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요청

 
1.
오늘 오전의 모 코디네이터에게 전화가 왔다.
공동체 사업 담당자인데, 사업으로 만났지만 인간적으로 신뢰하는 관계다. 올해 이런 저런 것들을 해보겠다고 몇 가지 제안을 넘겼고 이 분이 사업이 성사되기 위해 공기관과 조율중이다.
마을에서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내용이 주다.
 
–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프로필을 다시 달라네요.
– 네 들어가자마자 보내드릴께요.
– 선생님, 근데 자격증 같은 거 없으세요?
– 아하하하하. 이런 저런 글쓰고 떠돌면서 강좌 여는 사람이 무슨 자격증이 있겠어요?
– 그러게요. 자격증이 있냐고 물어서요.
– 누가 글쓰는 자격증을 주나요 ㅋㅋ 강의도 그렇고요.
– 그러게요.
 
코디네이터는 내내 난감해했지만 기관에서 요청하는 강사비 조건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걸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는 일단 프로필을 다시 보낼테니 기관에서 판단하게 하고 너무 애쓰지 마시라 전했다.
 
이 코디네이터와 나는 현직 언론종사자가 특강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공기관에서는 2시간에 30만원을 주려면 박사학위에 경력 10년이 필요하다는 조건을 걸었고 그보다 조건을 낮추면 석사학위에 경력 5년이 필요하다고 해서 난처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조건을 가진 현직 종사자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얘기했고 안그래도 바쁜 사람들인데 돈보다도 뚜렷한 명분과 가치, 그래도 자존심 상하지 않을 정도의 강사비는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다. 그도 충분히 동의하고 있었지만 결정권이 없는 사람은 한숨만 쉬는 것이다.
“그래도 그런 분이 한 번 오셔서 마을 아이들 만나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자신있게 확답하지 못했다.
 
나는 코디네이터에게 “너무 애쓰지 말자. 안되는 걸 되게 하려고 애쓸 영역이 있고 아닌 게 있더라. 공기관 결정권자가 책임지고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 그러니 너무 애써서 지치지 않도록 하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직종사자가 꼭 필요하겠느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너무 마음 끓이지 마시라.”고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2.
오후에는 지역 모 중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제가 병가를 내야 하는데요, 수업을 맡아주실 선생님이 안 계셔서요. 아휴. 애들 말도 들으니 진행도 안 될거고요. 애들 자습하고 시간 버리게 될까봐요. 제가 예산을 챙겨둔 게 있는데 그날 시간 되시면 특강 좀 해주세요.”
 
자유학기제 시작인데 첫 시간을 불가피하게 비우게 되었단다. 아이들에게 과제를 주고 넘어가도 될 일인데 ‘아이들 시간 버리게 될까봐.’ 라는 말에 마음이 걸렸다.
주제가 뭐고 교사가 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물은다음 이런 내용으로 수업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흔쾌히 좋다고 한다.
 
수년 간 봐온 사람이다. 아이들이 아무리 의욕 없이 모여도 하나라도 해보자고 권했던 사람이고 혼자 여기 저기 쫓아다니며 새로운 걸 체험하게 해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학교라는 조직 안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조직의 생리상, 칭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괜히 쓸데없이 일 벌인다고 상처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동아리를 몇 년째 이끌어왔고 어떻게든 아이들이 자기 권리를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판을 펼쳐주는 이런 사람은, 예산이 10만원밖에 없다고 해도, 그냥 갈 수 밖에 없다. 멀지도 않다.
 
3.
더러 이렇게 혼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좀 더 합리적인 구조로 일을 하고,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고 고군분투한다.
이들이 하는 말은 비슷하다.
 
“있는 집 애들은 부모들이 알아서 다 챙기잖아요. 우리가 그런 거 기획 안해도 부모님 친구들만 만나도 더 많이 배우잖아요. 시야가 달라지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더 많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해줄 수 있으면 해줘야죠.”
 
이 사람들이 정말 안 해도 될 일을 만들어서 여러 사람을 귀찮게만 하는 존재인가. 비싼 강사를 불러와서 행정실을 번거롭게 하고 조직의 기강을 흔드는 사람인가?
시스템이 딱 덮고 있는 뚜껑이 너무 무겁다고 달그락 거리는 게 그렇게 꼴사나운가. 이 두 사람이 오늘은 어떤 저녁을 보냈을지 모르겠다.
 
사람의 가치를 학벌과 경력으로 재단하고 증명할 수 없는 가치는 접촉도 하지 않는 게 편하게 사는 세상일수도 있다.
제도가 불편한 사람들이 이타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공공기관 시스템의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해봐야지

사람들을 살면서 때때로 이유없는 불행을 맞닥뜨린다.
자기 실수가 아니고, 원인을 만든 것도 아닌데 갑자기 어떤 사고가 터져 진퇴양난에 봉착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겪는다. 
그 불행을 마주하는 방법에 따라 나머지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나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사건과 사고가 연달아 터질 경우 우울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길을 걷다가 음주자가 운전하는 차에 치이거나, 아무 이해관계 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당하는 경우부터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으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떠안는 경우가 있다. 불행이 터지면, 사고의 인과관계를 찾으려 애를 쓴다. 어떤 연구는 사람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는데 그 분류는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나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사건과 사고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이 있고 내부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이건 개인의 기질과 연결되는데 그 어떤 원인도 외부나 내부 일방에서 오지 않으며 인간의 두뇌로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자연계가 작용해서 닥치는 사건이었고, 내가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암호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 시간동안 사건의 당사자는 피해자, 희생자가 되어 긴 우울의 터널에서 헤매인다.

