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꽃 필 때

  • 어떤  관계의 균열에 관하여

산책을 하다 문득 배롱나무를 본다.

그때 이후로 나는 여름마다 배롱나무 꽃피기를 기다린다. 배롱나무는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만지면 간지럼을 타듯 흔들린다고 한다. 나무의 껍질이 벗겨지면 새 껍질이 드러나는데 그 껍질이 매우 부드러워 사람의 속살 같다고 한다. 배롱나무를 설명한 문건을 찾다보면 “여인의 속살”이라는 말이 나온다. 배롱나무 꽃은 7월부터 8월까지 이어서 핀다. 백일을 핀다고도 해서 목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분홍색 꽃은 마치 구겨진 종이로 만든 것 같다.

배롱나무 꽃이 필 때, 나는 그와 헤어졌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배롱나무 꽃이 피던 계절이었다. 9년 동안 나는 그의 아내였으며, 그와 사는 동안 양가 가족들의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겪었고 우리는 업무분담을 한 동료로 지냈다. 배롱나무의 이름을 알게 된 그해 여름, 그가 새 연인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내 의심을 거두지 않던 나는 그의 휴대폰에서 연인의 사진과 연인과 동행했던 여행의 이동경로를 알게 되었다. 배롱나무 꽃 아래서 나는 울었다. 아이를 업고 있었다면 더 그럴싸한 신파가 되었겠으나, 아이는 어느새 더 이상 업혀있을 수 없을 만큼 자라버렸다.

 

그와의 결혼이 격렬했던 것처럼, 이혼 역시 그랬다. 뜨거운 여름에 만나, 9년을 함께 살고 뜨거운 여름에 헤어지기로 한 뒤 우리의 서류는 차가운 겨울이 다 되어서 정리가 되었다. 다시 배롱나무 꽃이 피고 졌다. 올해도 배롱나무 꽃이 피었다.

그날의 비참했던 기분은 두 번째 배롱나무 꽃을 맞으며 사그라졌다. 마치 배롱나무가 껍질을 벗듯이, 배신이나 이별, 따위의 낱말이 벗겨져버렸다.

배신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일방적이다. 나는 관계의 균열에 대해 생각했다. 지붕이 깨진 집에 비가 오면 물이 새는 것처럼 균열이 시작된 관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드는 타자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관계는 양가의 일을 해소하고 육아의 분담을 나누는 업무로 이어졌으며 어느 순간 그 모든 업무가 갑작스럽게 종료되었을 때, 관계는 갈 길을 없고 소멸되었다.

그가 나를 버렸다, 라는 문장은 쓰지 않기로 했다. 그가 나를 소유한 적 없기 때문이다. 관계의 균열은 서로 존중하지 않을 때 시작되었다. 존중을 버리고 편리를 취했을 때, 관계는 마치 공장의 부품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신속하게 재빨랐다. 그 사이 우리는 서로를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이 가진 기능에 집중했다.

 

그해 배롱나무 꽃이 필 때, 그가 새 연인과 아들바위 위에서 오징어회를 먹은 것은 관계의 균열에 빨려 들어간 어떤 타자가 우연찮게 발생한 사건일 뿐이다. 그때 우리는 과연 누가 누구를 배신하였는가. 나는 그를 사랑하던 나를 오래전에 배신했고, 그는 나를 사랑하던 그 자신을 배신했다.

그 사랑이 왔던 시절을 기억했다. 사랑은 언제 오는가. 자기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타인을 돌아보게 되지 않았던가. 내 자신이 가장 사랑스러울 때 오는 사람이 가장 사랑스럽다. 이것은 매우 우연한 사건이다. 사건은 시간과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 때로는 맑은 냇물처럼, 때로는 거대한 파도처럼, 아주 우연히 발생한다. 불행은 예의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랑도 무참히 왔다 비루하게 떠난다.

 

어떤 사랑은 깨져버린 지붕 사이로 쏟아지는 빗물에 대해 영원히 함구하고자 한다. 개입된 타자의 존재를 완벽하게 지우고자 한다. 어떤 사랑은 깨져버린 지붕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한다. 빗물이 들이닥친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그는 빗물을 지우고 지붕만 말했으며, 나는 지붕을 지우고 빗물만 말했다. 더 이상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균열이 점점 벌어져 결국 집이 무너져버린 셈이다.

 

어떤 관계의 균열 사이에 휘말려 들어간 타자는 어찌 되는가. 폐허위에 쏟아진 타자의 욕망은 어디로 갈까. 타자는 당사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알 수 없다. 배롱나무 꽃이 지고 난 다음, 차가운 바람이 불면 알게 될까.

