을 나왔고, 좋은 직장에 다녔다. 딱지를 사서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비밀도 아니었으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 나는 알 지도 못했다. 나는 세입자였으므로.

그 성채로 들어설 때마다 부채의식에 시달렸다.
그런 나에게 무슨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냐고 낯선 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가난하고 못 배웠다면, 공기라도 좋은 데 살면 안되나. 단 하나 남은 천혜의 것. 달이 가까운 동네라는 게, 우리나라야 척박한 도로 환경으로 인해 산동네 달동네가 빈민가가 되었지만, 아침마다 들려오는 새소리와 쏟아져 내려오는 꽃냄새를, 누군가가 눈물 흘리며 쫒겨났을 거라는 그 땅에서 가만히 앉아 맡는다는 것도 힘겨웠다.

내 양심에 발린 소리였던가.
간혹 나는 삼성산 아래 고시촌을 떠돌다 6동 시장이라 부르는 재래시장에서 아이를 들쳐업고 장을 보고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저기 어딘가 사람이 살고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삼성산 성당의 뒷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그리고 이 집을 만났다.
아파트가 밀어내지 않은 골목. 이 집은 몇 평이나 될까.
이 집이 열평이라면, 평당 1200만원 시세를 적용하면 1억 2천짜리 집이 될테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너무나 빤한 일.

고마웠다.
내 어린 날, 화장실을 가기 위해 어두운 산길, 휴지를 쥐고 마구 내달려야 했던 기억처럼, 아무 것도 없고, 설령 부모는 끼니걱정을 하더라도, 엄마 아빠가 집에 있어서 좋아. 라고 뇌까렸던 철없으나 암울했던 그 시절처럼, 완전히 색이 바랜 가림막에도, 여기,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고.
내 알량한 양심에, 조금 기름칠을 해 준 셈이라 고맙다고.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70만원을 내면서 일곱식구일지, 여덟식구일지 모를 사람들을 내 쫒은 자리에서 내가 두 발 뻗고 살고 있지 않다고 변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게끔. 나, 당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게끔. 말해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기념한, 겨울의 풍경이다.

2013. 2. 1.

_최근들어, 이 사진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일이 생겨서 적어본다.

무섭다는 말

예민한 아이는 새벽녘 제 부모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으면 곧잘 잠에서 깬다.
새벽 2시 50분.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가 에미를 부른다.
엄마 저기 뭐가 있어.
엄마 저기 뭐가 이상해.
빛에 비친 그림자였거나, 안방에 숨어 들어온 늙어가는 개였을게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를 다독여 다시 재우고 나도 모르게 아이가 가르킨 방향을 외면한다.

무섭다는 말.
언제 해봤을까.
기억이 없다.

아이 무서워.
아이 두려워.

이 아이는 나를 대신해, 무섭고, 두렵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는데,
내 기억속의 나는 당췌, 무섭다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어 본 적이 없다.

아이가 묻는다.
엄마는 세상에서 뭐가 제일 무서워?
글쎄…
한 참을 생각해도 싫은 건 있어도 무서운 게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견고하게 만들어 온 밖에 내세우기 위한 자아는 이제 세월의 더께를 입어 더욱 더 곤고해진다.
딱딱하게, 움직이지도 않고, 석고상에 이끼가 끼듯.
무섭다는 말, 해 본 적도 없이, 이제는 무섭다고 말하기도 쑥스러운 나이를 먹었다.

그 모든 것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스스로 무장하여 갑옷을 입혀 대문앞에 세워놓은 저 것이.
이제는 나인 척 하고 수십년을 살아서, 자기가 나 인 줄, 내가 자기인 줄, 나도, 그것도 착각하고 있다.

경리장부 20년 주물러, 자기가 대표이사 인 줄 아는 경리직원처럼.
그렇게 되어버렸다. 주객의 전도.

무섭다는 말.
누구에게 할까.

어느 봄밤, 아이를 재우고 나와 벚꽃 사진을 찍는 나를 마주쳐, 술에 취한 채 흐느적대면서, 옆에 한 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그 날의 당신을
이 밤, 생각한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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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1.

2004년 12월 1일 -자전거 고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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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일

이 날.
이 날 아마 날씨가 약간 춥긴 했고,
며칠 째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을거다.
과외를 가는 길이었고,
길을 잘 못 들었는데 자전거마저 고장이 났었지.
그래서 길에서 만난 자전거 수리공에게 자전거를 고쳤는데, 아마 그 수리공이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을거야.