온 공기를 뒤덮은 뿌연 먼지가 내 삶을 관통한다.
며칠 뿐이겠지만 사람들은 심각하게 이민을 상상해본다. 이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는 상상을 쉽게 하는 것은 여기에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다. 미래를 포기하게 되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을 때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다.
나로부터 초래하지 않은 사건 사고를 자주 당하게 되면 사람의 뇌는 능동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피해갈 방법에 골몰하거나 그저 닥치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거나, 혹은 생을 마감해버린다. 탐구할 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게 나와 전혀 무관한 곳에서 시작된 일인가 생각하기도 한다.

오늘의 미세먼지는 요 며칠 사이의 결과이지만 최근의 원인은 아니다.
중국이 원인이다, 한국도 책임이 있다는 공방은 쓸모가 없어 보인다. 미세먼지의 원인은 인류 모두에게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자처했다. 환경보호를 우선으로 내건 어떤 나라들은 자국에 공장을 짓지 못하게끔 정책을 조정했다. 그들의 생활을 책임질 필수품들은 모두 중국에서 생산되었고 우리는 중국의 저임금, 고노동, 인권침해로 만들어진 싼 물건을 쉽게 소비하고 버리며 비하하고 칭찬하기를 반복했다. 중국으로 공장이 몰려가고 사람들의 소비는 늘어났다. 쓰레기가 넘쳐나고 경제는 성장동력을 잃었다. 더 이상 개발할 게 없어진 사람들은 비틀고 뒤집고 꺾고 휘어진 물건들을 만들며 연기를 뿜어냈다. 더 많이, 더 빨리 소비해야 경제가 돌아가고 정권이 유지되었으니, 규제를 완화하고 디젤차를 승인하고 공장을 돌리고 전기를 생산하고 밭을 갈아엎고 나무를 자르고 산을 베어 전기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소비해야 유지되는 세상을 위해 중국이나 한국이나,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세계의 공장을 자처했다.

2014년, 10년만에 찾은 중국 상하이에 자전거는 드물었다. 수천만대의 자전거는 전기자전거나 오토바이로 대체되었고 학교에 가득하던 자전거 대신 폭스바겐 자동차가 가득했다.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쓰기 위해 더 많이 놀러다니기 위해 우리도 디젤차를 쓰기 시작했고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들은 그저 불안해서 전기를 더 만들어 쓰지 못하면 버렸다.

10년 전 오늘 내가 어떻게 살고 있었느냐가 오늘의 나를 결정하듯이, 10년 전 사람들이 벌인 일의 결과는 오늘의 자연이 말해준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지.”라는 말을 하는 건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 소시민들의 태도다. 미세먼지가 최악이라는 월요일, 정부의 강력한 제재조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서울시내 차량 통행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시민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공생하고자 하는 욕구를 텅 빈 서초대로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발전기를 멈추고 공장을 쉬게 하고, 운전을 하지 않고 물이라도 뿌려야 하지 않나.
공기청정기는 전기로 돌아간다. 작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더 큰 공동체의 위험을 계속 부추기는 것이 무슨 해법이 되겠는가.

2004년 상하이의 여름이 20일 넘게 39도에 육박할 때, 공장을 닫고 모든 야간조명을 껐다. 2003년 사스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대학에서는 마스크를 나눠줬다. 지금도 국제회의가 열리는 날 베이징의 모든 공장이 문을 닫으면, 하늘이 파랗게 돌아온다.
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뿐이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는가.
우겨도 보고 화도 내보고 달래도 봐야 하지 않나.
우리도 이렇게 해볼테니 너희도 이 정도는 해달라가 협상의 기본 아니었던가.
너희가 먼저 하지 않으면 우리도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건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조건을 걸지 말고 일이 되게 하려는 태도는 내 패를 먼저 보여주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게 빠르다.
공기청정기를 방마다 놓고, 차량에도 공기청정기를 달면 경치하나 포기해도 괜찮을 것이다. 재난은 가장 낮은 곳부터 덮친다. 현장노동자, 야외근무자, 공기청정기가 없는 가정, 호흡기가 약한 사람,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 더 많이 노출되고 더 많이 습격당하는 건 가장 가난한 곳부터다.

기득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재난문자를 보내야 할 상황이라면 재난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이 전염병이었다해도 이렇게 대처할 것인가?
왜 아무 것도 하지 않는가.
이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하지 않겠나.
보이지 않는 것의 공포는 가늠할 수도 없는 것이다.

 

2019. 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