그 역시 알 수 없다.

2016. 7. 27.

조금은 성글게

아지 산책을 하러 나갔다. 공원엔 웬 덩치 큰 남자가 서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위협적인 느낌마저 들었지만 이 느낌이 전해지면 저 사람은 억울하겠지.

아지와 공원 한 바퀴를 돌고 공원과 단지사이의 문에 서 있는데 곱게 정장을 차려입은 할머니가 아지를 보고 묻는다.

이 개는 몇 살이죠?

음.. 얘가 열 세 살이예요. 나는 2004년생인 아지에게 한 살을 더 해 대답했다. 누군가 몇 살이냐 물으면 항상 그게 헛갈린다. 개니까 만나이로 따져야 하나.

이 개가 참 순한 개예요. 그렇죠? 할머니가 물으셨다.

아.. 얘는 잡종인데요, 그 다리 짧은 웰시코기하고 섞인 거 같긴 해요.
그렇구나.

할머니는 세로 선이 들어간 위 아래 한 벌짜리 바지 정장을 입고 녹색 로퍼를 신었다. 버버리 파우치백을 손에 쥐고 있었다. 가벼운 퍼머를 한 단발머리는 은발이었다. 동그란 금속테의 안경을 썼는데 눈썹은 가느다란 산모양이고 이목구비가 진하진 않았지만 선명하고 전체적으로 선이 고왔다.

나도 개를 많이 키우는데 다섯 마리까지 키워봤거든요.

내가 지금 칠십 넷인데, (할머니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 나이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칠십 넷, 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점점 달라져간다.) 내가 쉰 다섯부터 개를 키웠어요. 우리 아들 친구가 어디 놀러간다고 일주일만 맡아달라는 거를 데리고 있었다가 정이 들어가지고.. 그때부터 키웠지. 중국에서도 한 마리 데려오고.

아, 얘가 중국에서 온 애예요.

아 그래요?

예. 제가 거기서 공부했는데, 저 살던 아파트단지 앞에 돌아다녀서..

한국사람인데 중국에서 공부한거예요?

네.

할머니는 내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명확히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서 검역 다 마치고 데려왔죠. 오래 됐어요.

어디에 살았어요?

저는 상하이요.

아, 우리 아들은 연태에 있었는데, 그때 페키니즈를 장에서 바구니에 넣고 꼬물꼬물한 걸 판는거야. 털도 복슬복슬해가지고 눈은 이렇게 크고 코는 구멍만 보이고 입은 이렇게 째졌어. 할머니는 손을 얼굴에 대어가며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는 듯 얘기했다.

우리 아들은 연태대학에 2년 있다가 학교에서 칭화대를 보내준다고 했다는데, 제가 싫다고 해서 안 갔어요.

아 네…. 중국이 별로 맘에 안 드셨나봐요.

그런가봐.

할머니는 집 앞 내가 다니는 정형외과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시는 중이었다. 고관절 문제가 있는데 나우병원에서 수술을 하려다가 다른 사람이 집 앞 병원을 추천해줘서 다니게 되었다고 하여 내가 이 병원은 과잉진료를 하지 않아 좋다 말했더니 맞다고 호응하셨다.

수술과정의 얘기며, 의사가 얼마나 살뜰히 보살폈는지, 병원에 환자가 많아 늘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그래도 다녀야 한다고도 했고, 신장이식을 해서 수술이 조심스럽다고도 했고, 물리치료를 일주일에 세 번쯤 받으면 좋은데 많이 불편하면 다섯 번도 간다고 하셨다.

아이고, 바쁜 사람 붙잡고 내가 얘기하느라고. 들어가요.

5분이 안되는 시간동안, 나는 할머니가 어디가 아픈지, 뭘 좋아하는지, 나이가 몇이고, 자녀가 어떻게 되며, 집에 개가 몇 마리인지, 종교가 무엇이며, 교회에서 어떤 사람과 교류하는지,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다 알아버렸다. 삶은 어쩌면 매우 성글게 엮여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할머니가 있다.
강남 센트럴시티 맥도날드에서 혼자 점심을 먹던 긴 은발의 나이든 여자, 너무 멋져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분은 꼭 영화배우 문희처럼 생겨서 도저히 카피불가한 사람이었다면,
오늘 이 할머니는 내 생활에 근접해보였다.
나이를 먹을 수록 깨끗하게 입고, 고운 얼굴을 하고 다닐 수 있다면 좋겠구나.