근데 그 터무니없는 값이라는 게 12위안이거나 20위안이었을게야. 그 때 아마 스타벅스 커피가 30위안이 좀 안됬나 그럴껄.

이 날도 분명히 시엔시아루 스타벅스에서 6시간 정도를 뭉개면서 외국인 유학생이라는 특권 아래서 무료 시음료도 몇 잔 받아먹고 그랬을지도 몰라.
이 날이 아니었다 해도, 그 전 날 그랬거나, 그 다음날 그랬거나. 아무튼 스타벅스를 도서관 삼아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전거 수리공과 흥정을 하는 거지. 한 잔의 커피값도 안되는, 그 저녁의 노동에 대해서.
손톱밑의 때는 평생을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호적은 분명히 없을 게 뻔한, 자기 이름이나 겨우 쓰면 다행인. 그 남자와 길바닥에서 말야.

그리고 슈주허를 넘으며 생각했겠지.
나는 대체 뭔가.
나의 돈은 무엇이고, 저이의 돈은 무엇인가.

가난이 내 영혼을 잠식하면,
나는 사기꾼이 될까 거지가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전거를 밀었을거야….

도시, 한 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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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재우다 잠들었고
새벽 2시 반이 넘어 깼다.
내가 자고 일어나면 무조건 밖에 나가는 줄 아는 개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길의 짧은 산책

아무도 없는 새벽,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나간 게 이런 풍경.
모두가 벽으로 둘러쳐진 아파트, 똑같은 풍경이라니

참으로 재미없고 정떨어진다.

아파트 생활 6년.
다시 또 생각한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2013.1.30.

어느 추운 밤 이야기

1.

딴따라나 재주꾼이나
그가 사는 곳, 그가 머무는 자리가 바로 작업실이고 무대다.
어디에 가면 화양연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바닥을 치는 자존감의 발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산이 좋지 않으면 저 산도 좋지 않다.

2.
할머니는 언제나 오만가지 재주 있는 년이 밥굶는다 했다. 오만가지 재주 중에 하나씩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3.
한 밤의 도로엔 바스러진 유리조각과 신속히 달리는 렉카차가 있다. 멍하니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과 이 나라의 척박함에 진절머리 내는 청춘이 있다. 그래도 내일은 낫지 않을까 하고 믿어보고 싶지만 대부분의 내일은 어제와 비슷했다. 그저 그 중에 맘에 들었던 어제를 꼼꼼히 복기하고 재현하는 일로 내일과 모레를 채워보는 것이다.

4.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저 듣는 자들이 있다. 세상에 수없이 넘쳐나는 문자들이 나무를 베어낸 종이로 책이 되어 팔린다.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가. 초대형 서점에 서서 수없이 많은 무명씨들의 감정의 배설물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나 역시 어딘가에 끊임없이 싸지르고 있다.

5.
도시는 끊임없는 배설의 공간.
사람들은 악귀같이 꾸역꾸역 욕망을 먹고 짐승보다 격하게 싸지르며 밤을 탕진한다. 멍하니 있는 시간은 비생산적이고 스스로를 컨베이어벨트에 올린 채 끼륵끼륵 기어간다. 욕하고 째려보고 분노를 배설하여 허기지면 위산과다를 못 참고 또 꾸역꾸역 음식을 마신다. 모두 나와 같이.

6.
태생이 그런 것을 어쩔 수 없다는 섭리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신들은 광폭한 절대 권력을 가졌다. 호메로스가 음모론의 기초라는 얘기를 들었다. 오이디푸스의 재앙은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었다는 말이 있다.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절대 선이 아닌 이유가 그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잘나고 용맹했다. 그게 그를 망쳤다. 공자의 知天命과 오이디푸스의 저주는 닮아있다. 그리스의 난잡한 신들은 지금의 재벌과 권력자의 모티브다. 인간이 사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 가장 현명한가. 그 답에 적어도 한 발은 가까워진 거 같기도 하다.

7.
움베르트 에코는 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은행원이 되어서라도 파리에 살고 싶다” 고 말했다 한다.
그 말을 열 번쯤 곱씹어 본다.
은행원이 그닥 나쁜 직업 같지도 않다. 수많은 군상을 관찰하고 퇴근은 제 시간에 할 테니까.

8.
더럽게 피곤한 밤이 깊어간다.
적어도 내게 삶은 언제나 치열해야만 했고 그래서 그게 정당했다.
그렇지 않게 살던 시절이 가장 괴로운 나날이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늘 조금은 부족하고 외로워야 행복했다.
문 닫기 직전의 마지막 손님으로 앉은 라면집에서 추위에 김이 서려 허얘진 안경을 내려 놓고 있자 그니가 말했다.
“너 중국에 있을 때, 안경 바꿔야 되는데 돈이 없다고 했었잖아. 진짜 불쌍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돗수가 안 맞아 눈이 피곤해도 아마 나는 행복했던 기억만 남긴 게 분명하다. 그 때는 가난했고 조금 외로웠다.
오이디푸스의 저주와 공자의 知天命 과 그리스 신들의 교만한 장난질이 안경에 서린 김 같았다.

– 어느 졸라리 추운 날 밤.

인간의 조건 2

청소하기
빨래하기
신발빨기
설거지하기
물건분류하기
망치질하기
전동드릴로 벽에 못 박기
못 뽑고 구멍메우기
형광등갈기
변기고치기
가죽구두 닦기
다림질하기
가죽소파 왁스질하기
화분키우기
동물돌보기
펜치로 철사구부려 모양만들기
기본 공구 다루기
티비 관련기기 연결하기
컴퓨터 포맷하기
고장난 빨래건조대 고치기
아이폰 동기화하기
블루투스 사용하기
물건 분류해 정리하기
나만의 책장 생각의 흐름별로 정리하기

– 이게 오늘 결심한 내 아들이 스무살 되기 전에 가르칠 것들이다.

대학을 가는 게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순대국을 먹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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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국은 언제나 혼자 먹는 음식이다.
한 고비를 넘어가야 할 때, 그 순간을 넘겨야 할 때, 나는 돼지의 잡고기로 만든 냄새나는 순대국을 먹으러 간다.

그 때는 언제나 남들은 모두 배부른 시간
늘어져 있던 앞치마들이 나 때매 다시 일어나는 시간. 오후 3시라든가, 밤 9시라든가. 아침 10시 반이라든가.

어쩔 수 없는 누린내가 나는 국에 들깨를 넣고 다대기를 풀고 맵고 짜게 한 그릇을 들이켜면 언덕을 내려갈 힘이 난다고 스스로를 속이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빈그릇을 바라보며 다시 최영미의 혼자라는 건 을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나에게 같이 순대국을 먹자고 할 때, 뛸 듯이 기뻐하지 못하고 아 이 것은 내 외로움의 음식인데.. 라고 주저하는 것이다.

겨울밤, 미친 몸뚱이에 질퍽한 순대국을 먹고 돌아오다.

폭력의 반복

내재된 폭력의 기억이
다시 폭력을 부른다.
인간에게 복수심이란
존재를 유지하려는 관성,
혹은 형평성을 뜻하는 것인가 생각한다.

굳이 누군가에게 복수하겠다는 구체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 고상한 마음의 수련이나, 또 다른 행동의 승화로 변질되었을 때도, 잠재의식속에 숨어서 치유받기 매우 어려운 그 수많은 폭력의 기억들이, 타자를 향해, 혹은 자아를 통해 다시 발현된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폭력인 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던 세월동안, 폭력은 이미 영혼 깊이 각인되어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로 자리를 잡아 버린다.

각성이 일어나고 그 마음과 몸의 표현들이 모두 대단한 폭력성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엔, 이미 살아가는 방법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른 여지를 다 차단해 버린 후다. 그리하여 가치관의 붕괴와 세계의 몰락이 동시에 발생하고 쉽게 이름 지을 수 있는 “우울증” 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몇 가지의 약물로 감정이 전달되는 시냅스들의 연결을 차단하고 깊이 사고하지 못하도록 나른한 육체를 만들어주어, 그 당시의 제 2의 반사적 폭력사태를 면하게 도와준다.

그러나 내재된 폭력의 문법을 고치는 방법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세상엔 이미 혼자다.

세상의 모든 이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삶은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하나의 인간개체에겐 오직 하나의 우주가 존재하며 그 우주엔 오롯이 그 우주의 주인 단 하나다.

고립된 채 다른 세상의 문법을 배우는 일은 어렵다. 언어는 늘 타자를 모방하면서만 배울 수 있다. 모방이 불가할만큼 폭력에 길들여진 채 세월이 지나버리면, 반복되는 것은 좌절과 좌절의 연속이다.
게다가 이미 인간과 사회에 대한 맹목적 신뢰 없이 불신마저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그 이후는 걷잡을 수 없는 카오스.
그 누구도 사전에 막을 수 없고 오로지 결과, 상처와 폭력, 혹은 시체만이 남곤 한다.

2013. 0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